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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지하운동
(In God's Underground)
리처드 범브란트 지음
전 덕애 옮김
이 책은 루마니아인 리처드 범 브란트 목사가 신앙과 양심 때문에 14년간 여러 감옥을 전전하며 온갖 고문과 박해 세뇌와 병고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살아 나온 수난기이며 동시에 자유를 위한 투쟁기이다. 상상도 못할 탄압과 학대 속에서 어떻게 전도를 하였는가 하는 승리의 자서전이며 신앙고백의 참회록이기도 하다.
제1장
나를 위해 준비된 사건들
내 생애의 전반부가 1948년 2월 29일에 끝났다. 내가 부쿠레슈티의 거리를 걷고 있을 때 비밀경찰들의 의해 그들의 본부로 잡혀 왔다. 그곳은 칼리아 라호바라고 하는 새로 지은 감옥이었고, 내가 최초의 죄수였다. 그러나 감옥이 나에게 있어서는 새삼스레 새로운 것이 아니었다. 나는 전쟁 중 히트러 집권 당시 정권을 잡았던 파시스트 당원들에게 체포되어 감옥살이를 한 적이 있었고 후에 공산당이 집권했을 때 다시 투옥된 적이 있다. 감방 안에는 콘크리트벽 높은 곳에 조그만한 창문이 하나, 두 개의 나무 침대, 그리고 구석에는 으레 있는 똥통이 있었다. 나는 나를 심문할 사람들이 무슨 질문을 해 올 것이며 나는 어떤 대답을 해야 할지 다 알고서 그들이 나를 부르러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의 어린 시절은 무척 가난했었다. 그러나 실업계에 투신을 해서 꽤 성공을 했다. 호화로운 술집과 카바레 지역을 누비며 돈을 물 쓰듯 쓰고 다녔다. 비록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는 것을 확신하면서도 계셨으면 하고 바라는 마음이 있었다. 나는 쾌락과 속임수와 사기의 생활을 계속하며 양심의 물음에는 눈을 감았다. 그러다가 폐결핵에 걸리고 말았다. 죽음에 대한 두려운 생각이 들었다. 요양원에서 휴식을 하며 과거의 일들이 고통스런 연극의 장면들처럼 떠올랐다. 요양원에서 몇 달을 그렇게 보내고 건강이 좋아져 휴양을 하러 갔다. 그곳에서 목수 한 분과 친해졌고 성경을 받게 되었다. 나는 신약 성경을 읽으며 휴식을 취했다. 나는 계속해서 성경을 읽으며 눈물이 끊임없이 흘렀다. 나는 옛날 중국 이야기에 나오는 남자와 같았다. 그 남자는 뜨거운 태양 아래 터덕터덕 걷다가 큰 참나무가 있는 곳에 다다라 그 그늘 밑에 앉아 쉬며 ,"아! 너를 찾아내다니 참 운수가 좋았구나" 하고 말했더란다. 그랬더니 그 참나무가 대담하기를 "운수가 아닙니다. 나는 이곳에서 사백년 동안이나 당신을 기다리며 서 있었습니다." 라고 대답했다. 그리스도는 나를 위해 내 일생을 기다려 주셨다. 비로소 그분과 내가 만나게 되었다. 내가 회개하고 예수를 믿게 되던 날 나는 이런 기도를 했다. "하나님, 나는 무신론자입니다. 이제 나를 러시아에 보내어 무신론자들에게 전도하는 선교사가 되게 해주십시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나를 러시아에 보내지 않으시고 러시아인들을 내게로 보내 주셨다. 백 만 명의 러시아 군대가 루마니아로 쏟아져 나왔다. 이 군대가 바로 '동맹군' 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약탈자들이었다. 나는 선교부 일을 맡으며 독학으로 설교하는 것을 배워가지고 루터파 목사로부터 안수를 받았다. 그리고 러시아인은 물론 루마니아인 공산주의자들에게도 전도했다. 공산당이 정권을 잡으면서 종교의 핍박이 거세졌다.
