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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우리나라의 성씨 중에 안씨?
고구려 : 안(晏)
신라 : 안(安)
중국 : 안(晏)
즉, 신라 안씨(安氏), 고구려 안씨(晏氏)가 있었고, 중국에도 안씨(晏氏)가 있었다.
참고 : 삼국시대 안씨 또는 안씨 추정 인물 http://cafe.daum.net/ahncham/DTkY/46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34706
안류(晏留)
생몰년 미상. 고구려시대의 관리. 동부(좌부=순노부) 출신이다. 191년(고국천왕 13) 어비류(於卑留)와 좌가려(左可慮)의 반란을 진압한 직후 고국천왕(故國川王,재위 179∼197)이 새로운 인재등용정책을 추진할 때 고구려 4부(部)가 함께 동부의 그를 천거하였다. 이에 왕에게 불려가 국정을 맡을 것을 부탁받았으나, 사양하고 대신 을파소(乙巴素)를 추천하였다. 을파소와 같은 훌륭한 인재를 천거한 공으로 대사자(大使者)에 제수되었다.
『삼국사기(三國史記)』안류(晏留) 관련 내용
고국천왕의 아버지인 신대왕은 명림답부의 도움을 얻어서 왕위에 올랐다. 명림답부는 신대왕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로 강한 권력을 가졌고 그가 속한 연나부 세력은 왕실에 버금갈 만큼 강해졌다. 왕위에 오른 고국천왕은 그들의 협조 없이는 나라를 다스릴 수가 없으므로 연나부 우소의 딸을 왕비로 택했다. 우씨왕후의 친척들 가운데는 중외대부 어비류와 평자 좌가려가 있었다. 이들은 왕후의 친척이자 세력이 강한 연나부의 귀족이라는 배경을 믿고 자신들은 물론 아들과 동생들까지도 모두 교만하고 사치했다. 고국천왕도 친척이나 다름없으니 자신들을 어쩌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자기 멋대로 행동했다. 나라의 법을 어기고 남의 자식들과 집과 밭을 마음대로 빼앗아 자신들의 배를 채웠다. 힘없는 백성들은 늑대 같은 놈들이라며 원망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그들의 못된 행동은 도가 심해졌고, 마침내 고국천왕에게도 알려지게 되었다. 고국천왕은 아무리 왕후의 친척일지라도 나쁜 짓만 하는 그들을 그냥 둘 수 없어서 벌을 주려고 했다. 그러자 좌가려 등은 반성하기는커녕 자신들이 속한 연나부의 힘을 모았다. 세력이 어느 정도 형성되자, 좌가려는 왕궁으로 쳐들어가 반란을 일으켰다. 고국천왕은 수도에 있는 군사들을 동원하여 반란을 진압했다. 반란을 집압한 후 고구려 9대 고국천왕 13년인 서기 191년 4월, 왕은 신하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최근 나라의 기강이 어지러워져서 사사로이 돈으로 벼슬자리를 거래하여 능력 있고 훌륭한 사람이 벼슬하지 못하고, 아부하고 능력 없는 자가 벼슬하여 그로 인한 피해가 백성들은 물론 왕인 내게도 미치고 있다. 이는 내가 정치를 잘못한 것이다. 이제 너희 신하들은 4부로 하여금 현명한 사람을 천거하도록 하라.”
고국천왕의 이러한 명령은 훌륭한 신하를 얻어 정치를 잘해 보겠다는 의지를 내보인 것이었다. 고구려는 계루부(고씨왕족), 연나부(왕비족), 소노부(초기 고구려왕족), 관노부, 환나부(순노부) 등 다섯 부족으로 구성되어 있던 나라이다. 이들 가운데 왕실인 계루부를 제외한 4부에서 인재를 추천하라고 했던 것이다. 4부의 사람들은 동부 출신의 안류(晏留)를 추천했다. 안류(晏留)는 대단한 능력과 함께 진정한 겸손과 양보의 미덕을 아는 인물이었다.
“저는 어리석고 속도 좁은 사람으로 나라의 큰 일을 하기에는 부족한 사람입니다. 저보다 더 큰 능력을 가진 인물이 있사오니, 서압록곡 좌물촌에 사는 을파소가 그 사람입니다. 을파소는 유리명왕 때의 대신인 을소의 후손이며, 사람이 의지가 굳고 의젓하며 지혜가 깊고 생각이 큽니다. 다만 세상에 등용되지 못해서 부지런히 농사를 지어 생활하고 있을 뿐입니다. 대왕께서 나라를 다스리려면 을파소를 반드시 등용하시기 바랍니다.”
