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의 재 성육신에 이르는 열다섯 가지 강령
1. 기독교는 종교적인 모임이 아니라 삶의 방식이다
2. 지금은 “성당-회당 시스템”을 변화시킬 때다
-----> 역사적인 정통 로마 카톨릭은 4세기에 콘스탄티누스 대제 이후로,
두 가지 요소에 바탕을 둔 종교적 시스템을 개발하고 채택했다.
그 두 가지 요소 중 하나는 구약시대의 성전을 기독교적으로 변형시킨 성당이고,
또 하나는 유대교 회당 예배를 따로 만들어진 예배 유형이다.
3. 제3의 종교개혁
-----> 루터는 이신칭의의 복음으로 제2의 종교개혁을 하였다.
이제 제3의 종교개혁, 곧 교회의 구조개혁을 시작해야 한다
4. 교회 건물에서 가정교회로
-----> 신약시대 이후로 “하나님의 집” 같은 것은 없었다.
스데반은 순교를 각오하고, 하나님은 사람의 손으로 만든 성전에 거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상기시켰다.
하나님의 백성이 교회다.
5. 교회는 크게 성장하기 위해 오히려 작아져야 한다
-----> 오늘날 대부분의 교회는 깊은 교제를 나누기에는 너무 커졌다.
신약의 교회는 그 수가 15~20명 정도에 이르면, 유기체 세포처럼 세포 분열을 통해 “옆으로” 배가했다.
6. 교회는 목사 혼자 이끌 수 없다
-----> 지역의 가정교회들은, 혈액이 순환하듯 장로들과, “이 가정에서 저 가정을 오가는” 다섯 가지 사역을 맡은 구성원
(사도, 선지자, 목사, 복음전도자, 교사)의 연합에 의해 하나의 운동으로 네트워크화 된다.
7. 제대로 된 퍼즐 조각을 가지고도 퍼즐을 잘못 맞출 수 있다
-----> 이제까지 우리는 두려움 때문에, 혹은 전통 때문에, 혹은 종교적 질투심으로 인해,
혹은 권력-통제의 사고방식 때문에 그 조각들을 잘못 맞추어 왔다.
8. 관료적인 성직자의 손을 벗어나 만인 제사장직으로
-----> 콘스탄티누스 대제 이후로 시작되어 점점 심화된 교회의 전문화는,
하나님의 백성을 유아적인 평신도와 전문적인 성직자로 나누고,
교회 안에 권력지향적인 사고방식을 심고 피라미드 구조를 고착화시키는 등, 오랫동안 교회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9. 조직화된 형태에서 유기적 형태의 기독교로
-----> 유기적인 면을 최소화하고, 조직적인 면을 극대화시킨 현재의 교회 구조는,
조직적인 면은 극소화하면서, 유기적인 면을 극대화하는 구조로 바뀌어야 한다.
10. 우리의 예배를 예배하는 데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데로
-----> 거룩한 사람들이 거룩한 날, 거룩한 시간에, 거룩한 장소에서,
거룩한 옷을 입은 성직자가 인도하는 거룩한 예식에 참여하기 위해 정기적으로 모이는 것이,
바로 대부분의 현대 교회의 모습이다. 이와 같이 정기적으로 행해지는 의식 행위 중심의 예배는,
조직화된 달란트와 행정적인 관료들, 경직되고 전통적인 형식을 요한다.
경제적인 면에서 볼 때 이러한 예배는, 투자는 많이 하는데 그 수익은 미미한 구조다.
11. 사람들을 교회로 데리고 오는 대신 교회를 사람들에게로
-----> 교회가 자발적인 배가를 통해 아직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영역들 속으로 번져갈 때 그 사명을 이룰 수 있다.
12. 진짜 만찬으로서의 주의 만찬을 회복하라
-----> 주의 만찬은 심오한 의미를 지닌 상징적인 만찬이었다기보다는, 상징적인 의미를 가진 실제적인 만찬이었다.
13. 교단에서 도시 차원의 대집회로
-----> 초대교회는, 지역 사회 안의 이웃과 삶을 나누는 가정교회였다.
