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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7월 22일 월요일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 축일
제1독서 : 아가 3,1-4ㄴ
복 음 : 요한 20,1-2.11-18
1 주간 첫날 이른 아침, 아직도 어두울 때에 마리아 막달레나가 무덤에 가서 보니,
무덤을 막았던 돌이 치워져 있었다.
2 그래서 그 여자는 시몬 베드로와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서 말하였다.
“누가 주님을 무덤에서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
11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었다. 그렇게 울면서 무덤 쪽으로 몸을 굽혀
12 들여다보니 하얀 옷을 입은 두 천사가 앉아 있었다.
한 천사는 예수님의 시신이 놓였던 자리 머리맡에, 다른 천사는 발치에 있었다.
13 그들이 마리아에게 “여인아, 왜 우느냐?” 하고 묻자, 마리아가 그들에게 대답하였다.
“누가 저의 주님을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
14 이렇게 말하고 나서 뒤로 돌아선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서 계신 것을 보았다.
그러나 예수님이신 줄은 몰랐다.
15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 “여인아, 왜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 하고 물으셨다.
마리아는 그분을 정원지기로 생각하고,
“선생님, 선생님께서 그분을 옮겨 가셨으면 어디에 모셨는지 저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제가 모셔 가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16 예수님께서 “마리아야!” 하고 부르셨다.
마리아는 돌아서서 히브리 말로 “라뿌니!” 하고 불렀다. 이는 ‘스승님!’이라는 뜻이다.
17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아직 아버지께 올라가지 않았으니 나를 더 이상 붙들지 마라. 내 형제들에게 가서,
‘나는 내 아버지시며 너희의 아버지신 분,
내 하느님이시며 너희의 하느님이신 분께 올라간다.’ 하고 전하여라.”
18 마리아 막달레나는 제자들에게 가서 “제가 주님을 뵈었습니다.” 하면서,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하신 이 말씀을 전하였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얼마 전에 어디를 가다가 건널목에 서서 신호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제 옆에 있는 분이 발을 떼고 앞으로 나아가십니다.
‘신호가 바뀌었구나.’라고 생각하면서 저도 그분을 따라 건너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신호가 보입니다. 파란불이 아닌 빨간불이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그분을 쫓아 건너려고 했던 분이 저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모습을 일상에서 자주 접하게 됩니다.
대화 중이던 친구가 주머니에서 휴대전화를 꺼내면 제 손도 무의식적으로 휴대전화를 잡습니다.
내 옆의 사람이 하품하면 저 역시 입을 벌려 하품하게 됩니다.
이를 가리켜 모방 행동이라고 합니다. 즉, 우리 모두 공동체 안에 어떻게든 연결되어 있습니다.
단순히 행동만 연결되어 있을까요? 아닙니다. 감정까지도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누군가가 자기의 힘든 감정을 이야기하면
이 말을 듣는 사람도 감정의 동화를 느끼면서 힘들어지는 것입니다.
반대로 기쁘고 즐거운 감정도 전달되어서 상대 역시 기쁘고 즐거운 마음을 갖게 됩니다.
따라서 우리 공동체에 어떤 행동과 감정을 전달해야 할까요?
공동체 자체가 기쁨과 행복으로 가득하다면, 그 영향을 받는 나 역시도 기쁘고 행복할 수 있습니다.
결국 자기가 전하는 그 모든 것이 결국 나에게도 고스란히 돌아오게 됩니다.
오늘은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 축일입니다.
성녀께서는 예수님을 사랑하며 끝까지 자리를 지켰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 자리는 죽음의 자리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자기 삶이 끝날 때까지도 주님과 함께하겠다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이런 마음으로 십자가의 죽음 뒤, 무덤에 묻히신 다음에도 이른 아침에 무덤을 찾아가십니다.
그런데 무덤을 막았던 돌이 치워져 있어서, 누가 주님을 꺼내 갔다며 울기 시작합니다.
그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나타나셔서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그토록 예수님을 사랑했던 분이 왜 알아볼 수가 없었던 것일까요?
슬픔의 감정, 모든 것이 끝났다는 감정, 이러한 부정적인 감정을 가지고서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볼 수 없었던 것입니다.
“마리아야!”라는 예수님의 부르심에 곧바로 알아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이 기쁨을 전하라고 명령하셨고,
제자들에게 가서 “제가 주님을 뵈었습니다.”라며 전합니다.
그토록 예수님을 사랑했던 마리아 막달레나도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던 것처럼,
부정적인 감정을 가지고서는 주님을 알아보기 힘듭니다.
우리가 주님을 알아보기를 원한다면,
좋은 마음과 긍정적인 마음으로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주님께서 명령하신 것처럼, 세상에 기쁨을 전달해야 합니다.
우리도 기쁨을 속에서 지금을 살 수 있습니다.
절망의 눈물을 멈춰라.
반영억 라파엘 신부
사랑하는 사람과의 예기치 않은 이별은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차라리 꿈이기를 바랄 때가 있습니다.
