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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7월 21일 연중 제16주일(농민 주일)
제1독서 : 예레 23,1-6
제2독서 : 에페 2,13-18
복 음 : 마르 6,30-34
그때에 30 사도들이 예수님께 모여 와, 자기들이 한 일과 가르친 것을 다 보고하였다.
31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너희는 따로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오고 가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음식을 먹을 겨를조차 없었던 것이다.
32 그래서 그들은 따로 배를 타고 외딴곳으로 떠나갔다.
33 그러자 많은 사람이 그들이 떠나는 것을 보고,
모든 고을에서 나와 육로로 함께 달려가 그들보다 먼저 그곳에 다다랐다.
34 예수님께서는 배에서 내리시어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기 시작하셨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자기계발서를 보면, ‘당당하게 이 세상을 살아야 한다’라는 말이 많이 나옵니다.
이 말에 동의하십니까? 아마 이렇게 힘차게 사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주변에 당당하게 사는 사람을 떠올려 보십시오. 생각보다 무례한 사람이 많습니다.
자기 좋은 것만 하려고 하고, 자기 싫은 것은 죽어도 싫다면서 하지 않지요.
남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자기 생각만 밀고 나가기도 합니다. 그러면 다시 한번 여쭙겠습니다.
“당당하게 이 세상을 살아야 할까요?”
당당하지만 무례하지 않아야 합니다.
당당함을 통해서 누군가에게 상처 주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특히 당당함에 자기 욕심과 이기심이 담겨 있다면
이것은 지극히 무례한 것으로 사람들과 함께하기 힘들어집니다.
저 역시 이런 무례한 사람과는 함께하고 싶지 않아서, 거리감을 둘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자기가 힘들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어떻게 살기를 원하실까요?
당당하게 살기를 원하실까요? 소심하게 살기를 원하실까요?
우리를 소중하게 창조하신 것만을 보더라도 당당하게 살기를 원하십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당신을 따라오는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고 하십니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 같았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지켜주는 사람이 없으면 계속 눈치를 볼 수밖에 없습니다.
바로 당시의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러했던 것입니다.
당당하기를 원하시는 주님이십니다.
단, 여기에 조건이 붙습니다. 무례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사랑을 강조하셨습니다.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은 하느님 아버지의 뜻에 맞춰서 당당하게 사는 사람입니다.
이들은 사랑해야 할 때, 움츠러들지 않고 또 숨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자기의 당당함만을 드러내는 사람은 사랑을 제대로 실천하기 힘듭니다.
자기만 사랑하고 있기에, 하느님 앞에서는 움츠러들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고 나서 숨었던 것처럼, 하느님 앞에 숨으려고만 하기 때문입니다.
당당하면서도 무례하지 않은, 진정으로 주님의 사랑을 배워서
세상에 실천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이 세상을 진정으로 힘차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특히 주님 안에서만이 하느님 나라의 커다란 희망이 있기에
그 희망을 바라보면서 기쁘게 살 수 있습니다.
목자 없는 양들 같은 우리에게 주님께서는 참 목자로 다가오십니다.
제2독서의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주님께서는 유다인과 이민족 사이에 놓여 있던 분열과 적개심의 장벽을 허물어뜨려
하나로 만드신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이렇게 큰 힘을 가지고 계신 주님과 함께하기에 우리는 당당하게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사랑을 간직하기에 또한 무례하지 않습니다.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
반영억 라파엘 신부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의 필요를 이미 아시고 채워주십니다.
이 시간 우리를 가엾은 마음으로 챙기시는 주님을 만나시길 바랍니다.
많은 분이 휴가를 즐깁니다. 휴가를 통해 쉬는 시간을 마련하는 것은 참 좋은 일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쉬는 방법과 우리의 쉬는 스타일은 좀 다르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따로 외딴곳으로 가서 쉬지만, 우리는 사람도 많고 시끄러운 곳으로 휴가를 떠납니다.
수많은 인파가 몰려드는 곳으로 갑니다.
길도 막히고 잠자리도 불편하고, 휴가를 다녀와서는 더 피곤해합니다.
그렇다면 그 휴식은 바람직한 쉼이 되었다고 할 수 없습니다.
기쁘고 건강한 휴식을 취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주님으로부터 받은 능력을 지니고 세상에 나가서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그들은 음식을 먹을 겨를조차 없이
바쁘게 사람들을 만나고 마귀를 쫓아내며 주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예수님 앞에 모여서 자기들이 한 일과 가르친 것을 자랑삼아 보고 하였습니다.
자기가 아침에 계획한 것을 열심히 살고 저녁에 삶을 되돌아보며
하루의 시간을 예수님께 보고하는 것은 저녁기도 시간입니다.
주님과 함께 하루를 마무리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양식입니다.
그랬더니 예수님께서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고 하셨습니다.
왜 외딴곳을 선택하셨을까요?
동안에 열심히 할 일을 한다고 했지만,
그것이 주님의 일이었는지, 내 일이었는지를 살펴보라는 말씀입니다.
혹 하느님의 일은 접어두고 인간적인 일에 매달린 것은 아닌지
내적으로 반성하고 채울 시간을 가져보라는 의미입니다.
사실 일에 치이면 마지못해, 억지로 하게 되고
그렇게 되면 그 일은 신성한 노동이 아니라 부역이 되고 맙니다. 따라서 휴식을 잘해야 합니다.
