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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7월 19일 연중 제15주간 금요일
제1독서 : 이사 38,1-6.21-22.7-8
복 음 : 마태 12,1-8
1 그때에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밀밭 사이를 지나가시게 되었다.
그런데 그분의 제자들이 배가 고파서, 밀 이삭을 뜯어 먹기 시작하였다.
2 바리사이들이 그것을 보고 예수님께 말하였다.
“보십시오, 선생님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3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다윗과 그 일행이 배가 고팠을 때, 다윗이 어떻게 하였는지 너희는 읽어 본 적이 없느냐?
4 그가 하느님의 집에 들어가,
사제가 아니면 그도 그의 일행도 먹어서는 안 되는 제사 빵을 먹지 않았느냐?
5 또 안식일에 사제들이 성전에서 안식일을 어겨도 죄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율법에서 읽어 본 적이 없느냐?
6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성전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
7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너희가 알았더라면,
죄 없는 이들을 단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8 사실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노인과 젊은이. 이 중에서 어떤 부류가 더 행복을 느낄까요?
심각한 질환, 극심한 통증, 또 가난 속에서 노인의 삶이 버겁고
그래서 불행하다고 느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의외로 노인이 젊은이보다 행복도가 더 높다고 합니다.
분명 부족해 보이는 것이 훨씬 많은데 말입니다.
스탠퍼드 장수 연수센터에서는 노인이 삶에 더 크게 만족하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앞으로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아는 노인들은
당장 즐거울 수 있는 일에 에너지를 집중하는 반면,
아직 갈 길이 먼 젊은이들은 비록 앞으로 쓸모가 없을지 모르더라도
새로운 경험이나 지식을 쌓기를 선호합니다.
또 젊은이들이 현재 자신이 가지지 못한 것들 중
나중에 혹시라도 필요한 것이 있을까 봐 초조 해하는 반면,
나이가 많은 사람들은 이미 가진 것들 중 가장 좋아하는 것 몇 가지만 추려냈다.”
결국 행복한 삶은 당장 즐거울 수 있는 일에 집중하고,
이미 가지고 있는 것에 만족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젊은이들이 보이는 모습을 계속 간직하는 사람이 너무 많습니다.
나이 많은 사람 중에 불행을 느끼는 분은 젊은이의 모습을 따라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즉, 가지고 있는 것이 없다고 생각하고, 즐거운 일이 없다면서
과거에만 연연하면서 모든 것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사람이었습니다.
행복을 지향한다면 지금을 살아야 했습니다.
지금 가지고 있는 것, 또 지금 행동하는 것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젊은이들은 개구리가 왕자로 변하기를 바라며 키스한다.
하지만 노인들은 손자손녀들에게 키스한다.”
누가 더 행복할까요? 사랑도 지금 당장 해야 합니다.
그래야 사랑을 통해 큰 기쁨과 행복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 바리사이들이 배가 고파서 밀 이삭을 뜯어 먹는 제자들을 가리키며
“보십시오. 선생님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라고 따지듯 말합니다.
그들은 율법을 어겼다면서 예수님께 따지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하느님의 안식일 법은 사람을 구속하기 위함이 아니라 살리기 위해서 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라는 성경 말씀을 인용해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과거에 매여있으면서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은 행복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지금을 살면서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은 주님 안에서 행복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사랑이 계명을 완수합니다.
반영억 라파엘 신부
가끔은 많은 것을 아는 척하는 사람을 만납니다. 그러면 반박하고 싶은 마음이 생깁니다.
무안을 주면 다음부터는 좀 겸손해질까? 하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결국은 마음의 상처를 줄 수도 있다는 결론을 내고 넘어갑니다.
그야말로 시쳇말로 번데기 앞에서 주름잡는 그를,
코를 납작하게 해 주고 싶은 마음은 지울 수가 없습니다.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배가 고파서 밀 이삭을 뜯어 먹은
행위에 대해서 못마땅하게 생각하였습니다.
당시 안식일 법은 안식일에 일을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해서는 안 되는 노동을 하고 있다는 것에 대해 예수님께 항의하자
“성전보다 더 큰이가 여기에 있다” 하시고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메시아이시고 안식일의 주체이십니다.
그러니까 바르게 알고 말하라는 가르침입니다.
