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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파] ☆ 퇴계 선생 마지막 귀향길 700리 종주이야기 (14)
퇴계 선생의 발자취, 경(敬)으로 따르다
2022.04.04~04.17.(14일간)
* [제14일, 최종일] 4월 17일(일요일) 삽골재(서원 주차장)→ 도산서원(1km)
* [1569년 기사년 음력 3월 17일 퇴계 선생]
○ 신유일(음력 3월 17일)에 집에 도착했다. —《退溪先生年譜》
○ 3월에 도산으로 돌아와 지냈다.
○ 도산 매화와 주고받은 시를 지었다. —《退溪先生年譜補遺》
◎ 《退溪先生年譜》에 의하면, 선생이 도산에 도착한 것은 신유일로서 1569년 음력 3월 17일이다. 선생은 이날 아침 일찍 영주에서 출발하여 도산으로 바로 왔을 것이다. 한양(서울)을 떠난 이후, 나라에서 뱃길은 배와 사공을 제공하였고, 뭍길은 역참에서 튼튼한 말을 내주었다. 이 말을 걸음이 잰 말구종이 고삐를 잡고 이끌었으므로, 서울에서부터 줄곧 도보로 걸어온 오늘의 귀향길 재현단보다 빨리 더 멀리 걸었을 것이다.
그런데 선생은, 계상(지금의 상계에 있는 본댁)으로 가지 않고 ‘도산서당’을 먼저 찾았다. 음력으로 3월 17일이니, 늦은 봄 서당 옆 절우사(節友社)의 매화가 아직 피어 있었다. 이때 선생이 지은 〈산매증답(山梅贈答)〉은 매화와 문답하는 형식이지만 모두 선생이 지은 것이다. 매화를 의인화하여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내려온 선생의 귀향을 매화가 반기고, 선생이 매화에게 화답하는 시이다. 먼저 ‘도산의 매화가 주인에게[梅贈主]’ 올린다.
寵榮聲利豈君宜 총영성리기군의 영예와 명리가 어찌 그대에게 있으리.
白首趨塵隔歲思 백수추진격세사 늘그막에 속세를 떠난 님 해를 넘겨 그리워하네.
此日幸蒙天許退 차일행몽천허퇴 이제야 다행히 임금님 허락받아 물러나셔서
況來當我發春時 황래당아발춘시 이 몸 꽃 피우는 봄날 때 맞추어 오셨네.
매화(군자)의 시를 받은 ‘주인이 답한다.’
非緣和鼎得君宜 비연화정득군의 음식 간 맞추려 그대 얻으려 함이이니라.
酷愛淸芬自詠思 혹애청분자영사 맑은 향기 사랑하여 그리움을 읊었노라.
今我已能來赴約 금아이능래부약 나 이제 돌아와 약속 지켰으니
不應嫌我負明時 불응혐아부명시 밝은 시절 저버렸다 허물하지 마소.
◎ 이 시는 1568년 퇴계가 선조임금의 간곡한 부름으로 상경하여 성군이 되기를 바라는 〈성학십도(聖學十圖)〉를 바치고 이듬해 봄(1569년 음력 3월) 귀향하여 자신을 기다리며 피어있는 매화와 주고받은 시이다. 퇴계는 추운 겨울을 이겨내고 맑은 향기를 피우는 매화(군자)를 좋아하여 친구로 사귀었다. 매화 또한 퇴계에게 세속에 물들지 않고 옥설처럼 맑고 깨끗한 마음으로 살아가기를 당부한다. 이 두 편의 시를 통해 퇴계는 고난의 겨울을 이겨낸 것처럼 외롭더라도 맑고 향기 나는 삶을 통해 모두가 행복한 세상을 만들어가자는 의지를 담고 있다.
* [2022년 4월 17일 일요일 귀향길 재현단]
도산서원에 드는 날
귀향길 재현단과 명사와 유림들의 긴 도열
▶ 오늘은 귀향길 재현행사의 마지막 날이다. 이날 아침, 몸소 걸어온 재현단을 비롯하여 각계 명사 그리고 안동의 유림 및 도산서원선비문화수련원의 지도위원 등이 삽골재 아래 도산서원길 주차장(어제의 도착지점)에 집결하였다. 오늘 참가한 도포를 입은 30여 명의 선비단을 비롯해 일반 참여자들은 삽골재 주차장을 출발하여 도산서원까지 1km 남짓한 거리를 마지막으로 걸는 것이다.
〈도산십이곡〉 시비(詩碑)
▶ 삽골재 아래에서 도산서원 입구에 이르는 길목에 〈도산십이곡〉 시비(詩碑)가 있다. 시비는 전6곡 / 후6곡으로 나누어, 나란히 쌍을 이루어 서 있다. 재현단 일행이 하루의 일정을 시작할 때마다 한 곡씩을 불러 어제까지 전 12곡을 완창(完唱)했다. 우리가 날마다 부른 그 〈도산십이곡〉이 자연석 시비가 되어 화사한 햇살을 받으며 서 있는 것이다. 퇴계 선생의 간절한 육성으로 이루어진 노랫말을 생각하니, 시비를 바라보는 후생의 감회가 새롭다.
도산십이곡(陶山十二曲)
〈도산십이곡〉은 퇴계 이황이 명종 때 친히 지은 연시조(聯詩調)로, 모두 12곡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전 6곡(前六曲) 후 6곡(後六曲)으로 나뉘어져 있으며, 전자는 ‘언지(言志)’, 후자는 ‘언학(言學)’으로 부른다. 즉, 전 6곡은 퇴계 이황이 자연에 은거한 상황에서 각종 심정의 감흥(感興)을 읊은 것이고, 후 6곡은 학문과 수양을 통한 성정(性情)의 순정(醇正)을 읊은 것이다. 친필본이 도산서원에 소장되어 있고, 청구영언에도 그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율곡의 〈고산구곡가(高山九曲歌)〉와 함께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시조 중 하나이며, 조선조 시조문학의 대표작이기도 하다.
서원으로 가는 길
▶ 오늘의 마무리 행사인 도산서원 고유제에 참석하기 위해 경상북도 도지사를 비롯한 명사들, 유림, 각 문중의 종손, 퇴계선생의 후손방손 등 수많은 인사들이 함께 포장된 도로를 따라 서원으로 향했다. 하늘은 청명하고 4월의 봄 햇살이 화사하게 내리는 아침이다. 서원 입구의 가장자리에 하마비(下馬碑)가 서 있다. 도산서원에 들어가는 사람은 누구를 막론하고 말에서 내려서 걸어야 한다. 도산서원은 성자를 모시는 영역이기 때문이다.