이들은 공동체적 정체성을 가지고, 도시 차원의 혹은 지역 차원의 대집회를 위해 가능한 자주 모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14. 박해에도 요동치 않는 영성을 개발하라
-----> 그리스도인들이 다시금 신약 성경의 삶의 표준대로 산다면,
예를 들어 죄를 죄라고 말 한다면, 언제나 그러했듯이 세상은 회개하고 돌이키든지, 아니면 교회를 박해하든지,
둘 중 하나의 반응을 할 것이다.
15. 교회는 가정으로 돌아가야 한다
-----> 기독교는 종종 자신의 영적인 패배의 장소일 수 있는 가정을 도외시했다.
그리고 현실의 삶과 동떨어진 거룩한 성전 안에 인위적인 예배 의식을 갖추어 놓았다.
하나님이 가정을 다시 회복시키실 때 교회는 그 뿌리로, 다시 말해 교회가 생겨난 곳으로 돌아가게 된다.
제 1장. 교회의 재창조
기독교 역사상, 우리 시대만큼 교회가 전 세계적으로 두드러지게 성장한 적은 없었다.
최근에 행해진 한 통계 조사에 의하면, 매주 전 세계 2천~3천 개의 교회가 새롭게 세워지고 있다고 한다.
피터 와그너와 랄프 윈터에 의하면, 전세계 복음주의 교회들은 그 교인 수가,
1974년에 1억 5천만 명에서 1998년에는 6억 5천만 명으로 성장했으며,
이는 오늘날 이 지구상에서 가장 빨리 성장하는 소수 그룹이라고 한다.
그러나 승리의 찬가를 부르는 이와 같은 흥분의 시대에 어떤 그룹들은,
“우리가 아는 대로의 교회”에 대한 불만족과 좌절을 겪어, 이 역시 어떤 한 지역의 문제가 아닌 전 세계적인 문제가 되고 있다.
우리는 날마다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께로 돌아오는 것에 대해 듣고 또 기뻐한다.
그러나 그들 중 몇 명이 지역 교회의 일원이 되고 있는지에 대한 이야기는 잘 듣지 못한다.
그들은 분명 복음 전도를 듣고 감화를 받았지만, 삶의 변화에 이르지는 못했다.
선교의 위기는 곧, 교회의 위기다. 교회가 재창조 될 때, 선교 역시 새로운 부흥의 전기를 맞게 될 것이다.
교회가 그 사도적, 선지자적 성격을 회복할 때 이웃과 민족들을 변화시키고, 그들을 제자로 삼는 하나님의 도구가 될 수 있다.
로마 카톨릭의 교회 시스템은 제단을 갖추고, 유향을 태우고, 일반 백성과 제사장들의 영역을 구분 짓는,
구약적인 성전 중심의 예배 유형들과 매우 비슷했다. 루터는 복음의 내용은 개혁했지만, ‘예배’의 기본구조는 바꾸지 않았다.
이후에 이 종교개혁적-로마 카톨릭적-유대교적 예배 유형 위에 침례교는 침례를 베풀었고,
오순절 교회는 성령의 기름을 부었으며, 이단들은 이것을 왜곡시켰고, 은사주의 운동은 갱신했으며,
구세군은 제복을 입혔고, 퀘이커 교도들은 드라이클리닝을 했다.
그러나 이 모든 시도에도 불구하고, 급진적으로 달라진 것은 전혀 없었다.
‘예배’는 여전히 본질적으로 보이기 위한 공연이요, 청중 지향의 미사였으며, 많은 경우 형식적이고 의식적인 종교 행사였는데,
여기서 다수의 구경꾼과 소비자들은, 소수의 종교전문가들이 자신들을 위해 그리고 자신들과 함께 공연하는 것을 구경할 뿐이었다.
따라서 제3의 종교개혁은, ‘교회의 구조개혁’이라 할 수 있다.
각 문화 안에는 유기체와 조직체를 비공식적인 것과 공식적인 것,
즉흥적인 것과 의식적인 것으로 나누는 아주 중요한 수적인 선이 있다. 나는 이것을 ‘20명’ 장벽이라고 부른다.
20명은 공식적이거나 조직적일 필요가 없는, 유기적이고 비공식적인 가족이라고 느낄 수 있는 최대 인원이기 때문이다.
만일 유기체가 ‘20명’장벽을 넘어선다면, 더 이상 유기체로 남아 있을 수 없게 된다.