밀 이삭을 잘랐다는 것은 안식일에 추수를 하지 말라는 규정을 어긴 것이고
손으로 비벼서 먹었다면 타작하지 말라는 조항에 어긋납니다.
그리고 손으로 비벼서 후후 불어 껍질을 털어냈다면
키질을 하지 말라는 법을 지키지 않은 것입니다.
편지를 뜯는 것도, 불을 지피는 행위도 금지 사항입니다.
닭이 안식일에 알을 낳았다면 그 역시 먹을 수 없었습니다.
바리사이들은 주일을 거룩히 지내야 한다는 명분으로 이렇게 철저히 규정을 만들었습니다.
그러니 주님과 함께 하기 위한 법이 오히려 올가미가 되고 걸림돌이 되고 말았습니다.
어느 날. 유다인이 살고 있는 이웃분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문을 두드려서 나갔더니 자기 집의 가스 불을 꺼 달라고 부탁하더랍니다.
가스 불! 자기가 끄면 되지. 그런 부탁을 하나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안식일이 되기 전 불을 켰는데 끄기도 전에 안식일이 온 것입니다.
불을 지피는 일을 금지하고 있으니, 안식일이 다 가기까지 켜 놓을 수도 없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여 부탁 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겉모양에 묶여있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당신은 안식일의 주인이시고 법조문을 지키기에 앞서 법의 의미와 내용을 살리기를 바라십니다.
“형식적인 계명 준수는 무의미합니다. 사랑이 계명을 완수합니다”(프란치스코 교황).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고 이웃에게 자선을 베푼 다음, 의식상의 규정을 준수하라는 것입니다.
바리사이들은 알맹이보다는 껍데기에 충실해서 야단맞았다면,
오늘 우리는 알맹이를 빌미 삼아 규정을 무시하고 소홀히 하여
꾸중을 들어야 하는 것은 아닌가 합니다.
주님의 날에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찾기보다는
내 취미와 즐기는 일을 더 우선하고 기도와 미사는 뒤로 미루고 있으니 말입니다.
주님의 날은 주님과 함께 쉬어야 합니다.
주님의 마음에 드는 일을 하면서 하루를 보낸다면
거룩함이 넘쳐나게 되고 이웃도 우리 안에서 주님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어느, 누구 앞에서도 뽐내거나 으스대지 말고! 주님과 동행하시길 바랍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과 제자들이 안식일에
밀밭 사이를 지나가다가 밀 이삭을 뜯어 먹습니다.
그러자 바리사이들이 트집을 잡습니다.
“보십시오. 선생님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마태 12,2)
바리사이들이 트집 잡은 것은
그들의 배고픔이나 남의 곡식을 수확했다는 윤리적인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단지 그날이 안식일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의 정신을 일깨워주시면서, 당신이 누구신지를 밝히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에게 다윗과 그 일행이 배가 고팠을 때
제사 빵을 먹었던 사실을 말해주십니다.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그런 일들을 해서는 안 되는 일로 알았지만,
다윗이 하였던 것처럼 이제 당신께서 그렇게 하십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다윗이 하느님의 집에 차려놓은 제사 빵에 한 일을,
아직 빵이 되지도 않은 ‘밀’로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은총으로 바꾸십니다.
곧 안식일의 본질이 율법의 규범이 아니라 사랑에 있음을 밝히십니다.
중요한 것은 ‘율법이 아니라 사람’입니다.
사람에 대한 하느님의 자비입니다.
‘사람에게 자비로운 일’, 그것이 바로 안식일 계명의 근본정신입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 이어지는 뒤 장면에서,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손 오그라든 사람을 고치신 다음에 말씀하십니다.
“안식일에 좋은 일은 해도 된다.”(마태 12,12)
그렇습니다.
당신께서는 성막을 가리던 휘장을 찢듯,
율법의 낡은 옷을 벗기시고 말씀으로 은총의 새 옷을 입히십니다.
그리고 선포하십니다.
“성전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마태 12,6)
그리하여 안식일의 본질이 율법의 규범이 아니라 당신의 사랑에 있음을 밝히십니다.
그래서 마르코 복음의 병행 구절에서는 말씀하십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다.”(마르 2,27)
그리고는 모세가 안식일을 야훼께서 주님이심의 표시로 선포하였듯이(탈출 31, 13),
안식일을 당신께서 주님이심을 알리는 날로 알리십니다.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마태 12,8)
<오늘의 말·샘 기도>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마태 12,8)
주님!