어느 수도원의 두 수사가 원장으로부터 들에 나가 밀을 거두어들이라는 분부를 받았습니다.
두 수사는 낫으로 밀을 베어 단으로 묶어나갔습니다.
한 수사는 시간마다 쉬곤 하는데, 반해 한 수사는 한 번도 쉬지 않고 일을 했습니다.
그런데 날이 저물었을 때 보니 쉬면서 일한 수사가
쉬지 않고 일한 수사보다 훨씬 더 많은 밀을 베어 놓았습니다.
열심히 일한 수사는 어떻게 그런 결과를 가져왔을까?
궁금해했는데 쉬면서 일을 한 수사가 말했습니다.
“저는 틈틈이 쉴 때마다 제 낫을 갈았습니다.”
쉰다는 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다음을 준비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세상일에 파묻혀서 내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지 불분명할 때,
가족과 잘 지내고 있는지, 신앙인으로서 하느님을 잘 모시고 살고 있는지
되돌아보고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은혜를 회복하는 시간이 휴식입니다.
쉼을 잘못하면 안 쉰 것만 못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음식을 잡수실 겨를조차 없이 바쁘시더라도
한적한 곳을 찾으셨고 이른 아침에 기도하셨습니다.
그것은 당신을 보내주신 아버지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는 시간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때때로 한적한 곳을 찾아야 합니다.
성체조배는 바로 훌륭한 휴식입니다. 자주 성체 앞으로 오십시오.
피정이나 성지순례도 꼭 필요한 휴식입니다.
성직자나 수도자들은 일정 기간 의무적으로 한적한 곳을 찾아야 합니다.
그래서 연 피정, 월 피정을 해야 합니다.
피정이란 말 그대로 시끄러운 곳을 피해 고요한 곳으로 가는 것입니다.
교회법으로, 수도회 규칙으로 정해놓았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과 깊은 만남을 통해 자기 소명 의식을 새롭게 하기 위함입니다.
대개는 침묵 피정을 합니다.
동안에 말을 많이 하고 살았으니까 침묵 가운데 주님의 말씀을 듣고
내적 성장의 토대를 다지는 은총의 시간입니다.
우리 청주교구 신부 수가 200명입니다. 신부 전체가 모이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연 피정을 할 때는 특별히 주교님의 허락을 받은 분 외에는 모두 참석합니다.
그래서 어떤 신부님이 건의 했습니다. 침묵을 해제해 달라!
일 년에 한 번 전체가 모이는데 동안의 삶을 서로 나누며
선후배 간의 끈끈한 정도 쌓고 친교의 장을 만드는 것이 더 의미가 있지 않느냐?
그래서 설문 조사를 했습니다. 침묵이냐? 해제냐? 어떤 결과가 나왔을까요?
절대다수의 신부님께서 침묵을 선택하셨습니다.
한번은 부산교구 정명조 주교님께서 피정 지도를 하셨는데 첫 시간에 말씀하셨습니다.
이번 피정은 “절대 침묵 피정”입니다.
절대 침묵이란, 내가 침묵을 지키는 것뿐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방해가 되는 모든 것을 하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문 여닫는 소리, 발걸음 소리까지도…
왜 그렇게 침묵을 강조하셨겠습니까?
세상이 시끄러우면 시끄러울수록 그만큼 더
하느님의 소리를 듣고 주님의 뜻을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소란하고 들뜬 마음으로는 결코 하느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고요함 속에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주님의 거울에 비추어진 내 속을 보아야 합니다.
사실 우리의 일상이 몇 일간 시간을 내서 피정하기란 힘듭니다.
그러나 한적한 곳에 가서 쉬라는 주님의 말씀을 되새겨야 합니다.
이 말씀은 좋은 휴양지에 가서 먹고 마시고 즐기라는 그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휴가를 내서 성지순례를 하시는 분이 계시고,
어떤 분들은 가족과 더불어 요양원이나 복지시설에 가 봉사를 하는 분도 있습니다.
그들은 중환자실에서 똥, 오줌을 받아내고 식사 수발도 하면서
가족의 소중함을 배우고 건강하게 지낼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행복인지를 일깨웁니다.
사랑하면 할수록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얻게 된다는 깨달음을 얻습니다.
그들의 휴가는 참으로 하느님 안에서의 휴식입니다.
시간이 없다고 하는 것은 마음이 없는 것입니다.
휴가를 내서 성경 연수에 참석하시는 분도 있고, 피정하며 주님 안에서 쉬기도 합니다.
“한적한 곳으로 가서 쉬어라”는 주님의 말씀을 가정에서 실천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이른 아침, 일상을 시작하기 전 또는 잠자리에 들기 전에 기도 시간, 침묵의 시간을 꼭 챙겨야 합니다.
가능하다면 예수 성심 상이나 성모님 상 앞에서 하루를 살피고 부족함을 채울 수 있도록
자기를 봉헌하면서 주님과 더불어 시작하고 주님과 함께 마치면 얼만 좋겠습니까?
세상이 각박해지는 것은 여러 이유가 있지만 쉼이 없어졌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쉰다는 것은 우리 자신에게 재충전의 시간을 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참으로 우리의 마음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생각해 볼 일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높은 곳에, 귀한 곳에, 천상에 두어야 합니다.
그러면 나머지는 하느님께서 넘치도록 채워주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고통받고 힘들어하는 사람들을 찾아가기도 하셨지만,
사람들이 예수님을 중심으로 모여들었습니다.
