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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7월 20일 연중 제15주간 토요일
제1독서 : 미카 2,1-5
복 음 : 마태 12,14-21
그때에 14 바리사이들은 나가서 예수님을 어떻게 없앨까 모의를 하였다.
15 예수님께서는 그 일을 아시고 그곳에서 물러가셨다.
그런데도 많은 군중이 그분을 따랐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모두 고쳐 주시면서도,
16 당신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엄중히 이르셨다.
17 이사야 예언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그리된 것이다.
18 “보아라, 내가 선택한 나의 종, 내가 사랑하는 이, 내 마음에 드는 이다.
내가 그에게 내 영을 주리니 그는 민족들에게 올바름을 선포하리라.
19 그는 다투지도 않고 소리치지도 않으리니 거리에서 아무도 그의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
20 그는 올바름을 승리로 이끌 때까지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연기 나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니
21 민족들이 그의 이름에 희망을 걸리라.”
조명연 마태오 신부
머리카락 때문에 어렸을 때 놀림을 많이 받았습니다.
너무 뻣뻣하다고 해서 빗자루, 돼지털이라는 놀림을 받았고,
또 머리숱이 많아서 이발한 지 얼마 안 되었어도 지저분하다고 선생님께 자주 혼났습니다.
머리카락이 빨리 자란다면서, “너 공부는 하지 않고, 야한 생각만 하는구나.”라며 놀리기도 하셨습니다.
아마 고3 학력고사 끝난 뒤였을 것입니다.
한 친구가 미용실에서 커트하고 왔는데 너무 멋져 보이는 것입니다.
당시 유행하던 머리 모양이라면서 멋지게 차려입고 학교에 나타난 것입니다.
당시 ‘두발 자율화’는 아니었지만, 학력고사도 끝났다고
선생님께서는 머리가 길어도 암묵적으로 묵인해 주셨지요. 그래서 친구들은 미용실부터 찾았습니다.
저 역시 친구에게 그 미용실을 물어 찾아갔고, 미용실 선생님께 요즘 유행한 스타일을 요구했습니다.
그런데 이발하면서 계속 이상한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당시 인기 가수의 머리로 해주셨는데 글쎄 ‘바가지 머리’입니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하니, “이게 학생에게 제일 잘 어울려.”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까?
결국 동네 이발소에 가서 다시 스포츠머리로 이발했습니다.
제게 제일 잘 어울린다는 것을 이때 알게 되었습니다.
남들과 머리카락 자체가 다르기에 남에게 맞게 이발하는 것이 아닌, 나에게 맞게 이발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제 머리는 짧은 커트 머리입니다.
자기의 고유함을 찾아야 진정으로 자기를 사랑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기 처럼이 아닌 남처럼 살려고 하면서
자기의 고유함을 찾지 못했던 것이 아닐까요?
그리고 남처럼 살지 못하는 사람을 향해서 왜 그렇게 사느냐고 비판하기도 합니다.
이 역시 고유함을 인정하지 못하는 ‘무지’에게서 나오는 것입니다.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을 없앨 궁리만 하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예수님께서 자기들처럼 살지 않기 때문이었습니다.
율법을 잘 지키지 않았고, 자기들을 향해 위선자라는 말을 하면서 반대하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알지 못했습니다. 아니 알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기들만 옳고, 예수님은 틀렸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알았다면 예수님을 없애려고 모의할 리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사야가 말한 대로, 모든 민족이 희망을 거는 이름입니다.
제대로 알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 더 알기 위해 노력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자기의 고유함뿐 아니라, 남의 고유함도 인정하는 겸손이 필요합니다.
그래야 다양한 모습으로 우리 곁에 오시는 주님을 알아보고 함께할 수 있게 됩니다.
예수님의 마음으로
반영억 라파엘 신부
세상을 살아가면서 좋은 일을 하는 사람은 하느님의 복을 받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복을 받기 때문에 좋은 일을 끊임없이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좋은 일을 한다고 해서 반드시 환영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시기와 질투의 대상이 되고 미움을 사기도 합니다.
아무리 어진 사람도 미워하는 무리가 있는 법입니다.