이날은 저희를 위하여 마련하신 날,
이날을 새롭게 하시고 저희를 새롭게 하소서.
새 마음, 새살이 돋게 하고 새 옷을 입히소서.
거룩함을 입었으니 거룩한 일을 행하게 하소서.
자비를 입었으니, 자비를 베푸는 이가 되게 하소서!
당신이 주님이심을 알고, 당신께 속한 이 되게 하소서! 아멘.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심금(心琴)’을 울리는 말이 있습니다.
비록 그 소리가 크지 않아도, 비록 그 소리가 장엄하지 않아도,
비록 그 소리가 화려하지 않아도 마음에 파장을 일으키는 그런 말이 있습니다.
며칠 전 산보 중에 목회자의 자기 고백과 같은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제목은 ‘성도의 수준이 목회자의 수준을 정한다.’라는 것이었습니다.
감독이 깊은 울림을 주는 작품을 만들어도 관객이 외면하면
감독은 그런 작품 대신에 관객이 좋아할 만한 작품을 만들기 마련입니다.
교회는 최고경영자와 같은 목회자를 초대하는 대신에
말씀의 선포자를 초대해야 한다고 이야기하였습니다.
최고경영자는 성공신학과 긍정의 신학으로 교회를 부흥시킬 수는 있지만,
하느님의 말씀으로 굳어있는 양심을 깨우는 말씀을 선포하기 어렵다고 합니다.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섬기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말씀을 선포하기 어렵다고 합니다.
젊은이들이 교회를 떠나는 것은
공동체가, 목회자가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기는 하지만
그 말씀을 실천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가톨릭교회의 계급주의가 드러나는 교계제도를 반대하며 개혁교회를 세웠지만
교회가 직분과 직책으로 계급화되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타산지석(他山之石)’이라고 합니다.
목회자의 자기성찰과 같은 말씀이 제게 울림을 주었습니다.
판소리를 배우는 수련생이 폭포수 아래에서 연습하는 걸 볼 때가 있습니다.
득음의 경지에 오르면 폭포 소리를 뚫고서
소리를 낼 수 있는 명창이 된다고 합니다.
이는 폭포 소리의 파장과 명창의 목소리에서 나오는
파장이 다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유명한 성악 경연대회는 예선을 치를 때는
피아노 반주로 노래를 부른다고 합니다.
예선을 마치고 본선에 오르면
이제 70명이 넘은 악단의 연주로 노래를 부른다고 합니다.
본선에 오른 경연자 중에 오케스트라의 연주를 넘어
자신만의 목소리를 내는 경우가 드물다고 합니다.
오케스트라의 연주에 목소리가 묻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케스트라의 연주를 뚫고서 자신만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경연자가 있다고 합니다.
그런 사람이 영예의 대상을 차지할 수 있다고 합니다.
1000년을 이어오는 사찰의 예불 소리를 녹음하고,
수천 명이 참석한 예배의 소리를 녹음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한 스님의 예불 소리가 수천 명의 예배 소리를 압도하였다고 합니다.
이는 파장이 다르기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교회가 거룩하지 않으면, 교회가 말씀을 실천하지 않으면
결코 세상이 내는 파장을 넘어설 수 없습니다.
교회의 위기는 거룩함을 상실하고, 하느님의 말씀을 실천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내는 파장에 교회의 소리가 묻혀버리기 때문입니다.
신부님 중에 심금을 울리는 신부님이 있습니다.
목소리가 크지 않아도, 언변이 화려하지 않아도,
크게 내세울 능력이 보이지 않아도
마음에 파장을 일으키는 신부님들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선포하면서, 예수님의 말씀을 실천하기 때문입니다.
섬김을 받을 자격이 넘치지만 섬기려고 하셨던
예수님의 말씀을 그대로 따르기 때문입니다.
나를 따르려면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했던
그 예수님의 말씀을 지키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따라서 그물도 버리고, 배도 버렸던 제자들처럼
세상의 것들을 기꺼이 포기하고, 온전한 몸과 마음으로 예수님을 따르기 때문입니다.
저는 첫 번째 본당 신부님을 자상하고,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모든 이들을 포용해 주시는 분을 만났습니다.
