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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에 이어다 는 니 에 하며 에 하라 을 하면 에 이니 은 라 요 은 라 니라 인댄 이리요
하니 이로다 하면 하리라
은 하고 이어다 이 이요 이 이니라 이 하면 하나니 는 나 은 니라 는 하고 는 니라 에 하나니 는 이 니라
요 이라 하면 이니라 |
오늘 비가 참 많이 왔는데요. 우산을 뚫어버릴 정도로 왔지요, 신심테스트를 확실히 하게 말입니다. 오늘 신심 있는 사람은 교당 나오고 없는 사람은 안 나왔을 것입니다. 그런데 공부에 대한 원력이 확실하면, 이정도의 비에 교당에 올까 말까 고민 자체를 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생에 항마위정도 가려면 이정도 비에 약간이라도 흔들렸다면 항마위는 새롭게 마음먹지 않는 한 힘들 것입니다.
지난시간에 ‘벗을 어떻게 사귀냐’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면 오늘은 ‘잠을 어떻게 자야 행복해질 것인가’의 문제, 그리고 ‘겸손과 하심’의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바로 본문을 보겠습니다.
⇒ 다섯째 : 삼경 외에는 잠자지 말라.
․ 삼경(三更) : 하룻밤을 다섯 때로 나누어 9시쯤부터 2경, 3경, 4경의 새벽 3시까지를 말한다. 자칫 3경의 자시를 말하는 이도 있는데 잘못 안 것이다. 즉, 요즘의 6시간을 말하는 것이 됨. ․ 경(更) : 고칠 경 다시 갱 이나 여기서는 시간단위로 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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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9시부터 새벽 3시까지가 삼경입니다. 절에서 이렇게 공부하지요. 신문을 보니 우리나라 사람들이 평균 6시간 15분을 잔다고 합니다. 그런데 건강을 위해 제대로 자려면 7시간 보다 조금 더 자야 한다고 합니다. 이보다 덜 자는 사람들이 비만해지고, 불안증이 있고, 그렇다고 합니다. 자 그런데 잠에 대해 공부하려면 먼저 잠은 잘수록 는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어떻게 잘 지를 고민하십시오. 사실 4시간만 자도 피로도의 80%는 풀린다고 합니다. 미국 워싱턴 교당의 한 교무는 3시간만 자고 삽니다. 학생 때도 3시간 잤습니다. 그런데 엄청 건강합니다. 흡사 보디빌더 같고, 운동 할 때도 아주 날아다닙니다. 제가 한 번 샤워장에서 물어봤어요. 자네 그렇게 적게 자고 살아도 괜찮나? 그런데 괜찮다고 합니다. 그것은 물론 평균적인 사람의 모습은 아닐 테지만 그런 사람도 있습니다. 아무튼 저녁 9시부터 새벽3시까지 ‘숙면’을 취하면 전혀 모자라지 않습니다. 몸이 불편하고 약해서 더 자는 것은 ‘수마’는 아닙니다. 낮에 잠깐 졸아버렸다, 그것은 범계일까요? 아닙니다. 이것도 범계는 아닙니다. 근데 상시로 항상 그 시간에 편하게 졸고 자고 있다 그러면 범계가 될 것입니다. 공자께서는 낮잠 자는 제자에게 “너는 썩은 나무다. 썩은 나무는 조각할 수 없고 아무 쓸모없는 나무다”라고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잠자는 것도 공부가 필요합니다. 여러분 운동을 신나게 하고 난 뒤에는 잠이 잘 오지요? 낮에 빈둥빈둥 했으면 잠이 잘 안 옵니다. 여러분 낮에 자꾸 자면 음양의 이치에 맞지 않는 것입니다. 밝은 낮에는 활동해야지요. 그리고 새벽3시부터 일어난다는 소리는 무슨 소리냐. 새벽에는 우주의 기운이 생생약동하는 시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맑은 영혼과 맑은 기운을 갖게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그 때에 맑은 기운을 살려서 쓰라는 소리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밤늦게 우주의 기운이 다운되고 자야 할 시간에 놀고, 기운이 맑을 때는 편하게 자고 있고 그러죠. 그래선 안된다는 것입니다.
