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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소멸된다고 합니다. 수십 년 동안 그렇게 들어오셨습니다. 그런데 금강경 어디에도 이 경전을 읽으면 업장이 사라진다는 말씀은 없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부처님은 이 경전 안에서 훨씬 더 놀라운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은 그 말씀을 알고 계십니까? 혹시 이런 적 있으십니까? 새벽 4시 알람도 울리기 전에 눈이 떠졌습니다. 천장을 바라보는데 아무 생각이 없는 것 같으면서도 마음이 무겁습니다. 옆에 누워 있던 사람이 먼저 가신 뒤로는 이 새벽이 유독 깁니다. 일어나 부엌에서 물 한 잔을 따르고 불단 앞에 앉아 금강경을 펼칩니다. 입술이 움직이고 목탁을 두드리지만. 오늘따라 글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자식에게 전화 한 통 하고 싶은데 이 시간에 깨울까 봐 전화기를 내려놓습니다. 손주 사진을 보다가 문득 이 아이가 커서 절에 올까 싶어지고 그 생각이 또 마음을 무겁게 합니다. 수십 년 부처님을 믿어왔는데 여전히 새벽이 두려운 분 그 새벽을 견디면서도 오늘 여기까지 오신 분 그런데 부처님은 금강경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경전의 내 구절 계속만 받아 지니고.
다른 사람에게 설해주면 3천대천 세계를 칠보로 가득 채워 무시한 것보다 그 복덕이 크다고 하셨습니다.
삼천대천 세계입니다.
온 우주를 보석으로 채워도 피할 수 없는 공덕이 단 네 구절에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 내 구절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 내 구절이 정확히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왜 하필 부처님이 칠보 보시보다 크다 하셨는지
그 말씀이 2600년이 지난 오늘 아침 여러분의 새벽 5분과 어떻게 만나게 되는지 그리고 그 5분이 어떻게 하루를 바꾸고 하루가 어떻게 업장을 녹여내는지 혹시 지금 이 순간 부처님의 그 말씀을 내 삶에 제대로 가져오고 싶다 하시는 분 계십니까?
그렇다면 지금 댓글에
나무석가 모니불
이라고 발언해 주십시오. 여러분의 그 작은 발언이 오늘 이 말씀을 마음에 새기는 첫걸음이 될 것입니다.
자 그러면 함께 들어가 보겠습니다. 2600년 전 인도 북쪽의 코살라국이라는 나라가 있었습니다. 그 나라의 수도를 사위성이라 불렀습니다. 성 밖으로 조금 걸어 나가면 숲이 하나 있었습니다. 기원정사 부처님이 가장 오래 머무셨던 곳입니다.
깊은 나무들 사이로 아침 햇살이 비스듬히 들어오는 그런 숲이었습니다.
새 소리가 들렸을 것이고 바람이 잎을 흔들었을 것입니다.
그 수반의 부처님이 계셨습니다.
어느 날 아침이었습니다.
부처님이 가사를 여미셨습니다.
발우를 드셨습니다.
발우라는 것은 신인들이 탁발할 때 쓰는 그릇입니다.
부처님이 그 발우를 들고 사위성 안으로 들어가셨습니다.
집집마다 돌아다니시며 밥을 얻으셨습니다. 차례대로 탁발을 하셨습니다.
다시 기원정사로 돌아오셨습니다.
공양을 드셨습니다.
가사와 발우를 정리하셨습니다.
발을 씻으셨습니다.
자리를 펴시고 앉으셨습니다.
여기서 한번 멈춰 보겠습니다.
지금 이 장면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이것이 금강경의 첫 장면입니다.
5149자로 이루어진 동아시아에서 가장 많이 읽힌 경전의 시작이 이것입니다.
설법이 아닙니다.
기적이 아닙니다.
하늘에서 꽃비가 내린 것도 아닙니다.
밥을 드시고 발을 씻으시고 앉으신 것입니다.
그것이 전부입니다.
보통의 경전은 다르게 시작합니다. 부처님이 큰 법회를 여시거나 빛을 놓으시거나 하늘과 땅이 진동하는 것으로 시작하는 경전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금강경은 밥을 드시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이것을 2600년 넘게 수많은 스님들이 주목했습니다.
왜 하필 밥인가?
왜 하필 발을 씻으시는 장면인가?
부처님은 그날 아침 아무런 특별한 일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깨달음을 얻으신 분이 우주의 진리를 꿰뚫으신 분이 평범한 아침을 보내셨습니다.
밥을 얻으러 마을에 가셨습니다. 돌아오셔서 드셨습니다.
발을 씻으셨습니다.
앉으셨습니다.
그 장면을 1250명의 비구가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그 중에 수보리라는 제자가 있었습니다. 수보리는 부처님의 10대에 제자 가운데 한 분입니다. 혜공제일 그러니까 공이 이치를 가장 깊이 깨달은 분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날 수보리가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오른쪽 어깨에 옷을 벗겨 드러내고 오른 무릎을 땅에 대고 합장했습니다.