그분에게는 안 되는 것도 없고, 되는 것도 없고 그랬습니다.
다만 한 가지 본인에게는 무척 엄격하셨습니다.
하루에도 몇 시간씩 기도하셨습니다.
신자들이 원하는 것은 가능하면 들어 주셨습니다.
하지만 재물에 대해서 청렴하셨습니다.
가난하게 사셨습니다. 언제나 자리를 지키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안식일에 대한 예수님의 해석을 들었습니다.
법과 원칙은 만인에게 평등해야 합니다.
법과 원칙은 엄격하게 적용되어야 합니다.
그것만 잘 지켜져도 우리 사회는 발전하고,
모든 이들이 편안하게 살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또 다른 말씀을 하십니다.
모든 법과 원칙은 사람을 위해서 만들어졌다고 하십니다.
나에게는 엄격하지만, 상대방에게는 관대한 법 적용을 말씀하십니다.
사람의 아들이 안식일의 주인인 것은
더 많은 자비를 베풀고, 더 많이 사랑하라는 뜻입니다.
오늘 본기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길 잃은 사람들에게 진리의 빛을 비추시어 올바른 길로 돌아오게 하시니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하는 모든 이가
그 믿음에 어긋나는 것을 버리고 올바로 살아가게 하소서.”
내가 바라는 것은 이웃에게 베푸는 자선이다.
조욱현 토마 신부
안식일이란 깊은 의미를 보면, 하느님을 위한 것이기보다 인간을 위한 것이다.
일주일에 엿새를 일하고 하루를 쉬면서,
하느님께서 베풀어주신 구원의 은총에 감사하면서 쉬는 날이다.
안식일은 하느님 안에 정신과 육체가 편안히 쉬는 날이다.
이 휴식은 인간의 건강을 위해서 절대로 필요하다.
그러나 살기 힘들다고, 하느님의 구원 은총에 대한 감사의 행위와 인간의 건강을 위하여
제정된 안식일을 지키지 못하고 오로지 돈만을 위해 사는 것은
인간의 삶을 피폐하게 만들 뿐 아니라, 자신의 건강까지도 잃는다.
지금은 5일제를 시행하고 있다.
일주일에 40시간 근무를 의무로 하고 있고 휴식을 하게 하는 것은
생산을 위한 충전의 시간도 되는 것이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안식일에
하느님께 이스라엘을 구원해 주신 은총에 감사의 기도를 드리시고
제자들과 함께 “밀밭 사이를 지나가시게 되었다.”(1절).
여기서 밀밭은 세상이며, 안식일은 휴식의 날이고,
밀 이삭은 미래의 믿는 이들의 수확 때 얻게 될 결과이다.
그러기에 안식일에 들로 나가신 것은,
세상에 오시어 인류라는 밭에 뿌려진 밀을 보러 오신 것이다.
제자들이 밀 이삭을 뜯어 먹기 시작하자, 바리사이들이 예수님께,
“보십시오. 선생님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2절) 한다.
예수께서는 다윗과 아히멜렉의 이야기로 해결하신다.
다윗과 그 일행이 허기로 지쳐서 아히멜렉에게 먹을 것을 부탁한다.
아히멜렉은 여자들을 멀리했는지 묻고는 사제들만이 먹을 수 있는 거룩한 빵을 주었다.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호세6,6)라는
말씀을 떠올린 아히멜렉은 그것이 더 낫다고 생각한 것이다.
하느님께서 즐겨 받으시는 희생 제물은 인간 구원이다.
우리의 구원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 안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재를 지킨다는 것은 재를 지킨 후 그것이 이웃사랑으로 실현될 때, 그 재가 완성되는 것이다.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완결되지 못한다면 재를 지키지 않은 것과 같다.
사람이 법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법이 사람을 위해서 있는 것이라면,
그 법은 사람을 위해서 지켜져야 한다, 재를 지킬 때는 이러한 마음으로 재를 지키고
그것은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완결시키도록 해야 한다.
형식을 채우지 못한 것이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다.
사람을 위할 줄 알고 나의 도움이 필요한 이웃에게 봉사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우선으로 해야 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하겠다.
김준수 아오스딩 신부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12,7)
우리 모두 공감하지만, 세상 살아오면서 많고 많은 서러움 중에서
참으로 서럽고 서러운 것은 배고픈 서러움과 집 없는 서러움이라고 하더군요.