⇒ 아득한 세월 동안 도를 가로막는 것은 수마보다 큰 것이 없으니,
․ 수마(睡魔) : 참을 수 없을 정도로 퍼붓는 졸음을 魔(마)에 비유하여 일컫는 말. ․ 막대(莫大) : ‘~보다 큰 것이 없다’라고 해석한다.
⇒ 12시진(24시간) 내내 성성한 의단(성품)을 지켜 어둡지 말며,
․ 이륙시(二六時) : 2 X 6 =12. 옛날 시간 계산으로 하루를 12지에 바탕을 두어 12시로 보았음. 요즘의 하루 24시간을 말함. 하루. ․ 성성(惺惺) : 깨어있는. 적적성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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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죽으면 일어나라고 아무도 하지 않습니다. 실로 원 없이 잘 수 있습니다. 그러니 살아있을 때 쉬이 혼침에 빠지지 마세요. 수마의 정 반대는 정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정진하는 마음이 없으면 졸음이 더 많이 오게 되어있습니다. 그리고 잠을 불필요하게 많이 자는 사람은 목표가 없다는 것, 습관이 들었다는 것입니다. 또한 마음속에 ‘이것은 어쩔 수 없어’라는 관념병이 든 병자입니다. 사람들은 이 병에 대해서 참 관대하지요. 이중에도 보면 여러분 중에 10시간 넘게 자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제가 누군지 다 압니다. 예전에 선사들이나 도를 닦는 분들 중에는 송곳을 턱 밑에 대고 좌선 하십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얼음장 속에서 하고, 어떤 선사는 까마득한 절벽 위에서 좌선을 했습니다. 떨어지면 죽어버리겠다. 그런 마음으로 하는 것입니다. 어떤 것을 하려고 할 때는 단호한 결심이 있어야지, 언젠가는 되겠지 라는 마음을 먹어서는 안 됩니다. 대나무가 마디가 있기 때문에 올라가는 것입니다. 틈틈이 마디마디 목표가 있어야 합니다. 대나무가 쭈욱 크는 것 아닙니다. 붓글씨를 쓸 때도 중간 중간 멈추면서 씁니다. 사람이 그냥 쭈욱쭈욱 클 수 없어요. 마디가 있습니다. 선을 하다가 조는 사람 있지요. 그러면 회초리로 때리지요. 그런데 그걸 맞고도 다시 조는 사람 있더라고요. 예전에 이런 말이 있어요. 전쟁터에서 옆에 동료가 총 맞아 죽어도 졸고 있다고. 그만큼 잠이란 무서운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차피 잘 잠. 이왕이면 일찍 자라고 하는 것이지요. 새벽을 활용 하는 사람이 공부인이고 수행자입니다. 자기 근무시간이 늦다면 가서 바로 자라는 것입니다. 근데 사람들 저녁시간에는 참 여유 있고 아침엔 참 바쁘지요. 묘합니다. 정말 묘해요. 그리고 과도한 수면은 지혜를 막아버립니다. 그리고 선심을 죽여 버립니다. 왜냐면 잠을 잔다는 것은 태중에 들어가는 것과 같이 ‘휴식’의 의미도 있지만, 영지가 감춰지는 시간이거든요. 그렇다면 그 시간이 길어질수록 매 해지는 시간이 길어진다는 소리지요.
