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소연의 시집 [극에 달하다]
[버리고 돌아오다]
지루한 글이었다 진전 없는 반복, 한 사람의 생 읽어내느라 소모된 시간들, 나
는 비로소 문장 속으로 스며서, 이 골목 저 골목을 흡흡, 냄새 맡고 때론 휘젓
고 다니며, 만져보고 안아보았다, 지루했지만 살을 핥는 문장들, 군데군데
마지막이라 믿었던 시작들, 전부가 중간 없는 시작과 마지막의 고리 같았다,
길을 잃을 때까지 돌아다니도록 배려된 시간이, 너무 많았다, 자라나는 욕망을
죄는 압박붕대가 너무, 헐거웠다, 그러나 이상하다, 너를 버리고 돌아와 나는
쓰고 있다, 손이 쉽고 머리가 맑다, 첫 페이지를 열 때 예감했던 두꺼운 책에
대한 무거움들, 딱딱한 뒷표지를 덮고 나니 증발되고 있다, 숙면에서 깬 듯
육체가 개운하다, 이상하다, 내가 가벼울 수 있을까, 무겁고 질긴 문장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1995년, 개인적인 봄]
세상에 대해 나는 당신들의 바깥에 있다.
개천가를 둘러싼
황색의 개나리들처럼. 또한 헐렁한 반지처럼
에워싸며. 살찌지 말거라, 중심이여.
오늘도 나는 외곽을 맴돌며
적적하였다. 楚歌도 흥얼거렸으므로.
당신들에게 들리지 않도록 아주 작게 불렀다.
변두리 시장에서
아기 거북이 아기 거북을 업고 가는 것을
봤다. 업힌 거북도
반쯤은 걸어야 했다.
펄펄 뛰는 미꾸라지들. 가장 큰 놈 한 마리는
죽었다. 늘씬하게 뻗어 아무렇게나 출렁이는,
그의
힘없는 全身. 작은 놈들이 마구마구 넘나든다.
좋은 풍경이다.
풀들은 다 같이 피어야 한다고
선동하지 않았다. 저 혼자
황폐한 이 대지에 여린 주먹을 짚고 힘껏
제 무릎을 편다. 각자가 그렇게
핀 것이다. 무더기무더기,
그런 봄나물을 사기 위해
좌판 앞에 머물렀다가
반지를 잃어 버렸다. 그런 후에야
필요 이상으로 내가 야위어졌다는 것을
알아챘다. 그래도
사랑에 대해서만큼은 아직 당신들 안쪽에
있기로 했다. 가장 여린 배춧잎과 같아서 최후에야
식탁에 오르도록.
[누구나 그렇다는]
이불 가게를 지날 때 묻는다
새 이불을 덮듯 너를 찾으면 안 되냐
새 이불을 덮어 상쾌하듯
너를 덮으면 안 되냐
건널목에 서 있을 때 나는 묻는다
파란 불. 내 마음에 켜진 새파란 불빛과
길 건너의 오히려 낯익은 세계를 너는 반가워하느냐
수면을 취하는 동안만
나는 외롭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밝은 거리를 활보하는 사람들과 나란히
이 길을 걷는다
은행의 통장 정리기 앞에 서서
타르르르……, 명쾌히 찍혀나온 임금을 확인할 때
명쾌하지 못한 내가 아니라
누구나 그렇다는 이 청춘이 싫어졌다
[극에 달하다]
나는 벼룩을 사랑하였고 벼룩을 사랑하는 지네의
지저분한 다리들을 사랑하였다 나는 푸른곰팡이가 피
어난 밥을 맛있게 먹어댔고 쓰레기통에 버려진, 깨진
달걀과 놀아났다 나는 남들이 피우다 버린 꽁초를 주
워 사랑을 속삭였고 징그러운 비단뱀이 버리고 간 허
물을 껴안고 환하게 웃었다 나는 말라죽은 화분의 누
런 잎과 간통하였고, 나는 텅 비어 있는 액자를 모셔
놓고, 오! 나의 사랑이여, 헤프게 헤프게 고백을 하
였다
너의 말을 듣고 있는 나 수치스러워
그 말을 하는 너 얼마나 행복했을까
내 양 귀를 찍찍 뜯어 창밖으로 집어던진다
비 오는 골목에서 내 귀야, 수천의 알을 까서
벼룩처럼 힘찬 뒷다리로 껑충껑충 뛰어서
지네처럼 자잘한 다리들로 스멀스멀 기어서
그의 방 창 밑에 모여들어
못다 한 그의 말, 끝까지 들어주렴
나는 때로 천천히 걸었다 필요한 말 듣기 위해서였다
나 빨리 걷기도 했다 피곤한
너 좀더 일찍 귀가하도록
동행한 줄 알았던 너 난간 너머에서
거울에 비친 벼룩을 사랑하고
말라죽은 화분의 누런 잎을
자갈처럼 물고서 낄낄낄 이야기하고 있다지
이 말을 듣고 나 이만큼 즐거워
그러고 있는 넌 얼마나 행복하니
비가 오는
네 집 앞 골목,
영글은 몸뚱이를
치덕거려야지
흙탕 속에
숨었다가,
네가
지나가면
몸을
동그랗게
말아올려야지
야, 너무 이쁜 뱀!
너는
내 허물을 보고
기뻐할
거야
[바로 그때입니다]
지프가 한 대 지나가면
비켜서서 가장자리 쑥풀들을
밟겠습니다 몇 대 더 그런 차가 지나가면
호박잎이 뽀얀 흙먼지를 입겠고 힘겹게
늘어져 있을 테지만,
한차례
짧은 비로
그 잎은 푸른 제 빛을 찾을 겁니다 그때가
반짝이며 빛나던 호박잎이 너덜대며 찢겨지는
바로 그때입니다
[끝물 과일사러]
끝물은
반은 버려야 돼.
끝물은 썩었어. 싱싱하지 않아.
우리도 끝물이다.
서로가 서로의 치부를 헛짚고
세계의 성감대를 헛짚은.
내리 빗나가던 선택들. 말하자면
기다림으로 독이 남는 자세.
시효를 넘긴 고독. 일종의 모독.
기다려온 우리는 치사량의 관성이 있을 뿐.
부패 직전의 끝물이다.
제철이 아니야.
하지만 끝물은
아주
달아.
