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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조주가 선물한 세상 원문보기 글쓴이: 박종태목사
기드온② -표적을 보여 주소서/삿 6:17-40
17. 기드온이 그에게 대답하되 내가 주께 은혜를 얻었사오면 나와 말씀하신 이가 주 되시는 표징을 내게 보이소서
18. 내가 예물을 가지고 다시 주께로 와서 그것을 주 앞에 드리기까지 이곳을 떠나지 마시기를 원하나이다 그가 가로되 내가 너 돌아오기를 기다리리라
19. 기드온이 가서 염소 새끼 하나를 준비하고 가루 한 에바로 무교전병을 만들고 고기를 소쿠리에 담고 국을 양푼에 담아서 상수리나무 아래 그에게로 가져다가 드리매
20. 하나님의 사자가 그에게 이르되 고기와 무교전병을 가져 이 반석 위에 두고 그 위에 국을 쏟으라 기드온이 그대로 하니
21. 여호와의 사자가 손에 잡은 지팡이 끝을 내밀어 고기와 무교전병에 대매 불이 반석에서 나와 고기와 무교전병을 살랐고 여호와의 사자는 떠나서 보이지 아니한지라
22. 기드온이 그가 여호와의 사자인줄 알고 가로되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내가 여호와의 사자를 대면하여 보았나이다
23.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너는 안심하라 두려워 말라 죽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24. 기드온이 여호와를 위하여 거기서 단을 쌓고 이름을 여호와살롬이라 하였더라 그것이 오늘까지 아비에셀 사람에게 속한 오브라에 있더라
25. 이날 밤에 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이르시되 네 아비의 수소 곧 칠년된 둘째 수소를 취하고 네 아비에게 있는 바알의 단을 헐며 단 곁의 아세라 상을 찍고 26. 또 이 견고한 성 위에 네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규례대로 한 단을 쌓고 그 둘째 수소를 취하여 네가 찍은 아세라나무로 번제를 드릴찌니라
27. 이에 기드온이 종 열을 데리고 여호와의 말씀하신대로 행하되 아비의 가족과 그 성읍 사람들을 두려워하므로 이 일을 감히 백주에 행하지 못하고 밤에 행하니라 28. 성읍 사람들이 아침에 일찌기 일어나 본즉 바알의 단이 훼파되었으며 단 곁의 아세라가 찍혔고 새로 쌓은 단 위에 그 둘째 수소를 드렸는지라
29. 서로 물어 가로되 이것이 누구의 소위인고 하고 그들이 캐어 물은 후에 가로되 요아스의 아들 기드온이 이를 행하였도다 하고
30. 성읍 사람들이 요아스에게 이르되 네 아들을 끌어내라 그는 당연히 죽을찌니 이는 바알의 단을 훼파하고 단 곁의 아세라를 찍었음이니라
31. 요아스가 자기를 둘러선 모든 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바알을 위하여 쟁론하느냐 너희가 바알을 구원하겠느냐 그를 위하여 쟁론하는 자는 이 아침에 죽음을 당하리라 바알이 과연 신일찐대 그 단을 훼파하였은즉 스스로 쟁론할 것이니라 하니라 32. 그 날에 기드온을 여룹바알이라 하였으니 이는 그가 바알의 단을 훼파하였은즉 바알이 더불어 쟁론할 것이라 함이었더라
33. 때에 미디안 사람과 아말렉 사람과 동방 사람들이 다 모여 요단을 건너와서 이스르엘 골짜기에 진을 친지라
34. 여호와의 신이 기드온에게 강림하시니 기드온이 나팔을 불매 아비에셀 족속이 다 모여서 그를 좇고
35. 기드온이 또 사자를 온 므낫세에 두루 보내매 그들도 모여서 그를 좇고 또 사자를 아셀과 스불론과 납달리에 보내매 그 무리도 올라와서 그를 영접하더라
36. 기드온이 하나님께 여짜오되 주께서 이미 말씀하심 같이 내 손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려 하시거든
37. 보소서 내가 양털 한 뭉치를 타작마당에 두리니 이슬이 양털에만 있고 사면 땅은 마르면 주께서 이미 말씀하심 같이 내 손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실줄 내가 알겠나이다 하였더니
38. 그대로 된지라 이튿날 기드온이 일찌기 일어나서 양털을 취하여 이슬을 짜니 물이 그릇에 가득하더라
39. 기드온이 또 하나님께 여짜오되 주여 내게 진노하지 마옵소서 내가 이번만 말하리이다 구하옵나니 나로 다시 한번 양털로 시험하게 하소서 양털만 마르고 사면 땅에는 다 이슬이 있게 하옵소서 하였더니