그럼 이륙시중에 성성기의이불매 하며는 무슨 뜻일까요. 하루 종일 성성하라고 합니다. 성성적적 적적성성은 선의 강령이면서 동시에 정신 그 자체입니다. 이것을 한국말로 하면 ‘고요하고 두렷하다’라고 합니다. 이것은 정전 ‘정신 수양의 요지’에 나오는 말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양변으로 치달아 갑니다. 고요하기만 하거나, 두렷하기만 하거나 하지요. 그러나 고요하면서 동시에 성성하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졸거나 무기에 빠지지 아니하면서 고요하고. 고요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성성히 깨어있고. 그냥 깨어서 딴 생각 하는 것이 아니라 공적영지의 광명이 그대로 함께 있다는 소리입니다. 아무리 기분 좋은 공연을 보고 즐거운 것을 보아도 적적성성한 공적영지의 자리에 합일하는 것에 비하면 우스운 행복입니다. 그것이 바로 극치의 행복입니다. 예전에 한 스님이 그러셨습니다. 화장실에서 볼일 볼 때 오직 거기에만 일심해도 견성한다. 그런데 여러분 화장실에서 볼일 보는 데만 집중하지 못하지요. 오만 생각 다합니다. 여러분 항상 ‘여기 무엇 하러 왔는가’를 기억하세요. 가만히 있을 때는 회광하세요. 밖으로 향하는 빛을 여러분 자신에게도 돌이키세요. 그게 회광반조입니다. 고요한 시간에는 회광반조 해야 합니다. 그다음 ‘기의’라는 것은 무엇인가요. 의두를 들라는 소리입니다. 여러분 의두가 있으실 것입니다. 지갑에 돈만 있으면 범부중생입니다. 수도인의 지갑에는 의두거리를 넣고 다녀야 한다고 했습니다. 좌선 끝나고도, 아침에 맑은 정신에, 하나만 있는 것이 의두가 아닙니다. 생활 속에도 의두가 있습니다. 내가 오늘 행사를 해야 하면 행사 의두를 연마해야지요. 여러분 좌선을 하다가 번뇌가 들었다. 그러면 어찌 해야 합니까? 아 번뇌가 들었구나 하고 알면 됩니다. 그것이 아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번뇌의 차를 타고 달려가는 것이지요. 중생의 인생은 번뇌의 차를 타고 도는 것입니다. 좌선 할 때 번뇌의 차를 타는 것이나 똑같은 것입니다. 왜냐. 재미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인생 살면서 번뇌 속에서 재미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도와는 먼 길이지요. 불매는 무엇이냐. 불매 앞에는 ‘허령’이라는 소리가 생략되어있습니다. 허령은 텅 비어서 실체가 없는 가운데 무언가 있다는 소리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유심이냐 무심이냐. 여러분 화두를 들 때, 선을 할 때 유심으로 해야 합니까 무심으로 해야 합니까. 유심중무심 무심중유심으로 해야합니다. 그것이 진경 자리입니다. 그 자리에 들어가면 툭 밝아집니다. 어떤 깨침도 선을 통하지 않은 깨침은 없습니다. “경전 많이 보고 실지 속에서 불공 잘하고, 은혜 나투고, 취사 잘 하면 되지” 하는 사람이 있는데요. 깨달음은 선과 의두, 의두라는 물음표가 붙었을 때 나오는 결과물입니다. 자 그런데 선은 어떻게 하느냐. 신분의성으로 해야 합니다. 며칠 하고 마는 것이 아니라요.
⇒ 네 가지 위의 안에 밀밀이 빛을 돌이켜 스스로 보라. ( 행(行)․주(住)․좌(坐)․와(臥)의 거동으로 촘촘히 혜광을 되돌려 비춰 스스로 보라.)
․ 사위의(四威儀) : 행(行)․주(住)․좌(坐)․와(臥)의 법다운 차림새 ․ 밀밀(密密) : 빈틈없고 끊임없이 ․ 회광(廻光) : 회광반조의 준말. 언어문자에 의지하지 않고 반성하여 바로 심성을 비춰보는 것 |
에너지를 밖으로 쓰지 마십시오. 저 사람은 핸드폰이 좋네, 저 사람은 가방이 명품이네, 이렇게 남들을 보느라 에너지를 밖으로 쓰지 마십시오. 밀밀회광이란 이 에너지를 안으로 돌이키라는 소리입니다. 사람들이 이것을 잘 못합니다. 그 사람이 얼마나 철이들었는가. 생각이 깊은가는 회광의 실력입니다. 내 안으로 자문자답 해보고, 내 서원에 신심에 대조하는 마음. 밖으로 향하면 원망이 보이고 분별이 생기지만 안으로 향하면 서원이 다져지고 법이 세워지고 지혜가 솟아납니다. 그래서 자간하라, 스스로 보라는 소리입니다. 여러분 회광반조. 반조공부에는 세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회광반조입니다. 제일 중요합니다. 그런데 견성하지 않은 자는 회광반조 할 수가 없습니다. 반조입니다. 목적과 서원을 반조하면 자연스레 안으로 돌이켜집니다. 저는 간사 때 이런 방법을 썼는데요, 졸리면 ‘야 너 여기 무엇하러 왔냐, 니 서원이 뭐냐’ 이렇게 질문하면 잠은 저리 도망갔습니다. 그래서 저는 간사 때 한 번도 졸아본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조는 것도 습관입니다. 내가 서원이 약하면 육신의 졸음이 옵니다. 그렇지만 서원을 반조하면 잠은 도망가게 되어있습니다. 그리고 믿음입니다. 믿음.
