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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7월 17일 연중 제15주간 수요일
제1독서 : 이사 10,5-7.13-16
복 음 : 마태 11,25-27
25 그때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26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
27 “나의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나에게 넘겨주셨다.
그래서 아버지 외에는 아무도 아들을 알지 못한다.
또 아들 외에는, 그리고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려는 사람 외에는
아무도 아버지를 알지 못한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대화의 한자어를 보면 얼굴을 맞대고 이야기를 나눈다는 뜻입니다.
영어로는 Dialogue인데,
어원상 고대 그리스어 dia(통과하다, 사이로)와 logos(말, 말씀)에서 왔습니다.
직역하면 ‘말을 통과하다’, ‘사이로 말하다’로,
말이란 서로를 통과해서 나간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한쪽에서 일방적이 되어서는 대화라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대화를 잘 하십니까?
예전에 휴대전화가 없었을 때는 공중전화 줄이 길게 서 있는 경우를 많이 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휴대전화가 나오고서는 길을 걸어가면서 길게 통화하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전화로 길게 통화하는 사람을 보기가 쉽지 않습니다.
대부분 메신저를 이용하기 때문입니다.
또 메신저로 소통할 때도 유행어와 이모티콘 표현이 가득해서 이해하지 못할 때도 많습니다.
대화하지 않는 시대에 사는 것만 같습니다.
우리 사회에 대화가 없어진 것은 아닐까요?
꼭 필요한 대화이지만, 대화가 없다 보니 의사소통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오해도 많습니다.
이런 대화 부족이 주님과의 관계에서도 그대로 이어집니다.
잠시 기도하는 것도 어려워하며, 메신저를 통한
간단한 대화처럼 짧은 기도에만 익숙해져 있는 듯합니다.
그래서 미사가 끝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영성체만 마치고서는 밖으로 나가시는 분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습니다.
조금이라도 빨리 주님 곁을 떠나고 싶은 것 같습니다.
이렇게 짧은 기도, 짧은 만남을 통해 주님의 뜻을 제대로 알 수가 있을까요?
계속된 오해와 불통으로 주님과의 거리가 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기도해야 하는 이유가 또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기도하셨기 때문입니다.
식사할 시간도 없을 정도로 바쁜 전교 활동 가운데에서도 홀로 외딴곳에 가셔서 기도하셨지요.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께 감사의 기도를 바치십니다.
당신을 반대하는 많은 사람이 있었고, 어렵고 힘든 시간도 많았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도 주님께서는 감사의 기도를 바치셨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하느님과 대화를 나누는 예수님의 모습에서 우리의 모범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도 주님과 많은 대화를 나눌 수 있어야 합니다.
바쁘다고, 힘들다고 대화를 멈춰버리면 당연히 주님과의 관계도 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또 그 대화도 감사의 마음이 있어야 가능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만약 부정적인 마음을 가지고 불평불만만 하고 있다면 과연 대화가 가능할까요?
대화가 되지 않고 가까운 관계도 되지 않습니다.
주님과의 기도를 절대로 멈추지 마십시오.
이렇게 계속 대화를 나눌 수 있을 때, 감사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주님의 일을 하라.
반영억 라파엘 신부
노자는 “알면서도 모르는 게 으뜸이요, 모르면서 아는 게 병통”이라고 하였습니다.
아는 것을 제대로 쓰지 않으면 아는 것이 병입니다. 오히려 모르는 게 약입니다.
자신이 잘났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하느님의 영광은 사라지고 자신이 드러나기를 바랍니다.
그는 종종 ‘내가 무엇을 했다.’고 으스댑니다.
그러나 부족함을 아는 사람은 철부지처럼 하느님께 전적으로 의지합니다.
내가 한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이루어 주셨다,’고 합니다.
진정 우리가 하는 일이 ‘나의 일’이 아니라, ‘주님의 일’이 되기를 희망합니다.
주님께서 나를 당신의 필요에 쓰십니다.
주님의 일을 한다고 하면서 내가 커지려고 하고 있지는 않은지 살필 때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이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고 자처하는 사람들에게 배척받았습니다.
