[자작시 해설] 브릭스달의 빙하 / 강인한
브릭스달의 빙하
강인한
설레는 오로라 때문일까요, 잠이 오지 않아요. 빙하를 보았지요. 푸른빛이 눈을 찔러요. 브릭스달의 빙하, 저 높은 이마를 가진 빙하도 이제 많이 늙었어요. 눈꺼풀이 무겁지만 잠이 올 것 같지 않아요. 내 나이 열일곱에 만난 당신 그때 만난 당신은 늠름한 청년이었지요. 이제 나도 마흔을 넘겼어요, 빙하의 푸른빛이 온통 내 눈으로 흘러드나 봐요. 어젯밤 우리들의 딸이 저희 반 남학생이랑 함께 지낸 걸 알아요. 빙하가 우레처럼 울고 난 뒤 피오르드로 한꺼번에 떨어지는 얼음 덩어리, 단숨에 벌어지고 쪼개지는 그게 우리네 삶인 걸요. 오늘 새벽 그 사내애를 만났어요. 화가 나서 따귀를 때리고 싶었지만, 당신의 서늘한 눈빛이 생각났어요. 저 빙하의 푸른빛이 산골짜기마다 넘쳐요. 이렇게 많은 푸른빛에 싸여서 나는 언젠가 눈이 멀 거예요. 당신이랑 작은 보트를 빌려 타고 피오르드에서 송어를 낚던 지난여름이 생각나요. 흥정도 없고 덤도 없는 세상. 이제 알아요. 나는 푸른빛에 둘러싸여서 머지않아 눈이 멀 거예요. 아름다운 브릭스달의 빙하도 언젠가는 폭포로 폭포 아래의 호수로 모두 다 풀어질 거예요. 내일 아침엔 노란 튤립 화분을 주방 창틀에 내놓겠어요. 아픔 반 기쁨 반, 딸애도 알게 되겠지요. 해가 없는 여섯 달, 해가 지지 않는 여섯 달 아이들은 알게 될 거예요. 블루베리는 보랏빛으로 익어가고 월귤 열매는 빨갛게 익어가는 것을.
.........................................................................................................................................................................
압도적인 노르웨이의 풍광 속 사람살이
전철을 갈아타기 위해 환승통로를 가고 있었다. 통로는 길고 벽은 약간 구부러지고 있었는데 거기 있었다. 그 길고긴 통로의 벽에 큼직큼직한 패널들이 붙어 있었다. 컬러사진인데 웅장한 대자연의 풍경들이 시선을 놓아주지 않는 힘이 있었다. 좁은 골짜기 사이로 들어서는 짙푸른 바다. 구불거리며 뻗는 험한 골짜기들. 북쪽 하늘을 아래서부터 기어올라 다시 옆으로 아래로, 제멋대로 흐르고 넘실대는 푸른 연기, 푸른 안개, 아 그것은 겨울하늘의 오로라였다. 그 환승통로의 갖가지 풍경사진들을 몇 시간 뒤에 역순으로 돌아보며 지났다. 노르웨이 관광청의 선전물이었다. 노르웨이—북유럽에 있는 나라. 입센의 『인형의 집』. 그리그의 「솔베이지의 노래」, 바이킹, 바다로 띄워 보내는 불길 속 장송의 배. 에드바르 뭉크의 「절규」.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노르웨이의 숲』도 있지. 저 자연과 사람들과 예술의 세계가 어떻게 어우러진 것일까. 무엇보다도 노르웨이의 풍광은 압도적이었다. 거기서 이루어지는 사람살이도 궁금하다. 서점에 가서 관광 도서를 찾는데 북유럽 몇 나라를 한데 모은 책도 있고 주로 여행 상품 안내서였다. 그런데 국가별 단행본도 시리즈로 있었다 그래, 한 권 안에 한 나라만 담고 있는 책. 노르웨이. 가족들과 함께 노르웨이에서 몇 해를 살다가 왔다는 싱가포르의 중년 여성이 쓴 책이었다. 노르웨이의 작은 도시에서 몸으로 부딪치며 친숙해진 노르웨이의 역사, 문화, 교육, 경제 등을 차분하게 서술한 책이었다. 이틀 동안에 책을 다 읽었다. 단지 관광엽서 같은 풍경을 넘어 그 자연에 어울리는 아름다운 사람살이라면, 그걸 시로 한번 쓰고 싶었다. 가보지 않은 먼 나라지만 빙하와 피오르드와 계곡과 호수가 있는 마을, 그리고 여름이면 해가 지지 않는 백야의 나라 이야기를 나는 쓰기 시작했다. _강인한
[감상]
한 편의 아름다운 단편소설을 읽고 난 뒤의, 소설이 지닌 아우라에 싸여 잠시 멍하니 앉아 있다가 끝내 눈물 한 방울이 핑 도는 것 같은 시. 시에 담겨 있는 소설적 서사에는 어머니와 딸애의 사랑과 삶의 이중적 통과의례가 있다. 딸아이는 언젠가 알게 될 테지. 이 삶이 해가 없는 여섯 달, 해가 지지 않는 여섯 달처럼 기쁨 반, 아픔 반이란 걸. 피오르드로 한꺼번에 떨어지는 얼음 덩어리처럼 단숨에 벌어지고 쪼개지는 그게 우리네 삶인 걸. 그러한 삶을 에둘러 싸고 있는 것은 이마가 높은 브릭스달 빙하의 푸른빛에서 뿜어져 나오는 신성의 힘이다. 그러므로 자, 내일은 우리네 삶을 향한 축하카드를 내어걸자. 주방 창틀에 노랑 튤립 화분을 내어 놓는 것으로.
조정인 (시인) |
첫댓글 어젯밤 우리들의 딸이
저희 반 남학생이랑 함께 지낸 걸 알아요.
빙하가 우레처럼 울고 난 뒤
피오르드로 한꺼번에 떨어지는 얼음 덩어리,
단숨에 벌어지고 쪼개지는 그게 우리네 삶인 걸요.
오늘 새벽 그 사내애를 만났어요. 화가 나서
따귀를 때리고 싶었지만, 당신의 서늘한 눈빛이 생각났어요.
-강인한
시에 담겨 있는 소설적 서사에는 어머니와 딸애의 사랑과 삶의 이중적 통과의례가 있다. 딸아이는 언젠가 알게 될 테지. 이 삶이 해가 없는 여섯 달, 해가 지지 않는 여섯 달처럼 기쁨 반, 아픔 반이란 걸. 피오르드로 한꺼번에 떨어지는 얼음 덩어리처럼 단숨에 벌어지고 쪼개지는 그게 우리네 삶인 걸. 그러한 삶을 에둘러 싸고 있는 것은 이마가 높은 브릭스달 빙하의 푸른빛에서 뿜어져 나오는 신성의 힘이다. 그러므로 자, 내일은 우리네 삶을 향한 축하카드를 내어걸자. 주방 창틀에 노랑 튤립 화분을 내어 놓는 것으로.
조정인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