우리 모두 한때 그런 세상을 살아왔습니다.
이 모든 서러움에서 벗어난 것은 다 우리 부모님 세대의 희생과 교육 덕분이 아닐까, 싶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의 제자들은 배가 고파서
안식일에 해서는 아니 되는 밀 이삭을 뜯어 먹습니다. (12,1~8)
어쩌면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먹을 것 제대로 먹지 못해,
그 서럽다는 배고픈 서러움을 겪어야 했나 봅니다.
물론 그런 제자들의 행동을 예수님께서 모르신 것이 아니라 알고 계셨음에도
저지하지 않으신 것은 율법 규정 보다 제자들의 배고픔에 대한 이해와 공감에 따른
자비의 이해이며 배려였으리라 봅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율법을 하찮게 여기신 것은 분명 아니셨지만,
그분은 율법 규정 그 자체보다는 율법의 올바른 의미를 깨닫도록 가르치셨고,
하느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기 위하여,
종종 율법주의자들을 꾸짖고 그들과 대립하셨던 것입니다.
아무튼 예수님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밀 이삭을 뜯어 먹은 것을 가지고 바리사이들이 비난하였습니다.
위선적이고 율법주의적 편협한 시선과 처신에 직면해서
예수님은 당신의 율법과 안식일 법에 관한 생각을 피력할 기회를 맞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 대상은 단지 바리사이만이 아닌 제자들과 우리 모두를 향한 것이며,
이를 계기로 예수님의 깊은 속내를 엿볼 수 있습니다.
호세아 예언자의 말을 빌려,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너희가 알았더라면, 죄 없는 이들을 단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사실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12,7;호세 6,6참조)하고 선포하신 것입니다.
지금껏 바리사이들이 경험하지 못한 하느님 자비의 모습을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언행을 통해 공개적으로 보여주고자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생긴 것은 아니다.”(마르2,7)라는 말씀은
안식일을 종교와 인생의 목적과 같이 절대화하지 말라는 가르침입니다.
율법과 안식일이 아니라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과 하느님의 자비가 더 중요합니다.
사람들의 시선이 하느님에게로 향하고 하느님의 마음으로 살아간다면
율법의 의미가 완성된다는 뜻이라고 봅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안식일 규정 포함)으로 잃어버린 하느님을 다시 살려내신 분이십니다.
물론 예수님은 결코 율법을 폐지하지 않으시고,
다만 율법의 본뜻을 되살리려고 노력하신 분이십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본래의 의미와 의도는 퇴색되어 버렸고,
결국 형식주의와 율법주의가 모든 삶의 중심축으로 자리 잡게 되어 버린 것입니다.
이로 말미암아 오히려 율법과 안식일이
사람들이 하느님께 나아가는 것을 가로막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율법이란 장벽을 허물고 구멍을 뚫는 작업을 하셨는데
그분의 의도는 내가 원하는 것은 자비이지 제사가 아니다, 는 말씀에 온전히 포함되어 있습니다.
결국 율법의 규정을 글자 그대로 실천하는 것이 종교의 본질이 아니라
구원을 누리는 것이 종교의 본질이라는 것입니다.
당대 유다 지도자들의 하느님에 대한 의식과 태도는 거룩함에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하느님에 관한 새로운 비전과 통찰을 보여주셨는데 그것이 곧 자비입니다.
하느님이 ‘자비로운 분이시냐’, ‘거룩하신 분이시냐’는 논쟁이 아니라
우리가 하느님에 관한 어떤 이미지를 갖고 사느냐에 따라
신앙인과 공동체의 생활 태도와 행동이 출발한다는 사실입니다.
즉, 거룩함은 비판적, 회의적인 태도이며
이는 결국 분리- 분열- 차별- 적대로 드러나며
이는 곧 자기 보존이 최우선입니다.
이에 반해 자비함은 긍정적, 낙관적인 삶의 태도로
타인과의 일치- 친교- 존경- 환대를 우선시하며
타인에 대한 지지와 나눔이 삶의 중심이 됩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사람들이 놓쳐버린 하느님에 관한
새로운 비전과 통찰로 살아가도록 자비를 강조하셨던 것입니다.