소위 잘나고 똑똑한 내로라하는 사람에게는 쉽게 받아들여 지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자기가 안다고 생각하는 것이 최고였기 때문에,
주님의 가르침이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철부지들에게는 받아들여졌습니다.
그야말로 촌사람, 별 볼 일 없는 못난이들은 주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들에게는 단순함이 있었고 부족하다고 인정하는 겸손이 있었기에 내 것으로 만들었습니다.
사실 그것이 세상의 희망입니다.
오늘도 다르지 않습니다.
정부 고위직 후보자들의 인사청문회가 있다고 합니다. 그들의 살아온 면모가 드러납니다.
잘난 사람이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내로라하는 사람이 감추어진 부정이 더 많게 보입니다.
자녀를 위한다고 좋은 학군으로 위장전입을 하고,
절세를 노린 쪼개기 증여, 부모 찬스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평범한 이들은 생각할 수도 없는 일들입니다.
불법으로 물질을 챙기고 기득권을 잃지 않으려 서로를 헐뜯고 깎아내리기도 합니다.
존경받아야 할 무리에서 뻔뻔한 사람이 생각 외로 많아 평범한 사람들을 허탈하게 합니다.
그러나 때 묻지 않은 철부지들은 새로운 가르침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그야말로 잔머리를 굴리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머리로 계산하지 않고 마음을 열고 겸허하게 받아들이는
단순한 사람을 미덥게 여기십니다.
세상에 이런 사람이 많아 희망을 발견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아는 것이 남을 등쳐먹는 데 사용되지 않고, 남을 풍요롭게 하는데 사용되기를 바랍니다.
성경에서 ‘안다’는 것은 단순히 ‘지식’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보다 훨씬 더 깊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사물을 꿰뚫는 통찰력을 가리키며 친숙해지는 것,
그리고 감정을 이해하며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
결국 알기 때문에 달라지는 것을 포함합니다.
또한 남녀가 결혼을 통해 가장 깊이 만나는 것을 ‘안다’라는 말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을 안다고 하는 것은 당신의 사랑으로 충만히 채워주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안다는 것은 곧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하느님을 알기 때문에 순수함을 회복하고 더 많이 사랑할 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외에는 아무도 아들을 알지 못한다.”고 하셨고
“또 아들 외에는, 그리고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려는 사람 외에는
아무도 아들을 알지 못한다”(마태11,27).고 말씀하심으로써
예수님과 하느님과의 긴밀한 관계를 알려주셨습니다.
그 아버지에 관해서 아들인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알려주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가 예수님을 그리고 그분이 알려준 아버지를 세상에 알려야 합니다.
그런데 그분을 알리기 위해서 그분을 알아야 하는데
그 첫 자세가 “어린이와 같이”(마르10,15)단순한 마음으로
하느님께 온전히 의지하며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단순하면 할수록 하느님의 뜻을 더욱 잘 깨닫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을 알고 전할 수 있는 은혜가 모두에게 충만하기를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마태 11,26)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 <복음>은 짧지만, 참으로 깊고 아름답습니다.
<앞 장면>은 예수님께서 아버지께 드리는 감사, 찬양의 기도요,
<뒤 장면>은 당신 자신에 대한 계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먼저 “하늘과 땅의 주님이신 아버지”를 부르시면서 기도를 시작하십니다.
곧 아버지께서 우주의 주권자이심을 인정하는 동시에,
모든 피조물의 소유권을 가지신 분임을 고백하십니다.
그리고 이렇게 기도드리십니다.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마태 11,25)
이 고백은 하느님의 뜻은 지혜나 슬기로 알게 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드러내 주셔야만 알 수 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드러내 주신다고 해서 모두가 알게 되는 것만도 아닙니다.
그것을 받아들일 때라야 알게 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어린이와 어른의 차이라 할 수 있습니다.
어린이는 “나는 모른다.”라는 태도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것저것 묻습니다. 그리고 ‘모른 것’을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어른이 되어가면서 “나는 안다.”라는 태도를 지니게 됩니다.