40. 이 밤에 하나님이 그대로 행하시니 곧 양털만 마르고 사면 땅에는 다 이슬이 있었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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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 처| 류영모목사
I. 출애굽 모티브(모세와 기드온)
유일한 여성 사사 드보라와 함께 이스라엘은 40년동안 평온한 세월을 보내게 됩니다. 드보라 사사가 사라지자 이스라엘은 또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게 되지요.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미디안, 아말렉 족속의 손에 맡겨서 고난을 당하게 합니다. 이스라엘은 산지 토굴로 쫓겨나 역사상 가장 초라한 꼴을 하고 하루하루를 살아갑니다. 이스라엘이 살려달라 애처롭게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하나님은 사사로 기드온을 선택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사자가 기드온을 찾아 왔을 때 기드온은 독립투사를 모아 훈련하는 것이 아니라 한끼 양식을 마련하기 위해 포도주 틀 속에 숨어서 부지갱이로 밀 타작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꼴이 누군가에게 들통이 날 때에 커다란 수치를 느낄 수밖에 없었지요. 그런데 여호와의 사자는 기드온에게 "큰 용사여 하나님이 너와 함께 하신다"고 말합니다.
분명 놀리는 말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기드온은 부끄러움에 여호와의 사자에게 항의를 하게 됩니다. "날 보고 큰 용사라구요. 나는 가장 작은 지파에 속한 사람이고 그 지파 가운데서 가장 초라한 가문의 사람이며 그 가운데서도 가장 못난 가장 작은 사람입니다" 고백을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면 우리가 이 꼴을 하고 살겠습니까? 출애굽을 하고 광야를 여행할 때에 또 가나안 땅에 입성할 때에 있었던 하나님의 그 놀라운 기적은 어디에 간 것입니까? 여호와의 사자는 기드온의 거역과 항거에 아랑곳하지 아니하고 말씀하십니다. "네 힘으로 네가 가라" "네가 네 백성을 구원하거라." 내 힘이라구요? 내 힘이 어디 있는데요? 내가 너와 함께 하는 것 이것이 너의 힘이니라. 기적이 어디 있느냐구? 내가 너와 함께 하는 것 이것이 기적이니라. 그러므로 너는 한 사람을 치듯이 미디안을 물리치게 될 것이다. 이게 힘이 아니고 무엇이겠느냐? 이게 기적이 아니고 무엇이겠느냐?“ 여기까지가 대략적인 지난 시간까지의 말씀입니다.
사사기 기드온 사건을 살펴보면 열두 사사 중에서도 상당히 독특한 사사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모세가 하나님을 대면하여 하나님과 말씀을 나누듯이 하나님이 직접 기드온과 말씀을 나누게 됩니다. 기드온은 또 하나님께 말씀을 드립니다. 그리고 직접 대화가 하나님과 기드온 사이에 오고 가게 됩니다. 모세의 경우처럼 성경의 해설자가 등장해서 하나님과 그리고 기드온 사이에 오고 가는 대화를 해설하는 것으로 기드온의 사건은 계속 이어져 가게 됩니다.
이것을 성경학자는 출애굽 모세 모티브라고 어려운 말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출애굽기 2장 23절부터 4장 14절 사이에 모세와 대면하는 하나님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사사기 6장 6절부터 7장 10절 사이에 기드온과 하나님은 깊은 대화를 나누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찾아오고 기드온을 찾아온 상황을 살펴보면 이스라엘이 고통에 겨워서 하나님께 부르짖을 때에 하나님이 모세를 찾아오고 기드온을 찾아옵니다. 그래서 출애굽기에서는 모세를 부르듯이 사사기에서는 기드온을 부르십니다. 내가 너를 내 백성에게로 보낸다. 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시지요.