여러 사람의 추천을 받은 만큼 스스로 나아가 높은 벼슬을 달라고 할 수 있었음에도 안류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안류는 진정으로 나라에 필요한 사람은 자신이 아니라 을파소라고 여기고 기회를 양보했던 것이다.
을파소가 등용되어 정치가 잘 행해지자 고국천왕은 안류를 불렀다.
“그대는 참으로 현명한 사람이오. 처음 많은 신하들이 그대를 추천했을 때 보통 사람이었다면 스스로 나서서 벼슬을 얻고자 했을 것이오. 그런데 그대는 높은 벼슬을 탐하지 아니하고, 진심으로 그대보다 재능이 있는 사람을 추천했기에 내가 을파소를 얻어서 함께 나라를 다스릴 수 있었소. 지금 나라가 잘 다스려진 까닭은 모두 그대의 공이나 다름없소. 그대에게도 대사자 관직을 줄 터이니 열심히 나라를 다스리는 데 힘써 주기 바라오.”
고국천왕은 안류의 공을 잊지 않고 그를 높이 평가했다. 대사자는 국상보다는 낮지만 대단히 높은 관직이다.
“이것은 저의 공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저는 다만 을파소를 추천했을 뿐입니다. 그에게 일을 맡기신 것은 모두 대왕님의 현명하신 판단 때문입니다.”
안류도 고국천왕이 인재를 아끼고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을 알고 을파소와 함께 나라를 다스렸다. 안류란 인물이 없었다면 을파소도 없었을 것이다. 진정으로 남의 장점을 알아주고, 그가 나보다 뛰어남을 알 때는 그에게 양보할 줄 아는 지혜는 결코 아무에게나 볼 수 없는 귀중한 덕목이다.
중국(中國)의 안씨 : 顔氏, 安氏, 그리고 晏氏
중국의 안씨는 안씨(安氏) 외에도 공자가 가장 사랑했던 제자 안회(顔回,BC521~BC490)와 안씨가훈(顔氏家訓)을 지었다는 안자추(顔之推,531∼591) 등의 안씨(顔氏)만 있는 줄 알았는데, 춘추전국 시대 때 제(齊)나라의 귀족 중에 안씨(晏氏)도 있었다.
참고 : 중국 안씨(安氏)의 유래 http://cafe.daum.net/ahncham/DFic/345
참고 : 필리핀 출신 중국 안씨(安氏) http://cafe.daum.net/ahncham/DFic/344
출처 : 기원전 497~403 중국연보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846934&cid=796&categoryId=1535
기원전 481
노(魯) 애공(魯哀公)이 대야(大野)에서 수렵을 하다 기린[麒麟, 성인(聖人)의 출현을 예언한다는 상상 속의 신령한 동물]을 획득(『춘추(春秋)』 기술은 이해에 끝남). 전설상으로는 이해부터 공자(孔子)가 노(魯)나라 역사 저술에 착수하여 노(魯) 은공(隱公) 1년인 B.C.722년부터 획린(獲麟)한 B.C.481년까지 242년간의 편년체(연대순으로 역사 사실을 기록하는 방식) 통사 『춘추(春秋)』를 지었다고 함(오늘날 공자의 『춘추』 저작설은 후대의 유학자들이 『춘추』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지어낸 윤색일 뿐이며, 실제로는 노(魯)나라의 역대 사관들이 오랜 기간을 거쳐 합동 저술한 역사서로 보고 있음). 제(齊)나라 좌상(左相)이자 실권자인 진항(陳恒)이 평소 사이가 나빴던 우상(右相) 감지(闞止)를 암살하고 감씨 일족을 몰살한 후 감지를 총애한 제(齊) 간공(簡公)을 서주(舒州)에 유폐시킴. 후에 간공을 시해한 후 간공의 동생 공자 오(驁)를 27대 군주 평공(平公, B.C.480~456 재위)으로 옹립. 진항은 노·위·진(晉)·오·월 등 사방 강린들과 친선을 유지하면서 민심을 수습하고 민생 안정을 도모하는 한편, 포씨(鮑氏)·안씨(晏氏)·고씨(高氏)·국씨(國氏) 등을 비롯한 제나라의 유력 경대부와 공족 가문들을 제거하고 제나라 영토의 반 이상을 차지해 제의 국정을 농단. 후에 전국에서 100여 명의 건강한 여자들을 뽑아 후방(後房)에 거주시킨 뒤 일가친척 남자들에게 후방을 개방. 그렇게 해서 태어난 70여 명의 아들들에게 진씨(陳氏) 성을 하사하고 이들을 중앙, 지방의 모든 관직에 충당함. 이로써 강씨(姜氏)의 제나라는 진씨(陳氏)=전씨(田氏)의 제나라가 됨. 공자가 노애공에게 진항(陳恒)을 징벌할 것을 청했으나 거절당함.