세상 모든 것의 의미를 잃어버리고 공허해지기도 합니다.
결국은 어찌할 수 없는 현실 앞에서 눈물을 흘립니다. 그 눈물은 절망의 눈물이기도 합니다.
인간적으로 다시 이룰 수 없는 만남이기 때문입니다.
눈물이 마를 때까지 흘려도 공허한 가슴은 채울 수가 없습니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매춘부였다가 예수님을 만나 회개한 여인으로 묘사되기도 하고,
간음하다 잡힌 여인(요한 7,53), 일곱 마귀에 사로잡혀 고통의 나날을 보내고 있던 여인(루카 8,2),
베타니아에서 예수님께 순 나르드 향유를 부은 여인(요한12,3) 등
복음 속의 다양한 여인을 대변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예수님을 만나면서 생이 완전히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가족으로부터의 버림과 이웃들의 멸시와 조롱에서 해방되어 자유를 얻었습니다.
사랑과 자비의 눈길을 보내시는 예수님을 만나면서 마리아는 본모습을 찾았습니다.
마리아에게 있어서 예수님은 생명의 은인입니다.
그런데 그 은인이 죽임을 당하고 시신마저 사라졌으니, 절망의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장례를 치르고 아직도 어두울 때 무덤으로 달려갔습니다.
차마 동녘이 밝아올 때까지 기다릴 수 없는 예수님을 향한 사랑 때문입니다.
이런 상황 안에서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 묻습니다.
“여인아, 왜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요한20,15)
“누구를 찾느냐?” 라는 질문은 의미 있는 질문입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을 찾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찾고 있었기에 ‘누구를 찾느냐?’는 질문을 하신 것입니다.
지금까지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찾았지만 하나같이 무엇을 얻기 위해서 몰려왔습니다.
안드레아, 베드로도 이스라엘을 독립시켜 줄 정치적 메시아를 찾아서 왔고,
일반 군중들은 먹을거리를 찾아서 왔고 치유 받기 위해서 왔습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무엇을 얻으려 찾아온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예수님을 찾아온 것입니다.
마리아가 무엇을 얻으려고 왔다면 “무엇을 찾느냐?”는 질문을 받았을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질문을 받을 수 있을까요?
예수님께서는 마리아의 눈에서 절망의 눈물을 거두어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밑에서 예수님을 바라보고 있었고, 시신을 매장할 때도 거기 있었고
이제 부활하신 주님을 제일 먼저 만났습니다.
다른 제자들에게 먼저 나타나지 않으시고 마리아에게 나타나시어
당신 부활을 알리라고 하신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아마도 수난의 처음부터 죽음의 끝까지 함께한 충실성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수난의 시기에 주님과의 관계가 단절되었습니다.
두려움에 떨며 주님의 곁을 떠났습니다.
그러나 마리아 막달레나는 끝까지 있어야 할 자리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예수님께서는 “마리아야!” 부르시며 당신을 알려주셨습니다.
마리아도 처음에는 알아보지 못했지만 이제 “라뿌니!”, “스승님!”하고 불렀습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스스로 먼저 당신을 알려주기 전에는 아무도 주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확실하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내 아버지시며 너희의 아버지신 분,
내 하느님이시며 너희의 하느님이신 분께 올라간다.” 하고 전하여라. 이 말씀은 결국
“마리아야, 내가 하느님의 아들이듯이 너희도 하느님의 아들이요, 하느님의 딸이다.
나는 이것을 전하러 세상에 왔고, 너희도 하느님께 올라갈 날이 올 것이다.”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언제까지나 우리와의 끈을 놓지 않으십니다.
우리도 끝까지 놓치지 않기를 희망합니다.
분명 우리는 하느님의 아들이요, 딸입니다. 천상이 우리의 고향입니다.
그러므로 어떠한 처지에서도 절망의 눈물을 흘려서는 안 됩니다.
흔들림 없이 주님을 찾고, 끝까지 믿음을 지켜야 합니다.
“믿는 이들이여, 이 땅 위에 살지만 천국을 그리워합시다”(성 베르나르도).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내 하느님이시며 너희의 하느님이신 분께 올라간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은 ‘마리아 막달레나 축일’입니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첫 번째 뵌 분일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부활을 제자들에게 첫 번째로 전한 사도입니다.
그래서 토마스 아퀴나스는 마리아 막달레나를 가리켜 ‘사도 중의 사도’라고 일컬었습니다.
이는 여성의 활동을 사도적 수준으로 재평가한 것으로,
이러한 관점은 교회 안에서 남성과 여성이 예수의 동등한 제자로서 활동할 수 있게 합니다.
이는 아주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곧 새로운 각도에서 '복음'이 바뀐 것에 해당합니다.
곧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가 왔다'는 것을 ‘복음’으로 선포했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이 '복음'을 선포하기 위해 파견 받았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새로운 복음’이 선포된 것입니다.