그분께 능력이 있고 힘이 있으며 가르침에 권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휴식을 취할 수 없었습니다.
많은 사람이 예수님과 제자들보다 먼저 그 휴식 장소로 와 진을 치고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몸이 파김치가 되어서 휴식을 취하고 싶은데
군중에게 떠밀려 어찌할 수 없는 상황이 되면 충분히 짜증이 날 만한데
예수님께서는 ‘목자 없는 양들 같아 오히려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가슴은 인간에 대한 측은지심과 자비심으로 가득 차,
귀찮고 짜증이 날 법한 상황에서도 꾸준한 사랑의 길을 가십니다.
과연 우리 주변에 사람이 모이고 있는가? 사람들이 나를 피하고 있는가?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고 미리 가서 진을 치고 있던 사람들처럼
주님의 뜻을 얼마나 갈망하고 있는지를 점검하시길 바랍니다.
세상 것엔 바쁘고, 주님 것엔 관심이 없으면서도 주님의 복을 청하는 모습이라면 부끄럽습니다.
오늘만큼은 외딴곳에서 주님과 함께할 수 있는 시간을 꼭 챙기시길 희망합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 요즘 너무 더우셨죠?
이럴 때는 차가운 바다를 다시금 생각합니다 : 썰렁해!
이럴 때는 가장 뜨거운 바다는 피하시길 바랍니다 : 열바다
그래서 가슴설레는 바다가 그립습니다 : 사랑해!
“너희는 따로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마르코 복음사가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질문 중 하나는
'예수님, 그분은 누구신가?'라는 예수님의 정체성에 대한 물음입니다.
그리고 오늘의 말씀 전례는 바로 이 물음에 대한 중요한 단서를 제공해 줍니다.
곧 예수님은 양 떼를 돌보는 '진정한 목자'임을 말해줍니다.
그리고 이 '참된 목자'의 상이 곧 메시아의 표상임을 말해줍니다.
제1독서에서 예레미야 예언자는 당시의 제도권 지도자들(왕들, 사제들)이
하느님의 양 떼인 백성들을 보살피지 않고 오히려 죽이고 흩어버리고 헤매게 하였음을 말해줍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하느님께서는 당신 양 떼들을 보살필 ‘진정한 목자’를 세워주실 것을 약속하십니다.
그리고 그 목자가 다윗의 후손에서 날 것임을 선포하십니다.
그분은 세상에 공정과 정의를 이루실 '우리의 정의'(예레 23,6)이신 주님으로
'참된 목자'인 ‘메시아’로 예고됩니다.
오늘 제2독서에서 '참된 목자'”는 단지 양 떼를 흩어지지 않게 하고,
헤매지 않게 하는 것에 머무르지 않고,
''흩어진 양 떼를 인도하고, 헤매는 양 떼를 보호하는 분,
양 떼를 하나 되게 하고, 평화를 주시는 분'으로,
곧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에페 2,14)로 제시됩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분께서는 당신의 몸으로 유다인과 이민족을 하나로 만드시고,
이 둘을 가르는 장벽인 적개심을 허무셨습니다.
그리하여 당신 안에서 두 인간을 하나의 새 인간으로 창조하시어 평화를 이룩하셨습니다.”(에페 2,14-15)
이토록 예수님께서 우리 사이의 갈라진 장벽을 허물고, 우리를 새 인간을 만드셨습니다.
참으로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통하여 양쪽을 한 몸 안에서 하느님과 화해'(에페 2,14-16)시키시고
평화를 이루신 '착한 목자'이셨습니다.
그렇습니다.
바로 이 일이 오늘 우리가 ‘평화’를 이루기 위해 할 일입니다.
서로를 가르는 장벽인 ‘적개심을 허무는 일’ 말입니다.
오늘 복음은 '참된 목자'이신 예수님의 모습을 세 가지로 그리고 있습니다.
첫째는 지친 제자들을 '배려하는 모습'이요,
둘째는 몰려든 군중들을 '측은히 여기는 모습'이요,
셋째는 양들을 '가르치는 스승의 모습'입니다.
오늘 복음은 파견받은 사도들이 돌아와 보고하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마르 6,31)라는 말씀으로 시작됩니다.
음식을 먹을 겨를조차 없을 만큼 군중이 몰려왔지만,
예수님께서는 지친 제자들에게 ‘가서 좀 쉬어라’고 배려하십니다.
'쉬어라'는 이 말씀에서 시편 작가가 들려주는 진동을 듣습니다.
“너희는 멈추고(곧 쉬고) 내가 주 하느님임을 알아라.”(시편 46,11)
또한 두 번씩이나 반복되는 '외딴곳으로 가서'라는 말씀을 들으면서,
우리는 <호세아서>에서 울려오는 진동을 듣습니다.
“이제 나는 그 여자를 외딴곳 광야로 데리고 가서 다정히 말하리라.
~ 너는 나를 ‘내 남편’이라 부르리라.
~ 내가 너를 아내로 삼으리니, 네가 주님을 알게 되리라.”(호세 2,16-22 참조)
그렇습니다.
'외딴곳'에서 벌어질 일은 바로 이 일입니다.
당신을 ‘낭군’이라 부르게 되고, ‘주님’을 알게 되는 일입니다.