하나님의 소명의 목적이 어디에 있느냐? 모세에게는 이스라엘을 인도하라고 말씀하시고 기드온에게는 이스라엘을 구원하라 말씀하십니다. 그때에 모세와 기드온이 하나님이 나를 찾아오셨구나. 감격해 우는 것이 아니라 모세는 보낼 만한 자를 보내주소서라고 말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기드온은 나는 제일 작은 자라고 넋두리를 하게 되지요. 하나님께서 포기하지 아니하시고 다시 그들을 격려할 때에 "내가 너와 함께 하겠다" 이 말씀을 모세에게도 하고 또 기드온에게도 합니다.
모세와 기드온은 똑같이 더 굳은 확신을 위해서 표징을 요구하게 되고 그 표징의 요구는 하나님 앞에 놀라운 경험을 할 수 있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만나고 기드온을 만날 때에 불 가운데서 만나주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모세는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 하나님을 만나고 기드온은 반석에서 불이 나와서 하나님을 경험하게 됩니다.
사사기 기자는 출애굽의 영웅 모세와 기드온을 의도적으로 비교하며 그 유사성을 강조하게 됩니다. 사사기 기드온의 기사가 출애굽 모세의 모티브를 따르고 있다 그만큼 열두 사사 가운데 기드온은 대단히 위대한 영웅같은 사사로 기록되어 지고 있습니다.
II. 지팡이와 바위
오늘 본문 시작하는 17절 18절에서도 "하나님께서 네가 가서 네 힘으로 내 백성을 구원하라"고 했더니 기드온이 뭐라 말합니까? "말씀하신 당신이 주님이라는 표징을 보여주십시오. 내가 집에 가서 예물을 가지고 오겠습니다. 꼼짝 말고 여기 계십시오." 하나님이 또 말씀하십니다. "그래 네가 올 때까지 내가 기다리마. 꼼짝하지 않고 여기 기다리마." 여기 여호와의 사자께서 천군천사를 거느리고 날개를 달고 천사의 모습으로 오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육신을 입은 사람의 모습으로 기드온을 만나주셨습니다. 그러니 당신이 우리 민족을 출애굽 시킨 그 주님 되심을 보여 달라고 합니다. 기드온이 예물을 준비한 것은 이미 하나님께 응답한 것이었고 일종의 신앙고백이었고 일종의 헌신의 결단이었습니다.
기드온이 집에 가서 흉년, 먹을 것 없는 고통의 때에 힘껏 예물을 준비해 옵니다. 예물의 내용을 보면 염소 새끼 한 마리를 잡아서 큰 소쿠리에 고기를 가득히 담습니다. 가루 한 에바 - 밀가루 한말 반 정도를 풀어서, 무교전병 - 누룩없는 떡을 만들어서 가져옵니다. 국을 큰 양푼에 가득히 담아 옵니다. 19절 내용입니다. 이것은 한 사람이 식사하기엔 양이 너무 많지요. 이것은 식사를 준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예물을 제사 제물을 준비한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표징을 보여달라는 기드온에게 여호와의 사자가 어떻게 응답합니까? 20절에 보면 "고기와 무교전병을 바위 위에 올려놓아라. 거기다가 국을 쏟아라. 여호와의 사자가 지팡이를 내밀었을 때에 불이 확 올라오더니 모든 제물들을 불 태워버립니다. 기드온이 깜짝 놀라서 쳐다보니 순식간에 제물들은 불타서 연기가 되어서 하늘을 솟아올랐고 또 여호와의 사자는 어디론가 떠나서 사라져 버렸습니다."
성경을 잘 살펴보면 여호와의 사자의 지팡이에서 불이 나온 것이 아닙니다. 바위에서 불이 나왔다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지팡이를 내밀었다면 상식적으로 지팡이 끝에서 불이 나와야 하는 겁니다. 그럼 바위를 갈라서 바위에서 불이 나온다고 한다면 지팡이를 내밀 필요가 없는 것이지요.