[달디단 꿈 1]
내 소원은
차례차례 사랑이었던 것들과 한꺼번에
달디단 혼숙을 하는 것
앞에 버틴 너무 큰 창문을 벌레들 죄다 날아들도록
활짝 열어놓는 것
반듯하게 누워 눈이 물로써 전하는
귀를 향한 전언을 듣는 것
대지가 제 몸을 뒤척여 아침을 모시고 오는
발소리 또한 듣는 것
피곤도 없이 일어나 그 여전할, 박카스 한 병 같은
새벽을 보는 것
멀리 시내 버스의 으르릉 소리를 새롭게 듣는 것
차례차례 시체들을 걷어내듯
곤히 잠든 알몸들 걷어내고 일어나, 사용한 적 없는
커다란 솥을 꺼내 허기를 느껴보는 것
쌀을 깨끗이 씻고, 밥 냄새를 고소히 풍기는 것
내 소원은 그러니까
차례차례 사랑이었던 것들과 함께
깔끔한 아침을 먹는 것
[꿈 속의 성취]
1
이른 아침 나는 항상 촉촉하다
할말은 꿈 안에서 벌써 다했다
빛이 환했다
배가 고팠다
새빨간 지렁이를 주먹 가득 쥐고
먹어댔다 아주 달았다
이른 아침 번번이 나는 죽고 싶다
네 개의 마루 창에는 반드시
교회 십자가가 보였다
확성기로 들리는 죄값을 치른다는
그 메세지를 이기기 위해서만
음악을 들었다
말을 믿었다 꿈 안에서만이
나는 수다쟁이가 되었다
그가 꿈에서 말했다
그녀가 꿈에서 말했다
너의 몸은 맛있어, 냄새가 좋아
그것만 좋아
나는 고름이 뚝뚝 흐르는 거울 속 내 육체를 본다
이게 그렇게 달콤했니
이른 아침 나는 그의 옷을 벗기고
그의 붕대를 푼다 몸을 다 핥고 나자
목이 탔다
2
그대가 가진 그 손이 행여 밀림 속 적막한 내 나라의 철문을 내릴 수 있다면, 종
려나무 무성한 그늘에 다다르십시오 그 나무 속 녹색 앵무새 한 마리 보신다면 그
의 상처를 당신의 혀로 핥아주십시오 내가 정녕 당신의 노예이기를 바란다면 앵무
새 그 오른쪽 날개를 뜯어버리십시오 그리고 새의 모가지를 비틀어버리십시오
3
오늘도 신의 부엌에 들려
남몰래 은그릇을 깨끗이 닦아 윤을 내고 왔다
그가 누구인지 몰라도
내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나는 살괭이처럼 몸을 웅크렸다
이 반짝이는 은그릇 가득 먹이를 주세요
배만 부르면
차디찰 저 하늘 한복판을
편안하게 날아갈 수 있을 것만 같았다
4
꿈은 언제나 엉성하고 나는 민감했다
상처난 아기 고래가 상어에게 뜯기곤
해초처럼 파도에 밀려 해안에 버려졌다
그렇게 나도 세상의 변두리로 오게 된 것이다
그 맑은 바다 햇살에 살이 빠르게 썩고 있다
웃으며 썩어갔다
따뜻하고 평화로웠다
[학살의 일부 1]
내가 얼마나 고독했었는가를 쉽게 잊는 것은
학살의 일부이다 얕은 기분으로 화분에 물 주며
나를 뜯어내듯 죽은 잎을 뜯어내는 것도
학살의 일부이다
이빨을 닦다, 하얀 치아를 보다, 치약 냄새를
맡았다 거울 속의 내가
울음을 터뜨렸는데…… 그 천박한 이유를 모르는 척
하는 것은 학살의 대부분이다
고무 지우개가 사각의 종이와 마찰을 일으킨다
마찰의 힘으로 한 페이지의 추억이 지워졌다
지워졌다고 믿는 것도 학살의 일부이다
창밖 앙상한 나무는
바람 불어주지 않으니
무대 세트처럼 가짜 모습을 하고 있다
죽은 평화를 누리는 나처럼
바람을 기다린다고 말하는 것도
학살의 일부가 된다
[관 람]
사람들이 킬킬거렸다 오 분마다
웃을 수 없다면 비싼 관람은 손해가 난다는 듯
결국 마지막은 만사가 행복하게 끝나요, 라는
피첨 부인의 대사에 사람들 발을 구르며 웃었다
극장을 나와서 걸으며 그는 어깨가 나란한
나에게 말한다 브레히트의 극은 너무 길었다고
그의 소외 효과는 더 이상
교훈을 줄 수 없다고, 외투를 추스르며
가라지 같은 웃음이 덧뿌려지지 않았다면 정말
지루했을 것이라고
이솝 우화나 한 권씩 사서 읽자, 그는 말한다
브레히트 신봉자인 내 어깨를 툭툭 치며
우리에게 희망은 관념, 절망만이 체험이라고
그는 내 귀에 대고서 말한다 필요한 것은
쓸개를 넣은 포도주 한 잔이라고, 이솝 우화의 곰이
엎드린 나그네에게 일러주듯
여기에도 비슷한 일이 일어나고 있다고,
죽은 것은 먹지 않는다는 곰처럼
어슬렁거리며
이 땅에 살아 있는 것은 없다 곰은 죽을 때까지
굶주림의 배를 오 분마다 움켜쥐어야 하리 그림자를
여러 개로 나누는 나트륨 가로등 아래를 걸으며
우리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불의를 너무 박해 말아요, 머지않아
그것은 저절로 얼어죽어요, 밖은 추우니까요*
*브레히트의 희곡, <서 푼짜리 오페라> 중에서.
[학살의 일부 12]
한밤중에 골목에 나가서
비닐 봉지처럼 시꺼먼 하늘 올려다보곤 한다
세상이, 이 세계가 호흡을 하는 것에
귀기울여보는 것이다
이 조용한 숨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게
치욕스럽다
일전에 예수가 언급했던 그 사랑이라는 언어가
길떠난 지 이천 년 만에 빈손으로 돌아오고 있다
이 예사롭지 못한 평화라는 것은
가혹한 가스실과 다름없다
침묵이라는 폭력을 몸에 익힌 시인들이여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말매미들이 대신해서 울고 있구나
여름 한철을 다 울어서 가뿐하게
땅으로 툭, 육체를 떨어뜨리고 있구나
나에게도 마음이 미쳐 날뛰던 시절이 있었다
용광로처럼 뜨거웠으므로
그때
이 한 세계를 육체에 첨벙 던져버린 것이다
견져지질 않는다
[나는 새로운가]
1
돌아보니 한번도 정갈한 손으로
너를 안은 적이 없었다
우리는 늘 시간이 없다고 말했다
너의 등을 만나기 위해
치석 같은 판단들을 사정없이 긁어냈고
시간을 닦아낸 휴지 조각은 산처럼 쌓였다
우리가 그토록 초조하게 찾으려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너의 것인 줄 알고 받아들인
수 많은 헛것들
두 눈 똑바로 뜬 채, 앞에 앉은 너에게
너를 빌려주어서 고마웠노라고 말한다
영사기에서 새어나온 우리는 허상이었다 말한다
초조한 마음으로는 아무것도 만날 수 없었다
사람의 발에 시간을 신길 순 없었다
이제 우리는 벗었던 양말을 신어야 한다
서로의 수음을 구경하는 일에 지나지 않았다
2
또 오십시오 감사합니다. 반복을 세뇌하는 복음
벗겨내고 나무젓가락 두 쪽을 쪼갠다
길다란 종이에 포장된 나무젓가락 두 쪽을 그들은
쪼개지만, 왜 그와 그 여잔 명료하게
쪼개지질 않을까 숨통 막히는 포장지 벗어던지고
그 여자는 국수를 비비면서 오늘도 생각했다
나무젓가락 두 쪽을 딱, 쪼개듯 쪼개질 수 없는 그에 대해
자웅동체처럼 붙어 사는 접착 본드의 위력에 대해
그 여자는 내일도 생각할 것이다
한 젓가락의 운명을 쓸 모있게 들어올려보았으면
그런 후, 부러지고 버려져보았으면!
