탱고의 어원은 ‘만지다’는 뜻의 라틴어 ‘탄게레’(Tangere)에서 비롯되었다. <br>
탱고는 19세기 유럽의 댄스와 댄스 음악이 <br>
아르헨티나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라틴 아메리카와 아프리카 리듬이 <br>
혼용된 복합적인 음악 산물이다. <br>
탱고의 문화적 스펙트럼을 형성하고 있는 유럽·라틴 아메리카·아프리카의 유기적인 결합은 <br>
19세기 아르헨티나의 복합적 문화와 동일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p
남부 유럽의 고전적인 춤곡과 아프리칸 이주민들의 민속음악이 결합된 <br>
탱고 음악은 모체, 또는 원조로 쿠바 아프리칸 노예들의 음악 하바네라(Habanera)를 모시고 있다. <br>
하바네라는 19세기 초 쿠바에서 유행한 2/4박자의 춤곡으로, <br>
아바나에서 이 우아한 춤곡을 접한 아르헨티나의 선인들에 의해 <br>
19세기 중엽 부에노스 아이레스로 건너왔다. <br>
쿠바의 하바네라는 아르헨티아에서 더 강한 템포감과 <br>
아르헨티나 목동의 노래 가우초의 멜로디가 차용된 ‘밀롱가’(Milonga) <br>
―현재 탱고의 변형된 형식이나 댄스 홀을 지칭한다―라는 고유한 형식으로 발전한다. <p>
1860∼70년에 즈음하여 <br>
아르헨티나 전역으로 확산된 밀롱가는 <br>
아프리칸 흑인 노예의 주술적 의식을 표방한, <br>
독특한 싱커페이션을 가진 2/4박자의 카니발 음악 칸돔블레(Candomble)로 진화하고, <br>
이는 탱고의 원형에 가장 근접한 음악이 되었다. <br>
그 밖에 유럽의 폴카와 중남미의 격렬한 축제 음악 살사와 볼레로에서도 <br>
그 내용을 흡수하게 된다. <br>
탱고 음악에 함유된 복잡하고 다양한 다문화적 배경은 <br>
탱고 음악이 오늘날 인종과 민족에 구애받지 않고, <br>
월드뮤직으로서 폭넓은 대중성을 확보할 수 있는 최선의 요건으로 작용하고 있다. <p>
탱고의 산지는 아르헨티나의 수도인 항구 도시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보카 지역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br>
부에노스 아이레스가 아르헨티나의 수도가 된 것은 <br>
v 1880년대이며, 1930년대까지 급속한 팽창이 이루어져, <br>
짧은 시간에 라틴 아메리카 최대의 도시가 되었다. <br>
19세기 말에서 1930년대에 이르기까지 부에노스 아이레스에는 <br>
유럽에서 이주해온 수많은 이주민들로 가득했다. <br>
라틴 아메리카의 열기가 가득한 이국적인 ‘남미의 파리’의 거주자 중 <br>
75% 이상이 유럽에서 이주해온 이민자들이거나 그들의 자손들이었다고 한다. <br>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동남쪽에 있는 지저분한 항구인 보카에는 <br>
부두와 신생 공업 지대가 인접하고 있었고, <br>
이탈리아에서 이주해온 극빈층 이주민들이 밀집되어 있었고, <br>
이 가난한 서민의 도시에는 유럽의 생활 양식 그대로인 <br>
카바레와 음악이 흐르는 선술집과 레스토랑이 <br>
보헤미안의 고단한 삶을 달래주고 있었다. <br>
거친 항만 노동자와 도축업자, 밀수꾼과 거리의 여인들이 뒤엉킨 <br>
이 도시의 풍경에는 생활에 찌든 노동자의 권태와 고독감이 가득하였다. <p>
이렇게 하층민의 가난한 삶과 <br>
체념적인 인생관은 라틴 음악의 격정과 융화되어 <br>
탱고 음악의 정서와 내용이 되었다. <br>
흥청대는 밤거리와 어둡고 습기 가득한 보카의 일상은 <br>
2/4박자의 강렬한 리듬감과 악센트를 자아내며, <br>
강한 호소력으로 그들의 삶과 영혼을 지배했다. <br>
보카의 빈민굴에서 발생한 탱고는 처음에는 항구에서 기생하는 도박사·밀수꾼 등 <br>
이방인들의 세계에서만 그 명맥을 유지했으므로 <br>