그런데 지팡이가 왜 필요했을까요?
지팡이가 부싯돌 역할을 한 것일까요? 무슨 뜻인고 하니 기드온아 너는 지팡이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순종하고 가기만 하라는 것입니다. 인간은 그 누구도 손가락 끝에서 불을 내는 사람은 없다는 것입니다. 불은 오직 하나님에게서 나온다는 것이지요. 너는 가기만 하라는 것입니다. 힘이 없다. 나는 작은 자다. 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불이 되어 주실 것이다. 하나님이 네 힘이 되어 주실 것이다. 하나님께서 큰 용사가 되어 주실 것이라는 약속으로 내밀기는 지팡이를 내밀었는데 지팡이 끝에서 불이 나온 것이 아니라 반석이 터져서 거기서 큰 불이 갑자기 솟아올라 제물을 불태우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반석이십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반석이 되십니다. 광야 목마른 백성들을 위해서 반석에서는 물이 쏟아졌습니다. 기드온의 반석에서는 불이 쏟아졌습니다. 오늘도 목마른 영혼들을 위하여 반석되신 예수님께서는 생수를 쏟아 부어주십니다.
오늘도 냉랭한 영혼들이 하나님의 집에 나올 때는 그 냉랭한 심령에 불을 붙여 주십니다. 지금 나의 영혼이 목이 말라 있는가? 하나님 앞에 내 영혼이 싸늘하게 식어져 있는가? 냉랭해져 있는가? 여러분은 물이 필요하십니까? 아니면 불이 필요하십니까? 지금 우리가 드리는 이 예배는 불이 있는 예배입니까? 하나님 앞에 기도하기 위해서 엎드릴 때마다 내 가슴속에 큰 불이 타오르고 있습니까? 이 불은 기드온의 모든 죄를 태우는 불이었고 허물과 상처를 녹이는 불이었고 또 나태와 타락을 모두 태워버리는 그런 불이었습니다.
III. 여호와 샬롬
하나님의 불, 하나님의 임재, 하나님의 응답을 경험하고 기드온이 하는 말이
22절에 기록되어져 있습니다. 22절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내가 여호와의 사자를 대면하여 보았나이다" 그때 23절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너는 안심하라 두려워하지 말라 죽지 아니하리라" "안심하라" - “안심하라”는 말이 원문에 샬롬하라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죽지 아니하리라. 그 말을 듣고
24절 "기드온이 여호와를 위하여 거기서 제단을 쌓고 그것을 여호와 살롬이라 - 평강의 여호와라" 그렇게 불렀습니다. 공동번역에서는 "안심시켜 주시는 여호와" 그렇게 번역합니다.
구약에서 백성들은 하나님을 만나면 그 자리에서 죽는 줄 알았습니다. 평민들뿐만 아니라 제사장, 대제사장도 일년에 한번씩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 지성소에 들어갑니다. 지성소에 들어갈 때에 방울을 매달고 들어갑니다. 제사를 집례하는 과정 속에서 방울 소리가 딸랑딸랑딸랑 들리면 대제사장이 살아있는 겁니다. 그런데 방울 소리가 멈추어지면 제사를 집례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임재가 나타나서 대제사장이 그 자리에서 죽은 걸로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대제사장이 죽었다고 그래서 지성소에 누가 들어가게 되면 또 하나님의 거룩한 전에 들어가 하나님을 목격하게 되고 그 사람도 죽을 것 아니예요. 그러니까 대제사장이 들어가게 될 때는 밧줄을 길게 바깥에 매달아 놓고 들어갑니다. 그래서 방울소리가 멈추어지게 되면 그 끈을 밖에서 당겨서 지성소 밖으로 끌어내게 되었던 것이지요.
