면장과 지서장 그리고 조합장이 3부요인이었습니다. 내 기억으로 조합장은 추곡수매와 농자금대출 같은 살아감에 실질적 권한을 가지고 있어서 주변 분들께서 그랬나 봅니다. 세월이흘러 지금의 해남에도 변함 없이 조합장님의 파워가 유지된 것을 보면서 시골은 어쩔 수 없이 농협과 운명공체라 생각합니다.
초근목피로 연명하던 시절에 밥 한끼가 대단한 권력이었습니다. 특히 섬에는 오랜 가뭄으로 식수는 당연하고 한 두끼 정도는 굶는게 일상이었습니다. 그때 밀가루로 수제비 만들어 온 동내분들이 매일 우리집서 저녁을 먹었습니다. 덕분에 나는 책보들고 학교간 기억이 없어요. 늘 누군가가 대신 들고 갔습니다. 지금은 아픈 추억입니다
저희 반엔 파출소장 아들하고 엿장수 아들이 있었어요. 파출소장 아들은 다 미워했지만 엿장수 아들은 다 좋아했지요. 엿으로 해결 안 되는 게 없던 시절이었으니까요. 요즘 동창회 가니 파출소장 아들은 아버지 재산 다 까먹고 영구임대아파트에 살고 있다고 하더군요. 혹시 엿장수 아들만나면 꿀하고 바꿔먹자고 하고 싶은데 소식을 모르네요.
첫댓글 학창시절의
자만을 스스로 쉽지 않음에도 고백
하실수 있는 용기에 박수를 보냅니다
외삼촌 선생님의
그 가르침을 잊지 않으신후. 깨달으며
산다는것은 인간승리가 아닐지요
토말선배님의 면면을 보는글 잘 읽고 느끼고 갑니다
나이들어가니 옛날 추억에 자주 머뭅니다.
그나마 이런 추억놀이가 있어 초보농부의 가을이 지루하지 않답니다.
댓글 감사합니다.
@토말촌장 시골에서는
부잣집 자녀들께는 누구든. 알아서 고개숙이던 시절이었을겁니다
요즘은 대부분 풍족하니까 40~50년 전과는 비교가 안될것 같습니다
남자라면 그런 자부심과 배짱이 있어야 되는데
저는 너무 일찍 제주제를 알아서 늘 조용히 있는듯
없는듯 살고 있습니다
그 시절 생각하면 흑역사가 넘치지만
그래도 소중한 추억이기에 간간히 꺼냅니다.
아버님께서 국회의장이나
안기부장, 아니면 비서실장 정도 되는줄 알았네요.ㅋㅋ
섬마을 조합장님 대단히 끝발 좋으셨네요..ㅋㅋ
넘 재밋게 읽었습니다..
저도 이 카페에서 너무 훌륭하신 선배님들이 많으시다는 것을 알고
턱없이 부족한 저 자신을 깨닫고 있답니다..
야속한 물결만 천번만번 밀려오는
작은 섬마을에 조합장이면 상당한 권력이었습니다.
내생각임~^^
국회의장 대법원장
국무총리 그 이상이었습니다.
이 또한 내 생각입니다.
지역사회에서는 조합장님 하면 다들 존경하고 알아모셨습니다.
좋은 가문에 태어나셨으니 항상 자신감에 차 있을 수 있었겠습니다.
저는 벽촌의 한미한 집안에 태어나 자존이나 자신감 같은 것이 전혀 없었습니다.
아이고~
좋은 가문은요~
할아버님께서 일제시절 머슴을 사셔서 어릴적 머슴집
손자라는 소릴 듣고
지내다 아버님께서
조합장이 되신 후
조합장님 아들 소릴 듣고 잠시 우쭐했던 추억을 글로 올렸습니다.
댓글 감사합니다.
권불십년(權不十年 아무리 높은 권세라도 10년을 가지 못한다는 말)이란 말이 토말촌장 님의 글을 읽으며
왜 떠오르는지 모르겠네요.
지금이라도 그 시절을 되돌아보며 겸손해지셨으니 깨달음(불교에서 말하는 성불)의 경지에 오르신 것이니
얼마나 다행입니까?
사람, 어찌 보면 쪼금 잘 나고, 쪼금 못 나고,
다 거기서 거기, 오십보 백보, 피장파장입니다.
공평하게 올 때는 옷도 못 걸친 벌거숭이, 갈 때는 땡전 한 푼 못 갖고 가는 빈 몸,
참으로 공평한, 공정한 인간사입니다.
박민순님 반갑습니다.
늘 열정으로 살아가는
삶의이야기 잘 읽고
있습니다 .
안부남깁니다.
@토말촌장 댓글을 다 달기도 전에 답을 주셨네요.
@바퀴장 그러게요 ~
반가움에 그만~^^
@토말촌장 나는 충청도 산속의 지독히도 가난한 농부한테 흙수저로 태어났는데
토말촌장 님은 최소한 은수저 내지는 금수저로 태어났구먼유. 부럽습니다요.
찢어지도록 가난이 싫어 어린 마음에도 정말 가난만은 탈출하고 싶더라구요.