‘鄒魯之鄕’(추로지향) 비(碑)
▶ 낙동강 안동호와 연해 있는, 말쑥하게 마사토가 깔린 서원 길 연도에 거대한 노송(老松)들이 장엄한데, 길목에 2단의 석조좌대 위에 장방형의 비석(碑石)이 있다. 내용은 전서체로 쓴 ‘鄒魯之鄕’(추로지향)과 해서(楷書)의 글씨로 구성되어 있다. 비(碑)에 쓰인 ‘추(鄒)’는 맹자의 고향이고, ‘로(魯)’는 공자의 본향이다. 추로지향은 퇴계 선생이 학문을 닦고 덕을 세운 도산서원이, 공자와 맹자 같은 성인이 배출되는 본향이라고 빗댄 말이다. 1980년 공자의 77대 종손인 대만 국적의 공덕성(孔德成) 선생이 도산서원 원장으로 추대되어 남긴 비석이다. 뒷면에 자상한 설명이 있다.
‘이 전서(篆書) 추로지향과 가는 해서(楷書)는 공자의 77대 종손 공덕성 박사가 도산서원 원장 재임 시에 쓴 것이다. 이로부터 예안과 안동을 '추로지향'이라고 일컬은 것은 멀리 중국의 공자와 맹자가 살고 있던 노와 추 두 나라에 비(比)한 것이며 이 말은 성현이 살고 있던 고장이란 뜻이다. 좌측 해서 부분의 국역은 다음과 같다. … “경신년 12월 8일 삼가 도산서원에 나아가 퇴계선생 신위에 배알하고 강당에 올라 끼치신 원규를 읽고 흠모하는 마음 더욱 간절하여 이를 돌에 새겨 기록하다. 곡부 공덕성은 쓰다.” 淵民 李家源 謹幷書’(연민 이가원 삼가 글씨를 쓰다)
천광운영대와 천연대
▶ 서원의 마당 입구에 있는 ‘천광운영대(天光雲影臺)’ 앞을 지난다. 천광운영대는 도산서원의 서쪽 절벽 위의 낙동강 전망대이다. 운영대(雲影臺)는 주희의 〈관서유감(觀書有感)〉에 ‘天光雲影共徘徊’(천광운영공배회, 하늘빛 구름 그림자가 같이 어울려 돌고)'에서 취한 것이다. 동쪽 절벽에는 ‘천연대(天淵臺)’가 있는데, 천연(天淵)은 《시경(詩經)》에 ‘鳶飛戾天 魚躍于淵’(연비려천 어약우연, 하늘에는 새가 날고 물에는 물고기가 뛰어 논다)'에서 취한 것이다. 낙동강 호수 건너편에 ‘시사단(試士壇)’이 보인다. 도산서원 '시사단(試士壇)'은 정조 때 퇴계의 학문과 위업을 기리기 위해 이곳 송림(松林)에서 도산 별과를 시행(1792년 정조 16년)하였는데 이를 기념하기 위해 1796년에 세웠다. 당시 송림은 안동댐 공사로 수몰되어 사라졌다.
향나무와 왕버드나무
▶ 도산서원 바깥마당에 들어섰다. 마당의 초입 가장자리에 오래된 ‘향나무’가 있고 동쪽의 가장자리에는 오래된 거목 ‘왕버드나무’ 두 그루가 있다. 왕버들은 퇴계 선생이 도산서당을 지을 때부터 있었다고 하는데, 안동댐 건설로 인해 수몰되는 것을 막기 위해 도산서당 전면부 마당을 5m 가까이 성토(盛土)하는 과정에서 나무의 아래 둥치가 대부분이 땅 속에 묻혔다. 그리하여 한 그루는 거대한 가지가 지면(地面) 가까이 뻗어있어 지지대를 받쳐놓았다. 묵묵히 서원을 지키는 오래된 나무들이다.
열정(冽井)
▶ 서원 정문에 들어가기 전에 마당 오른쪽에 장대석을 우물 井(정) 자 모양으로 쌓은 열정(冽井)이 있다. 도산서당 바깥마당에 있는 우물이다. ‘열정(冽井)’이라는 이름은 《주역(周易)》 (48) 수풍(水風) 정괘(井卦)의 구오(九五) 효사(爻辭)에서 취하였다. 효사에 이르기를, ‘우물이 맑고 차가우니 마실 수 있다. 상(象)에서 말했다. 찬물을 마시는 것은 중심에 있으면서 바르기 때문이다.(九五 井冽寒泉食 象曰 寒泉之食 中正也)’
… ‘열정(冽井)’은 혼자서만 마시는 ‘단순한 찬 우물’이 아니라, ‘차갑고 맑은 샘물을 많은 사람들이 마시어, 군자(君子)의 덕(德)이 두루두루 미치기를 바라는’ 퇴계 선생의 마음이 담겨 있다. 퇴계는 〈도산잡영〉에서 ‘서당의 남쪽에 맑고 차며 단맛의 옹달샘이 있다.’ 라며 열정과 관련한 시(詩)를 짓기도 하였다.
우물은 마을이 떠나가도 옮겨가지 못하고, 아무리 물을 퍼내도 줄지 않으며, 오가는 사람 모두 마실 수 있다. ‘열정(冽井)’에는 이와 같이 세상에 널린 지식을 부단한 노력으로 쌓아 우물과 같이 사회에 꼭 필요한 인재가 되라는 염원이 깃들어 있는 것이다. 남에게 인정받기 위한 위인지학(爲人之學)을 넘어, 스스로 자신의 소명(召命)을 다하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 위기지학(爲己之學)으로서의 배움은 편협한 나를 넘어서 자신의 학덕을 사회와 국가로 확장하는 것이다.
도산서당
▶ 도산서당(陶山書堂)은 3칸밖에 안 되는 작은 규모의 남향 건물이다. 서쪽 1칸은 골방이 딸린 부엌이고, 중앙의 온돌방 1칸은 선생이 거처하던 완락재(玩樂齋)이며, 동쪽의 대청 1칸은 마루로 된 암서헌(巖棲軒)이다. 제자들을 강학하는 마루이다. 건물을 남으로 향하게 한 까닭은 행례(行禮), 즉 예를 행함에 있어 편하게 하고자 함이고, '재(齋)'를 서쪽에 두고 '헌(軒)'을 동쪽에 둔 것은 나무와 꽃을 심을 뜰을 마주하며 그윽한 운치를 숭상하기 위함이었다.