칼리아 라호바의 감옥에서 나에 대한 고문이 시작되었다. 어떤 때는 허벅다리나 척추뼈 끝이 떨어지기도 했다. 기절을 하면 찬물을 끼얹으며 정신을 차리게 했다. 그때마다 그들이 원하는 사람의 이름을 대주면 고문을 중지하겠다고 했다. 한번은 내 몸에 칼끌을 세게 눌러 피로 범벅이 되기도 하고, 내 위가 터질 지경이 되도록 호스로 목구멍에 물을 퍼붓는 고문도 당했다. 이외에도 많은 고문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고문시에는 반드시 의사가 참석을 해서 죄수의 맥박을 재어 보고 비밀경찰이 아직도 필요로 하는 인물이 죽지 않도록 만전을 기했다. 그런 고통은 영원히 죽을 수도 없는 지옥과도 방불했다. 성경 말씀을 기억하기가 매우 어려웠다. 그래도 나는 왕으로 오실 수 있었던 예수님께서 오히려 죄인의 형을 받고 맞는 것을 택하셨던 길을 기억하려 애썼다. 로마 군인들의 매질은 무서운 것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내가 맞는 한 대, 한 대의 고통이 그분의 고통과 같다고 생각하니 이 고통에 참예하는 기쁨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칼리아 라호바 감옥에서 칠 개월 동안 있었다. 그리고 2년 동안 독방에 갇혀 있었다. 내가 진정으로 하나님을 믿는가? 시험이 닥쳐왔다. 나는 혼자였다.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오직 시련만을 주셨다. 내가 과연 계속해서 그분을 사랑할 것인가? 내 마음은 페터릭이라는 책으로 향했다.
" 침묵이란 가슴에서 타오르는 화살과 같은 사념들을 막아내며 네 좁은 방에서 지혜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홀로 앉아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침묵은 선을 가져온다…….조용히 침묵하는 자는 '오 주여, 내 영혼이 당신을 찬양할 준비가 되었나이다' 라고 노래하는 자니라." 처음에는 하나님께 나를 석방시켜 달라고 기도했다. 그러나 날이 바뀌어도 나를 찾는 사람은 없었다. 아마도 이 침묵 속에서 나는 하나님께 더 좋은 목사로 만들어 줄는지도 몰랐다. 왜냐하면 나는 가장 훌륭한 목사들은 예수님처럼 마음속에 침묵을 간직한 분들인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비록 좋은 말을 한다 하더라도 입을 너무 많이 벌리면 그 사람의 불같은 열정을 잃게 된다. 서서히 나는 침묵의 나무에 평화의 열매가 달린다는 것을 배웠다. 기쁨도 습관처럼 자꾸 연습하면 생긴다는 것을 발견했다. '기뻐하라' 고 하나님께서는 명령하셨다. 나는 가장 비참한 환경에서도 기뻐하는 것을 배웠다. 그러나 의심을 품게 하는 사단의 공격은 나의 기쁨과 평정을 빼앗아 갔다. 나는 이 고통속에서 "아버지여 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라고 외치며 완전히 버림받은 느낌이었다. 이 암흑과 같은 시기에 나는 시를 지었고 그 시는 나의 구원이었다. 말과 리듬과 영창으로 나는 사단을 물리칠 수 있었다.
이 시는 어떤 상황 가운데서도 예수님을 사랑한다는 강한 느낌을 전달하고 있습니다......나의 사랑은 당신의 사랑처럼 아무런 동기도 없는 미친 듯한 사랑입니다. 주 예수여, 여기에서 행복을 찾아 주십시오. 당신에게 더 드릴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나는 이 시를 다 끝내고 더 이상 사단이 가까이 있는 것을 느끼지 못했다. 그는 가 버렸다. 나는 그리스도 입맞춤을 느꼈고, 마음의 안정과 기쁨이 다시 찾아왔다.