그리고 부처님께 여쭈었습니다.
세존이시여 참으로 드문 일이십니다. 수보리는 그 평범한 아침에서 드문 것을 보았습니다. 부처님이 밥을 드시고 발을 씻으시는 그 장면에서 무언가를 느꼈던 것입니다. 어쩌면 수보리는 그 평범한 자체가 가르침이라는 것을 알아차린 것인지도 모릅니다.
수보리가 물었습니다.
선남자와 선여인이 바른 깨달음의 마음을 냈다면 마음을 어디에 머물러야 하며 그 마음을 어떻게 다스려야 합니까?
이 질문을 쉬운 말로 바꿔 보겠습니다. 부처님 저는 좋은 마음을 내고 싶습니다. 바른 길을 가고 싶습니다. 그런데 마음이 자꾸 흔들립니다. 이 마음을 어디에 두어야 합니까? 어떻게 하면 흔들리지 않을 수 있습니까?
이 질문이 금강경 전체의 시작입니다. 5149자의 모든 말씀이 이 질문 하나에 대한 답입니다.
여러분 이 질문이 낯설게 들리십니까?
아마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수보리의 이 질문은 어쩌면 여러분이 수십 년 동안 가슴에 품고 계셨던 질문과 같은 것인지도 모릅니다.
새벽의 금강경을 펼쳐놓고도 마음이 흩어질 때 기도를 하면서도 잡념이 밀려올 때 절에서 돌아오는 길에 문을 거전해질 때 그때 여러분의 마음속에 올라오는 그 물음 이 마음을 어디에 두어야 합니까?
어떻게 하면 편안해질 수 있습니까?
수보리가 2600년 전에 여쭈었던 바로 그 질문을 여러분도 지금 알고 계신 것입니다. 부처님이 답하셨습니다.
훌륭하다. 수보리여
내 말과 같다.
이제 잘 들어라.
이 잘 들어라라는 말씀에서 금 강경의 본문이 열립니다.
부처님이 수보리에게 그리고 그 자리에 앉아 있던 1250명의 비구에게
그리고 2600년 뒤 이 새벽에 이 말씀을 듣고 계시는 여러분에게
하시려는 이야기가 시작된 것입니다.
부처님이 가장 먼저 말씀하신 것은 이것이었습니다.
보살은 이렇게 마음을 다스려야 한다. 알에서 태어난 것 태에서 태어난 것 습기에서 태어난 것 변화로 태어난 것 형상이 있는 것 형상이 없는 것 생각이 있는 것 생각이 없는 것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는 것까지.
이 모든 중생을 내가 다 열반에 들게 하겠다고 하라.
여기까지만 들으면 아 모든 중생을 구제하라는 말씀이구나 하고 생각하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부처님은 바로 다음에 놀라운 말씀을 이어가셨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헤아릴 수 없는 중생을 모두 재도했다 하더라도 실제로 재도된 중생은 없다.
이 말씀을 처음 들으시면 고개를 갸우뚱하실 수 있습니다. 중생을 다 구제하라고 하시고는 구제된 중생이 없다. 니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부처님이 그 이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왜냐? 왜냐하면 보살에게 나라는 상이 있으면 보살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라는 상
사람이라는 상
중생이라는 상
수명이라는 상이 있어도
보살이 아니다.
상이라는 것은 쉽게 말해서 고정된 생각입니다.
내가 있다는 생각
내가 누군가를 도왔다는 생각
도움을 받는 저 사람이 중생이라는 생각
이 생각들이 마음에 붙어 있으면
그것이 바로 집착입니다.
부처님은 그 집착을 내 가지로 나누어 말씀하셨습니다.
