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 성령작업
2-1. 길위학교
하늘과 별과 바람을 등에 지고 나무와 풀과 꽃들의 속삭임을 들으며 걸었던 270Km 지리산 둘레길, 마음 속 꽁꽁 묻어두었던 이야기들을 나누며 청소년과 동행자가 걸었던 9박 10일간의 아름다운 동행인 성공회대전나눔의 집 ‘길위학교’가 올해로 16차를 넘었습니다. 많은 청소년과 동행자가 걸었던 아름다운 둘레길과 주교로서 걸어왔던 저만의 ‘길위학교’를 소개하고 싶습니다.
“예수께서 길을 가시다가 태어나면서부터 눈먼 소경을 만나셨는데(요한9:1) 예수가 “그가 소경으로 태어난 것은 자기 죄 탓도 아니고 부모의 죄 탓도 아니다. 다만, 저 사람에게서 하느님의 놀라운 일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다.”고 말씀하셨다(요한 9:3). 소경은 예수의 명대로 실로암 연못으로 가서 씻고 눈이 밝아졌다(요한 9:7).“
‘도락(道樂)’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길을 걷는 즐거움’이라고 간단히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만, 도락은 ‘도(道)를 닦아 깨달음을 얻은 뒤에 생기는 기쁨’이라는 뜻으로 ‘깊고 참된 이치를 깨달았을 때 느끼는 기쁨이나 환희’라는 뜻이 있습니다. 단순히 길을 걸으며 얻는 즐거움인 도락이 심오한 환희라는 신비에 닿아 있다니 여기서 ’길위학교‘가 단순히 걷는 여행이 아닌 더 큰 의미의 깊은 학교라는 생각이 듭니다.
한 발자국 한 발자국 내딛다 보면 어느 순간 잡념이 사라지고 마음속에 막힘없는 너그러움이 드러날 때가 있습니다. 그 순간, 같이 발걸음을 내딛어 주었던 하늘이 더욱 푸르게 보이고 그 하늘이 내 안에 들어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우주와 제가 분리되지 않고 하나가 되는 설명할 수 없는 경험입니다. 아마도 진리의 깨우침을 느끼는 순간의 기쁨이 환희라고 한다면 바로 ‘길위학교’에서 얻을 수 있는 기쁨 중의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1889년 11월 1일 영국 런던의 웨스트민스터 성당에서 찰스 존 코프 주교는 주교성품을 받고 조선 선교의 명을 켄터베리 에드워드 화이트 벤슨 대주교로부터 받습니다. 그는 조선선교를 앞두고 자신의 선교표어로 “하느님께는 먼 곳이 없다. Nihil longe est Deo”로 세웁니다. 영국의 정반대인 곳에서도 하느님은 계시다는 자기 확신을 믿음으로 표현한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선교포어는 조선성공회의 믿음의 기반이 되었고 대한성공회으로 이어져 나눔의 집 ‘길위학교’의 정신과 가치의 출발이 되었다고 봅니다. 하느님이 함께 하시는 ‘길위학교’의 출발은 그런 하느님 대한 믿음인 것이며 ‘길위학교’에서 만나는 청소년과 동행자에게 하느님은 멀리 계시지 않고 늘 함께 계시다는 것을 알게 해 줍니다.
하느님은 인간이 헤아릴 수 없는 절대적인 큰 힘과 지혜를 지니신 분입니다. 하느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은 그 큰 힘과 지혜와 함께 걷는 것 이상이 된다고 생각하면 될 것입니다. 내 힘으로는 못할지라도 그분이 함께 하신다면 못할 일이 무엇일까라는 마음이 들고 비록 우리는 보지 못할 지라도 그분과 함께라면 볼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드는 곳이 바로 ‘길위학교’입니다. 자신감이 없어 오히려 객기로 자신의 존재를 엉뚱하게 표현할지라도 그분의 지혜로 받아 주는 하느님이 보내주신 동행자가 같이 걷는 ‘길위학교’는 존 코프 주교의 선교표어처럼 우리 옆에 그분이 항상 계심을 알려주는 여행이 될 수 있습니다.