제2장
산자의 고통
거의 2년 동안 독방 생활을 하고 난 나는 자주 피를 쏟으며 사경을 헤매게 되었다. 부쿠레쉬티의 가장 큰 수도원의 하나인 바카레스티 감옥에서 나의 재판이 시작되었다. 스칸디나비아 교회 선교회의 세계선교협의회를 통한 간첩 행위, 종교라는 미명 아래 제국주의 사상을 유포시키고, 같은 구실 아래 당을 침투해 들어 왔다는 것 등등이 나의 죄목이었다. "더 할 말이 있습니까?" 재판장이 물었다. 방안이 캄캄해지는 것 같고 혼돈된 나의 머리 속에서는 오직 한가지 생각만 떠올랐다. "나는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라고 말했다. 그리고 20년 동안 강제 노동에 처한다는 언도가 10분만에 내려졌다. 폐결핵을 앓고 있는 나는 요양소 비슷한 티르걸 오크나로 보내어 졌다. 알디아 라는 의사는 내가 약 두어 주일 살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 죄수들은 내 침대를 지나면서 십자가를 그었다. 그들은 나의 고통을 덜어 주기 위해 하룻밤에 평균 40번씩 나를 돌려 뉘어 주었다. 열군데도 넘는 상처에 고름이 흐르고 있었다. 가슴과 척추에 고름이 든 것 같았고 계속해서 피를 쏟고 있었다. 나는 죽음의 방이라고 불리는 4호실에 있었다. 그러나 나의 열은 내리고 정신이 점점 똑똑해졌다. 질기게 목숨을 이어가는 것을 본 알디아는 이상해했다.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은 한사람도 무신자로 이곳을 통해 죽어 나간 사람이 없었다. 파시스트들, 공산당들, 도둑놈들... 그들 모두가 하나님께 돌아와 마음의 평안을 얻고 죽어나갔다. 나는 언제나 불신앙이 죽음 앞에서 무너지는 것을 보았다.
한 번은 팝이라는 교수가 나에게 물었다. "목사님, 도대체 하나님이 어디 계십니 까? 계시다면 왜 우리를 도와주지 않으십답니까?"나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그리스도 꼐서는 여러 가지 모습으로 우리와 함꼐 이 감옥에서 계십니다. 첬째로 얻어맞아 들볶임을 당하면서도 계속해서 우리들을 도와주는 크리스찬 의사들의 모습으로 나타나셨습니다. 바카레스티에 있는 공무원 의사들 중 어떤 의사들을 몰래 약을 갖고 들어온 이유로 10년 동안 복역을 하고 있습니다. 둘째로, 그리스도께서는 다른 사람들의 고통을 덜어 주려고 애쓰는 신부나 목사들의 모습으로, 자기 자신들 보다 더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음식이나, 옷이나, 도움을 주는 크리스천의 모습으로 나타나셨습니다. 셋째로, 예수님은 하나님에 대해 가르쳐 주는 사람들이나 재미있는 사람들의 모습으로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그리고 우리를 도와 주는 사람들뿐 아니라 우리가 도와 주어야 하는 사람들의 모습으로 우리와 함꼐 계십니다.
제3장
나를 위한 기도
러시아에서 수입해온 재교육이 있었다. 거치른 폭력행위에 보다 더 세련된 잔인한 행위가 자행되었다. 신앙을 지키는 사람들에게는 가장 잔혹한 처벌이 내려졌다. 기독교 신자들을 나흘 동안 십자가에 메달아 놓았는데 매일 십자가를 땅바닥에 내려놓고는 다른 죄수들을 그들의 얼굴과 몸에 대고 용변응? 보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나서 십자가를 올려 세웠다. 많은 죄수들은 고문하는 자들을 고문할수 있는 날에 희망을 걸거나, 공산당들이 지글지글 불에 탈 지옥이 있다는 신념 때문에 살고 있었다.
