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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상대사가 용을 타고 당나라에서 신라로 돌아오는 것을 그린 그림. 당시 신라인이 타고 다닌 배를 상상해 볼 수 있다. |
816년 신라는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크게 굶주렸습니다. 그러자 170 명이 먹을 것을 구하기 위해 바다를 건너 당나라의 절동 지방으로 건너갔습니다.
삼국 통일 전에도 백제ㆍ신라 사람들은 일본 열도로 건너가 땅을 개척하기도 했습니다. 이들이 일본 역사의 발전에 공헌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일입니다.
그런데 9세기 초 신라인들은 당시 사이가 좋지 않았던 일본이 아닌 당나라로 건너갔습니다. 특히 당나라 해안 지역으로 많은 신라인들이 건너가 그 곳에서 새로운 삶의 터전을 일구어 나갔습니다.
●당나라에 활발히 진출
당시 당나라는 이민족을 포용하여 외국에서 온 사람들은 세금을 일정 기간 면제해 주는 조치를 취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신라인들도 당나라로 건너갔던 것입니다.
이들은 ‘재당 신라인’이라고 불렸습니다. 하지만 단지 신라에서 굶주림을 피하기 위해 온 농민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빚을 졌다가 그 빚을 갚지 못해 노비가 되어 당나라에 강제로 팔려 온 사람도 있었습니다. 이와 달리 넉넉히 살 능력이 있지만, 보다 많은 재물을 모으려는 생각에 당나라에 온 사람도 있었습니다.
또 새로운 것을 배우기 위해 당나라에 건너온 사람들도 섞여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의상대사와 같이 불교를 공부하거나, 최치원처럼 유학을 위해 온 이도 있었습니다. 특히 최치원은 외국인을 위한 과거 시험인 빈공과에 수석으로 합격하기도 했습니다.
한편, 신라인들은 차츰 산동반도 남쪽의 문등현, 양자강 유역의 양주를 비롯해 곳곳에서 ‘신라방’이라는 집단을 이루며 살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당장 당나라에서 땅을 얻어 농사짓기보다는 즉시 돈이 되는 일을 먼저 했습니다. 배 만들기, 소금 만들기, 숯 굽기 등이 주된 일이었습니다.
●재당 신라인 구심점 이루며 무역 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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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화원. 중국 산동성 문등현에 있던 신라인의 절로, 최근에 복원되었다. |
9세기 초 당나라를 여행하고 온 일본의 엔닌 스님이 쓴 ‘입당구법순례행기’에 따르면 당시 대륙의 동해안과 신라, 일본 사이의 무역은 대부분 신라인의 손에 의해 장악되었다고 합니다.
엔닌 스님은 또 당나라를 여행하면서 재당 신라인의 도움을 가장 많이 받았습니다. 그만큼 신라인들은 대륙 해안 곳곳에서 큰 활동을 펼치고 있었습니다. 신라인들은 강과 도로, 운하가 만나는 교통의 요지에 활발히 상업 활동을 했던 것입니다.
재당 신라인들은 당나라에서 오래 살게 되면서 당나라 사회에 적응하기도 했지만, 때로는 함께 모여 살면서 자신들의 뿌리를 잊지 않고 살았습니다. 언어와 생활 풍습, 즐겨 쓰는 물건이 당나라 사람들과 달랐기에 자연히 신라와 많은 거래를 하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당나라에 거주하고 있던 많은 신라인 덕분에 신라는 당나라와 보다 활발하게 무역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신라인들은 타국에서 서로를 의지하는 가운데 모임도 자주 가졌습니다. 특히 산동반도 문등현 적산촌에 있던 법화원이라는 신라인의 절에는 남녀 신도가 250 명이나 몰려든 때도 있었습니다.
법화원은 당나라에 사는 신라인들의 구심점 역할을 했던 것입니다. 신라방은 당나라의 힘이 제대로 미치지 못했고, 신라인 스스로가 자신들을 다스리는 반독립적인 지역이었습니다. 신라방의 신라인들은 당나라에 유학 온 스님과 유학자들의 편의를 돌봐 주기도 하고, 뒤늦게 당나라에 온 사람들이 잘 정착하도록 도움을 주었습니다.
신라방은 대륙에 있던 또 하나의 신라였던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