청소년과 동행자들과 같이 걷다 보면 청소년뿐만 아니라 동행자들도 그 속을 알 수 없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나 자신도 나를 모르는데 어찌 그들의 속을 알 수 있는가?’ 라는 질문을 하며 발걸음을 내딛다 문득, 내 마음에 들지 않는 그들의 행동이나 말하는 태도 등을 발견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다가 이내 그것만이 동행자의 전부가 아님을 깨닫게 됩니다. 내가 보는 모습이 전부가 아님을 알게 되고 그 속에서의 편견을 가진 편협한 ‘나’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나’임을 받아들이게 되는 경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내가 생각한 것이 맞다’는 교만한 ‘나’를 발견했던 곳이 바로 ‘길위학교’에서였습니다. 교만함으로 힘이 들어갔던 어깨의 힘이 빠지고 그러다 보니 마음속 깊은 구석에서 무언가 신선한 바람이 이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앞을 보지 못하는 소경이 앞을 보는 것처럼, “아, 이것을 모르고 살았구나” 참으로 어리석기도 한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작품입니다. 곧 하느님께서 미리 마련하신 대로 선한 생활을 하도록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창조하신 작품입니다(에페2:10).” 나를 만드신 하느님 앞에서 나의 교만한 자랑을 함부로 내세울 수 없을 것입니다. 나의 작품이 하느님이 아니라 내가 하느님의 작품임을 확인하는 길위학교입니다. 하느님 앞에 머무르는 그 자체만으로도 큰 기쁨이 됩니다. 창조주 하느님을 믿는 그 마음부터 이미 기쁨은 시작된 것입니다. 하느님을 안다는 것은 선가 악이 분리된 세상의 너머에 있습니다. 선악의 분리는 극단적인 인간을 형성하여 선과 악 중간쯤 어디에 있는 한 사람에 대해 이해를 하지 못합니다. 한사람 안에 선과 악이 있어 그사이를 오가며 성장하는 것이 바로 인간입니다. 절대 선인과 절대 악인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고 머릿속에만 존재하는 인간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선악의 구분을 넘는 자리에 계십니다. ‘길위학교’는 선인과 악인을 구분하지 않고 존재, 그 자체로 바라보게 만듭니다. 이런 마음가짐으로 동행자는 청소년을 바라보기에 청소년도 긴장을 풀게 만듭니다.
예기치 않은 위험과 불편함에 익숙한 청소년들은 이런 분위기가 익숙치 않아 결국엔 좌절감에 도망치는 방식을 취하곤 합니다. 그리고 도망치기 위해 거짓말을 하고 거짓말을 하는 자신의 모습에 마음 한구석에 죄책감이란 돌을 매단 체, 생존하기 위해 발버둥 치며 살아내는 삶의 방식이 두텁게 쌓여 버립니다. 입에서 나오는 것이 늘 거짓말과 욕일 수밖에 없는 그들의 방식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이런 청소년들에게 ‘길위학교’는 자신의 내면을 발견하게 되는 천운의 학교인 것입니다. 이런 기회가 자신에게 왔다는 것만 해도 참으로 좋은 기회라고 결국엔 받아들이게 되는 학교입니다.
과학기술문명의 시대로 많은 도구나 기기들을 사용하지만 결국 혼자 힘으로 살아내야 하는 것을 알기에 ‘길위학교’는 이런 체험을 통해 혼자 해낼 수 있는 힘을 기르는 시간을 만들어 줍니다. 혼자이기에 약하면 살 수 없습니다. 사회 속에서 청소년은 강해야만 살아남게 됩니다. 살아남기 위해 거짓말을 했고 도둑질을 했으며 그래서 이렇게 잡혀 왔다는 고백을 한 청소년에게 동행자는 “그렇게라도 살았으니 고맙구나.” 이 말 한마디에 청소년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길을 걸으며 서로의 말을 들어주면서 세상에서 느껴보지 못한 공감과 위로가 청소년에게는 세상에서 받지 못한 새로운 느낌으로 다가간 것입니다.
청소년기에는 우정만큼 멋진 것이 없습니다. 우정은 교과서에서 글로 배우는 것이 아닙니다. 삶에서 동무와의 관계를 익히는 것입니다. 배움이라기 보다는 경험치로 아는 것입니다. 서로의 경험이 쌓이면 우정도 쌓이게 되는 겁니다. 우정에는 신뢰가 쌓여가는 시간이 필요하고 역사가 필요합니다. 신뢰는 우정을 순수한 아름다움으로 만들어줍니다. 그러나 ‘길위학교’에서 만난 청소년들은 돈이라는 물건 앞에 우정이라고 믿었던 사람들의 배신을 경험하며 우정을 믿지 못하게 됩니다. 그런 우정의 깨짐을 겪어본 사람에게는 우정이라는 말을 함부로 하지 않습니다. 삶의 밑바닥을 걸어온 청소년들에게는 우정은 그저 책 속의 단어일 뿐입니다. 이런 청소년들에게 ‘길위학교’는 같이 걷는 사람들에게 의존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의존하지 않으면 길을 찾을 수 없고 밥을 먹을 수 없습니다. 의존하면서 때로는 이기적인 자신과 이기적인 타인을 만납니다. 우정은 이처럼 상호의존적이면서도 이기적인 것입니다. 이기적이지 않은 우정은 없다는 것을 수도 없이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그런 세상 속에서 살아내야 하는 청소년들에게 양팔을 들어 사랑을 표현하는 행위는 사치일 뿐입니다. 그런 단순한 행동으로 사랑과 우정이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서로 의존해야만 살아낼 수 있는 것을 ‘길위학교’에서 배우게 됩니다.
