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기다림
“야훼의 영광이 시나이 산위에 머물러 있어 구름이 엿 세 동안 산을 뒤덮고 있었다. 야훼께서 이레째 되는 날 그 구름 속에서 모세를 부르셨다(출애 24:16). The cloud covered the mountain for six days, and on the seventh day the Lord called to Moses from the cloud.”
모세는 하느님을 만나기 위해 시나이 산위에서 6일간을 기다리다 7일째 하느님이 모세를 부르는 소리를 듣습니다. 이것이 이집트에서 탈출하여 가나안땅으로 가는 도중에 시나이산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시나이산에서의 6일간은 하느님을 기다리는 시간입니다. 6일간 하느님을 생각하면서 지내고 7일째 하느님의 음성을 듣는 시간입니다. 하느님을 기다리는 시간을 지니고 사십니까? 하느님을 기다리는데 한 시간도 할애하지 못하는 우리입니다. 우리의 생명과 즉결된 문제라고 생각한다면 한 시간이 무엇입니까? 6일도 짧다고 생각하는 것이 당연함으로 받아들일 것입니다. 시나이산에서의 하느님을 기다리는 모세의 기다림처럼 하느님을 기다리는 우리의 인생이고자 합니다.
하느님이 계신 산에 올라가 예배를 올린 장로 칠십 명과 아론, 나답, 아비후와 모세 74명은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선발된 사람입니다. 이들은 하느님을 만나뵈오며 먹고 마셨습니다(출애 24:1,11). 우리들이 그 자리에 함께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말씀을 읽게 됩니다. 모세는 제물로 수송아지를 바치고 그 피를 제단에 뿌리고 백성에게 뿌려주며 “이것은 야훼께서 너희와 계약을 맺으시는 피다. 그리고 이 모든 말씀은 계약의 조문이다.”하고 선언하셨습니다(출애 24:8). 피는 생명과 연결되는 상징입니다. 하느님과의 관계는 생명과 연결되기에 피로 조약을 맺습니다. 의형제를 맺을 때 피를 내서 서로 손바닥에 넣고 악수하는 어린 시절의 약속이 떠오릅니다. 예배를 바친 이스라엘의 지도자 74명은 시나이산 입구로 가서 이스라엘의 하느님을 뵈었습니다(출애 24:10). 그리고 먹고 마셨습니다. 성공회의 감사성찬례는 말씀과 계약의 피를 먹고 마시며 하느님을 뵙는 시간입니다. 하느님을 뵙는 시간이니 얼마나 기쁜 시간입니까? 더구나 하느님과 함께 먹고 마신다니 인간이 누릴 최고의 순간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이런 감사성찬례가 너무 기뻐서 눈물이 흐른다는 신도의 기쁨을 함께 나눈 기억이 납니다.
산에 오르는 그 모세의 발걸음이 당차 보였을 것입니다. 힘 있는 발걸음으로 산을 향한 모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저 아래서 기다리고 있고 그들의 지도자들이 예배를 바치는 동안에 모세는 산에 오르자마자 하느님을 뵐 것이라고 여겼을 것입니다. 모세가 하느님의 훈계와 계명을 새긴 돌판을 받고자 하느님이 계신 산으로 여호수아만 데리고 올라가고, 모세는 자신이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고 앉아 있는 이들의 지도력을 아론과 후르에게 주고 산에 오르자 구름이 덮습니다(출애 24:12-15). 이스라엘 백성들의 눈에는 야훼의 영광이 마치 산봉우리를 태우는 불처럼 보였습니다. 6일간 구름에 덮여 있다가 7일째 하느님이 모세를 구름 속에서 부르셨습니다. 하느님이 계신 산에 올라 하느님을 뵙고 하느님이 주시는 말씀을 받고 시나이산에서 내려와 백성들에게 그 말씀을 전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빨리 가야 한다는 것이 모세의 계획이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거대한 역사의 변곡점이 되는 순간입니다. 모세와 하느님이 연결되는 역사적인 순간을 아마 여호수아는 다 목격했을 것입니다. 하느님을 향하는 도중에 지칠 때도 있습니다. 그때 마음을 새롭게 하는 하느님의 음성을 듣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갈 길이 머니 몸과 마음을 추슬러 영적으로 재무장하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재무장하는 시간을 지니지 못하면 길 가는 도중에 쓰러질 수 있습니다. 한 사람인 모세로 인하여 많은 사람이 하느님의 은총을 받게 됩니다. 모세를 조수인 여호수아는 그 조수의 역할에 충실하여 모세의 후계자가 됩니다.