아성 인성 중생상 수자상
나라는 생각 남이라는 생각 중생이라는 생각 이 생명이 영원히 이어진다는 생각
이 네 가지 고정된 생각을 붙들고 있으면 아무리 좋은 일을 해도
진짜 자유로운 마음이 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여러분의 삶으로 가져와 보겠습니다. 절에 가서 보시를 하셨습니다. 쌀을 넣으셨습니다. 치주를 하셨습니다. 그런데 집에 돌아오시면서 이런 생각이 드실 때가 있지 않습니까? 내가 이만큼 했으니 부처님이 알아주실 거야. 내가 이만큼 넣었으니 우리 아들이 잘 되겠지. 내가 정성을 다했으니 건강이 좋아지겠지. 그 마음 나쁜 마음이 아닙니다. 당연한 마음입니다. 그런데 부처님은 바로 그 마음을 가리키시는 것입니다. 그 내가 했다는 생각 그 내가 이만큼 했으니라는 기대. 그것이 아상입니다. 나라는 생각에 붙들려 있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그 부틀님에서 노연하라고 하십니다. 좋은 일을 하되 했다는 생각에 머물지 말라. 보시를 하되 보시한 나에게 집착하지 말라. 이것이 금강경의 첫 번째 가르침입니다. 이 가르침을 더 깊이 들어가 보겠습니다. 부처님이 다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보살은 어떤 법에도 머물지 말고 보시를 행해야 한다. 모양에 머물지 말고 소리 향기. 맛 감촉 생각에도 머물지 말아야 한다. 어디에도 머물지 않고 보시면 그 공덕은 헤아릴 수 없다. 여기서 부처님이 하시는 말씀은 아주 구체적입니다. 눈으로 보이는 것에 마음을 빼앗기지 말라. 귀로 들리는 것에 끌려가지 말라. 냄새 맛에 감축의 생각에 그 어디에도 마음을 묶어두지 말라.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말씀입니다. 응무수주의 생기심 마땅히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내라. 이 한마디가 금강경의 신장입니다. 5149자 전체를 꿰뚫는 핵심이 2 한 9절에 들어 있습니다. 이 말씀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하나의 이야기를 들려드리겠습니다. 중국 당나라 때의 일입니다. 남쪽 지방의 한 청년이 있었습니다. 이름은 예능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였습니다. 집이 가난했습니다. 어머니를 봉양하기 위해 날마다 나무를 해서 시장에 내다 팔았습니다. 글을 배우지 못했습니다. 경전을 읽을 줄 몰랐습니다. 어느 날 캐능이 나무를 팔고 돌아오는 길에 어떤 객점 앞을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안에서 누군가가 경전을 읽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해능이 걸음을 멈추었습니다. 그 소리를 듣고 있었습니다. 경전 읽는 소리가 어느 구절에 이르렀을 때 캐능의 마음에 무언가가 일어났습니다. 그 구 구절이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마땅히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내라. 응모소주의 생기심 그를 모르는 나무꾼 청년이 이 한마디를 듣고 마음이 활짝 열렸습니다. 그 뒤에는 오조홍인 스님을 찾아가 수행하여 마침내 육조 대사가 되었습니다. 중국 선불교 역사상 가장 위대한 스승 가운데 한 분이 되셨습니다. 그 시작이 금강경에 2 한 9절이었습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글을 모르는 나무꾼도 이 한마디의 마음이 열렸습니다. 그렇다면 수십 년 동안 부처님을 믿어 오시고 저래시고 금강경을 읽어 오신 여러분에게 이 한마디가 닿지 않을 리가 있겠습니까? 다만 너무 오래 읽어서 익숙해진 것뿐입니다. 너무 많이 들어서 그냥 지나친 것뿐입니다. 새벽 5분 그 자리가 부처님의 자리입니다. 여러분이 새벽에 눈을 뜨시고 불단 앞에 앉으시고 금강경을 펼치시는 그 자리 그 자리가 바로 2600년 전 기원 정사에서 부처님이 앉으셨던 그 자리와 같은 자리입니다. 부처님도 아침에 일어나셨습니다. 밥을 드셨습니다. 발을 씻으셨습니다. 자리에 앉으셨습니다. 여러분도 새벽에 일어나십니다. 물 한 잔 드십니다. 자리에 앉으십니다. 다른 것이 없습니다. 부처님의 하루와 여러분의 하루 사이에 2600년의 시간이 있지만 그 아침의 모습은 놀랍도록 닮아 있습니다. 그렇다면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내라는 것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이 말씀이 현실에서 어떤 뜻입니까? 법당에서 들을 때는 고개가 끄덕여지지만 집에 돌아오면 막연해지는 이 말씀을 오늘 아주 천천히 풀어보겠습니다. 먼저 머문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살펴봐야 합니다. 한자로는 주라고 합니다. 머무른다. 붙어있다. 집착한다는 뜻입니다. 우리 마음이 어디엔가 머문다는 것은 어떤 생각이나 감정이나 기대의 마음이 매달려서 놓지 못하는 것을 말합니다. 예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아침에 자식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목소리가 밝았습니다. 