젊은 날 혁명적 기치를 내세우며 친구들과 어깨 걸며 나아갔던 저의 우정이 있었습니다. 그런 우정은 과거에 머물지 않고 저의 삶 곳곳에서 귀하고 소중했던 경험임을 매번 느끼게 해 줍니다. 더 나은 세상을 세워보겠다는 열정, 그 열정에서 오는 벅찬 기쁨들이 저를 살렸기에 그 시절 우정을 나눈 친구와 동료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처럼 ‘길위학교’는 자신의 불편함을 나눌 때까지의 기다림의 과정에서 생기는 우정 속에서 자신을 재발견하게 됩니다. 새벽공기를 마시며 결의에 찬 발걸음에 이슬이 스칩니다. 바지자락에 젖어 들던 그 이슬과 같이 골목길을 내달리며 서로 장난치며 웃었던 청소년들의 넘치던 웃음과 우정이 그립습니다. 젊음을 우정의 도구로 삼으신 하느님께 고마움과 감사함을 바치는 아침이었습니다.
미국에서 오바마 대통령이 당선되었을 때 ‘더 살기 좋고 더 나은 세계를 세웠구나. 진정한 흑인 노예해방의 날이로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새로운 세상이 되었으니 잘 다져 더 나은 세상이 되겠구나 라는 생각이 곧 다음 대통령을 통해 무참히 무너지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하느님이 사시는 계단이 부서졌다는 절망감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 계단을 통해 인간과 왕래하는 세상으로 복 있게 사는 세상이라 여겼는데 그 계단이 부서져 버려 하느님과 소통하며 관계를 맺으러 오르락내리락할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젊은 날 공장의 노동자로 산다는 것이 이런 부서진 계단을 복구하는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하느님의 부르심으로 사제가 되었을 때도 부서진 계단을 고치는 작업을 하라고 받아들였습니다. 부서진 계단을 고쳐 하느님과 온전한 관계를 회복하고자 하였습니다. 부서진 계단을 즉 하느님과의 관계단절로 인한 부서진 가슴은 회복하는데 많은 시간을 들여야 합니다. 그리고 정성도 필요합니다.
사람을 만나 속마음을 나누는 일은 누구에게나 어려운 일입니다. 이러한 일도 기술이 필요합니다. 대화를 나눈 경험이 적은 청소년들은 더욱 어려운 일이 될 것입니다. 자신이 속내를 고스란히 드러내는 과정도 어렵지만 그 속내를 온전히 들어주는 것도 또한 어려운 것입니다. 우리나라 국창이신 박동진 선생님으로부터 2년간 판소리를 배웠습니다. 판소리는 목으로 흥얼거리는 단순한 노래가 아닙니다. 온몸을 사용하여 온힘으로 부를 때에만 제대로 소리가 나오게 됩니다. 그분에게 쑥대머리를 단가로 배웠습니다. 그때 온몸을 사용하여 온 힘을 다해 속의 힘을 토해내듯이 말과 뜻을 어울려 표현하는 방법을 어렴풋이 배우게 되었습니다. 제대로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산다고 여길 때 저는 그때 배운 쑥대머리를 불러봅니다. 그리고 복음도 불러봅니다. 그러면 어느덧 정신을 차리게 됩니다. “춘향이가 옥방에 있을 때 그의 형색을 볼 것 같으면, 쑥대머리 귀신형용....”
영국 람베스궁에서 켄터베리 저스틴 웰비 대주교 앞에서 복음을 판소리로 내어 수도사들의 환호를 받았었고, 뉴욕의 성트리니티 성당에서는 해금으로 황조가를 연주하여 하느님께 찬미를 바쳤을 때 새로운 세상을 여시는 하느님의 힘과 저의 온몸과 마음으로 드러내는 저의 속내를 들어주시는 그분의 따뜻함 즉 진정한 대화임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외로워라 이 내 몸은 뉘와 함께 돌아갈꼬.”의 신국악을 연주하며 하느님과 함께 천국으로 돌아가는 꿈을 꾸었습니다. 획일적으로 집단화하지 않고 각기 다른 삶으로 소중한 것을 지키는 모습을 허용하고 저의 소리를 들어주신 켄터베리 저스틴 웰비 대주교와 뉴욕교구의 디치주교와 신알랜주교와 리퍼사제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습니다.
