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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도명기 홍도(東都名技紅桃)의 삶을 재조명하라
홍도, 아악
대신 속악 발굴 후학 지도 전념 생 마감
천인 출신 불구 생몰연대 확실,
묘·비문 남아 특징
2005년 서울서 온 문인들이 찍은 홍도무덤. 무덤과 비석이 온전히 보존돼 있다.
경주시내 어딘가에 묻혀있다는 홍도무덤에 설치된 비석.
반으로 갈라져 시멘트로 붙인 흔적이 있다
"동도명기홍도지묘(東都名技紅桃之墓), 비석이 묻힌 곳을 찾아야 합니다."
정조 임금으로 부터 조선 제일의 명기라 칭송받았던 홍도(紅桃)에 대해 다시 관심이 부각되고 있다.
정조 이후 순조 22년에 걸쳐 30여년간 활동한 경주 명기 홍도 (紅桃) 최계옥(崔桂玉).
그는 우리 전통 음악인 아악(雅樂)보다 속악(俗樂)에 전념하며 살다간 사람이다.
1990년 처음 비문이 발견돼 그해 8월 처음으로 세상에 보도돼 민속자료연구로서의 가치를 인정받으면서 이를 아는 전국의 예술인들이 경주를 찾아 홍도 무덤을 둘러보곤 했다.
정조의 장인인 국구 박준원의 소실이 돼 11년간 생활했고 정치의 정상에 있었던 남편이 죽은 다음 상례(喪禮)마치고 고향 경주로 내려온 홍도는 궁궐에서 배우고 익힌 실력으로 후진 양성에 심혈을 기울여 마침내 동도악부(東都樂府)의 사종(師宗)이 됐다.
당시 기생에 대한 사회의 관념은 천인이었으나 적어도 1930년까지는 지식층에게 격조높은 기쁨을 가져다 준 특수신분으로 활동했다. 홍도는 시(詩)와 서(書), 그리고 미모에 뛰어났고 가무 또한 출중해 나이 20세에 상의원에 선발돼 상궁이 되고 기생으로 전국에 이름을 날렸다.
세도정치하에서 농민의 동요가 극심한 시기에 살았으면서도 오진 우리 음악인 아악보다는 속악의 발굴 장려와 후학지도에 전념했다는 점이다. 그리고 최계옥은 본관이 경주로 세거가인 최동명과 세습관기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지만 생몰연대가 분명하고 묘와 비문이 남아있는 점도 매우 큰 특징 중의 하나다.
경주군 향토사에는 현 법원 경주지청 부지에 교방사무소를 두고 현 감리교회 부지에는 관기양성소를 두어 운영했다고 돼 있는데 이곳은 조선시대 경주관아 안에 해당되는 곳이다.
최계옥이 죽은지 30년이 지난 철종 2년, 홍도 최계옥의 비문을 쓴 첨지중추부사 최남곤은 무과에 급제한 자이며 소리꾼 이상복 등 비문 걸립에 적극 참여했던 이들을 볼 때 교방은 물론, 경주관아를 비롯한 이 고장의 많은 이들이 홍도 최계옥을 따르고 덕을 추모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2005년 경주시 도지동 코아루 아파트 시공을 빌미로 이모씨가 무연고 분묘 개장을 하면서 비석은 사라졌다. 당시 무연고분묘 개장을 허가해준 경주시와 월성동 담당 직원과 개장 시행자 이모씨, 당시 일을 했던 포크레인 기사 임모씨 등은 서로 모른다고만 할 뿐이다. 이에대해 "경주시는 홍도 최계옥을 발굴하는 일에 소홀하지 않아야 할 것"이라고 시인 최모씨는 말한다.
경주 형제산 기슭 위치 2005년 아파트 공사중 행방묘연…지역 예술인들 분노
'동도명기홍도지묘(東都名技紅桃之墓)'란 여덟글자가 뚜렷이 새겨져 있던 홍도(紅桃) 비석의 행방이 묘연해 일부 예술인들이 경주시에 분노하고 있다.
홍도는 황진이, 매창을 능가한, 경주가 낳은 조선 제일의 명기.