곧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복음'을 선포한 것입니다.
이제 사도들 시대의 '복음'은
‘십자가에 처형되신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주 그리스도이시다.’가 되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이렇게 사도들에게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나는 내 아버지이시며 너희의 아버지이신 분,
내 하느님이며 너희의 하느님이신 분께 올라간다.”(요한 20,17)
이는 당신께서 가시는 곳이 어디인지를 명확하게 밝혀 주신 것입니다.
곧 당신이 가시는 곳은 ‘아버지’이십니다.
그리고 그분이 당신의 아버지이시면서 동시에
바로 제자들의 아버지라는 사실도 분명하게 밝히십니다.
바로 이것이 예수님의 부활이 증언하는 진리요, 부활이 가져온 선물입니다.
곧 우리가 성자의 반열에 들게 되었고, 우리가 아빠 아버지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물으셨습니다.
“여인아, 왜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요한 20,15)
그러나 마리아 막달레나는 자신과 함께 계시는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도
그분이 예수님인 줄은 몰랐습니다.(요한 20,14)
그렇습니다.
오늘도 주님께서는 ‘낯선 이’의 모습으로 오십니다.
사실 우리가 지척에서 말씀을 건네시는 주님의 목소리를 알아듣지 못함은
우리 마음의 귀와 눈이 닫혀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눈과 귀를 열어주시는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곧 “마리아야!”(요한 20,16) 하고 부르시는 주님의 음성이
자신의 생각과 편견에 빠져있던 마리아를 빠져나오게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나를 더 이상 붙들지 마라.”(요한 20,17)
이 ‘말씀은 더 이상은 육신의 손으로 붙들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그러니 손으로가 아닌 믿음으로 만지라는 말씀입니다.
그것은 내가 ‘알고 있는 예수님’이 아니라,
‘모르는 낮선 분’으로 살아계신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예수님을 붙들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우리를 붙들고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나를 더 이상 붙들지 마라.”(요한 20,17)
주님!
이제는 당신을 놓게 하소서!
제가 붙들면 속박이 되지만 당신이 붙드시면 자유이오니,
제가 붙드는 것이 아니라 당신께 붙들리게 하소서!
붙들고 있는 것은 제 마음일 뿐,
당신은 붙들 수도 붙들려지지도 않으시는 분이오니,
제가 만들어 놓은, 제가 원하는 당신이 아니라,
주님이신 당신께 붙들리게 하소서!
당신 사랑은 늘 멈춤이 없사오니,
사랑하는 일에 붙들리어 늘 사랑하는 일에 멈춤이 없게 하소서! 아멘.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헨리 워즈워드 롱펠로우의 ‘인생예찬’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슬픈 사연으로 내게 말하지 말아라.
인생은 한갓 헛된 꿈에 불과하다고!
잠자는 영혼은 죽은 것이어니
만물의 외양의 모습 그대로가 아니다.
인생은 진실이다! 인생은 진지하다!
무덤이 그 종말이 될 수는 없다.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라.’
이 말은 영혼에 대해 한 말은 아니다.
우리가 가야 할 곳, 또한 가는 길은
향락도 아니요 슬픔도 아니다.
저마다 내일이 오늘보다 낫도록
행동하는 그것이 목적이요 길이다.
예술은 길고 세월은 빨리 간다.
우리의 심정은 튼튼하고 용감하나
싸맨 북소리처럼 둔탁하게
무덤 향한 장송곡으로 치고 있으니.
이 세상 넓고 넓은 싸움터에서
인생의 노영 안에서
발 없이 쫓기는 짐승처럼 되지 말고
싸움에 이기는 영웅이 되라.
아무리 즐거워도 ‘미래’를 믿지 말라!
죽은 ‘과거’는 죽은 채 매장하라!
활동하라, 살아있는 ‘현재’에 활동하라!
안에는 마음이, 위에는 하느님이 있다!
위인들의 생애는 우리를 깨우치느니,
우리도 장엄한 삶을 이룰 수 있고,
우리가 떠나간 시간의 모래 위에
발자취를 남길 수가 있느니라.
그 발자취는 뒷날에 다른 사람이,
장엄한 인생의 바다를 건너가다가
파선되어 버려진 형제가 보고
다시금 용기를 얻게 될지니.
우리 모두 일어나 일하지 않으려나.
어떤 운명인들 이겨낼 용기를 지니고,
끊임없이 성취하고 계속 추구하면서
일하며 기다림을 배우지 않으려나.”
가슴을 뜨겁게 하는 멋진 글입니다.
롱펠로우의 삶은 그가 예찬한 것처럼 멋지고, 아름답지만은 않았습니다.
그에게는 두 명의 아내가 있었습니다.
첫 번째 부인은 오랜 투병생활을 하다가 외롭게 숨졌습니다.
두 번째 부인은 부엌에서 화재가 발생해 비참한 최후를 마쳤습니다.
이런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롱펠로우의 시는 여전히 아름다웠습니다.