그래서 ‘아는 것’을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는 우주의 주권자이기에
당신께서 원하시는 사람들에게 자유롭게 당신의 뜻을 드러내시기도 하고
감추시기도 하실 수 있는 분이심을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처럼, “감추시고”와 “드러내시고”라는 표현을 통해서,
영적 진리는 하느님의 주권적인 배려에 의해서만 알 수 있음을 말해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 바로 이러한 아버지의 주권적인 배려에 감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드린 “감사”(Έξομολο-γουμαί)의 원어의 뜻은
찬양을 나타내는 감격스런 고백을 뜻합니다.
곧 아버지의 뜻에 대한 완전한 인식과 동의를 말합니다.
곧 ‘슬기롭다는 자에게는 감추시고 철부지에게는 드러내시는’
아버지의 뜻과 섭리에 대한, 완전히 동의와 전폭적인 지지를 말합니다.
그래서 그 감사의 이유를 이렇게 고백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마태 11,26)
오늘 우리도 이렇게 고백해야 할 일입니다.
아버지께서 우리 안에 활동하시고 일하셨음을 믿음과 흠숭으로 고백하는 일입니다.
당신의 일하심에 전적으로 동의하고 지지하는 일입니다.
비록 지혜롭고 슬기롭다는 자들이 나를 알아주지 않아도, 아버지를 확신하고 지지하는 일입니다.
아니, 오히려 감사와 찬미를 드리는 것입니다.
‘모든 것에 감사드리는 것이 아버지 하느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원하시는 바 입니다.’(1코린 5,18)라고 말씀하신 사도 바오로처럼 말입니다.
‘하늘나라의 장막에 머무는 길은
우리 안에 일하시는 주님을 찬미하라’(수도규칙 머리말 30)고 제시하신
성 베네딕도의 말씀하신 것처럼 말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아버지의 선하신 뜻”(마태 11,26)
그렇습니다. 주님!
오늘도 미처 알아듣지도 못한 채
당신의 ‘선하신 뜻’을 부둥켜안고 살아갑니다.
그 드러내신 사랑에서 당신의 얼굴을 뵈오며,
그 감추신 신비에서 당신 심장의 소리를 듣게 하소서.
그 모든 것 안에서 믿음과 사랑이 자라게 하시고,
그 안에서 신비를 살게 하소서!
당신의 선하신 뜻 그 안에 제가 매달려 있으니,
당신 뜻에 응답하게 하소서. 아멘.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연령회에서 11월 위령성월을 ‘죽음에 대한 교육’을 준비한다고 합니다.
저는 그렇게 하시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신앙인에게 죽음이란?’이라는 주제는 본당신부님이 하는 거라고 합니다.
저는 아직까지 죽음에 대해서 깊이 성찰하지 않았습니다.
강의 부탁을 받으면서 ‘신앙인에게 죽음’이란 무엇인지 생각해 보았습니다.
우리말에 ‘죽음’과 관련된 단어가 있습니다.
자주 듣는 말이 ‘돌아가셨습니다.’입니다.
이는 죽음이 끝이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여행을 가듯이, 죽음은 어딘가로 떠나는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운명하셨습니다.’라는 말도 있습니다.
이는 이제 모든 것이 끝났다는 의미입니다. 관계가 끝났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말에 죽음은 어딘가로 떠나는 여행과도 같고,
이 세상과의 관계가 끝났다는 말과 같습니다.
어딘가로 떠났다면 다시 돌아올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잘 갔다 오라는 마음으로 ‘제사’를 지냈습니다.
이 제사를 교회는 ‘우상숭배’라고 여겼습니다.
한국인 최초의 순교자인 윤지충 바오로 복자는 제사를 거부했습니다.
교회의 가르침을 따랐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제사’를 조상에 대한 존경과 사랑을 표현하는 아름다운 전통이라고 인정했습니다.
한국교회는 ‘설과 추석’에 차례를 지낼 수 있도록 예식을 마련하였습니다.
‘연도’는 죽은 이를 위한 한국교회의 아름다운 기도입니다.
연도는 고인의 유족들에게는 깊은 위로가 됩니다.
연도는 이제 하느님의 품으로 가는 이를 위해 성인들의 통공을 바라는 기도입니다.