기드온이 바로 이 날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을 때에 기드온의 머릿속에 '아하, 내가 내 앞에 그 분을 하나님인줄 몰라보다니 그분이 나를 찾아오셨다니 타락된 눈으로 죄악된 눈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뵈었으니 나는 이제 죽게 생겼구나.' 그래서 두려워 떨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두려워하지 말라 안심하라 너는 죽지 아니할 것이다" 그래서 그곳의 이름을 하나님을 만나고도 죽지 않은 장소, 그 제단을 쌓고 그곳의 이름을 여호와 살롬이라 불렀던 것이지요.
지금까지 우리는 살롬이라 했을때 마음의 평안, 마음이 고요해 지는 것 또 큐티할 때 마음이 안정되어 지는 것, 평강을 우리는 살롬이라 생각해 왔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여호와 살롬의 평강은 그런 살롬, 평강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냐? 죽어야 되는 상황속에서 멀쩡히 내가 살아있는 평강이었습니다. 내가 지옥에서 영원히 고통받아 죽어야 됐는데 하나님을 만나고서 죽지 않을 수 있는 그런 평강이었습니다. 마귀의 올무에 꽁꽁 묶여서 꼼짝달싹 할 수없는 영적인 전쟁터에서 처절하게 실패하고 깨지고 망가지고 피투성이 되어 살아야 되는데 내가 멀쩡히 살아있는 평강, 승리의 모습으로 살아있는 평강, 이 모습을 일컬어서 여호와 살롬, 하나님은 나의 평강이라 그렇게 고백하게 된 것이지요.
지금까지 기드온의 모습은 "큰 용사"라기 보다는 소심한 졸병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사사기는 기드온을 역사의 무대에 등장시키며 6장 전체에서 기드온의 소심함, 유약함으로 가득히 채우고 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이처럼 초라하고 소심하고 유약한 모습, 강하고 담대함을 상실한 이 모습이 바로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의 모습이었다는 것이지요. 지금 이 기드온의 모습은 당시 이스라엘의 모습이었고 또 오늘 우리 자신의 모습일 수 있고 한국교회의 모습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토록 소심하고 유약한 기드온을 볼 때에 내 얼굴을 볼 수 있어야 되고 우리교회의 얼굴을 볼 수 있어야 되고 한국교회의 모습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낙타를 타고 밀려오는 미디안 족속에 대한 두려움이 낳은 상처가 바로 초라함, 유약함 소심함으로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두렵다, 두려워 한다는 말이 반복적으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6장 10절, 23절, 27절, 7장 10절.
또한 기드온 사건을 계속 읽어가다 보면 기드온의 주 활동 무대가 낮이 아니라 밤 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밤에 바알과 아세라 목상을 찍어서 깨뜨려버립니다. 밤에 하나님을 믿지 못하여 하나님 앞에 표징을 요구합니다. 심지어 전쟁도 기드온은 낮에 하는 것이 아니라 밤에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낮을 미디안에게 송두리째 빼앗긴 하나님의 백성의 모습입니다. 낮은 이스라엘에게 온통 두려움의 시간이었습니다.
지난 시간 기드온은 밀 타작을 하는데 타작마당에서 밀 타작을 하는 것이 아니라 포도주 틀 속에 들어가서 부지갱이로 밀을 털고 있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평지평온을 다 빼앗기고 산지로 올라가 웅덩이 굴 산성에 숨어서 사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는 공간상실, 이번 시간에는 시간의 상실을 볼 수 있습니다. 시간의 공간을 다 빼앗기고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을 통하여 사사기 기자가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 주고 싶었던 것일까요?
하나님은 온 우주와 역사의 주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공간의 주인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 역사, 시간의 주인이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잃어버렸더니 공간을 잃어버리고 시간을 다 잃어버리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공간과 시간의 주인으로 살라고 이곳에 보내셨습니다. 그런데 지금 시간의 주인 자리, 공간의 주인 자리를 다 빼앗기고 살아야 했습니다.