임종을 앞둔 롱펠로우에게 한 기자가 물었습니다.
‘숱한 역경과 고난을 겪으면서도 당신의 작품에는 진한 인생의 향기가 담겨 있습니다.
그 비결은 무엇입니까?’
롱펠로우는 마당의 사과나무를 가리키며 말했습니다.
‘저 나무가 나의 스승이었습니다. 저 나무는 매우 늙었습니다.
그러나 해마다 단맛을 내는 사과가 주렁주렁 열립니다.
그것은 늙은 나뭇가지에서 새순이 돋기 때문입니다.’
롱펠로우에게 힘을 준 것은 바로 부정이 아닌 긍정의 마인드였습니다.
인생은 환경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두 가지로 나누어집니다.
나이가 들어가는 자신을 고목(古木)으로 생각하는 사람과
고목의 새순으로 생각하는 사람의 인생은 완전히 달라집니다.
긍정적이고 희망적인 생각이 바로 인생의 새순입니다.
사람은 자신의 생각에 따라 새로운 감정이 생깁니다.
우울한 생각을 하면 우울한 감정이 생깁니다.
감사의 생각을 품으면 감사할 일들이 계속 생깁니다.
오늘은 마리아 막달레나의 축일입니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모두가 포기했을 때,
모두가 두려워 숨어 있을 때에도 예수님을 찾았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그런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새로운 사명을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에게 가서 ‘주님을 뵈었습니다.’라고 말하여라.
나는 갈릴래아로 갈 것이다. 그러니 제자들에게 갈릴래아로 오라고 전하여라.”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주신 사명을 충실하게 전하였습니다.
오늘 감사송은 이렇게 기도합니다.
“살아계신 주님을 사랑하였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시는 주님을 뵈었으며
무덤에 묻히신 주님을 찾던 마리아 막달레나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처음으로 경배하였나이다.
주님께서는 동산에서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나타나시어
사도들 앞에서 사도 직무의 영예를 주시고
새로운 삶의 기쁜 소식을 세상 끝까지 전하게 하셨나이다.
그러므로 주님, 모든 천사와 성인과 함께 저희도 주님을 찬양하며 환호하나이다.”
교회는 마리아 막달레나를 ‘사도들을 위한 사도’로 공경하고 있습니다.
오늘 독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옛것은 지나갔습니다. 보십시오, 새것이 되었습니다.”
옛것의 기준은 시간의 순서가 아닙니다.
옛것의 기준은 나이가 아닙니다.
옛것의 기준은 부정과 불평 그리고 불만입니다.
새것의 기준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고난의 순간에도, 역경의 순간에도 감사할 수 있습니다.
2000년 전에 있었던 마리아 막달레나는 새로운 피조물이고, 새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 모두 새로운 피조물, 새것이 되면 좋겠습니다.
왜 울고 있느냐? 누구를 찾고 있느냐?
조욱현 토마 신부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는 루카 복음에 “일곱 마귀가 들렸던 여자”(루카 8,2),
요한복음에는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계실 때에 그 밑에 있던 부인 중의 하나로(참조: 요한 19,25),
마르코 복음에는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에 제일 먼저 막달라 여자 마리아에게 나타나셨고,
예수님의 부활을 제자들에게 제일 먼저 알렸던 분으로 묘사하고 있다(참조: 마르 16,9-11).
전승에 의하면, 교회는 마리아 막달레나를 “용서받은 죄 많은 여자”로 보고,
통회와 관상의 이상적인 모델로 공경해 왔다.
성령강림 후 마리아 막달레나는 성모 마리아와 성 요한과 함께 에페소로 가서
선교하다가 그곳에서 선종하였다고 한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복음을 통해서 진정한 부활의 증인으로 나타난다.
막달라 마리아는 새벽녘 아직 어두울 때 무덤으로 가서 돌이 치워져 있는 것을 보고
본능적으로 누군가 밤중에 주님의 시신을 훔쳐 갔다고 생각하고 베드로와 요한에게 전한다(1-2절).
그런데 예수님이 나타나셨을 때, 울고 있던 마리아는 왜 예수님을 보면서도 알아보지 못했을까?
막달레나는 완전히 자기 자신의 사고에 사로잡혀 있었기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동산지기로밖에 보지 못하였다.
빈 무덤에서 눈을 돌리지 못하기에, 자기 고집에서 벗어나지 못하였기에,
자신의 판단이 옳은 줄로만 알았기에 결과적으로는 예수님에게서 등을 돌리게 된 것이다.
우리도 흔히 그와 같은 태도를 보이면서 살아가기 일쑤라 하겠다.
그럴 때 우리도 차디찬 무덤, 땅에만 쏠리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그곳에서 눈을 돌려 승리를 거두시고, 서 계시는 주님을 알아볼 수 있어야 한다.
이때 예수님께서는 “마리아!”하고 부르신다.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그 한마디로 “선생님!”하고 기뻐한다.