소리꾼 이상복(李尙福)이 비문을 짓고 전 검지(僉知)최남언이 388자 예서체로 정교하게 쓴 비문에는 '철종2년 경주의 풍류객 및 교방의 여러 악공과 기생들이 홍도(紅桃)를 정부의 사종(師宗)으로 여겨 그를 잊지않기 위해 약간의 재물을 보아 석돌을 세워 무덤을 표시한다. 나는 이 홍도의 실적을 써서 보내니 세상에 오래 전하도록 할 뿐이다. 명(銘)하기를 미인이 있어 동방에 으뜸이었으니 귀여운 얼굴 예술이 능하였도다. 동도(東都)의 형제산 선영아래 간좌(艮坐) 언덕에 장사지내다'라고 분명하게 쓰여있다. 뿐만 아니라 홍도(최계옥)에 관한 일대기가 상세하게 기록돼 있다.
조선의 명기로, 가장 뛰어나 예술인으로 살았던 홍도의 무덤은 경주시 도지동 형제산 기슭에 위치하고 있었다.
그러나 2005년 아파트를 시공하려던 시행자 이 모씨가 경주시에 무연분묘 개장신고를 하면서 이 비석의 행방이 묘연해졌다.
홍도 무덤 발견당시 묘의 둘레 10m, 높이 2m정도로 일반 묘보다 2배 내외로 컸으며 비의 높이 120㎝, 너비 50㎝, 두께 20㎝, 반으로 깨진것을 시멘트로 접착시켜 놓은상태, 글자도 몇 개 부서졌다.
최계옥은 호가 홍도, 자(字)는 초산월(楚山月)이다. 그의 아버지는 경주에 세거(世居)하면서 세를 떨쳤던 가선대부 최동명이었다. 홍도는 세기(世技)로 머리가 명석하고 미모가 뛰어났다. 10세때 시·서·화를 통달하고 음악과 춤에 능해 경주 교방 활동 당시인 20세때(정조 21년) 경주부윤 유한모의 천거로 상예원에 뽑혀 창경원으로 들어가 상궁이 된다. 당시 기생 중 노래와 춤에 능한 자는 궁중 여악(女樂)으로 선발돼 공직에 임하던 시절이었다.
최계옥의 노래와 춤이 전국적으로 유명하게 되자 정조는 그를 몹시 아껴 의례적으로 홍도라는 별호까지 하사했다. 이후 정조의 장인이자 순조임금의 외조부 박준원이 궁궐 연회석에서 전개된 최계옥의 독특한 가무를 보게된다. 박준원은 39년이란 나이차가 있었지만 그에게 빠져 사위인 정조에게 사람을 넣어 외부(外婦)로 허락해줄 것을 간청했고 당시 나이 59세로 상처한지 10여년이 지난 장인에게 정조임금은 소실로 삼도록 해락했다.
'푸른 옷깃에 붉은 치마입은 새는/매양 하늘과 무지개를 향하여 울고 있으니/깊숙한 새장 속에 갇혀 오래 있음에/어찌 얼굴이 야위지 않으리오.("왜 점점 야위어 가느냐"는 박준원의 농담에 홍도가 지어 올린 시 '앵무').
그의 시에 관한 수준이 어느정도인지 쉽게 파악할 수 있다.
홍도는 박준원이 68세에 중풍으로 세상을 뜨자 여주에서 삼년상을 마친 후 경주로 돌아왔다. 그때 나이 32세. 그는 죽기까지 마지막 13년을 제자들에게 악기연주와 노래를 지도하다 45세때 세상을 떠나고 소리꾼, 악공, 기생 등 후진 양성에 정열을 바친 인물로 홍도는 기록된다.
경주시는 지금이라도 이같은 인물의 비석도 찾고 묘소도 복원하고 작품도 찾아내야 할 것이다.
천재예술인, 그가 경주에 끼친 영향을 결코 간과해서는 안될 일이다.
(註) 홍도 崔桂玉(1778~1822)은 1930년대말 일제강점기에 민족의 울분을 달래주던 ‘홍도야 울지마라 오빠가 있다’는 대중가요의 홍도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인물이다.
