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그 때
아모 이기지 못한 슬픔도 시름도 없이
다만 게을리 먼 앞대로 떠나 나왔다.
그리하여 따사한 햇귀에서 하이얀 옷을 입고
매끄러운 밥을 먹고 단샘을 마시고 낮잠을 잤다.
밤에는 먼 개소리에 놀라나고
아츰에는 지나가는 사람 마다에게 절을 하면서도
나는 나의 부끄러움을 알지 못했다.
(백석, <북방에서>)
1.
2차대전 종전 후 전범재판소에서 아이히만의 재판을 참관한 한나 아렌트는 안경 안에 빛나는 그의 천진난만하고
너무나도 맑은 표정을 보며, 어떻게 저런 사람이 수많은 유대인들을 죽음의 가스실로 몰아 넣었는지 의아해했다. 그리고 그녀는 악의 평범성에 대해 소스라치게
놀라게 된다. 유대인들을 가스실로
보내 처형한 후 퇴근한 그는 자신의 자녀에게 피아노를 가르치고 조언을 하는 자상한 아버지였기 때문이다.
세상의 악은 가장 부드럽고 친근한 얼굴로 다가온다. 우리가 악을 인지했을 때는 이미 우리 자신을 거의 파괴했을 즈음이다. 진짜 공포는 소리 없이 다가와 이미 도망칠 수도 없는 상태에서 맞이하게 된다. “가만 있으라”는 말을 믿다가
뒤집혀진 배에서 손톱이 다 빠지도록 선실벽을 긁다가 숨진 우리 아이들처럼 이미 저항할 수 없는 상태가 되고 마는 것이다. 질병이나 자연재해가 아닌 소위 인재에 기인한 공포는 가장 끔찍하다.
세월호 선원들도 누군가에게는 좋은 아버지였을 것이고, 어쩌면
유병언도 자식들을 훌륭하게(?) 키운 아버지였으며 신의 말씀을 전하는 사도였을지도 모른다. 세월호에 얽혀 뇌물을 받거나 부조리를 눈감아준 누군가도 좋은 사람이라는 말을 들으며 매일을 성실하게 살면서
자신의 일에 긍지를 가졌을지도 모른다. 자신의 잘못을 인지하지 못하고 평범한 삶을 사는 우리들은 이런
인지 부조화를 어떻게 설명해 낼 것인가.
2.
우리는 매일 죽음을 목격하며 산다. 그리고 그러한 죽음들은
오락 게임처럼 그저 평범하다. 이스라엘의
백린탄(포병출신 이라면 이것의 위력을 알 것이다) 공격을
받는 가자지구의 팔레스타인들의 죽음을 우리는 포트리스게임을 보듯이 TV를 통해 보고 있다. 아프리카 서안의 에볼라도 그저 남의 일이다. 우크라이나도, 시리아도, IS의 참수현장도 아침에 밥을 먹으면서 일상인 듯이 태연히
지켜보고 있다.
세월호 사건 당일 오후 공중파를 비롯한 모든 매체들은 반쯤 뒤집힌 현장을 하루 24시간 중계를 했다. 한쪽만 삐죽 나온 그 배 안에서 아이들이 죽음과 싸우고 있는 현장과 이미
사망했을 거라 추정되는 시간 이후에도 계속 중계를 하였다. 물론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로 말이다. 밥 먹다가 울고, 씻다가도
울었다. 이러한 연민은 나의 무능력과
무고함(“내가 저지른 일이 아니야”)을 증명하는 알리바이가
되어선 안 된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을 극복하고 잔혹한 이미지에 대한 우리의 무감각을 떨쳐내기란 쉽지 않다. 타인의 고통을 그냥 하룻밤의 그저 그런 오락거리로 여기게 된다면 우리의 삶은 얼마나 피폐해질 것인가. 누군가의 고통이 곧 내 것이 될 수도 있다는 확장성을 갖는 것, 그것을
되살려야 한다. 또한 미디어가
가지는 폭력성(수전 손택은 이것을 스팩터클이라 부른다)을
제어하고 본질을 꿰뚫는 통찰도 필요하지 않을까.