3
거기 화환을 줄지어 내다놓는 양화점
새로 문을 여시는군
거리의 새로운 출발을 목격하는 나는 새로운가
한 사람의 구원덩어리가 버스에 올라탔다
식권을 쥐어주듯, 우리들 허기를 걱정하는
경고장을 나눠주었다
기쁘다, 라는 말을 사용하였다 모든 사람들은
바쁘다, 라는 말을 중얼거리고 있었다
신촌역 로터리에서 버스의 그림자가 급회전할 때
나는 생각한다 무관한 행려병자의 안구와 오장육부에 대해
그리고 나는 쉽게 전염된다 세브란스 영안실의
무관한 통곡들에
덩달아 화를 내는 일 잦아도 덩달아
기뻐하는 일이 드문 나는 말한다
거리의 화환이 즐비한 어떤 양화점을 지나며
당신들은 좋겠어요
짧은 희망들마저도 내다놓고 장식할 줄 아시니
[학살의 일부 11]
나는 그때 그 핏빛을 사색했다 지는 해 지는 해 거기에서 나는 청춘을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청춘으로 살아야 한다고 애쓰는 너희를 보았다 그런 너희가 지고 있는 것을 두
눈으로 지켜보았다
황혼의 힘으로 모서리를 날카롭게 빛내는 이곳에서 나는 외롭다, 라는 말을 천천히 발
음해본다 외로움이 부족해 피가 마르는 세상이 있고 중무장된 평화에 천천히 질식되
는 너희가 있고 지금은 마지막 사랑, 더 이상 꿈꿀 사랑이 없다, 라는 사실을 날마
다 애써 외우는 내가 있다
삶이 더 이상 궁금해지지 않을 때 사람들은 돌아앉아 추억에게 먹이를 준다 돌아누워
내 추억을 먹이로 받아먹다 잠든 세상이여, 바람 소리 굉장해서 나는 사나운 꿈들을
불러들였노라 지금 찬란하게 지는 해의 저 사무치는 평화는 여전하고 여전하지 않는
나는 노엽게, 진창처럼 부드러운 생을 바라보고 있다
[그러나, 거대함에 대하여]
1
(내가 자금성을 반만 꼼꼼히 보고 질려 했을 때, 그 스케일에 대해 그는, 때이른 찬
사를 보냈다. 천안문 광장의 광활함에, 그가 아, 하고 한 음절로 요약했을 때, 나, 인
력거에 몸 싣고 달리며 뺨 핥아주던 그 바람에, 무수한 자전거들 은빛 바퀴살에 감기
던, 그 햇살에, 나, 취해 있었다. 북경에서 나흘을 쉬고 있었어도 만리장성엔 가기 싫
었던 사람이 나였으니, 그가 진시황릉의 거대함을 보는 동안, 나는, 어느 한 토용의
등판에 새겨진 도공의 이름을 읽었다.)
2
부디 그여, 나를 칠종칠금하시기를
세상 전체를 병풍처럼 펼치며 불어오셔서
지나치게 충분하고 하염없으시기를
한없고 속절없으시기를
나는 이제 그의 수다가 남긴 수많은 말의 뿌리들 보네
백 개의 손가락을 가진 거인처럼
무수한 잔뿌리 하나하나가
나에게 피곤한 말을 건네네
나 그 잔뿌리에 묻은
거뭇거뭇한 흙의 입자들 보고 있다네
항상 열려 있었으므로 아예 입구가 닳은
그의 생도 언뜻언뜻 보이네
나는 견딤의 힘으로
견디며 살아왔네
왼발을 내디디며 오른발을 걱정하고
숨을 내쉴 때 들이쉴 숨 준비하느라
나는 정신없었네
쌀 한 알에 새겨진 반야심경 같은 나를 그가
반복해서 읽을 때면
그의 우주를 움켜쥘 만할 손바닥에서
나 기나긴 낮잠을 자곤 하네
모래처럼 그 손가락 사이로
그러나 나는 항상
빠져나와 있네
[가지않네 모든것들*]
지난한 종이들 너무 많아라
정든 세상, 지루했던 스무 살들이여 잘 가거라
공터에 나와서 그대와 나
어두운 그림자처럼 우두커니 서서
식는 불꽃 바라보고 있다
나무 막대로 한 번 뒤적일 때마다
작은 불꽃들 위로 위로 솟는다
그대 옛여인과 내 옛남자의 사진
한데 섞여 재가 되고 있다
수많은 한숨과 적절한 외로움의 나날들
그대 일기장과 내 일기장
몇 권의 노트로 요약되는 우리의, 그렇게 무관했던 세월들
한데 섞여 재 될 수 있으니
뼈아프게 행복하여라
나는 석유 붓고 그대 성냥을 긋고
저 지리한 편지들과
시효 지난 약속들 다 타는 동안
부디 그대여
저 먼 곳으로 날아가 보렴, 그대 여자가 살던
그 동네로, 그대 외로운 수음의 날들이 견뎌낸
그 옛집으로 날아가렴, 훠이훠이 그렇게
그곳에 마음 두고 몸만 오렴
저걸 봐, 정발산 저쪽으로 쓰러지는 저 해를,
마지막처럼 자기의 빛을
온 마음으로 산란시키는 저것을
그러나
내일 또 반복되는 저 석양을
그대는 다 타 버린 우리의, 그러나 각자의
내력을 움켜쥐며
아, 따뜻하다
하며 웃네
너무 다르게 살아왔어도
거기서 거기인, 그렇고 그런
짧은 청춘의 흔적들 이제 한 줌 재가 되었다
새카매진 손 마주 잡고
우리 현관문을 연다
그대와 나, 두 켤레의 신발이
현관에 남는다
* 함성호의 詩 「오지 않네, 모든 것들」에 답하다.
