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20년 30년을 한결같이 불전 앞에 앉으신 분도 계십니다. 그러면서도 문득 이 기도가 정말 어딘가에 닫고 있는 것인가 하는 물음이 가슴 한쪽을 스쳐 지나간 적이 있으셨을 것입니다. 정성이 모자라서가 아닙니다. 기도의 자리 마음의 자리에 대한 물음이 빠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능원경 7처 징심을 통해 그 기도가 왜 헛돌 수밖에 없었는지 함께 새겨 보겠습니다. 능원경은 놀라운 장면에서 시작됩니다. 부처님 곁에서 25년을 모신 아난존자가 한순간에 무너지신 이야기입니다. 안 한 존자는 부처님의 사촌 동생이자 부처님 곁에서 가장 오래 모시며 가장 많은 법문을 들으신 분이었습니다. 기억력이 남달라. 부처님께서 설하신 모든 말씀을 한 자도 빠뜨리지 않고 간직하셨다. 전해집니다. 다문제일이라 불리신 까닭이 바로 그것이며 가장 많이 들은 분 가장 가까이에서 모신 분이기도 하셨습니다. 그날 아난 존자는 홀로 탁발을 나가셨습니다. 그런데 그 마을 길에서 마든가녀라는 여인의 환술에 걸리시어 마음이 크게 걷잡을 수 없이 흔들리고 말았습니다. 마든가녀의 어머니가 선범 천주의 사수를 걸었고 아나는 그 힘에 이끌려 걔를 범할 위기에 놓이셨습니다. 다문제일이라 불렸던 아나니 한 번의 환술 앞에서 그만 중심을 잃고 말았습니다. 가장 많이 간직한 그 머리가 정작 한 번에 흔들림 앞에서는 아무 힘도 되어 주지 못하였습니다. 이 이야기는 아난의 허무를 드러내려는 이야기가 아니며 오히려 우리 자신을 비추는 거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오래 곁에 있어도 마음의 자리를 모르면 한순간에 흔들린다는 사실을 능원경은 첫 장면에서 곧바로 드러내 보여줍니다. 아난이 무너진 까닭이 그러했다면 지금 우리가 울리고 있는 기도는 과연 어떠한지 한번 살펴보아야 합니다. 불자 여러분 이 대목을 듣고 계시면서 가슴 어딘가가 뜨끔하셨을 수도 있습니다. 저를 오래 다니셨어도 기도를 꾸준히 올리셨어도 마음이 여전히 흔들리는 자신을 보신 적이 있으실 것입니다. 작은 말 한마디에 화가 치밀어 오르고 사소한 일에 온종일 마음이 들쑤셔지는 날도 적지 않으셨을 것이며 지나간 일이 자꾸만 떠올라 잠을 이루지 못하는 밤이면 내가 이렇게 오래 기도했는데 왜 아직도 이러한가 하고 스스로 물으셨을 것입니다. 아난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25년의 세월이 아난의 귀에는 법문을 가득 채워주었으되 마음자리에는 닫지 못하였습니다. 듣는 것과 아는 것은 다르며 아는 것과 마음의 뿌리 내리는 것은 또 다릅니다. 아나는 가장 많이 들은 분이셨으나 그 가르침이 마음에 어떤 자리에 뿌리를 내려야 하는지는 한 번도 점검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부처님께서 능엄 신주를 설하시어 문수보살로 하여금 아난을 구해 오게 하셨습니다. 아나는 부끄러움에 엎드려 울며 부처님께 간절히 여주셨습니다. 저는 부처님의 사촌이라는 인연에만 기대어 다문에만 의지하였으며 마음은 아직 돌을 얻지 못하였나이다. 다문에만 의지하였다는 이 고백은 아난 스스로 문제의 핵심을 꿰뚫은 순간이었습니다. 많이 들었다는 것이 깊이 아는 것과 같지 않다는 사실을 무너진 그 자리에서 비로소 알아차리게 되셨습니다. 절에 오래 다녔다는 것이 마음을 닦은 것과 같지 않으며 경전을 많이 외웠다는 것이 마음을 본 것과 같지 않습니다. 이 간극을 알아차린 자리에서 비로소 진짜 수행의 문이 열리게 됩니다. 아난의 눈물은 부끄러움만이 아니라 깨어남의 시작이기도 하였습니다. 스스로 모자람을 인정하는 그 자리에서 비로소 가르침이 마음 안으로 들어올 공간이 열립니다. 그런데 부처님께서는 아난을 꼬짖지 않으셨습니다. 질책도 경고도 없이 고요히 한 가지 질문만을 건네셨을 뿐입니다. 법석에 모인 대중이 숨을 죽인 가운데 아나는 고개를 들어야 했습니다. 25년 동안 들었던 모든 법문이 이 한순간에 시험대 위에 올려졌습니다. 그리고 부처님의 음성이 고요히 법석 전체를 감쌌습니다. 스승이 사촌 동생에게 던지신 이 한마디는 부끄러움 위에 놓인 더 깊은 물음이었습니다. 그것은 아난 한 사람에게 물으신 것이 아니라 그 자리에 앉은 모든 이에게 물으신 것이기도 하였습니다. 아나나 너는 마음이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느냐 하고 물으셨습니다. 이것이 칠처 진심의 시작입니다. 진심이란 마음을 캐묻는다는 뜻이며 일곱 차례에 걸쳐 마음의 자리를 묶고 또 물으신 그 문답의 첫걸음이 여기에 놓여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가장 먼저 물으신 것은 어떻게 하면 다시 흔들리지 않겠느냐가 아니었고 어떤 수행법을 써야 하느냐도 아니었습니다. 방법을 묻기 전에 마음의 자리를 먼저 물으셨습니다. 왜 이 질문을 가장 먼저 하셨는지를 가만히 생각해 보십시오. 아난이 무너진 뒤에 물으실 수 있는 질문은 많았습니다. 왜 혼자 갔느냐? 어떻게 빠져들었느냐? 앞으로는 어찌하겠느냐 하는 물음도 가능하였습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경의도 다짐도 못지 않으시고 오직 마음의 자리만을 물으셨습니다. 