두 번째는 인과반조. 교법에 비춰보는 것입니다. 대종사님이 연고없이 자지 말라고 하지 않았잖느냐! 잠 많이자면 내생에 축생보 받는다고 하지 않으셨느냐! 이렇게 대조하라는 소리입니다. 마지막이 자성반조입니다. 이것을 두고 직지인심이다 라는 이야기를 하지요. 가장 중요한 반조가 이것입니다. 자성의 지혜광명을 돌이켜보는 것이 가장 근본적인 반조입니다. 위의 세가지가 모두 어우러지면 무서운 힘이 나옵니다.
⇒ 한평생 헛되이 지나면 만겁에 한이 따르리니,
․ 만겁(萬劫) : 영원한 시간
⇒ 무상으로 보면(변하는 것은) 찰나(빠르게 지나가는지)라 나날이 놀라고 두려워해야 한다.
․ 찰나(刹那) : 아주 짧은 시간 ․ 경포(驚怖) : 놀랍고 두려움
⇒ 사람의 목숨은 잠깐이라 실로 시간 시간을 보장할 수 없도다.
․ 수유(須臾) : 잠깐 |
일생을 헛되이 보내버리면 만겁에 한이 따를 것이다. 일생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여러분 한 생 축생보 받아 보세요. 언제 인간이 될 것입니까? 그러면 만겁을 통해 한이 됩니다. 여기에 선순환과 악순환의 고리가 있습니다. 우리가 일생 뻘 짓이나 하고 방심했다, 그러면 악순환의 고리에 들어갑니다. 축생이 되면 지혜도 없고 인연 짓기도 어렵고 깨닫기도 어렵고 더 들어가 보면 대체 어떻게 수행을 할 것입니까? 또 제가 말씀 드렸죠, 발목이 삐면 운동이 어려워져서 살이 찌고 헌배도 어려워집니다. 발목 하나 삐었는데 그것 때문에 악순환의 고리에 듭니다. 현생을 내가 한 번 잘못 살면 그걸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만겁으로 이어집니다. 이것을 선순환으로 바꿀 것이냐 악순환으로 바꿀 것이냐 이것이 중요합니다.
무상(無常)하다는 것은 변한다는 소리입니다. 항상성이 없다는 소리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변하냐, 찰나로 변한다는 소리입니다. 찰나찰나 매 순간 변합니다. 우주는 성주괴공으로 바뀝니다. 그럼 어떻게 바뀌나요? 누구는 진강급으로, 누구는 은생어해 해생어은으로 바뀝니다. 여러분 교통사고 정말 찰나에 일어납니다. 금방 바뀝니다. 그래서 나날이 놀라고 두려워해야 합니다. 제가 전에 90살 먹은 분과 이야기 해봤는데요, 90년 정말 금방 지나가더랍니다. 마음은 아직 청춘인데 육신은 금방이더랍니다.
모든 것에는 때가 있습니다. 농약 칠 때, 풀을 멜 때, 씨 뿌릴 때가 있습니다. 유아기 청소년기 청년기 장년기 노년기에 할 일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해야 합니까? 젊을 때는 놀러 다녀야 하나요? 아닙니다. 젊을 때는 준비할 때입니다. 사람 목숨은 잠깐입니다. 정말 금방이에요 여러분.
