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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성에 대한 새로운 상상- 느티나무 도서관의 모금 사례
느티나무도서관장 박영숙
1. 밑 빠진 독
도서관을 네 글자로 하면 ‘밑 빠진 독’, 다섯 글자로 하면 ‘돈 먹는 하마’다. 공립과 사립의
차이도 없다. 정부나 지자체 예산에서도 도서관은 늘 우선순위에서 밀려난다. 모든 서비스가
무료이니 수입은 없는데, 시설관리부터 책값 인건비 같은 운영비는 끝없이 들여야 하기 때문이다.
눈에 띄는 성과가 금세 보이는 것도 아니다. 책을 만나고 사람을 만나면서 삶이 크게 달라질
수 있지만, 그걸 통계수치로 증명할 방법은 없다. 수익성이나 효율성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고, 당연히 재정적 부담을 운명처럼 안고 가야 한다. 그래서 도서관을 사회주의적 시설이라고
말한다.
민간으로 오면 더 말할 나위도 없다. 도서관을 사립으로 운영한다고 하면, 많은 사람이 ‘비상식
적’이라고 한다. 느티나무는 그 비상식적인 일을 11년째 이어가고 있다. 지금도 자료구입비
명목으로 지원되는 시도비 지원금을 빼면 운영비 전액을 기부금으로 채운다. 가끔 지자체나
단체의 공모사업에 지원할 때도 있지만, 대부분의 공모사업이 단기 프로젝트를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해당사항이 없다. 살림살이를 안정적으로 꾸릴 방법은 꾸준한 기부와 모금밖에 없다.
2. 도서관에 기부라니?
하지만 도서관은 매력적인 기부대상이 아니었다. 소아암 환자나 기아 난민을 돕는 것도 아닌데
왜 기부를 해야 하느냐는 질문을 받곤 했다. 도서관에 대한 인식이 필요했다. 도서관의 사회적
가치를 한 마디로 말한다면 공공성이다. 인종, 성별, 나이, 종교, 장애, 학력, 어떤 이유로도
차별 없이 지식, 정보, 문화를 누리도록 보장한다는 것이 공공도서관의 이념이다. 지식기반사회,
정보화시대로 접어들면서 정보와 지식의 격차가 빈부격차로 이어지는 문제가 더 심각해졌지만,
도서관이 제대로 발전하지 못한 우리나라 현실에서 정보복지, 문화복지에 대한 사회적 인식은
뿌리내리기 힘들었다. 기부를 제안하면 흔히, 이런 일은 정부에서 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반응이
뒤따른다. 공공성은 도서관에 기부가 이루어져야 할 명분인 동시에 기부를 막는 벽이 되기도
했다. 바로 그런 이유에서 도서관의 기부가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자선이나 시혜를 넘어, 스스로
누리면서 함께 나누는 기부문화를 싹 틔울 계기가 될 수 있다고 기대했기 때문이다. 시간이
필요했고, 잠재 기부자들이 도서관의 공공성을 자신의 문제로 인식하게 될 기회가 필요했다.
3. 도서관의 가치를 체험할 기회가 필요하다
공공성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정당성을 갖지만 한계도 있다. 가장 큰 문제는 획일화! 그리고
서비스의 질이 하향 평준화되기 쉽다는 점이다. 우리는 그 한계에 정면으로 도전(!) 하기로
했다. ‘그다지 매력적이진 않지만 무료라서 이용하는’ 도서관이 아니라, 마을에서 가장 머물고
싶은 곳, 도서관이 있어서 이 마을에 살고 싶어지는 도서관을 만들자고 했다.
새로 살 책을 고를 때는 ‘비싼 책 먼저’ 산다는 원칙을 세웠다. 개인이 사기 힘든 자료를
도서관에서 볼 수 있게 하기 위해서다. 아직 번역되어 출판되지 않은 이름난 외국작가의 그림책
원서도 사서 꽂아두고, 값이 비쌀 뿐 아니라 ‘깨지기도 쉬운’ CD나 DVD까지 대출했다. 개관
무렵부터 신도시 개발바람이 불어 삭막한 아파트 숲으로 변해가는 동네에서, 눈길을 끄는 책들이
가득 꽂혀있고 아무 데서나 편안히 책을 볼 수 있는 도서관을 사람들은 사막의 오아시스처럼
반겼다. 느티나무에서만 볼 수 있는 책이 있어서 온다는 사람, 애써 고르지 않고 어떤 책을
봐도 믿을 수 있어서 좋다는 사람, 아이들이 놀이터보다 도서관을 더 좋아해서 온가족 도서관나들
이가 주말행사가 됐다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4. 도서관, 공공성의 마지막 보루
순조롭기만 했던 건 아니다. 서비스의 질이 높아지면 더 높은 서비스를 바라는 요구도 생기게
마련이다. 기꺼이 돈을 낼 테니 이용대상을 제한해서 좀 더 수준 높은 프로그램들을 만들어달라는
요구가 끊이지 않았다. 정부 지원도 없이 민간의 힘으로 언제까지 유지할 수 있겠느냐, 어느
정도 수혜자들이 부담을 하는 건 마땅하지 않느냐는 논리도 끝없이 발목을 잡았다.