‘포르테냐 음악’(Musica Portena)이라고도 불렸다.<p>
<font color=blue><b>초기 탱고 음악의 발전</font color=blue></b><p>
최초의 탱고 곡은 1880년대에 발표된 ‘Bartolo’로 기록되고 있으며, <br>
‘El Choclo’의 작곡자인 앙헬 비요르도가 <br>
기타와 하모니카를 동시에 연주하며 장난스럽게 불렀던 노래가 <br>
탱고 음악의 원형이었다. <br>
초창기의 탱고는 플루트·클라리넷·기타·바이올린으로 연주되었지만 <br>
1910년 무렵 ‘El Amancer’의 작곡자인 로베르토 피르포가 <br>
처음으로 독일에서 수입해온 반도네온이라는 악기를 사용하면서, <br>
반도네온은 탱고를 특성화하는 상징이 되었다. <br>
어둡고 무거운 음색의 반도네온은 강력한 스타카토·레가토 주법으로 <br>
아르헨티나 탱고의 독특한 리듬감을 재현하는 데 더없이 유용한 도구였다. <br>
1910년대 오스발도 푸글리에세에 의해 제안된 탱고의 기본적인 편성은 <br>
‘오르케스타 티피카’라는 고유한 명칭의 반도네온 2대, <br>
바이올린 2대, 피아노 1대, 베이스 1대로 구성된 6중주 편성으로 <br>
확립되었다. <br>
때로 오르케스타 티피카를 축소한 반도네온 1∼2대, <br>
바이올린 1∼2대, 피아노 1대, 베이스 1대의 편성인 ‘콘훈토’는 <br>
더 밀도 높은 연주에 사용되기도 했다.
<p>
카를로스 가르델은 탱고 음악의 첫 번째 거장으로 기억되고 있다. <br>
수려한 외모와 아름다운 음색, 뛰어난 작곡 능력을 보유한 그는 <br>
여러 방면에서 성공을 거둔, 최초의 탱고 스타였다. <br>
프랑스에서 태어난 그는 <br>
19세기 말 아르헨티나로 이주해서 유럽과 남미의 이질성과 동질성을 결합하며 <br>
탱고 음악의 특성을 대중들에게 설파했다. <br>
그는 자신이 주연했던 영화에서 13세 소년, 아스토르 피아졸라를 발탁하기도 했다. <br>
가르델은 1937년 비행기 사고로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수백 곡의 히트곡을 남겼다. <br>
초기에는 주로 왈츠나 쿠에카·가우초 등의 <br>
아르헨티나 민속음악을 연주하다가, <br>
1917년 최초의 탱고 히트곡 ‘Mi Noche Triste’를 발표하면서 아르헨티나 국민의 열광적인 지지를 얻는다. <br>
‘Mi Buenos Aires Querido’는 그의 이름을 오늘에까지 지속시켜주었던 초기 탱고 음악의 명곡들이었다.<p>
가르델의 갑작스런 죽음 뒤에 <br>
그가 뿌린 씨앗들은 하나둘 열매를 맺기 시작한다. <br>
가르델과 함께 ‘현대 탱고의 시조’라 불렸던 훌리오 데 카로를 비롯해서 <br>
로베르토 필포·프란시스코 카나로·오스발도 프레세도·후안 필리베르토 등이 <br>
포스트 카를로스 가르델 시대의 주역으로 초기 탱고의 발전을 진두 지휘했던 인물들이다. <br>
그들의 음악은 단순한 감상의 차원이 아니라 <br>
탱고의 또 다른 의미인 무용을 위한 목적을 특화시켰다. <br>
이때부터 탱고 음악은 춤곡의 성격을 전면적으로 띠기 시작했으며, <br>
탱고 음악을 위한 대규모 밴드가 조직되었다. <br>
후안 데 아리엔조와 아니발 트로일로는 <br>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라 쿰파르시타’와 같은 <br>
정식 오케스트라 버전의 곡을 생산했다.<p>
탱고의 황금기라 일컬어지는 1930년대는 <br>
탱고의 ‘빛과 그림자’가 공존하는 혼란의 시간이었다. <br>
1930년 군사 쿠데타에 의해 군부가 아르헨티나를 점령하면서 <br>
탱고 음악은 심각한 위기를 맞는다. 3명 이상이 모이는 것을 금지하고, <br>
자유로운 의사 표현과 문화를 향유할 수 없었던 폭정 시대에 탱고 음악은 정치적 탄압의 대상이 되었다. <br>
탱고가 연주되고, 탱고 춤이 함께 흐르던 클럽과 댄스 홀은 폐쇄되었고, <br>
수많은 탱고 작곡가와 뮤지션들이 블랙 리스트에 오르며, 창작의 날개를 꺾어야만했다<p>
.