하느님을 만날 마음의 준비를 하루 정도는 해야겠지 라며 도착한 날에 결국엔 하느님을 뵙지 못한 것을 스스로 위로했던 모세였습니다. 그래서 다음 날은 만날 것이라고 생각하며 잠을 잤을 모세입니다. 삼사일이 지나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영적인 지도력이 사라진 모세라는 말을 하고 바로 아래에 있는 지도자들이 모세의 지도력을 의심하는 소리들이 들리는 듯했습니다. 사오일이 지나면서 기다리다 지친 그의 귀에 가장 가까웠던 사람들이 배신하는 말들까지도 귀에 들려왔을 것입니다. 환청이 아니고 생각도 아니고 실제로 일어난 듯했습니다. ‘하느님이 자신을 버리셨나.’라는 생각까지 들어 자책하고 끝난 인생이라고 여겨 극단적인 생각까지 하였을 모세입니다. 출애굽의 여정이 길어질수록 수심이 깊어지고 강바람이 세차고 물길이 거세어지기에 배신과 파당과 미움은 일상이 되는 듯했습니다. 그러는 시간에 하느님은 모세의 위에서, 모세의 옆에서, 모세의 뒤에서, 모세의 앞에서 도와주십니다. 모세를 도우시는 하느님이 우리를 도우시고 계심을 믿는 신앙으로 아픔과 위험과 어려움을 이겨 나아가야 합니다. 하느님은 자신을 믿는 사람을 꼭 도와주시는 분이십니다.
모세 스스로에게도 어리석은 실수가 이어지는 듯했고 확신이 의심이 되기도 했습니다. 작은 잘못된 판단을 작게 보지 않고 큰 무너짐으로 보아 과도하게 자신을 질책하는 모습까지도 보였던 모세입니다. 금방 뵐 줄 알았던 하느님이라는 생각이 사라지고 기다림으로 버티는 전략으로 수정한 모세의 시간이었습니다. 6일간의 하느님을 기다리는 시간이 자신에게 집중하는 인내의 시간입니다. 6일간의 인내의 시간을 가진 모세가 드디어 하느님을 뵙게 됩니다. 기다림과 인내의 시간은 하느님의 음성을 들을 때 필수요소입니다. 믿음 좋은 신도는 잘 기다리는 사람이고 인내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앞이 보이지 않는 길을 지금까지 이끌어 주신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이 곧 나타나 앞길을 헤쳐나갈 지혜를 주실 것이라는 믿음이 어느 순간 흔들려 무너질 듯한 순간이 오기도 합니다. 자신이 살아온 길을 6일간 집중하여 본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과정입니다. 수도원에서의 7일 피정은 하느님을 뵙는 것이 목적일 때 필수적입니다. 수도원에 들어가 7일간의 피정일정으로 하느님을 뵙는다는 것은 모세의 심정으로 들어가는 좋은 기회라고 여겨집니다. 사람들이 살 수 없는 척박한 땅인 시나이산 입구의 광야에 카타리나 수도원이 있습니다. 광야에서 하느님을 뵐 수 있는 가장 적합한 곳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카타리나 수도원이 시나이산 입구에 있다는 것은 하느님의 음성을 듣고자 하는 신도들에게는 광야를 체험하는 참으로 좋은 기다림의 장소라고 보여집니다. 가장 어려운 사람들이 사는 곳만 찾아가는 성공회 신부가 계십니다. 안착하여 안정적인 삶을 살 수 있음에도 자신을 경계하여 삶의 맨 가장자리에 사는 사람들을 찾아가는 신부입니다. 제가 그 신부를 만나면 그 신부의 순수한 마음을 세상의 더러움으로 오염시키는 게 아닐까하는 생각까지 들게 만드는 신부이십니다. 그 신부를 오랫동안 제가 뵙지 못하고 사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교회에서조차 받아들여지지 않고 서럽게 사는 동성애자들에게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만나는 자캐오신부와 이태원 참사로 젊은 영혼들을 먼저 보낸 부모들의 마음을 예수가 우시는 마음으로 위로해주시는 레오나르도신부를 안다는 것만 해도 큰 기쁨입니다. 긴 기다림으로 이미 훈련된 신부들이기에 늘 하느님의 음성을 듣는 사제의 삶을 봅니다.