이용자의 요구와 도서관의 철학, 지켜야 할 것과 바꿀 수 있는 것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 데
가장 큰 힘이 된 것도 사람이었다. 책하고는 거리가 멀 것 같던 아이들도 꾸준히 도서관을 찾아왔
고, 아이 키우는 데에만 매달려 책읽기나 배움도 아이들 몫으로만 여겼던 사람들이 스스로 책을
펼치며 다시 꿈을 찾기 시작했다. 학교도 그만두고 문제아로 낙인이 찍힌 아이, 부모가 없거나
있어도 돌보지 못하는 아이, 특목고에 다니는 우등생, 서로 다른 세상에서 태어난 것처럼 다른
환경의 아이들이 스스럼없이 어울리는, 더 이상 도서관이 아니면 어디서도 보기 힘든 풍경은,
도서관이 공공성의 마지막 보루가 되어야 할 이유를 알게 해주었다. 우리는 도서관이 왜 모든
사람에게 활짝 열려있어야 하는지 끝없이 말을 건넸다. 꼭 사람이 말을 거는 것도 아니다. 들어서
는 길목부터 도서관 구석구석의 공기에서 공공성에 대한 바람이 느껴지게 만들려고 했다.
5. 느티나무도서관의 모금
느티나무도서관 입구에는 흔히 공공도서관에서 볼 수 있는 도난방지용 게이트가 없다. 규제보다는
자발적으로 존중하고 배려하는 문화를 만들려고 하기 때문이다. 걱정도 많고 반대도 만만치
않았지만, 도난방지 센서를 한 대 설치하려면 천만 원도 넘는 돈이 드는데 그만큼 책을 잃어버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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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 꽤 시간이 걸릴 테니 그냥 책 잘 잃어버리는 도서관이 되기로 했다. 그런데 지금까지 책꽂이에는
많은 책들이 거의 그대로 남아있다. 그리고 그런 ‘작은 차이’를 체험한 사람들이 차츰 ‘자발성
과 다양성이 살아있는’ 공공성에 공감하게 되었다. 반납기한을 넘긴 책을 작은 선물과 함께
담아 택배로 보내기도 하고, 밤새도록 책이 쌓인 반납함 구석에서 후원신청서를 발견하는 날도
있었다.
새로 건물을 짓고 옮겨온 해, 하루는 낯선 사람이 문을 두드리더니 주머니에 든 동전까지 죄다
털어 후원금으로 놓고 간 적이 있다. 회식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환하게 불이 켜진 창으로
책에 둘러싸인 풍경이 보여서 이 건물이 대체 뭐 하는 곳인가, 하고 둘러보다가 커다란 간판이
눈에 띄어 읽어보았다고 했다. (느티나무의 간판은 도서관 설립취지를 새겨 넣어, 책의 한 페이지
처럼 만들어 달았다. 그렇게 ‘튀는’ 간판이 생긴 것도 공공성에 대한 생각 때문이었다. 한글을
몰라도 간판만 보면 책이 많이 있는 집이라는 걸 알아차릴 수 있게 만든 것이다.) 그런 작은
시도가 기부의 동기가 될 수 있다니! 우리는 그런 경험을 통해, 기본적인 가치와 신념을 꾸준히
실천해가는 것이 모금에도 가장 중요하다는 걸 배웠다. 지금 당장 내가 누리진 못하더라도 언제든
누릴 수 있다는 믿음은, 수동적인 이용자들을 잠재 기부자로 만들었다. 경쟁, 이기주의, 소외로
얼룩진 현실이지만, 많은 사람들이 공공성에 대한 바람을 갖고 있다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6. 다양한 참여의 기회가 필요하다
2000년 2월에 문을 연 느티나무도서관은 개관당시 3천 권이었던 책이 4만권으로 늘었고, 이용자로
등록한 회원은 3만 명이 넘는다. 2007년에는 건물을 지어 공간도 8배로 커졌다. 달마다 기부하는
사람이 3백여 명. 그 가운데에는 다른 도서관에서 사서로 일하며 느티나무의 꿈과 실천을 지지하는
사람들, 느티나무의 이야기를 담은 책을 읽거나 강연을 듣고 후원하게 된 사람들도 많지만,
도서관 이용자가 40%쯤으로 가장 많다.