삼월이 되자 날씨가 풀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새로운 뉴스가 감옥 안에 퍼졌다. 그것은 스탈린의 죽음이었다. 몇칠 후 스탈린의 장례식을 알리는 기차의 기적소리와 종소리를 들었는데 감옥에는 비웃음과 욕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간수들은 묵뚝뚝했고 장교들은 불안해하는 눈치였다. 아무도 앞일을 예상하지 못했다. 그후 법무부의 고위관리가 감옥을 ?아와 이곳저곳을 돌아나니며 불편한 것이 없냐고 물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계략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아무도 말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가 4호실에 왔을 때 나는 할 말이 있다고 했다. 감옥안에서의 부당한 일들에 대해서 말했다. 검사관은 끝까지 나의 말을 들어 주었다. 다른 사람들도 용기를 얻어 입을 열었다. 그리고 일주일 뒤 사령관이 바뀌고 감옥의 규칙이 개선되었다. 그리고 나는 4호실에서 나오게 되었다. 4호실 친구들은 무척 기뻐했다. 2년 반 동안 4호실에서 보내고 살아서 감방을 떠난 사람은 내가 최초였다. 한 사람이 농담조로 내게 물었다. "목사님, 왜 그 늙은 몸이 의사의 명령대로 죽어주지를 않나요?" "그것은 하나님의 기적이요,기도에 대한 응답입니다." 나는 많은 사람들이 나의 옛교인들은 물론, 내가 감옥에서 만난 많은 사람들이 나를 위해서 기도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전 세계에 걸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나를 위해 기도했는 지는 몇 년 후까지 알지 못했다.
제4장
살아 있는 기쁨
4호실은 사람들이 그들의 신앙 때문에 인품이 변화되고, 성화되는 재단과 같은 곳이었다. 나는 아직도 살아 있는 것이 기쁘기는 했으나 그 감방을 떠나는 것은 지상세계로 내려가는 것 같았다. 나는 고상하고 희생적인 분위기에서 싸움과 허영과 허위의 세계로 돌아갔다.
나는 팝교수로부터 내 아내의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내아내 사비나는 내 뒤를 이어 2년 동안 복역했다. 그러나 무혐의로 풀려나서, 여집사로서 교회의 부인들을 인도하였다. 당국은 그녀에게 설교할 내용까지 지시했으나 그런 지시를 따를 그녀는 아니었다.
써로이아누 신부가 있었다. 그는 누구보다도 슬퍼해야 할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그러나 그는 다른 사람들을 격려하고 용기를 북돋아 주는 생활을 매일 보냈다. 그는 "미소를 지을 수 없는 날이면, 상점 문을 열지 않는 편이 낫습니다. 웃는 데는 17개의 안면근육이 필요하지만, 찡그리는 데는 43개의 안면 근육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나도 내가 목사로 임명받으면서 가슴속에 간직해온 꿈이 이제 이루어지고 있다는 의미에서 기뻐할 수 있었다. 이곳 감옥에서는 나의 교인들이 나와 항상 '교회 안에' 있었으며 그들은 언제나 기쁜 마음이 아니더라도 내말을 들었다. 어느 날 죠시프라는 젊은 죄수가 들어왔다. 그는 얼굴의 궤양으로 항상 얼굴을 가리고 있었고 폐결핵의 지병이 있었었다. 그는 나를 고발하겠다고 위협했다. 그당시 루마니아는 정보원들로 배신과 밀고 행위가 만연되어 있었습니다. 죠시프에게 성경으로 영어공부를 가르치며 범브란트목사님은 그를 전도 하였습니다. "죠시프, 하나님꼐서는 하늘과 땅과 너의 생명과 수많은 아름다움을 창조하셨다. 예수님이 당하신 수난에 의미가 있듯이, 네가 지금 당하는 고통에도 반드시 의미가 있을 것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셨기 ?문에 인류의 구원이 완성된 것이다." 그는 예수님께서 나와 같은 사람이라면 예수님을 사랑 한다고 고백했다. 그가 석방 되는 날 그는 눈물이 가득 나를 꼭 껴안았다. "목사님은 제 친아버지처럼 저를 돌보아 주셨습니다. 이제는 저도 제 힘으로 하나님과 함께 설 수 있습니다." 몇 년 후 우리는 다시 만났고 그가 옛날에 그렇게 싫어하던 흉터를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었다.