‘도산서당(陶山書堂)’은 이전의 계상서당(溪上書堂)이 좁고, 또 제자들의 간청이 있어 낙동강을 바라보는 도산 자락에 지은 서당인데, 도산서당이 완성된 뒤에도 퇴계는 계상서당과 도산서당을 왕래하였고, 만년에 이 서당에서 수많은 제자들을 길러냈다.
〈도산잡영(陶山雜詠)〉 ‘병기(幷記)’
퇴계는 1557년 쉰일곱 되던 해에 낙동강이 마주하는 도산의 남쪽 기슭에 땅을 구하고, 1558년 터를 닦고 집을 짓기 시작하여 1560년에 ‘도산서당(陶山書堂)’ 건물을 완성하였고, 이듬해에 그 옆에 서생들의 숙소인 농운정사(隴雲精舍)를 지었다. 그 내력을 〈도산잡영(陶山雜詠)〉 ‘병기(幷記)’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도산잡영(陶山雜詠)〉은 도산서당 터를 잡기 시작한 1557년(정사년) 3월부터 1566년(병인년)까지 지은 도산(陶山) 관련 시들 중 116수를 뽑아 엮은 것이다.
‘…내 애초에 퇴계 위에 터를 잡을 제, 시내를 굽어 집 두어 칸을 얽어서 책을 간직하고 마음 수양할 곳을 삼았으니, 대체로 이미 세 차례나 자리를 옮겼으나 문득 비바람에 헐리게 되었다. 또 시냇물의 위는 치우치게 고요하기는 하나 마음[襟懷]를 밝게 하고 넓히기에는 알맞지 못하기에, 다시금 옮길 것을 생각하여 도산(陶山)의 남쪽에서 이 땅을 발견하였다. 앞으로는 낙동강(洛東江) 들판을 굽어 그윽하기도 하고 고요하기도 하고 멀기도 하고 넓기도 할 뿐더러 바위와 멧부리가 가파르고 밝고 돌샘이 달고 차가우니, 선비가 수양하기에 알맞은 곳이었다. …
‘… 정사년(1557년)로부터 신유년(1561년)에 이르기까지 다섯 해 만에 집이 대략 이룩되었으니, 가히 깃들 만큼 되었다. 당(堂)이 모두 세 칸인데 그 중간에 든 한 칸은 ‘玩樂齋’(완락재)라 이름 하였으니, 이는 주자의 명당실기 중에 “즐겨 완상하여 족히 나의 일생을 마쳐도 싫음이 없으련다.”라는 말씀에서 취한 것이다. 동편 한 칸은 ‘巖棲軒’(암서헌)이라 이름 하였으니, 주자의 운곡시 중의 “스스로 믿으려도 오랫동안 못했기에 바위에 깃들어서 약간 효과 바라노라.”라는 말씀을 취한 것이다. 그리고는 또 합하여 ‘陶山書堂’(도산서당)이라 현판 하였다.
도산서당 앞 드나드는 곳에 싸리문을 닫았으니, 이를 ‘幽貞門’(유정문)이라 하였다. 서당의 안마당 동편에 조그마한 모난 못을 파고는 그 가운데에 연을 심고 ‘淨友塘’(정우당)이라 하였다. 또 그 동편이 ‘蒙泉’(몽천)이요, 몽천 위 산기슭을 파서 암서헌(巖棲軒)에서 마주 볼 수 있도록 평평하게 단을 쌓고는 그 위에다 매화[梅]⋅대[竹]⋅솔[松]⋅국화[菊] 등을 심고는 ‘節友社’(절우사)라 이름 하였다. … ’
— 2021년 1월 문화재청은 ‘도산서당’과 ‘농운정사’를 보물 2105호, 2106호로 각각 지정했다. 향교와 서원이 보물로 지정된 적은 있지만, 서당이 목록에 오른 건 처음이다.
유정문(幽貞門)
▶ ‘유정문(幽貞門)’은 도산서당 사립문이다. 《주역(周易)》 천택(天澤) 리괘(離卦) 구이(九二) 효사(爻辭)에 근거하고 있다. “가는 길이 탄탄하니 유인(幽人)이라 참고 있으면 길하다.(九二, 履道坦坦, 幽人貞吉)”에서 ‘幽人’(유인)을 취한 것으로, 선생이 조용히 도산에 은거하여 군자의 도(道)를 실현하겠다는 의지를 보인 것이다. 유인(幽人)은 자연 속에 은거하여 사는 사람을 말한다.
몽천(蒙泉)
▶ 퇴계 선생은 산골에 솟아나는 샘물을 보고 이곳에 서당의 터를 잡았다고 한다. 그 이름을 ‘몽천(蒙泉)’이라 했다. 서당 유정문 아래에 있는 ‘몽천(蒙泉)’은 《역경(易經)》 산수(山水) 몽괘(蒙卦)에서 취했다. 몽괘 구이(九二)의 효사는 “몽매한 사람을 포용하면 길하고 부인을 받아들여도 길하니 아들이 집을 담당할 수 있다.(九二, 包蒙, 吉. 納婦, 吉, 子克家)”이다. — ‘맑은 우물물을 마시고 몸과 마음을 정화하여 몽매함을 깨우치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몽매한 제자를 바른 길로 이끌어나가려는 스승의 마음가짐을 담은 샘물이며, 아울러 제자들로 하여금 산골의 한 방울 샘물이 강을 이루고 바다에 이르듯 끊임없이 정진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담긴 샘물이다. 퇴계 선생이 후학을 교육(敎育)하는 데 깊은 뜻을 두고 있다는 뜻이 함축되어 있다.
절우사(節友社)
▶ 퇴계 선생은 서당의 담장 밖, 개울 건너 산 아래 매화·대나무·소나무·국화를 심어 ‘절우사(節友社)’라고 불렀다. 산록의 빈 공간을 이용하여 절조(節操)를 상징하는 나무들을 심어 평소 군자(君子)의 덕(德)으로 상교(相交)하였던 것이다. 늘 마음의 따뜻한 눈길로 교감하며 벗하였으니 자연과 하나 되는 경지를 시(詩) 〈節友社〉(절우사)에서 다음과 같이 노래하고 있다.
松菊桃園與竹三 송국도원여죽삼 도연명의 동산은 송·국·죽 세 가지라
梅兄胡奈不同參 매형호내불동참 매화는 어찌하여 그 속에 못 들었나
我今倂作風箱契 아금병작풍상계 나 이제 그들과 풍상계를 맺었노라
苦節淸芬儘飽諳 고절청분진포암 굳은 절개 맑은 향기 너무나 잘 알기에…
— 〈도산잡영(陶山雜詠)〉 중에서
서당 서편에 기숙사를 지었다. 기숙사는 모두 여덟 칸인데, 재(齋)의 이름은 시습(時習)이요, 요(寮)는 ‘지숙’이라 하고 헌(軒)은 ‘觀瀾’(관란)이라 하여 합하여 ‘隴雲精舍’(농운정사)라 현판 하였다.