일이 공식화되기 시작하고, 심지어 준비된 일정을 따라야 할 필요를 느끼기도 한다.
관계와 의사소통의 효율성은 점점 떨어지고, 모임을 이끌 누군가에 대한 필요성이 점점 커진다.
결과적으로 가정교회는 원래의 매력을 잃어버리고, 그 가치는 변질되고, 처음과는 완전히 다른 동력을 개발하기 시작한다.
우리는 “큰 것이 아름답다”는 말에 속고 있지는 않은가?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의 사고 체계 속에서 ‘0’자를 지워 버려야 할지도 모른다.
그렇게 할 때 교회는 평균적으로 8-10명, 혹은 12명 정도, 대형교회는 15명 정도,
그리고 ‘초대형 교회’는 수천 명의 출석 인원을 자랑하는 대신 21명, 22명 정도의 규모가 될 것이다.
세계적으로 교회의 평균 크기는 약 100명 정도다. 극소수의 교회들만이 200명 이상이고, 많은 교회들이 40-60명 정도이다.
독일의 루터 교회의 주일 아침 평균 출석수는, 1993년을 기준으로 할 때 23.5명이었다.
성경에서 우리는 셀과 대집회를 찾아볼 수 있다.
신약성경에서 우리는, 가정에서 정기적으로 모이는 셀 단위의 교회에 대해 읽는다.
그리고 솔로몬의 성전 뜰이나 옥외에서,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모임에 대해서도 읽는다.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자기 자신을, 가정 안에 있는 교회와 동일시 하셨다.
예수님은 성경 그 어느 곳에서도, "기독교 회당"을 만들거나 종교적인 건물을 지으라고 말씀하지 않으셨다.
교회사 학자들에 따르면, 주후 첫 3세기 동안은,
그리스도인들이 자신들의 새로운 삶을 함께 공유하는 보편적이고도 자연스러운 방식은, 가정교회였다.
교회 구조에 혁명적인 변화가 일어난 것은, 4세기에 로마의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기독교를 공인한 때를 그 기점으로 한다.
회중교회 형태가 도입되었다. 교회는 청중이 되었고, 가정교회는 주변부로 밀려나면서 결국은 금지되었다.
회중교회(20-200명 정도의 중간 크기의 규모)는 서도들이 교제할 수 있는 가능성이 매우 제한되어 있고,
전문적인 성직자들을 가지고 있다.
이 교회는 국가의 요구에 부합하는, 그리고 동시에 세상의 종교적 패턴에 손쉽게 들어맞는 하나의 정치적 해법이었다.
이 새로운 회중적 구조는 국가와 교회법에 의해서 엄청나게 강화 되었다.
그 결과 교회 역시 새로운 구조에 맞게 바뀌도록 강요되었다.
질이 구조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형식이 질을 결정하는 구조가 되어 버렸다.
그 결과 교회 안에 왕과 같은 주교나 교황을 상위에 두고, 그 아래로 교회 사찰과 피아노 반주자에 이르기까지,
계급적인 권력 구조가 들어섰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의 교제는 미미해지고, ‘교제가 없는 공동체’가 생겨나게 된 것이다.
“제2의 종교개혁”이라는 책에서, 미국의 선교사이자 저술가인 빌 베컴은,
회중, 즉 그가 명명하듯 ‘성당 식의 교회’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4세기 콘스탄티누스 대제 이래로 교회는 무엇보다 ‘성당’으로서 기능을 해 왔다. 성당식 교회의 다섯 가지 중요한 요소는,
1. 건물(예배당) 2. 특별한 날(주일) 3. 전문적인 지도자(제사장, 성직자)
4. 사람들을 위해 시행되는 특별한 예배(의식, 예배, 교리해석) 5. 자기 유지 방법(십일조와 헌금)이다.”
셀 중심의 가정교회 운동은, 전통적인 회중교회 스타일에 비해 적어도 다음과 같은 "열두 가지 장점"들을 가지고 있다.
1. 제자화를 통한 배가
2. 박해에 굴하지 않는 구조
3. 교회 성장의 장벽들로부터 자유롭다.
4. 보다 많은 사람들이 보다 효과적으로 참여할 수 있다 .