선한 일을 하는데도 선망의 대상이 되기보다는 견제의 대상이 된다는 것이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봄비가 기름 같지만, 행인은 그 진창길을 싫어하고
가을 달은 밝고 아름답지만, 도둑은 그 밝게 비추는 것을 싫어합니다.”
자기에게 득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되면 싫어하고 시기 질투하며 심지어 미워합니다.
봄비처럼 꼭 필요한 것일지라도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사람은 언제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고통받는 사람들의 마음을 헤아리시고
병을 고쳐 주시며 당신의 소명에 충실하셨습니다.
그런데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을 어떻게 없앨까를 모의하였습니다.
지금 있는 그대로를 봐주면 좋으련마는 눈엣가시로 보았습니다.
그들은 기득권을 잃을까 두려워 하는 사람, 사촌이 땅을 사면 배를 앓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반대에 대응하지 않으시고 한발 물러서는 지혜와 인내를 보여 주셨습니다.
막무가내로 대드는 사람에게는 한숨 쉬게 하는 것이 좋습니다.
우리도 인내를 가지고 기다리며 모두를 품을 수 있는 넉넉함을 키웠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많은 사람들의 다양한 생각들을 품으셨습니다.
다투거나 큰 소리를 내지 않으시고 자비로운 손길로 버림을 받은 사람들을 일으켜 세우셨습니다.
상처받은 사람들을 치유시켜 주시고 낙담한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시며 구원해 주셨습니다.
병을 고쳐 주면서도 스스로를 내세우지 않으시고 오히려 그 공을 감추시고
결코 기적을 위한 기적을 행하시는 것이 아님을 확인해 주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언제나 철저히 아버지 하느님의 뜻 안에서 구원 사업을 이루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무슨 좋은 일을 해 놓고는 생색을 내다가 그 공을 다 잃고 맙니다.
선한 지향을 갖다가도 이내 시기와 질투심에 그 좋은 뜻을 놓치기도 합니다.
주님께서 “너희는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의로운 일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그러지 않으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에게서 상을 받지 못한다”(마태6,1).고 하셨건만
그 말씀을 잊고 살아갈 때가 많습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숨은 일도 보시는 아버지께서 갚아주실 것을 믿고,
하늘을 바라보고 살아갈 수 있는 은총이 함께하기를 서로 기도해 주시길 희망합니다.
"올바름을 승리로 이끌 때까지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연기 나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니,
민족들이 그의 이름에 희망을 걸리라"는 말씀에 귀를 기울여 보십시오.
예수님께서는 어딘가 상하고 깨져서 할 일을 제대로 못 한다고 생각 되어지는 이들을
결코 소홀히 하지 않으셨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성공에로 부름을 받은 것이 아니라 최선에로 부름을 받았습니다"(마더 데레사).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셔서 시작한 하느님의 나라는 사람에 대한 희망을 잃지 않는 세상,
무엇을 이루었는가 보다는 어떻게 살았는지를 더 소중하게 여기는 세상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간직할 수 있는 은혜를 간절히 청합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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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이 어떤 일을 하는데, 시간이 걸리면 게을러서이고,
내가 시간이 걸리면 철두철미하기 때문이다.
남이 일을 하지 않으면 게을러서이고, 나는 바뻐서이다.
누가 하라 하지 않는데 하면 월권이고,
나는 진취의 기상이 있어서이다.
남이 강력한 주장을 하면 그 사람은 고집스러운 것이고,
나의 경우는 단호한 의견발표이다.”
그야말로 내가 하면 로맨스요, 남이 하면 스캔들입니다.
“그는 상한 갈대도 꺾지 않고, 꺼져 가는 심지도 끄지 않으리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손 오그라든 병자를 낫게 하신 일에 대한
바리사이들과 군중들의 반응에 대하여 취하신 두 가지 처신을 들려줍니다.
한편으로는 당신을 죽이려고 모의를 꾸미는 바리사이들을 피하고,
또 한편으로는 당신을 따르는 군중들을 고쳐 주시면서 남에게 알리지 말라고 당부하십니다.
곧 예수님의 온유하고 겸손하신 모습과 측은히 여기며 자비롭고 신실하신 모습입니다.
이 사실에서 마태오 복음사가는 예언자 이사야의 말씀이 이루어졌음을 봅니다.