출처 : 중국 위키백과사전 http://zh.wikipedia.org/zh-hant/%E6%99%8F%E6%B0%8F
안씨(晏氏)
是中國春秋時期齊國世卿家族。晏桓子晏弱、晏平仲晏嬰父子都是齊國的名臣,晏弱輔佐齊頃公、齊靈公,晏嬰輔佐齊靈公、齊莊公、齊景公。父子兩代在齊國政壇活躍了八九十年。前489年,田乞廢殺齊景公的兒子安孺子,擁立安孺子異母兄公子陽生為齊悼公,晏嬰的兒子晏圉逃到魯國。
이 성씨는 중국 춘추전국시대에 제(齊)나라의 유력한 세경가(世卿家, 유력한 귀족 가문)의 족속이다. 안약(晏弱·晏桓子)과 안영(晏嬰·晏平仲) 두 부자가 모두 제나라의 이름난 신하였는데, 안약(晏弱)은 제경공(齊頃公)과 제영공(齊靈公)을 보좌했고, 안영(晏嬰)은 제영공(齊靈公), 제장공(齊莊公), 제경공(齊景公)을 보좌하여, 부자가 양 대에 걸쳐 80~90년 동안 제나라 정권에서 활약을 했다. 기원전 489년, 전기(田乞)가 제경공(齊景公)의 아들 안유자(安孺子)를 폐살(廢殺)하고 안유자의 이복형이던 공자 양생(陽生)을 제도공(齊悼公)으로 옹립하자, 안영(晏嬰)의 아들 안어(晏圉)는 노(魯)나라로 도망했다.
主要人物
晏桓子 안약(晏弱) 前6世紀初—前556年
晏平仲 안영(晏嬰) 前556年—前500年
안어(晏圉) 前500年—前489年
안리(晏氂)
안부융(晏父戎)
출처 : http://zh.wikipedia.org/wiki/%E6%99%8F%E5%A7%93
안성(晏姓)
在《百家姓》中排第324位。
1. 起源
始祖為晏安,陆终之第五個儿子。而陆终则是祝融氏吴回之子。春秋时代晏氏家族昌盛,为齐国四大贵族之一。秦漢以後世居於山东。
시조는 안안(晏安)으로 육종(陆终)의 다섯째아들인데, 육종은 축융씨(祝融氏) 오회(吴回)의 아들이다. 춘추시대 안씨가족(晏氏家族)은 창성하여 제(齊)나라의 4대 귀족 중의 하나였다. 진(秦)·한(漢) 이후 산동지역에서 세거했다.
2. 分佈
晏姓在大陆和台湾都没有列入百家姓前一百位,算是較少見之姓氏,约占全国汉族人口的0.027%,居第324位。但分佈頗廣,以湖北、四川、江西等省多此姓,三省加起來佔全國晏姓人口82%。
3. 知名人物
안영(晏嬰),東周時期諸侯齊國的政治家與外交家。曾輔佐齊景公,及出使楚國。
안수(晏殊),北宋前期婉約派詞人之一。撫州臨川文港鄉(今南昌進賢縣)人。
안궤도(晏几道),晏殊之子。
안양초(晏陽初),中國早期平民教育工作者。
안자(晏紫) 1984年生,中國女網球員。
출처 : http://zh.wikipedia.org/zh-hant/%E6%99%8F%E5%AE%89
안안(晏安),曹姓,根据《史记·楚世家》记载,祝融氏吴回的孙子,陆终的第五子。陆终有六个儿子:昆吾(樊)、参胡(惠连)、彭祖(钱)、(来言)、晏安、季连。周武王之时,封晏安后裔挟于邾,建立子爵邾国。
안안(晏安)은 조성(曹姓)으로《사기(史記)·초세가(楚世家)》에 기록되어 있다. 축융씨(祝融氏) 오회[吴回, 삼황오제(三皇五帝, 중국 고대 전설 속의 인물) 중 한 명인 전욱(颛顼)이 칭(称)을 낳고, 칭이 노동(老童)을 낳고, 노동이 난 아들이 오회(吴回)라고 함. 전욱(颛顼)-칭(称)-노동(老童)-오회(吴回)]의 자손으로 육종(陆终)의 다섯째 아들이다. 육종(陆终)은 아들 6명을 두었는데, 장남을 곤오(昆吾)라 하고 이남을 삼호(參胡), 삼남은 팽조(彭祖), 사남은 회인(會人), 오남은 안안(晏安)이고 여섯 번째는 계련(季連)이라 했다. 주무왕(周武王) 때 안안(晏安)의 후예 협(挾)을 주[邾, 주(周)대 추국(鄒國)의 본래 이름. 지금의 산동(山東) 추현(鄒縣, 저우현)에 있었음]에 봉하고, 주(邾)나라를 세우게 하여 자작(子爵)으로 삼았다.