회중교회의 경우, 전체 교인의 약 20%만이 다른 사람을 위해 사역하고, 나머지 80%는 수동적으로 남아 있다.
5. 목회적 양육의 딜레마를 깨뜨린다.
목사 한사람이 모든 양을 돌보는 것이 불가능해지기 때문이다.
6. 삶의 변화를 경험하고 서로에 대한 책임을 질 수 있다.
7. 가정은 새로운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가장 효율적인 장소다.
8. 리더십의 위기를 해결한다.
가정교회는 장로들이 인도한다. 장로들은 의식을 집행하는 전문가나 정규 과정을 거친 교사일 필요가 없다.
9. 성직자와 평신도 간의 구분을 극복한다.
바니 쿰즈는 “신약성경 그 어디에서도, 우리는 목사가 인도하는 회중에 대한 언급을 찾아볼 수 없다”고 말한다.
가정교회는, 전통적인 의미의 목회자를 전혀 필요로 하지 않는다.
10. 보다 성경적이다.
성경은 우리에게 거룩한 날, 거룩한 시간에, 거룩한 성전에, 거룩한 무리가 모여,
거룩한 옷을 입은 성직자들이 행하는 거룩한 의식에, 거룩한 돈을 내고 참여하는 것이 신약적인 교회라고 가르치지 않는다.
11.비용이 적게 든다.
회중교회는 ‘기획 + 건물 + 성직자 + 사례 + 프로그램’으로 정의될 수 있다.
가정교회는 ‘사람들 + 평범한 가정 + 믿음 + 공유된 삶’이다.
12.도시 교회를 부활시킨다.
오늘날의 교회는 다음의 네 가지로 조직된다.
a. 가정 (유기적인 교제가 가능한 곳) b. 회중교회 (모임 중심의 전통적인 교단교회)
c. 도시 혹은 지역 d. 교단 (한 지역의 교단 교회들의 네트워크나 컨퍼런스, 조직체)
전통적인 교회는 보통 b와 d 수준에 초점을 두는 반면, 셀교회는 a와 b 수준에 초점을 맞춘다.
그러나 가정교회는 a와 c 수준에 대한 초점을 회복하게 만든다.
신약성경에서 교회가 명명된 것은 그 지역을 따라서였지, 교단을 따른 것은 아니었다.
가정교회라는 새로운 흐름을 타고 이것은 또한 ‘도시교회’, 곧 말 그대로 한 도시의 교회
(한 도시나 지역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정기적, 비 정기적으로 도시 규모의 대집회로 함께 모이는)로 되돌아가는 길을 연다.
가정교회의 작은 단위에서 이루어졌던 일이 결국에는, 도시 규모로까지 번져 가게 될 것이다.
제 2장. 기독교 역사를 통해 본 가정교회
종교개혁
루터는 1521년 보름스에서, 그의 동 시대인들로서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폭탄 선언을 했다.
“나는 교황과 공의회를 믿지 않는다. 그들이 종종 실수를 저질렀다는 것은 사실이다. 나는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힌 자이다.”
쯔빙글리와 멜랑히톤, 칼뱅, 존 녹스를 비롯한 다른 많은 종교개혁자들은 성경 번역을 장려했고,
일반 성도들이 성경을 읽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전까지는 전문 성직자의 언어인 라틴어로 된 성경밖에 없었다.
성경이 다시금 보통 사람들의 손에 주어졌다는 사실은 ‘재 발견의 역사’의 장을 열었다.
이를 통해 교회는 어둠 속에서 다시 빛을 향해 오르기 시작해서, 그 자신의 구조적 감옥을 탈출하여,
‘유기체적 교회 형태로서의 가정교회’와 같이, 오래 잊혀졌던 진리와 실천들을 하나하나 재 발견하기 시작하게 된다.
마르틴 루터의 “제 3의 예배”
루터는 예배의 질서를 3가지로 구분한다.
첫째, 라틴어로 진행되며, 모든 이들을 위한 공적인 라틴어 예배다.
둘째, 공식적인 독일어 예배다.
셋째, 전도적인 예배다. “세 번째 예배는 진실로 복음 전도적인 예배여야 한다.
이 예배는 모든 사람들이 모이는 공적인 장소에서 드려져서는 안 된다.