3.
어제 아침에 버스에 내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공교롭게도 Bob
Marly의 No woman no cry를 들었다, 핸드폰에
저장된 곡들 중 하나. 세월호
사건 이후 이 곡을 들을 때마다 눈물이 난다. 쪽팔림을 무릅쓰고 잰 걸음으로 집으로 돌아와 TV를 켜니 대리기사 폭행 사고 기사가 나오고 있다. 여기저기 채널을
확인하고 인터넷에 접속해 보니 역시나 카페는 들끓고 있고 필자 역시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내친김에 모의원의 블로그를 찾아가 보니 대문에 소방대원 폭행사고 실태를 블로깅한 것이 떡하니 버티고 있다. 아마도 그 의원은 자신이 엄청 자랑스러웠겠지. “내가 이런 것을 했어요.” 착한 일 하고 칭찬 받길 기다리는 아이와
같은 느낌이다. 이미 달린 댓글들을
보고 한 마디 하려다 10여분 정도 모니터만 쳐다 보았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엄두가 나지 않아서다. 그냥 딱 4자만 적고 나왔다.
강자가 약자를 괴롭히고, 약자는 더 약자를 괴롭히는 순환의
연속인가. 어느 날 온 국민과 거물급 정치인이 관심을 가져주고, 심지어
교황까지 직접 맞이하니 간이 부어버린 완장질인가.
아님 우리가 매일 업무상 만나는 그냥 그렇고 그런 평범한 필부들의 갑질인가. 누군가는 한 달이 넘게 목숨을 걸고 단식을 했는데, 누군가는 국회의원 나리의 위로를 받는답시고 음식과 술을 먹고 사람을 패는 이 아이러니를 어떻게 해석할까.
4. Epilogue
이후는 현재와 같다. 서로 편을 나누거나 심지어는 같은 편(?)끼리 싸우고 있다. 유가족은 유가족대로, 대리기사는 대리기사끼리 서로를 향한 이 끔찍한 증오는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구경하던 미디어는 신난 듯이 각종 기사를 쏟아내고, 뒷짐지고 이 장면을 보며 미소짓는 자는
누구일까. 루쉰의 말처럼 길이
원래 있었던 것이 아니듯 희망도 원래 있던 것이 아니다. 사람들이 많이 다니면 자연스럽게 길이 되듯이 우리가 원하면 그것이 희망이
된다.
온 국민을 놀라게 했던
세월호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제 무엇이 본질인지도 모를 곳까지 흘러갔다. 때때로 진실은 우리를 외면하거나
더 큰 악에 의해 가려지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언제나 진실은 하나다. “진실이 지하에 묻히면 자라난다. 그리고 무서운 폭발력을 축적한다. 이것이 폭발하는 날에는 세상 모든 것을 휩쓸어 버릴 것이다. –에밀 졸라” 세월호 너머 어딘가에 진실이 있으리라 믿는다.
지그문트 바우먼은 그의 저서 ‘유동하는 공포’에서 그것을 똑바로 보자고 말한다. 공포를 정면에서 노려보고 정체를 알아내면 우리는 공포를 극복할 수 있다고
한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정부와
관료들, 싸움을 부추기는 비열한 언론들, 하릴없는 구경꾼들의 논리
없는 지난한 싸움 속에서 자신을 지키며 중심잡고 살기는 쉽지 않다. 지금 우리가 느끼는 광기와 공포의
정체는 무엇인가.
광기란 중력과 같지, 살짝 밀어주기만 하면 되거든 -영화 베트맨에서
첫댓글 우울한 맘이 지속되네요 타는속을 진정시키려구 이것저것 해봐두 소용없구요 우루과이 대통령 호세 무히카 2012년 연설을 계속 읽고 있네요 . . .
복잡한 마음이 혈계님 글을 읽으니 정리가 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