한편 예수님께서는 피곤함에 지친 제자들은 쉬게 하시면서도,
외딴곳까지 먼저 달려온 군중을 보시고(마르 6,32 참조)는
마치 목자 없는 양들처럼 가엾은 마음이 드셨습니다. (마르 6,34)
그래서 환자에게 의사가 필요하듯, 길 잃은 양들을 먼저 돌보는 '목자'로서 자신을 드러내십니다.
그것은 애틋한 사랑의 발로로 타인의 상황에 마음 아파함이요,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으시고 연기 나는 심지를 그냥 둘 수 없는, 차마 못 견디는 마음입니다.
사랑 때문에 안달이 나고 몸살이 나서 사랑을 건네주지 않고는 차마 못 배기는 까닭입니다.
오늘 우리는 ‘사랑에 안달이 난 바로 그분’을 만납니다.
그토록 '가엾은 마음이 드신' 그분께서는
그래서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주기 시작하셨습니다. (마르 6,34)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진정으로 굶주리고 목마른 것이 진리임을 아셨습니다.
그들을 채울 수 있는 것은 오직 영원한 생명을 주는 ‘진리’ 외엔 결코 그 어떤 것도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양들을 '진리'로 인도하는 분이 바로 '참된 목자'입니다.
그러니 오늘날 우리가 목자가 되려면 먼저 ‘진리’가 되어야 할 일입니다.
그리고 진리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참된 양식’을 받아먹는 ‘양’이 되어야 할 일입니다.
진정 우리가 그분의 ‘양’이라면, 우리를 ‘측은히’ 여기시는 그분에게서 우리는 진리를 얻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지녀야 할 것은 양들을 측은히 여기는 애틋한 마음이요,
참된 진리를 가르치기 이전에 먼저 참된 진리가 되어야 할 일입니다.
그리기에 우리는 먼저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양식을 얻는 양이어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 (마르 6,31)
주님!
저를 외딴곳, 당신의 거처로 데려가소서.
당신 안에 쉬게 하소서.
그 쉼 안에서 사랑에 젖게 하소서.
당신 사랑을 알게 하소서.
그 사랑 안에서 당신을 낭군이라 부르게 하소서.
오, 주님!
당신만이 진정한 쉼이오니, 당신 사랑의 속삭임 안에 쉬게 하소서! 아멘.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2002년 대한민국을 뜨겁게 달구었던 역사가 있습니다. 무엇일까요?
그렇습니다. ‘2002년 한일 월드컵’입니다. 어느덧 22년이 지났습니다.
한국은 폴란드와 포르투갈을 이기고 월드컵 역사상 처음으로 16강에 올랐습니다.
기세를 몰아 한국은 이탈리아를 연장까지 가는 혈투 끝에 2:1로 이기고 8강으로 올랐습니다.
감독인, 히딩크는 ‘I am still hungry!’라는 유명한 말을 하였습니다.
한국은 스페인과 승부차기 끝에 4강으로 올랐습니다.
대한민국은 그야말로 용광로와 같았습니다.
우리는 모두 ‘붉은 악마’가 되었고, 붉은 셔츠를 입었습니다.
당시에 모든 사람이 힘차게 외쳤던 구호와 박수가 있습니다.
“대한민국”이라는 구호와 “짝짝 짜자작”으로 이어지는 박수였습니다.
또 하나 생각나는 구호가 있습니다. “꿈은 이루어진다.”라는 구호입니다.
어린 시절 저의 기억에 깊이 새겨졌던 구호가 있습니다.
‘국민소득 1,000불, 수출 100억 불’이라는 구호입니다.
한강의 기적을 이룬 대한민국은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을 세웠습니다.
모두가 땀을 흘리며 열심히 일했습니다.
학교 담벼락에도, 동네의 담벼락에도 ‘국민소득 1,000불과 수출 100억 불’이라는 구호가
신동우 화백의 그림과 함께 그려졌습니다.
당시 정부는 1980년대에 그 목표를 이루겠다고 했는데
빨리빨리의 대한민국은 4년 앞당긴 1977년에 목표를 달성했습니다.
2023년 대한민국의 국민소득은 33,475달러입니다. 수출은 1,118억 달러입니다.
소득은 33배가 넘게 증가했고, 수출은 11배가 넘게 증가했습니다.
또 하나 생각나는 구호가 있습니다.
‘잘살아 보세, 우리도 한번 잘살아 보세.’입니다.
구호는 목표가 되었고, 목표는 우리에게 할 수 있다는 신념과 용기를 주었습니다.
한국교회에도 구호가 있었습니다. 1984년 한국교회는 창립 200주년을 맞이했습니다.
한국교회에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주례로 103위 시성식이 있었습니다.
한국교회는 200주년 준비의 하나로 ‘사목회의’를 개최했습니다.
103위 시성식을 기점으로 한국교회는 비약적인 발전을 이룩했습니다.
10년마다 신자 수가 100만 명씩 증가했습니다.
1980년대에 100만 명이던 신자는 2020년에는 500만 명을 넘었습니다.
성직자와 수도자가 늘어났습니다. 본당은 넘쳐나는 신자로 분가해야 했습니다.
서울과 광주에만 있던 신학교도 늘어나는 신학생을 다 받지 못해서 늘어났습니다.
수원, 인천, 대전, 부산, 대구에 새롭게 신학교가 생겼습니다.
한국교회가 창립 200주년을 준비하면서 내세운 구호가 있습니다.