그러나 1930년대 후반 <br>
아르헨티나 시민들이 정치적 자유를 회복하면서 <br>
탱고는 다시 활기를 띠게 되었고, <br>
탱고 음악은 ‘아르헨티나 서민들의 자유를 위한 찬가’라는 의미가 보태졌다. <br>
가난한 빈민층의 음악이었던 탱고는 지식인과 상류층으로까지 확산되었으며, <br>
더 낭만적이고, 목가적인 이미지로 변모되어 갔다. <br>
1946년 포퓰리즘(대중영합주의)을 표방하며, <br>
기층 민중의 지지를 얻었던 정치 군인 후안 페론이 집권하고, <br>
아르헨티나 국민의 연인이자 성녀였던 영부인 에비타가 정열적인 탱고를 선보임으로써, <br>
탱고는 다시 한 번 최고의 중흥기를 맞게 된다. <br>
1952년 에비타가 사망하기 전까지 아르헨티나의 전역에는 <br>
수백 개의 탱고 오케스트라가 번성하였고, <br>
크고 작은 댄스 홀에는 수만 명의 댄서들이 활동하고 있었다. <br>
그러나 페론주의가 선택한 정치적, 외교적 고립, <br>
그리고 1955년 로나르디 군부의 집권과 경제적 공황을 겪으면서 탱고는 <br>
20여 년 동안 암울한 어둠 속에서 버려져야만 했다.<p>
탱고가 처음 유럽에 소개된 것은 20세기 초였으며, <br>
1910년대에는 유럽의 상류층 사회를 중심으로 탱고 붐이 일기도 했다. <br>
이 무렵 유럽을 사로잡은 탱고의 열풍은 미국에도 상륙하는데, <br>
탱고 스텝을 고안하여, 대중적으로 유포시킨 무용가 카스루 부부와 <br>
이탈리아 출신의 무용가이자 영화배우였던 루돌프 발렌티노에 의해 확산된 ‘발렌티노 탱고’의 공로가 컸다. <br>
1920년대에서 1930년대까지 탱고 음악은 <br>
유럽에서 새로운 작풍으로 작곡·연주되었고, <br>
탱고는 전통적인 ‘아르헨티나 탱고’와 <br>
유럽의 우아한 댄스 음악이 접목된 유럽의 새로운 탱고 양식 ‘콘티넨털 탱고’로 분화되었다.<p>
아르헨티나 탱고가 빈민굴과 선술집 등 <br>
서민들의 삶의 터전에서 비롯되었던 것에 반해, <br>
콘티넨털 탱고는 유럽 상류사회의 무도회에서 시작되었다는 정서와 <br>
계급적인 측면에서의 뚜렷한 차이가 있다. <br>
콘티넨털 탱고는 정박자의 리듬을 기초로 한 아르헨티나 탱고에 비해 <br>
더 가벼운 리듬감과 우아한 선율미를 강조함으로써, <br>
유럽의 고전음악에 근접하고 있다. 아르헨티나의 탱고가 반도네온·바이올린·피아노·베이스에 의해 연주되었던 데 반해, <br>
콘티넨털 탱고의 오케스트라 편성 방식은 유동적이기는 했지만, <br>
더욱 다채로운 현악기가 채용되어 실내악적인 감수성이 부가되었다. <br>
또한 어둡고 무거운 음색의 반도네온 대신에 아코디언이 널리 채택됨으로써, <br>
밝고 매끄러운 멜로디 중심의 음악이 되었다. <br>
콘티넨털 탱고가 댄스 음악의 목적에 치중하고 있음에 반해, <br>
아르헨티나 탱고는 서민들의 애환과 삶의 그리움을 <br>
진솔하게 표현하는 가사 중심의 노래 언어라는 특성에서도 뚜렷한 차별성을 지닌다. <p>
<font color=blue><b>탱고의 부활</font color=blue></b>
<p>
에비타의 사망, <br>
그리고 기층 민중의 힘을 두려워했던 군부 독재가 탱고를 억압하면서, <br>
탱고는 20여 년의 긴 시간 동안 침묵해야만 했다. <br>
탱고가 연주되던 클럽이나 살롱은 문을 닫았고, <br>
자연스레 탱고 오케스트라는 하나둘 해체되었다. <br>
탱고를 연주하던 뮤지션들도 생계를 위해 다른 일거리를 찾아야만 했으며, <br>
수많은 초기 탱고 음악의 선구자들이 세상을 떠났다. <br>
오르케스타 티피카의 편성은 축소되고, <br>
레코드 녹음이나 해외 공연 등의 특수한 상황에서만 <br>
탱고는 그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다. <br>
이런 탱고 음악이 겪은 모진 풍파와 함께 대중들의 기호도 변모했다. <br>
이런 변화의 요구에 발맞추어 탱고 음악 역시 새로운 체질 개선을 시도하게 된다.