마음이 좋습니다. 그런데 오후에 다시 전화가 왔는데 이번에는 목소리가 어둡습니다. 무슨 일이 있는 것 같습니다. 전화를 끊고 나면 그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습니다. 밤이 되어도 생각이 납니다. 잠자리에 누워서도 자꾸 그 목소리가 떠오릅니다. 이것이 머무름입니다. 자식의 목소리라는 소리에 마음이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또 하나의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병원에서 검사를 받으셨습니다. 결과가 일주일 뒤에 나온다고 합니다. 그 일주일 동안 마음이 편하십니까? 아마 편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혹시 나쁜 결과가 나오면 어떡하지? 자식들한테 뭐라고 하지? 주술을 해야 하면 돈은 있나 이런 생각들이 줄줄이 이어집니다. 아직 결과가 나오지도 않았는데 마음은 이미 열가지 20가지 시나리오를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이것이 머무름입니다. 아직 오지 않은 미래에 마음이 매달려 있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이런 머무름을 이런 집착을 우리 고통의 뿌리라고 보셨습니다. 우리가 아프고 불안하고 두렵고 외로운 것은 사실 무언가의 마음이 머물러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자식에 대한 걱정에 머물러 있고 건강에 대한 불안에 머물러 있고 지나간 일에 대한 후회에 머물러 있고 오지 않은 일에 대한 두려움에 머물러 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이 하신 말씀이 이것입니다. 그 머무름에서 놓여나라 어디에도 머물지 말라? 그렇게 머물지 않는 마음에서 진짜 마음을 내라. 응 무소주의 생기심 그런데 이 말씀을 들으시면 아마 이런 의문이 드실 것입니다. 부처님 그것이 어떻게 가능합니까? 자식 걱정을 안 할 수가 있습니까? 건강 걱정을 안 할 수가 있습니까? 사람이 어떻게 아무데도 마음을 두지 않고 살 수 있습니까? 맞습니다. 당연한 질문입니다. 부처님도 그것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생각을 하지 말라. 고하신 것이 아닙니다. 머물지 말라. 고하신 것입니다. 이 차이가 매우 중요합니다. 자식 걱정이 떠오르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건강이 불안한 것도 당연한 일입니다. 그 생각이 떠오르는 것 자체가 문제가 아닙니다. 문제는 그 생각에 붙들려서 놓지 못하는 것입니다. 걱정이 한 번 지나가는 것은 괜찮습니다. 그런데 그 걱정을 붙잡고 치고 치우고 그러안고 밤새 굴리는 것 그것이 머무름입니다. 구름을 생각해 보십시오. 하늘의 구름이 지나갑니다. 구름이 지나가는 것은 자연입니다. 그런데 그 구름을 잡으려 하면 어떻게 됩니까? 잡을 수 없습니다. 잡으려 할수록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갑니다. 우리의 생각도 그렇습니다. 생각은 구름처럼 지나가는 것입니다. 지나가게 두면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구름을 붙잡습니다. 이 구름은 내 것이다. 이 걱정은 내가 해결해야 한다. 이 불안을 내가 안고 가야 한다. 이렇게 붙잡는 순간 마음은 무거워집니다. 부처님은 그 손을 펴라고 하십니다. 붙잡고 있는 그 손을 풀라고 하십니다. 구름이 지나가듯 생각이 지나가게 두되 그 한가운데서 맑은 마음을 내라. 그것이 음무소주의 생기심입니다. 이것이 쉬운 일입니까? 솔직히 쉬운 일이 아닙니다. 부처님의 제자들도 어려워했습니다. 1250명의 비구가 부처님 곁에서 날마다 수행했는데도 이 물음을 던져야 했습니다. 수보리조차 물어야 했습니다. 마음을 어디에 두어야 합니까? 그러니 여러분이 어렵게 느끼시는 것은 당연합니다. 수십 년 전에 다니셨어도 이 가르침이 막연하게 느껴지시는 것은 전혀 부끄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이 가르침을 말씀만으로 끝내지 않으셨습니다. 금강경 안에서 같은 말씀을 여러 번 서로 다른 방식으로 점점 더 깊이 설명해 나가셨습니다. 마치 어려운 길을 안내하시듯 한 걸음씩 한 걸음씩 함께 걸어 주셨습니다. 오늘 우리도 그 걸음을 따라가 보겠습니다. 부처님이 걸어 주신 그 길을 한 걸음씩 함께 가보겠습니다. 부처님이 수보리에게 물으셨습니다. 동쪽의 허공을 셀 수 있겠느냐 수보리가 답했습니다. 아닙니다. 부처님이 다시 물으셨습니다. 남쪽 서쪽 북쪽 위아래의 허공을 셀 수 있겠느냐? 수보리가 또 답했습니다. 아닙니다. 부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보살이 머무름 없이 보시한 공덕도 이와 같다. 허공을 셀 수 있겠느냐. 셀 수 없습니다. 허공은 끝이 없습니다. 잴 수 없고 재단할 수 없고 한계를 정할 수 없습니다. 부처님은 그 허공에 비유하셨습니다. 