시나이산이 종착지가 아니라 경유지라면 종착지에서 해야 할 일을 하지 않고 경유지에서 해야 할 일을 해야 합니다. 지금 자신이 있는 곳이 정착지가 아니라 지나치는 경유지라면 간단하고 단순한 일을 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을 종착역으로 보지 않고 간이역으로 보는 것입니다. 간이역에서는 짧은 시간이 소요되는 한계시간을 지닙니다. 성공회는 천국을 종착역으로 보고 이 세상을 간이역으로 보고 살아갑니다. 이동하는 시간이기에 몸을 가볍게 하고 이동하기에 적합하게 민첩한 몸을 만듭니다. 말씀과 기도로 몸을 민첩하게 만들어 성령의 지시를 따라 단순하게 사는 것입니다. 경유지로 사는 사람들을 동료로 맞이하고 환대의 마음으로 만나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지니고 만나는 것입니다. 6일간의 기다림을 버틴 사람은 미지근하게 살지 않고 하느님을 향한 뜨거움으로 살기에 늘 하느님을 뵙는 은총가운데 삽니다. 또한 좋은 일은 자신에게만 일어나야 하고 나쁜 일이 일어나는 사람들을 ‘나 몰라라.’ 하는 질투가 만연한 시대에 질투없이 사는 신부들을 보면 참으로 기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가져야 할 삶의 덕목으로 사는 성공회 신부는 질투없이 사는 삶을 가르쳐주십니다. 아직은 온전하진 못해 미숙한 점도 있습니다만.
세상이 어떻게 생겼는지를 가르치는 걷는 교회는 우리의 발과 마음이 어디로 향해야 하는지를 깨닫게 해 줍니다. 세상이 무엇으로 만들어졌고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보게 하는 하느님의 마음을 신부의 움직임을 통해 세상을 보게 합니다. 하느님의 마음으로 세상과 소통하는 하느님의 언어를 사용할 줄 아는 신부의 말씀을 듣고자 사람들이 귀를 기울입니다. 걷고 또 걷는 단순한 훈련을 사람들은 힘들어합니다. 걷기를 반복함으로써 가장 어려운 사람을 만나는 사제의 삶은 하느님의 마음에서 벗어나지 않게 하여 사람들을 걷는 훈련에 참여하게 하시는 신부입니다. 세상의 승리자들이 아니라 패배자들의 연합체를 구성한 모세처럼 성공회 신부의 삶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잘 볼 수 없는 진리와 거룩함과 아름다움과 경외감을 성공회 신부를 통해 보게 해 주셔서 하느님께 감사기도를 바칩니다. 이미 천국이라는 정착지의 삶의 기쁨을 지닌 성공회 신부는 경유지를 종착지라 오해하는 사람들에게 기쁨을 선사해 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