[음력 제13월]
운명적으로 입 앞의 것을 집어먹은 비둘기, 제 몸을 못 가누기 시작한다 함부로 파닥
파닥대는 저 새의 날개는 날기 위한 용도가 아니다 고통을 표현하고 무덤을 파는 저
두 날개, 독이 번지는 그의 육체는 이내 아스팔트 위에 밀착된다 몇몇 대의 차바퀴가
그의 생을 짓뭉개고 지나갔다 그가 평생을 휘젓던 무한 창공은 그의 무덤이 되지 못했
다 결과적으로 그는 길을 선택한 셈이다 포처럼 납작해진 그는 길 위에 보잘것없이 포
개어졌다
이제 당신이 무익조가 아니라는 걸 아시겠지요
당신은 동천의 즈믄 밤,
신의 빛나는 눈썹을 꿈으로 맑게 씻었던,
老시인의 노래 속에 나오던
그 매서운 새입니다
그걸 알고 시늉하며 비끼어가십시오
당신의 구곡간장은
삭망의 변화무쌍한 하늘 어디고 날아갈 수 없이
지리합니다
내 역법은 당신의 파다거림을 받아들였습니다
나의 달력엔 가장 빠르게 둥글어지고, 가장 느리게
야위어가는 음력의 한 달이 만들어졌습니다
새가 멈춘 달, 그 일 개월을 노닐다 가시지요
저는 평생이라는 찰나를 태양에 비껴 서서
있습니다 아무도 우리를 그 어떤 절기 속으로
포함시키지 못할 것이며,
유족해진 시간에 당신은 여기를
지옥이라 말하시고,
고통에 대한 결핍감으로
진저리를 치소서
[우리는 찬양한다]
세 장의 달력을 한꺼번에 뒤로 젖혔다 정확히 석 달,
그 동안 우리는 매일 밤 전화를 했다 밤새
낡은 말을 하고 그 말을 믿었다
믿으려고 애썼다 한 줄의 글 쓰지 않았다
편지 보내지 않으니 오는 편지 없었다
단 하루의 日記도 없이 백 일을 보냈다 우리는
서로에게 주인을 강요했다 노예로
삼아달라고 밤새 서로를 설득했다 그렇게
백 일을 보냈으나, 백 원짜리 폭죽처럼
입술은 건드리는 족족
펑펑 터졌으나, 속쓰리고 머리 아픈 아침만이 남은
몫이었으나
한 번의 후회도 언급한 적 없었다 불안함
없었다 비 없었고 빛도 없었다
그저 지루한 인생의 백 일을 도려냈다는
큰 몫을 우리는 찬양했다
[ 바다를 보러 가야겠다 수많은 그를 수
장하고 돌아선 바다 보러 가야겠다 내 눈
물로 그 수위를 높였던 동해바다에 가야
겠다 먹장구름 삼키며 사나운 파도가 나
를 삼키며 나는 세상을 삼키며 세월을 물
쓰듯 썼던 그 시절들 보러 가야겠다]
내가 신화 속에 존재할 먼 미래에 대해 궁리하다가, 나는 미래를 발길로 찼고 현재
와 결별했다 딱딱한 의자에 앉아서 생소한 창밖 응시하다 보면, 고스란히 실내를 되비
추는 창이 보이고 그곳엔 내가 허공의 실내에 화분처럼 놓여 있기도 하다 멀리 한 줄
로 세워진 아파트 불빛이 보인다 이 빠진 불빛 한 군데가 마저 줄을 채운다 거기 사람
이 왔나 보다 여기도 사람이 있다
창문을 흔들어대는 낯설고 억센 바람, 그, 억센 손아귀와 싸우다 실내에서 지쳐 버
린 이 영혼 하얗게 타고 있다 가벼운 입김에도 휙, 흩어지게 될 것이다 나는 온 청춘
을 저속하고 불결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거적 같은 몸뚱이를 아무 데나 두고 자 버
렸고 내키는 대로 아무 꿈이나 불러들여 가위눌렸었고 바퀴벌레 우글거리는 헌 집처럼
오래오래 나를 비워두웠었다 때가 온 것인가, 선회하는 멸망이 보이고 아주 달게 저무
는 세기말이 보이고 나는 늙어가기보다는 꺾여가고 있음을, 헐렁헐렁한 제스처로 변두
리골목을 어슬렁대고 있음을, 세상의 가십거리를 들어주다 내뱉은 욕설에 뚝뚝 부러지
고 있음을 알게 되었고 그것은 기분 좋고 바람직한 일이 되어 버렸다
공명되는 악기보다 더 비었으면 비었지, 싶은 마음들이 백화점 세일축제에 붙들린
풍선으로 매달려 있고, 아직 세상에 내건 문패가 없음과 그 문패가 마모될, 마모되어
다 지워질 세상에 대해 나는 기립박수를 보냈고, 가장 좋은 것에 대해서 한 마디도 발
설하지 않은 채 내가 하루, 하루를 살아내고 있음을, 꿰매 입지 않고 찢어 입는 시대
에 태어났음을, 뒷산에서 희미하게 들려오는 약수행렬의 야호, 를 점호로 삼는 야행성
들이 컴퓨터 통신 대화방에서 불개미처럼 득실거리고 있음을 못내 만족스러워하며 안
도의 한숨을 내쉰다 우리는 전통이란 허깨비의 발뒤꿈치를 잠시 보았을 뿐, 그 허상을
숭배한 한때는 우리 인생의 양념이었을 뿐, 우리는 역사를 배반하기는커녕 구경조차
못 했으니 현실과도 자연스럽게 결별하는 것임을
내 삶의 목적은 천년 동안 잠을 자는 것, 나의 수면은 시대에 대한 예의이며 자비
이다 사나운 파도가 지형을 바꾸며 나의 수면을 깨우지 않은 채 모든 것을 훼손할 것
꿈꾼다
[주문을 외다 2
- 타르코프스키 ]
선하게 만들지 마소서
그대의 눈이, 손이, 혀가 닿는 내 살갗과
내 살갗이 아닌 것
무섭습니다
저기 눈부시게 하얀 소금밭은 썩지 않고 있습니다
썩지도 않지만, 어떤 생명도 자라지 않습니다
선의 과잉은 언제나 악으로 보입니다
부디
그대 몸이 닿는 곳마다 재앙이 오기를
내가 알거나 알지 못하는 신이여,
더 낳을 죄 없어 삶이 황폐합니다
이 육신은 죄의 권세도 누리지 못하고
낡았습니다
악의 끝이 더할 나위 없이
달고, 시고, 고소해서 그렇다고 믿기 때문에
그 마지막에서 설탕처럼 하얗게
반짝이며 웃고 싶습니다
[병들어 행복합니까]
일파만파지요 당신의 다녀감은
다녀가지 않음은 만파억파입니다만
감정을 적대시합니다만
육신이 꺼내놓은 융단에서
쉬려고 합니다만
관계치 말아주십시오, 당신은 한 번도
아니오, 라고 말씀하지 않는군요
좋은 버릇입니다만
악몽은 행복으로 둔갑하여
오후 한나절을 나에게
헌신해주었다
넌 상처를 전파하는 종파의 지도자
나의 꿈이 너가 될까 봐
전전긍긍하시길
나는 난해한 말들을
창가에 심어두었고
가끔
물을 주었고 그 뿌리는
그리하여 썩었다
우리는 화랑교에서
다리를 절며 걸었다
절던 우리의 다리는
서로 방향이 달랐다
기우뚱
한번 어깨가 멀어지면
다음은 맞닿지만
그때마다 나는 되도록
시선을 멀리 두었다 관악산을 장악한
아카시아들이
주먹마다 흔들고 있는 백기를 보고
어지러워했다
그 지독한 향기들
눈 속의 솔가지 꺾어
이내 뜻을 알리리라던 단호한
사랑의 고백들은
나로 인해 무력하리라
그 솔가지 꺾어들고
잔 세어 술 마시듯
세어보리라
너가 비운
내 술독에
어떤 사내들이 취해 돌아서는지
돌이켜 볼 것도 없다
너로부터 멀리 가려
할 때마다 내가 당도한 곳은
너의 창, 그럴수록
생은 납덩이처럼
무거운 그림자를 키워가지만
아무려면 어때,
뭇 사내들이
그 그림자에 와