작은 자의 소리를 듣는 것은 시간을 내야 하고 정성을 들여야 들을 수 있습니다. ‘길위학교’는 그렇게 작은 자들의 속내를 듣는 학교입니다. 목에서 나는 단순한 소리가 아닌 온몸과 온힘으로 아픔 속에서 자신의 속을 드러내는 그들만의 속내를 듣기 위해서는 입만 본다고 들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함께 작아지지 않으면 결코 들을 수 없는 것입니다. 서품성사시 사제가 엎드리는 이유를 알면 됩니다. 크게 보면 이 세상에서 나은 게 보이지 않는 평범조차도 되지 않는 별 볼 일 없는 사람임을 인정하게 됩니다. 그 크신 하느님 앞에서 엎드릴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 동행자라야 청소년과 진정한 속의 말이 오가게 됩니다.
요르단에서 사해의 물을 입에 대니 짜다 못해 쓴 물맛이었습니다. 예수님도 이 물을 수없이 맛보셨을 것입니다. 요르단 강 건너 저 멀리 여리고가 보였습니다. 여리고에 가까이 가면 요르단 강물이 빠르게 흐르는 것이 보입니다. ‘이곳에서 예수님이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구나’ 뿌연 요르단 강물에 손을 넣어 물살을 느껴보면서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의 세례성사를 상상하며 하늘을 보았습니다. 하늘이 매우 파랗고 드높았습니다. 예수도 그날 이 하늘을 보셨을 겁니다. 비둘기가 푸른 하늘에서 날아 요르단강물 위로 내려오는 것을요.
요르단 국왕이 예수의 세례성사가 일어난 이곳 땅을 성공회에 봉헌해 주셨습니다. 세계성공회 관구장 회의에 참석한 대주교들이 예수의 세례성사가 이뤄진 이곳에서 가슴에 찬 십자가가 뜨거운 태양으로 인해 비췬 빛이 서로의 얼굴에 비치는 오전 11시에 기도를 하느님께 바쳤습니다. 그 십자가의 빛들이 마치 하늘에서 내려오는 성령의 비둘기인 것처럼 대주교들에게 내리는 신비한 광경이었습니다.
오래 걷는 것은 지루함의 반복입니다. 쉽게 지치게 되고 특히 산비탈을 오를 때면 힘들어 포기하고 싶은 마음도 듭니다. 어쩌면 요르단의 돌과 모래만 가득하고 나무가 보이지 않는 사막에서 길을 걷는 것과도 같은 심정이 될 것입니다. 힘들고 포기하고 싶고 지치고 쉬고 싶은데도 걸어야 합니다. 그런 불편함을 참고 참으며 걷고 또 걷게 됩니다. 발에 물집이 생겨서 발바닥이 쓰라립니다. 그런 와중에 이런 고통은 잊고 오직 자신 안의 정리되지 못한 일들을 신경 쓰다 보면 불편함과 고통은 잊게 됩니다. 고통스런 순간에 고통을 잊고 불편함 중에 불편함을 느끼지 못하는 순간이 옵니다. ‘길위학교’는 그런 시간을 갖게 해 줍니다. 그런 신비의 시간을 통해 자신의 다른 삶을 경험하면서 자신의 삶을 재배열하게 됩니다.
요르단 강물로 세례성사를 받은 예수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성령을 받습니다. 청소년들도 ‘길위학교’에서 자신 안의 새로움의 자리를 발견하게 됩니다. 특히 동행자들의 동행도 단순한 동행이 아닌 지극정성을 주는 동행이기에 동행자가 주는 세례성사로 하늘의 성령을 받는 시간으로 보입니다. 푸른 창공이 보고 있고 숲 속의 나무들이 보고 있고 서로의 속을 바라보는 시간입니다. 하느님이 함께 하는 시간이 됩니다. 우리가 알 수 없는 신비의 시간이 고통과 불편함을 잊게 만듭니다. 고통과 불편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게 됩니다. 저녁에 숙소에 도착해서야 발바닥이 다 헤진 처참함을 보게 되지만요.
이스라엘과 국경지역이었던 이곳에서 벗어나면 지뢰가 묻힌 위험지역이라고 합니다. 그 위험지역에 가기 직전에 요르단 압둘라 국왕이 세계성공회 대주교들을 위해 환영식과 만찬을 준비해주었습니다. 현 압둘라 국왕은 아버지왕을 이어 두 번째 세대의 왕이었습니다. 저와 비슷한 키에 얼굴도 저와 비슷하다는 대주교들의 말들이 있었습니다. 압둘라 국왕을 알현할 때 한국에서 왔다고 하니 매우 반갑게 맞아주셨습니다. 요르단을 도와달라는 압둘라 국왕의 담화도 들었습니다.