곧 예언자 이사야는 '야훼의 종의 첫째 노래'에서 위의 두 가지를 메시아의 특징으로 말해줍니다.
“그는 다투지도 않고 소리치지도 않으리니,
거리에서 아무도 그의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
그는 올바름을 승리로 이끌 때까지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연기 나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라.”(마태 12,19-20)
이 말씀을 들으면,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신
주님의 돌보심과 신실하심과 측은히 여기시는 마음이 전해져 옵니다.
동시에 이 말씀은 저 자신을 들여다보게 합니다.
사실 저는 죄 있는 형제들에게 손을 뻗어 위로하기보다 돌팔매질하기를 자주 했습니다.
형제의 짐을 져주기보다 오히려 더 큰 짐을 얹어 짓눌렀습니다.
약한 형제를 못 본 척 홀로 두고서 제 길을 가기에 바빴습니다.
형제를 존중하기보다 하찮게 여기며 마치 없는 사람처럼 무시하고 업신여겼습니다.
그렇게 저는, 기 꺾인 이들을 짓밟고, 부러진 갈대는 꺾어버리고,
연기 나는 심지는 꺼버리기를 거리낌 없이 하였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그런 저를 구해 주셨습니다.
당신께서는 제가 음모를 꾸미고 악의를 품고 있을 때도,
제가 넘어지고 부러져 있을 때도, 저를 꺾어버리지 않으셨습니다.
제가 무너지고 또 무너져도, 저에 대한 신뢰를 거두지 않으셨습니다.
제가 당신을 배신하고 거부할 때마저도, 결코 저에게서 희망을 거두지 않으셨습니다.
제가 음모를 꾸미고 악의를 품고 있을 때도 부러진 갈대를 꺾어버리지 않으셨습니다.
신실하심으로 저를 이끄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제 영혼이 병들어 말라 갈 때,
오히려 저를 택하여 당신의 사람으로 만드시고 사랑을 쏟으셨습니다.
당신의 영을 부으시고 당신의 제자로 삼으셨습니다.
성소를 내팽개치고 달아날 때도 결코 제게서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셨습니다.
아니, 저를 따라다니며 뒤를 처리해 주셨습니다.
참으로 온유하고 겸손하신 모습으로 돌보아주셨습니다.
참으로 선하시고 자비하신 모습으로 신실하셨습니다.
그토록 신실하신 사랑, 그 지치지 않는 사랑과 연민으로 저를 이끄셨습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그는 올바름을 승리로 이끌 때까지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연기 나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니"(마태 12,20)
주님!
당신은 제가 무너지고 또 무너져도 저에 대한 신뢰를 저버리지 않으시고,
배신하고 또 배신하며 거부 할 때에도 저에게서 희망을 거두지 않으셨습니다.
음모를 꾸미고 악의를 품고 있을 때도 부러진 갈대를 꺾어버리지 않으시고,
성소를 내팽개치고 달아날 때도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셨습니다.
도망질쳐도 언제나 동행하시고, 제 영혼이 병들어 말라 갈 때 오히려 저를 택하시어
당신의 사람으로 만드시고 사랑을 쏟으셨습니다.
이제는 제 갈 길을 가느라 약한 이를 홀로 두지 않게 하소서.
넘어진 이를 일으켜 세우고, 짐 진 이를 위로하게 하소서. 아멘.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복음을 보면 ‘옥합을 깬 여인’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여인은 비싼 순 나르드 향유가 든 옥합을 깨서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발라 드렸습니다.
그리고 여인은 머리카락으로 예수님의 발을 씻겨드렸습니다.
그러자 유다는 이렇게 말합니다.
“저 비싼 향유를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면 좋겠다.”
복음은 유다의 말과 생각이 다르다고 전합니다.
유다는 따로 주머니를 가지고 있었다고 이야기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가난한 이들은 언제나 너희들 곁에 있지만 나는 곧 떠난다.
이 여인이 이렇게 하는 것은 나의 장례를 위해 미리 준비하는 것이다.
다른 것들은 잊힐지라도 이 여인의 행위는 기억될 것이다.”
저는 그동안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드린 것만 생각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스승이시고, 모범을 보이기 위해서 그렇게 하셨다고 생각했습니다.