그것은 “이 땅에 빛을‘이라는 구호였습니다.
한국교회는 선교사의 도움 없이 하느님을 받아들였던 특별한 교회였습니다.
많은 박해와 시련이 있었지만, 이 땅에 하느님 사랑의 빛이 비추었습니다.
그리고 한국교회는 하느님 사랑의 빛을 이웃들에게 나누어 주고 있습니다.
1989년에 한국교회는 44차 ‘성체대회’를 개최하였습니다.
103위 시성식은 우리만의 행사였다면 성체대회는 가톨릭교회의 공적인 행사입니다.
변방에 있던 한국교회는 성체대회를 개최할 수 있는 당당한 교회가 되었습니다.
신학생이었던 저는 ‘괌’에서 온 순례단의 안내를 맡았습니다.
브라질의 주교님이고, 세계적인 해방 신학자인
‘돔 헬더 까마라’ 주교님의 강의를 직접들을 수 있었습니다. 주교님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내가 가난한 사람을 돕자고 말하면 사람들은 나를 성자(聖者)라고 부릅니다.
하지만 내가 가난한 사람을 위한 조직을 만들자고 말하면
사람들은 나를 공산주의자라고 부릅니다.”
배고픈 사람에게 물고기를 주는 것도 좋지만,
배고픈 사람에게 물고기를 잡을 수 있는 그물을 주는 것은 더 좋은 것입니다.
44차 세계 성체대회의 구호는 ‘그리스도 우리의 평화’였습니다.
그리스도는 양들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착한 목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는 부활이요,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배에서 내리시어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기 시작하셨다.”
영적으로 충만한 신앙은 ‘공감’에서 시작됩니다.
공감은 연민이 되고, 연민은 조건 없는 나눔이 됩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신 것은 바로 공감과 연민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고 가신 것은
공감과 연민이 희생으로 드러난 것입니다.
공감과 연민이 함께 한다면 우리는 지금 이곳에서
새 하늘과 새 땅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더는 슬픔과 울부짖음이 없는 세상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오늘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그리스도의 평화는 재물과 권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의 희생과 한없는 연민으로 시작되는 것입니다.
지금 나의 신앙은 영적으로 충만한지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그들은 목자 없는 양과 같았다.
조욱현 토마 신부
오늘의 전례는 지난주의 선교 사명의 주제를 발전시키고 있다.
목자와 양 떼라는 상징적 표현들이 이것을 말해주고 있다.
예레미아 예언자는 당시의 왕들과 지도자들이 목자들이라고 하기에는 부당하다고 비난한 후,
이스라엘 백성을 귀양살이에서 돌아오게 하시고
그들에게 당신 마음에 맞는 목자들을 주심으로써 돌보아 주시리라는 것을 예언한다(예레 23,3-4 참조).
그리고 마지막 날 이상적인 왕이며 목자이신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에게 성덕과 정의를 펼쳐 보이시리라고 예고한다.
그분은 정통 왕손, 야훼, 우리를 되살려주시는 이로 불릴 것이라고 한다.
복음에서는 사도들이 선교활동의 결과를 예수께 보고하고 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사도들에게 따로 한적한 곳으로 가서 좀 쉬자고 하신다(31절).
군중들이 많이 밀려들었기 때문에 한적한 곳을 찾아 떠났지만,
군중들은 이미 알고 앞질러 그곳으로 갔기 때문에 실패하고 만다.
“예수님께서는 배에서 내리시어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기 시작하셨다.”(33-34절).
측은히 여기시는 주님의 모습은 양 떼가 흩어지는 것을 보살필 뿐 아니라,
양 떼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시고, 기적의 빵으로서 양육시키고자 애쓰시는 그런 목자를 의미한다.
예수님은 이런 의미에서 이상적인 목자이시다.
왜냐하면 첫째로 목자는 자기의 양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마음 깊이 느낄 수 있을 만큼 사랑하시는 분이라는 것이다.
그러기에 힘보다는 사랑과 헌신과 부드러움으로 나타나는 예수님이시다(요한 10,11-12 참조).
두 번째는 양 떼가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함께 느껴 그들과 하나가 되는 분이시다.
예수님은 군중들에게 빵의 기적을 통하여
그들과 완전히 하나가 되시는 모습을 볼 수 있다(마르 6,37 이하 참조).
이 빵의 기적에서 사도들의 태도는
바로 교회 안에서 우리의 봉사 정신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말해주고 있다.
즉 다른 사람들이 하느님의 은총으로 성장하고 강해지도록
그들을 위해 자신을 내어주고 봉헌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양 떼의 주인으로서가 아니라
그들을 위한 종으로 느낄 수 있을 때만 가능하다(마태 20,25-28 참조).
세 번째로는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홀로 있는 것과 휴식의 필요성을 실천하시는 분이시다.
예수께서는 하느님과의 일치를 통해 하느님의 뜻을 더 잘 이루실 수 있었고
또 필요한 빛과 지혜를 얻기 위하여 침묵과 기도를 위한 휴식을 필요로 하셨다(마르 6,45-47 참조).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봉사자로 일하는 사람들은 하느님 말씀의 충실한 해석자가 되기 위해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분과 대화할 시간과 공간을 가져야 한다.
즉 기도와 묵상이 없는 봉사활동은 좋지 않은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유다인들과 이방인들을 화해시켜 한 몸을 이루게 하셨다고 한다(에페 2,14-16 참조).