조선때 명기 홍도는 실존 인물 이었다.
동국대
최효식교수 경주서 묘비발견
미모ㆍ예능 뛰어난 조선조 명기
일제 암흑기때 유랑극단에 올려져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이
애창하는 「홍도야 울지마라」의 주인공인 홍도가 조선조때 실존했던 기생임을 밝히는 묘와 묘비가 경주에서 발견됐다.
동국대 경주캠퍼스 최효식박물관장은 14일 경주시 홍도동 627의1 동광포 도원안에서
「동도명기 홍도지기묘」라는 묘비와 묘 를 발견했으며 이 묘비를 해석한 결과 일제암흑때 국민들이 나라를 잃은 슬픔으로 즐겨 불러온 「홍도야
울지마라」라는 유랑극의 여주인공이 조선조때 실존했음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화강암으로된 이 묘비는 높이 1.2m,너비 50㎝,두께 50㎝ 규모로 비문에는 홍도가 지은 자작시 등
3백88자가 새겨져 있다.
비문에는 당시 시ㆍ서ㆍ예에 능하고 절세가인이었던 홍도를 기리는 많은 풍류,협객들이
홍도가 세상을 떠난 28년뒤인 1851년(철종2년)8월에 비를 세웠다고 기록돼 있다.
또 홍도의 이름은 최계옥이며 자는 초월산이고 홍도라는 이름은 상궁으로 있을때 임금이 내린 별호인데
아버지는 가선대부를 지낸 최영동,어머니는 세습기생이라고 밝히면서 홍도는 수술년(1778)에 태어나 영특했으며 10세에 시와 서에 능통하고 미모가
뛰어났는데 14세에 예능에도 능했다고 돼있다.
홍도는 특히 20세에
이르러 노래와 춤에서 독보적인 존재가 됐고 초동에 살고있던 당시 임금의 장인 박상공이 첩으로 삼았다.
비문 마지막부분에는 홍도가 고향인 경주로 돌아와 기생으로 지내다 45세에 세상을
떠나자 풍류협객들이 돈을 모아 1851년8월 최남곤이 비문을 쓰고 이 비를 세웠다고 기록돼 있다.
최교수는 『비문의 내용으로보아 홍도는 당시 명성이 높았던 기생들 중 대표적인물로 보이며 이번에 발견된
묘비는 당시 궁중기생 연구에 좋은자료가 될것』이라고 말했다.
'東都名妓紅桃之墓’의 비문
홍도 최계옥에 관해 살필 수 있는 자료는 현 경북 경주시 도지동 627-1의 兄弟山 가지의 작은 언덕에 위치한 무덤 앞에 ‘東都名妓紅桃之墓’라는 비가 있다.
발견 당시 묘는 둘레 10m 높이 2m정도로 일반의 것 보다는 2배 내외로 커 보였고, 비석은 화강암으로 되었는데 반으로 깨진 것을
시멘트로 접속시켜 놓은 상태였다.
비의 높이는 대략 120cm이고 너비는 50cm이며 두께 20cm 크기로 비문은 388자의 예서체로
정교하게 새겨져 있었다. 비가 깨어지면서 글자도 몇 개 부서져 버렸다.
그 비문의 내용을 편의상 (1)~(7)의 번호를 붙여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東都名妓紅桃之墓
伶 李尙福
妓 允惠 松切
(1) 逮至辛亥 州之風流諸俠及敎坊諸伶妓 以娘之爲樂府師宗 不欲泯晦 各損若干財 立石表其墓 屬余爲文 余以娘之實蹟 書而歸之 傳之不朽云爾 爲之銘曰 有美一人兮 擅大東. 容之丰兮 藝之工. 詩以歌兮 諧律音. 山花寂寂兮 月蒼蒼.
(2) 崇禎后四 辛亥八月 日立前僉知 崔南崑識 監役 閑良金周海 折衝張斗寅 敎坊有司 方⌧範 妓有司 福節 雲悅.