더위를 피하며
쉬었다 가든지
말든지
당신의 눈물로 나를 침례하지 말아 주십시오
저녁은 오지 않을 것이고
와도 소용없습니다
당신도 마찬가지입니다만
병들어 행복합니까
[ 손 ]
내 오른손에 만져지는 왼손
내 왼손이 느끼는 오른손에는
애인의 손맛에 취해서 청춘을 망친 자들이
요약되어 있다
악기
숨구멍
마음을 감싼 이 푸대자루를 조여맨 자국
정들면 지옥이라는 말의 증언대
'안다'라는 말의 산 증인
오래도록 밟아서 만든 길
본래의 천성을 어지럽힌 장본인
그럼에도 불구한 내 천성의 실마리
말보다 솔직해서
말보다 미더워서
그리고 무엇보다
말이 한번도 받지 못한
'이해'라는 걸 받아 보았으므로
더할나위없는 지복을 누렸던 손
마음의 바람기
마음의 육갑
마음의 단도직입
마음의 주인나리
만지는 쓰는 전화를 걸고 그의 발을 씻어주고
주먹을 쥐는 형제를 염하는
때리는 훔치는 속이는 묶는 뜯고 찢는
은밀함의 극치이며 드러남의 극치인
마음의 가장 비천한 식객
마음의 천형
손이 먼저 저지른 죄들로
인류는 날마다 체한 채 지구를 돌린다
종생토록 죄값을 치러도
손이 있는 한 반성하지 않으며
[대체 식량]
르완다의 어린이들은
주유 중인 군용트럭에 달려들어
손에 쥔 넝마조각에, 새어나온 가솔린 묻혀 빨면서
굶주림을 이긴다
하루치 신선한 산소를 공급하는
oxygen salon의 영국인들은
튜브를 코에 꼽고
비치 체어에 누워 있다
산란기의 연어 떼를 잡아먹고
터질 듯 배가 부른 알래스카 불곰은
연어의 눈알만 빼먹으며 습관적으로
연어 사냥을 한다
먹는다, 라는 관성이 餓死 이후를 이끌어간다
꿈이 아닌 곳에 팔아먹은 잠
시만 읽어도 배불렀던 시절
꽃다웠던 한때를 추억하는 어머니
처절한 허기를 잊기 위해서라면
고행중이었던 붓다도
대마잎쯤 질겅질겅 씹었으리라
내가 꾼 꿈들이
내 꿈의 포식자가 될 때까지
대머리독수리처럼
썩은 내 잠을 그리하여 쪼아댈 때까지
조악한 은유를 나는 우물우물 씹는다
완벽한 아사만이 유일한 대체식량이 될 때까지
[행복하여]
허전하여 경망스러워진 청춘을
일회용 용기에 남은 자장면처럼
대문 바깥에 내다 놓고 돌아서니,
행복해서 눈물이 쏟아진다 행복하여
어쩔 줄을 모르던 골목길에선
껌을 뱉듯 나를 뱉고 돌아서다가,
철 지난 외투의 구멍 난 주머니에서 도르르르
떨어져 구르는 토큰 같은
옛사람도 만났다 오늘은
행복하여 밥이 먹고 싶어진다
인간은 정말 밥만으로 살 수 있다는 게
하도 감격스러워 밥그릇을 모시고 콸콸
눈물을 쏟는다
[학살의 일부 6
- 연애하다]
피곤하다 털어놓고 싶었어
성냥으로 초에 불붙이던 당신이
힘들어, 먼저 말해 버렸지
촛불의 끝을 만져 보고 싶어
뭉뚝한 대로 예리한 대로 조용히
열 내고 있는 끝
중간도 촛불이기는 해
검지손가락 휙, 지나가도 뜨겁지 않은
당신도 사랑이겠군
나도 헤프고 싶어 헤퍼서 아프고 싶어
내가 얼음에 불을 붙여 볼까
에스키모처럼 날고기를 먹어 볼까
나는 쉽게 익어 버렸어, 아니
쉽게 얼어 버렸는지도 모르지
왜 가운데엔 파도가 없지
바다 한가운데도 사람이 살까
얼음에 불을 붙여야겠어, 목젖을 삼키면서
웃음 터트렸지
차라리 화를 내 봐, 라고 당신이 관대하게
말하던 바로 직전에
나도 아프고 싶어
내가 내 고기로 배 채우면서 과식하고 싶어
[ 벽 ]
무당벌레 한 마리가 재떨이에 빠졌다
뒤집어져 다리를 허우적댄다
크고 듬직한 덩치 골라잡고 바로 일어서려 한다
커다란 담뱃재를 잡았다
다리 끝에 생존을 압축시키고 이내
반쯤 일어서고 있다
제 몸 몇 배의 부피지만 무게를 비운
담뱃재와 함께 다시 나자빠지고 만다
부피에 생사를 거는 어리석은 무게
등짝을 이용해 어떻게든
단단한 벽이나 닿아야
다시 날 수 있다
딱딱한 밀폐는 대개 문이 될 수 있다
열고 빠져나가는 문이 아니라
짚고 일어서는 문이다
견고한 끝에 가 닿으려면
멀고멀었다 가볍게 보이지 않는
가벼운 재가 보일 뿐이다
* 김소연의 에세이
[ 끝이 보이는 맑은 날 ]
끝이 보이는 맑은 날
어느 곳에선가 그대를 읽고선 이상스레 마음이 울렁댔다. 그대가 아직도 꿈꾸고 방황
하고 살아있고 '계획한다'는 사실 때문만은 아니다. 그대가 뱉은 한마디 한마디에 대
해 아직도 내가 예민하게 반응한다는 그 사실 때문만도 아니다. 여러 가지 복잡한 잡
념들이 우왕좌왕, 동분서주하며 내 머릿속을 뛰어다닌다.
나는 그대가 만들어 놓은 말들에 어쩐지 불안하다. 그대는 그 사이에 무얼 본 거 같
으다. 분명히 무얼 봤다. 그게 그대의 삶에 깊이 반영될까봐 무섭다. 이 짧은 사이에
그대가 엿보게 된 것은 무엇일까. 나는 그 간극에 대해 설레다 못해 두려운 거다. 부
디 내가 따라잡을 수 있는 지경 안에 그대가 속해 있기를......
건달 乾達처럼 정말로 아무 것도 하지 않게 되기를 바랬던 짧은 방황의 시간들에, 더
없는 반려자였던 그대를 상기하는 나는, 기억해서는 안될 것들을 기억하고 있는 이상
한 자책과 함께, 이제는 반려자가 아닌, 더 이상은 '추억' 이외의 것이 아닌 그대에
대한 호감과 반감이 이상스럽게 교차되어 있어 외롭다.
나는 가끔 그대를 훔쳐보곤 한다. 마음의 고음들이 심하게 갈라지고 정신의 호흡도
예전같지 않으며, 그대의 윤곽과 눈빛이 예전처럼 선연히 빛나지도 않는다. 그러나 그
대에겐 그런 거 외의 다른 것이 - 더 중요하고 핵이 되는 무언가가 - 있어서 그 퇴락
함들이 내 즐거움을 깎아내린 적은 없었다. 그대가 내 청춘의 한 모퉁이에서 풍미했던
세월들에, 나같은 피래미가 떼를 지어 몰려다니고 있다는 '그게' 그대의 뒤에는 보인
다.
그런 네가 그런 생각들을 하고 있었구나…… 그 한숨, 그 웃음, 나는 헷갈리기 시작
했고, 심한 멀미가 나기 시작했고, 그대의 신념에 이상한 화학반응이 일어나기 시작했
다.
꽤 길게 비가 왔고 세상은 차분하게 넓어졌다. 가시 거리가 너무 멀리 물러난 자유
로를 달리며 나는 그대를 견딘다. 그대의 소리와 그대의 냄새와 그대의 허상을 한사코
견딘다. 갓길에 차를 한참동안 세워두고 나는 한강을 바라봤다. 이름을 알 수 없는 철
새들이 더러운 물에 깃털을 적시고 있는 것을 보았다. 한없이 익숙한 배경이 되어 버
린 강 건너의 세계도 보았다. 그 너머의 세계에는 그대와 내친 걸음으로 달려갔던 어
떤 극이 보였다. 나는 요즘 세상에게 실연당한 느낌이다. 내가 연애하고 있다고 믿는
모든 국면들에게. 그 투명하게 반짝이는 그대와 나의 극을 바라보는 일이 그래서 더
힘들었다.