부활의 체험이란 것은 이제 막달레나가 체험하는 것 같이,
부활하신 주님을 뵈옵는 것뿐 아니라, 그 체험을 전하는 것이다.
그녀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전하는 명을 받고 달려가서 그 소식을 전한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이다. 먼저 신앙인으로서 부활을 매일 체험하여야 하며,
그 부활 체험을 기쁘게 선포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이것은 흔히 새로이 주님 안에 태어나는 삶의 모습에서 나올 수 있는 것이며,
우리는 이때 진정으로 감사하며 살 수 있고 그것을 이웃에게 전할 수 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막달라 여자 마리아가 주님을 애타게 찾았으나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여 예수께서 먼저 다가가시고 마리아를 불러주시듯이,
언제나 우리에게 먼저 다가오시고, 나를 먼저 부르신다.
그러나 우리가 나 자신의 고정관념이나 나의 편견에 사로잡혀 있을 때는
내 옆에 계신 주님도 엉뚱한 동산지기로 만들 수 있음을 명심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깨어있는 자세로 그분을 뵙고
“나의 주님!”으로 맞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우리의 삶이 언제나 마리아 막달레나 성녀처럼 부활을 체험하고
그 체험을 용감히 전할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
그리스도의 사랑에 다그침 받는 우리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막달레나 성녀는 어떤 분인가?
어떤 분이라고 함이 가장 합당할까?
이번엔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주님을 가장 사랑한 여인인가?
맞는 말입니다.
성녀는 주님을 가장한 사랑한 여인인데
여인 가운데 주님을 가장 사랑한 여인일 뿐 아니라
사도들과 비교해도 주님을 가장 사랑한 여인이었고,
주님을 가장 사랑했다고 하는 요한 사도보다도 더.
주님께서 돌아가셨을 때 다른 사도들은 다 도망쳤어도
실제로 요한 사도만은 주님의 십자가 밑에 있었는데
그런 그도 주님이 돌아가시고 난 뒤엔 사랑이 끝난 듯 주님을 찾지 않았고,
오늘 복음에서는 빈 무덤을 보고서도 찾아 나서지 않은 그가 아니었습니까?
그러니 연인을 찾아 헤매는 아가를 독서로 한 것이 시사하듯
성녀가 주님을 찾아 헤맨 가장 사랑한 여인인 것 맞습니다만
사랑한 여인 이상의 분이라고 함이 마땅할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도 성녀의 축일을 축일로 지내게 하였고,
감사송을 특별히 지어 바치며 성녀를 ‘사도들을 위한 사도’라고 명명합니다.
사랑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성녀는 사랑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주님께 대한 사랑을 행동으로 보여줍니다.
성녀도 처음에는 주님 만난 기쁨에만 머물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당신을 붙잡으려는 성녀에게 주님 말씀하십니다.
“나를 더 이상 붙들지 마라!
내 형제들에게 가서 전하라!”
그래서일까 아가서의 대체 독서인 코린토서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다그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에 우리도 다그침을 받습니까?
그래서 사랑을 넘어 사명을 실천하는 오늘 우리입니까?
.
.
늦잠을 자서 많은 묵상을 하지 못했습니다.
양해 바랍니다.
그리고 오늘부터 포르치운쿨라 행진에 들어갑니다.
혹 강론 올리지 못하는 날이 있을지 모릅니다.
저와 행진단을 위해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오늘 나는 존재 자체로 누군가에게 생명과 기쁨을 주고 있습니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누군가를 깊이, 그리고 극진히, 진심으로 사랑하게 되면 생기게 되는 현상이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너와 나 사이의 경계와 장벽이 허물어지는 것입니다.
언제 어디서든 연결되며, 일상의 모든 것을 공유하게 됩니다.
결국 그의 고통이 내 고통이 되고 그의 슬픔이 내 눈물이 됩니다.
그의 기쁨이 내 기쁨이요, 그의 행복이 곧 내 행복이 됩니다.
일곱 마귀의 횡포로 인해 죽음 일보 직전까지 걸어갔던 마리아 막달레나는
예수님과의 만남으로 인해 그런 진한 사랑 체험을 하게 됩니다.
내 인생이 이쯤에서 끝이라고 생각했었는데,
내 삶에서 그런 사랑, 그런 축복이라곤 꿈도 꾸지 못했는데,
그분의 등장으로 인해 뜻밖의 기적이 찾아온 것입니다.
한때 일곱 마귀로부터 괴롭힘을 당했던 마리아 막달레나였습니다.
일곱이라는 숫자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더 이상 고통스러울 수 없는 큰 고통과 병고의 표현이 일곱입니다.
완전히 무너져 내려 더 이상 부서질 것 없는 폐허가 곧 일곱입니다.
그런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예수님께서 다가가십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은 마치 징그러운 벌레 바라보듯 자신을 바라봤었는데,
더 이상 부드러울 수 없는 세상 자상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셨습니다.
따뜻한 손을 내미시며 나를 죽음의 구렁에서 빼내 주셨습니다.