구약성서 마카베오서에는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 스스로 목숨을 바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하나는 엘아자르의 이야기입니다. 마카베오서는 이렇게 전합니다.
“엘아자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이미 나이도 많고 풍채도 훌륭하였다.
그러한 그에게 사람들이 강제로 입을 벌리고 돼지고기를 먹이려 하였다.
그러나 그는 더럽혀진 삶보다는 명예로운 죽음을 택하는 것이 낫다고 여겨,
자진해서 형틀로 나아가며 돼지고기를 뱉어 버렸다.
그는 젊은이들뿐 아니라, 온 민족에게 자기의 죽음을
고결함의 모범과 덕의 귀감으로 남기고 죽었다.”
엘아자르는 하느님께 대한 믿음으로 기꺼이 죽음을 받아들였습니다.
다른 하나는 일곱 아들을 둔 어머니의 이야기입니다. 마카베오서는 이렇게 전합니다.
“어떤 일곱 형제가 어머니와 함께 체포되어 채찍과 가죽끈으로 고초를 당하며,
법으로 금지된 돼지고기를 먹으라는 강요를 임금에게서 받은 일이 있었다.
이 사악한 인간, 당신은 우리를 이승에서 몰아내지만,
온 세상의 임금님께서는 당신의 법을 위하여 죽은 우리를 일으키시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실 것이오.
하느님께서 다시 일으켜 주시리라는 희망을 간직하고, 사람들의 손에 죽는 것이 더 낫소.
그러나 당신은 부활하여 생명을 누릴 가망이 없소.
우리 형제들은 잠시 고통을 겪고 나서 하느님의 계약 덕분에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되었소.
그러나 당신은 주님의 심판을 받아 그 교만에 마땅한 벌을 짊어질 것이오.”
일곱 형제와 어머니는 ‘부활’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기꺼이 죽음을 받아들였습니다.
위령기도 감사송은 이렇게 기도합니다.
“거룩하신 아버지,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주 하느님,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언제나 어디서나
아버지께 감사함이 참으로 마땅하고 옳은 일이며,
저희 도리요 구원의 길이 옵니다.
그리스도께서 복된 부활의 희망을 주셨기에,
저희는 죽어야 할 운명을 슬퍼하면서도,
다가오는 영생의 약속으로 위로를 받나이다.
주님, 믿는 이들에게는 죽음은 죽음이 아니요, 새로운 삶으로 옮아감이오니,
세상에서 깃들이던 이 집이 허물어지면, 하늘에 영원한 거처가 마련되나이다.
그러므로 하늘의 모든 천사와 함께,
저희도 땅에서 주님의 영광을 찬미하며 끝없이 노래하나이다.”
신앙인들에게 죽음 영원한 생명으로 들어가는 문입니다.
그래서 억울하게 죽어야 했던 사람들은 깊은 위로를 받습니다.
성실하게 사는 사람들은 영원한 생명에 대한 희망을 지닙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에 대해서 마르타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
사마리아 여인에게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물을 마시는 자는 누구나 다시 목마를 것이다.
그러나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내가 주는 물은 그 사람 안에서 물이 솟는 샘이 되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할 것이다.”
다락방에 숨어있던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체험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평화를 주셨습니다.
제자들에게 성령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다시 일어섰습니다.
절망에서 희망으로 일어섰습니다. 두려움에서 담대함으로 일어섰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기쁜 소식을 전하였습니다.
이것이 교회의 시작입니다.
이것이 우리 신앙의 근본입니다.
부활은 죽음 이후의 삶이 아닙니다.
부활은 지금 이곳에서 나의 삶이 변하는 것입니다.
부활은 지금 이곳에서 나에게 주어지는 십자가를 기꺼이 지고 가는 것입니다.
삶이 변화되지 않는다면, 십자가를 포기한다면 부활은 허황된 꿈일 뿐입니다.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
아버지 외에는 아무도 아들을 알지 못한다.