수행의 첫자리가 거기에 있기 때문이며 그 자리를 모르고 나아가면 나머지 모든 수행도 방향을 잃게 됩니다. 무엇을 닦으려면 닦을 대상이 어디 있는지를 먼저 알아야 합니다. 마음을 닦겠다 하면서 마음이 어디 있는지를 모르면 빈 허공을 향해 걸레를 휘두르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기도를 올리면서 기도가 어디에서 일어나는지를 모르면 그 기도는 떠돌다 흩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수행의 방법보다 마음의 자리가 먼저인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불자 여러분 절에 앉아 두 손을 모으실 때 그 기도가 어디에서 일어나고 있는지를 한 번이라도 살펴보신 적이 있으실 것입니다. 머리에서 일어나는 것인지 가슴에서 일어나는 것인지 혹은 입에서 나오는 소리만 흘러가고 있었는지를 말입니다. 이것을 한 번도 물어보지 않은 채 수십 년의 기도에 오신 분들이 적지 않습니다. 기도의 내용은 해마다 달라졌어도 기도가 떠나는 그 출발점은 한 번도 살펴보지 않으신 채 오셨습니다. 불자 여러분 이 질문은 단순한 물음이 아닙니다. 마음이 어디에 있느냐 하는 것은 나는 누구인가를 묻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마음이라 부르는 것 기도할 때 모으는 그것 화날 때 흔들리는 그것 잠들기 전 자꾸만 떠오르는 그것이 도대체 무엇이며 어디에 머물고 있는가? 이 물음 앞에 서면 우리가 평생 당연하다고 여겨 온 것이 사실은 한 번도 살펴보지 않은 것이었음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이 질문은 수행의 시작인 동시에 수행의 전부이기도 합니다. 부처님께서 이 한 가지를 물으셨을 때 아남뿐 아니라 법석에 앉은 모든 수행자가 마음속으로 같은 물음을 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아나는 이 질문 앞에서 망설이지 않았습니다. 수천 번의 법문을 들으신 분이 마음의 자리 하나를 모를 리 없다는 자신이 있었습니다. 마음은 몸 안에 있습니다라고 하셨습니다. 누구라도 그리 답하셨을 것입니다. 생각은 머리에서 나오고 감정은 가슴에서 일어나는 법이니 마음이 몸 안에 있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해 보였고 의심할 여지조차 없어 보였습니다. 부처님께서는 그 답을 받으시고 고요히 고개를 저으셨습니다. 아난의 첫 답이 왜 틀렸는지 아나는 아직 알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마음을 가장 잘한다고 믿었던 바로 그 자리에서 마음을 찾는 긴 여정이 비로소 시작되려 하고 있었습니다. 부처님께서 아난을 바라보시며 고요히 물으셨습니다. 아나나 마음이 내 몸 안에 있다면 먼저 몸 안에 있는 것들을 보아야 하지 않겠느냐? 아나는 선뜻 대답하지 못하였습니다. 부처님의 이 물음은 간결하였으나 그 안에 담긴 뜻은 무거웠습니다. 만일 마음이 안에 있다는 말이 맞다면 안에서 안을 보는 것이 먼저여야 한다는 뜻이었기 때문입니다. 부처님께서 이어서 차분히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방안에 있으면 방 안에 있는 것들이 먼저 보이는 법이다. 방 안에 있는 것들이 먼저 보이는 법이다. 탁자와 벽과 창이 보이고 그런 뒤에야 문을 열고 바깥을 볼 수 있다. 이것이 안에 있다는 것의 이치이다. 마음이 몸 안에 있다 하면 심장이 뛰는 모양이 보여야 하고 간과 쓸개가 쉬지 않고 움직이는 모습이 보여야 하며 뼛속의 꼬리 이어져 있는 결이 보여야 한다. 그런데 아나나 너는 내 몸 안에서 일어나는 일을 하나도 보지 못하고 있지 않느냐. 이 물음 앞에서 아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였으며 우리도 다르지 않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 심장은 쉬지 않고 뛰고 있습니다. 커피가 온몸을 돌며 폐가 숨을 들이쉬고 내쉬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마음으로 본 적이 있으셨을까를 한번 살펴보십시오. 심장이 뛰는 것을 느끼는 것과 심장이 뛰는 것을 보는 것은 전혀 다른 일입니다. 우리는 느끼기는 하되 직접 보지는 못합니다. 한평생 이 몸과 함께 살아왔으면서도 정작 그 안을 본 적은 한 번도 없었으며 의사의 검사나 기계를 통해야만 알 수 있을 뿐입니다. 불자 여러분 우리는 평생을 마음이 몸 안에 있다고 믿어 왔습니다. 머리가 복잡하면 마음이 머리에 있다고 생각해 왔습니다. 배가 아프면 마음이 불안해지고 다리가 저리면 마음이 불편해지기에 마음은 분명 이 몸 어딘가에 있다고 느껴왔을 것입니다. 그런데 부처님께서는 느끼는 것과 있다는 것은 다르다 하셨습니다. 몸에서 무언가를 느끼는 일과 마음이 몸 안에 자리잡고 있는 일은 전혀 별개라 하셨습니다. 가슴이 뜨거워질 때 그 뜨거움을 아는 것은 마음이지만 그 마음이 가슴 안에 들어앉아 있기에 뜨거운 것은 아닙니다. 