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렌 비티가 재현한 마술적 사랑의 고전 '러브어페어(Love Affair)'
'Classic' 이란 창작된 시기와 무관하게, 시대와 삶 속에서 끊임없이 재해석되고 새롭게 탄생하는 작품을 말한다.
[러브 어페어]는 두가지 의미에서 고전인데, 두남녀가 운명적인 사랑에 휩쓸리고 재회를 기약하지만 갑작스런 장애가 발생하고 서로가 이유를 알지 못한채 세월을 보낸 끝에 마침내 사랑을 완성한다는 줄거리 자체가 하나의 원형인데다가, 영화로서도 레오 맥케레이 감독에 의해 1939년과 1947년에 제작되어 뭇 사람들의 애정과 찬사를 모았던 클래식이기 때문이다.
이 영화의 세대를 초월한 호소력은 우리나라에서도 데이트 무비로 성공을 거두었던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 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여주인공 맥라이언이 눈물을 쏟으면서 무감한 현실을 사느라 가슴 속에 유예시켜 버린 기적 같은 사랑에 대한 꿈을 되살리는 영화가 바로 케리 크란트와 데보라 카의 1957년 작 [러브 어페어 : An Affair to Remember]이다.
이미 두 세대의 손 수건을 적셨던 사랑 이야기를 부담 없는 관계를 선호하는 90년대에 와서 다시 엮는다는 일은 얼핏 무모해 보인다. 하지만 70년대 부터 이 영화를 리메이크하고 싶었으나, 타인과의 관계보다 자아의 독립을 귀중히 여기는 경향이 강한 시기였기에 미루었다는 웨렌 비티는 "외려 90년대는 진정한 사랑을 찾는 일조차 위험이 따르는 점에서, 그리고 사람들이 사랑의 가치를 다시 생각하기 시작한다는 점에서 로맨틱한 세대"라며 [러브 어페어]의 성공을 자신하고 있었다. 인생에 새로운 세례를 베푸는 사랑을 그린 [시에틀에 잠 못 이루는 밤]이나 [네 번의 결혼식과 한 번의 장례식]이 근래에 얻어 낸 호응도 그의 [러브 어페어]의 세 번째 리메이크에 한 몫을 했으리라 본다.
극중 선상에서 이루어졌던 플레이보이와 여가수의 만남은 시대의 흐름에 따라, 비행기를 탑승한 전직 풋볼 스타와 불시착한 섬에서 싹트는 사랑으로 탈바꿈했다. ' Love Affair ' 는 누구나 짐작 할 수 있는 서사의 단조로움을 고급스런 영화적 경험으로 승화시키기 위해 사랑의 이상과 현실을 우아하게 형상화 할 만한 제작진을 규합했는데, 그중 핵심적인 멤버가 작곡자 엔니오 모리꼬네이다.
웨렌 본인에게 사랑의 관념 자체인 아네트 베닝의 캐스팅이나 뉴욕커 다운 생기를 필름에 불어 넣은 '블루 문 특급'의 근렌 고든 캐론 감독도 적격이었지만, 무엇보다 '마지막 황제'의 디자이너와 '베리 린든'의 의상담당, 그리고 '벅시'의 엔니오 모리꼬네가 마감 손질을 가한 영화의 외관이 발산 할 복고적 아름다움이 기대해 봄직하다.
이제 마에스트로라는 이름이 거추장스럽기까지 한 엔리오 모리꼬네(66). 6살에 작곡을 시작하고 산타 제칠리아 음악원에서 4년코스를 6개월에 마쳤다는 전설적인 천재성과 연 20여편의 다작을 사무적으로 해내는 직업의식은 기묘한 불협화음을 내며, 그의 천재성을 그리기 어렵게 만들기도 한다. 그의 입지를 굳히게 한 세르지오 레오네의 작품은 웨스턴과 일본의 사무라이 영화, 미국의 팝 문화와 이탈리아의 오페라를 섞어놓은 듯한 영화였는데, 이 복잡한 스타일을 완벽하게 반주한 데에서 예감 할 수 있었듯이 이후 모리꼬네의 재능은 영화의 국적과 장르를 묻지 않는 왕성한 창작속에 만개했다.
그의 OP.4** 쯤에 해당하는 본작에 모리꼬네는 10개의 트랙을 제공하고 있다. 'For Annette and Warren'으로 시작해서 엔드 크레딧까지 이어지는 모리꼬네의 연주곡들은, 그의 미덕인 친근하고 단순한 멜로디와 악기에 대한 정확한 이해에 바탕한 오케스트레이션을 유감없이 들려주며, 반복되는 회고조의 테마는 국내에서 '미션'과 함께 모리꼬네의 작품중 단연 인기 를 모았던 '씨네마 천국'을 연상시키면서 단절없는 정서의 흐름을 주도하는 역할을 담당한다.
피아노와 오케스트라가 앞자리를 주거니 받거니 하며, 잔잔하게 일관되는 분위기 속에서 8번째 수록곡 'Anxiety and Joy'는 신선한 기분전환을 마련 하는데 두근대는 리듬 파트를 선두로 신디사이저, 현 등이 Jam이라도 하는 양 생기있게 합류해 나가다 환희를 상징하는 듯한 관현악의 돌연한 외침으로 마침표를 찍는구성이 인상적 이다. 뒤 이은 'Piano Solo'와 'Return'에는 모리꼬네가 즐겨 사용하는 여성의 허밍이 삽입되어 팬플릇, 트럼펫, 오보에, 휘파람 등... 인간의 숨결을 선호하는 그 취향을 다시 확인시키기도 한다.
한편, 앨범 앞부분은 이영화의 오리지널을 그리워하는 관객들을 도취시킬 블루스/스윙 풍의 노래들이 메우고 있다. 첫머리의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30-40년대에 자신의 그룹 Tympany Five를 이끌고 R&B의 기초를 확립했던 후이스 조단이 불렀고 당대의 댄스뮤직으로 손색이 없었음을 납득하게 하는 곡이다.
재미있는 것은 음악 양식면에서 레이 찰스와 루이 암스트롱 사이의 가교로 불리는 조단이 암스트롱과 듀엣으로 부른 'Life is so peculiar'이 세 번째 트랙으로 실린데에 이어 레이찰스의 'Christmas Song'이 흘러 나온다는 점. 재즈의 어법을 대부분 마련한 거대한 존재이지만, 'What a Wonderful World'로 요즘 젊은이들에게도 친숙한 루이 암스트롱이 카리스마적 음성과 맛깔스런 트럼펫으로 조단과 흥겹게 대화하는 'Life is so peculiar'는 사랑이 열어준 생의 아름다움을 예찬하는 듯 하며,
레이 찰스의 'Christmas Song'은 눈오는 날 틀어 놓을라 치면 엠파이어 스테이트는 아니더라도 시내 높은 곳에 올라가 운명의 상대를 기다리고 싶어질 것 같은 그야말로 '영화같은' 노래라 하겠다.
사랑한다는 일이 어떤 것인지 잊은 사람들이 올겨울 영화 한편으로 가슴 밑바닥 잿더미 속의 불씨를 피워낼 수 있을런지. 극장 밖의 찬 바람속에서도 그 따뜻함을 간직하긴 어렵겠지만 꿈을 꿀 수 있는 오후 한때도 인생에서 소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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