▶ 이렇게 선생은 집과 방, 우물, 연못, 화단, 사립문에 이르기까지 이름 하나 하나가 모두 선현의 말씀이나, 경전 등에 근거하여 선생의 깊은 뜻을 담은 것이다. 바로 퇴계의 학문 정진에 대한 경건함과 교육에 대한 열성이 담겨 있다.
* [퇴계 선생의 삶] *
‘毋不敬’(무불경)과 ‘愼其獨’(신기독) ― ‘경(敬)’으로 일관한 중용(中庸)의 삶
☆… 퇴계 선생은, 높은 벼슬을 하고자 학문(學問)을 하신 분이 아니다. 어쩔 수 없이 몇 차례 관직에 오르기는 했어도 내려진 벼슬을 대부분 사양하고 안동의 도산(陶山)으로 물러와 학문에 정진하면서 후학을 양성했다. 바른 마음으로 도산(陶山)에 은거하면서[幽貞門] 자신을 경(敬)으로 수양하고[冽井] 후학들을 교육하겠다[蒙泉]는 의지를, 이렇게 도산서당의 곳곳에 수놓고 있다. 퇴계 선생은 경(敬)을 수양의 추기(樞機)로 삼았다. 경(敬)을 실천하는 구체적인 원리와 방법은 《성학십도(聖學十圖)》에 아주 자상하게 개진하고 있다. 선생의 경(敬)은 ‘경건(敬虔)하게 집중(執中)하는 것’이다. 퇴계 선생의 경(敬)은 요·순의 윤집궐중(允執闕中)이요, 공자의 중용(中庸)에 해당한다.
《성학십도(聖學十圖)》는 1568년, 68세의 노학자 퇴계(退溪) 이황(李滉) 선생이 작성하여 선조(宣祖)에게 마지막으로 바친 소책자[箚子]이다. 17세의 어린 왕 선조를 성화(聖化)하기 위하여 군주가 갖추어야 할 성심(誠心)과 나라의 덕치(德治)를 위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요목 10가지를 뽑아 도표(圖表)와 함께 설명을 곁들인 책이다. 다음은 마음{心}과 경(敬)을 주제로 한 제8심학도이다. ― 사람의 마음[心]은 한 몸을 주재하고 경(敬)은 한 마음을 주재한다. 오직 한결같은 마음으로 지켜나가는 것이다.
퇴계 선생의 수도(修道)는 크게 세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가 ‘진리탐구’이다. 성현의 경전을 읽고 생각하고 체득하는 학문연구가 여기에 해당한다. 둘째는 ‘명상 수련’이다. ‘무불경(毋不敬)’의 마음과 ‘신기독(愼其獨)’의 자세로, 천명을 받아들이고 본성을 온전하게 보존하는 마음공부이다. 퇴계 선생은 마음의 수양뿐만 아니라 몸 또한 소홀히 하지 않았다. 하늘로부터 품부 받은 소중한 몸이니 잘 보양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퇴계 선생의 세 번째 수련이 스스로 심신의 기운과 활력을 도모하기 위해 생활화한 것이 ‘활인심방(活人心方)’이다.
퇴계 선생의 서거(逝去)
“저 매화[盆梅]에게 물을 주어라”
◎ 1570년(庚午) 12월 7일, (계상서당 병석의 선생이) 아들 적(寂)으로 하여금 제자 이덕홍에게 서적을 맡으라고 지시하였다. … 선생의 병세가 위중해서 제자들이 점(占)을 쳤는데, 주역(周易) 겸괘(謙卦)의 “君子有終”(군자유종)이라는 점사(占辭)를 받고 모두 실색하였다. (庚午十二月初七日 令寂言于德弘曰 ‘汝其司書籍’ 德弘聞命而退 與同門筮 得謙卦 ‘君子有終’之辭 金公富倫等 卽掩卷失色) — 艮齋先生文集 卷六 / 退溪先生言行通錄
◎ 1570년 12월 8일 이침, 퇴계 선생은 분매(盆梅)에게 물을 주라고 지시하였다. 유시(酉時, 오후 5~7시) 초에 누운 자리를 정돈하게 하고는 부축을 받고 일어나 앉아서 편안하게 서거(逝去)하였다. 이날 날씨가 맑았는데, 유시 초에 갑자기 흰 구름이 집 위에 몰려들더니 눈이 한 치 가량 내렸다. 퇴계가 서거하자 곧바로 구름이 걷히고 눈이 그쳤다. (庚午十二月初八日朝 命灌盆梅 … 酉時 靑天忽白雲坌集 宅上雪下寸許 須臾先生命整臥席 扶起而坐逝 卽雲散雪霽) — 艮齋先生文集 卷六 / 退溪先生言行通錄
— 鄭錫胎 편저 《退溪先生年表月日條錄》 권4 (사단법인 퇴계학연구원 퇴계학연구총서 제6집, 2006.3.30.) pp.654~655
장엄한 낙조(落照)
▶ 그런데, 한문학의 대가이며 역사-인문학 등에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전 고려대 김언종 박사는, 2019년 〈제1회 퇴계선생 마지막 귀향길 재현행사〉를 마감하는 강연회에서, 퇴계 선생의 임종(臨終)의 상황과 의미를 다음과 같이 갈파했다.
" 7일 제자 간재(艮齋) 이덕홍(李德弘)에게 서적 처리를 부탁했습니다. 이때 설월당(雪月堂) 김부륜(金富倫), 겸암(謙庵) 류운룡(柳雲龍), 간재(艮齋) 이덕홍(李德弘), 지헌(芝軒) 정사성(鄭士誠) 등 제자들이 주역의 괘를 뽑아 보았습니다. 겸괘(謙卦)가 나왔습니다. 겸괘의 괘사인 “君子有終”(군자유종)을 보고 모두들 실색(失色)했다고 합니다. … (그런데) 괘사 "군자유종"의 '종(終)'의 의미는 '죽음'이 아닙니다. 퇴계 선생의 서거는 "장엄한 낙조"입니다. 낙조(落照)는 끝이 아니라 내일의 찬란한 아침을 담보하는, 한 단락의 완성이자 새로운 시작인 것입니다. … "
이에 부연하여 이치억 박사는, 퇴계 선생의 서거는 삶의 끝이 아니라 삶을 마무리하는 것인 동시에 또 다른 시작점이 라고 말했다.