십자가 위에서의 죽음을 통해 이루신 화해의 의미를 압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서로 대립하는 두 민족으로부터
“하나”(에페 2,14), “새 인간”(에페 2,15), “한 몸”(에페 2,16)이 생겨난다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교회 안에서 모든 것이 하나를 지향해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사목자들은 먼저 자신이 사랑 안에서 성장하고
또한 그들이 맡은 신자들이 사랑 안에서 성장하면 성장할수록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증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목자들이든 신자들이든 모두가 다 같이 서로 노력하는 여기에 우리 교회의 미래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인도하시도록 우리를 그분께 맡겨드려야 한다.
“그래서 그분을 통하여 우리 양쪽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가게 되었습니다.”(에페 2,18).
오늘 복음의 내용은 설교자를 대상으로 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신자들을 제외하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목자는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모범에 따라 행동해야 하고,
또 신자들은 사랑으로 충실히 목자의 소리에 응답하여야 한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군중들과 한데 어우러져 그들과 하나가 되신 것처럼
그들을 사랑하고 하나가 되는 것이 중요하다.
또한 주님의 말씀을 듣는 군중들의, 마음의 자세가 중요하다.
우리가 비록 여럿이지만, 다양성을 표현하고 있지만, 하느님 안에, 주님의 이름 안에
진정한 하나, 일치를 이룰 수 있는 우리가 되는 것이
오늘 독서와 복음을 올바로 알아듣고 표현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삶이 우리 안에 항상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표징이 되어 드러날 수 있도록 기도하자.
부화뇌동은 No, 화이부동은 Yes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예수님께서는 배에서 내리시어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 같았기 때문이다.”
오늘 연중 제16주일은 진정한 양과 목자의 관계를 얘기합니다.
오늘 독서에서 목자는 ‘우리의 정의’라고 불리는 분입니다.
둘째 독서에서 목자는 ‘우리의 평화’라고 불리는 분입니다.
종합하면 주님은 ‘우리의 정의와 평화’라고 불리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의 정의이고 평화인지 성찰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 성찰은 우리 자신에 대한 반성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아니, 나는 주님을 나의 정의와 평화의 목자로 모시는 착한 양인가?
세상의 정의 평화 투사를 나의 정의와 평화의 목자로 생각지는 않는가?
주님의 정의와 평화를 쫓지 않고 나의 정의와 평화를 주장하지는 않는가?
그렇습니다.
우리는 착한 양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종종 길잃은 양들입니다.
사실 양들의 인도자들이어야 할 수도자 성직자들이라고 하는 저희가
주님의 정의와 평화를 따르지 않고 정치가들을 열렬히 추종함으로써
결과적으로 길잃은 양들인 경우가 많아 참 안타깝습니다.
옛날 ‘어머니 부대’라는 극성 여성들이 있었고,
요즘은 ‘개딸’이라는 극성 여성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정반대인 둘의 공통점은 복음이나 보편성 같은 것을 따르지 않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정치가를 무조건적으로 따른다는 것인데
어떤 때 저희 일부 수도자들과 일부 신자들이 이러합니다.
주님의 정의를 가지고 여도, 야도, 모두 비판하고 예언해야 하는데
비판과 예언은커녕 부화뇌동(附和雷同)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정의가 주님의 정의를 따르는지 잘 식별해야 하는데
우리가 주님 정의를 따르는지 세상 정의를 따르는지 어떻게 알 수 있냐 하면
우리의 정의가 주님의 평화를 이룩하는지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우리의 정의는 물론 불의와 타협하지 않습니다.
며칠 전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고 주님께서 말씀하셨던 것처럼
불의와는 갈라서야 하지만 화이부동(和而不同)할 수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부화뇌동은 말고 화이부동은 할 줄 알아야 한다는 뜻인데
우리는 종종 부화뇌동하거나 독불장군처럼 자기 정의만 주장하여
화이부동할 줄 모르고 주님처럼 진정한 평화를 이룩할 줄 모릅니다.
그러므로 참 목자이신 주님의 정의와 평화를 따르는 양들인 우리는
각자의 자리에서 그러니까 성직자는 성직자의 자리에서
가정의 부모나 단체의 장들은 가정과 각 단체에서 이제,
주님을 대신하여 양들을 주님의 정의와 평화로 인도하는 목자가 됩니다.
이때 필요한 것이 목자 의식입니다.
나도 목자라는 의식 말입니다.
나는 주님의 양이기도 하지만 양들의 목자이기도 합니다.
다음으로 필요한 것이 양들에 대한 연민의 사랑입니다.
주님처럼 목자가 없는 양들에 대한 연민이 필요합니다.
양들을 그저 잡아먹고 팔아먹고 부려 먹으려고만 들어서는 안 될 뿐 아니라
그들이 내 맘에 들기를 바라기보다
그들의 고통이 내 눈에 먼저 들어와 그들을 불쌍히 여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가출 소녀가 있습니다.
나쁜 놈들은 그들을 꾀어 성 노리개 삼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을 불쌍히 여기고 그래서 어떻게든 집으로 돌려보내거나
그럴 수 없는 집안 사정이라면 그들을 내 집이나 다른 쉼터로 인도하겠지요.
어떻습니까?
우리는 주님의 정의와 평화를 따르는 착한 양들입니까?