아무데도 머물지 않고 보시하는 사람의 공덕이 그 허공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보시라는 말을 넓게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보시는 절에 돈을 내는 것만이 아닙니다. 베푸는 모든 행위가 보수입니다. 밥을 지어주는 것도 보시입니다.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도 보시입니다. 웃어 주는 것도 보시입니다. 금강경을 읽으며 좋은 마음을 내는 것도 보시입니다. 부처님 말씀을 다른 사람에게 전해 주는 것도 보시입니다. 보시의 범위는 우리 삶의 모든 순간을 아우릅니다. 그런데 보시를 할 때 내가 했다는 생각이 남으면 그 보시는 크기가 정해져 버립니다. 만 원을 넣었으니 1만원만큼의 공덕 싸얀 가마를 시주했으니 쌀 한 가마만큼의 공덕 이렇게 헤아릴 수 있는 공덕이 됩니다. 그런데 내가 했다는 생각 없이 아무데도 머물지 않고 베풀면 그 공덕은 허공과 같아집니다. 셀 수 없게 됩니다. 끝이 없게 됩니다. 이것이 부처님이 말씀하신 무주상봇이 머물지 않는 보시입니다. 새벽 5분 그 자리가 부처님의 자리입니다. 여러분이 새벽에 금강경을 읽으실 때 그것도 보시입니다. 여러분 자신에게 주는 도시입니다. 여러분의 가족에게 여러분이 마음에 두고 계신 모든 분에게 전해지는 도시입니다. 그런데 이 5분을 내가 공덕을 쌓기 위해서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시면 그 공덕은 5분만큼의 크기가 됩니다. 오늘 하루가 잘 되게 해 주십시오라는 기대에 머물면 그 기대만큼의 크기의 가칩니다. 그러나 만약 이 5분을 그냥 아무 기대 없이 부처님의 말씀 앞에 조용히 앉아 있는 시간으로 보내신다면 어떻겠습니까?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아무 결과도 기대하지 않고 그냥 앉아서 읽는다면 부처님의 말씀이 내 입을 통해 흘러가게 두신다면 그때 그 5분은 허공과 같은 공덕이 됩니다. 셀 수 없는 공덕이 됩니다. 이것이 어려우시다면 하나의 장면을 떠올려 보십시오. 여러분의 어머니가 계셨습니다. 혹은 할머니가 계셨습니다. 그분이 손주를 안고 밥을 먹이시던 모습을 기억하십니까? 숟가락에 밥을 떠서 후후 불어서 아이 입에 넣어 주셨습니다. 그때 그 할머니가 내가 지금 공덕을 쌓고 있다 하고 생각하셨을까요? 이 밥 한 숟가락이 내 업장을 녹여줄 것이다라고 생각하셨을까요? 아닙니다. 그냥 주셨습니다. 아이가 맛있게 먹는 것을 보시며 웃으셨습니다. 그것뿐이었습니다. 그 마음이 우주상 보시입니다. 아무데도 머물지 않는 도시입니다. 내가 준다는 생각도 없고 받는 사람이 있다는 생각도 없고 무엇을 준다는 생각도 없이 그냥 주는 것 우리 어머니들이 평생 해오신 것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여러분은 이미 그 마음을 알고 계십니다. 자식을 위해 아무 조건 없이 기도하셨습니다. 손주를 위해 아무 데가 없이 빌어 오셨습니다. 절에 갈 때 자식들 몰래 시주를 하시면서도 그것을 공덕이라고. 계산하신 적이 있으십니까? 아마 없으실 것입니다. 그냥 하신 것입니다. 그 마음이 부처님이 말씀하신 마음입니다. 여러분은 이미 금강경의 가르침을 삶으로 실천해 오고 계셨던 것입니다. 다만 그것을 몰랐을 뿐입니다. 금강경에서 부처님이 수보리에게 하신 말씀 가운데 가장 자주 등장하는 구조가 있습니다. 그것은 무언가를 세우신 뒤에 바로 그것을 허무시는 것입니다. 세우고 허물고 또 세우고 또 허무십니다. 마치 모래성을 쌓아 놓고 직접 파도를 보내시는 것 같습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부처님이 수벌이에게 물으셨습니다. 몸의 형상으로 열애를 볼 수 있겠느냐 수보리가 답했습니다. 볼 수 없습니다. 열애께서 말씀하신 몸의 형상은 몸의 형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대화를 쉬운 말로 풀어보겠습니다. 부처님이 물으신 것입니다. 내 몸을 보고 부처를 알 수 있겠느냐? 수보리가 답한 것입니다. 아닙니다. 부처님의 그 몸은 진짜 부처가 아닙니다. 이 말씀이 왜 중요한지 하나의 장면을 떠올려 보시겠습니다. 법당에 가시면 부처님 상이 계십니다. 금색으로 빛나는 부처님 그 앞에서 저를 하십니다. 향을 올리십니다. 초불을 켰습니다. 두 손을 모으고 기도를 하십니다. 그때 여러분의 눈에 보이는 것은 부처님의 형상입니다. 그 형상이 부처님이라고 생각하십니다. 당연합니다. 그런데 부처님은 바로 그 생각을 가리키시며 말씀하셨습니다. 경상을 보고 나를 찾으려 하지 말라. 이것은 부처님 상 앞에서 절하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저를 하되 그 형상에 붙들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금으로 된 부처님 산이 부처가 아닙니다. 돌로 깎은 부처님 상이 부처가 아닙니다. 부처는 형상 너머에 있습니다. 경상을 통해 만나되 경상에 갇히지 말라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이것을 더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경상이 있는 것은 모두 허망하다. 모든 형상을 형상이 아니므로 본다면 그때 열애를 본 것이다. 이것이 금강경 사국의 가운데 첫 번째입니다. 