한국교회, 오늘 한국교회 성도들에게 이 사사기 기자는 시간을 초월하여 우리에게 묻는 것입니다. 그대는 공간의 주인으로 살아가는가? 네가 섬기는 그 교회는 이 한소망교회가 몸담고 있는 이 도시에 주인으로 살아가는가? 그대가 직장에 들어가서 직장에서 살아갈 때에 직장에 주인으로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가는가? 묻는 것입니다. 지금 한국교회 그리스도인들이 한국교회가 시간의 주인이 되어서 살아가는가? 역사에 대한 책임의식이 있는가? 이것을 이름하여 역사의식이라 하는 것이지요. 너는 돈을 쓰면서도 돈의 주인인가? 아니면 돈의 노예로 살아가는가? 하루 하루를 지낼 때에 너는 시간의 주인이냐 아니면 시간의 노예이냐? 하는 것을 묻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시간과 공간의 주인이십니다. 하나님을 잃어버리고 나면 시간과 공간을 다 상실하고 살아가게 되는 것이고 하나님을 얻으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공간과 시간을 우리는 얻고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IV. 여룹 바알
하나님의 소명을 확인한 기드온에게 주어진 첫 번째 미션 - 사명은 므낫세 부족안에 있는 바알과 아세라 제단을 때려 부수는 일이었습니다. 미디안을 때려부수기 전에 먼저 때려부셔야 될 것이 바알과 아세라 우상의 제단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몰락을 가져온 첫 번째 원인이 바로 하나님을 버리고 바알을 섬긴데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을 위축시키고 이스라엘 땅에서 하나님의 축복과 능력을 앗아간 것이 바로 바알과 아세라 우상 숭배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에 더하여 나라를 구하기 전에 먼저 내 안에 우리 가정 안에 웅크리고 있는 바알과 아세라 죄악의 덩어리를 몰아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기드온아 네 안에 있는 우상을 몰아내라. 너의 가정 안에 있는 우상을 몰라내라. 그리고 너의 민족, 너의 지파 안에 있는 우상을 몰아내라. 이것이 미디안을 몰아내는 지름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는 바알과 아세라 우상의 제단이 바로 기드온의 아버지 요아스의 집에 있었던 것 같아요. 아버지 요아스가 바알과 아세라 제단을 관리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우상의 제단을 부순 다음 하나님께 제사를 드려야 하는데 하나님은 아주 구체적으로 25절과 26절에서 지시하고 있습니다. 먼저 아세라 목상을 찍어서 그 나무로 제단을 삼으라는 것입니다. 그것으로 장작을 삼으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요아스 아버지 집에 있는 두 번째 수소 곧 칠년된 수소를 잡아서 제사를 드리라는 것입니다. 아마 이 집에 소가 여러 마리 있었는지 아니면 소 두 마리가 있었는데 첫 번째 오래되고 큰 소가 한 마리 있었고 칠년쯤 된 소가 있었던 모양이지요.
왜 칠년된 두 번째 수소라고 얘기했을까요? 이것을 알기 위해서는 기드온의 사건이 시작되어지는 6장 1절로 가봐야 됩니다. 기드온의 때에 7년동안 미디안의 손에 압제를 당하고 있었습니다. 두 번째 수소는 미디안이 처음 쳐들어 올때 태어난 소였던 것 같습니다. 지난 7년동안 이 수소를 지키기 위해서 산지 토굴 속에 숨겨 키워왔던 애지중지했던 바로 그 소입니다. 이제 7년의 고난과 압제를 이 소와 함께 끝내버리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알과 아세라를 온전히 불태워 이스라엘에게서 완전히 멸할 때에 가능한 것이었다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아세라 나무 우상을 장작으로 삼아서 7년된 수소를 제물로 드리라고 얘기했습니다.
성령의 불을 경험했으면 그 불로 죄악을 태워버려라. 지난날 하나님을 배신했던 수치를 태워버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했으면 담대함을 잃어버리고 웅크리고 살았던 지난날에 비겁했던 당당하지 못했던 위축되었던 우리의 삶을 태워버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없이 살았던 7년의 수치를 불태워버려라. 바알의 가치를 불태워라. 아세라의 쾌락의 가치를 불태우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아세라 목상을 찍어서 그것을 장작으로 삼아 그 위에 7년된 수소를 올려놓고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리라는 의미였습니다.
