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회 머니투데이 경제신춘문예 / 강태승
눈보라 / 강태승
밖에는 죽어라 무너져라 눈이 내리고
찬바람은 빈틈으로 칼을 들이미는
너덜너덜한 신발들만 모인 식당
옆 탁자에서 한 사람은 명퇴자이고
한 사람은 명퇴하여 사업 중이고
한 사람은 명퇴 대상자라는데
펄펄 끓는 선짓국이다
처음엔 꽃송이를 주고받다가
말과 말 사이 핏물이 보이더니
칼을 쥔 것처럼 솔직한 손짓발짓에
누룽지 까맣게 탄
이야기 내 술잔에 배인다
딸이 고3인데 명퇴하였다는
아들이 대학2학년인데 명퇴금으로
조그만 사업을 하다가
사기당해 다시 취직했다는
노모가 암에 걸렸는데 명퇴 대상자라는
날고기가 안주로 배달된다
살점 떼어 주는 것처럼 권하는 소주
어린 사람은 피처럼 받아 마신다
금세 꽃이 다아 떨어졌는지
대화가 묵처럼 엉키고
컴컴한 데에 못질하는 소리
관(棺)뚜껑처럼 깔리는 눈꺼풀
이때다 하고 창문 후려지는 눈보라,
나이 든 사람이 소주잔을 중앙에 놓는다
다시 놓인 선짓국
나도 문제를 가로질러
막걸리를 사발에 부었다
눈보라가 팽팽하게 들이치다 도망가고
멀어지다가 죽은 듯이 펑펑 내린다.
[수상소감] 두 번 맞은 부도…혼자 마신 막걸리에서 나온 시
서울 충무로 인쇄소 골목 구멍가게에서 친구와 술을 먹다 당선 소식을 들었습니다.
요즘 경기가 좋지 않아 이른 오후부터 술 냄새를 풍기는 인쇄소 골목,
20년 넘게 인쇄출판업을 하면서 세상물정 제대로 모르고 일을 했다가 부도를 두 번 맞은 적이 있습니다.
서울 중구 약수시장 골목 순댓국집에서 혼자 막걸리를 마시는데 옆 탁자에서 나보다
더 뜨겁거나 가슴 아픈 애기를 들으니 나도 모르게 이 시를 썼습니다.
좀 서럽거나 아쉬운 이야기들을 함박눈이 아늑하거나 따뜻하게 덮어주는 날이었습니다.
좋은 일이나 가난한 날도 봄이 오면 같은 봄을 맞으니 세월 지나고 나면 여름엔 같은 나뭇가지에서 꽃이 핍니다. 오히려 가난했던 시절의 줄기가 더 곱게 단풍 들기도 하겠습니다.
IMF(국제통화기금) 외환위기 때보다 어렵다고 합니다.
경제를 걱정하기보다 국민의 걱정거리를 생산하는 정치권을 보면 답답해지는 현실이지만
우리 국민들의 민주주의 수준을 보면 안도감이 들기도 합니다.
정치·경제가 조속히 제자리 찾기를 소망하며 부족한 제 시를 뽑아주신
심사위원님과 관계자분들께 감사의 말씀 올립니다.
감사합니다.
[심사평] 명퇴자의 애환·거리의 간판 묘사, 섬세하고 리얼했다
올해 경제신춘문예에서는 시 부문과 산문(소설 수필 수기) 부문에서 공동 당선자를 내게 됐다.
먼저 시 부문에서 어느 해보다 응모작이 많았다. 다만 작품의 우열이 뚜렷해 양보다는 질이 아쉬웠다.
총 5명의 작품이 최종에 남았다. 그 가운데 이OO씨의 <세탁사의 미로>와 정OO씨의 <타이어>가
눈에 띄었으나 함께 응모한 작품들이 신뢰를 깨뜨려 일찌감치 탈락됐다.
응모자들은 무엇보다도 순수한 자신의 창작품으로 승부하는 기본을 어겨서는 안될 것이다.
한편 박봉철씨의 <바지랑대>는 팽팽한 시적 긴장감을 이미지와 결합시키는 능력이 돋보였으나
입상작으로 하기엔 호흡이 너무 짧았다.
결국 넙치와 그 넙치로 회를 뜨는 남자를 긴장되게 묘사한 김상현씨의 <넙치회>와 눈보라 몰아치는 밤,
허름한 식당에 모여 술을 마시는 명퇴자나 명퇴 대상자들의 애환을 그리고 있는
강태승씨의 <눈보라>가 마지막까지 경합을 펼쳤다.
논의를 거듭한 끝에 경제신춘문예라는 주제에 더욱 충실한 <눈보라>를 최종 수상작으로 결정했다.
너덜너덜한 인생 같은 사람들이 모인 식당에서 펼쳐지는 ‘부도수표’와도 같은 삶의 모습이
술과 음식들과 엉켜 리얼하게 묘사되고 있다.
시가 세련되지 못하고 투박한 것은 어쩌면 우리네 삶 자체가 그러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이유로 <눈보라>를 당선작으로 정했다.
산문 분야에서는 우선 소설에서 권행백씨의 <악어사냥>, 수필에서 임철순씨의 <부녀가 나누는 경제 이야기>,
박지영씨의 <시애틀의 백년 된 치킨집 이야기>가 최종에 남았다.
소설 <악어사냥>은 재미있게 읽히기는 하나 작품 초반에 유지했던 흥미와 긴장감이 중반에 접어들면서
돈벌이를 위해 악어를 남획해 그것을 팔고 사는 이야기로 넘어가면서 인간이 기본으로 지켜야 할
자연주의에 반하는 작품이 되고 말았다.
남은 두 편의 수필은 모두 뛰어나다.
당선작으로 뽑은 <시애틀의 백년 된 치킨집 이야기>는 지난 몇 년 동안 한 자리에
여러 업종의 사람들이 차례로 들어와 간판을 달고 영업을 하는 모습을 그렸다.
한 업종이 장사를 하다가 문을 닫고 나가면 그 자리에 다른 업종이 새로운 간판을 달고
영업을 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시선이 섬세하면서도 따뜻하고 또 분석적이다.
마치 거리의 경영학을 살피는 듯한 모습이 반듯한 문장으로 그려졌다.
이 작품을 시의 <눈보라>와 함께 공동 당선작으로 정했다.
또 한편의 수필 <부녀가 나누는 경제 이야기>는 ‘성수기와 비수기’ ‘재래시장과 마트의 차이’와 같은
우리 일상생활 속의 경제이야기를 부녀의 대화로 알기 쉽게 설명해나가는 방식인데
특히 그것을 하나하나 설명하는 비유가 뛰어나 가작으로 결정했다.
세 사람의 수상을 축하하며 아울러 입선에 들지 못한 모든 응모자들에 대한 위로와 함께 정진을 바란다.
심사위원 이순원, 이희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