이어서 요르단식 식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숟가락만 주어졌고 큰 쟁반 안에 쌀밥과 양고기가 있고 요커트 사발이 옆에 있었습니다. 자기 앞에 먹을 양만큼 요거트를 붓고 숟가락으로 쌀밥과 양고기를 적당히 얹어서 먹는 것이었습니다. 앞 접시에 익숙한 서구의 대주교들은 밥먹기를 매우 어려워했고 저도 주저주저하는데 케냐대주교가 맛있으니 먹어보라고 세 번이나 권해 조심스럽게 숟가락으로 한번 먹어보았습니다.
향신료 냄새가 강하지 않아 먹기가 괜찮았습니다. 압둘라 국왕이 함께 하는 만찬이라 귀한 자리로 여겼고 감사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후에 공항가는 택시운전사에게 여쭤보니 참으로 존경받는 국왕이라고 알려주었습니다. 인간적으로 만나고 거기다 후한 대접까지 받는 자리는 우리를 너그럽게 만들어 줍니다. 관용의 저 밖의 사람이 관용 안으로 들어가게 해 주는 것은 관용이었습니다. 한 사람의 관용이 많은 사람을 관용적이게 만드는 자리를 경험한 것입니다. 누구라도 그 한 사람의 관용을 가질 자리가 주어질 때 관용을 베풀면 많은 사람이 관용적이게 됩니다.
청소년들이 동행자를 만난다는 것은 참으로 귀한 시간입니다. 인간에게 사랑을 주시고자 늘 준비하신 하느님처럼 동행자는 청소년들에게 사랑을 주고자 준비한 사람입니다. 특히 몸과 마음이 상했을 때는 더더욱 같이 해주기에 어머니 품처럼 느끼기도 할 것입니다. 실제 그런 말을 청소년들이 합니다. 귀한 사람과 함께 밥을 먹으면 자신도 귀인이 된 느낌을 받게 됩니다. 국왕과 함께 밥을 먹으니 국왕 같은 사람이 된 듯한 느낌을 받는 것처럼요. 국왕과 함께 밥을 먹은 사람이니 경호원들이 대주교들을 국왕처럼 대해 주었습니다. 동행자들과 함께 밥을 먹는 것에서부터 자신이 귀인이 되는 것을 매번 밥을 먹을 때마다 느끼게 됩니다. 자신 스스로 귀인이라고 느껴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는 고백을 듣기도 합니다. 한 인간이 한 귀인으로 만나는 동행자입니다. 길위학교는 이렇게 한 인간을 귀인으로 만들어 줍니다.
아시아, 남미, 중동의 대주교들의 모임이 방콕에서 있었습니다. 저녁 만찬을 시작할 무렵에 한 분을 소개하는 자리가 있었습니다. 태국의 경제적인 안정을 다진 태국의 전 수상이었습니다. 태국인들은 국왕을 존경하는데 국왕 다음으로 이 전 수상을 존경한다고 합니다. 미국서 공부하고 태국의 경제적인 안정을 위하여 애를 쓰신 수상이라고 하여 한국의 태국대사가 가장 존경하는 수상이라고 신문에 기고한 글을 본 적이 있습니다. 한국에서 왔다고 하니 한국을 여러 번 방문하여 많이 배웠다는 말씀을 주셨습니다. 참으로 겸손하신 태국의 어르신이라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키도 크신데 키보다도 마음과 겸양이 크신 지혜자로 느껴졌습니다. 만찬이 끝 날 무렵 자신은 불자인데 몸이 아프니 성공회 대주교님들의 안수기도를 받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네 분의 대주교들이 수상의 양 어깨와 머리와 등에 손을 대고 하느님께 간절히 빌었습니다. 사제는 어디를 가든 아픈 사람을 위해 늘 기도를 하는 사람입니다. 아픈 사람이 낫기를 아픈 사람이 되어서 간절히 기도를 하는 이가 바로 사제인 것입니다. 그렇게 ‘길위학교’는 아픈 사람이 성한 사람이 되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동행자로 걷는 것입니다. 아픈 사람은 그 아픔 때문에 다른 것들에 신경 쓸 여력이 없습니다. 그래서 아픈 사람은 자신의 아픔에 온 신경을 쓰기 때문에 온전한 관계를 맺지 못합니다. 구멍이 숭숭 난 사람처럼 사는 사람이 있으면 뭔가 아픈 사람입니다. 깔끔하게 정돈되지 아니한 사람을 만나면 아마도 어딘가 아픈 구석이 있는 사람입니다. ‘길위학교’는 아픈 청소년들과 함께 걸으면서 아픈 구석을 발견하게 도와주고 그 아픔을 치료할 방법에 대해 얘기를 나누게 됩니다. 아픈 사람은 의사가 필요합니다. 동행자는 하느님의 치유를 바라는 온전한 마음으로 함께 걷는 사람입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한 사람으로 하느님이 보내주신 사람일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마음으로 잘 돌봐주는 것이 동행자의 할 일입니다.