그러나 진심으로 그리스도인들이 되기를 원하는 사람들과, 손과 입으로 복음을 고백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이름을 서명해야 하며, 기도하고, 성경 읽고, 세례를 주고, 성례를 행하고,
다른 기독교 사역을 하기 위해 가정에서 따로 모여야 한다.”
슈벵크펠트의 사도운동
“루터는 자신의 제자 카스파르 슈벵크펠트를 무서운 증오심을 가지고 박해하기 시작했으며,
그를 귀신에 사로잡힌 이단자라고 부르면서, 심지어 그가 글을 보내 오면 읽지도 않고 그대로 돌려 보냈다.
슐레지엔의 개혁가는 사냥꾼에게 쫓기는 사슴처럼, 유럽 전역을 방황해야 했다.
그는 두루 돌아다니며 많은 곳에 생동감 넘치는 교제 공동체를 만들었다.
이러한 교제 공동체는 주로 가정교회와 성경 공부 모임, 기도 모임을 통해 형성되었다.
그는 기성교회와의 갈등을 피하기 위해 그의 모임 안에서, 세례와 성만찬은 행하지 않았다.
재세례파
취리히의 존경받는 가문 출신으로 시의원이었던 콘라드 그레벨은 1524년에 아들을 낳았는데,
자기의 아들에게 세례를 베풀기를 거절했다.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 믿음이 먼저 오고, 세례는 나중에야 뒤 따른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종교 개혁자들은, 성인들에게 이와 같이 행하는 세례는,
유아 세례 때 확정된 하나님의 은혜를 격하시키는 것이며, 따라서 신성모독이라고 주장했다.
라바디의 비밀 집회
예수회 수도사 출신의 장 드 라바디는, 평생을 작은 ‘형제단’ 형태의 참된 신자들의 교제 공동체라는 한 가지 목적을 위해 살았다.
라바디의 저술의 주요 강조점은, 건물에서 개인의 가정으로 교회의 초점을 옮겨 놓은 것에서 찾을 수 있다.
그는 이 비밀 집회에서 도입의 말을 하거나, 기도를 하거나, 찬송을 하거나, 성경을 읽거나,
고린도전서 14:24-26절에 나와 있는 것처럼 자유롭게 예언하거나, 성경 말씀을 함께 토론하기를 권했다.
그의 저술은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고, 필립 야코브 슈페너도 그의 제자들 중 하나였다.
위그노들과 “광야교회”
이 비 국교도들은 어떤 면에서는 영국판 위그노파였다.
이들은 기성교회의 극심한 박해로 인해 지하로 숨을 수밖에 없었고, 가정교회 형태로 조직화 되었다.
또한 애굽의 압제에서 구원받은 이스라엘 백성(행7:38)에 빗대어, 스스로를 ‘광야교회’라고 불렀다.
그들은 개개인의 가정에서 비밀 집회를 가졌을 뿐 아니라, 숲 속 개간지에서 대규모 집회도 가졌다.
다시 말해 셀과 대집회라는 두 구조를 활성화시켰던 것이다.
디포는 결국 감옥에 갇히게 되었는데, 거기서 유명한 “로빈슨 크루소 이야기”를 썼다.
선교사 켄 맥베티는, “크루소의 항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의 자유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의 파선 경험은, 디포가 감옥에 수감된 것을 반영하며, 섬은 그의 감방을 상징한다”고 말한다.
슈페너와 "교회가 아닌 교회"
독일 경건주의의 아버지 필립 야코브 슈페너(1635-1705)는, 기존의 교회는 회복될 필요가 있으며,
개인적인 상호 권면과 훈련을 위해 소그룹이 필수적이라고 보았다. 그는 1670년에 “경건 모임”을 시작했다.
일주일에 두 번 가정에서 모임을 가졌는데, 종종 그들이 속해 있는 루터교회의 이전 주일 아침 설교에 대해 토론했다.
그러나 이러한 모임은 곧 성경 토론 모임이 되었다. 빌 베컴은 이렇게 말한다.
“슈페너는 그가 창시한 소그룹에 대한 오해의 희생자였다.
그는 분명히 소그룹이 교회임을 믿었지만, 기성교회를 위협하기를 원치 않았다.