양자택일이 아니라 어떻게 조화와 균형을 유지하느냐가 우리에게 맡겨진 몫이지만
어떤 면에서 익숙한 거룩함보다 익숙하지 않은 자비를 지금은 살아야 하는 때라는 점입니다.
더 중요한 게 있고 덜 중요한 것인지 선택이 아니라
예수님이 오시기 전까지 거룩함이 전부인 것처럼 살았다면,
예수님은 자비를 더 중요시하고 자비를 우선해서 살기를 바라신 것입니다.
자 이제 여러분은 어떤 태도로 신앙생활을 하시기 원하십니까?
“남에게 어떠한 행동을 했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행복도 결정된다.
남에게 행복을 주려고 하였다면 그만큼 자신에게도 행복이 오게 된다.” (플라톤)
가장 중요한 사람은 뒷전이고 일이나 구조에 함몰되어 있는 것은 아닌지?!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본인 스스로를 어떻게 평가하고 계시는지요?
이 평가가 성숙하고 균형 잡힌 인생을 살아가기 위해서
참으로 중요한 과제라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자기 자신을 너무 비하하는 것을 넘어 학대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틈만 나면 스스로를 하찮게 여기고 자책하고 업신여깁니다.
이는 겸손의 덕도 아니고 심각한 병리 증세입니다.
반대로 스스로를 너무 과대평가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입만 열면 자화자찬입니다.
틈만 나면 자신의 성공스토리를 끝도 없이 늘어놓으니 주변 사람들이 정말이지 피곤합니다.
더 심각한 증세가 있으니 과대망상 증세입니다.
존재 자체로 우리 사회를 힘들게 하는 사이비 교주들, 정신 나간 정치인들이 바로 그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지닌 특기가 있는데, 상대방을 얕보기, 꼬투리 잡기,
하대하고 무시하기, 잘난체하기 등입니다.
오늘 안식일 규정을 들이대며 예수님을 공격하는 바리사이들이
가장 대표적인 부류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의 머릿속은 정말이지 별것 아닌 규칙,
지나가는 개도 웃을 안식일 규정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들은 언제나 눈에 불을 켜고 누가 안식일 규정을 어기는가? 살펴보고 있었습니다.
누군가가 안식일 규정을 어기는 것이 눈에 띄면 가차 없이 비판하고 칼날을 들이댔습니다.
예수님 시대 유다 사회 안에 바리사이라는 특별한 부류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바리사이’라는 말은 ‘분리되다’라는 의미를 지녔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을 죄인들로부터 분리되고 차별화된 정통 신앙인이라는 자부심이 대단했습니다.
원래 바리사이들은 모세오경만을 유일무이한 계시라고 강조하는 사제들에 반대하던
평신도 개혁자들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들은 모세오경뿐만 아니라 예언서들과 시편 등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모든 삶을 통해 하느님께 영광과 제사를 드리려 했습니다.
이토록 좋은 의도와는 달리 그들의 신앙생활은 점점 복잡해지고 부담스럽게 되었습니다.
철저하고 빈틈없는 신앙생활을 추구하던 그들이었기에
613개나 되는 율법 조항에 대한 준수뿐만 아니라
구전을 통해 내려오던 실천 사항까지 세밀하게 지키려고 애를 썼습니다.
하느님 사랑에 대한 순수한 응답으로 시작되었던 그들의 신앙 행위는
점점 반드시 해치워야만 하는 의무 사항이자 무거운 짐, 족쇄로 전락해 버렸습니다.
자연히 그들의 신앙은 정신보다 제사 행위 자체에 치중하게 되었습니다.
내면보다는 겉치레에 더 신경을 쓰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유달리 강조한 것 규정 가운데 정말 웃기는 규정들이 있었는데,
정결 예식이요, 안식일 규정이었습니다.
외출했다가 귀가했을 때 물이 떨어져서 손이나 발을 못 씻을 수도 있고 씻을 수도 있는데,
씻지 않으면 완전 중죄인 취급을 했습니다.
안식일만 되면 누가 규정을 어기나 눈에 불을 켜고 서로를 바라봤습니다.