아프리카, 남미와 아시아 대주교들이 케냐 나이로비의 주교관에서 만났습니다. 케냐의 잭슨 올레 사핏 대주교 Archbishop of Kenya, Dr Jackson Ole Sapit는 마시이족 출신으로 키가 크고 배려심이 컸고 자녀가 많았습니다. 10명의 원형탁자 하나에 사핏대주교의 자녀들이 앉아 있는 것을 보고 저는 많이 놀랐습니다. 저는 아시아인으로 아프리카 친구들을 보면 동족같은 느낌을 받습니다. 사핏 대주교를 만나서 어느 순간 허물없이 대화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물론 그의 자녀들과도 재미있게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사핏대주교는 잠비아의 루사카에서, 요르단과 켄테배리 대성당과 케냐에서 네 번이나 뵈었고 늘 편하게 대해 주셨습니다. 한국에 오자마자 사핏대주교의 자녀들에게 BTS의 사진들과 노래가 담긴 CD를 구입해서 나이로비로 보냈습니다. 아이들이 좋아할 것이라 여겨서 보낸 것인데 제게 볼 때마다 그 이야기를 하고 저를 더 친근하게 대해 주셨습니다. 성공회 나눔의집에서 청소년들을 만났던 경험이 있어서인지 어디를 가나 청소년들을 만나는 것이 편했습니다. 사핏대주교의 자녀들이 제가 한국에서 왔다고 하니 자기들도 한국에 가고 싶다고 하면서 많은 질문을 제게 퍼부었습니다. 그들은 제게 한국 드라마 무엇을 보았고 한국의 노래들도 좋고 한국음식도 먹고 싶다는 말을 하였습니다.
청소년들이 바라는 바를 듣는 시간이 길을 걸을 때입니다. 가만히 상담실에서 앉아 얘기를 하는 것은 감옥에 가둬놓고 ‘말하라’라는 식으로 청소년이 받아들일 수도 있겠다 싶었기 때문에 걸으면서 얘기를 나누는 방식을 저는 오랫동안 해 왔던 것입니다. 걸으면서 속 얘기를 듣는 것입니다. 먹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듣고 싶은 노래가 무엇인지? 어떤 가수의 춤을 추고 싶은지? 이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길을 걸으면 먼 거리가 짧아 보이기도 합니다. 마음을 열어놓고 만나면 아프리카 사람들도 제 마음에 들어오게 됩니다. 마음을 열어놓으면 어떤 사람이 들어올지 몰라 대개 마음을 닫고 지냅니다. 하지만 마음을 열어놓으면 사람들이 들어와 편해합니다. 동행자는 청소년들이 자신들 안에 들어오게 하여 그들의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어 줍니다.
잠비아의 루사카에서 아프리카 대주교들을 만나서 기도를 하는 가운데 한국교민들이 찾아왔습니다. 저녁을 함께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루사카에 한국교민이 140명이 사는데 대사관이 없어서 불편한 일들이 생긴다는 말을 듣고 마음이 안타까웠습니다. 잠비아대주교를 만나 루사카교구장인 주교를 만나 뵙기를 청하니 금방 루사카교구의 주교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루사카교구의 주교에게 한국교민을 위하여 일해달라고 부탁하였습니다. 대사관이 없는 나라의 교민들은 여러 가지 불편하다는 이야기를 전해드렸습니다. 귀국하여 국무총리에게 이 말을 전했습니다. 이에 총리의 답변은 외교부가 가난하다는 여러 이유로 대사관 설치가 어렵다는 것이었고 그 말을 듣고 무척 실망했던 적이 있습니다. 한국인이 어디에 있든 한국정부는 한국인을 보호하고 지켜줘야만 합니다. 그것이 정부가 할 일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자신을 돌봐주고 지켜주는 대사관과 같은 존재가 있어 보호를 받게 됩니다. 동행자가 ‘길위학교’의 청소년의 대사관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누구나 대사관이 필요합니다. 가장 큰 대사관이 가정이지만 가정이 여의치 않으면 다른 대사관이 필요한 것입니다. 동행자가 그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을 지켜주는 보호자가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천군천사를 보내주셔서 우리를 지켜주십니다. 그리고 성령을 보내주셔서 하느님의 사랑을 부어주십니다. 동행자는 하느님의 사랑을 부어주는 성령에 젖은 사람입니다. 큰 사랑을 지닌 사람과 동행한다는 것은 ‘길위학교’의 큰 자랑입니다. 큰 사랑을 지닌 사람을 만난다는 것 자체가 복입니다. 복으로 걷는 ‘길위학교’입니다. 한 걸음씩 내디딜 때마다 복을 받는 걸음이 됩니다.