또 아들 외에는, 그리고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려는 사람 외에는
아무도 아버지를 알지 못한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조욱현 토마 신부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25절)
당신에 관한 신비를 지혜롭다는 이스라엘에게는 감추시고,
철부지인 다른 민족들에게는 드러내신 아버지의 뜻에 대한 찬미이다.
우리도 세례를 받아 신앙인이 되었지만,
그분의 말씀을 따르지 않으면 우리도 외면을 당할 것이다.
하늘과 땅의 주님이란 말은 창조계 전체의 주님으로
하늘은 하늘에 있는 모든 것, 땅은 땅 위에 있는 모든 것을 의미한다.
이 아버지께 감사를 드리신다.
예수께서는 이 일들을 다 하시고도 아버지께서 그 일을 하신 것으로 아버지께 감사를 드리신다.
그럼으로써 우리에게 좋은 것을 베풀어주신 하느님의 사랑에 감사드리신다.
주님의 말씀에서 철부지들은 나이가 어려 철부지가 아니라,
죄와 사악함에서 거리가 먼 철부지라는 것이다.
철부지들에게 드러내 보이신 이유가 왜 하느님의 선하신 뜻인지는 설명하지 않으신다.
다만 감사를 드리신다.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하느님의 뜻을 따져 물어서는 안 된다.
단지 그분의 뜻을 따리 실행하고 그분께 충성을 다하는 일만이 우리의 할 일이다.
“나의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나에게 넘겨주셨다.”(27절)
아버지께서는 아들을 통해 아버지께 다가간 사람들과 전에는 반항했으나
이제는 하느님을 알게 된 모든 사람을 맡기셨다는 뜻이다.
“아버지 외에는 아무도 아들을 알지 못한다.
또 아들 외에는, 그리고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려는 사람 외에는
아무도 아버지를 알지 못한다.”(27절)
그러기에 아들을 아는 사람은 아들 안에서 아버지를 아는 것이다.
아버지가 아들을 알고 아들이 아버지를 아는 신비를 통하여
아버지에게 있는 모든 것이 아들에게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도 주님을 알기 때문에 하느님의 뜻을 알 수 있다.
예수께서는 아버지를 잘 아시며, 아버지를 잘 아는 유일한 분인 만큼
아버지와 같은 분이라는 것이 분명해진다.
아버지의 모상이신 아들을 보는 사람은 아버지를 보는 것이다.
아버지만이 당신 본질의 열매인 당신의 아들을 아신다.
오직 아들만이 자신을 낳으신 아버지를 알아본다.
그리고 거룩하신 성령만이 하느님의 깊은 비밀, 곧 아버지와 아들의 생각을 아신다.
하느님을 아는 우리는 그분의 뜻을 알고 실천하여 참으로 그분을 사랑하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
이 삶으로 하느님 안에 사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
김준수 아오스딩 신부
“지혜롭고 슬기로운 사람들에게 드러난 것이 아니라
아무 것도 모르는 철부지들에게 드러난다.” (11,25~27)
저는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아빠 하느님 앞에서 철부지처럼 살아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해 봅니다.
예전 어느 수녀원에 미사 갔을 때 그 수녀원 복도에 걸려 있던
“나이가 들면 세상의 눈은 멀어지지만, 영적 눈은 점차적으로 밝아진다.”라는
표현을 마음에 새기며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나이 들면서, 아픈 다리는 낫지 않고, 눈도 귀도 멀어지기만 한 게 아니라
마음도 굳어져 가는 듯해서 이런 저를 보면서 저도 마음이 여간 불편합니다.
작은 것인데도 예전처럼 잘 참지 못하고,
급한 성격이 더 급해지는 것 같아서(=나이 들면 다 그런다고 하던데 저만 그런가요?)
요즘 거의 말하지 않고 혼자 조용히 살아갑니다.
혹여 대화하다 보면, 서로 불편해지지 않도록, 보고도 보지 않은 척,
들어도 듣지 않은 척하면서 말문을 닫고 살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저도 모르게 지나치게 고루한 관점을
마치 지금에도 맞는 것처럼, 우길 땐, 참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하느님 앞에 철부지처럼, 다만 믿음으로 하느님의 은총에 전적으로 신뢰하며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존재가 되고 싶은데 아직은 그렇지 않네요.