"죽음은 삶의 끝이나 생명의 단절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죽음은 삶을 마무리하는 것인 동시에 또 다른 시작점이다. 진실한 삶을 살지 못한 사람에게는 죽음은 모든 것이 허무로 돌아가는 일회성 사건이며 모든 관계와의 단절을 의미하겠지만, 위대한 삶을 살았던 인물에게는 한 개체로서의 인생의 마무리이며, 전체로서의 생명에는 새로운 시작이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죽음을 대하는 태도와 죽음을 맞이하는 모습에서 역설적으로 그 삶의 충실성을 엿볼 수 있다." (중략) …
"퇴계에게 삶의 마무리는 제자들에게 새로운 시작과 책임을 부여하는 커다란 사건이었다. 퇴계라는 이름으로 살아온 한 개인의 인생으로서의 '낙조(落照)'이지만, 그것은 후일 제자들과 후학들을 통해 다시 떠 오를 것이다. 그 성공여부는 제자들과 후학들에게 던져진 것이다. … 위대한 발자취를 우리가 경(敬)으로 따를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지금 이곳은 위대한 미래를 위한 새로운 출발이다."
"퇴계의 위대한 발자취를 따른다는 것은, 그 진정한 의미는 퇴계의 정신과 그가 추구한 길[道]을, 시간의 현격을 극복하고 다시 오늘날에 되살리는 데 있다고 생각한다. … '사람이 길을 넓힐 수 있는 것이지, 길이 사람을 넓혀 주는 것이 아니다.(人能弘道 非道弘人)'라고 한 공자의 말처럼, 퇴계의 길[道]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가 넓혀야 하는 임중도원(任重道遠)의 숙제로 주어진 것이다. …" ― 이치억 집필, 이광호 외 지음 《퇴계의 길에서 길을 묻다》 (푸른역사, 2021) p. 294~296
☞ [퇴계(退溪) 선생의 유종(有終)] — 겸덕(謙德), 그 생사일여(生死一如)의 경지
퇴계(退溪) 선생의 병환이 위중한 상태에서, 제자들이 주역(周易)의 점(占)을 쳐보았더니, 겸괘(謙卦)의 괘사 ‘君子有終’(군자유종)이 나왔다. 제자들은 모두 얼굴이 사색(死色)이 되었다. ‘君子有終’이 나왔으니, 이제 곧 운명(殞命)하실 거라는 판단에서다. 그러나 퇴계 선생의 모습은 지극히 편안하고 따뜻했다. 살아서 겸덕(謙德)을 다한 군자의 모습은 죽음의 순간에도 편안하고 자연스러웠다. 생사일여(生死一如)의 경지가 되었기 때문이다. 매화에게 물을 주라는 그 여유도 여기에서 나온 것이 아닐까.
"근심 가운데에 즐거움이 있고 즐거움 가운데에 근심이 있었네. 조화를 타고 일생을 마치니 다시 또 무엇을 구하리오?(憂中有樂, 樂中有憂. 乘化歸盡, 復何求兮?)” 퇴계(退溪) 이황(李滉) 선생이 스스로 지은 묘갈명(墓碣銘)의 마지막 구절이다. 스스로를 잊고 음양(陰陽)의 조화에 따라 자연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마음이다. 세계와 삶에 대한 겸덕의 높은 경지이다. ―필자의 생각이다.
도산서원
◎ 1561년(명종 16)에 우선 ‘도산서당(陶山書堂)’을 완성하여 제자들과 강학을 하였고, 도산서원(陶山書院)은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1570) 선생 사후 6년 뒤인 1576년에 완공되었다. 1570년 퇴계 선생이 돌아가시자, 1572년에 도산서당의 뒤쪽 산록에 선생의 위패를 모실 상덕사(尙德祀)를 짓기로 결정하였다. 2년 뒤 지방 유림의 공의로 사당을 지어 위패를 봉안하였고, 전교당(典敎堂)과 동재[博約齋]와 서재[弘毅齋]를 지어 서원으로 완성했다. 전교당(典敎堂, 보물 제210호)은 도산서원의 강당(講堂)으로 선조(宣祖) 7년(1574년)에 건립되었다. 1575년(선조 8년)에 ‘陶山書院’(도산서원)으로 편액을 하사 받음으로써 사액서원으로서, 영남 유학의 총 본산이 되었다. 현판 글씨는 한석봉(韓石峯)이 임금 앞에서 직접 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사당인 ‘尙德祀’(상덕사, 보물 제211호)와 사당 일곽 출입문인 '내삼문(內三門)', 그리고 사당 주위를 두른 토담은 모두 ‘도산서원 상덕사와 정문 및 사방의 토담’[陶山書院尙德司附正門及四周土屛]이란 명칭으로 1963년 보물 제211호로 지정되었다. 1615년(광해군 7년), 사림이 선생의 최측근 제자인 월천(月川) 조목(趙穆, 1524-1606년)을 사당에 종향(從享)했다. — 도산서원은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 당시에도 훼철되지 않고 존속한 47개 서원 중의 하나이다.
◎ 도산서원은 2019년 7월 6일, 제43차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에서 16~17세기에 건립된 다른 8개 서원과 함께 오늘날까지 한국에서 교육과 사회적 관습 형태로 지속되어온 성리학과 관련된 문화적 전통의 증거이며 성리학 개념이 여건에 맞게 바뀌는 역사적 과정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탁월한 보편적 가치를 인정받아 '한국의 서원(Seowon, Korean Neo-Confucian Academies)'이라는 이름으로 한국의 14번째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이날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우리나라 9개 서원은 풍기 소수서원(1543년 건립), 함양 남계서원(1552년), 경주 옥산서원(1573년), 안동 도산서원(1574년), 장성 필암서원(1590년), 달성 도동서원(1605년), 풍산 병산서원(1613년), 정읍 무성서원(1615년), 논산 돈암서원(1634년)이다.
도산서원 전교당(典敎堂)과 뜰을 가득 메운 재현단과 선비단
▶ 도산서원 전교당(典敎堂)으로 들어가는 정문은 ‘進道門’(진도문)’이다. ‘참다운 진리를 찾아 들어가는 문’이라는 뜻이다. 서원의 강학 공간인 경내로 들어가는 출입문이다. 진도문에 들어서면, 정면에 강당인 전교당이 보이고 우측에는 동재인 박약재, 자측에는 서재인 경의재가 자리하고 있다. 그리고 진도문 좌우에는 서고인 동-서이 광명실이 있다. 귀향길 재현단과 선비단은 진도문을 지나 도산서원 내정에 들어갔다. ― 전교당에서는 선비단이, 마당에는 귀향길 재현단과 도산서원선비문화수련원 지도위원들이 마주 보고 서서 경건하게 상읍례를 올렸다.