내 아내가 석방되었다는 소식으로 나는 사기 중천했다. 내 아들이 면회를 할 수 있게 되었다. 내가 체포 되었을? 내아들 미하이의 나이는 아홉 살 이었는데 이제 열다섯 살이 되었다. 그러나 그렇게 자라버린 아들을 상상할 수 없었다. 나는 아들과 만날 날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드디어 그날이 왔다. 미하이는 "어머니께서는 아버지가 감옥에서 돌아가신다고해도 슬퍼해서는 안된다고 말씀하셨읍니다.우리는 모두 낙원에서 만날테니까요" 위로가 되는 첫마디에 웃어야 될지 울어야 될지 몰랐다. 내가 질문 할 때마다. 미히이는 성경귀절로 대답했다. 아마도 범브란트 목사님은 아내에게 고마움을 느끼는 순간이었을 것입니다.
바깥세상에서는 교회에 대한 박해가 강화 되었다. 당시 교회에 대한 타격은 단순히 우둔한 민중이 뜨르던 갖가지 미신들을 잘라 버리는 데 불과했고, 참다운 신앙은 박해 속에서도 더 강하게 남아있었다. 1955년 봄과 더불어 정치적 해방도 찾아왔다. 많은 감옥의 사람들이 직무유기죄로 체포되었고 직무유기의 희생이 되어 강제 노동에 끌려갔던 많은 죄수들이 티르걸 오크나에 들어오게 되었다. 나도 6월 초순이면 다른 감옥으로 옮겨가라는 명령을 받았다. 나는 눈물을 흘리며 많은 친구들에게 작별인사를 했다. 몇 시간이 흘러서야 기차가 삐걱거리고 덜컹거리며 시골로 난철길을 달리기 시작했다. 작은 데다, 페인트칠까지 한 창문으로 숲과 산의 모습이 조금씩 보였다. 따뜻하고 아름다운 여름날이었다.
제5장
해빙기
감방 안에서 나는 악취에 속이 메슥거렸다. 썩은 양배추 조각과 씻지 않은 생선의 내장이 거품 속에 떠있었다. 그러나 먹어야할 의무가 있었으므로 나는 국 그릇을 비웠다. 언제나 우리들에게는 50파운드 무게의 쇠사슬들이 채워졌는데, 이 쇠사슬들이 옷을 뚫고 피부를 벗겨서 상처가 나기 쉬웠다. 무거운 쇠사슬에 묶인채 자주 이곳저곳 끌려다녀서 나의 폐결핵이 악화 되었다. 봄이 되자 새로운 소식이 들려왔다. 러시아는 오스트리아에서 러시아 군대를 철수시키기로 약속했고, 동서 간의 10년 동안의 냉전 끝에 최초의 정상회담이 제네바에서 열릴 예정이었다. 정상회담이 열리기 전에 공산주의를 보다 좋게 보이게 하려고 감옥운영에 있어서 지나친 일들이 몇 가지 줄어들었다. 매질이 중단되고 간수들은 공손해졌다. 그러나 이런 개혁은 오래가지 못했다. 나는 새감옥으로 이송되었다. 루마니아어로 질라바라는 '젖은 땅' 이라는 곳이었다. 감옥위에서는 양이 풀을 뜯고 우리는 수 천 톤의 흙밑에서 산 채로 뭍힌 느낌이었다. 2,000명의 죄수들이 희미한 전등이 비치는 감방과 굴 속에서 우굴거리고 있었다. 한때는 마음대로 죽일 수 있는 생사여탈권을 현 정권으로 받은 사람들이 그들의 희생양이 되어 감방 신세를 지며 죄수들로부터 몰매를 맞기도 하고 정부로 부터 사형선고를 받기도 했다.
