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햇살을 받으며 산길을 걸었다. 약간의 오르막이 있고 가파른 언덕도 있으니 산책하기 심심하지 않은 재미있는 길이다. 평평한 길을 걸을 때보다 다소 숨이 차고 땀도 나서 운동 효과와 마음 운동이 함께 되는 환상의 코스다.
나무들이 잔가지를 드러낸 채 겨울을 보내고 있다. 길섶에서 겨울잠에 빠진 들풀들이 코 고는 소리를 들으며 좁다란 산길을 걷는 일은 나에게는 최고의 선물이다. 집안에 갇혀서 시간을 보낼 때는 그 일에 빠져서 모르고 지낸다. 그렇지만 하루라도 산책하러 나가는 일을 거르면 정서불안이 온다.
너무 춥거나 너무 덥거나 할 때 갈까 말까? 고민하는 날이 있다. 그런 날에는 그 마음에 사로잡혀서 다음 일을 하지 못하고 온통 마음이 바깥으로 향해있음을 느낀다. 함께 사는 남자조차 나에게 운동 중독이라고 놀린다. 이런 현상들이 중독 증세라고 하면 인정할 수밖에 없다. 일 년에 산책하는 것을 거르는 날이 손에 꼽을 정도이니 나에게는 산책은 밥 먹는 것처럼 중요한 일이 되었다.
앞서가는 사람들이 모처럼 풀린 날씨에 몸이 가볍다. 두꺼운 옷은 벗어서 허리에 동여매고 걷는다. 내 또래 여자 셋이 이야기를 나누며 걸어간다. 재미있는 이야기를 나누는 것 같다. 웃음소리가 작은 숲길에 가득하니 바라보는 나도 절로 웃음이 나온다. 정말 예쁜 모습이다.
산책을 마치고 연못이 내려다보이는 나무 의자에 앉아서 부들의 홀씨가 눈처럼 날리는 아련한 풍경에 빠져있었다. 연못 한쪽에 자리 잡고 살아가는 부들이 홀씨를 날리고 있다. 펄펄 눈이 내리는 것 같다. 다리 난간 아래에는 홀씨들이 소복하게 쌓여있다. 내 마음도 홀씨 따라 훨훨 날아가고 있었다.
이곳 토산지로 산책하러 올 때는 속마음이 따로 있는 날이다. 산책하는 코스가 두 군에 있는데 하나는 내가 이름을 지어준 선화리 <바이칼 호수> 라고 부르는 나 홀로 연못인 연지못과 진량행정복지센터 앞에 있는 벚나무길이 아름다운 작은 연못이다. 토산지라는 예쁜 이름을 갖고 있다. 근처 골프장 숲길과 어리연과 부들과 정답게 살아가고 있다.
토산지는 진량행정복지센터가 있는 곳이라서 맛있는 빵 가게가 몇 군데 있다. 작은 이야기를 나누는 카페와 청춘들의 놀이터인 햄버거 가게가 있어서 마음이 간지러울 때는 산책 코스를 이곳으로 잡는다.
꽈배기를 사러 <송사부> 빵 가게로 갔다. 가게는 그대로인데 문 앞에 커다란 붕어가 나를 맞아주었다. 며칠 사이 <송사부> 빵 가게가 홀연히 떠나버리고 강남 붕어빵으로 바뀌었다. 이미 가게 안으로 들어왔고 붕어빵도 좋아하는 것이니 바로 적응하고 주문했다. 붕어빵 크기가 기존의 3배는 되는 것 같다. 강남 붕어빵은 이렇게 생겼어요? 물어보니 예쁜 아가씨도 웃는다. 강남 붕어빵 네 마리와 와플 하나를 샀다.
빵 가게와 이웃사촌으로 지내는 단골 카페 <봄봄>에서 청포도 에이드를 한 잔 샀다. 집에서 그림 그리는 일로 하루를 보내는 아들을 위해서 청포도 에이드를 샀다. 손이 시려서 이 손에서 저 손으로 옮겨가면서 왔지만, 오늘처럼 봄기운이 완연한 날에 청포도 에이드를 들고 걸어가는 내 모습이 노란 개나리 같아서 행복했다.
얼음이 녹으면 넘칠 수 있으니 종이컵에 꽂혀있는 큼직한 빨대로 한입 훔쳐 먹으면서 걸었다. ‘얼음이 녹아서 양이 늘어나 넘칠까 봐 먹어주는 거야’하면서 흔적이 남을까 흘깃흘깃 컵을 훔쳐보면서 걸었다. 몇 번을 먹었더니 줄어든 표시가 났다. 녹기 전에 가려고 빨리 걸었더니 땀도 나고 하는데 목이라도 축이자 체념하니 마음이 편안했다. 아주 쪼끔 표시 나는데 사실대로 아들에게 고백하기로 했다.
얼음이 더 녹기 전에 가야지 하는 마음에 정말 무슨 일이 있는 사람처럼 종종걸음으로 걸었다. 글 쓰는 것만큼 그림 그리는 작업도 에너지가 필요하다. 친구끼리 당 떨어진다는 말을 자주 하는데 아들도 당을 충전해야 한다.
와플과 거대한 붕어 한 마리를 들고 맛있게 먹는 아들을 보니 손 시린 것을 감수하며 때로는 몰래 훔쳐 먹으면서 한참을 걸어온
수고로움을 보상받는 기분이다. 내가 생각해도 철없는 엄마지만 그래도 예쁜 엄마인 것 같아서 혼자 웃는다. - 2023년 1월1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