도산서원 상덕사(尙德祠)
고유제(告由祭)
▶ 모든 재현단 일행을 비롯하여 명사와 유림은 조용히 도산서원(陶山書院) 경내로 들어섰다. 선생 생전의 강학공간인 도산서당과 농운정사를 지나, 서원의 정문인 진도문에 들어서면 서원의 강학공간이다. 선비들이 전교당에 올라 도열하고 동재와 서재 사이의 마당에도 많은 인사들이 자리 잡고 도열했다. 엄숙한 고유제를 준비하기 위해 재현단과 유림은 의관을 정제하고 전교당과 서원의 마당에서 옷깃을 여미고 마음을 가다듬었다.
선생의 위패를 모신 상덕사(尙德祠)에서 귀향길 재현단의 고유제(告由祭)가 향사 절차에 따라 엄숙하고 정중하게 거행되었다. 이철우 경상북도 지사가 고유했다. 진주의 허권수 박사가 고유문을 짓고 유림 대표가 곡진한 목소리로 고유문(告由文)을 대독했다. 절차에 따라 고유제를 마치고 전교당에 다시 좌정하여 제향 후의 강연과 덕담을 나누었다.
도산서원 전교당 강담회
▶ 전교당에 많은 인사들이 자리하고 마당에도 많은 사람들이 서서 강담회(강담회)를 경청했다. 이 자리에서 퇴계 선생 영전에 올린 고유문(漢文)을 전 동양대 권갑현 교수가 우리말로 번역한 내용을 낭독하였다. 다음은 허권수 박사가 근찬(謹撰)한 상덕사 고유문(告由文)이다. 퇴계 선생을 숭모하는 정이 절절하다.
歲壬寅第三回遵行退溪先生歸鄕路行畢後告由文
(임인년 제3회 퇴계선생 귀향길을 따라 다 걸은 뒤 고유(告由)하는 글)
維歲次壬寅三月甲申朔 유세차 임인(2022)년 삼월 갑신삭
十七日庚子慶尙北道 십칠일 경자에 경상북도지사 이철우는,
知事李哲雨敢昭告于 선사 퇴도 이 선생에게 감히 밝게
先師退陶李先生之靈. 고하나이다.
伏以, 엎드려 생각하나이다.
猗歟先生 (의여선생) 훌륭하시도다! 선생이시여,
吾邦儒宗 (오방유종) 우리나라의 으뜸 되는 선비이십니다.
學德冠世 (학덕관세) 학문과 덕행은 세상에서 첫째 가시니,
誰不敬從 (수불경종) 누가 존경하며 따르지 않겠습니까?
七十而化 (칠십이화) 일흔이 되도록 계속 발전하시어,
幾詣聖域 (기예성역) 거의 성인의 경지에 나가셨습니다.
仰之彌高 (앙지미고) 우러러 볼수록 더욱 높아,
北斗泰岳 (북두태악) 북두칠성이나 태산 같습니다.
不求聞達 (불구문달) 이름 나고 출세하기를 구하지 않고,
天爵是培 (천작시배) 도덕을 키워나갔습니다.
欲孝赴擧 (욕효부거) 효도하고자 하여 과거에 응시해 본 것이지,
豈望鼎台 (기망정태) 어찌 정승에 이르기를 바랐겠습니까?
時奸盈朝 (시간영조) 그 때 간신이 조정에 가득하였고,
士禍荐疊 (사화천첩) 사화는 거듭거듭 일어났습니다.
章甫首鼠 (장보수서) 선비들은 눈치 보기에 바빴고,
道學絶跡 (도학절적) 도학은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先生堅志 (선생견지) 선생께서는 뜻을 굳게 하셔서,
治經修德 (치경수덕) 경전을 공부하시고 덕을 닦으셨습니다.
窮格不息 (궁격불식) 궁리하고 연구하시기 멈추지 않으셔서,
乃蘇聖學 (내소성학) 성인의 학문 다시 살려내셨습니다.
四朝帷幄 (사조유악) 4대에 걸쳐 경연에서 강의하셨기에,
國王特倚 (국왕특의) 임금들이 특별히 의지하셨습니다.
歸鄕輒召 (귀향첩소) 고향에 돌아오시면 곧바로 불렀는데,
奏疏屢辭 (주소루사) 여러 번 상소 아뢰어 사양하셨습니다.
非果忘世 (비과망세) 과감하게 세상을 잊은 것은 아니었고,
硏敎最樂 (연교최락) 연구하고 가르치기를 가장 즐거워하셨습니다.
喜探蘊奧 (희탐온오) 담긴 깊은 내용을 탐구하기 좋아하시어,
藏修泉石 (장수천석) 산수 속에서 뜻을 오로지하여 공부했습니다.
獻圖導學 (헌도도학) 「성학십도」 바치시어 학문으로 인도하였고,
六條示治 (육조시치) 「무진육소」로 정치가 무언지 보여주었습니다.
國之蓍龜 (국지시구) 나라의 법도가 되는 분이었고,
儒林首位 (유림수위) 유림에서 으뜸가는 어른이었습니다.
立朝無施 (입조무시) 조정에 계시면서 아무 시행되는 일이 없자,
要歸林壑 (요귀임학) 초야로 돌아가려고 했습니다.
出處大節 (출처대절) 벼슬에 나갈 것이냐 물러날 것이냐의 큰 기준,
義時是適 (의시시적) 의리와 때에 맞추었습니다.
上章乞骸 (상장걸해) 상소하여 고향에 돌아가길 빌었나니,
決意已確 (결의이확) 결심은 이미 확고했습니다.
穆陵屢挽 (목릉루만) 선조 임금이 여러 번 말리다가,
竟許釋爵 (경허석작) 마침내 벼슬에서 풀어 주었습니다.
歸養陶山 (귀양도산) 도산으로 돌아와 수양하면서,
誨撰不輟 (회찬부철) 가르치고 시문 짓기 그치지 않았습니다.
覿德聞風 (적덕문풍) 그 덕행을 보고 소문을 들은,
多士來質 (다사래질) 많은 선비들이 와서 물었습니다.
養成後學 (양성후학) 후학을 양성하여,
道有傳脈 (도유전맥) 도학에 전해지는 맥이 있게 되었습니다.
著書立說 (저서입설) 책을 짓고 학설을 펼쳐,
裕後不歇 (유후불헐) 후세에 도움주기를 마지 않았습니다.
先生倡導 (선생창도) 선생이 앞장서 부르짖어 이끄시어,
吾邦有學 (오방유학) 우리나라에 학문이 있게 되었습니다.