다리가 저릴 때도 마찬가지이며 저림을 아는 것은 마음이 되 마음이 다리속에 있기에 절인 것이 아니라 할 수 있습니다. 마음은 알고 있대. 그 자리에 머물러 있는 것과는 다릅니다. 잠자리에 누우셨을 때를 한번 떠올려 보십시오. 눈을 감으시면 온몸의 감각이 하나하나 느껴지셨을 것입니다. 발끝에 차가움 어깨의 결림 명치의 묵직함. 이 모든 것을 아는 것이 마음입니다. 그런데 그 마음이 발끝에도 있고 어깨에도 있고 명치에도 있다면 마음은 온몸에 흩어져 있는 셈이 됩니다. 하나인 마음이 여러 곳에 동시에 있을 수 없기에 느끼는 것과 있다는 것은 분명히 다릅니다. 산길을 걸을 때도 살펴보십시오. 바람이 볼을 스치면 마음이 그 서늘함을 알아차리고 발 밑에 돌이 닿으면 마음이 그 딱딱함을 곧바로 알아차립니다. 멀리서 새가 울면 마음은 그 소리까지 놓치지 않습니다. 바람도 알고 돌도 알고 새소리도 아는 이 마음이 과연 어느 한 곳에만 머물러 있다 할 수 있는지를 가만히 살펴보십시오. 어디에나 닿으면서 어느 한 곳에도 고정되어 있지 않은 것이 마음의 본래 모습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것을 놓치고 살아온 까닭은 마음의 몸 안 어딘가에 놓아두는 것이 너무 오래된 습관이었기 때문입니다. 아나는 이 농파 앞에서 평생 품어온 확신이 무너지는 것을 느꼈을 것입니다. 숨을 쉬면 마음이 편해지고 몸이 아프면 마음도 아프기에 마음과 이 몸은 당연히 한 자리에 있다고 믿는 것이 자연스러웠습니다. 그런데 부처님께서는 바로 그 당연함을 허무셨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가만히 살펴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마음이 몸 안에 있다는 믿음은 단순한 상식의 문제가 아닙니다. 이 믿음이 우리 수행의 방향 전체를 정해 놓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몸 안에 있다고 여기면 수행도 자연이 몸 안에서만 이루어지게 됩니다. 몸을 바르게 하면 마음도 바르게 될 것이라 여기고 호흡을 고르면 마음도 고르게 될 것이라 믿게 됩니다. 몸을 바르게 하고 호흡을 고르는 일은 귀한 수행이지만. 그것이 곧 마음의 자리를 아는 일은 아닙니다. 불자 여러분 기도를 올리실 때 마음을 모으려면 할수록 생각이 오히려 더 흩어졌던 적이 있으셨을 것입니다. 그때마다 스스로의 정성이 모자란 탓이라. 여기셨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부처님의 이 농파에 비추어 보면 마음을 이 몸 안에 한 자리에 가두려 한 것 자체가 마음의 성품에 맞지 않는 일이었을 수 있습니다. 마음은 본래 한 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지 않기에 가두려 하면 할수록 빠져나가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마음이 나쁜 것도 수행이 모자란 것도 아니며 다만 자리를 잘못 잡은 것뿐입니다. 마음이 몸 안에 있다는 전제 위에서 기도하면 기도는 늘 몸 안쪽에 좁은 자리에서만 맴돌게 됩니다. 몸 안에서 평안을 찾으려 하고 몸 안에서 고요를 만들려 하며 오후 안에서 부처님을 만나려 합니다. 그러나 마음이 몸 안에 있지 않다면 이 모든 노력은 엉뚱한 자리를 향한 기도가 되어 버립니다. 불자 여러분 절에 앉아 기도하실 때 마음의 가슴 안에만 가두려 하지 마십시오. 마음은 가슴보다 넓고 이 몸보다 넓습니다. 염부를 하시되 소리가 가슴 안에서만 울리게 하려 애쓰지 마시고 그 소리가 법당 전체를 감싸고 법당 밖에 허공까지 퍼져 나가는 것을 그저 알아차려 보십시오. 마음을 억지로 잡으려 하지 않고 마음이 본래 이 몸보다 넓다는 것을 허락하는 일 그것이 이 논파가 가리키는 수행의 첫걸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전환이 일어나면 같은 기도를 올려도 기도의 결이 달라지게 됩니다. 마음을 잡으려 애쓰는 기도에서 마음이 본래 넓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기도로 바뀌며 같은 연부를 올리더라도 그 울림이 다는 자리가 달라지게 됩니다. 부처님께서 아난의 첫 답을 허무신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마음이 어디에 있는가 하는 물음에 아난이 몸 안이라 답하는 순간 그 답이 맞다 하면 아난의 수행은 평생 몸 안에 갇히게 됩니다. 부처님께서는 아난이 좁은 자리에 갇히지 않도록 바로 그 첫 답부터 허물어 주신 것입니다. 부처님의 허무심은 단순한 부정이 아니라 더 넓은 자리를 열어 주시는 일이었습니다. 아난의 첫답이 무너진 자리에서 부처님은 아직 답을 주시지 않으셨습니다. 답을 주시기 전에 먼저 잘못된 답을 하나 걷어내시는 일이 필요하였기 때문입니다. 아나는 2000농파 앞에서 잠시 고요히 서 있었을 것입니다. 평생 당연하다고 여겨온 것이 무너지면 사람은 잠시 허공에 뜬 것 같은 느낌을 받게 됩니다. 발 아래 단단하던 땅이 사라진 듯한 그 불안함을 아난도 느꼈을 것이며 법석에 함께 앉은 다른 수행자들도 느꼈을 것입니다. 