화두는 악세사리가 아닙니다. 원공 교우가 강연 때 말한 것처럼, 젊은 지금 정말 다 놓고 해 봐야지요. 훈련 나면 화두 한 번 들어보고, 기분 좋으면 한 번 들어보고, 집에 가면 안 들고. 그런 사람은 천년만년 가도 못 깨칩니다. 한 번 들 때는 쭉 들어가 버려야 합니다! 왜냐면 그것이 정말 중요한 것이니까요. 하면 좋겠네? 한번 그런 자세로 백년 닦아 보십시오. 과연 깨쳐지나.
⇒ 아직 조사의 관문을 뚫지 못하였다면 어찌 편안하게 잠들 수 있겠는가. ․ 조관(曺關) : 조사관, 조사의 문빗장, 화두, 숙제 |
조관을 뚫는 다는 것은 화두를 타파한다, 견성해서 모든 화두에 대답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하지 못한다면 어찌 편히 잘 수 있겠느냐 하는 소리입니다. 화두를 뚫고 편히 자십시오. 화두도 못 뚫고 무지해서 편히 잔다면 그것은 진짜 편한 것이 아니라 어리석은 것입니다. 이 말이 여러분 가슴에 ‘아 괜찮은 말이다’가 아니라 절절하게 다가가야 합니다. 간절함이 있는 사람에게 조관을 뚫을 기회가 옵니다. 간절한 없이 ‘그러면 좋겄다, 좋은 말이구만’ 하는 사람에겐 조관을 뚫는 선물은 오지 않습니다.
⇒ 게송으로 이른다.
⇒ 졸음뱀이 구름처럼 둘러치니 심월이 어두워지고, 수행자가 이에 이르면 다 길을 헤맨다.
․ 수사(睡蛇) : 졸음의 뱀, 즉 수마를 나타냄 ․ 운롱(雲籠) : 구름재롱, 즉 구름이 끼다의 뜻 ․ 수사운롱(睡蛇雲籠) : 졸음이 뱀처럼 스스르 소리없이 오고 구름처럼 덮씌우듯 오는 것을 이르는 말 ․ 심월(心月) : 마음 달. 자기 본성. 참 자기 ․ 행인 : 수행자 |
잠이라는 것은 그럽니다. 자기가 알지도 못하는 새 잠드는 것입니다. 마치 알지 못하는 새 하늘에 구름이 끼는 것처럼 말입니다. 잠은 그렇게 옵니다. 잠은 방심하면 옵니다. 한 마음 놓으면 잠이 옵니다. 심월암, 마음달이 어두워진다. 그렇습니다. 졸리면 영지가 가려집니다. 행인도차. 수행인이 여기에 이르면, 진미정이로다, 다 길을 헤매버린다는 것입니다.
대종사님은 상시응용주의사항으로 저녁에는 낮에 못한 거 정리하고, 참회 반성하고, 수양시간 가지라고 하셨습니다. 낮에 열심히 했기 때문에 잘 때 꿈이 적습니다. 낮에 생각하는 것들은 꿈속에서 몸을 받아 움직입니다. 꿈은 번뇌의 잔상입니다. 선수행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믿는 것이 신심이고, 그것을 서원하는 마음이 신분의성입니다. 여러분 그래서 유무념으로 일과를 잡아야만 합니다.
⇒ 여기에서(이 가운데) 취모검의 예리한 칼날을 세워 쓰면 졸음뱀의 구름은 저절로 모습이 사라지고, 심월도 절로 밝으리라. ․ 취모리 : 아주 날이 잘 드는 칼. 칼날이 날카로와서 털을 대기만해도 잘라지는 정도의 보검. 여기서는 화두로 보면 됨. 또는 화두의 타파. 지혜의 완성 |
자 취모리가 무엇인가요. 동물은 가을에 난 털이 가장 부드럽다고 합니다. 겨울을 나기 위해 일단 가을에 가장 부드럽게 납니다. 그런데 그 털을 살짝 칼날 위에 놓기만 해도 잘리는 아주 날이 선 칼이 바로 취모리입니다. 자, 이것은 의두를 정신 바짝 차리고 들어야 한다는 소리입니다. 포기하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중생들은 포기해버립니다. 그리고 포기한 자기의 모습이 미우니까 더 포기해버립니다. 이것이 악순환입니다.
