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둔밤
- 십자가의 성요한 지음
/최민순 옮김/ 바오로딸
제9장
이 밤이 영을 어둡게 할지라도, 영을 비추고 빛을 주기 위함이다
1. 이 복된 밤을 두고 여기 할 말이 더 있다면, 비록 영을 어둡게 할지라도 오직 일체의 사상에 대한 빛을 주고자 함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영을 낮추어 비참하게 만듦도 높여주고 올려주려 함이요, 가난하게 만들어 자연의 모든 것과 정에서 비워놓음도 매사에 걸림이 없는 공번된 마음으로 저승과 이승의 일체 사상을 영묘하게 맛보고 즐기라 함이다. 마치 어느 요소가 자연계의 온갖 실체와 복합체에 들어가려면, 다시 말해서 갖가지 맛과 내음과 빛깔에 참여하려면 제 나름의 빛깔과 내음과 맛이 따로 있어서는 안되는 것처럼, 영혼도 순일 청정하여서 자연의 습관적 및 현실적 애호를 벗어나야 걸림 없는 영으로 자유로이 하느님 예지와 통할 수가 있으니 여기서 영혼은 그 청정 순결로써 온갖 것의 온갖 맛을 뛰어나게 맛보는 것이다.
이러한 정화 없이는 영성의 맛을 마음껏 다 느끼고 흐뭇이 맛 볼 수 없으니, 습관적이건 현실적이건 단 하나의 애호나 정붙인 무엇이 있다면, 온갖 맛을 뛰어나게 지닌 사랑의, 영의 그 심오한 맛을 느끼거나 얻어볼 수가 절대 없을 것이다.
2. 이스라엘 백성은 이집트에서 맛보았던 고기와 음식 생각이며 그 기호가 남은 이유 하나 때문에(출애 16,3) 광야에서 풍미로운 천상의 빵을 맛들일 줄 몰랐다. 그 빵은 만나로서 성경에 의하면 온갖 풍미가 다 있어서 각 사람이 원하는 대로 맛이 돌았다. (지혜 16, 21)
이와 마찬가지로 영혼이 현재적이든 잠재적이든 어느 애호나 부분이든지 아니면 다른 어느 지각에 오염이 되어 있으면 영혼은 그가 원하는 대로의 청정 무애한 영의 낙을 미처 맛볼 수 없다. 그 이유는 완전한 영이란 신스러워서 그의 애호나 정감이나 지각 등이 자연의 그것들과는 월등히 다르고 차원이 높기 때문, 따라서 현재적이건 잠재적이건 하나를 용납하려면, 한 주체 안에 양립할 수 없는 이율배반처럼 다른 하나를 몰아내거나 없애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영혼이 이 드높은 데까지 다다르면 관상의 어둔 밤이 영혼의 낮은 데부터 부수고 없애어서 스스로 어둠 속에서 메마르고 궁하고 비어 있는 것이 절대로 필요하니, 장차 받을 빛이 까마득히 높은 하늘스런 빛으로서 자연의 모든 빛을 초월하고 자연적으론 이성이 용납할 수 없기 때문이다.
3. 이와 같이 이성이 이 빛과의 일치에 도달하고 완전성의 지위에서 스스로 신스럽게 되기 위해서는 우선 자연의 빛을 씻어 없애고 어두운 관상의 힘으로 당장 어둠 속에다 이성을 집어넣어야 한다. 이 어둠은 영혼이 오랫동안 제 나름으로 인식하느라 자리가 잡힌 그 습성을 없애고 그 대신 신스러운 빛을 받아들일 때까지 계속한다. 그리고 저 인식을 위해서 지니던 힘이 자연의 것이었기 때문에 여기서 당하는 어둠은 영의 깊은 실체에서 마치 실체적 어둠처럼 느껴지는 까닭에 짙고 무섭고 매우 견디기 어려운 것이다. 사실 신스러운 사랑의 합일에서 영에게 주어져야 하는 정애(情愛)가 신스러운 만큼 이 정애는 가장 신령하고 미묘 우아하고 너무 그윽해서 마음의 정감과 욕구를 모두 다 초월하므로 마음이 사랑의 합일로 - 자연 본성에 용납될 수 없는 이렇듯 신스럽고 숭고한 정과 낙을 느끼고 맛보기 위해서는 먼저 그 마음이 모든 애호와 감정에 있어 정화되고 없어져야 한다. 그리고 하느님 일이건 사람 일이건 거기에 정 붙이던 습관을 버리고 마음이 메마르고 궁해야 바삭바삭하게 물기가 없이 이 어두운 관상의 불에 단련이 되어서 (토비아가 열화 속에 넣었던 물고기의 염통처럼 : 토비 8,2), 맑고 티없는 마음가짐과 닦여지고 건전한 입천장을 가지게 될 것이니, 그래야만 하느님 사랑의 심오 희한한 접촉을 느끼게 되는 것… 영혼은 이 접촉으로 말미암아 신스럽게 변화되고 이전에 지니던 - 현재적 및 잠재적 - 모든 정애를 몰아낼 것이다.