주님의 정의와 평화를 대신 실현하는 선한 목자들입니까?
위기는 기회입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이백명 삼백명은 아니지만, 육칠십명 아이들을 위해
비지땀을 흘리며 열심히 여름 신앙학교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젊은 형제들은 새벽부터 밤늦도록 프로그램 진행하랴, 물놀이 따라다니랴,
동선 체크하랴, 정신이 없습니다.
저는 주방 근무라 새벽 6시에 홀로 미사를 봉헌합니다. 특별한 체험입니다.
아무 탈 없이 신앙학교가 잘 진행되었으면, 하는 지향으로 초스피드로, 그러나 정성껏 미사를 봉헌합니다.
미사 끝나자마자 주방으로 달려가서 하루를 시작합니다.
그리고 아침 끝나면 점심 준비, 점심 끝나면 시장, 그리고 저녁...
단 한 순간도 자리에 편히 앉아 있을 시간이 없습니다.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강철 체력을 주신 주님께 깊은 감사를 드리는 요즘입니다.
정말이지 다들 몸은 피곤하지만, 신명 나는 하루하루입니다.
예수님과 제자단이 펼쳐나갔던 초기 교회 공동체의 모습도 비슷하지 않았을까요?
신명 나게 전개된 예수님과 제자들의 복음 선포 활동은 세상 사람들을 크게 매료시켰습니다.
끝도 없이 밀려드는 군중들로 인해 예수님과 제자들은
잠시 쉴 틈도 없었으며, 음식 먹을 겨를조차 없었습니다.
자연스레 제자들의 피로는 누적되었고, 수면 부족으로 인해 건강까지 염려될 지경이었습니다.
이런 제자들의 모습이 걱정되었던 예수님께서 이렇게 당부하셨습니다.
“너희는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마르 6, 31)
밀물처럼 밀려드는 고객들, 양 떼들로 인해 힘겨웠지만,
다른 한편으로 사기충천 의기양양했던 예수님과 제자 공동체의 모습,
그런 모습과는 너무 비교되는 오늘 우리 교회의 모습을 내려다보며,
참담한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교회로부터 점점 멀어져가는 청소년과 청년들, 급격한 고령화 현상,
동력을 상실한 공동체의 모습을 속수무책으로 바라만 봐야 하는 안타까움은 참으로 큰 것입니다.
예수님을 중심으로 한 초기 교회 공동체가
그토록 군중들을 매료시킨 비결이 무엇인지 유심히 관찰 해 봐야겠습니다.
우리도 그들의 운영 노하우를 배워야겠습니다.
세상 사람들을 우리 교회로 끌어들일 수 있는 매력을 갖추기 위해 노력해야겠습니다.
요즘 교회의 위기라고 합니다만, ‘위기는 기회’라는 말도 있습니다.
위기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기회입니다.
다시 한번 일어서라고, 다시 한번 가장 밑바닥에서부터 새롭게 시작하라고,
그래서 철저하게도 쇄신되고 거듭나라고 주신 은총의 기회입니다.
최선을 다해 노력하고 있다고 생각하더라도, 조금 더 할 것이, 무엇인지 고민 해 봐야겠습니다.
교회를 외면하고 있는 이들, 교회로부터 매력과 흥미를 잃어버린 이들이
눈을 번쩍 뜨고 되돌아올 수 있도록, 더 많은 행복 꺼리들 찾아봐야겠습니다.
우리 교회는 세파에 시달려 지치고 힘겨워하는 양들에게
기쁨과 희망, 열정과 첫 마음을 가득 채워줄 수 있는
에너지 충전소가 되도록 백방으로 노력해야겠습니다.
서공석 요한 세례자 신부
예수님 시대 유대교는 구원받기 위함이라 말하며
사람들을 율법 준수와 제물 봉헌에 얽매여 살게 하였습니다.
하느님을 믿는 것은, 우리가 처한 상황이 어떤 것이든,
자비하신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사실을 믿고,
그분의 자비와 사랑을 우리가 배워 실천하며 사는 데에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시대 유대교는 함께 계시는, 자비하신 하느님에 대해서는 잊어버리고,
율법 준수와 제물 봉헌에만 사람들의 시선을 집중시켰습니다.
율법을 가르치는 직업적 율사와 제물봉헌을 담당하는 직업적 사제들이 등장하면서 일어난 탈선입니다.
그들은 율법에 因果應報라는 이 세상의 원리를 적용하여,
잘 지키면 상받고, 못 지키면 벌 받는다고 가르쳤습니다.
제물봉헌에는 多多益善이라는 인간 욕심의 원리를 적용하여
많이 바치면, 많이 바칠수록 하느님이 좋아하신다고 가르쳤습니다.
예수님도 유대교에 속한 분이었지만,
그분은 율사와 사제들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고, 그들을 비판하셨습니다.
「마태오복음서」는 예수님이 “눈먼 길잡이들”(23,16)이라고 율사와 사제들을 혹평하셨다고 말합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복음은
‘예수님께서는 배에서 내리시어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 같았기 때문이다.’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이 보시기에 율사와 사제들은 사람들을 하느님에게 인도하지 못하였습니다.
하느님의 자녀로 살겠다는 신앙인은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예수님에게 하느님은 인간 생명을 베푸신 분입니다.
그래서 그분은 하느님을 아버지라 불렀습니다. 그 하느님은 자비하신 분이십니다.