저의 큰아버지ㅡ할아버지의 장남ㅡ
조합장하셨어요
그때는 조합장 선거여서 할부지 돈 엄청날리고 조합장되셨는데
돈생돈사ㅡ진짜 돈마이날린 큰아부지셨네요 ㅎ
저는 아부지권력이고 뭐이고 외동딸이라는게 권력이었고 오만했더랬는데
지금요? 조신모드중입니다 ㅎ
그때는 보릿고개가 엄청 절정인 때라서
특히 섬마을에는 먹고사는 일이 삶의 대부분을
차지했습니다.
미국에서 우유가루와 밀가루가 원조로 오는 날에는
잔치날이었고요~
아마도 그래서 그 보급권을 가진 조합장의 힘이
더 크게 느껴졌나 봅니다.
조그만 섬마을에서 우체국에 근무를 했지요
대빵은 '면장'(5급사무관)이구요. 파출소장(경감)
우체국장(6급주사) 보건소장(5급대우), 초등학교교장 선생님 5사람이 정부기관 기관장인데
보건소장은 병역의무대신 온 젊은이라 잘 어울리지 않고
단위농협장은 민간인으로 기관장으로 대접은 받습니다.
인구 4,000명의 조그만 섬이었는데
우리동네에서는 단위조합장이 크게 힘은 못썼는데
그곳에서는 파워킹 이었나 봅니다.
면장과 지서장 그리고 조합장이 3부요인이었습니다.
내 기억으로 조합장은 추곡수매와 농자금대출 같은
살아감에 실질적 권한을 가지고 있어서 주변 분들께서 그랬나 봅니다.
세월이흘러 지금의 해남에도 변함 없이
조합장님의 파워가 유지된 것을 보면서
시골은 어쩔 수 없이 농협과 운명공체라 생각합니다.
ㅎㅎㅎ
과거엔 그랬지만
지금은 나보다 못한 사람이 없어
보인다는 말씀에 공감 백배입니다ㆍ.
그 건요
과거엔
수직관계를 중요시 했다면
지금은
수평으로 보이는 걸 거에요
득도 하신 겁니다ㆍㅎ
요즘 젊은이들을 보면 젊음 그 자체로도 충분하게
아름답습디다.
나이들어가니 꾸며도 좋은 옷을 입어도 폼이안나요~
날마다 변해가는 모습에 요즘 거울도 안보는 남자랍니다.
해가
이렇게나 붉게 떨어집니까
멋지네요
토말촌장님
글 정말
잘 쓰십니다 ^^
시골이라선지 도시보다는 맑고 고운 하늘이 자주 보입니다.
이른아침 문 열고 느끼는 싱그런 공기는 덤이고요~
이런 것 하나하나가 시골살이에 견디는 힘이됩니다.
두서없는 글에 칭찬하나 남겨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아~
깜짝 놀랐습니다.
울 아버지 보다
높은 사람이
있었나하고..ㅎㅎ
섬마을 조합장님..
아들에게는
대단한 배경이었겠어요..ㅎ
설마
친구들을 많이
괴롭히진 않으셨겠지요?
ㅎㅎ
똘망한 소년의 모습이 그려집니다..ㅎ
초근목피로 연명하던
시절에 밥 한끼가 대단한 권력이었습니다.
특히 섬에는 오랜 가뭄으로 식수는 당연하고 한 두끼 정도는 굶는게 일상이었습니다.
그때 밀가루로 수제비 만들어 온 동내분들이
매일 우리집서 저녁을
먹었습니다.
덕분에 나는 책보들고
학교간 기억이 없어요.
늘 누군가가 대신 들고
갔습니다.
지금은 아픈 추억입니다
저희 반엔 파출소장 아들하고 엿장수 아들이 있었어요.
파출소장 아들은 다 미워했지만 엿장수 아들은 다 좋아했지요.
엿으로 해결 안 되는 게 없던 시절이었으니까요.
요즘 동창회 가니
파출소장 아들은 아버지 재산 다 까먹고 영구임대아파트에 살고 있다고 하더군요.
혹시 엿장수 아들만나면 꿀하고 바꿔먹자고 하고 싶은데 소식을 모르네요.
올 봄 뒷산에 아카시아꽃이 엄청 피어있어 청을 작은
항아리로 가득 담아
어제 처음 개봉해 맛을
봤습니다.
그런데 진짜 꿀맛이었습니다.
요즘 꿀 하면 늘 베리꽃님 생각이 납니다.
언제 날 잡아 삶방 모임을 남도에서 해야겠습니다.
보고픈 분들이 많아서요~!!!
아카시아 청이라니 캬! 거기다 맛 향이 쥑인다니 갸가 지대로 잘난 개비여 ㅎㅎ 조걸 언제쯤 맛보려나 한 숟가락이라도 남겨두오 혹 모르니까 흠.. 촌장님은 잘나긴했어요 내가 생각해도
그동안 맛보지 못한 아주 특변한 맛이었습니다.
늘 관심으로 격려로 함께하시는 운선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