(3) 娘之姓崔 名桂玉 字楚山月. 世以紅桃稱者 其尙宮時 御賜別號也. 父嘉善大夫諱鳴東 母⌧⌧東都世妓也. 娘生於戊戌 天姿潁異 年才十歲 通詩書
曉音律 十四歲 色藝雙絶 二十選入于尙醫院 以歌舞獨步長安 名振三國
(4) 國舅苧洞朴相公 見而悅之 納爲外婦 深居數十年 朴相公 戱之曰 汝近何鎖瘐也.
(5) 娘題鸚鵡詩 喩意曰 緣衿紅裳鳥 每向雲霽鳴 雕籠深鎖久 那得不鎖形
(6)及相公捐館 服闋後 歸鄕里 守紅 歲壬午 遘疾疾革 取筆書身後事 以無后嗣 家眥物 施親戚 投筆 就枕而逝 得年四十五
(7) 葬于東都之兄弟山 先隴下負艮原.
이를 필자가 해석하여 제시하면,
동도 명기 홍도의 묘
소리꾼
李尙福
기생 允惠 松切
(1) 마침내 辛亥年(철종 2, 1851)에 이르러 州의 風流客 및 敎坊의 여러 악공과 기생들이 娘[紅桃]을 樂府의 師宗으로 여겨, 그를
잊지 않기 위해 각자 약간의 재물을 모아 석돌을 세워 무덤을 표시할 적에 나에게 碑文을 부탁하였다. 나는 娘의 실적을 써서 보내니 세상에 오래
전하도록 할 뿐이다. 銘하기를 美人이 있어 東方에 으뜸이었으니 귀여운 얼굴 藝術이 능하였도다. 詩로써 노래하여 음률에 맞았도다. 산에 꽃은
寂寂하고 달만 蒼蒼하도다.
(2) 崇禎後四 辛亥 八月 日에 碑를 세우다. 前 僉知 崔南崑이 글을 쓰고, 監役은 閑良 金周海, 折衝 張斗寅이며, 敎坊 有司 方⌧範이고,
妓有司는 福節 雲悅이다.
(3) 娘의 姓은 崔요 이름은 桂月이며, 자는 楚山月이다. 세상에서 紅桃라 부르는 것은 그가 尙宮이었을 때 임금께서 내린 별호였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嘉善大夫[종2품]로 諱는 鳴東이고 어머니는 ⌧⌧인데 東都의 세습 기생이었다. 娘은 戊戌年(정조 2, 1778)에 태어났는데,
天姿가 빼어났다. 나이 겨우 10세에 詩와 書에 통달하고 音律을 깨우쳤으며, 14세에 얼굴과 재주가 모두 뛰어났고, 20세에 尙醫院에 선발되어
들어가 노래와 춤으로 장안에서 독보적 존재가 되고 이름이 온 나라에 떨쳤다.
(4) 國舅인 苧洞에 사는 朴相公[朴準源]이 보고 좋아하여 外婦(妾)로 삼고 수십년을 함께 살았다. 朴相公이 농담으로 놀려 말하기를 너는
어찌하여 이와 같이야위었느냐 하니
(5) 娘이 鸚鵡詩를 지어 자기의 뜻을 비유하여 말하기를, “푸른 옷깃에 붉은 치마입은 새는 / 매양 하늘과 무지개를 향하여 울고 있으니
/ 깊숙한 새장 속에 갇혀 오래 있음에 / 어찌 얼굴이 야위지 않으리오.”라고 하였다.
(6) 相公이 죽자 喪을 마친 뒤에 고향에 돌아와서
다시 敎坊에서 일하였다.
壬午年(순조 22, 1822)에 병이 들어 위독해지자 붓을 가지고 죽은 뒤에 부탁할 일을 적기를, 後嗣가 없으니
집안 살림을 친척에게 나누어 주라고 하였다. 붓을 놓은 자리에서 죽으니 나이 45세였다.
(7) 東都의 兄弟山 선영 아래 艮坐 언덕에 장사지냈다.
(崔孝軾/동국대학교 국사학과 교수․신라문화연구소 소장/'東都의 명기 紅桃 崔桂玉'에서 일부 발췌)
첫댓글 좋은자료 너무감사함니다 경주인으로자부심 120%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