범소유상 개시어망 약견재상비상 즉견열에 무릎 청상이 있는 것은 모두 다 허망하다. 만약 모든 형상을 형상 아닌 것으로 보면 곧 열애를 보리라. 이 구절을 처음 들으시면 어렵게 느껴지실 수 있습니다. 경상이 있는 것이 다 허망하다니 그러면 내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이 전부 가짜라는 말입니까? 내 몸도 가짜입니까? 내 자식도 가짜입니까 그런 뜻이 아닙니다. 부처님이 말씀하신 허망은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고정되어 있지 않다는 뜻입니다. 변한다는 뜻입니다. 영원하지 않다는 뜻입니다. 봄에 꽃이 핍니다. 아름답습니다. 그런데 그 꽃이 영원히 피어 있습니까? 아닙니다. 가을이 오면 집니다. 꽃이 핀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영원히 피어있을 것이라고 믿으면 그 믿음은 허망한 것입니다. 꽃은 있습니다. 다만 변할 뿐입니다. 우리 몸도 그렇습니다. 젊었을 때 내 몸이 있었습니다. 힘이 좋았습니다. 무릎이 아프지 않았습니다. 108배를 하고도 끄떡없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다릅니다. 몸이 변했습니다. 그 변함을 아프게 느끼시는 분이 많습니다. 옛날에 그 힘을 돌려받고 싶다는 마음 그 마음이 바로 변하는 것을 변하지 않는다고 붙잡으려는 집착입니다. 부처님은 그 붙잡음을 놓으라고 하십니다. 고치지는 슬퍼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고치지는 보면서도 그 지는 가운데 튀어남이 있다는 것을 보라는 것입니다. 경상 너머를 보라는 것입니다. 그래야 연애를 볼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여러분의 삶과 겹치는 지점이 있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먼저 가신 분을 그리워하시는 분이 계실 것입니다. 남편을 아내를 부모님을 혹은 형제를 먼저 보내신 분 그분의 얼굴이 아직 눈에 선합니다. 목소리가 아직 귀에 남아 있습니다. 빈자리가 너무 큽니다. 그 그리움이 가시지 않습니다. 부처님은 그 그리움을 부정하시지 않습니다. 그리워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마음입니다. 그러나 그 그리움에 매여서 빠져나오지 못하면 그것이 고통이 됩니다. 부처님이 말씀하신 것은 이것입니다. 그분의 형상에 머물지 마십시오. 그분이 남기고 가신 사랑에 머무십시오. 그분의 몸은 떠나셨지만 그분이 여러분에게 주신 것들은 형상이 아닙니다. 경상 너머에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범소유산 개시어마 형상이 있는 것은 모두 변합니다. 그러나 약견제상 비상 측견열에 그 형상 너머를 볼 수 있다면 거기에 진짜가 있습니다. 부처님이 말씀하신 열애가 거기에 있습니다. 새벽 5분 그 자리가 부처님의 자리입니다. 여러분이 새벽에 금강경을 읽으시며 문득 먼저 가신 분이 떠오르실 때 그 순간을 밀어내지 마십시오. 그렇다고 그 생각에 빠져들지도 마십시오. 그냥 떠오르게 두시고 그리고 다시 금강경에 다음 구절로 돌아오십시오. 그것이 머물지 않는 마음입니다. 그것이 음무소주의 생기심입니다. 그 5분 안에서 여러분은 이미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제 금강경의 두 번째 큰 가르침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부처님이 수보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삼천대천 세계를 칠보로 가득 채워 보시라는 공덕보다 이경에 네 구절이라도 받아 지니고 남에게 말해주는 공덕이 더 크다. 이 말씀이 금강경에 여러 번 등장합니다. 비슷한 구절이 6차례나 반복됩니다. 부처님이 같은 말씀을 6번이나 하셨습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한 번 말씀하시면 될 것을 왜 여섯 번이나 반복하셨을까요? 그것은 이 가르침이 그만큼 알아듣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한 번 들어서는 스쳐 지나갑니다. 두 번 들어도 머리로만 이해합니다. 세 번 네 번 들어야 비로소 마음 어딘가에 와닿기 시작합니다. 부처님도 그것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같은 말씀을 매번 조금씩 다른 비유와 다른 각도에서 되풀이해 주신 것입니다. 삼천대천세계라는 것은 온 우주를 말합니다. 칠보라는 것은 금은 유리 수정 산호 만호 진주 이렇게 일곱 가지 법외를 말합니다. 부처님이 하시는 말씀은 이것입니다. 온 우주를 일곱 가지 보석으로 가득 채워서 사람들에게 나누어 준다고 해도 금강경의 내 구절을 받아 지니고 다른 사람에게 전해주는 것이 더 크다. 이것을 현실적으로 생각해 보겠습니다. 여러분이 세상의 모든 재산을 가지고 있다고 칩시다. 전 세계의 금을 은을 다이아몬드를 모든 보석을 가지고 있다고 칩시다. 그것을 전부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 공덕이 크겠습니까? 당연히 큽니다. 엄청나게 큽니다. 