영국 요크대관구의 스티븐 쿼트렐 대주교를 2022년 제 15차 람베스 세계주교회의에서 만났습니다. 영국의 젊고 열정적인 주교들이 스티븐 퀘트렐 대주교와 함께 있는 것을 자주 목격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마침 같은 성경공부를 하는 같은 반이었기에 함께 기도하고 서로를 위해 기도하는 만남을 가졌습니다. 일과 후에 요크 대주교부부와 함께 만나 더 깊은 친교를 나누며 선교에 대한 비젼을 공유하였습니다. 솔즈베리교구의 앤드류주교의 열정은 제 열정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였고 심리상담을 하시는 사모님의 큰 품도 놀라워 함께 깊은 친교를 나눴습니다. 저보다 큰 분들을 만나니 제가 겸손해지는 것이 보였습니다. 하느님은 저보다 큰 분들을 만나게 해 주셔서 저를 겸허하게 사는 길로 인도해 주신 것입니다.
앤드류주교는 스티븐 퀘트렐대주교와와 함께 하느님을 향한 인간의 가치를 세우는 높은 영혼의 소유자였습니다. 요크 대주교는 람베스궁 옆에 자신의 작은 집이 있으니 그곳에서 자주 만나자고 하였고 공예를 하시는 레베카 사모와 함께 즐겁고 깊은 친교를 나눴습니다. 스티븐 퀘트렐 대주교는 사람들에게 힘을 주고 열정을 주시는 분이셨고 앤드류주교도 다른 사람에게 열정을 복돋워 주는 주교였습니다. 두분의 사모들도 불편함 없게 주위 사람들을 환대해주시는데 큰 분들이셨습니다.
‘길위학교’의 동행자는 청소년들에게 힘과 열정을 공급하는 사람입니다. ‘길위학교’는 살아갈 힘과 살아갈 이유와 그런 자신에게 애정을 부어주는 동행자가 있습니다. 예수로 인하여 우리가 살 이유를 확인받았듯이 동행자는 청소년들에게 살 이유를 주는 사람입니다. “그래. 맞아. 너야말로 정말 아름답지.”라는 한 마디 때문에 살 이유를 발견하게 하는 동행자는 바로 하느님이 청소년들에게 보내주신 큰 사람입니다. 걷기로 인해 발바닥 전체가 물집이 잡혀 걷는데 너무 쓰라려 그냥 산절벽 아래로 뛰어내리고자 하는 마음이 가득 찼는데 그쪽에 항상 주교께서 서 계셨기에 그 순간을 넘겼던 적이 있었다는 소감을 나눈 청소년의 고백을 듣고 깊이깊이 하느님께 감사의 기도를 올렸습니다. 걷기 그 자체로 한 사람이 새로운 생명으로 살아난 것입니다. ‘길위학교’는 그렇게 한 인간에게 깊고 새로운 지평을 열어가게 하는 곳입니다.
사해의 동편에 높은 느보산이 있습니다. 느보산 어딘가에 모세의 묘지가 있지만 어딘지는 알 수 없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모압 땅에 있는 벳브올 맞은편 골짜기에 묻혔는데 그의 무덤이 어디에 있는지는 오늘까지 아무도 모른다(신명 34:6).” 하지만 한 수도원에서 느보산 정상에다가 그 당시의 묘지를 구성하여 우리에게 모세의 죽음을 생각하게 했습니다. 모세는 비참한 상황에서 태어났고 파라오 궁전에서 40년간 자랐고 40년간 광야에서 훈련받았고 40년간 이집트를 탈출한 여정으로 120세에 눈에 빛이 난 강한 상태로 별세하였습니다. 모세는 여호수아에게 손을 얹어 하느님의 영을 받게 하였고, 하느님과 얼굴을 마주하면서 사귀었습니다. 그리고 모세에게 하느님은 온 땅을 보여 주셨습니다. 하느님은 이 세상이 희망으로 건설되었다는 것을 모세에게 전달하고 싶으셨던 모양입니다. 바로 그 느보산 정상의 수도원 안에서 세계성공회 대주교들이 모여 예배를 보았습니다. 그리고 세례명이 모세인 제가 기도자로 선정되었습니다. 대주교들의 예배에 수도원장과 수도사들이 참가하였는데 한 중앙에 서서 모세의 심정으로 하느님께 간절하게 기도를 바치게 되었습니다. 하느님이 함께 하시지 않았다면 아기 때 죽었을 모세를 궁과 광야에서 지도자 훈련을 통해 높은 지도력으로 이스라엘인들을 희망 안으로 들어오게 한 인생이었습니다. 하느님이 느보산의 비스가 봉우리에서 모세에게 온 땅을 보여 주셨습니다. 희망이 무너진 세상에서 하느님께서 희망을 보게 해 주시고자 세계성공회의 대주교들을 느보산 정상에 모여 기도하게 해 주셨습니다. 부족하지만 하느님이 저희들을 쓰셔서 우리로 하여금 희망이 되게 해 주심에 감사함을 바치는 기도를 올렸습니다. 그리고 하느님 나라를 건설하다가 죽어간 모든 영혼들이 하느님 품 안에서 안식을 누리기를 간절히 바라는 기도를 바쳤습니다. 제 마음속에는 늘 아들 동욱 제레미를 향한 간절함이 묻어 있었기에 눈물의 기도를 바쳤습니다. 