월간 <PAPER> 1999년 9월호
[ 사전 ]
[사전/***]
투명해서 보이지는 않는,
고체가 아니어서 형태가 없는,
하지만, 필경은 튼튼하고 어마어마한,
자기자신이 직접 빚어 제작했을
척추를 가진 여자,
그래서, 神이 인간에게 심어준
딱딱하고 부자연스러운 척추를
진심으로 조롱할 자격이 있는 여자.
팀버튼의 화성침공에서의
지구인과 화성인처럼,
커뮤니케이션의 완벽한 불통을
느끼게 하는 여자, 그러나
그 불통이
소통보다도 더 아름답고 눈물겨운,
역설적인 '합일'의 짜릿함을
제시하는 창문을 소유한,
아침처럼 눈이 부신 여자.
반사적인 행동과
생각이 모자랐던 말들과
불성실했던 글이
발 앞에 던져졌을 때에는,
사생결단하며 물어뜯는
불독 같은 여자,
그러므로, 나태와 해이함과
무책임함과 교만함을
비로소 버리고 싶게 만든,
인간 개조의 초능력을 소유한 여자.
글로써 나의 시각을 멀게 하고,
말로써 나의 청각을 명민하게 하고,
몸으로써 내 촉각을 쥐나게 하고,
체취로써 나의 후각에 인두를 댄,
그러니까 오감 모두를 점진적이고 순환적으로
홀리게 만든,
최초의 인간.
친구가 되기 싫어서
도망다니고 싶었던,
지금도 '절연'의 유혹을 못 버리게 만드는,
그러면서도 평생동안
그 방의 창문을 지키는 방범대원이 되고 싶게 하는,
한번쯤은 흠씬 때려보고 싶은,
한번쯤은 그 앞에서
10년치의 눈물을 펑펑 쏟고 싶은,
<사전/***>을 어떻게 고쳐 써도 미진할,
이상한 열대의 나라에서
내가 가장 그리워했던 '사람'.
내가 이 지상에서
가장 지긋지긋해하고 가장 연민하며
가장 혐오하고 가장 걱정하는,
가장 큰 멍에이자 가장 큰 은혜인,
짧은 회상만으로도
울음을 터트리게 만드는,
내가 유일하게 '애증'하는 여자인
나의 엄마
의 환영이 오버랩되었던
최초의 여자.
(98. 05. 23. 06:50, HiTel sg68 '이다')
[ 노정 ]
나는 궁극적으로, '노정'이란 단어가 좋다. 혹은 '도정'.
사실에도 가깝고 진실에도 가깝다. 그 단어 안에는 어떤 위선도 없고, 위악도 없다.
다만 '피로'가 있을 뿐이다.
나도 길 위에 있다. 한때는 길 위를 헛전헛전 걷고 있는 중이라고 여겼지만, 요즘은
길 위에 반듯하게 누워서 있다. 한때는 이렇게 멈춰서 길 위에 있는 나를 '포복'해 있
는 중이라고 여겼지만, 지금은 그냥 누워 있을 뿐임을 나는 안다.
따뜻한 열대의 나라에서, 두려운 것은 오직 모기밖에 없는 채, 발 아래 모기향을 피워
놓고 노숙을 한 적이 있었다. 차가 끊겨 택시만 있고, 나는 돈이 없었다. 그 작은 마
을의 모든 숙소에는 빈 방이 없었고, 지칠 때까지 그 작은 마을을 뱅뱅 돌면서 걷다
가, 나는 사람들이 조금 모여 있는 역전에서 배낭을 베고 노숙을 했다.
그때가 그리워라.
노숙에 처할 수 있는 운명도 홀가분할 뿐더러,
추위와 허기에 찌들지 않고 노숙할 수 있는 쾌적한 환경이 아늑할 뿐더러, 발이 확인
하는 대지와 땀이 확인하는 내 육체와 별과 달이 확인해 보이는 하늘이란...
나는 부디 어디에 다다르지 말았으면.
나는 부디 내가 걸어온 길을 망각했으면.
나는 부디 짊어지고 가뿐히 걸을 수 있을 만큼의 물건을 소유했으면.
이제 이사를 한다. 집없고 저축정신도 없는 사람에게 2년마다 새로이 오른 전세값에
적응하기 위해 한 단계 한 단계 평수를 줄이며 하는 이사는 서러운 것이다. 그러나,
그때마다 나는 내가 '노정'에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멍청하게 쌓아놓은 가치없는 물
건들을 버리고 또 버린다. 줄이고 또 줄인다.
모든 길 끝에 있는 따뜻하고 최종적인 불빛만을 염두에 둔 자들과는 상종하지 않으리
라. 모든 길은 성소이다. 아니, 모든 길만이 성소이다. 우왕좌왕 부딪치고 떠도는 미
숙한, 혹은 방황이 업인 자들에게, 들어앉을 안방도 없고 비빌 언덕도 없는 자들에게
나의 이 작디작은, 그러나 무한한 옹호를 보낸다.
처음부터 내겐 어울리지 않았을, 세상의 모든 안방을 버리고 그냥 길로 나앉자.
불끈!
bluebook
(98. 02. 24. 18:39, '망명국가')
[ 두 여자 ]
나는 오늘 두 여자를 만났다.
한 여자는 변덕의 아수라 위를 걸어왔지만,
그 위를 걷는 데에는 아무 변덕없이 올곧게 살아온 여자였다.
또 한 여자는 부유가 너무 피로했으며 그 어떤 것을 '추'로 매달고
무게를 가장하고 있는 여자였다.
그리고 내가 그 두 여자의 사이에 있었다.
우리 셋의 공통점이라고 한다면, 이미 죽을 때를 놓쳤다란 점이다.
아마도 그 중 한 여자는 고개를 끄덕일 것이고,
또 한 여자는 십 년 후쯤? 하고 고개를 갸웃할 것이다.
한 여자는 자포자기의 운명을 이해하고 수용한 여자였고,
또 한 여자는 적절한 타협선을 찾아 안주 중에 있는 여자였다.
나는 그 두 가지를 갓 이해하기 시작한 지점에 놓여 있다.
두 여자에게는 분명히 빛나는 한때가 있다.
한 여자는 분명한 무위의 공간에서, 잠깐 외출을 하여
무위보다 더 멀고 가벼운 곳으로 날아가버리곤 한다. 그런 순간이 있다.
바로 거기. 거기에 빛더미가 켜켜로 쌓여 있다.
또 한 여자는 대개 기운을 구부러뜨리고 접고 접어서
좁은 자기 방에 가둬두려고 하지만, 그래서 그것들이 밖으로 뻗어나가지
못하도록 하지만, 그 힘있고 철없는 기운이 문을 툭 차고 밖으로 삐져나올
때를 스스로 감지하질 못한다. 바로 그때다. 그 불감의 표정 안에는
부처와 갓난애가 공유한 그 맑은 지경이 있다.
정말이지, 아름다움 때문에 죽어버릴 수 있는 운명은 최고다.
bluebook
(98. 02. 16. 08:11, '망명국가')
[ 접두어 '첫' - 고통을 디스플레이하는 법]
어제 저녁식사 중에서 ; 삶의 한 부분을 오려내 고스란히 시로 가져와서는 쓰여진 시
를 놓고 위무받던 시절은 지나온 것 같다. 이제는 내 환부를 이미 알레고리화해놓거
나, 발효를 하거나 아무튼 환치를 시켜놓고는, 그것에 내가 매수당한 다음에야, 그 매
수 이후의 문제를 시로 쓰게 된다.