그런데 부처님은 그것보다도 금강경에 내 구절을 마음에 담고 다른 사람에게 전하는 것이 더 크다 하셨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물질적인 도시는 한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금을 아무리 많이 주어도 그 금은 언젠가 쓰이고 없어지고 사라집니다. 그런데 진리를 마음에 담으면 그 진리는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진리를 다른 사람에게 전하면 그 사람의 마음에도 남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이 또 다른 사람에게 전하면 끝없이 이어집니다. 금은 나누면 줄어들지만 진리는 나누면 늘어납니다. 이것이 부처님이 벚꽃실을 물질 보시보다 크다고 하신 이유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부처님이 말씀하신 내 구절을 받아지닌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금강경을 외운다는 뜻입니까? 금강경을 달달 암기하면 공덕이 생긴다는 뜻입니까? 아닙니다. 수지라는 것은 바다서 지닌다는 뜻입니다. 받는다는 것은 마음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입니다. 지닌다는 것은 삶에서 놓지 않고 간직한다는 것입니다. 단순히 글자를 외우는 것이 아니라 그 뜻을 마음에 새기고 그 뜻대로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금강경을 매일 읽으시면서 그 말씀이 오늘 내 삶에서 어떤 의미인지를 생각해 보시는 것 머물지 말라는 말씀을 들으시며 오늘 내가 무엇에 머물러 있었는지를 돌아보시는 것 그것이 수지입니다. 그것이 금강경을 받아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남에게 설해준다는 것도 거창한 것이 아닙니다. 법당에 서서 설법을 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옆에 앉은 보살님에게 오늘 금강경에서 이런 구절이 마음에 와닿았어요 하고 한마디 건네시는 것 자식에게 부처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다더라 하고 전해 주시는 거 손주에게? 부처님은 마음을 편안하게 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신 분이야 하고 한마디 해 주시는 것 그것이 남에게 설해 주는 것입니다. 그 한마디가 칠보 보시보다 크다고 부처님이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제 금강경에서 가장 많은 분들이 궁금해 하시는 부분으로 가보겠습니다. 바로 업장 소멸에 대한 말씀입니다. 금강경 제16분 능정업 장군이라는 대목이 있습니다. 능의 업장을 깨끗이 한다는 뜻입니다. 이 대목에서 부처님은 매우 중요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부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선남자 선요인이 이 경을 수지독성하는데도 난일 다른 사람에게 업신여김을 당한다면 그 이유는 응단이 악도에 떨어질 만한 전생의 죄업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이제 이렇게 사람들로부터 업신여김을 당했기 때문에 전생의 죄업은 곧 소멸될 것이고 따라서 마땅히 위없는 바른 깨달음을 얻을 것이다. 이 말씀을 천천히 풀어보겠습니다. 금강경을 열심히 입고 있습니다. 그런데 주변 사람들이 나를 무시합니다. 자식이 내 말을 듣지 않습니다. 이웃이 나를 업신여깁니다. 그러면 마음이 상합니다. 내가 이렇게 열심히 기도하고 수행하는데. 왜 좋은 일이 생기지 않고 오히려 이런 일을 겪어야 합니까? 내가 뭘 잘못한 겁니까? 이 마음 가져보신 적 있으시지요? 부처님은 이 상황에 대해 아주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전생에 지은 업 때문이다. 그 업의 무게가 원래는 매우 무거운 것이었다. 자칫하면 악도에 떨어질 수도 있는 무게였다. 그런데 금강경을 수지독성하는 공덕으로 인해 그 무거운 업보가 가벼운 형태로 나타나는 것이다. 악도에 떨어질 대신 사람들에게 업신여김을 당하는 정도에서 그 업이 풀리는 것이다. 그러니 이 업보를 받아들이면 전생의 죄업이 소멸된다. 이것을 여러분의 삶에 대입해 보겠습니다. 여러분이 새벽마다 금강경을 읽으십니다. 그런데 자식이 전화를 안 합니다. 며느리가 차갑습니다. 몸도 여기저기 아픕니다. 절에 가면 마음은 편한데 집에 오면 다시 무겁습니다. 이런 일이 계속되면 기도를 왜 하나 싶어지실 때가 있습니다. 금강경을 읽어도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부처님의 말씀대로라면 달라지고 있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겪고 계신 그 어려움은 원래라면 훨씬 더 무
