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되고 싶다. 돈도 많이 벌고 관객에게 인정도 받고 싶지만 가장 큰 소망은 동료와 선,
후배들에게 인정 받는 배우가 되고 싶다. ‘공형진은 배울 것이 있는 배우’라는 소리를 듣고 싶다."
12년차
배우라면 ‘베테랑’ 소리를 들을 만도 하지만 공형진 스스로는 “아직 모자람이 많은 배우”라고 말한다. 군 복무와 방송으로 생긴
5년간의 휴지기는 "영화를 향한 그리움과 확신"을 확인한 시간이었다. 방송과 연극, 영화 등 모든 연기 영역을 섭렵한 지금 그는
영화와 연극에 주력하겠다는 결심을 굳혔다. 1년에 한 편씩 좋은 연극을 할 요량으로 극단 ‘유'의 막내 단원을 자처했던 그는
<파이란>이 연기 생활의 문턱이 될 영화라고 강조한다.
<파이란>에서 공형진은 양아치 경수 역을
맡았다. 천하의 삼류 건달 강재(최민식)의 고향 후배이자 룸 메이트로 늘 함께 다니는 단짝이다. 위장 취업한 파이란(장백지)을 직업
소개소에 팔아 넘기고 강재와의 위장 결혼을 알선하는 경수는 두 사람을 매개하는 중요한 인물. 개봉을 앞두고 배우 공형진이 말하는
<파이란>과 연기에 대한 이야기.
94년 이후 5년간 공백이 있었다 ‘배우’가 되기
위한 휴지기였다. 군에 가기 전에는 당시 유행하던 하이틴 영화에 많이 출연했다. 아무 것도 몰랐던 때였다. 제대 후 팀웍과 출연
배우를 보고 너무 욕심이 나서 <쉬리>의 오디션을 봤지만 안 됐다. 그때 후유증이 좀 있었다. 배우로 인정 받으려면
연기력이 우선이라는 것을 뼈저리게 느낀 계기였다.
<박하 사탕>의 고문 형사 역은
인상적이었다 형사들이 수배자를 검거하는 장면은 거짓말 안 하고 50번 이상 반복했다. 나중에는 너무 힘들어서 밭에 숨어
있었다. 힘든 만큼 배운 것도 많은 영화였지만 이창동 감독은 정말 지독한 사람이다.
<파이란>에 출연한
계기는? 작품도 작품이었지만 결정적인 것은 최민식 형 때문이다. 예전에 <에쿠우스>라는 연극을 할 때부터
민식이 형은 내 모델이었다. <쉬리>에 출연했던 친구가 민식이 형을 소개해 줘서 알게 됐는데 일상 생활에서부터 연기까지
완벽한 배우의 모습처럼 보였다. ‘꼭 같은 무대에 서서 저 배우의 에너지를 느껴보고 싶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파이란>은
내게 절박했다. 죽기 아니면 살기로 이 영화를 해야 된다고 덤볐다. 캐스팅이 확정됐을 때 정말 기뻤다.
최민식은
강재가 되기 위해 욕을 입에 달고 다녔다는데 경수가 되기 위해 노력한 점은? 난 기본 성향이 경수다. 활달한 성격에
다혈질적인 면이 나를 닮았다. 예전에는 극중 인물이 내가 돼야지, 내가 극중 인물이 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파이란>을
하면서 이런 생각은 완전히 바뀌었다. 스폰지에 잉크가 스미듯이 강재가 돼 가는 민식이 형을 유심히 관찰했다. 경수는 후배지만 강재의
주변에서 강재를 통제할 수도 있는 인물이다. 계산적인 액션에 치우치기 보다는 서서히 젖어가기 위해 생각을 많이
했다.