안영(晏嬰,?~BC500)
춘추 시대 제(齊)나라 사람. 이름은 영(嬰)이고, 자는 평중(平仲)인데, ‘안자(晏子)’라고 존칭되기도 한다. 평소 검소한 생활을 실천했다. 영공(靈公)과 장공(莊公), 경공(景公) 세 군주를 섬기면서 재상을 지냈다. 사령(辭令)에 뛰어났고, 백성들의 생활에 관심을 가졌으며, 근검절약을 실천하면서 충간(忠諫)을 올려 제후들 사이에서 명성이 높았다. 경공(景公)에게 세금을 경감할 것과 형벌을 줄일 것, 신하의 말에 귀를 기울일 것 등을 충고했다. 근면한 정치가로 백성의 신망이 두터웠고, 관중(管仲)과 비견되는 훌륭한 재상이었다. 일찍이 경공의 명령으로 진(晉)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혼인 외교를 성립시켰는데, 진나라의 대부(大夫) 숙향(叔向)과 토의하면서 제나라의 국정에 대해서도 언급하게 되었다. 예치(禮治)가 쇠퇴하는 현실에 우려를 표명하면서 장차 제나라는 진씨(陳氏, 즉 田氏)에 의해 대치될 것이라고 단언했다. 기억력이 뛰어난 독서가였으며, 합리주의적 경향이 강했다고 한다. 『안자춘추(晏子春秋)』가 그의 저서로 전해지는데, 후세 사람들이 그의 언행을 모아 편찬한 것이다.
안수(晏殊,991~1055)
북송 무주(撫州) 임천(臨川) 사람. 자는 동숙(同叔)이고, 시호는 원헌(元獻)이다. 진종(眞宗) 경덕(景德) 2년(1005) 송나라 최초의 동자(童子)를 위한 특별시험에 합격하여 동진사출신(同進士出身)의 자격을 받았다. 좌정언(左正言)과 직사관(直史館)을 거쳐 한림학사(翰林學士)에 올랐다. 진종의 신임을 얻어 기밀(機密)에 참여했다. 인종(仁宗)이 즉위하자 우간의대부(右諫議大夫)에서 급사중(給事中)과 추밀부사(樞密副使)가 되었다. 일을 논한 것이 유태후(劉太后)의 뜻을 거슬러 응천지부(應天知府)로 쫓겨났다. 재임하면서 학교를 일으키고 생도들을 가르쳤다. 부름을 받아 어사중승(御史中丞)이 된 뒤 참지정사(參知政事)로 옮겼다. 다시 외직으로 쫓겨나 박주(亳州)와 진주(眞州)를 다스리고, 입조하여 어사중승과 삼사사(三司使)를 지냈다. 경력(慶曆) 연간에 재상 겸 추밀사(樞密使)에 임명되었다. 나중에 간관의 논박으로 파직되어 영주(潁州)와 허주(許州), 영흥군(永興軍), 하남부(河南府)를 맡아 다스리다가 병으로 경사(京師)로 돌아왔다. 평소 인재 발굴에 전념하여 후배의 양성에 힘썼고, 오대(五代)의 난 이후 처음으로 학교를 부흥시켰다. 문하에서 범중엄(范仲淹)과 공도보(孔道輔), 구양수(歐陽脩) 등이 배출되었다. 사위는 부필(富弼)이었고, 재상으로 있을 때 한기(韓琦)와 구양수, 부필을 등용했다. 문장은 넉넉하고 다채로웠으며, 시사(詩詞)에도 뛰어나 당시 칭송을 들었다. 저서는 많이 전하지 않고, 다만 사집(詞集) 『주옥사(珠玉詞)』 1권이 남아 있는데, 북송 초기의 사(詞) 작가로서의 위치를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