가장 꾸준히 기부를 하는 사람들은 자원활동가들이다. 도서관의 취지와 가치를 가장 깊게 이해하
고 누리기 때문일 것이다. 모금을 위해 자원활동을 조직한 것은 아니지만, 자원활동이 기부의
계기가 되는 건 분명하다. 느티나무에서는 모자라는 일손을 채우려고 자원활동을 조직한다기보다
는 자원활동 기회를 늘리려고 일거리를 만들 때가 많다. 봉사라는 말도 쓰지 않고 자원활동가라고
부른다. 자원활동이 책을 만나고 사람을 만나는 도서관의 일상을 가장 풍성하게 누릴 기회가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독서회 활동을 하는 사람들이 적극적으로 자원활동에 참여하는 걸
보아도 그걸 알 수 있다. 그래서 많은 이용자들이 잠재적 자원활동가가 되도록, 하루하루 도서관의
일상에서 아주 작은 것이라도 참여의 기회를 만들려고 한다.
얼마 전 느티나무에는 또 새로운 책꽂이가 생겼다. 개관 10주년 생일에 일일찻집을 열어 번
돈으로 만든 책꽂이다. 손님을 초청해 축사를 하고 감사패를 전달하는 기념식으로 치를 수 있겠지
만, 좀 더 도서관다운 행사가 되도록 일일찻집을 열기로 했다. 그냥 책을 보러 왔던 사람들도
스스럼없이 참여할 수 있고, 멀리서 찾아오는 손님들도 화분이나 후원금 봉투를 들고 오는 것보다
는 도서관에서 책도 읽고 반가운 사람과 차를 마시며 자연스레 후원도 할 수 있게 만들자는
생각이었다. 모금한 돈의 용도에 대해서도 긴긴 논의가 이어졌다. 옥상에 텃밭을 만들어 분양을
할까, 태양광설비를 할까, 책을 살까, 궁리 끝에 책꽂이를 만들기로 했다. 한 사람이라도 더
혜택을 함께 누리는 게 좋겠다는 데 의견이 모아진 것이다.
기부경매, 헌책방까지 아이디어가 보태져, 천 명이 넘는 손님이 다녀가고 순수익이 4백만 원을
넘었다. 잔치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힘이 모여서 운영되고 있는지 알리는 기회가 되었다. 행사가
있었던 2월 한 달 동안 정기후원 신청은 평소의 서너 배나 되었다.
많은 사람의 다양한 참여로 모금을 했으니, 그 돈으로 책꽂이를 만드는 과정도 함께 누리도록
만들고 싶었다. 때마침 가까운 공방에서 일하는 이용자가 찾아왔다. 주말에 아이를 데리고 와서
책을 읽어주다 보면, 가끔 탁자 다리가 헐거워져 흔들리는 게 보이더라며 가져가서 고쳐 와도 되겠느냐
고 했다. (번번이 이런 일이 생기기 때문에, 느티나무 사람들은 어디선가 숨어서 도와주는 ‘느티나무
귀신’이 있는 게 틀림없다고들 한다.) 반가운 마음에 당장 책꽂이 만들 계획을 이야기하고 자원활동가
들과 함께 만들어도 되겠냐고 제안했다. 서툰 초보자들과 작업을 하는 건 번거로운 일이 될 텐데도,
도서관의 열린 분위기에 호감을 갖고 있던 공방에서는 흔쾌히 제안을 받아주었다. 도서관 마당이
목공소로 탈바꿈하고 아이들까지 거들고 나서서, 일은 더디었지만 많은 사람의 손길이 닿은 책꽂이가
도서관의 표정을 바꿔놓았다. 커피 한 잔, 헌 책 한 권씩 사는 것으로 기부한 돈이 이렇게 쓰였다는
걸 두고두고 알려주는 몫을 톡톡히 할 것이다.