오늘 전화통화 중에서 ; 얇은 투명막이 둥근 반원을 그리며 나를 감싸고 있었다고 감
지한지 한 오륙 년이 되었다. 그 투명막을 걷어내면 무한창공을 휘젓고 다닐 수 있으
리란 기대를 해온지, 그래서 답답 갑갑해온 지도 그만한 세월이 흘렀다. 그 투명막에
귀를 대고 전자파가 어디서부터 시작되어 오는지를, 그래서 이 투명막을 운영하는 스
위치의 위치가 어디인지를 '깨닫게' 되는 일이 내 숙제였던 것같다. 그런데 그 숙제는
나도 모르는 새에 풀어져 있다. 지금의 나는 빤히 보이는 저 스위치를 누를까 말까
를 고민하고 있는 셈이고, 그러느라 소진과 피로의 와중에 있는 것이다.
대화방에서의 채팅 중에서 ; '살煞'을 처치하려는 노력을 해봤다. 내가 내민 손을 잡
으면 녹아져 내리던 너였던 이들에 대하여, 내 손에 들어 오면 공기를 피식피식 흘리
며 탄성을 잃는 지금의 너에 대하여. 내 손에 담긴 살을 처치하려고 나는, 고독과의
정면 결투를 치룬 말레이시아에다가 이 몹쓸 손과 팔을 짤라 떼어놓고 왔다. 잘한 일
임에는 틀림이 없는데, 간헐적으로 손을 쓰고 싶을 때가 있다. 스위치를 누르는 일.
혹은 너의 심장에 매스를 대는 일. 모든 게가능한 채, 집도를 할 수 없는 관계는 아무
리 자유로운 출입증을 손에 쥐고 있더라도 '결박'에 다름아니다.
내 오류의 원천인 내 안의 표독한 자아를 박멸하기 위해서, 내가 주는 먹이를 받아먹
고 날마다 헛헛해하는 혹은 날마다 체하는 모든 너들을 더이상 연민하지 않기 위해서
내가 정말 할 수 있는 일은, 쓸데없이 물파스 뚜껑을 열어 너와 내 살갗을 문지르지
않는 것이다. 환부를 햇빛에 내어말리며, 햇빛을 향해서 "네가 알아서 해줘!"라고 당
부하고 있는 내가 있다. 천천히 천천히 고통이 나를 밟고 지나가지만, 절박하게, 이
햇빛에게 완치를 기대하는 경건함. 이런 느리고 느린, 그리고 진통의 효능이 부재한
수법에 나를 맡긴다는 의미에서 이것은 마지막이어야 하고, 그리고 처음이라고 명명할
수 있어야 한다.
[ 사전/새 ]
새는
맞아
치명상을 입어도
힘껏 난다
그리고
날면서
죽는다
죽어서
비로소 땅에 떨어진다
새는
달아나려고 계속 난 것일까
달아나려고 난다면
죽어서
비로소 달아날 수 있다
떨어진 것은
단념했기 때문일까
그렇지 않으리라
날면서 죽은 것이다
깊은 상처에 지쳐
단념하고
떨어져
그리고 죽은 것은 아니다
나는 모습 그대로
그의 삶은 직각으로 방향을 바꾼 것이다.
-다까하시 기꾸하루, <새>
때로 생명의 종자보다 표현의 종자에 더 깊은 신뢰를 보내는 나를 발견하곤 한다. 그
때마다 불길한 예감이 든다. 그러나 친숙하다. 스물두 살때 썼던 "언제나 박물관"이라
는 내 소설을 펼쳐 보았다. 저 <새>라는 시를 다시 읽고 싶어서였다. 그 소설에는 서
른이라는 나이에 대해 "생애의 확장을 다 이루고 수렴을 해도 용서가 되는 나이"라고,
스물 두 살의 내가 써놓았다. 전적으로 맞는 말이지만, 비현실적인 말이다. 왜냐하면
나는 이놈의 "수렴"하고자 하는 균형감각들을 아주 비극적으로 해석하고 있으니까.
나는 모습 그대로, 직각으로 방향을 바꾼 한 삶을 안다. 그는 직각으로 낙하하는 저 "
새"와는 달리, 직각으로 상승한 것 같다. 기화되는 물처럼, 가볍고 아우트라인도 없
고, 심지어 기표마저 없는 기의처럼.
bluebook
(97. 05. 27. 05:06, HiTel sg68 '이다')
[ 정지 ]
꽤 긴 시간을 그냥 흘러보내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그리곤 외면한다. 이 세상에서 직
시하지 말아야 할 것이 몇 가지가 있다면, 아마 이 경우도 그 중 하나에 포함될 것이
다.
지금 나에게는 모든 것이 비워져 있다. 시간도 인간도 공간도 지금의 나는 운용하고
있지 아니하다. 그런 점에서, 아주 한심한 한 지경에 다다랐다는 점에서 나는 나에게
짐짓, 결심한듯, 우렁찬 박수를 치고싶을 때가 종종 있다. 가령, 아주 사랑스러운 친
구와 내용 없는 전화를 마치고 그 여운을 음미할 때, 나는 거의 나를 식물화한다. 작
은새가 잠시 앉았다가 떠났을 때에 작게 찰랑대는 나뭇가지가 되어서, 잠시의 출렁임
을 그냥 맞닥뜨린다. (대개 나는 그때 그 찰랑이는 나뭇가지를 바라보던 사람의 시각
이곤 했지만) 그때 1분, 2분, 3분, 4분... 짧은 시간이 흐르면 나는 다시 무대세트처
럼 아무 기미도 내색도 없는, 다만 나뭇가지가 되어 있다. 그 회복의 탄력성. 그것은
아무것도 운용하지 아니하고, 그냥 다만 '있는' 무위의 진수처럼 여겨지곤 한다. 삶
에 있어서의 '정지'를 나는 처음 경험하여 본다. 가만히 있어도 흘러가는 게 시간이고
보면, 나는 어쩌면 지독한 마이너스적 운용을 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마
이너스 내지 허송이라고 말하기에는 내 깨달음들이 너무 굵다.
어제는 집에서 20분 거리에 있는 한 시골에 다녀왔다. 가서, 톱밥을 깔고 앉은 젖소
들을 바라보다가, 뿔이 잘린 사슴들을 바라보다가, 엉덩이까지 실룩실룩 흔들어대는
황구들을 바라보다가, 요란스레 목청을 높이는 거위들의 노란 주둥이를 바라보다가,
허허벌판 (그러나 가까이 들여다 보면 푸릇푸릇한 싹도 나왔을)으로 시선을 돌렸을
때에 나는 매를 봤다. 매가 둥글게 큰 원을 그리면서 날다가, 그 허공에서 정지하는
모습을 봤다. 그는 허공 전체의 흐름을 운용하고 있는 듯해 보였다. 그래야만 그 허공
에서 정지할 수 있으리. 그때 매는 무엇을 보았을 것이다. 무엇을 보고, 그리고 정지
하려고, 아주 가늘고 작게 날개를 파르르르 떨며 운용하고 있었다.
[ 행복 ]
한 보름 정도를 계속 들국화 2집을 듣고 있다.
마르고 닳게 들을만한 다른 것들은 이미 다 들었고, 이제 이거 하나 남았다. 어둡
지 않고, 사람들이 알아준다고 다소 들떠도 있고, 귀에 편안하고, 때로는 무지 맑은
경지로 나아가는 이 들국화 2집. 예전엔 바로 그런 점들 때문에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
는데, 요즘은 참으로 다르다. 물론, 거기에는 "밖에는 눈, 눈이 오네"를 노래하는 허
성욱이 있다. 허성욱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무대 위의 피아노 위에 혼자 앉아 약간 턱
을 쳐들고 노래를 하는 그를 본다.