구름은 스스로 모양이 없습니다. 그리고 달은 스스로 밝습니다. 구름이 스스로 모양 없이 사라지고 나면, 심월이 당연히 솟아오르는 것입니다. 이것은 동시에 이뤄집니다. 구름이 사라지고 나중에 밝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수마가 멸하면 동시에 공적영지가 올라옵니다. 여러분들 취모검을 하나씩 갖고 있으셔야 합니다. 어떤 의두도 모두 잘라버릴 수 있는 취모검을 하나씩 차고 계셔야 합니다. 잠을 자는 사람은 지혜가 사장되어버립니다. 잠을 적당히 주무셔서, 하근기로 머무르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 여섯째 : 결코 망령되이 스스로 높이고 자만심으로 남을 가벼이 여기지 말라.
․ 존대(尊大) : 높이고 크게 함. 크게 높임. ․ 경만(輕慢) : 가벼이 업신여김 ․ 만(慢) : 게으르다 오만하다 |
여섯 번째는, 허망하게 스스로를 존대하지 말라는 소리입니다. 자기를 존대하면 무엇이 나오지요? 무시가 나옵니다. 자기를 존대함과 동시에 타인을 무시하게 되어있습니다. 내가 잘났고 너는 나보다 못났구나. 그래서 경만타인, 타인을 경만하게 되어있습니다. 아상과 타인의 무시는 동시이며 하나입니다. 넘어가겠습니다.
⇒ 어짊을 닦아 어짊이 이루어지는 데는 겸손과 사양이 근본 되고 벗과 친하고 화목하게 지내는 데는 공경과 믿음이 으뜸이 된다.
․ 종(宗) : 마루 종 근본 종 으뜸 종 |
공자님은 ‘인’을 최고로 말하셨지요. 모든 것을 살려 쓰는 것이 인이고, 최고의 덕이라고 하셨습니다. 인을 얻고 인을 닦는 데에 근본 되는 것은 무엇입니까? 바로 겸양입니다. 내겸외양. 안으로 조심하고 밖으로 양보하는 것이 겸양입니다. 친우화우. 벗하고 친우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무엇입니까. 벗을 경신하는 것입니다. 공경하고 믿는 다는 소리입니다. 바로 처처불상 사사불공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끝까지 믿어주고 끝까지 이해한다는 것이며, 이것은 사제지간에도 적용되어야 하는 소리입니다. 한 경계에 공경심 놔 버리고 그러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어떤 경계가 와도 경과 신을 놓지 않는 것이 참된 종입니다.
여러분, 하심(下心)을 가지라고들 말씀하시는데, 공심(空心)이 되어야 하심이 됩니다. 잘못 하심하면 나중에 폭발해버립니다. 진짜 참된 하심, 참된 고개 숙임은 공심, 즉 빈마음일 때 되는 것입니다. 억지춘향으로 해버리면 나중에 폭발해버립니다. 하심이라는 형식만 빌리지 마세요.
⇒ 사상산(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이 점점 쌓이면 삼악도의 바다는 더욱 깊어지나니
․ 사상(四相) :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의 네 가지 관념 ․ 삼도(三途) : 축생도와 아귀도와 지옥도의 삼악도.
⇒ 밖으로 위엄을 드러내는 것은 마치 존귀한 듯 하지만 안으로는 얻을 것이 없음은 썩은 배와 같다.