그는 소그룹을 기성교회의 하나의 부속기관으로 만들고, 이 운동을 마감하게 되었다.”
그의 교제 공동체는 반쯤은 교회 같고, 반쯤은 그렇지 않은 어중간한 것이었다.
존 웨슬리의 셀
초기의 감리교 운동에 대해 연구하는 많은 역사가들은, 감리교 부흥의 열쇠는,
소그룹 안에서 새로운 신자들에 대해 책임을 지고 양육하는 관계를 가졌기 때문이라는 것에 의견을 같이 한다.
존 웨슬리는 이러한 소그룹을 “학습반”이라고 불렀다. “학습반"은 사실상 가정교회였다.
매주 주중에 한 시간 정도 가지는 이러한 모임에서 각 사람은, 자신의 영적인 진보를 보고하고,
특별한 필요나 문제들에 대한 의견을 나누었다. 그리고 대부분의 회심은 바로 여기서 일어났다.
감리교 운동은 이러한 집단들의 네트워크, 곧 학습반의 연합체를 통해 서로서로 연결되었다.
그는 루터가 소원했지만 결코 시도해보지 못한 것, 곧 보통 사람들이 하나님에 의해 특별하게 되고,
가정교회의 구조 안에서 엄청난 운동을 일으킬 수 있는 능력을 가지게 된다는 것을 증명해 보였다.
가정교회의 수명
가정교회는 그 자체로 살아있는 유기체다. 가정교회는 쉽게 소멸되지 않는다.
교회는 신약시대와 콘스탄티누스 대제 시대에 이르기까지 가정교회들 속에 살아 있었다.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가 회중 교회 안에서 암흑시대를 이기고 살아 남은 것은, 가정교회 때문 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회중교회 안에 있는 가정교회는 하나님의 방주가 되었다.
역사상 영적인 운동들이나 신학적인 갱신 운동, 혹은 소위 평신도 운동은 대부분, 소그룹이나 비밀 집회, 밴드, 셀 등을 만들었다.
이러한 가정교회와 유사한 소그룹은, 모라비안 운동이나 러시아나 중국에서 번성하였다.
그러나 가정에서 시작된 거의 모든 자생적 교회는 대부분, 성당이나 그에 준하는 형태의 건물들로 끝나고 말았다.
즉 이러한 새로운 교회는, 언제나 회중 교회 형태로 전락하고 말았다.
사도적-선지자적 개혁
에베소서 2장 20절에 의하면, 사도와 선지자 사역은 교회의 토대를 세우는 데 필수적이다.
사도와 선지자는 교회의 토대를 세우는 데 필수적이다.
나는 과거, 현재, 미래를 막론하고, 사도의 역할에는 교회를 개척하는 것이 반드시 포함된다고 생각한다.
세대주의 신학은, 우리에게 이미 성경이 주어졌으므로 사도와 선지자 사역은 더 이상 필요치 않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위험한 성서주의에 빠지게 만들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말 그대로 연구하고 과학적으로 탐구했으며,
“성경 공부 모임”이 활성화 되면서, 하나님의 말씀이 예배의 대상이신 하나님을 대신하게 되었다.
그리고 에베소서 4장 11절에 언급된 다섯 가지 사역들 가운데, 목사와 전도자, 교사 이 세 가지만을 인정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선지자와 사도의 사역에 기름 부음과 은사가 없이, 이러한 세 가지 사역들만 가지고 교회를 세움으로써,
목회적이고 복음전도적인 모델의 교회, 곧 교사의 사역을 중심으로 세워진 교회들이 태동하게 되었다.
이러한 가르침 중심의 목회적, 전도적 모델의 교회는, 거의 전 세기를 통틀어 가장 지배적인 형태로 자리매김해 왔으나,
사람들을 진정으로 제자로 삼는 데는 실패했다.
복음 전도자가 거짓 선지자가 될 수 있는가?
복음 전도자들과, 그들의 조직들과 계획들은, 마치 그들이 하나님의 선지자인 양 많은 교회들로부터 환영을 받아 왔다.
그러나 복음 전도자는, 복음 전도자의 일을 할 때 진정한 복음 전도자라 할 수 있다.