몇 주일이 지나고, 스탈린의 탄핵이 정말로 새로운 '해빙기'를 가져왔다. 많은 죄수들은 특사로 풀려났다. 나는 그런 생각만 하면 슬퍼졌다. 내가 나가서 무슨 쓸모가 있을 것인가? 어느 날 아침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나에게 심문을 받을 준비를 하라고 했다. 복도를 지나 층계를 걸으며 쇠문이 하나씩 열리고, 드디어 나는 바깥 세상에 나오게 되었다. 기다리는 차도 없고 사무관이 내게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그것은 판결 언도문 이었다. 내가 특사를 받아 자유의 몸이 되었다는 내용이었다. 사무관은 감옥 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텅빈, 여름세상에 혼자 서있었다. 따뜻한 6월의 한낮이 너무도 조용해서 벌레들이 붕붕거리며 나는 소리까지도 들을 수 있었다. 길고 하얀 길이 눈부시도록 짙은 초록색 나무들 밑으로 한 없이뻗어 있었다. 나는 벽뒤에 있는 보초들이 들을 수 있도록 큰 소리로 외쳤다. "하나님, 당신은 내가 감옥에 있을 때에도 나와 함께 계시었으므로, 이제 내가 자유의 몸이 되었다고 해서 더 기뻐하지 않도록 도와 주십시오" 나는 언덕 길을 넘어서 크게 자란 풀을 밟고, 나무껍질을 만져보려고 풀밭으러 들러가기도 하고 때때로 꽃 한송이, 움터 나오는 잎을 바라보려고 발을 멈추었다. 루마니아에서는 석방된 죄수는 따돌림을 받기는커녕 높이 존경을 받는다. 나도 예외는 아니었다. 사람들은 전차 요금도 내주고 먹을 것도 주었다. 전차를 타고 집으로 향했다. 드디어 나는 우리집 문 앞에 닿았다. 그러나 나는 잠시 머뭇거렸다. 문을 열었을 때 홀에는 여러 명의 젊은 이들이 모여있었다. 그중 한 청년이 나를 뚫어지게 쳐다 보다가 "아버지-!" 하고 소리치며 달려 나왔다. 아들 미하이었다. 아내가 뒤따라 나왔다. 그녀는 흐느껴 울었다. 나의 집은 금새 방문객 들로 줄을 잇고 있었다. 자정이 되서야 모두들 갔다. 나의 기쁨은 말로 형용할 수 없었다. 아들 미하이가 "아버지, 아버지는 많은 고통을 겪으셨습니다. 아버님이 겪으신 고통에 대해서 무엇을 배우셨는지 알고 싶습니다."라고 말했다. 나는 두팔로 그를 끌어 앉고 "미하이, 그동안에 성경을 다 잊어버렸지만 네 가지가 늘 내 마음을 떠나지 않았다. 첫째,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 둘째가 그리스도가 우리의 구세주라는 것, 셋째 영원한 삶이 있다는 것, 그리고 사랑이 최선이라는 것이었다." 라고 말했다. 내 아들은 "그게 제가 원하던 것입니다." 라고 말했으며 후에 목사가 되기로 결심했다고 말했다. 그날밤, 깨끗하고 부드러운 침대에 누운 나는 좀체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일어나 앉아 성경을 폈다. 내눈이 요한 사도 서신중의 일절에 가있었다. "내게는 내 자녀들이 믿음 안에서 행한다는 것을 듣는 것 이상의 기쁨이 없다." 나도 이 기쁨을 맛보고 있었다.