그분으로 인해 마리아 막달레나는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오게 되었습니다.
그분을 만나기 전에는 삭막하고 혹독한 겨울 같은 인생이었는데,
그분으로 인해 하루하루가 화사한 봄날로 급변했습니다.
너무나 고맙고 감사했던 마리아 막달레나였습니다.
이제 그녀에게는 오직 예수님 밖에 없었습니다.
그녀에게 예수님은 삶의 유일한 의미요 기쁨의 원천이 되었습니다.
이런 연유로 그녀는 열두 제자들처럼 모든 것을 뒤로 하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녀는 열두 사도 못지않은 여사도로 거듭난 것입니다.
오늘 나는 과연 존재 자체로 누군가에게 새 삶의 동기를 부여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누군가가 너무나 힘겨운 고통에, 바닥에, 퍼질러 앉아 울고 있다가도
내 얼굴을 떠올리며 다시금 힘을 얻고 일어서고 있는지 돌아보게 됩니다.
혼자 기도할 때 언제쯤 끝마치는 게 좋을까?
전삼용 요셉 신부
오늘은 마리아 막달레나 축일입니다.
막달레나는 일곱 마귀가 들었지만, 예수님에 의해 깨끗해진 여인입니다.
그다음에 얼마나 발전했던지 예수님은 그녀에게 당신 부활의 모습을 처음 드러내십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 보면 예수님께서 당신을 바로 드러내시지는 않고
순차적으로 드러내심을 볼 수 있습니다.
마리아는 처음 무덤에서 천사들을 목격하고
그다음에는 무덤 밖에서 동산지기로 보이는 예수님을 만나며
마지막으로 예수님은 마리아의 이름을 불러 그녀를 기쁘게 하십니다.
이 과정은 우리가 기도할 때 거치게 되는 과정과 일치합니다.
그리고 기도를 어떤 과정을 거치며 나아가야 하는지 길을 제시합니다.
기도는 누가 할까요? 기도할 필요성을 느끼는 이가 합니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기도할 필요성을 느끼는 유일한 사람이었습니다.
다른 사람들도 기도할 수 있었겠으나 그리스도의 무덤 곁에 머물지는 않았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이 아니면 세상에서 살 자신이 없었습니다. 세상도 어차피 무덤이기 때문입니다.
그녀에겐 힘이 필요했고 그 힘을 줄 분이 아직은 부활을 믿지 못하여도
여전히 자신에게 자유를 선사한 그리스도입니다.
기도의 시작은 이렇게 필요에 의한 ‘머무름’입니다.
머무르다 보면 무언가 신비로운 깨달음을 얻게 됩니다.
천사들은 “여인아, 왜 우느냐?”라고 묻습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면 울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누가 저의 주님을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라고 대답하며
여전히 부활을 믿지 못합니다. 그러니 묵상기도를 통해 천사를 만나는 것만으로는 완전하지 못합니다.
물론 묵상의 과정은 신기하고 기쁘고 삶을 변화시킵니다. 그러나 이것이 끝이 아닙니다.
여기에서 멈춘다면 기도를 하다 만 것과 같습니다.
그래도 더 머무르면 예수님을 만납니다. 그러나 그분이 동산지기처럼 여겨집니다.
마리아는 두려움을 무릅씁니다. 예수님만 만날 수 있다면 더는 필요한 게 없습니다.
예수님은 “여인아, 왜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라고 물으십니다.
마리아는 “선생님, 선생님께서 그분을 옮겨 가셨으면 어디에 모셨는지 저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제가 모셔 가겠습니다.”라고 말합니다.
동산지기가 정말 예수님을 훔쳐 갔다면 마리아는 매를 맞거나 죽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죽음을 무릅씁니다.
그런 그녀에게 예수님은 “마리아야!”라고 부르십니다.
예수님께서 마리아를 아시니 그제야 마리아도 예수님을 알게 됩니다.
마리아는 스승님을 “라뿌니!”라고 부릅니다.
스승을 만났음은 이제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 알려줄 분을 만났음을 의미합니다.
마리아는 너무 기뻐서 예수님과 머물고 싶습니다.
타볼산에서 베드로도, 변모하신 예수님과 모세,
그리고 엘리야와 그곳에서 천막을 짓고 살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그만큼 기도가 깊어지면 더 큰 기쁨을 맛보게 됩니다.
이 기쁨 속에 잠겨있다가는 평생 세상으로 내려올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마리아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아직 아버지께 올라가지 않았으니 나를 더 이상 붙들지 마라. 내 형제들에게 가서,
‘나는 내 아버지시며 너희의 아버지신 분, 내 하느님이시며 너희의 하느님이신 분께 올라간다.’
하고 전하여라.”
‘사명’을 부여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도의 마지막입니다. 예수님을 떠나 세상으로 내려옵니다.
그리고 기도에서 받은 사명만이 그리스도를 만났다는 향기를 풍깁니다.