부처님의 한마디가 법석 위를 고요히 지나가는 동안 누구도 입을 열지 못하였습니다. 한평생 품어온 확신이 한 가지 물음에 허물어지는 것을 대중은 고요히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마음이 몸 안에 없다면 그러면 마음은 도대체 어디에 있는가? 이 물음이 아난의 가슴에 무겁게 내려앉았을 것입니다. 아나는 곧 두 번째 답을 올리기 위해 다시 입을 열었습니다. 안에 있지 않다면 밖에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따라왔을 것이며 한쪽이 무너지면 반대쪽을 찾게 되는 것이 사람의 마음이기에 아나는 곧바로 몸 밖으로 눈을 돌리셨습니다. 아난이 두 번째로 올린 답은 일화였습니다. 마음이 몸 안에 있지 않다면 몸 밖에 있을 것입니다. 등불이 방 안에 있으면 방 안을 비추듯 마음이 밖에 있으면 바깥 세계를 먼저 비추는 것이 이치에 맞습니다. 아난으로서는 자연스러운 답이었을 것입니다. 아니 아니면 바뀌라는 생각은 누구에게나 가장 먼저 떠오르는 논리입니다. 한쪽 눈이 닫히면 반대쪽 문을 밀게 되는 것이 사람의 마음이며 아난도 그 길을 따라 두 번째 답을 올리셨습니다. 부처님께서 물으셨습니다. 아나나 마음이 몸밖에 있다면 마음과 몸은 서로 알지 못해야 하지 않겠느냐. 밖에 있는 것은 아내 일을 모르는 법이다. 마음이 몸밖에 있다 하면 몸에서 일어나는 일을 마음이 알 수 없어야 한다. 그런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손에 가시가 박히면 마음이 그 아픔을 즉시 알아차리고 발을 헛디디면 마음이 그 순간을 놓치지 않습니다. 배가 고프면 마음이 먹고 싶다 하고 몸이 지치면 마음이 쉬고 싶다 합니다. 마음과 몸은 늘 함께 움직이며 한쪽이 느끼면 다른 쪽이 곧바로 알아차립니다.
밖에 있으면서 어떻게 아에 일을 이렇게 빠짐없이 알 수 있겠느냐?
하고 부처님께서는 아난의 두 번째 답도 허무셨습니다.
불자 여러분 이 논파를 듣고 계시면서 한번 살펴보십시오.
마음이 몸밖에 있다면 지금 이 순간 느끼고 계신 모든 것이 설명되지 않습니다.
의자에 앉아 계신 분이라면
등이 의자에 닿는 느낌을
누워계신 분이라면
이불의 무게가 몸 위에 놓인 것을
마음이 빠짐없이 알아차리고 있습니다.
몸에 어디가 편하고 어디가 불편한지를 마음은 한순간도 놓치지 않습니다.
살아 있다는 것 자체가
마음과 몸이 한순간도 떨어져 있지 않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어떤 날은 마음이 어딘가 먼 곳에가 있는 것 같다고 느끼실 때가 있으셨을 것입니다. 멍하니 앉아 마음이 여기에 없는 것 같은 순간도 있으셨을 것이며
그러나 그때에도 마음은 몸을 떠나 잊지 않았습니다.
멍하다는 것을 아는 것이 마음이며
여기 없는 것 같다고 느끼는 것 자체가 마음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어디 다른 곳으로가 버린 적은
실은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기도 중 마음이 딴 곳에가 있다 느끼셨던
그 순간에도 마음은 떠난 것이 아니라 알아차림이 흐려져 있었을 뿐입니다.
부처님께서 이 답을 받아들이지 않으신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안에도 없고 밖에도 없다는 사실 앞에서 아나는 당혹스러웠을 것이며
단순히 답이 틀렸다는 사실보다
자신이 마음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이
더 무겁게 다가왔을 것입니다.
25년간 부처님 곁에서 법을 들으면서도 마음의 자리 하나를 바로 답하지 못하는 자신이 새삼 낯설게 느껴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낯선 바로 그 자리에서야.
마음을 처음으로 바로 볼 수 있는 길이 열리기 시작합니다.
답할 수 있는 자리가 줄어들고 있었으나 아나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안에 있지도 않고 밖에 있지도 않다면
혹시 감각기관 속에 숨어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아난이 세 번째로 내놓은 답은 조금 달랐습니다.
마음은 눈이라는 감각기관 뒤에 숨어 눈을 통해 바깥을 보고 있는 것이라 하셨습니다.
마치 사람이 유리벽 뒤에 서서 바깥 거리를 내다보듯
마음도 눈이라는 유리벽 뒤에서 세상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이
아난의 생각이었습니다.
이 답에는 나름의 치밀함이 담겨 있었습니다.
안도 아니고 밖도 아닌 자리를 찾아야 했기 때문에
안과 밖의 경계에 있는 감각기관을 떠올렸습니다.
눈은 분명 몸의 안쪽에 박혀 있으면서도 바깥 세계를 향해 열려 있습니다.
안과 밖의 사이에 걸쳐 있는 자리이기에 마음이 거기에 숨어 있다 하면
안에의 일도 밖의 일도 알 수 있다는 생각이었을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다시 고요히 물으셨습니다. 아나나. 내가 말한 대로 마음이 눈 뒤에 숨어 있다면 눈을 도구로 삼아 바깥을 보는 셈이 된다.