제6장
자유인
이제 자유의 몸이 되었으므로, 나는 조용히 쉴 기회를 갈망하고 있었다. 그러나 공산주의가 교회를 완전히 파괴하려고 도처에서 발버둥 치고 있었다. 교회가 문을 닫지 않기 위해서는 밀고를 해야 했다. 나는 학생들 앞에서 기독교 강론을 하였다. 주말에 내 강의는 수 천 명에 달했다. 그러나 나역시 학생들을 선동한다는 이유를 붙여 감시의 대상이 되었다. 나는 설교 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나는 전쟁 직후에 러시아 군인들에게 전도했던 것처럼 극비리에 일을 해야 했다. 때로는 지하실이나 다락방이나 아파트나 시골에 있는 농가에서 예배를 보았는데, 우리의 예배는 1900여 년 초기의 크리스천들이 드린 예배처럼 단순하고 아름다웠다. 우리는 큰 소리로 찬양을 했다. 누가 물으면 생일 축하를 하는 것이라고 대답했다. 우리는 들판에 모였다. 하늘이 우리의 성전이고, 새들이 음악을 제공 했으며, 꽃들이 우리의 향이고, 별들이 우리의 촛불이고, 천사들이 촛불을 켜는 복사 이었으며, 갓 감옥에서 풀려나온 순교자의 초라한 옷이 우리에게는 가장 아름다운 신 부복보다 더 깊은 의미가 있었다. 물론 나는 조만간에 다시 체포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헝가리 혁명이 가라앉고 난 후로 매달 사태가 악화 되었다. 후루시초프는 '모든 미신의 흔적을 뿌리 뽑기 위한' 계획을 발표했다. 교회들은 문이 닫히거나 공산당 클럽이나 박물관이나 곡물창고로 바뀌어 사용되었다.
나는 기도했다. "하나님, 만일 당신이 감옥에서 나를 도와 줄 수 있는 사람이나 구원해야 할 영혼들을 알고 계시다면 저를 감옥으로 돌려보내 주십시오. 저는 기쁘게 그 짐을 지겠습니다."
그들이 나를 잡으러 온 것은 1959년 1월 15일 오전 1시였다. 나는 익숙한 감방으로 갔다. 심한 매질과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봉사하는 것이 법브란트 목사님의 일과였다. 복음을 전하는데 있어서는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았다. 달이 흘러 해가 바뀌고 2년 이라는 세월이 흐르는 동안 모든 것이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겔라 에서의 생활이 3년 째로 접어들면서 좀 수월 해졌다. 언론의 자유가 좀늘고,식사의 양이 조금 많아지고, 외부의 사정도 달라져 가고 있으리라 추측 되었다. 우리는 아직도 가장 큰 시련이 우리 앞에 놓여 있다는 것과, 그것이 어떤 모양으로 다가올 것인가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다.
제7장
불신앙의 시대
루마니아 에서는 '목사'란 말은 보통으로 '목자'라는 말로 쓰이기도 한다. 전 감옥은 계급별로 나뉘어 졌다. 같은 부류의 집단끼리 모아놓았는데 그곳에서는 분쟁이 일어나기 일쑤였다. 예를 들어 서로의 종교가 옳다는 것이었다. 감옥에서는 강의가 시작되었다. 그 강의 자체는 우스운 것이었지만 그 뒤에는 세뇌라는 아주 간교한 계획이 숨어있었다. 그들은 우리가 얼마나 세상 재미를 놓치고 있는가. 지적하였다. 그리고 이 허울들이 무너져 내리면 그들은 우리들의 초자아와 양심과 사회적 가치관과 윤리적 가치관에 대해 호소를 하는 것이었다. 벽에 있는 확성기에서는 '공산주의는 좋다, 기독교는 어리석다, 그것을 포기하라, 기독교는 죽었다' 의 말들이 밤새, 그리고 그 다음날까지 계속되었다.