4. 또한 이 어둔 밤이 영혼을 준비시키는 사랑의 합일을 위해서는 영혼이 하느님과의 통교에 있어 어느 영광된 장엄을 지녀야 하는 것이니, 이 통교에는 영혼이 자연적으로 가질 수 있는 일체의 풍요를 초월하는 헤아릴 수 없는 유열이 간직되어 있다. 박약하고 불순한 자연 본성으로서는 합일을 받지 못하는 것… 이사야 (64,4)의 말대로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것은 눈이 보지 못하였고, 귀가 듣지 못하였고, 사람의 마음에 들어온 적이 없는 것이기 때문이니, 우선 영혼이 마음의 진공(眞空)과 청빈을 말끔히 씻어야 묵은 인간을 벗고, 진공 무위가 되고, 이 밤을 힘입어 얻어지는 저 새로운 진복생활을 할 수 있을 것이니 그것이 곧 하느님과의 합일의 상태다.
5. 이 경우 영혼은 신적 및 인간적 사상에 관하여 보통 감각이나 자연지(自然智)가 미치지 않는 공번되고 맛스러운 신적 감각 및 지견을 가지는 데까지 도달해야 하므로 (왜냐면 마치 영이 감각, 신적인 것이 인간적인 것과 다르듯이 이전과 아주 다른 눈을 가지고 일체를 보는 까닭에) 모름지기 영은 보통 감각에 있어 야위고 닦달질을 받아야 하는 것, 따라서 이 정화의 관상을 통하여 영은 심한 불안과 고뇌 속에 있어야 하고 기억은 친숙하고 수월한 모든 알음알음을 떠나서 일체 사물을 남처럼 나그네처럼 속으로 느껴야 하니, 그에겐 모두가 관심 밖의 것, 여태까지와는 전혀 다르게 보이는 것이다. 이 밤이 영혼을 사물에 대한 일반 통념에서 이런 데로 끌어내기 때문인데 이는 신적 상념에 끌어올리기 위함 이요, 신적 상념은 인간의 사고방식과 너무나 다른 것이다.
여기서 영혼은 자기를 떠나 오뇌 속을 거니는 듯, 때로는 홀린 듯 반한 듯 보고 듣는 모든 것이 묘하기만 하여서, 평소에 일쑤 당하는 일들이 그저 신기하고 야릇하게 보이기도 한다.
이것은 사물에 대한 보통 감각과 일반적인 통념에서 영혼이 벌써 그만치 멀어지고 남이 되어가기 때문인데 이렇게 됨으로써 이승 것에 죽고 신스러운 지견에 살라는 것, 이야말로 이승보다 저승의 것이다.
6. 이 모든 쓰라린 정화는 결국 하느님의 이러한 힘으로 말미암아 영혼이 생명 안에 다시 나기 위함인데, 고통과 함께 구원의 영이 분만된다 함은 이사야 (26,17-18)의 말에도 그 사실이 있으니 "주여 당신 얼굴에서 우리는 잉태하였고, 산고를 치렀어도 구원의 영을 낳았나이다."라고 하였다. 이뿐 아니라 영혼이 이 관상의 밤을 통하여 마음의 고요와 평화- 즉 성경 (필립 4,7) 말씀대로, 모든 감각을 초월하는 즐겁기 짝없는 정일(靜逸)에 다다르려면 첫번째의 평화를 다 버려야 한다. 이 평화는 영혼에게 평화와 같이 보였지만 불완전에 휩싸였기 때문에 참다운 것이 아니었다. 영혼이 제멋대로 생각한 평화였던 까닭이다. 말하자면 두 쪽 평화, 즉 감각과 영의 평화로 영혼이 풍성하게 느껴져서 감각과 영이 정일을 얻은 듯했지만 실상은 (내가 보기에) 불완전한 것이다.
따라서 영혼은 이러한 평화를 씻고 거두고 없애야 하는 것이니, 이미 우리가 이 밤의 고통을 밝힐 때 인용한 예레미야의 말씀이 (애가 3,17) 이것을 느끼고 슬퍼하였다. - 평화에서 내 영혼 쫓겨났고..