그런데 도구를 쓰는 자는 그 도구 자체를 볼 수 있어야 한다. 안경을 쓰는 사람은 안경을 벗으면 안경이 보인다. 그러면 마음이 눈 뒤에 있다 하면 마음은 눈 자체를 볼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 그런데 우리는 눈으로 눈 자체를 보지 못한다. 눈 뒤에 있으면서 눈을 보지 못한다면 거기에 있다 할 수 없다. 이 논파가 가리키는 바는 깊습니다. 마음이 눈 뒤에 숨어 바깥을 본다는 것은 몸 안에 또 하나의 작은 존재가 앉아 있다고 여기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마음은 어딘가에 앉아서 바라보는 존재가 아니라 하셨습니다. 우리가 보고 듣고 느끼는 모든 것은 마음의 작용이지만 그 작용이 일어나는 자리에 마음이 앉아 있는 것은 아닙니다. 불이 타오르는 곳에 불씨가 앉아 있지 않듯 마음의 작용이 일어나는 곳에 마음이 자리를 잡고 머물러 있지는 않습니다. 불자 여러분 우리는 평생 눈을 통해 세상을 보아왔습니다. 그런데 눈 자체를 본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거울 앞에 서면 눈의 모습이 비치지만. 그것은 거울이 보여주는 것이지 마음이 직접 눈을 보는 것은 아닙니다. 마음이 눈 뒤에 숨어 있다면 거울 없이도 눈을 볼 수 있어야 하는데 우리에게는 그런 경험이 없습니다. 귀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귀를 통해 소리를 듣지만 귀 자체의 소리를 들은 적은 없습니다. 코로 냄새를 맡지만 코 자체의 냄새를 맡아본 적도 없으며 마음이 감각기관 뒤에 숨어 있다면 그 기관 자체를 먼저 알아차려야 하는데 우리에게 그런 경험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감각기관은 마음이 세상과 만나는 통로이되 마음이 머물러있는 집은 아닙니다. 눈으로 본다 하여 마음이 눈 안에 있다 할 수 없고 귀로 듣는다 하여 마음이 귀안에 있다 할 수도 없습니다. 보고 듣는 일은 감각기관이 하되 보고 들은 것을 아는 일은 마음이 합니다. 아는 자리와 아는 자리가 같지 않다는 것을 부처님께서는 이 논파에서 분명히 밝혀 주셨습니다. 이 세 번째 농파에서 부처님께서 보여주시는 것은 마음을 어딘가에 자리 잡고 앉아있는 것으로 여기는 한 어떤 답도 무너진다는 사실입니다. 마음을 안에 놓으면 아니 맞지 않습니다. 밖에 놓으면 밖도 맞지 않으며 감각기관 뒤에 놓아도 그 자리가 맞지 않습니다. 마음은 어딘가에 놓아 두는 물건이 아니라는 사실이 세 번의 문답을 거치며 조금씩 드러나고 있었습니다. 아나는 세 번째 닭까지 허물어지자 점점 막다른 자리로 내몰리고 있다는 것을 느꼈을 것입니다. 처음에는 당연한 답을 올렸습니다. 두 번째는 논리적인 답을 세 번째에는 치밀한 답을 올렸습니다. 그런데 어느 것도 부처님의 물음 앞에서 살아남지 못하였습니다. 단단해 보이던 바위에 물이 스며들듯 부처님의 물음은 아난히 품고 있던 모든 확신의 조용히 스며들어 그것을 안에서부터 허물어뜨리고 있었습니다. 이 허물어짐은 아난에게만 일어났던 일이 아닙니다. 지금 이 법문을 듣고 계신 우리 안에서도 같은 허물어짐이 고요히 시작되고 있을 수 있습니다. 불자 여러분 이 자리를 한번 되돌아보십시오. 마음이 안해도 밖에도 감각기관 뒤에도 있지 않다면 도대체 마음은 어디에 있는가? 이 무릎이 깊어질수록 우리가 마음이라 부르는 것이 실은 무엇인지를 처음으로 묻게 됩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 새겹의 착각을 벗겨내신 지금 마음이라 불러온 그것의 정체가 비로소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그 흔들림 속에서 아나는 아직 네 번째 답을 품고 있었지만 답이 올라올수록 자신감은 줄어들고 있었습니다. 아난이 네 번째로 올린 답은 앞에 세 답과는 결이 달랐습니다. 눈을 감으면 어둠이 보이는데 이 어둠은 몸 안에 5장6부에 해당한다. 하셨습니다. 또 눈을 뜨면 밝음이 보이는데 이 밝음은 바깥 세계에 해당한다. 하셨습니다. 어둠이 보인다는 것은 마음이 안을 향해 보고 있다는 뜻이며 따라서 마음은 몸 안에 있되 다만 오장육부를 직접 보지 못하는 것뿐이라 하셨습니다.