들국화2집 속에 묻어있는 맑고 어린 그를 회상한다는 것은, 그시절 그때에 그들이
얼마나 행복했을지를 느껴보는 것하고 같다. 너희들은 그때 되따 행복했지 그치. 나
는 어둑어둑해져가는 작은 방의 침대 위에 태아처럼 웅크리고 모로 누워서 모국어로
된 노래를 듣는다. 소리를 최대한으로 키워놔서 노래 외엔 아무 소리도 안 들린다. 너
희들은 지금 그때 정말로 가장 행복했지 그치.
이들이 행복한 것 같아서 나는 아주 조금 의식을 추스린다. 어젯밤부터 비오듯 땀
뻘뻘 몸이 뜨거워지다가 금세 턱이 달달거리며 몸이 식다가를 몇십번 반복했다. 그렇
지만 약을 먹거나 병원에 가거나를 하지 않고 (약도 없고 병원도 어디 붙어있는지 모
르니까), 행복의 정점에 있어보이는 얘네들의 노래로 치료를 해보려고 한다. 벌써 치
료가 되고 있어 보인다. 암만 생각해도 행복하다라는 냄새에는 마취성분이 있는 것 같
다.
- 쿠알라룸푸르에서
[ 사랑을 완성하기 위하여 ]
'사랑을 완성하기 위하여'라는 제목을 한참 들여다 본다. 제일 마음에 드는 단어는
'하다' 라는 동사파생접사다. 그 단어가 '사랑'뒤에 붙지 않고, '완성' 뒤에 붙어서
안쓰럽다. 그게 참 마음을 끈다. '사랑'이라는 이름의 무수한 결례들 앞에서 나는 그
결례의 안쓰러운 수작들에게 길고 긴 박수를 보낸다. 그대여. 부디 내 앞에서 함부로
이길. 그리고 그것이 그대의 천성이길. 그리고 그것이 그대와 내가 '하려던' 그것이
길. 그러나 고착되지 않은 의외의 마음이 피곤하다. 몸의 쇠함과 마음의 우왕좌왕.
이 두 개의 귀가 각기 다른 소리들을 듣는다. 나는 피곤하다. 나는 눕고 싶다. 나는
잠들고 싶다. 나는 배부르고 싶다. 나는 노엽다.
오늘은 해지는 것을 보며 걸어가서 국수를 사먹고, 달이 뜬 것을 보며 걸어 집으로
돌아왔다. 지는 해와 뜬 달이 문제가 아니고, 언제나 그렇듯이 그 배경의 넓디 넓은
공허가 문제다. 빈 넓디 넓은 투명한 그 허공을 가시적으로 만들기 위해서 해도 지고
달도 뜬다. 나는 언젠간 달의 입장에서 하늘을, 달의 입장에서 해를, 달의 입장에서
지구를 응시하겠다. 그렇게 하면 나는 그대와 나의 이 간격을 메꿔나가는 데에 필요한
말들을 덜 소모하게 될 것이다.
어떤 여자는 혼자 하는 모든 일을 의식을 행하듯 하는가 하면, 또 어떤 여자는 함께
하는 모든 일을 의식을 행하듯 한다. 의식을 행하듯 하는 목욕보다 의식을 행하듯 하
는 섹스에 대해 더 언급하고 싶은 게 나다. 왜냐하면, 내가 타자와 시공을 공유할 때
에 비로소 나를 물성화시키기 때문이다. 내가 부분임을 인지할 때에 나는 겸허해지고
경건해지기 때문이다. 물성 전체가 한눈에 들어올 때에 나는 완벽한 허기를 만끽한다.
그 포만감이 좋다.
그러나 나는 이제 혼자에도 함께에도 허기가 진다. 포만하지 않은 이 허기를 정면으
로 응시하려는 노력을 해봤다. 그리고는 나는 이렇게도 저렇게도 쓸데가 전혀 없는 이
미지근한 허기를 급속냉동건조하여 포장하려고 한다. 이런 방법을 쓸 수 있는 나이가
됐다. 허기를 완성해버리는 것도 사랑을 완성하는 한 방법이다. 나는 내게 주어진 역
할을 수행한다.
- 하이텔 <이다sg68> 게시판
[ 추억이라는 이름의 정육점 ]
늦은 귀가. 지하철 손잡이에 매달려 서울의 땅 속을 지나갈 때에, 차창에 비친 자
기 얼굴을 응시해 본 적 있는 자들은 알리. 그때에 자신의 얼굴이 도대체 살아 있다고
할 수 없을 정도로 파리하다는 걸 느낀 자들은 더더욱 알리. 늘 사랑을 좇아 지하철처
럼 순환하고, 사랑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 종점에서 종점까지를 피곤하게 왕복하고,
그리고 사랑의 목적지에 가닿기 위해 한번쯤 갈아타본 자들은 이미 알리. 한 번도 사
랑을 정면응시해 본 적이 없음을, 한 번 내지 두 번쯤 정면 응시를 해보았다 할지라도
쓰디쓴 열매만 허술하게 양 손에 담아쥐고 돌아선다는 사실을, 그러나 이러한 째째한
사실을 면서기처럼 담담하게 기록해두곤 하는 자들은 이미 내렸으리. 아무렴. 언제나
당역에서 하차할 줄 아는 당신, 아니, 하차하는 그곳마다 언제나 당역인 당신.
나는 언제나 어리석어서 당역을 지나치고 내렸고, 이제는 나, 그냥 어리석어 버리
리라 생각하는데, 그래서 언제나 더 가버리고, 갔던 길을 다시 돌아오고, 그래서 더
피곤하고……. 그리하여 집 앞 정육점의 붉은 조명 앞에 한참을 서서 구경한다네. 내
사랑도 저처럼 싱싱하게 냉장되어 있음을, 저 짐승의 생살처럼, 어느 부위 하나 버릴
게 없음을, 사랑의 꼬리뼈, 사랑의 안심, 사랑의 갈비살, 그 하나하나를 바라보다,
내 추억의 정육점을 지나치며 집 앞의 골목에서 생각한다네. 추억이 나의 허기를 채워
주고, 추억이 나의 갈증을 축여준다는 이 행복함에 대하여, 고기를 씹듯, 추억을 씹으
며 나는 생각한다네. 날마다 나를 계몽하는 추억에 대하여, 추억하는 자를 날마다 계
몽하는 추억에 대하여, 나를 잠재우는 따뜻한, 나를 운반하는 든든한, 나를 위로하는
정갈한 추억에 대하여.
이제는 신기할 것도 없지, 찢어지고 까지고 피를 흘리던 상처들이 환한 추억으로
환치되어 있는 이 진풍경이. 늦은 귀가. 아옹다옹했던 일상으로부터 받은 째째한 상처
들의 진통제가 되는 이 황홀경이. 나는 날마다 하루만을 살고, 나는 날마다 이 하루를
추억에게 헌납한다네.
- 월간 <PAPER> 1999년 5월호
김 소연님의 홈페이지
김소연 - <妙有>
http://earth.interpia98.net/~catjuice/
카페 게시글
--시를 위한 시
◈김소연 시인에 대하여
가송테리아
추천 0
조회 59
01.05.05 09:54
댓글 0
다음검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