간밤에 기드온이 바알과 아세라를 찍어 불태운 일이 아침에 모두 탄로가 나버리고 맙니다. 성읍 사람들이 바알 신 앞에 새벽기도를 드리기 위해서 가 보았더니 바알이 비참하게 부셔져 있었습니다. 아니면 바알과 아세라 신이 마을에서 올려다 보면 한 눈에 볼 수 있는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한 눈에 그 신상을 볼 수 있었던 모양입니다. 아세라 목상은 아예 장작이 되어서 불타고 없어졌습니다. 그 옆에 다른 제단이 하나 만들어졌는데 요아스 집에 있었던 수소가 제단에 드려지고 뿔 같은 잔재들이 버젓이 남아 있었던 것 같습니다. 요아스의 둘째 소는 이 마을에서 마스코트처럼 잘 알고 있는 바로 그 소였습니다. 미디안 정복의 역사 대변인 같은 역할을 하고 있었던 모양이지요. 그러므로 마을 사람들은 이 짓이 요아스의 아들 기드온이 한 일임을 쉽게 알 수 있었을 것입니다. 기드온을 끌어내어 죽이겠다고 덤벼듭니다. 바알과 아세라 자신의 신이 무참히 죽었으니 마을 사람들은 분노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기드온은 미디안을 한번도 공격해 보지 못하고 마을 사람들, 같은 므나셋 부족 사람들에게 맞아죽게 생겼습니다. 아니 그 이전에 아버지에게 맞아죽게 생겼습니다. 바로 이때 므낫세 집안에 우상관리인이었던 요아스가 일어납니다. 너희들이 죽은 바알을 살리겠다고 그렇게 나한테 덤비는 것이냐. 바알이 진짜 신이라면 친히 그 상을 파괴한 자를 바알이 직접 대적할 것 아니겠느냐. 우리 집에 수소가 죽었고 우리 집에 신상들이 부셔졌다면 화를 내도 내가 낸다. 꺼져라. 만약 누구든지 내 아들 기드온을 해치는 자는 내일 아침에 죽음으로 발견되어질 것이다. 31절입니다. 므낫세의 우상관리인이 아버지 요아스가 아들 기드온을 감싸고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지요. 이것은 성령의 역사였습니다.
이때부터 기드온의 이름이 달라집니다. 기드온의 이름이 여룹바알이라고 불리워집니다. 여룹이란 싸운다. 바알은 바알과 맞서 싸우는 자라는 뜻입니다. 바알 킬러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때부터 기드온을 부르는 호칭이 아주 다양하게 불리어집니다. 요아스의 아들 기드온, 기드온, 여룹바알, 혹은 여룹바알이라는 기드온. 요아스의 아들 여룹바알. 기드온과 여룹바알이 번갈아 나오면서 요아스의 아들이란 수식어가 늘 따라붙어 나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큰 용사라 불리워졌던 이것은 하나님께서 여호와의 사자가 나타나서 이 기드온을 한번 부른 다음에 그 이후에 나타나지 않는 이름이 되었습니다.
이무렵 미디안 아말렉 그리고 동방족속들이 연합해서 이스라엘 싹을 멸하겠다고 쳐들어옵니다. 기드온에게 여호와의 영이 임하여 공식으로 사사로 등장하게 됩니다. 이스라엘도 여러 지파가 함께 기드온의 부름을 받고 모여들기 시작했습니다. 지금 미디안과 아말렉 동방 연합군이 함께 일어나고 므낫세 지파를 중심으로 해서 열 두 지파의 여럿 부족들이 함께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오늘 설교가 끝나고 나면 7장에서는 멋진 한바탕 전쟁이 일어날 것을 오늘 본문이 예고하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V. 양털 표징
미디안 연합군과의 본격적인 전쟁을 앞두고 기드온은 한번 더 하나님께 표징을 요구하는 것으로 오늘은 본문의 막을 내리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한번 더 표징을 요구합니다. 지금 큰 어마어마한 전쟁을 목전에 두고 기드온으로서는 하나님의 강력한 도우심, 한번 더 흔들리지 않는 표적이 필요했던 것 같습니다.