기부한 돈이 어떻게 쓰였는지 알리는 일에도 다양하게 공을 들인다. 책 한 권, 과일 한 봉지,
인쇄용지 한 묶음까지 아주 작은 물품기부 내역도 소식지에 담는다. 아이 생일선물로 도서관에 책을
기증하기로 했다며 들고 오는 사람, 집에서 분갈이 한 화분을 슬그머니 갖다놓는 사람, 생일 케이크
대신 나눠먹으려고 롤 케이크 세트를 샀다며 한 줄을 전해주고 가는 사람…. 그 작은 마음씀씀이와
그것을 하나하나 소식지에 담아 전하는 정성 모두 말을 거는 기회가 되는 모양이다. 다양한 기부사연을
눈에 담은 사람들은 어디서든 기부할 물건을 만나면 도서관을 떠올린다고 한다. 기부가 기부로 이어지
는 것이다.
7. 일상성, 그 지난한 화두
도서관의 공공성이 오롯이 실현되려면 일상성이 담보되어야 한다. 한 번의 이벤트나 캠페인이
삶의 패러다임을 바꿀 수는 없다. 일상성은 밋밋해 보인다. 하지만, 도서관은 원래 사방을 둘러싼
책 속에서, 사소하고 우연한 만남들을 통해 스스로 배움의 동기를 찾고 꿈을 꾸게 되는 곳이다.
기부도 아주 작은 계기에서 비롯될 때가 많다. 느티나무는 일상 속에서 아주 작게라도, 꾸준히
실천되는 기부에 무게를 둔다. 그래야 오랫동안 이어질 수 있고 다양한 참여가 있는 공공성을
구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거액기부가 필요할 때도 있다. 특히, 도서관처럼 물리적인 인프라가 필요한 곳은 초기에는 더욱
그렇다. 느티나무도서관이 처음 문을 연 아파트상가 40평 공간은 관장 개인이 집을 한 채 살
돈으로 얻을 수 있었지만, 버틸 수 없을 만큼 책도 늘어나고 사람도 늘어나면서 땅을 사고 건물을
지었을 때에는 30억이 넘는 돈이 들었다. 개관 5주년잔치를 열어 본격적인 모금을 시작했지만,
개미 후원으로 몇 해 안에 집을 짓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적어도 공공도서관으로 등록할
수 있는 규모가 되기 위해서는 거액 기부가 필요했다. 그 몫은 이사회에서 맡았다.
2003년 재단법인을 세울 당시 이사회는 실무를 맡은 관장을 빼면 모두 기업의 CEO들로 꾸려졌다.
말 그대로 ‘후원이사회’였다. 건물을 짓고 다시 문을 연 뒤에도 인건비를 포함한 경상운영비는
여전히 이사회를 중심으로 월 1백~3백만 원을 기부하는 소수의 거액 기부에 기대고 있다. 그런
기부자들이 없었다면 지금처럼 ‘살아남는’ 것도 불가능했을지 모른다. 관장과 후원회장의
친구들을 중심으로 이사회가 꾸려지고 거액 모금을 할 수 있었던 힘은 신뢰였다. 하지만, 몇몇
사람의 진정성에 대한 신뢰만으로 기부가 지속되기는 어렵다. 참여와 소통으로 함께 만들어가는
공공성을 기대하기는 더 어렵다. 십 년, 백 년이 지나도 도서관이 자리를 지키고, 느티나무
같은 도서관들이 많아지게 만들려면 도서관의 적극적인 이용자들이 정기기부자가 되어야 할 것이
다.
8. 아주 작은 것 하나까지 공들일 것, 섬세하게!
느티나무도서관에는 제3열람실의 몫을 하는 북카페가 있다. 북카페의 공식 이름은 ‘전기요금’
이다. 자원활동가들이 커피와 토스트 같은 먹을거리를 만들어 팔아서 도서관의 공공요금을 대겠다
는 뜻을 담은 이름이다. 17명쯤 되는 자원활동가들이 달마다 머리를 맞대고 회의를 해서 재료는
공정무역으로 들여오는 커피와 초콜릿, 유기농 음료와 빵을 사용한다. 빵과 과자는 지역의 장애인
단체가 사회적기업으로 운영하는 빵집에서 가져오고 음료, 달걀, 잼, 설탕 등도 지역의 생협에서
유기농 제품을 가져다 쓴다. 책을 보다가 토스트를 곁들여 커피를 마시며 잠깐 쉬는 동안에도
여러 가지 의미 있는 실천으로 이어질 기회를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도서관 북카페에 찾아올
이유가 많아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