기도는 ‘머무름 – 들음(깨달음) - 기쁨과 평화(만남) - 파견(사명)’의 과정을 거칩니다.
군인이 군대에 들어와 훈련하다 보면 이전의 자기가 무엇을 했고
무슨 의도로 들어왔건 결국엔 나라에 대한 충성심과 전우애만 남게 됩니다.
영화 ‘지 아이 제인’이 그러합니다.
여자도 네이비실의 훈련을 견뎌낼 수 있음을 보여주려고 남자들과 함께 훈련받던 그녀는
이제 그 의도에 상관없이 다른 사람과 같은 한 명의 네이비실이 되어 나라와 동료를 위해 싸우게 됩니다.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도를 잘했다면 마지막엔 나의 처지에서 어떻게 이웃을 사랑할 것인가에 대한 사명만 남습니다.
이 사명이 명확히 느껴지면 그때 기도를 멈추면 됩니다.
<요한과 함께하는 묵상>
예수의 주검을 마음속에 묻은 성녀
박상대 마르코 신부
오늘은 신약성서의 인물이자 예수님 당대에 살았던 마리아 막달레나,
또는 막달라 여자 마리아의 축일이다.
마리아 막달레나!
막달레나는 그녀의 고향을 딴 이름이다.
성녀는 갈릴레아 서 쪽에 위치한 막달라 지방 출신으로서
성녀의 이름은 단지 복음서에만 12번 언급된다.
그것은 마태오 복음에 3번(마태 27,56; 27,61; 28,1),
마르코 복음에 4번(마르 15,40; 15,47; 16,1; 16,9),
루카 복음에 2번(루카 8,2; 24,10), 그리고 요한 복음에 3번(요한 19,25; 20,1; 20,18)이다.
복음서에서 성녀를 언급하는 곳은 거의 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 및 부활과 관련되어 있다.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와 어떠한 관계에 서 있는지에 대하여 정확히 기록하고 있는 곳은
루카복음에서 ‘예수를 도와드린 여자들’의 명단을 기록한 대목이다.(8.2)
여기서 마리아는 일곱 마귀가 들려 시달리다가 예수님으로부터 치유된 여인으로 지목되며,
이 사실은 마르코 복음에도 증언된다.
“일요일 이른 아침 부활하신 예수께서 막달라 여자 마리아에게 처음 나타나셨는데,
그녀는 일찍이 예수께서 일곱 마귀를 쫓아내어 주셨던 여자이다.”(마르 16,9)
이 점을 미루어볼 때 마리아 막달라 성녀는 예수님으로부터 구마 치유를 받고
줄곧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다른 여인들과 함께 선교 활동에 협조하였으며,
예수님의 마지막 십자가 죽음과 부활의 증인이라 결론지을 수 있다.
종합해보면, 막달라 지방 출신의 마리아는 일곱 마귀에 들려 고생하다
예수로부터 치유되어 그분의 제자가 되었다.(루카 8,2)
그렇다면 예수의 제자단은 12제자 뿐 아니라 여인들까지 포함한 큰 규모였음을 알 수 있다.
마리아는 여성제자단에서 중요한 인물이었고,
다른 여인들과 함께 재산을 털어 예수와 그 일행의 시중을 들었고, 그들의 衣食을 돌보았다.(루카 8,3)
마리아는 예수를 따라 모든 제자들과 예루살렘까지 간다.
그러나 예수의 예루살렘 마지막 날에는 많은 제자들이 스승을 버리고 도망가 버렸지만,
마리아 막달레나는 다른 두 여인과 함께 예루살렘뿐 아니라
스승의 십자가 죽음 끝까지 따라갔다.(마태 27,55-56)
마리아는 아리마태아 사람 요셉이 예수를 장례 치르는 동안
줄곧 스승을 잃은 슬픔에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마태 27,61; 요한 20,11)
그녀는 경황이 없어 스승의 시신에 다 하지 못한 예를 갖추기 위해
안식일 다음 날 동이 트기도 전에 다른 여인들과 함께
스승의 시신에 향유를 바르기 위해 무덤을 찾아갔다.
그 일로 그녀는 빈무덤의 첫 증인이 되었고,
예수 보활에 관한 천시의 기쁜 소식을 맨 처음 들은 자가 되었고,
이 소식을 모두에게 전해야 할 사명을 받게 되었다.(마르 16,6-7)
요한 복음은 부활절 이른 새벽에 마리아 막달레나가 혼자 예수님의 무덤에 있었으며,
그녀 혼자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본 것으로 전한다.(요한 20,15-17)
마리아는 예수님의 살아생전뿐 아니라
부활하신 예수님의 현존에도 각별한 친분으로 함께 한 증인이었다.
마리아 막달레나에 관한 더 이상의 기록은 찾아볼 수 없다.
그런데 복음서를 보면 헷갈리는 부분이 있다.
그것은 복음서 여기저기에 등장하는 다른 ‘마리아’로서
그녀가 마리아 막달레나와 동일한 인물인 듯한 인상을 주기 때문이다.