世世相承 (세세상승) 대대로 서로 이어서,
稍昇國格 (초승국격) 점점 나라의 격이 높아져갔습니다.
一臥遊岱 (일와유대) 한번 몸져눕자 저 세상으로 가시니,
儀形永邈(의형영막) 그 풍모 영원히 아득하게 되었습니다.
著作留世(저작류세) 지은 글들이 세상에 남아 있기에,
訓語可接(훈어가접) 가르침의 말씀 접할 수 있습니다.
惠賜旣洽 (혜사기흡) 은혜롭게 내려주신 것 이미 흡족하여,
鄙等蒙澤 (비등몽택) 저희들이 그 혜택 입고 있습니다.
何日敢忘 (하일감망) 어느 날 감히 잊겠습니까?
務遵道脈 (무준도맥) 도의 맥을 힘써 쫓고자 합니다.
先生之道 (선생지도) 선생의 도는,
做人之道 (주인지도) 사람 되는 도리이고,
先生之道 (선생지도) 선생의 도는,
淑世之道 (숙세지도) 이 세상 깨끗하게 하는 도리입니다.
至於叔季 (지어숙계) 말세에 이르니,
乃量其値 (내량기치) 그 가치 헤아릴 수 있겠습니다.
眞珍在玆 (진진재자) 참된 보배가 바로 여기에 있는데,
不識何愧 (불식하괴) 알지 못 한다면, 얼마나 부끄러운 일입니까?
癘疫雖熾 (려역수치) 전염병이 비록 기세 부리지만,
焉絆吾足 (언반오족) 어찌 우리들의 발 묶을 수 있겠습니까?
每歲遵行 (매세준행) 해마다 선생의 길을 따라 걷는데,
誓永矜式 (서영긍식) 길이 공경하여 법도로 삼고자 맹세합니다.
步到院庭 (보도원정) 걸어서 서원 뜰에까지 이르렀으니,
虔告歷程 (건고역정) 지나온 길의 사정 경건하게 고해야지요.
焚香再拜 (분향재배) 향을 불사르고서 두 번 절하노니,
靈其鑒情 (영기감정) 영께서는 이런 사정 살펴 주시기 바랍니다.
洋洋降格 (양양강격) 여유 있게 강림하시어,
茂賜眞詮 (무사진전) 참된 가르침 많이 내려 주시기를.
敬遵正路 (경준정로) 삼가 바른 길을 따르고자,
晝宵惓惓 (주소권권) 밤낮으로 정성 다 쏟겠습니다.
後學 許捲洙 敬撰 (후학 허권수 경찬) 후학 허권수 공경하는 마음으로 짓습니다.
▶ "… 은혜롭게 내려주신 것 이미 흡족하여 저희들이 그 혜택 입고 있습니다. 어느 날 감히 잊겠습니까? 도(道)의 맥을 힘써 쫓고자 합니다. 선생의 도(道)는 사람 되는 도리이고, 선생의 도(道)는 이 세상을 깨끗하게 하는 도리입니다." ― 고유사의 내용은 구구절절이 후학들의 진솔한 마음이었다. 정중하면서도 심금을 울리는 내용이었다. 고유문 낭독이 끝나고 나서, 김병일 원장이 제3회 퇴계선생 마지막 귀향길 재현행사가 원만하고 성대하게 이루어진 데 대해 감사의 말씀을 하면서 강담회를 마감했다.
▶ 강담회를 마치고, 고유문을 근찬한 허권수 박사를 비롯한 제위를 모시고 기념 촬영을 했다. ㅡ 아래 사진은 우측에서부터 문영동 박사, 김승종 시인, 김언종 박사. (퇴계선생 차종손 이치억 박사의) 아들, 허권수 교수, 안미정 교수, 김순종 님, 권갑현 교수 그리고 필자이다.
[도산서당] — 경과보고 및 좌담회
퇴계선생 마지막 귀향길 재현행사 최종 마무리
▶ 전교당에서 강담회를 마치고, 오늘 고유제에 참석한 모든 분들이 도산서당에 내려와 〈도산십이곡〉전 12곡을 제창한 뒤, 이철우 경북지사의 축하와 격려의 말씀을 들었다. 그리고 홍덕화 전 연합통신 부국장이 지난 귀향길 14일간의 여정을 요약하여 경과보고를 했다.
▶ 그리고 김병일 도산서원 원장을 비롯한 중심인사들이 도산서당 마루에 좌정하여, 좌담회를 갖고 2022년 올해의 귀향길 재현행사에 대해 진지하게 의견을 개진했다. 귀향길 700리 전 구간을 의관을 정제하고 시종일관 선두에서 걸어온 이한방(李翰邦) 교수의 사회로 진행 되었다. 좌담회에서 귀향길 재현행사의 의의와 앞으로 발전적인 방향에 대하여 심도있는 의견을 나누었다. 이날 마무리 좌담회 자리에는 김병일 귀향길 재현단장을 비롯하여 전 경상대 허권수 박사, 전 안동문화원장 이동수 박사, 전 고려대 김언종 박사, 문영동 박사, 동양대 강구율 교수, 권갑현 교수 등과 유림 종손 여러분이 자리하였고, 특히 퇴계선생 16대 종손이신 이근필 선생께서 나와서 격려사를 하고, 구십 노구에도 끝까지 자리를 지키며 모든 발언자의 말씀을 경청했다.
[에필로그] — 퇴계 선생 귀향길 700리 종주를 마치고
도산서당·도산서원 — 조선 성리학의 요람
우리나라에 유교가 전래된 것은 삼국시대부터라고 할 수 있으나 신유학 즉 성리학(性理學)이 전래된 것은 13세기 말엽이라고 할 수 있다. 고려 충렬왕 15년(1289년) 안향(安珦, 1243~1306)이 원나라에 가서 《주자서(朱子書)》를 얻어 베껴오고 공자와 주자의 진상을 모사하여 돌아온 후, 《주자서(朱子書)》를 강함으로써 성리학이 비로소 우리나라에 전해지게 되었다. 그 후 백이정(白頤正, 1247~1323년)은 충선왕을 따라 연경에 머물면서 정자와 주자의 성리학을 배워서 전하였으며, 우탁(禹倬, 1263~1342)은 정주(程朱)의 《역전(易傳)》을 해독하여 이를 강독하면서 ‘역동선생(易東先生)’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고려 말에는 포은 정몽주(鄭夢周, 1337~1392)가 성리학 유포에 크게 힘써서 ‘동방이학의 시조’로 추앙받았으며 권근(權近), 정도전(鄭道傳)으로 계승되면서 성리학의 기초가 형성되었다. 조선조에 들어 길재(吉再), 김숙자(金叔滋), 김종직(金宗直), 김굉필(金宏弼), 조광조(趙光祖) 등의 학맥을 통하여 성리학은 더욱 발전하였다. 조선 초기의 성리학은 현실적인 면에서 수신(修身)과 치국(治國)의 실현에 힘을 기울였고, 조광조에 와서는 지치주의(至治主義) 유학으로 나타났던 것이다.