옥합을 깬 여인의 이야기를 묵상하면서
우리도, 아니 나도 예수님의 발을 씻어드려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가 깨트려야 할 ‘옥합’은 어떤 것이 있을지 생각합니다.
그 옥합 안에는 어떤 것들이 들어있을까요? 전통과 관습이라는 옥합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전통과 관습이라는 옥합을 과감하게 깨트리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안식일이 사람의 주인이 아니라, 사람이 안식일의 주인이다.
새 술을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시대가 변하고, 사람이 변하고, 상황이 변한다면
그 시대와 사람 그리고 상황에 따라서 새로운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자전거는 페달을 계속 밟아야 넘어지지 않고 전진할 수 있습니다.
교회는 늘 개혁이라는 페달을 밟아야 합니다.(Ecclesia semper reformanda est.)
기득권이라는 옥합니다.
기득권은 교회를 보호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기득권은 교회를 내부로부터 병들게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높은 자리에 앉으려고 하는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의 기득권을 비판하셨습니다.
말은 그럴듯하게 하면서 정작 실천하지 않았던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의 기득권을 비판하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의 제자가 되려거든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
너희 중에 첫째가 되고자 하는 이는 꼴찌가 되어야 한다.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을 자격이 있지만 섬기려고 왔다.”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신 것은 바로 기득권이라는 옥합을 깨뜨린 사건입니다.
요즘의 신앙을 생각합니다. 요즘의 가정을 생각합니다.
고등학교에 들어가면 성당에 가지 않아도 야단치지 않습니다.
대학에 가면 성당에 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학원에 가지 않고, 공부하지 않으면 야단치지만
기도하지 않고, 성경을 읽지 않아도 말하지 않습니다.
할아버지 할머니의 기일이 되어도 가족들이 함께 모이지 않습니다.
모두가 바쁘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일이 먼저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예전에 들었던 ‘작은 연못’이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연못에 물고기가 살았습니다.
서로 싸우면서 한 마리가 죽었습니다.
물이 썩으니 살았던 물고기도 죽었습니다.
신앙이라는 연못이 상하면 그곳에서 살아야 하는 신앙인도 죽기 마련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집트를 떠나야 했습니다.
그곳에는 성공, 명예, 권력이라는 바벨탑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곳에서는 참된 행복을 얻을 수 없었습니다.
그곳에서는 진리를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은 이집트를 떠나야 했습니다.
권력을 향해서 날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욕망을 향해서 날아가는 사람들은
하느님을 좀처럼 볼 수 없습니다.
오늘 미가 예언자도 바로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진리의 길에서 벗어나, 악을 일삼는 자들은
사랑이신 하느님을 결코 볼 수 없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도 그런 이야기를 하십니다.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예수님이 눈앞에 있어도, 진리와 정의가 눈앞에 있어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순수하고,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예수님이 보였고,
그들은 주님과 함께하는 참된 행복의 삶을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그는 올바름을 승리로 이끌 때까지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연기 나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니 민족들이 그의 이름에 희망을 걸리라.”
하느님께서 택하신 종 예수 그리스도
조욱현 토마 신부
예수께서는 안식일에 회당에서 한쪽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고쳐주신다.
바리사이들은 예수께서 안식일에
그 사람의 손을 다른 손처럼 건강하게 해주신 것을 보고
어떻게 예수님을 없앨까 모의를 했다고 한다.
이것을 아신 예수께서는 다른 곳으로 물러가셨다.
그것은 그들의 모의가 무서워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고쳐 주시며 악을 없애기 위한 것이다.
예수께서는 이 모든 것이 당신이 마땅히 해야 하는 일이므로
그 일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하신다.
이어서 이사 42,1-4의 말씀을 이루신다.
그들 안에 있는 부러진 갈대나 연기 나는 심지와 같은 연약한 모습이라도
파멸하지 않도록 하시려는 뜻이다.
그들이 언제나 당신께로 회개할 수 있도록 끈기 있게 참아주신다.
예수께서는 밀과 가라지를 추수 때까지 그대로 두도록 하라고 하신 분이다.
우리 자신도 그렇게 참아주시는 분이다.