형태로 다가왔을 억보가 가벼워진 것일 수 있습니다. 금강경의. 밝은 빛이 그 무거운 업의 덩어리를 조금씩 녹여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이 공덕이 헤아릴 수 없다고 하신 것입니다. 이어서 부처님은 더 놀라운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가 과거 무량아승직업전 연등부처님을 뵙기 전에도 8만 4000
수의 여러 부처님을 만나뵙고 모두 다 공연하고 받들어 섬겨 헛되이 지냄이 없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앞으로 오는 말세에 능히 이 경을 수지독송하며 그가 얻는 공덕은 내가 여러 부처님께 공양한 공덕으로는 백분위 1도 미치지 못하며 천만 억 분의 1도 미치지 못할 것이
이 말씀에 무게를 느껴 보십시오. 부처님이. 직접 말씀하고 계십니다. 나석가모니가. 과거 할 령
세월 동안 할 령 없는 부처님들께 공약을 올렸다. 그. 공양의 공덕이 어마어마하다. 그런데. 말씀 이 경을 수지독송하는
공덕은 그나의 공덕으로도 비교가 되지 않는다. 부처님. 자신의 공덕보다 더 크다는 것입니다. 2. 말씀을 처음 들으시면 믿기 어려우실 수 있습니다 부처님도. 그것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바로 다음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만일 이 경을 수지독성하여 얻는 공덕을 내가 다 말한다면
어떤 사람은 그 말을 듣고 마음이 몹시 혼란하여 의심하고 믿
않을 것이다. 부처님. 스스로 이 말을 들으면 믿지 못할 것이라고 미리 말씀하셨습니다. 그만큼. 이 가르침이 깊
평범한 상식을 넘어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부처님은. 왜 이렇게까지 말씀하셨을까요? 금강경을 읽는? 것이 정말로 그토록 큰 공덕이 되는 것일까요? 그 이유를? 이해하려면 부처님이 말씀하신 공덕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봐야 합니다.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공덕은 이런 것입니다. 절의 보시를 하면 공덕이 쌓입니다. 기도를 하면 공덕이 쌓입니다.
하면 공덕이 쌓입니다. 이런. 공덕들은 모두 무엇을 했다는 행위에 따르는 공덕입니다. 부처님은. 이것을 유의의 공덕이라 하셨습니다. 유일한. 것은 무언가를 한다는 뜻입니다. 행위가. 있고 결과가 있는 공덕입니다.
그런데 금강경을 수지독성하는 공덕은 다릅니다. 금강경
의 가르침을 마음에 받아들이면 무엇이 일어납니까? 나라는 집착이
조금씩 녹아갑니다. 내가 했다는 생각이 줄어듭니다. 내가 이만큼 했으니 이만큼 받아야 한다는 기대가 사라집니다. 그러면 마음이 넓
무한해집니다. 허공과. 같아집니다 이것이. 같아집니다 이것이 무의의 공덕입니다 행위에 의해 쌓이는 공덕이 아니라 집착을 내려놓음으로써 스스로 드러나는 공덕입니다 유의의 공덕은 아무리 많아도 셀 수 있습니다 크기가 정해져 있습니다 그런데 무위
의 공덕은 셀 수가 없습니다 나가 없어지면 공덕의 크기를 제 주체가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금강경을 수지독성하는 공덕이 무량하다고 헤아릴 수 없다고 자신의 공양 공덕으로도 비교할 수 없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것을 일상의 비유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컵에 물
을 담으면 그 물의 양은 컵의 크기에 따라 정해집니다 큰 컵이면
많이 담기고 작은 컵이면 적게 담깁니다 이것이 유의의 공덕입니다 그런데 컵을 없애면 어떻게 됩니까 물은 어디로나 흘러갈 수 있습니다
바다가 될 수 있습니다 한계가 없어집니다 나라는 컵을 내려놓으면
바다처럼 한계가 없어집니다. 이것이. 금강경이 말하는 수지독성의 공덕입니다. 여러분.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것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말씀을 듣고 그러면 나는 아직 멀었구나 하고 생각하시는 분이 계실지
모릅니다. 나라는 집착을 놓으라고 하는데 나는 아직 자식 걱정도 못 놓고 건강 걱정도 못 노는데. 이 경지에 어떻게 가느냐 하고 막막해 하시는
계실지 모릅니다. 그런. 분께 부처님이 해 주시는 말씀이 금강경 안에 있습니다. 부처님이. 수보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한. 생각이라도 맑은
내면 열애는 그를 다 알고 다 본다. 그. 사람이 얻는 공덕은 할 령없다. 한 생각입니다. 완벽한. 깨달음이 아닙니다. 수십. 년의 수행이 아닙니다. 단
생각이라도 맑은 믿음을 내면 부처님은 그것을 알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새벽에 눈을 뜨셔서 아직 어두운 방 안에서 불단 앞에 앉으시고 금강경을 펼치시는
순간 그 순간에 여러분의 마음에 맑은 생각이 하나 올라옵니다 부처님. 말씀을 오늘은 마음에 담아 보겠다 이한. 생각이면 됩니다. 2. 한 생각의 맑은
부처님은 다 알고 계십니다. 다. 보고 계십니다 새벽. 5분 그 자리가 부처님의 자리입니다. 그. 5분 안에서 단 한 번이라도 맑은 마음이 올라온다면
그것이 이미 한량없는 공덕의 씨앗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