하느님 앞에 작은 자의 삶과 숨은 가난의 삶을 살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같은 데
그렇지 못한 저 자신이 애처롭게 느껴집니다.
사실 하느님 안에 제대로 살아가는 삶이란
자비로우신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에 전적인 신뢰와 의탁으로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인 우리가 살아야 할
하느님의 지혜이며 하느님의 뜻입니다.
“아들이신 예수님 외에는 아무도 아버지를 알지 못합니다.” (11,27)
그래서 아버지를 알고 아빠 하느님과 함께 살아가기 위해서 우리는 예수님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는 지적인 앎으로 하느님과 하나가 되는 것이 아니라
관계의 앎, 사랑의 앎에서 오는 지혜만이 하느님의 신비를 꿰뚫을 수 있고,
사랑으로 하느님과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을 통해서 하늘나라의 신비는
“지혜롭고 슬기로운 사람들에게 드러난 것이 아니라
아무것도 모르는 철부지들에게 드러난다.”(11,25~27)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오늘 말씀은 어제 복음에서 불행하다, 는 예수님 말씀과 대비되고 대조되는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그 고을에선 랍비들의 종교 교육이 가장 성행했었으며,
어느 지역 사람들보다 그 고을 사람들은 하느님에 관한 지식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의 지적인 앎으로 말미암아, 아는 것이 병이다, 는 표현처럼
자기도취와 오만으로 예수의 가르침을 외면하였습니다.
그들은 눈을 감고 생명의 빛을 보지 않았고,
귀를 틀어막고 진리의 말씀을 듣지 않았던 것입니다.
당대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은 하
느님 아버지의 뜻과 그 의로움이 예수님을 통하여 실현되고 있음을 깨닫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나의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나에게 넘겨주셨다.
그래서 아버지 외에는 아무도 아들을 알지 못한다.
또 아들 외에는, 그리고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려는 사람 외에는
아무도 아버지를 알지 못한다.”(11,27)하고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을 통해 볼 때, 아들 외에는 아버지를 보여 줄 사람이 없으며,
예수님을 통해서만이 아버지 하느님을 만날 수 있으며 알 수 있다는 점입니다.
물론 지혜로움과 슬기로움이 죄는 아닙니다.
많이 배우고 많이 아는 것이 죄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 모든 지식과 지혜가 세상을 살아가는 데 아주 필요한 요소입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너무 많이 알고, 너무 많이 듣고 배운 것이 흘러넘쳐
오히려 부족함만 못한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렇습니다. 과유불급의 지혜를 깨달아야 합니다.
이로써 지나친 하느님에 관한 지식 과잉이
오히려 하느님을 살지 못해 영혼이 말라비틀어지기도 합니다.
지식 과잉이 하느님보다 우선하다 보면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가리게 됩니다.
하느님보다 다른 것을 더 우위에 둘 때,
하느님이 아니라 자신이 가지고 있던 경험과 지식, 능력, 명예 등이 우선 할 때,
하느님은 가려져서 보이지 않는 법입니다.
그에 비해 철부지들은 받아들일 수 있는 여백이, 공간이 충분합니다.
결국 우리가 얼마나 많은 경험을 하고, 얼마나 많이 배우고,
얼마나 많이 가지고 있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또한 반대로 많이 배우지 못하고, 많이 가지지 못한 것들도 그리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어떤 상황이나 환경이든지 자신의 지금 있는 그대로를 가지고
하느님 앞에 서고 하느님을 하느님으로 살려고 최선을 다하는 삶이 중요합니다.
내가 살아온 삶의 자세나 가진 것이나 경험한 것이
하느님과 하느님 나라를 살아가는 데 걸림돌이 된다면 과감하게 떨쳐내야 할 것입니다.
내가 힘써 노력해서 배운 지혜이고, 터득한 슬기라고 할지라도,
하느님께서 성령을 통해 가르쳐 주신 것이 아니라면 기꺼이 내려놓고
하느님께서 가르쳐 주시기를 간청하면서 다만 예수님 삶의 자세와 태도를 본받아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에 온전히 신뢰하며 의탁하는 삶을 살도록 깨어 있어야 하겠습니다.