“그는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연기 나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라.”(이사 42,3).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의 크신 온유함을 뜻한다.
그러나 언제까지 이렇게 참아주실 수 있는가?
이는 밀과 가라지가 추수 때까지 참아주셨듯이,
그분의 구원 업적이 이루어질 때까지 그렇게 하실 것이다.
이사야는 이것을 “그는 정의를 승리로 이끌리라.”(이사 42,3)
그리하여 “다른 민족들이 그의 이름을 신뢰하게 되리라.”(이사 42,4)라고 한다.
“정의를 승리로 이끌리라.”(이사 42,3)라는 말은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의 구원업적을 다 이루시면,
믿지 않는 사람들을 마지막으로 심판하신다는 의미이다.
그때는 터무니없고 모순되는 논리를 그대로 두지 않으시고
그들이 하느님의 영광을 알게 될 것이다.
이제 하느님의 섭리는 믿지 않는 이들을 심판하는 데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모든 민족을 위한 것이므로 “다른 민족들이 그의 이름을 신뢰하게 되리라.”(이사 42,4) 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바로 “내가 사랑하는 이, 내 마음에 드는 이다.”(18절)
하느님으로부터 사랑받는 분은 당신을 사랑하시는 분의 뜻에 따라서 이 모든 것을 이루실 것이다.
하느님의 뜻을, 아버지의 뜻을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언제나 우리도 하느님의 말씀을, 하느님의 일을,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
그래서 우리도 “내가 사랑하는 이, 내 마음에 드는 이다.”라는 선언을 들어야 할 것이다.
하느님께서 하시도록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내가 그에게 내 영을 주리니 그는 민족들에게 올바름을 선포하리라.
그는 다투지도 않고 소리치지도 않으리니 거리에서 아무도 그의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
그는 올바름을 승리로 이끌 때까지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연기 나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니 민족들이 그의 이름에 희망을 걸리라.”
무위지위(無爲之爲), 아무것도 하지 않지만 한다는 뜻입니다.
무위지치(無爲之治)란 말도 있지요.
요순 임금처럼 임금의 이름을 백성이 모를 정도로 임금이 없는 듯 있는데도,
그리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듯 통치하는데도 태평성대를 이룬다는 뜻이지요.
오늘 마태오 복음은 주님께서 하시는 구원 행위가
무위지치 하시고 무위지위 하시는 것이라고 얘기하는 듯합니다.
주님은 영을 받아 올바름, 정의를 선포하시는 분인데 다투지도 않고
소리치지도 않아 길거리의 누구에게도 그의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고 합니다.
요즘 정치권을 보면 다투는 정의와 소리치는 정의뿐입니다.
나는 정의롭고 너는 불의하다고 소리치며 다투는 것입니다.
자기들의 당이 민생정당이라고 주장하지만,
민생은 팽개치고 그저 주장하는 민생일 뿐입니다.
생색내지 않고 말없이 실천하는 민생은 없습니다.
오히려 부러졌다고 갈대를 아주 작살을 내버리고,
꺼져간다고 심지를 아예 꺼버리는 짓이나 합니다.
기세등등한 사람들 심기는 살피고,
기가 꺾인 이들은 깔아뭉개는 짓이나 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기세등등한 사람들에게 기가 꺾인 갈대들을 일으켜 세우고,
꺼져가는 사람들의 목숨을 되살리시기에 모든 이가 주님께 희망을 겁니다.
주님의 정의는 이처럼 주장하는 정의가 아니라 묵묵히 실천하는 정의이고,
그래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모두를 살리는 올바름입니다.
그런데 오늘 저는 다른 측면에서 무위지위를 보겠습니다.
내가 하지 않는데 한다는 것은
내가 하지 않는데 하느님께서 하시는 겁니다.
뒤집으면 하느님께서 하시도록 내가 하지 않는 것이고,
내가 하지만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의 하느님께서 하시게 하는 겁니다.
왼손이 하는 것을 오른손이 모르도록 드러나지 않게 할 뿐 아니라
내가 하지만 그것은 하느님의 섭리와 은총을 드러내는 것뿐입니다.