이 답은 첫 번째 답의 약점을 보완하려는 시도였습니다. 부처님께서 몸 안에 있다면 오장육부를 보아야 하지 않느냐 하시자. 아나는 눈을 감았을 때 보이는 어둠이 바로 그 증거라고 올린 것입니다. 안에 있으면서 왜 못 보느냐는 부처님의 물음에 보고 있되 다만 어둠으로 보인다는 식으로 논리를 세운 것이기에 네 번째 답에는 나름의 정교함이 담겨 있었습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그 정교함마저 단 하나의 물음으로 허무셨습니다. 부처님께서 고요히 물으셨습니다. 아나나 내가 눈을 감았을 때 보이는 어둠이 몸 안이라 하였다. 그러면 한 가지 물어보겠다. 사람이 어두운 방에 앉아 있을 때 눈을 뜨고 있어도 어둠이 보인다. 이 어둠은 몸 안의 어둠이냐. 방 안의 어둠이냐 하고 물으셨습니다. 아나는 이 물음에 선뜻 답하지 못하였습니다. 어두운 방에서 보이는 어둠은 분명 바깥의 것인데 눈을 감았을 때 보이는 어둠과 어둡가 어디인지를 우리는 분명히 가르칠 수 없으며 피부가 경계라 하면 피부는 아닌지 각인지가 탓 다였다면 우리는 과연 어떠한가 하는 물음이 대중한 사람 한 사람의 가슴에도 스며들었을 것입니다. 이 눈물은 아난 한 사람의 눈물이 아니라 마음의 자리를 묻는 물음 앞에 이것은 마음이 아니라 허망한 분별에 불과하다. 이것을 능원경에서는 망심 곧 허망한 마음이라 합니다. 불자 여러분 이 말씀을 가만히 되새겨 보십시오. 우리가 평생 마음이라 불러온 것 생각하고 판단하고 기뻐하고 슬퍼하는 그 모든 작용을 우리는 마음이라 여겨 왔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바깥 조건에 따라 일어났다. 사라지는 반응에 불과합니다. 좋은 일이 생기면 기쁨이 올라오고. 나쁜 일이 생기면 슬픔이 올라옵니다. 칭찬을 들으면 흐뭇해지고 비난을 들으면 위축됩니다. 이 모든 것은 바깥 조건에 끌려다니며 일어나는 반응이지. 우리 본래의 마음이 아닙니다. 가만히 하루를 돌아보십시오. 아침에 일어나면 오늘 할 일이 떠오르고. 누군가의 말 한마디에 기분이 바뀌며 저녁이 되면 피곤함이 밀려옵니다. 이 모든 것은 바깥 조건에 따라 일어났다. 사라지는 것이며 하루 안에도 수없이 바뀝니다.
거울을 한번 떠올려 보십시오.
거울 앞에 꽃을 놓으면 꽃이 비치고
돌을 놓으면 돌이 비칩니다.
비치는 모습은 끊임없이 바뀌지만
거울 자체는 바뀌지 않습니다.
우리가 마음이라 여기며 따라다녔던 것은 거울에 비친 모습이었고
진짜 마음은 그 모습을 비추고 있는 거울 자체에 가까웠습니다.
이것을 알아차리는 것만으로도 수행의 방향이 달라집니다.
거울의 비친 모습을 바꾸려 애쓰는 것이 아니라 거울 자체를 바라보는 것이
수행의 첫걸음이 되기 때문입니다.
아난이 일곱 번 답하면서 자리를 찾으려 했던 것도 바로 이 망심이었습니다.
생각으로 마음의 자리를 찾으려 하였기에 일곱 번 모두 틀린 것입니다.
생각은 마음의 주인이 결코 아니라 마음 위를 지나가는 손님에 불과합니다.
손님의 자리를 찾아봐야 그것은 주인의 자리가 아닙니다.
아나는 손님을 주인이라 착각하고 손님의 자리를 찾으려 법석을 헤맨 셈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부처님께서 가르치시는 진심은 무엇인가?
능엄경에서 밝히시는 진심은
생각 너머에 있는 본래의 알아차림입니다.
생각이 올라올 때 그 올라옴을 아는 것이며
감정이 일어날 때 그 일어남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생각과 감정은 쉬지 않고 바뀌지만
그것을 보고 있는 자리는 바뀌지 않습니다.
이것이 부처님께서 능엄경 전체를 통해 밝히시려는 핵심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보통 마음이라 부르는 것은 끊임없이 바뀌는 표면의 물결이며
그 물결 아래에서 고요히 깨어 있는 바다가
바로 진심입니다.
물결은 바람에 따라 일어났다 사라지지만 바다 자체는 물결과 상관없이
늘 그 자리에 있습니다.
참선하거나 기도할 때
생각을 멈추려 애쓰는 것은
결을 없애려 하는 일과 같습니다.
물결을 없애려 하면
더 큰 물결이 일어나듯
생각을 멈추려 하면
오히려 더 많은 생각이 올라옵니다.
물결은 그대로 두되
그 물결 아래에 바다를 보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입니다.
생각이 일어나면 그대로 두고
그 생각을 보고 있는 고요한 자리를
가만히 느끼십시오.
이것을 좀 더 가까이에서 살펴보십시오.
지금 이 법문을 듣고 계신 이 순간에도 여러 가지 생각이 오고 가고 있을 것입니다.
어떤 생각은 잠깐 머물다 사라지고
어떤 생각은 오래 남아 있기도 합니다.
그런데 생각이 오든 가든
그 오고 가는 것을 알아차리고 있는 무엇인가가 있습니다.
이것은 생각이 아닙니다.
생각이라면 생각과 함께 사라져야 하는데 생각이 사라진 뒤에도
이 알아차림은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이 알아차림은 수행을 통해
새로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닙니다.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으며 깨어 있을 때도 잠들어 있을 때도 쉬지 않고 있어 온 것입니다.
다만 우리가 생각과 감정의 물결에 정신이 팔려 이 알아차림을 잊고 살아왔을 뿐입니다.
부처님께서 가르키시는 진심이란 바로 이것입니다.
불자 여러분 기도를 올리실 때
잡념이 올라오면 그것을 마음이라 여기며
괴로워하셨을 수 있습니다.
잡념을 없애야 기도가 된다고 생각하셨을 것이며
잡념이 사라지지 않으면 기도가 안 된다고 느끼셨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부처님의 이 말씀에 비추어 보면 잡염은 마음이 아닙니다.
잡념은 바깥 조건에 끌려 일어나는 망심의 작용일 뿐이며
그 잡념이 일어나는 것을 알아차리고 계신 바로 그 자리가
진짜 마음에 가깝습니다.
잡념을 없애려 하지 마시고 잡념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아는 그 자리를 한번 느껴보십시오.
잡념과 싸우지 않고 다만 알아차리고 있는 그 자리에 가만히 머무르시면
기도의 결이 달라지기 시작합니다.