안식일에는 배가 고파 죽을 지경이어도 요리조차 마음대로 할 수 없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제자들이 너무 배가 고파서 밀 이삭 몇 가닥 뜯어먹는 것조차
용납을 못하고 태클을 걸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들의 시선이 무서워서 누군가 죽어가도 안식일에는 치료행위조차 함부로 할 수 없었습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종교의 힘을 통한 영적 학대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일종의 종교 중독으로 인한 이상행동이라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의 마음을 꿰뚫고 계시던 예수님, 부자연스럽고, 비인간적인 삶의 방식,
이중적이고 위선적인 행동 양식을 죽어도 참아내지 못하셨던 예수님이셨습니다.
바리사이들이 눈에 불을 켜고 바라 보고 있는 중인데도 불구하고
법 같지도 않은 법, 안식일 규정을 사정없이 짓뭉개십니다.
보란 듯이 안식일 규정을 산산조각 내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묵상하면서
오늘 우리 발밑을 내려다봅니다.
우리 역시 제도나 규정의 틀에 사로잡혀
이웃을 단죄하거나 고통으로 몰고 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봅니다.
가장 중요한 사람은 뒷전이고 일이나 구조에 함몰되어 있는 것은 아닌지 성찰해 봅니다.
주인의 삶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주인의 삶.
주인의 삶은 종의 삶과 다릅니다.
종의 삶을 생각할 때 즉시 떠오르는 것이 억지로 하는 것입니다.
하고 싶지 않은데도 주인이 하라니까 억지로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내 좋을 대로 하는 것이 주인의 삶일까요?
퍼뜩 생각해도 다시 말해서 깊이 생각지 않아도 그것은 아닐 것입니다.
‘자기 좋을 대로’란 우선 다른 사람을 상관하지 않는 자기중심성입니다.
이런 삶으로는 행위의 주인이 될는지 모르지만, 행복의 주인은 못될 것입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살면 행복하겠습니까?
이렇게 살면, 다른 사람들이 그를 존중할 것이며 그렇게 살도록 내버려두겠습니까?
당장 태클이 들어갈 것이고 결국 자기 좋을 대로 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니 자기 좋을 대로 사는 것은, 실제로 자기가 주인인 삶이 아니고,
행복의 주인이 되는 삶은 더더욱 아닙니다.
주인의 삶은 휘둘리는 삶이 아니라 다스릴 줄 아는 삶입니다.
그러니 주인의 삶은 좋을 대로 산다며 실은 욕망에 휘둘리는,
그런 삶이 아니라 욕망을 다스릴 줄 아는 삶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프란치스코는 이렇게 권고한 바 있습니다.
“죄를 지을 때나 해를 입을 때 자주 원수나 이웃을 탓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이래서는 안 됩니다.
사람은 육체를 통해서 죄를 짓게 되는데
누구나 그 원수, 즉 육체를 다스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자기의 지배 아래 넘겨진 그러한 원수를 항상 손아귀에 집어넣고
그에게서 슬기롭게 자기 자신을 지키는 그런 종은 복됩니다.”
같은 맥락에서 주인의 삶은 스스로 옳게 식별하고 선택할 줄 아는 삶입니다.
식별의 기준은 늘 자기의 행복이고,
이 행복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 말 것인가?
무엇을 소유할 것인가, 포기할 것인가?
누구를 따를 것인가, 말 것인가?
심지어 하느님을 믿을 것인가, 말 것인가?
스스로 판단하고 선택하는 삶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불교의 유명한 가르침이 있습니다.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여버리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여버려라!
부처가 나를 집착하게 하면 부처를 죽여버리고,
불경이 나를 집착하게 하면 불경을 태워버려라!
사실 진정한 나는 우주의 중심입니다.
내가 없으면 우주도 없는 것이고,
내가 없으면 심지어 하느님도 아니 계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거듭 말하지만, 나의 행복을 위해
무엇이 이롭고,
무엇이 필요하고,
무엇이 우선인지 스스로 성숙하게 식별하고 선택할 줄 아는 것이 주인의 삶이고,
“사람의 아들이 안식일의 주인이다.”라는 말씀의 뜻임을 묵상하는 오늘 우리입니다.
끝으로 프란치스코의 관련 글을 다시 덧붙입니다.
“모든 형제들은 어디에 있든지 간에 필요성이 생길 때마다
사람이 먹을 수 있는 음식은 다 먹어도 됩니다. 마찬가지로
분명한 필요성이 있을 때는 주님께서 형제들에게 베풀어주시는 은총에 따라,
‘필요성 앞에는 법이 없기’ 때문에, 모든 형제들은 필요한 것을 쓸 수 있습니다.”