경수가 되는 것이 쉽지는 않았을 텐데 소주집에서 경수가 강재에게 접시로 맞는 장면이 있다. 그
장면 촬영 하루 전날 민식이 형에게 전화를 했다. “형, 난 여기서 이렇게 하려고 하는데, 어때?”라고 물었다. 민식이 형은 말이
없었다. 한참 있다가 다짜고짜 “그냥 네가 경수가 되면 돼”라고 했다. 무슨 말인지 몰라 답답했는데 곰곰히 생각해보니 아직 경수가 안
됐다는 뜻이었다. 극중 인물이 되는 것은 수학공식처럼 맞출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평생을 해도 못 할 수도 있겠지만, 서서히 변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촬영 하면서 민식이 형의 도움이 컸다. 무서울 정도로 호되게 혼도 많이 났다.
<파이란>은 연기가 사실적이어야 하는 영화다. 그래서 경수가 되는 것이 중요했나? 리얼리즘
영화든 아니든, 출발은 리얼리즘 연기라고 생각한다. 우선 자연스러운 연기가 돼야만 다른 패턴의 연기로 응용이 가능하다고 본다.
코미디가 전형적인 사례다. 자연스럽게 웃기는 연기를 하기는 아주 어렵다. 억지로 웃음을 주려는 것은 티가 나기 마련이다. 자연스럽게
웃음을 유발하는 연기는 울리는 것보다 훨씬 힘들다.
얼마 전에 <선물>에도 출연했는데, 같은 멜로
영화인 <파이란> 과 차이가 있다면? <선물>의 삼류 개그맨 철수는 기본적으로 따뜻한 인간이다.
친구인 용기(이정재)를 곁에서 지켜보면서 안타까워 하는 모습을 담아내는 것이 핵심이라고 생각했다. <파이란>을 멜로라고
부를 수 있다면 그것은 리얼하고 ‘사람’이 보이는 멜로 영화다. 경수는 똑똑한 바보다. 잔 머리를 굴리면서 똑똑한 척 하지만 결국
한심한 양아치다. <파이란>에서는 뚜렷하게 인간이 보여야 한다.
<파이란> 촬영 후 가장
달라진 점은 뭔가? 나로서는 굉장히 큰 변화다. 연기관 자체가 바뀌었으니까. 예전에는 재능과 끼가 연기의 밑천이라고
생각했고 그런 연기를 했다. <파이란>을 하면서 재능과 끼는 배우가 갖춰야 할 덕목 중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됐다. 촬영 중에 민식이 형이 “열심히 하는 것은 누구나 해. 잘 해야지”라고 했다. 그 말이 맞는 말이다. 배우라는 이름에 부끄럽지
않을 정도가 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송해성 감독은 어떤가? 현장에서 “<파이란>에 목숨 건
사람 많다”는 말을 농담처럼 주고 받았는데 정말 노력 많이 하셨다. 여성적이지는 않지만 세심하고 꼼꼼한 편이다. 연기하는 배우들이
편하게 놀 수 있도록 배려도 많이 해 주신다. 술을 좀 좋아한다는 게 탈이지.
영화를 봤을 텐데 자신의 장점과
약점이 보이나? 상황에 따라 필요한 임기응변이나 순간적인 순발력은 강점이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되게 캐릭터를 끌고 가는
측면에서는 약하다고 본다. 억지로 만들려고 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우러나는 연기를 위해 생각을 더 많이 해야 할 것 같다. 민식이 형이
마지막 세트 촬영할 때 “지금부터 <파이란> 찍으면 진짜 좋은 영화 나올 것 같다”고 했는데 그게 무슨 말인지 나도 알 것
같다.
배우로 가장 크게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잘 되고 싶다. 돈도 많이 벌고 관객에게 인정도
받고 싶지만 가장 큰 소망은 동료와 선, 후배들에게 인정 받는 배우가 되고 싶다. ‘공형진은 배울 것이 있는 배우’라는 소리를 듣고
싶다. 자체 시사할 때 민식이 형이 “걱정 많이 했는데 잘 했다”고 칭찬해 줬을 때 가장 기뻤다. 내게는 동료들의 평가가 중요하다.
또 한 가지 바람은 부모님에게 인정 받고 싶은 것이다. 나와는 워낙 다른 인생을 사셨던 분들이기 때문에 그 동안 걱정이 많으셨다. 꼭
한 번 마음의 짐을 털어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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