<p>
위기는 또 다른 기회였다. <br>
영원히 소멸될 것만 같았던 탱고가 새로운 부흥의 시간을 맞이할 수 있었던 것은 <br>
현대 탱고의 우상, 아스토르 피아졸라의 등장 때문이었다. <br>
그는 기존의 닫혀진 음악, <br>
제한된 음계와 화성학에 갇혀 있던 탱고 음악에 날개를 달아 드넓은 창공을 보여주었다. <br>
그는 독창적인 화음 개념을 부착시켜 <br>
1959년 ‘Adios Nonino’를 발표한 이후 ‘Berretin’ ‘Verano Porteno’ <br>
‘Melancolico Buenos Aires’ 등의 현대 탱고의 걸작을 쏟아내면서 탱고의 새로운 차원과 부흥을 꾀했다. <p>
피아졸라는 “탱고도 재즈처럼 변화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펼치며, <br>
탱고 음악이 시대와 환경에 적응하며 새로운 양식으로 진화·발전되어 <br>
야 한다고 역설했다. <br>
그가 내딛은 ‘새로운 탱고’(El Nuevo Tango)를 향한 선언 아래 <br>
깨어 있는 탱고 작곡가와 연주자가 몰려왔으며, <br>
이 변화의 흐름 속에 탱고는 오늘까지 닫혀진 음악 형식이 아닌 열린 음악으로 진화하고 있다. <br>
피아졸라의 고군분투 속에 탱고는 <br>
재즈와 클래식을 비롯한 세계의 모든 음악가의 귀와 가슴을 유혹했으며, <br>
더 이상 탱고는 아르헨티나의 음악으로만 구속되지 않았다.<p>
1977년 아르헨티나 정부는 <br>
카를로스 가르델과 훌리오 데 카로의 탄생일인 12월 11일을 <br>
‘탱고의 날’로 제정했으며, <br>
1980년에는 탱고 탄생 100주년을 맞이하고 부흥의 리듬은 고조되었다. <br>
1987년 탱고의 명곡에 당시의 스텝을 가미한 <br>
‘탱고 아르헨티노’의 공연은 세계적인 인기를 누리게 되었다. <br>
세계의 모든 음악가들은 자신의 창작에 <br>
탱고라는 라틴 아메리카의 격정과 비감 어린 음악을 넣기 위해 <br>
탱고를 향해 몰려들고 있다.<p>
1998년 ‘탱고’라는 영화를 연출하여 <br>
탱고가 단순한 음악과 춤이 아닌, <br>
그 자체로서 문화임을 일깨웠던 영화감독 카를로스 사우라는 <br>
“탱고의 영혼으로 가까이 다가갈 수 있기 전까지 나의 작업은 아무런 가치가 없었다” <br>
라고 탱고의 의미를 밝혔다. <br>
아르헨티나의 생선비린내 가득한 선창과 홍등가의 흐린 불빛 아래에서 <br>
태어난 탱고는 가난한 민초들의 삶에 스며 있는 애환과 영욕, <br>
기쁨과 눈물, 집착과 한이 어우러진 고단한 삶의 기록이며, <br>
그들이 살아가고자 하는 희망이며, 처절한 몸부림이다. <p>
“탱고는 시인들이 언어로 기술하고자 하는 것들, <br>
그리고 투쟁은 곧 축제라는 믿음에 대한 직접적인 표현이다.” <br>
-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p>
하종욱 | 재즈 칼럼니스트<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