기도 후에 수도원을 나오는데 느보산 수도원 원장 아빠스가 제게 말을 건넸습니다. “모세대주교의 기도가 하늘에 닿았을 것입니다. 너무 기도가 은혜로왔습니다. 감사합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사랑을 원합니다. 속에 있는 가장 원하는 사랑을 끄집어 내어주는 ‘길위학교’입니다. 사랑으로 서로를 깊이 이해하게 되는 세계가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시간을 가지게 됩니다. 그래서 “나는 인간이고 그 무엇도 내게 낯설지 않다.”라는 로마시인인 테렌스 Terence의 라틴어의 시어가 자신의 언어가 되게 해 줍니다. ‘길위학교’의 청소년과 동행자는 낯설지 않게 자연과 사람을 보게 합니다. 처음 보더라도 낯설지 않게 볼 수 있고 느끼게 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사랑이기에 세상이 낯설지 않게 다가오는 것입니다. 과거를 이상화하지 않고 악마화하지 않는 것만 해도 자신을 정확하고 정직하게 바라보게 되는 것이 ‘길위학교’의 관대함입니다. 과거와의 단절은 어렵습니다. 그렇기에 과거의 무엇과 연속성을 지니게 하는 것인가가 매우 중요합니다. 과거의 속에 있는 작은 사랑의 씨앗만 발견해도 됩니다. 그 사랑으로 우리가 지금 연결되어 있고 내일도 연결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길위학교’는 바로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연결시켜주는 곳으로 의미가 있습니다.
프랑스 작가 조르주 베르나노스가 1936년에 발표한 작품 “어느 시골신부의 일기”의 책의 마지막 글입니다. “아무려면 어떤가? 모든 것이 은총이니.” 각기 제 모양대로 살지만 우리 모두는 하느님의 은총과 연결되어 살아가게 됩니다. 모든 것이 은총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걷기를 통해 우리를 은총 안으로 들어가게 합니다.
마지막에 청소년들은 자신을 힘들게 한 아버지나 어머니, 형과 누나인 가장 가깝게 지냈던 가족들을 용서하는 시간을 갖게 됩니다. 속에 감춰두었던 사람이 가장 가까운 사람이었습니다.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모르고 있습니다(루가23:34).” 용서로 끝났다 싶은데 다시 그러한 일이 생깁니다. 용서하는 삶이 예수이셨으니 우리는 끝없이 용서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이 세상을 떠날 때 자연스럽게 ‘모든 것이 은총이니’라는 말을 할 것입니다. 학생들이 동행자와 같이 갈 곳이 은총의 길임을 다시금 확인하며 푸른 창공을 바라봅니다.
지리산 둘레길 700리를 걸은 후 몇 달 동안은 예전에 보지 못했던 너그러움으로 사는 자신을 발견하였습니다. 거대한 지리산이 주는 영험한 힘을 받았기 때문에 너그러움으로 사는 것일까? 아니면 청소년들의 속에 담긴 선한 에너지를 받아서일까? 아마도 이 두 가지 모두가 제게 영향을 준 것이라 여깁니다. 하느님이 창조하신 자연에서 힘을 받았고 하느님이 제게 보내주신 생명으로부터 얻은 선한 힘이 제게 너그러움으로 다가온 것임을 발견한 것입니다. 땀을 흘린 보람으로 이렇게 큰 힘을 얻게 된 것입니다. 너그럽게 되니 한층 나은 사랑도 하게 되었습니다. ‘길위학교’는 청소년과 함께 동행자에게도 제대로 사랑하는 법을 배우게 됩니다. 사랑할 줄 모르고 사는 사람과 사랑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사람에게 거리를 두고 사랑하는 방법에서부터 열정적으로 사랑하는 방법에 이르기까지 ‘길위학교’에서 배운다는 것입니다.
무조건적인 사랑을 배우기가 힘든 시대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길위학교는 사랑에는 깊은 생각이 들어있고 온몸에서 나는 땀흘림이 있고 슬픔과 고통에 젖은 눈물이 있고 막힘없는 웃음이 있고 이기적인 부끄러움과 어리석음이 들어있는 것을 보게 합니다. ‘길위학교’는 하느님의 본성인 거룩함과 깊은 사랑을 배우는 곳입니다. 거룩한 사람을 알게 해 주는 깊은 사랑이 있는 길위학교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