인간은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배워 실천하여 하느님의 생명이 자기 안에 살아있게 살아야 합니다.
유대교는 율법을 지키지 못하거나, 제물 봉헌에 충실하지 못한 사람들을 모두 죄인이라 단죄하였지만,
예수님은 그렇게 죄인으로 낙인찍힌 이들도 하느님이 사랑하신다고 믿었습니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예수님의 말씀(마르 2,17)입니다.
오늘 복음에 의하면, 제자들은 전도 여행에서 돌아와
자기들이 한 일과 가르친 것에 대해 예수님에게 보고하였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데리고 따로 한적한 곳으로 가서 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모여들자, 예수님은
‘그들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예수님을 움직이는 것은, 사람들을 가엾이 여기고 돌보아 주는 마음입니다.
「복음서」들은 예수님이 돌아가신 후 그분의 말씀과 행적에 대해
제자들이 기억하던 바를 기록한 문서들이지만,
그 안에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제자들이 한 決意도 함께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은 전도 활동을 한 후, 돌아와서 예수님에게 보고합니다.
이제 그들은 율법과 성전을 기준으로 살지 않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에 준해서 실천하고 반성합니다.
하느님 아버지에 대해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것을 근거로 그들은 세상을 바라보고 행동합니다.
오늘 복음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외딴곳으로 가서 쉬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이 열어놓은 시야에는 우리 자신과 우리의 업적은 보이지 않습니다.
우리의 일만 보이는 우리의 시야를 벗어나, 예수님이 열어놓으신 시야로 들어가라는 말씀입니다.
「마태오복음서」는 예수님이 우리를 쉬게 하신다고 말합니다.
“수고하며 짐을 진 여러분은 모두 내게로 오시오. 그러면 내가 여러분을 쉬게 하겠습니다.”(11,28)
예수님의 가르침은 우리의 욕망과 성취욕에서 우리를 벗어나게 하여
하느님의 사랑 안에 우리를 쉬게 한다는 뜻입니다.
이스라엘의 예언자들이 하느님을 아버지라 말할 때는
그분이 사랑하고 베푸시는 은혜로운 분이라는 뜻입니다.(호세 11,1; 예레 3,19 참조)
오늘 우리가 제1독서로 들은 「예레미야 예언서」는 하느님이 은혜로우시다고 말한 다음,
“그들은 더 이상 두려워하거나 당황하지 않고,
그들 가운데 잃어버리는 양이 하나도 없을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해방절을 가장 큰 축일로 기념한 것도
우리 중심의 좁은 시야를 벗어나 은혜로우신 하느님으로 말미암은 해방을 살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사랑이 자기 중심의 좁은 시야에 갇히면, 하느님은 은혜로운 분이 아닙니다.
자기 자신을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에게 하느님은 자기 위에 군림하는 무서운 분입니다.
인간은 오로지 지키고, 바쳐서 그분으로부터 많은 혜택을 얻어내어야 합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것은, 그분이 은혜로우시다는 사실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감사하는 사람은 자기 주변 사람들에게도 은혜롭게 행동합니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그 감사에 참여하게 합니다.
오늘 복음은 자기의 업적에만 시선을 빼앗기지 말고
예수님으로부터 참다운 자유를 배우라고 말합니다.
「요한복음서」는
“그대들은 내 벗입니다. 나는 그대들을 종이라고 부르지 않겠습니다.”(요한 15,14-15)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할 일은 삶의 방향을 잃고 방황하는 이들을 측은히 여기고,
그들이 은혜로우신 하느님에 대해 깨닫고, 그 은혜로우심을 살도록 인도하는 것입니다.
은혜로우신 하느님을 자기 삶의 중심으로 삼고 사는 것이, 하느님의 나라를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가르쳤습니다.
우리는 삶의 방향을 잃고 헤매기도 합니다.
財物 혹은 權力이 우리 삶의 유일한 보람이로 보여서
그것을 향한 욕심을 쫓다가 하느님 자녀의 자유를 잃을 때도 있습니다.
立身出世하고, 많은 것을 얻어 누리고 싶은 욕심은 인간 모두에게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하여 매진하면서, 비굴하게 행동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자유로운 인간의 모습이 아닙니다.
이 세상은 나 한 사람을 위해 있지 않습니다. 인간은 이웃과의 유대를 살아야 합니다.
이웃을 측은히 여기고, 이웃에게 도움이 되기 위해 노력할 때, 우리는 이웃과의 유대를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이 가르친 하느님 나라입니다. 우리가 살아야 하는 진리입니다.
「요한복음서」는 예수님의 입을 빌려 말합니다.
“내 말에 머물러 있으면... 진리를 알게 되고, 그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8,31-32)
하느님은 측은히 여기고 사랑하는 은혜로운 분이십니다.
그분의 사랑과 은혜로우심을 실천하는 사람 안에 하느님 나라가 있습니다.
인간은 스스로 수양하지 않으면, 자유로워지지 못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으로부터 참다운 자유를 배웁니다.
그리스도 신앙은 자기 한 사람만을 생각하는 俗物根性에서 우리를 해방시켜
예수님에게서 참다운 자유를 배워서 하느님의 진리를 살게 해 줍니다.
이웃을 측은히 여기는 은혜로운 사람이 하느님 자녀의 品位를 유지합니다.
[출처] ‘벨라수녀 영화방’ : 오늘의 말씀 묵상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