“아버지는 하늘나라의 신비를 철부지들에게 드러내 보이셨나이다.” (11,25)
작고 단순하고 소박하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참 재미있는 우리 말이 있습니다. 철부지입니다.
철부지의 어원은 절부지(節不知)입니다.
절은 계절을 뜻하니, 절부지는 계절(season)을 잘 파악하지 못하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일 년 농사를 성공하려면 절기를 잘 파악해야 하는데,
그게 안 되는 사람을 철부지라고 하는 것입니다.
결국 철부지는 사리를 분별할 만한 능력이 없는 사람입니다.
아직 철이 들지 않은 아이를 의미합니다.
철부지들이 지닌 두드러진 특징들은 개념이 없다는 것,
분위기 파악을 잘 못한다는 것, 아직 세상 물정 모른다는 것,
뭐가 뭔지 잘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순종적입니다. 부모가 시키는 대로 행동합니다.
아직 작고 힘이 없다 보니 철저하게도 의존적입니다.
늘 부모에게 물어보고, 부모가 가자 하면 가고 오라 하면 옵니다.
부모 입장에서 보면 사랑스럽기 짝이 없습니다.
그러나 나이가 들어가고 철이 들어가면서,
이것저것 어설프나마 배워가면서 슬슬 자기주장이 생기고, 고집도 늘어갑니다.
때로 뺀질거리며 말도 잘 듣지 않습니다.
부모가 한마디 하면 전에는 절대 그러지 않았는데, 이젠 꼬박꼬박 말대답입니다.
부모 입장에서 보면 미워 죽을 지경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뜨거운 사랑을 느끼고자 한다면,
그분의 지속적인 축복을 원한다면,
인간을 한 그분의 한없는 측은지심의 손길을 느끼고자 한다면,
방법은 단 한 가지입니다.
큰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작은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대단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철부지가 되는 것입니다.
단순하고 소박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어린이들이 지닌 천진난만한 성품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따지고 대들고 튕기는 것이 아니라 고분고분 순종하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교 신앙, 참으로 역설적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역설의 신비를 사는 사람입니다.
어떻게 하면 좀 더 있어 보이려고 기를 쓰는 사람들이 세상 사람들입니다.
있어 보이기 위한 세상 사람들의 투자는 만만치 않은 것입니다.
부실함과 결핍과 약점을 애써 감추려고 기를 쓰니 에너지 소모도 만만치 않습니다.
매일의 삶이 늘 부담스럽고 피곤할 따름입니다.
그러나 참된 그리스도인들은 없어 보이려고 기를 쓰는 사람들입니다.
목과 어깨에 잔뜩 들어간 힘을 빼는 사람들입니다. 마치 예수님처럼 말입니다.
주변을 살펴보면 자칭 지혜로운 사람들,
엄청난 학문적 성취를 통해 한 분야의 최고봉에 올랐음에도 불구하고,
때로 유치원생보다 못한 사고를 하는 분들이 부지기수입니다.
그러기에 요즘 와서 자주 생각하는 것이 편식하지 말아야 하겠다는 생각입니다.
너무 한 과목에 집중하지 말고, 여러 과목에 골고루 신경 써야 하겠다는 생각입니다.
우리가 그토록 기를 쓰며 쌓아 올리고자 노력하는 학문적, 세상적, 인간적 지혜 위에,
인문학적, 영적, 정신적, 신앙적 지혜가 가미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
참으로 지혜로운 사람이 어떤 존재인가 생각해 봅니다.
참으로 지혜로운 사람은, 다른 무엇에 앞서 하느님을 경외하는 사람입니다.
이 세상은 순식간에 지나간다는 것을 깨달은 사람입니다.
그리고 영영세세 지속되는 또 다른 세상,
하느님 나라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음을 인식한 사람입니다.
참으로 지혜로운 사람은 나와 가장 가까운 존재들이
가장 큰 은총의 선물임을 깨달은 사람입니다.