이런 것은 긴 세뇌과정의 첫 단계에 불과했다. 그들은 공산주의 사상을 심으려고 애를 썼다. 우리들은 하루에 10시간에서 12시간씩 강의를 듣고 토론회에 참석하고 녹음된 표어들을 들어야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변절하는 이들이 나타났고 밀고하는 열병이 퍼져갔다. 범브란트 목사님은 공산주의가 두려워 신앙을 져버리지 않았으며 오히려 공산당원에게 당신도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말하며 담대히 예수님을 증거했습니다. 그러던 중에 아내 사비나가 감옥에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그것은 충격이었고 앞으로 다가올 고통에 대한 공포를 더 크게 만들었다. 나는 곧 좋은 감방으로 옮기어졌다. 그리고 유혹을 받았다. 가족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아팠다. 나의 말 한마디에 그들과 내가 잘되고 못되고 가 결정되는 순간이었다. 나는 하나님꼐 기도했다. 이 무서운 유혹을 이기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기도하고 나니 마음이 안정이 되었다. 특별구역 안에서는 매일 "기독교는 죽었다" 라는 확성기 소리를 들어야 했다. 그리고 나는 그들이 우리에게 들려준 소리를 믿게 되었다. 기독교는 죽어있었다.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나는 기독교를 믿고, 그것이 틀림없이 다시 일어날 터이니 그때까지 나는 마리아처럼 그 무덤 곁에서 울고 있겠다"고 생각했다.
제8장
보이지 않는 힘
1964년 6월 어느 날 모든 죄수들이 강당에 모였다. 우리들은 새로운 투쟁회의가 열리려나 생각을 하였는데 알렉산드레스큐 중령은 정부가 내린 대사면 덕택에 모든 계층의 정치범들이 다 석방될 것이라고 선언했다. 온 강당 안은 술렁이고 박수 갈채가 터져 나왔다. 내가 석방될 차례가 되었다. 나는 부쿠레슈티에 있는 우리 이웃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런데 감옥에 있는 줄 알았던 아내와 아들의 목소리를 들었다. 내가 감방 안에서 들은 것은 거짓세뇌 공작에 대한 나의 반응을 보기위한 마지막 수단이었던 것이다. 몇 년이 지나도 나에대한 소식을 듣지 못하다가 나의 전화를 받은 아내는 기절을 하였다. 그녀에게는 마치 내가 죽었다가 살아온 것 같았다.
석방된 후 몇 달 이 지난 여름 나는 아이들을 사자의 우리로 데려가서, 아이들을 내 주위에 둘러 서게 했다. "너희 기독교 신앙의 선배들이 이런 사자와 같은 야수들의 우리에 던져졌었다. 그들은 예수님을 믿었기 때문에 기쁘게 죽었다. 너희들도 그리스도를 믿기 때문에 감옥에 갇히고 고통을 받게 될 때가올지 모른다. 이제 너희들은 그날에 대비할 준비가 되어 있는지 결정을 지어야 한다. 아이들은 눈에 눈물을 글썽이며, 한 사람씩 "예"라고 했다. 나는 내 나라를 떠나기 전에 마지막 수업을 한 것이다.
워싱턴 D.C에 있는 관공서 건물에는 미국의 헌법을 새긴 동판이 걸려 있다. 처음에 그것을 보면 동판에 새겨진 글자만이 보인다. 그러나 한발자국 뒤로 물러서서 보면 광선의 각도가 변하면서 조지 워싱턴의 얼굴이 나타난다.
한 인간의 생애와, 그와 같이 감옥에 있었던 다른 사람들에게 일어났던 이야기들을 써놓은 이책도 그렇게 읽혀져야 한다. 이 모든 이야기들 뒤에는, 우리들의 믿음을 끝까지 붙들어 주시고 우리들에게 승리 할 수 있는 힘을 주신 눈에는 보이지 않는 그리스도께서 서 계신다.
저자; 리처드 범브란트 목사
유태계 루마니아인(루터교 목사)
복음주의 신앙의 기독교로 개종(26세)
부쿠레슈티 유태계 기독교회 조직
나치 기간 동안 투옥
2차 대전 후 소련 군인 들에게 러시아성경 배포
1948년 루마니아 공산치하 8년간 투옥
1954년 석방
1959년 6년간 재 투옥
1988년 5월 미 상원 국내안보소위원에서 증언
2001년 '공산세계에 예수를' 이라는 선교 단체에서 봉사하다 소천.
[출처] 하나님의 지하운동-리처드 범브란트 |작성자 천산의 언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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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훌륭한 사역에 찬사를 보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