하나님 제가 하나님께 표적을 요구합니다. 제가 타작마당에 양털 한뭉치를 갖다 놓겠습니다. 오늘밤에 이슬이 내릴 터인데 타작마당 이 주변에는 어디에도 이슬이 내리지 아니하고 양털에만 이슬이 소복이 내리게 해 주십시오. 여러분 그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지요. 사방에 내리는 이슬이 풀에도 내려야 되는 것이고 나뭇잎에도 내려야 되는 것이고 바위에도 내려야 되는 것이고 한 마리 곤충 위에도 이슬은 내려야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날밤에 이슬이 내리는데 다른데는 한 방울도 내리지 않고 양털에만 이슬이 얼마나 내렸던지 아침에 양털을 쭉 짜봤더니 물이 한 사발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그것도 모자라 한번 더 표적을 요구합니다.
하나님 이번엔 내가 다시 양털을 타작마당에 갖다 놓겠습니다. 이번엔 다른데는 다 이슬이 내리게 하시고 양털에는 양털이 내리지 않게 해 주십시오. 이것은 더 어려웠을 것입니다. 양털은 물을 빨아들이는 흡입력이 있었을 터인데 그 다음날 일어나 보았더니 양털에는 이슬이 내리지 않아 바싹 말라있고 온 마당과 풀 그리고 나뭇잎에는 이슬이 가득히 쌓여있었다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의 결론입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가 신앙생활하면서 하나님의 날마다 새로운 표적을 요구하면서 신앙생활하라는 뜻일까요? 아닙니다.
이 당시 이스라엘에 믿음이 끊임없이 보고 또 보아도 믿음이 흔들릴 만큼 오늘 보았다고 오늘 하루동안 믿음을 지키기가 어려울 만큼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의 믿음이 엉망진창이었다는 것이지요. 하나님의 임재를 맛보지 못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사라졌던 엉망인 상태가 이스라엘의 믿음이었다 하는 것을 본문은 얘기해 주고 있습니다.
그 당시 이스라엘이 당한 위기가 너무나도 커서 하나님의 역사가 크고도 구체적으로 나타나지 않고서는 이스라엘을 하나님 앞으로 이끌 수 없었다는 상황을 얘기하는 것입니다. 무엇을 말씀하고 있는 것일까요? 하나님의 이슬, 하나님의 은총은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에게만 내리고 이 땅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서는 거두어 갈 수 있는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배신하고 떠나게 되면 지구촌 온 땅에 이슬이 내리고 마을마다 고을마다 나라마다 오대양 육대주에 하나님의 은총의 이슬이 내린다 할지라도 너희들에게는 이슬을 하나님의 은총을 거두어 갈 수 있다고 하는 것이지요.
여러분 세상이 참 어렵다고 합니다. 세계는 이곳 저곳에서 지구촌에서 경제적인 위기를 겪고 있는 것 같고 정치적인 갈등, 강대국이란 강대국은 다 밀집해 있는 한반도에 찾아온 위기, 북한과의 갈등, 일본과의 갈등, 중국과의 새로운 갈등의 시작, 반미감정, 지금 우리 나라가 당하고 있는 사회적인 문화적인 교육적인 위기, 사상적인 위기, 세대간의 갈등, 끝이 없는 어려움만 우리 가운데 보여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때에 세상 모든 땅으로부터 이스라엘을 거두어 간다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 너에게는 이슬 하나님의 은총을 내려주실 수 있다고 약속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이 위기에 위기 또 위기를 맞이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여러분에게 아침 이슬을 내려주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은총의 비를 내려주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축복의 장마비를 내려주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반면 이 세상에 온통 하나님의 이슬로 가득해 진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너로부터 이슬을 빼앗아 갈 수 있는 분이시라는 것이지요. 온 세상이 하나님의 은혜의 강물이 범람한다 할지라도 나는 너로부터 하나님의 은총을 거두어 갈 수 있다. 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표징들을 통하여 지금 기드온은 하나님 앞에 온전히 부름을 받게 되고 하나님 앞에 서게 되고 다시 하나님의 사사로서 대 사사로서 역할을 새롭게 감당하는 모습을 보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