사람들이 무식하고 못생긴 당신을 왜 그렇게 따르냐고 맛세오가 물었을 때
프란치스코는 하느님께서 자기보다 못나고 죄인인 사람을 발견치 못하셔서
강하고 지혜롭다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고 자기를 뽑으신 것이라고 답하였지요.
그리고 다른 곳에서는 자기에게 주셨던 은총을 다른 강도에게 주셨다면
그 강도는 자기보다 훨씬 더 많이 하느님께 영광을 드렸을 것이라고도 하였지요.
어쨌거나 성령의 사람들이 하는 것은
자기가 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은총이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하느님께서 하시도록 내 이름으로 그리고 내 힘으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 우리가 되기로 결심하고 은총 청하는 오늘입니다.
때로 우리가 벼랑 끝에 몰려 있는 느낌일 때도!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오늘 개인적으로 참 감개무량한 날입니다.
노인들만 수두룩한 이 시골에 꽃 같은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와서
여름 신앙학교를 시작하는 날이기에 그렇습니다.
신나게 뛰노는 아이들을 보는 형제들의 얼굴에는 다들 웃음꽃이 피어났습니다.
제가 이곳 피정 센터에 도착했을 때, 막 펜데믹이 시작되었습니다.
집합 금지 명령으로 인해 잡혀있던 모든 피정 계획이 100퍼센트 취소되었습니다.
참으로 막막했었습니다. 공동체에 월급받는 사람은 한 명도 없고,
매월 나오는 기본 전기세는 엄청나고, 통장 잔고는 바닥이고,
다른 피정 센터나 수련원들은 줄줄이 문을 닫았습니다.
윗선에서는 진지하게 폐업과 매각까지 고민했습니다.
다행히 주님께서 저희에게 크신 자비를 베풀어주셨습니다.
기도와 고민 중에 방법을 알려주시더군요. 딱 한 말씀 던져주셨습니다.
“애야, 피정이나 수련회를 꼭 큰 규모로만 할 필요가 있겠느냐?”
저는 무릎을 탁! 쳤습니다. 감사합니다. 주님! 하며 바로 실행에 옮겼습니다.
개인 및 소규모 피정을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딱 한 명 오셨습니다. 친절히 봉사했더니 다음에는 두 명이 오셨습니다.
그 다음에는 세 명, 네 명. 네 명까지만 가능하니,
여기 네 명, 저기 네 명, 저 건너편에 네 명...
그 어려운 펜데믹 기간에도 피정 센터는 잘 돌아갔습니다.
모든 것이 주님 자비와 은총 덕분이라고 확신합니다.
때로 주님께서 한쪽 문을 닫으시지만, 찬찬히 사방을 둘러보면
슬그머니 다른 문 하나를 열어주신다는 진리를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주님은 언제나 너그럽고 인자하신 분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그릇된 길을 간다 할지라도 항상 인내하십니다.
때로 우리가 벼랑 끝에 몰려 있는 느낌일 때도
그분께서는 늘 우리를 지켜보고 계시고 보살펴주심을 굳게 믿습니다.
우리 주님은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연기 나는 심지를 끄지 않으시는’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이토록 우리에게 큰 인내와 자비를 베푸시는데,
우리는 이웃들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지 진지한 성찰이 필요합니다.
오늘도 우리의 회심과 새 생활을 기다리고 또 기다리시는 주님께
깊은 감사와 찬미와 영광을 드리면서,
그 인내와 자비를 가까운 이웃들에게도 실천하는 하루가 되면 좋겠습니다.
메시아적 예언자인 이사야
박상대 마르코 신부
오늘 복음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어제 복음과의 중간 부분을 한번 살펴볼 필요가 있다.
다윗보다 더 나은 분, 예루살렘 聖殿보다 더 높은 분,
안식일의 주인으로 자신을 계시하신 예수께서는 곧 이어
어느 한 회당에서 오그라든 손을 가진 불쌍한 사람을 치유해 주신다.(마태 12,9-13)
물론 그날 또한 안식일이었다.
예수님의 상대자들이 먼저 예수를 고발할 구실을 찾으려고 회당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안식일에 병을 고쳐 주어도 법에 어긋나지 않습니까?”(10절)하고 묻는다.