․ 존귀(尊貴) : 높고 귀함 |
산이라는 것은 장애물을 이야기 합니다. 네 개의 장애물이 있다. 이것이 쌓이면 삼악도의 바다에 깊이 들어가 버린다. 아,인,중생,수자 상 이것이 네 장애물 입니다. 사상의 뿌리는 무엇입니까? 정산종사님께서는 ‘아(我)상’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육신을 ‘나’로 압니다. 조금 생각 있는 사람은 육신과 정신을 ‘나’로 압니다. 정신을 오온, 색수상행식이라고 합니다. 아상이라는 것은 육신이 나라고 한다거나. 나의 업식, 습관되어진 나, 습관과 성격인 나, 또는 생각의 주체가 있는 나. 나라고 인식하고 있는 나가 ‘있다’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수상행‘식’. 즉 ‘식(識)’이라는 것이 있어서 받아들인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제 강연을 듣고 아는 것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있냐, 여기서 아상의 뿌리가 나옵니다. 범부는 “이것이 나다!”라고 생각합니다. 데카르트가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고 말 했는데요. 이것은 하근기의 생각입니다. 생각하고 있는 나의 실체는 없으면서 있습니다. 있지만 그것이 참으로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아는 ‘식’ 그렇다면 그 ‘식’은 어디에 있느냐. 없습니다. 어디에도 없는 것입니다. 있으면서 없습니다.
그리고 ‘나라는 것이 있다!’라는 생각을 하니까 중생심과 ‘상대심’이 나옵니다. 또 나라는 것이 ‘있다’는 생각 때문에 장수하고 싶다, 잘나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조견오온개공입니다. 즉 오온이개공, 정신육신이 모두 공하다는 것을 조견(見), 그저 보아야 합니다. 심안(心眼)으로 보아야 합니다. ‘내가 있다’는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대(大)자리에 바탕한 소유무(小有無)를 해야하는 데, 중생은 대자리는 놔버리고 그저 구분만 합니다. 이것이 전부 상입니다. 그러니까 삼악도에 빠져버립니다. 전도몽상 해버립니다. 그러니 올바른 행동이 나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금강경에서는 ‘사상이 멸도되면 즉 보살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여래라고 하셨지요.
수행이라는 것은 두 가지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참 나’라는 존재를 깨치는 것이입니다. 그러나 습관과 업력은 계속 비져나옵니다. 그러니 이것과 끝없이 싸워나가는 것이 두 번째 입니다. 자칫 나라는 자존감을 세우고, 나의 실체를 모르고, 구분하고 상대하는 마음으로 살면 그것은 착각입니다. 썩은 배와 같은 것입니다. 정산종사께서도 “내실이 있어야지 외부로 나타난 것은 허망하다”고 하셨습니다. 좋은 글, 좋은 명예도 허망할 뿐이라고 하셨습니다.
=> 벼슬이 더욱 높은 사람일수록 마음은 더욱 삼가고, 도가 높은 사람일수록 뜻은 더욱 낮춰야 한다.
․ 대자(大者) : 큰 사람, 크고자 하는 사람 ․ 고자(高者) : 높은 사람, 높아지고자 하는 사람
=> 인․아상의 상(相)이 무너지는 곳에 무위도가 저절로 이루어지느니,
․ 무위도(無爲道) : 조작이 없는 본래의 세계. 깨달음의 경지. 열반.
=> 무릇 하심이 있는 사람은 만 가지 복이 저절로 돌아오게 된다. |
벼슬이 높을수록 하심(下心)하라는 소리입니다. 또한, 도가 높은 사람일수록 사회적 욕망이나 이기심을 낮춰야 한다는 소리입니다. 높아지려면 하심해야 하고, 하심하려면 비워야 합니다.
정산종사법어 무본편33장을 보면 무위도자성에 대해 이야기가 나옵니다. 상이 무너지는 곳에 바로 무위도가 이루어집니다. 망아진아현입니다. 무상상고전입니다. 정산종사님께서는 무위위무위라고 하셨습니다. 장자는 유위의 세계를 부정적으로 보았습니다. 그러나 정산종사님은 유위의 세계야 말로 극치라고 하셨습니다. 무위에 바탕한 유위야 말로 극치라고 했습니다. 장자는 윤회도 부정했고, 무의의 세계를 주장했지만 유위의 세계로 끌어내지 못했어요. 그러나 정산종사는 유위위무위라고 했습니다. 참 없음에 근본해서, 유위의 세계로 끌어내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원불교의 매력입니다. 자칫 잘못 공부하면 상 없애는 것이 다입니다. 그러면서 상내는 사람은 욕하고 있죠. 그러면 안 됩니다. 무위도 무위법 그렇습니다. 무위법은 인도불교에서 쓰는 말이고, 무위도는 중국불교에서 쓰는 말입니다. 범유하심자는, 무릇 하심 있는 자는 만복자귀의라 그러셨습니다. 만복이 다 귀의한다. 즉 공의 진리를 깨쳐서 하심으로 쓸 것 같으면 만복은 알아서 거꾸로 오지 말라고 해도 스스로 자기가 오토매틱으로 능히 오게 되어있다는 소리입니다. 쫓으면 도망가는데 놓으면 오더라. 이것이 인과입니다. 오온이 개공한 자리를 조견할 것 같으면 만복은 알아서 따라온다 이런 이야기입니다. 자 계속 가겠습니다.