7. 이것이 바로 영혼이 제 안에 지니는 숱한 의혹과 상상과 투 쟁에서 비롯된 괴로운 혼란으로서 영혼은 스스로가 처해 있는 비참을 느끼고 깨닫는 만큼 자기는 이 혼란 속에서 영영 망하고 행복도 다 끝나는 줄로 생각한다. 그러노라면 고통과 비탄이 영혼 안에 깊이 사무쳐 마음속으로 호된 울부짖음이 일어나고 심하면 입으로 튀어나오고 눈물로 쏟아지는 수가 있다. 그러나 이렇게라도 속이 풀리는 때는 매우 드물다. 다윗은 이런 일을 잘 경험했는지 어느 시편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까라지고 아주 으스러지고, 애끓는 마음에서 소리는 터져나오나이다." (시편 37,9)
터지는 소리... 그것은 심한 고통을 말함이니, 과연 어느 때는 영혼이 자기가 처해 있는 이러한 비참을 갑자기 그러나 예리하게 상기함에서 너무나 흥분하고 감정이 함빡 고통과 비탄 속에 빠지게 되어서, "내 신음이 물처럼 쏟아지는구나."라는 이 말로 같은 처지에서 고생하시던 성자 욥(3,24)에게나 비길까, 나는 어떻게 표현할 말이 없다. 미상불 어느 때는 큰 물이 범람하면 모든 것이 잠기고 가득 차듯이 영혼의 이 부르짖음과 감정도 어느 때는 더할 나위 없이 커져서 영혼을 다 잠그고 휩쓸며 형언할 수 없는 불안과 고통으로 그의 모든 힘과 깊은 속을 가득 채워준다.
8. 날 빛의 희망을 감싸주는 이 밤이 영혼 안에서 하는 일이란 이런 것이다. 역시 욥(30,17)은 이런 뜻으로 "밤은 내 뼈를 깎아 내고, 나를 갉아먹는 고통은 잠들지 않네."라고 하였다. 왜냐면 여기의 뼈란 곧 마음이니 이것이 영혼을 난도질하면서 쉬지도 자지도 않는 이 아픔에 사뭇 꿰뚫리는 것, 영혼을 관통하는 의혹과 공포가 그칠 새가 없기 때문이다.
9. 이 겨룸, 이 싸움이 심각한 까닭은 영혼이 기대하는 평화가 그만치 심오한 탓이고, 영혼의 아픔이 깊고 섬세함은 차지해야 할 사랑이 그만치 매우 그윽하고 순수하기 때문이니 무릇 깊이 있고 절묘한 작품이 나오기 위해서는 그만치 작업도 정성되고 진지하고 깨끗해야 하며 오래가는 건축일수록 그만치 튼튼한 법이 다. 그러기에 욥(30, 16-27)이 말한 대로 내 영혼은 내 안에서 시들어가고, 그 속은 아무 바람 없이 타고 있는 것이다. 사실이 꼭 그러하니, 영혼이 정화의 밤을 거쳐 다다라야 할 완전 (완덕)의 단계에서 그 실체로나 능력으로나 여러 은사와 덕의 무수한 보화를 얻고 누리고 해야 하므로, 우선은 통틀어 이러한 은사들을 멀리 떠나고 잃어버리고 비우고 없앴음을 보고 느껴야 하고, 이러한 보화와는 너무나 동떨어졌기 때문에 다시는 거기에 도달할 수 없으며 좋은 일은 다 끝났다는 확신까지도 가져야 한다. 마치 앞서 인용한 예레미야의 "나는 언제 행복하였던가." (애가 3,17)라는 말씀 그대로인 것이다.
10. 그러면 관상의 이 빛이 그토록 영혼에게 맛들고 절친해서 더 바랄 나위 없는 것이라면 (위에서 말이 있었듯이, 이 관상으로 영혼이 하느님과 합일하고 바라는 완전의 상태에서 모든 보화를 얻으므로), 도대체 무슨 까닭으로 이 빛이 한번 들어오기 시작하자 처음엔(방금 말한 대로)그토록 고통스럽고 냉엄한 결과를 가져오는가 그 이유가 지금은 알고 싶다.
11. 이에 대한 응답은 어렵지 않고 그 일부는 벌써 해둔 셈이니, 즉 이런 결과는 하느님이 내리시는 관상 편에서 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당신이 내리시는 관상이란 그 자체가 고통을 줄 수가 없고 도리어 (다음에 말하겠지만) 맛과 낙을 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원인은 그때 영혼이 지니는 나약과 불완전이요, 은혜를 받아들이기에 마땅찮은 자세이니, 하느님의 빛이 이러한 데에 들어오는 바에야 영혼이 이미 말한 그러한 고통을 안겪을 수 없는 것이다.
- 어둔밤 (십자가의 성요한 지음/ 최민순 옮김/ 바오로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