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이 말씀하신다.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도 그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가서 그와 함께 살리라.”(요한 14,23)
형형색색 아름답게 물든 단풍들이 이제 하나 둘 낙엽으로 떨어져 계절의 변화를 절감하게 하는 11월의 첫째 주일이며 전례력으로 연중 제 31 주일을 맞는 오늘 이 미사 안에서 듣게 되는 하느님의 말씀은 하느님 계명의 완성인 사랑의 실천이 우리 신앙생활 안에서 얼마나 중요한지를 이야기합니다.
우선 오늘 제 1 독서의 신명기의 말씀은 “셰마”라고 불리는 유명한 모세의 명령입니다. 이집트를 탈출해서 38년 동안 광야생활을 한 뒤, 이제 가나안 땅에 정착을 앞두고 모세는 마음이 완고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스라엘아, 들어라!” 하면서 가장 중요한 율법의 계명을 일러줍니다. 모세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너희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오늘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이 말을 마음에 새겨 두어라.”(신명 6,5)
‘셰마’. 곧 ‘들어라’라는 말씀으로 시작되는 이 신명 6,4-6절의 말씀은 “하느님을 항한 사랑”을 가장 잘 요약한 부분으로서 고대 이스라엘의 신앙고백, 즉 오늘날의 사도신경과 같은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유다인이라면 지금도 “셰마”를 무조건 외워야 하고, 신명 11,13-21과 함께 매일 두 번씩 이 구절을 외쳐야만 한다고 합니다. 그 말씀이란 다름 아닌 이스라엘 백성들의 하느님에 대한 신실한 믿음 곧 사랑을 이야기합니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해야 하며 이 계명을 잊지 않기 위해 돌에 글자를 새기듯 마음에 한자 한자 새겨두어야 한다는 이 말씀은 이스라엘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율법의 계명, 가장 첫째가는 율법의 계명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같은 오늘 제 1 독서의 신명기의 말씀은 오늘 복음 말씀으로 그대로 이어집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에게 다가온 한 율법학자가 율법의 계명 가운데 첫째가는 계명이 무엇인지를 묻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의 시작에서 율법학자는 예수님께 다가와 이렇게 묻습니다.
“모든 계명 가운데에서 첫째가는 계명이 무엇입니까?”(마르 12,28ㄴ)
사실 율법학자의 이 질문은 무언가 의도가 깔린 질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오늘 제 1 독서의 신명기의 말씀에서 확인해보았듯이 유다인들 그 가운데에서도 율법의 전문가라 할 수 있는 율법학자라면 율법의 계명 가운데 첫째가는 계명은 바로 오늘 제 1 독서의 그 말씀 신명기 6장 4절에서 6절까지의 ‘셰마’가 바로 그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그가 예수님께 다가와 이미 잘 알고 있으며 모두가 다 알고 있는 그 사실을 다시금 재차 예수님께 물었다는 것은 이 율법학자가 무언가 다른 의도와 생각을 갖고 이 같은 질문을 던졌음을 우리는 미루어 짐작해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도 그 사실을 꿰뚫어 보셨던 것인지 어찌 보면 너무도 당연한 답이 예상되는 그 질문에 전혀 예상 밖의 답을 건네십니다. 예수님은 이 질문에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첫째는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그러므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둘째는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마르 12,29-31)
예수님의 이 대답은 실로 의미심장합니다. 분명 첫째가는 계명이 무엇인지를 묻는 물음에 모두가 아는 신명기 6장 4절에서 6절까지의 ‘셰마’를 첫째가는 계명이라 대답하고 이어서 묻지도 않는 둘째가는 계명을 설명하면서 이 둘째가는 계명이 가장 큰 계명이라는 설명을 덧붙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왜 묻지도 않은 둘째가는 계명을 이야기하며 그 계명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는 설명을 덧붙였던 것일까? 첫째가는 계명과 둘째가는 계명 그리고 둘째가는 계명이 첫째가는 계명보다 더 크다는 알 듯 모를 듯한 이 말씀은 과연 무슨 의미일까? 마치 수수께끼 같은 예수님의 이 대답에 율법학자가 보이는 반응이 더욱 신기합니다. 그는 예수님의 대답에 이렇게 응답합니다.