⇒ 게송으로 이른다.
⇒ 교만한 번뇌 속에 반야 지혜 감춰지고, 아인산(아상-사상을 줄인 표현)의 위에는(안에는) 무명이 길어진다. ․ 반야(般若) : 만물의 본질을 이해하고 불법의 참다운 이치를 깨닫는 좀 더 본원적인 지혜. 사물의 바른 통찰력. ․ 무명(無明) : 어리석음. 밝지 못함. 지혜 없음.
⇒ 남을 가벼이 여기며 배우지 않고 뒤뚱뒤뚱걷는 노인이 되면, 병들어 누워 신음하게 될 때 한탄함이 다함없으리라.
․ 불궁(不窮) : 다함이 없음. 끝이 없음. |
교만하면 그 마음이 나는 순간 반야의 지혜는 숨어버립니다. 반면 반야의 지혜가 솟아나면 교만, 즉 나라는 상은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반야는 나와 너의 상대가 없는 자리, 절대 자리를 이야기합니다. 교만과 반야는 서로 반비례 합니다. 이게 참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래서 육바라밀 중 최고로 치는 것이 바로 (처음에야 보시반야 뭐 이러지만) 반야바라밀을 깨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반야를 뭐라고 그러냐. 모든 부처의 어머니라고 그럽니다. 왜냐면 반야의 지혜를 통해서만이 성불할 수 있고 부처가 나오기 때문입니다. 반야의 지혜를 통해서만이 부처가 탄생합니다. 그래서 반야의 공덕을 높이 추앙해서, 제불지모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반야바라밀다심경 이라고 하지요. 아인산상장무명 이라. 여기서 무명은 번뇌를 말하는 것이고 십이연기의 시작을 이야기 합니다. 십이연기의 시작은 무명입니다. 반야가 아니라 무명으로 시작합니다. 그래서 삼악도에 들어갑니다. 경타불학. 남을 가벼이 여기고 배우지 않는다. 그래서 용종노인이 되버리면, 노인이 되면 똑바로 걷기 힘듭니다. 가볍게 여기면 배우지 않습니다. 그게 교만입니다. 그런 사람은 자기의 상, 자기의 잘난체에 가려져있습니다. 하심하면 자연히 배우려고 합니다. 교만한 사람은 배우려고 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기쁨 중에 배우는 기쁨, 알아가는 기쁨, 깨쳐지는 기쁨이 참 대단한 것이거든요. 그런데 이게 책을 통해 배우는 것뿐만 아니라 실행을 통해 몸으로 체득되는 배움이 있습니다. 그런데 요새는 몸으로 체득하는 배움이 없고 관념으로 배우기 때문에 큰 도인이 잘 안 나옵니다.
자, 병와신음한불궁이니라. 병들어 누워 신음하게 되면 한탄이 다함이 없을 것이다. 한탄한다. 젊은 시절에 우리의 본업, 수행을 하지 않으면, (부업은 육신의 의식주입니다) 직장 생활 한다고 수행 안하고 화두는 뒤로 하고 그러면. 투조관은 전혀 못하고 늙어서는 병이와 신음할 따름입니다. 아무리 착해도 성품이 착해도 결국 중생입니다. 경계 오면 그냥 교만해버릴 따름입니다. 천만경계에도 흔들리지 않는 부처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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