기도를 방해하는 것으로 여겼던 잡념이 오히려 진심을 알아차리는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손님과 주인의 비유를 다시 떠올려 보면 여관에 손님이 드나들되 손님은 머물다 떠나고 새 손님이 또 옵니다. 그런데 여관의 주인은 어떤 손님이 와도 떠나지 않으며 손님이 오든 가든 주인은 늘 그 자리에 있습니다. 우리의 생각과 감정은 손님입니다. 기쁨이 왔다 가고 슬픔이 왔다 가고 분노가 왔다 갑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오고 가는 것을 지켜보고 있는 주인은 한 번도 떠난 적이 없었습니다. 부처님께서 이 진심을 밝히시는 까닭은 우리가 평생 손님을 주인으로 알고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생각이 곧 나라고 여겨왔으며 감정이 곧 나라고 믿어왔습니다. 화가 나면 내가 화가 난 것이라 여기며 슬프면 내가 슬픈 것이라 여겨 왔습니다. 그런데 부처님께서는 화도 슬픔도 기쁨도 모두 손님이라 하십니다. 그 손님이 올 때 함께 흔들리는 것은 손님을 주인으로 착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인의 자리에서 바라보면 기쁨도 슬픔도 모두 지나가는 손님이라는 것을 알 수 있으며 그 손님에게 끌려다니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비로소 알게 됩니다. 진심은 흔들리지 않으며 어떤 조건에서도 사라지지 않습니다. 손님이 시끄러워도 주인은 고요합니다. 진심은 어디에 있다 할 수 없으되 모든 것을 비추고 있습니다. 아난이 7번 자리를 찾으려 했을 때 찾아지지 않았던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진심은 특정한 자리에 앉아 있지 않기에 자리를 가리킬 수 없으되 없는 것은 아닙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보고 듣고 알아차리고 있는 이 진심은 분명히 살아있으며 한순간도 떠난 적이 없습니다. 불자 여러분 이것을 한번 직접 살펴보십시오. 지금 눈을 감으시면 어둠이 보일 것이며 그 어둠을 보고 있는 것은 눈이 아닙니다. 눈은 감겨 있기 때문입니다. 어둠을 보고 있는 바로 그것이 부처님께서 능엄경에서 가리키시는 진심의 한 자락입니다. 이 진심은 밖에서 찾아오는 것이 아니며 어디서 빌려오는 것도 아닙니다. 처음부터 지금 이 자리에서 이미 우리와 함께 있습니다. 찾으려 하면 잡히지 않지만 찾기를 멈추고. 고요히 알아차리면 진심은 늘 여기에 있었다는 것을 비로소 보게 됩니다. 아난이 눈물 뒤에 만난 것도 바로 이 자리였습니다. 그렇다면 이 깨달음이 우리의 기도와 수행에 어떤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이 법문의 처음으로 돌아가 보십시오. 우리는 이 법문을 시작하면서 마음의 자리를 모르고 하는 기도가 헛도는 까닭을 함께 살펴보았으며 그 답이 능원경 칠처진 심 속에 고스란히 들어 있었습니다. 마음의 자리를 모르고 올리는 기도는 받는 이의 주소를 모른 채 부친은 편지와 같습니다. 아무리 간절한 말을 적어넣어도 주소가 없으면 편지는 돌아오지 않으며 마음이 몸 안에 있다. 여기고 기도하면 기도는 몸 안에 갇히며 마음이 밖에 있다. 여기고 기도하면 기도는 바깥으로 흩어집니다. 마음의 자리를 알지 못한 채 올리는 기도는 어디로 향해야 할지를 모르는 기도와 같았습니다. 법당에 앉아 간절히 기도를 올렸는데 기도가 끝나고 나면 마음이 텅 비어 있는 듯한 느낌을 받으셨을 수 있습니다. 무엇인가를 열심히 구했는데 구한 것이 마음에 닿지 않은 듯한 허무함을 느끼셨을 것입니다. 이것은 기도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기도가 마음의 자리를 향하지 못했기 때문이며 마음의 자리를 모르면 기도는 머리로 올리게 됩니다. 머리로 올린 기도는 생각이 끝나면 함께 사라집니다. 그래서 기도 중에는 간절했던 마음이 기도가 끝나면 금세 잊히고 다시 똑같은 일상 속으로 돌아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기도의 방향을 바꾸어야 하는 까닭입니다. 기도가 마음의 자리를 향해 올라갈 때 기도는 비로소 마음에 닿게 됩니다. 마음에 닿은 기도는 법당을 나선 뒤에도 사라지지 않으며 일상의 한가운데에서도 고요히 살아남아 있습니다. 불자 여러분 아난이 일곱 번 답하고 일곱 번 무너진 끝에 부처님께서 밝히신 것을 되새겨 보십시오. 우리가 마음이라 불러온 생각과 분별은 망심이 불가하며 진짜 마음은 생각 너머에서. 모든 것을 고요히 비추고 있는 알아차림 그 자체라는 것입니다. 이전에는 기도할 때 마음을 한 곳에 모으려고 애를 쓰셨을 것이며 그 자리에 마음을 붙잡아 두려 하셨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능원경에 칠처진 SIM을 지나오신 지금 마음은 특정한 자리에 모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아셨습니다. 마음을 모으려 하지 않아도 마음은 이미 여기에 있습니다. 모으려는 힘을 내려놓으시고 이미 있는 마음을 그대로 알아차리시면 됩니다. 처음에는 이것이 너무 단순하게 느껴지실 수 있습니다. 그동안 힘을 주어 마음을 모으려 했던 분일수록 힘을 빼고 알아차리기만 하라는 말이 허전하게 들리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힘을 뺀 자리에서 오히려 마음이 깊어지는 것을 경험하시게 될 것이며 그 경험이 쌓일수록 기도의 자리가 달라지기 시작합니다. 마음의 자리를 아는 기도는 무엇을 구하는 기도가 아닙니다. 무엇을 달라고 비는 기도는 마음 밖에 무엇인가를 놓고 그것을 향해 손을 뻗는 행위입니다. 그러나 진심은 밖에 있지 않습니다. 진심은 지금 이 자리에서 이 기도를 올리고 있는 바로 이 알아차림 속에 이미 있습니다. 구하는 마음을 내려놓고 기도를 올리고 있는 바로 이 순간을 알아차리는 것 이것이 마음의 자리를 아는 기도입니다. 이 기도는 겉으로 보면 이전의 기도와 다를 것이 없습니다. 같은 자리에 앉아 같은 경전을 읽고 같은 연부를 올립니다. 그러나 안에서 일어나는 일은 전혀 다릅니다. 이전에는 무엇인가를 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였지만 이제는 기도를 올리고 있는 이 순간 자체를 알아차리며 기도합니다. 이전에는 기도의 결과를 기다렸지만
이제는 기도하고 있는 바로 이 자리가 이미 결과이기도 합니다.