우리 모두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그들과 함께 지상천국을 건설할 수 있음을 확신하는 사람입니다.
또한 지혜로운 사람은 나 자신의 부족함을 기꺼이 수용하는 사람입니다.
부족하고 부끄러움에도 불구하고 내 안에 하느님께서 현존하심을 굳게 믿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나 자신을 주님께서 거처하시는 거룩한 성전으로 여기고,
나 자신에 대해서도 큰 가치와 의미를 부여하는 사람입니다.
안다는 모름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제 생각에 대표적인 교만이 바로
내가 옳다는 교만과 안다는 교만입니다.
진정 올바른 사람이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마는
교만한 사람은 자기가 올바르지 않으면서 옳다고 합니다.
더 나아가서 다른 사람은 옳지 않다고 하며 자기만 옳다고 합니다.
주님께서는 이런 사람에 대해서 비유를 가지고 비판하셨지요.
바리사이와 세리가 모두 기도하러 성전에 갔는데 바리사이는
꼿꼿이 서서 혼잣말로 이렇게 기도하지요.
“오, 하느님! 제가 다른 사람들, 강도짓을 하는 자나 불의를 저지르는 자나
간음하는 자와 같지 않고 저 세리와도 같지 않으니,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이에 비해 세리는 얼굴을 들지도 못하고 이렇게 기도하지요.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주십시오.”
‘오, 하느님!’ 하며 둘 다 하느님을 불렀지만
누가 실제로 기도했고, 하느님을 뵈었습니까?
바리사이는 하느님 앞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세리 앞에 있었고,
하느님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세리를 보고 있었던 겁니다.
그래서 이런 교만한 사람에게는 하느님께서 당신을 보이지
않으신다고 오늘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겁니다.
또 다른 교만이 오늘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안다는 교만,
곧 지혜롭고 슬기롭다는 교만인데 마찬가지로
진정 하느님을 잘 알고 진정 지혜롭고 슬기롭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그렇지 않으면서 잘 안다고 더 나아가서 다 안다고 하니 그것이 문제지요.
그러나 아는 것이 아무리 많아도 곧 지식이 아무리 많아도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더 많다는 것을 알아야 지혜로운 것이고,
하느님께 대해서는 더더욱 알지 못한다는 것을 알아야 지혜로운 것이지요.
이런 면에서 지혜는 겸손과 동의어입니다.
그런데 다른 무엇보다 자기를 잘 아는 것이 겸손이자 지혜인데,
자기를 잘 안다는 것은 자기가 얼마나 모르는 것이 많은지 아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가 모른다는 것을 겸손히 인정할 때 모르는 것을 물을 겁니다.
그러나 교만한 사람은 반대로 자기는 잘 알고 있으며 다 안다고 자신하고,
교만이 하늘을 찌르는 사람은 하느님께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잘 알고 다 안 결과가 신은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느님에 대해 아는 것의 전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믿는 사람들은 다행히 이렇게 교만한 사람은 아닙니다.
교만이 하늘을 찌를 정도는 아니라는 말이고 다만 땅에서 교만하고
그래서 땅만 보고 하늘을 알려고 하지 않고 보려고 하지 않는 사람은 있습니다.
그러므로 겸손할 바에는 얼치기로 겸손하지 말고
철부지 어린아이와 같이 제대로 겸손해야 합니다.
철부지 어린아이는 모든 것을 알고 싶습니다.
그래서 귀찮을 정도로 모든 것을 물어댑니다.
지금은 군대에 가 있는 손주와 그 할머니와 함께 어디를 간 적이 있는데
가는 내내 눈에 보이는 족족 할머니에게 그것이 뭔지 묻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대화를 제대로 나누지 못할 정도였는데
그런데 그때 저는 모든 것을 모르고,
그래서 모든 것을 묻는 철부지 어린아이에게 모든 것이신 하느님께서
당신을 드러내 보이신다는 주님 말씀을 덕분에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조금 알고 일부 아는 것으로 더 이상 알려고 하지 않는
지혜롭고 슬기롭다는 사람이 바로 내가 아닌지,
안다는 모름이 나의 교만은 아닌지 돌아보는 오늘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