법을 先行하는 법 제정 정신
박상대 마르코 신부
그리스도교의 모태가 되는 유대교의 핵심은 야훼 하느님께 대한 唯一神觀이다.
이는 유대인들이 다신론적인 근동 아시아 세계 안에서
오랜 시간과 노력을 거쳐 얻어낸 그들 신앙의 핵심이다.
신앙은 무릇 내용(contents)만으로 이루어지지 않고 행위(action)를 수반해야 하듯이
유일신 하느님에 대한 유대교 신앙의 내용은 그분이 내려주신 율법(토라, 모세오경)이며,
신앙의 행위는 이 율법을 준수하는 것이다.
따라서 율법을 실제로 지킨다는 것이 곧 그들 신앙의 전부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문제는 하느님과 동일시되는 율법을 준수하는데 있어서
이를 어떻게 관리하고 해석하느냐는 것이다.
결국 유대교 안으로 율법의 관리와 해석을 담당하는 그룹이 등장하게 되는데
이들이 바로 랍비(선생)들인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이다.
이 선생들이 율법을 관리하고 해석하면서 ‘시행세칙’을 만들었으니,
이것이 바로 ≪탈무드(Tamud)≫이다.
탈무드는 유대교 율법의 시행세칙과도 같은 것으로서
율법의 해설, 口傳(미슈나), 전통적 관습, 축제, 민간전승 등을 총망라한 책으로서
유대인의 정신적, 문화적인 유산으로 평가된다.
탈무드는 약 1만2천 권의 엄청난 규모로서 유대인들 지혜의 총집합이라고 말할 수 있으며,
지금도 이 책은 계속 기록되고 있다.
어제 복음에서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이는 사람은 다 나에게로 오너라. 내가 편히 쉬게 하리라.”고 하신
예수께서 오늘은 율법과 그 기본적인 정신에 관하여 다시 한번 들려주신다.
마태오복음사가는 原典이 되는 마르코의 같은 대목(2,23-28)을 참조하면서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은 아니다.”(27절)는 말을 삭제하였다.
그 이유는 자칫 이 부분이 안식일 법을 폐기하려는 의도로 착각될 수 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마태오는 이미 예수께서 율법이나 예언서의 말씀을 없애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마태 5,17)는 자신의 독자적인 편집을 통하여 율법의 완성을 강조한 바 있다.
오늘 복음에서 마태오는
‘안식일’과 ‘제자들이 배고픔을 달래기 위해 밀 이삭을 잘라먹는 행위’를 놓고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예수님의 대립상황을 묘사하고 있다.(1-2절)
율법은 ‘이웃집 밭에 서 있는 곡식 이삭을 손으로 잘라먹는 것은 괜찮지만,
곡식에 낫을 대면 안 된다.’(신명 23,26)고 규정하고 있다.
따라서 제자들의 행위는 범법행위가 아니지만,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이를 안식일법과 관련짓고 있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다윗과 그 일행의 행동(1사무 21,1-10)과 아론과 그의 아들들,
즉 사제들에 대한 안식일의 예외규정(레위 24,9)을 들어, 그들의 생각을 흩어버린다.(3-5절)
오늘 복음의 요점은 사람의 아들이 바로 법의 주인이시라는 것이다.(8절)
여기서 사람의 아들은 예수님을 지칭한다.
그분은 메시아의 상징인 다윗이나 대사제인 아론보다 크신 분이시며,
유대교 신앙의 요람인 예루살렘 聖殿보다 크신 분이시며, 율법의 주인이시다.
어떤 법이든 그 법이 제정되기까지의 정신이 있다.
이 말은 법을 제정하는 정신이 제정된 법을 先行한다는 말과 같다.
오늘 복음에서
“내가 바라는 것은, 나에게 동물을 잡아 바치는 제사가 아니라
이웃에게 베푸는 자선이다.”(호세 6,6; 마태 9,13)는 구약의 인용이
바로 율법의 정신을 말하는 것이다.
여기서 祭祀는 곧 규정된 율법이요, 慈善은 이 율법을 제정한 정신임을 알 수 있다.
결국 좋은 양심과 도덕이 법을 앞질러 간다는 말씀이다.
[출처] ‘벨라수녀 영화방’ : 오늘의 말씀 묵상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