염불을 올리실 때를 한번 떠올려 보십시오.
나무아미타불을 외우는 소리가 입에서 나오고 그 소리가 귀에 들립니다.
그런데 그 소리를 듣고 있는 것은 귀가 아닙니다.
귀는 소리를 받아들이는 통로일 뿐이며 소리를 듣고 있다는 것을 아는
그 알아차림이 진심에 가깝습니다.
그 알아차림이 진심에 가깝습니다.
염불의 소리에 마음을 실으시되
소리를 듣고 있는 그 자리를 함께 느끼십시오.
소리와 알아차림이 하나로 만나는
그 자리가 바로 염불삼매이며
이 자리에서 염불은 단순한 반복이 아닌 살아 있는 수행이 됩니다.
절을 올리실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몸이 바닥에 닿는 순간 무릎과 이마가 땅에 내려가는 그 느낌을 알아차리고 계십니다. 그 알아차림이 바로 진심이 머무르는 자리입니다.
절을 몇 번 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절을 올리는 바로 그 순간에
온 마음으로 깨어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깨어있는 기도는
한 번의 절에도
온전한 마음이 담깁니다.
천번의 절을 수로만 채우는 것보다
한 번의 절에 온전히 깨어 있는 것이 수행의 바른 자리에 가깝습니다.
경전을 읽으실 때도
글자를 눈으로 쫓는 것이 아니라
글자가 마음에 닿는 그 순간을
알아차리며 읽으면
같은 경전이 다르게 열리기 시작합니다.
좌선을 하실 때도
생각을 멈추려 애쓰는 대신
생각이 오고 가는 것을 보고 있는 자리에 가만히 머무르십시오.
그 자리에서 좌선이 고요해지며 억
지로 만들어낸 고요가 아닌
처음부터 있어 온 본래의 고요를 만나게 됩니다.
불자 여러분 기도가 끝난 뒤를 생각해 보십시오.
기도의 말이 끝나고 경전을 덮고 자리에서 일어날 때
마음의 자리를 모르고 하는 기도는
거기서 끝이 납니다.
그러나 알아차리는 기도는
자리에서 일어난 뒤에도 이어집니다.
걸을 때 발이 땅에 닿는 것을 알고
밥을 먹을 때 숟가락이 입에 닿는 것을 알아차리며
누군가와 말할 때 말하고 있는 자신을 아는 것
이 자리에서 기도는
하루 종일 이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법당 안에서만이 아니라
삶 전체가 기도의 자리가 됩니다.
이것이 마음의 자리를 아는
수행자의 삶이며
능엄경이 가리키는 수행의 궁극적인 모습입니다.
아나는 25년간 부처님 곁에서 법을 들으면서도 마음의 자리 하나를 몰랐습니다. 7번의 답이 모두 무너진 뒤에야 비로소 자신이 무엇을 모르고 있었는지를 알게 되었으며 그 모름 위에서 부처님의 진짜 가르침이 시작되었습니다. 아난의 이 여정은 우리에게 하나의 길을 보여줍니다. 기도를 오래 했다고 마음을 아는 것이 아니며 경전을 많이 읽었다고 마음이 밝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이 마음이 이미 이 자리에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 이 한 가지를 가슴에 새기시면 기도가 달라지고 수행이 달라집니다. 들은 것을 아는 것으로 아는 것을 깨달은 것으로 바꾸어 가는 여정이 오늘 이 법문에서 시작되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모든 수행의 출발점이며 능엄경 7처 증심이 2500년 동안 전해져 온 까닭입니다. 이 법문이 끝나고 일상으로 돌아가시더라도 오늘 만난 이 앎을 가슴 한쪽에 고요히 간직하고 계시기를 바랍니다. 마음의 자리를 모르고 흔들리던 기도가. 오늘 이 법문을 기점으로 달라질 수 있습니다. 오늘 밤 잠들기 전에 한 번 눈을 감아보십시오. 어둠 속에서도 무엇인가를 보고 있는 그 자리가 이 법문이 오늘 밤 드리는 선물입니다. 특별한 수윙이 아니라 다만 알아차리는 것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불자 여러분 이 논문을 들으신 모든 분들의 마음에 작은 등불 하나가 켜지기를 바란합니다. 이 논문의 공덕이 듣는 모든 분들에게 회양되기를 일체중생이 마음의 본래 자리를 바로 보아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부처님 전에 발언드립니다. 오늘 법문도 끝까지 함께 들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