만일 그가 선지자처럼 행동하기 시작한다면, 자기의 영적인 관할권 밖으로 나가기 시작하는 것이다.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어, 자신이 위임 받지 않은 사역을 취하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복음 전도자들을 하나님의 선지자로 간주한다면, 진정한 선지자들은 ‘순진한 바보들’로 취급되고 말 것이다.
그 결과 교회는 선지자적인, 사도적인 지도를 따르는 것을 주저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교회는 이미 전도자적인 정신과 사고방식에 푹 빠져있고,
따라서 하나님의 원하시는 것보다 훨씬 못한 것이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교회의 사도적-선지자적 유형과 구조가 회복되어야 한다. 나는 가정교회가 바로 이러한 유형이라고 확신한다.
제 3장. 가정교회의 본질
가정교회란?
가정교회는, 일반 가정 안에서 초자연적인 능력을 통해 공동체적으로 기독교적인 삶을 사는 한 방식이다.
가정교회는, 구원받은 사람들이, 지역 사회 가운데서 살아가는 방식이다.
가정교회는, 제자들이 일상생활 속에서 함께 예수님을 따르는 유기적인 방식이다.
구원받은 자들은 더 이상 독립된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개인주의적인 생활방식을 가지는 대신, 공동체적인 생활방식을 가지게 된다.
가정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성령을 특별히 거룩하게 구별된 장소에서 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의 가운데서도 경험한다는 확신에 기초한다.
이런 의미에서 유기적 가정교회는, 이기주의의 임종을 지켜보는 한편 교회의 탄생을 목도하는 침상이라고 할 수 있다.
진정한 공동체는 개인주의가 끝나는 곳에서 시작된다.
가정교회는 일상 생활에 있어서, 보통의 대가족보다 큰 상위 단계의 조직이나 직급, 혹은 대집회 등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가정교회는 수직적으로 하나님께 회심하고, 수평적으로는 서로에게 회심하며,
사랑과 능력으로 세상을 섬기는 일에 회심한 사람들로 이루어진 공동체이다.
가정교회의 사역
현대의 가정교회와 더불어, 신약성경과 초대교회에 대한 연구를 통해 우리는 네 가지 요소를 발견할 수 있다.
이 요소들은 시대를 초월하여 존재해 온 가정교회의 가장 기본적인 뼈대와 같다.
1) 모여서 함께 먹음
가정교회는 진짜 음식을 서로 함께 나누는 식탁 공동체이다.
2) 어떻게 순종할 지 피차 가르침
가르침의 목적은 지식을 늘리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섬기고, 그 분 뜻에 순종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3) 물질적 축복과 영적 축복을 나누기
4) 함께 기도함
실질적인 측면
가정교회에는 전문적인 의미에서의 지도자가 없고, 대신 장로가 있다.
장로는 성경이 요구하는 장로의 자격 요건을 갖추어야 한다 (딤전3장).
이 지역 장로들은, 사도 역할을 하는 사람들에게 권한을 위임받고, 상담을 받는다.
가정교회는 자체적으로 세례를 시행한다. 결혼식이나 장례식 행사에는, 별로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제 4장. 다섯 가지 사역들
다섯 가지 사역을 배가시키라
우리는 성장의 구조적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에베소서 4장11-13절에 나오는 다섯 가지 사역
(사도, 선지자, 전도자, 목사, 교사)에서 찾을 수 있다. 다섯 가지 사역은, 교회의 자가 조직 능력으로서 기능한다.
이 다섯 가지 사역들은, 교회의 영적 DNA이다.
1. 목사
은사적인 면에서, 그리고 전통적인 의미가 아닌 성경적인 의미에서, 목사는 그 성격상 목자이다.
목사는 양떼의 한가운데 서 있다. 모든 것이 그를 중심 축으로 하여 돌아간다.
그러나 신약 성경 그 어느 곳에서도, 우리는 회중을 지도하는 목사의 예를 찾아볼 수 없다.
목사는 그 성격상, 가족적인 분위기를 만들 수 있는 아주 다정다감한 사람이다. 그에게는 관계가 가장 중요하다.
목사는 ‘너무 관계에 몰두한 나머지’ 큰 그림을 놓치는 경향이 있다.
2. 선지자
선지자는, 양떼보다 언덕 하나는 넘어서 5마일 정도를 앞서 간다.