“훌륭하십니다, 스승님. ‘그분은 한 분뿐이시고 그밖에 다른 이가 없다.’하시니, 과연 옳은 말씀입니다. 또 ‘마음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그분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 모든 번제물과 희생 제물보다 낫습니다.”(마르 12,32-33)
자신이 묻지도 않는 것을 대답하는 예수님을 두고 언짢아할 수도 있을 것 같은 율법학자는 오히려 예수님의 대답에 감탄하고 거기에 더해 예수님이 하지도 않으신 번제물과 희생 제물 이야기까지 덧붙여 말합니다. 이 율법학자는 도대체 예수님의 대답에 어떤 부분에 감탄한 것이며 그는 왜 예수님이 언급하지도 않은 번제물과 희생 제물이야기를 덧붙인 것일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오늘 제 2 독서의 말씀 안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오늘 제 2 독서의 히브리서 말씀은 영원한 대사제, 멜키체덱의 뒤를 잇는 사제 그리스도 예수님에 관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사실 우리는 이와 같은 대사제가 필요하였습니다. 거룩하시고 순수하시고 순결하시고 죄인들과 떨어져 계시며 하늘보다 더 높으신 분이 되신 대사제이십니다. 그분께서는 다른 대사제들처럼 날마다 먼저 자기 죄 때문에 제물을 바치고 그다음으로 백성의 죄 대문에 제물을 바칠 필요가 없으십니다. 당신 자신을 바치실 때에 이 일을 단 한 번에 다 이루신 것입니다.”(히브 7,26-27)
히브리서의 이 말씀처럼 예수님은 자기 자신을 십자가상 제물로 내어바치는 그 희생적 죽음을 통해 모든 속죄를 완성한 대사제이십니다. 더 이상 다른 제물을 필요치 않는 희생 제사의 완성,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상 죽음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오늘 복음의 율법학자가 번제물과 희생 제물을 언급했던 이유는 많은 대다수의 유다인들 그 가운데에서도 사제들이 번제물과 희생 제물이라는 부차적인 경제적 이득만을 바라고 정작 중요한 하느님 사랑의 계명을 충실하지 않는 모습 때문이었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가난한 이웃의 아주 작은 봉헌마저도 자신의 잇속을 챙기기 위해 그들의 주머니를 탐내는 파렴치한의 사제들, 율법학자들의 모습에 인간적 혐오와 하느님께 대한 배신을 느꼈던 율법학자는 예수님의 말씀 속에 담긴 이웃에 대한 참 사랑 그 사랑이 하느님 사랑에 못지않게 중요하다는 그 가르침에 무릎을 치며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하느님 사랑, 물론 그것이 율법의 첫째가는 계명이며 우리가 반드시 지켜야할 가장 중요한 계명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명목으로 내 주위의 가난한 이웃들, 내 관심과 사랑을 필요로 하는 작은이들을 외면하고 심지어 그들이 가진 작은 것들을 탐내고 그것을 희생제물과 번제물이라는 이유로 빼앗으려 하는 이들은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닌 하느님을 배신하는 행위, 하느님을 팔아 자신의 잇속을 챙기려 하는 파렴치한, 하느님으로부터 용서받지 못할 죄를 짓은 일삼는 이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송동 교우 여러분, 오늘 복음환호송의 말씀을 기억하고 마음에 꼭 새기십시오.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지키는 이들이며 그 말씀을 지키는 이들에게 하느님은 언제나 함께 하시며 그들에게 넘치는 은총을 베풀어 주십니다. 그와 같은 하느님의 함께 하심이 우리가 드리는 그 어떤 번제물과 희생제물보다 중요한 것입니다. 내 곁에 사랑과 관심을 필요로 하는 이웃에게 베푸는 작은 사랑, 그 사랑이 바로 하느님이 우리에게 바라시는 유일한 한 가지이며 이를 통해서 우리는 진정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의 말씀처럼 하느님을 사랑하는 첫째가는 계명은 이웃을 사랑하는 둘째가는 계명을 통해 완성되고 이웃에 대한 사랑이 첫째가는 계명인 하느님의 사랑을 보다 완전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모두가 오늘 전해들은 이 하느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 그 두 사랑의 계명을 실천함으로서 하느님 안에서 온전히 일치하는 삶을 살아가시기를 그리하여 그 일치를 통해 하느님 안에서의 완전한 기쁨과 평화 가득한 나날을 보내시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기도하겠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신다.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도 그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가서 그와 함께 살리라.”(요한 14,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