그러나 성리학(性理學)에 대한 본격적인 철학적인 탐구는 조선 중엽부터 이루어졌다. 기묘사화를 계기로 성리학자들은 산수 간에 묻혀 학문을 집중하여 성리를 탐구하게 된 것이다. 회재 이언적(李彦迪)을 거쳐 퇴계(退溪) 이황(李滉)에 이르러 조선의 성리학은 그 절정을 이루게 된다. 퇴계 이황은 성리학의 세계를 확고하게 구축하였으며, 성자적인 삶을 통하여 만인의 사표(師表)가 되었다. 그리고 모든 사람에게 참다운 삶의 길을 열어 주었다. 도산(陶山)은 바로 조선 성리학(性理學)의 요람이다.
특히 퇴계는 자연(自然)에 귀의하여 자연과 물아일체가 됨으로써 성리(性理)를 궁구하고 본성(本性)을 체인하고자 하였다. 퇴계에게 자연(自然)은 순수한 풍류의 대상이었을 뿐만 아니라, 천리(天理)를 체득하고 심성을 존양하는 철학적인 공간으로 인식하였던 것이다. 그 중심에 ‘도산서당’이 있다.
퇴계 선생은 1569년 4월에 도산(陶山)에 돌아와서 1년 9개월 후, 1570년 12월에 세상을 떠났지만, 생애를 통하여 오직 세상에 착한 사람이 많아지기를 소원하며 학문에 정진하고 공경하는 마음으로 살았다. 이를 위해 '나아감보다는 물러남'을 통하여 끊임없이 자신을 수양하고, 학문 연구와 후학 양성에 힘쓴 것이다.
“퇴계의 길에서 길을 묻다”
— 퇴계선생 마지막 귀향길 재현행사의 주제
▶ 우리가 추구하는 ‘퇴계의 길’은 그야말로 ‘퇴계의 학문과 사상’[道]을 집약한 말이고 ‘길을 묻다’의 ‘길’은 선생의 길[道]을 추구하는 ‘우리의 삶의 지향[道理]’이다. 평생, 퇴계의 길을 추구하며 성심으로 정진하고 있는 이광호 박사는 ‘퇴계의 길’을 ‘도학(道學)’으로 규정하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황에게서 진리는 인간사유가 만든 관념이 아닌 우주자연의 뿌리이며 생명과 가치의 근원으로 영원한 것이었다. 인간의 마음은 이와 같은 진리를 담고 있는 모든 인간의 삶의 주인이었다. 이황의 삶은 진리와, 진리가 담긴 인간의 심성을 밝히기 위한 힘들면서도 즐거운 구도(求道)와 득도(得道)의 여정이며 낙도(樂道)와 전도(傳道)의 삶이었다. 이황의 학문과 삶에는 영원한 진리를 향한 끊임없는 염원과 사랑, 그리고 헌신이 담겨 있다.” — 이광호 옮김, 성호 이익·순암 안정복 엮음 《李子粹語(이자수어)》해제, (예문서원, 2010.06.15.) p.13
▶ 올해로 3회째를 맞은 퇴계 선생 귀향길 재현행사는 경복궁에서 안동 도산서원에 이르는 700리 구간 곳곳에 남아 있는 선생의 삶과 정신을 배우고 선생의 귀향 당시 마음을 되새기며 ‘오늘날 우리 사회에 참다운 삶의 길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선생은 “이제 자연의 조화를 타고 돌아가려니, 나는 다시 무엇을 구하겠는가.” 했다. 퇴계 이황 선생은 끝까지 천인합일(天人合一)의 세상을 추구한 성자(聖者)였다.
▶ 지난 4월 4일(음력 3월 4일) 453년 전 퇴계가 한양의 도성을 떠나는 날, 2022년 우리도 같은 날 경복궁을 출발하여 남양주, 양평, 여주, 충주, 단양, 풍기, 영주를 거쳐 매일 평균 25km 이상을 걸어서, 14일 만인 4월 17일(음력 3월 17일)에 도산서당(서원)에 도착했다. 필자를 비롯한 퇴계선생 마지막 귀향길 재현단은, 퇴계의 길을 따라 몸과 마음을 다하여 걸음걸음마다 선생에게 길을 물으며 걸었다. ‘높은 산을 우러러 공경하는 마음으로 그 길을 걸어온 것이다.(高山仰之 景行行之)’
퇴계 선생이 선조 임금의 간절한 만류에도 불구하고 ‘물러남의 길’을 택한 것은 선생께서 평생 염원한 '선인다(善人多)', 즉 착한 사람이 많아지기를 바라는 것이었다. 그러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 도산으로 돌아가 사람의 도리를 다하고, 인격적으로 아름다운 사람, 참다운 선비(지도자)를 길러내기 위함이었다. — 오늘날 세상이 어지러워지는 원인은 수신(修身)이 안 된 사람이 ‘기를 쓰고 나아가’ 정치(政治)에 관여하기 때문이다. 평생 유학의 진리를 추구하며 ‘한마음’ 실천을 강조한 이기동 박사가 말했다.
“자기를 닦아서 자기를 바르게 하는 것이 정치의 시작이고, 사람을 가르쳐서 모든 사람을 바르게 하는 것이 정치의 완성이다.” — 이기동 지음 《유학 오천 년》 (전5권) 제1권 (성균관대학교 출판부, 2022.06.30.) p.242
▶ ‘코로나19’로 인해 잠시 중단되었던 '퇴계선생 귀향길 재현행사'가 지난 4일 경복궁을 출발하여 오늘 17일 안동 도산서원에 도착하여 14일 간의 긴 여정을 이렇게 마무리했다. 퇴계 선생 귀향길은 선생의 정신과 가르침을 체득해 나가는 길이라는 점 외에도, 사람마다 자신의 참다운 마음을 생각하며 걷는 길이요, 하늘과 땅 그리고 사람이 하나가 되는, 장중하고 아름다운 여정이다. ‘도산으로 가는 길’은 저 ‘산티아고 가는 길’처럼 자연(自然)과 인문(人文)을 아우르는, 우리나라의 걷기문화의 새로운 코스[노정]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힘들지만 즐겁고, 마음 충만한 구도(求道)의 길이기 때문이다.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