그는 사람들이 자기를 어떻게 생각하는가보다는, 하나님의 음성에 더 관심이 있다.
그는 종종 복잡하고, 약간 괴팍한 성격을 가지고 있다.
선지자는 하나님에게서 듣고, 목사를 포함한 모든 것에 대해 하나님의 관점에서, 인정사정 보지 않고 날카로운 질문을 던진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이 주신 건전한 사명이다.
3. 사도
사도는 선지자만큼 양떼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는 않다. 사도는 보통 집집마다 심방해서 담소를 나눌 시간이 없다.
‘세상이 온통 그의 교회이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이 그렇듯이, 사도들은 결코 만족을 모른다.
로마를 방문한 다음 바울은 스페인으로 가기를 원했다. 그의 핵심 단어는 ’전략‘이며, 그의 핵심 사역은 ’선교‘다.
그는 하나님의 계획이 모든 민족들에게서 성취되는 것을 보기를 원한다. 사도는 교회를 개척하는 사역이다.
이 사역은 교회가 없는 곳에 교회를 세우고, 사막 같은 복음의 불모지에 샘을 만든다.
4. 교사
교사는 양떼와 아주 가까운 곳에 산다. 그는 “진리, 오직 진리만을” 모토로 삼는다.
교사는 질에 관심이 있다. 그는 질적인 것을, 큰 그림보다 훨씬 더 매력적인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세부적인 것을 좋아하고, 모든 것을 정확하게 아는 ‘주석가’역할을 한다. 그는 가르침 자체에 대한 열정을 가지고 있다.
5. 전도자
전도자 역시 양떼로부터 반 마일 정도 떨어진 곳에 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발견하고, 또 발견하게 하는 것이다.
그는 외부인들에게 건전한 교회 상을 소개하고, 문자 그대로 ‘복음을 그들에게 읽어 줌으로’,
그들에게 ‘전도를 함으로’ 새로운 신자들이 성숙함에 이르도록 훈련시키는 일에 참여한다.
성경적으로 볼 때 전도자는, 교회의 확장을 선도하는 자가 아니다. 전도자는, 다른 사람들이 전도자들이 되도록 훈련시킨다.
교사가 교회를 세운다면, 그는 자신이 받은 고유한 은사인 가르침을 중심으로 교회를 세울 것이다.
교사는 교회를 강의실로 바꾸어 놓거나, 성경 학교나 교육 센타를 세울 것이다.
교사는 진정으로 교회의 기초를 놓는 사람이 아니라, 교회의 기초에 대해 탁월하게 설명하는 사람이다.
복음 전도자가 교회를 세운다면, 그는 끝없이 이어지는 집회 속에 묻혀 산다.
그는 매분마다 엄청난 아드레날린을 만들어내는 매혹적인 행사들과, 흥분을 자아내는 프로그램들을 끊임없이 만들어낼 것이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그 교회는, 한 가지 메시지만 들려줄 뿐이다.
전도자는 많은 사람들을 끌어 모을 수 있지만, 그들을 하나의 교회로 세우는 은사가 없는 경우가 많다.
멀지 않아 사람들은, 한 가지 영적인 양식에 싫증을 느끼고는, 다른 양식을 찾아 떠나게 될 것이다.
목사가 교회를 세운다면, 그의 가장 강력한 메시지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사람들은 다 내게로 오십시오. 내가 여러분의 말을 듣고 상담을 해 드리겠습니다”이다.
그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옴짝달싹 못하게 된다.
교회의 성장은 교회를 한계 상황으로 몰고가서, 결국에는 성장을 멈추게 만든다.
목사들은 너무 빨리 ‘많은 것을 쏟아내고’ 그들의 한계점에 이르고 만다.
사도와 선지자는 좋은 목사와 교사, 그리고 복음 전도자처럼, 사람 중심적이거나 필요 지향적이기 보다는, 하나님 중심적이다.
그들은 눈에 보이는 일이나 인간의 필요와 문제, 그 너머에 있는 것을 바라볼 수 있는, 하나님이 주신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하나님의 과업과 비전을 이해한다. 그들은 단지 ‘교회 하나’를 세우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더 나아가 도시 전체나 나라 전체를 복음 위에 세우기를 원한다.
제 5장. 가정교회와 셀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