이 대목의 原典인 마르코복음에서는 예수께서 먼저 사람들을 향하여
“안식일에 착한 일을 하는 것이 옳으냐? 악한 일을 하는 것이 옳으냐?
사람을 살리는 것이 옳으냐? 죽이는 것이 옳으냐?”하고 물으시자,
모두들 말문이 막혔다고 한다.(3,4)
사람들이 아무 말도 못 하고 입을 닫고 있자,
예수께서는 그들의 완고한 마음에 탄식하시고 노기에 찬 얼굴로 둘러보시며
손이 오그라든 사람에게 “손을 펴라.” 하시면서 그를 고쳐주셨다.(3,5)
그러자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나가서 즉시 헤로데 당원들과 만나서
예수를 제거 할 방도를 모색한다.(3,6)
마태오복음서는 약간 다른 뉘앙스를 보인다.
마태오는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진 양을 어려움에 처한 사람과 비교하면서
사람이 양보다 훨씬 더 귀하기 때문에, 안식일이라 할지라도
착한 일을 하는 것은 법에 어긋나지 않는다고 말한다.(11-12절)
이어서 예수께서는 병자의 손을 고쳐주신다.(13절)
치유를 목격한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태도는
마르코복음에서와 같이 예수를 제거할 모의로 치닫는다.(14절)
그들은 예수께서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될 일을 함으로써
안식일 법을 또 다시 어겼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동안 줄곧 병으로 고생한 병자 측에서 관찰한다면,
그가 오늘(안식일) 치유되는 것과 내일 치유되는 것의 차이는 그리 크지 않다.
그러나 마르코복음은 예수께서 안식일이라 할지라도
착한 일을 해야 할 경우를 만나서 그 일을 회피하면 곧 악한 일이라고 보고 있으며,
사람을 살려야 하는 경우를 만나서 그 일을 회피하면
곧 사람을 죽이는 일로 본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그 반면 마태오 복음은 이 내용을
“안식일에라도 착한 일을 하는 것은 법에 어긋나지 않는다.”(12절)는 말로 고쳤다.
이는 어제 복음 묵상에서 언급한 대로 마르코와 마태오의 시각 차이를 드러내는 부분이다.
그렇게 뚜렷하지는 않지만 마르코는 착한 일을 위해서 안식일 법은 폐기될 수 있는 것으로 보고,
마태오는 안식일에 착한 일을 하는 것도 포함 된다는 것으로 보는 미소한 차이가 드러나고 있다.
결국 마태오의 의도는 구약의 율법을 폐기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오신 메시아 예수의 지상사명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래서 마태오는 이사야 예언서의 말씀(40,1-4)을 인용하면서,
이스라엘이 간절히 기다리던 메시아가 바로 예수이심을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은 곧 하느님께서 택하신 종, 사랑하는 사람, 마음에 드는 사람,
성령을 부어 이방들에게 정의를 선포하는 사람, 상한 갈대도 꺾지 않고,
꺼져가는 심지고 끄지 않는 사람, 정의를 승리로 이끌어 가시는 분,
이방인들이 희망을 거는 이름을 가진 분, 바로 메시아이신 것이다.(18-21절)
마태오에 있어서 이사야는 메시아적 예언자이다.
마태오는 이사야의 말을 시기적절하게 인용하면서
예수님의 메시아적 實存을 점층적으로 提高하고 있다.
지금까지 진행되어 온 마태오복음을 면밀히 살펴보면,
예수 탄생을 예고하는 곳에서(1,23), 세례자 요한의 광야 선포에서(3,3)
예수의 갈릴래아 전도를 시작함에서(4,15-16) 많은 병자를 치유하는 대목에서(8,17)
그리고 안식일에 오그라든 손을 고쳐 주신 예수를 따르는 모든 병자들을 또한 고쳐 주시는
오늘 복음의 대목에서(12,18-21) 이사야 예언자의 말씀이 인용되고 있다.
이제 마태오는 예수님을 메시아로 선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메시아는 거리에서 그의 소리조차 들을 수 없는(19절) 조용한 가운데서
인간의 구원을 위해 봉사하는 야훼의 고난받는 종이신 것이다..........
[출처] ‘벨라수녀 영화방’ : 오늘의 말씀 묵상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