우선 요한복음에 의한 마르타와 라자로의 누이로서의 마리아인데,
이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붓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닦아드린 적이 있다는 것이다.(요한 11,1-2)
요한복음 사가는 실제로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바로 전,
마지막 과월절을 엿새 앞두고 라자로를 다시 살렸던 베다니아에서의 환영만찬에서
마르타가 시중을 들고 있던 중에 마리아가 나타나 매우 값진 순 나르드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닦아드렸다는 사실을 증언하고 있다.(요한 12,1-8)
이 대목은 마태오(26,6-13)와 마르코(14,3-9) 복음에도 실려 있는데,
시기적으로 예수님의 최후만찬 직전에 있었던 사건으로 매우 신빙성이 있다.
가리옷사람 유다는 비싼 향유를 아까워했으나,
예수께서는 이 사건을 자신의 죽음을 예고하는 것으로 풀이하셨다.
문제는 루카 복음이다. 루카 복음에는 이 대목이 생략되었다.
그러나 루카 복음에도 예수님의 갈릴래아 활동기 중에
이름 없이 죄인으로 묘사된 한 여인이 예수께 와서 그 발치에서 눈물을 흘리고는
자기 머리카락으로 닦고 나서 향유를 발랐다는 기록이 있다.(루카 7,36-50)
여기서 이 여인은 예수께 행한 사라의 행위를 통하여 자신의 죄를 용서받는다.
이 여인이 베다니아에 살고 있던 마르타의 누이 마리아(루카 10,38-39)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런데 후대의 사람들은 같은 마리아 막달레나로 본다는 것이다.
확실한 사실은 마리아 막달레나가 빈무덤과 예수부활의 첫 증인이며,
일찍이 일곱 마귀가 들렸던 여자라는 것이다.(마르 16,9; 마태 28,1; 루카 24,10. 8,2; 요한 20,1)
오리게네스(185-254?)는 마리아 막달레나와 마르타의 누이 마리아와
이름 없이 묘사된 죄 많은 여인을 구분하였으나,
373년 시리아 출신 에프라임의 복음주석서에는 모두 동일한 인물로 주장되었고,
교황 대 그레고리오(540-604)는 이를 재차 확증하였다.
이후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에 관한 많은 이야기들이 만들어졌다.
동방정교회의 증어네 의하면 마리아 막달레나는 성모 마리아가 살았던 에페소 살다가 죽었으며,
그녀의 유해는 899년 콘스탄티노플로 옮겨졌다고 한다.
독일에서는 13세기부터 뉘우치는 여인들을 위한 막달레나 수녀회가 창설되었고,
덴마크와의 전쟁에서 막달레나의 전구로 승리하였다는 것을 기념하여
‘뤼벡’이라는 도시가 건설되기도 했다.
14세기부터는 ‘멀리 서서 지켜보고 있던 여자들’(루카 23,49) 가운데서 마리아 막달레나를
예수님의 십자가 바로 아래로 끌어와 그린 성화들이 등장하였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뉘우치고 용서받고 구원받은 죄인으로
중세기 시인들과 화가들의 모티브가 되기도 했다.
1844년 프리드리히 헤벨스의 ≪마리아 막달레나≫나,
1983년 루이제 린저의 ≪미리암≫은 이런 모티브를 사용한 대표적인 작품이다.
오늘 교회가 기억하는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가 과거 행실이 나쁜 죄인이었다는 주장은
그 정확성의 여부를 접어두고라도 교회적으로 볼 때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다.
그러나 죙니이 아닌 사람이 세상 어디에 있겠는가?
중요한 것은 마리아가 예수께 믿음과 사랑을 가졌었고,
이 믿음과 사랑으로 말미암아 죄를 용서받았다는 것이다.
누구든지 마리아처럼 눈물로 예수님의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닦으며,
발에 입을 맞추고 향유를 발라드리는 극진한 사랑을 보인다면,
그 또한 그만큼 많은 죄를 용서받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렇게 예수님으로부터 죄를 용서받고
그분의 사랑을 받은 자는 예수님과 마지막까지를 함께 한다.
제자들은 예수를 버리고 모두 달아났지만(마르 14,40),
그는 십자가 곁을 떠나지 않고 예수님의 죽음을 아파하며,
그분의 주검을 마음속에 묻었다.(마르 15,40-41)
예수님의 屍身을 마음에 묻고 사는 사람은 더 이상 송장을 묻어두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살아계신 예수님을 품고 사는 사람이다.
죽음으로부터 예수님은 부활하셨기 때문이다.
살아계신 예수님을 마음에 품고 사는 사람은 매일 아침 부활한 예수님을 만나 뵈올 것이며,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처럼 부활의 기쁜 소식을 세상에 전하는 증인이 될 것이다.(요한 20,18)
[출처] ‘벨라수녀 영화방’ : 오늘의 말씀 묵상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