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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 교회에 나이 많으신 목사님이 부임하셨습니다. 부임한 첫 주일 사랑설교를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하나님은 자기 아들을 보내서 죄를 담당하셨고 그 사랑을 믿는 사람들에게 넣어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받아들인 사람은 그 사랑을 가졌습니다. 그러니 사랑하십시요" 이런 내용이었습니다. 성도들은 사랑에 관한 설교 은혜를 받고 좋아했습니다. 성도들은 다음 주에 무슨 설교를 할까 기대했는데 목사님은 또 "사랑하라"는 같은 설교를 하셨습니다. 성도들은 의아해 하면서도 "다음 주에는 다른 설교를 하시겠지." 기대했는데 다음 주에도 또 사랑설교를 하셨어요 참다 못한 성도들이 그런 식으로 설교한다며 화를 냈고 결국 교회를 사임하라는 통보를 받은 목사님은 이제 마지막 설교를 했는데 또 "사랑하라" 설교를 하신 겁니다.
성도들은 저! 노인 목사님 왜 저래 하는데 성도들이 이곳저곳에서 눈물 흘리며 하는 말이 오죽하면 떠나시는 날까지 얼마나 우리가 사랑을 안 했으면 저렇게 설교하시나~~그순간 교회안에 이곳저곳에서 울음 바다가 되고 말았습니다. 예배가 끝나고 성도들은 "목사님 우리가 잘못했습니다. 이제 알았습니다. 예수님처럼 사랑할 수 있는데 안 했습니다. 제발 용서하시고 떠나지 마십시오. 계속 사랑하라는 설교만 해주십시오. 그것만 듣겠습니다." 그래서 목사님은 계속 시무하게 됐고 교회가 사랑 가득한 교회가 되었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입니다. 왜일까요? 요한일서 4장 8절 하반절에 하나님은 사랑이시니라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사랑은 첫 인간 아담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아담이 하나님 말씀을 어기고 선악과를 먹고 죄를 범했습니다. 아담은 죄책감 때문에 두려워 나무 뒤에 숨어 괴로워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죄책감에 괴로워한 아담을 아시고 아담아! 부르시며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아담에게 왜 선악과를 따 먹었느냐 죄를 지적하지 않으시고 용납하시고 손수 가죽 옷을 지어 죄지은 인간에게 입혀주셨습니다. (창3:21) 이렇게 하나님 사랑은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 사랑이 시작된 이후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향하여 지극히 사랑한다며 확인 시켜준 것이 있습니다. 너는 보배로운 백성이다. 소유된 내 백성이다. 거룩한 성민이라고 하시면서 끔찍하게 아끼고 사랑하고 계심을 각인시켜 주셨습니다.(출19:5-6,신26:18-19)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 사랑에서 점점 멀어졌습니다...... 그럴 때 마다 하나님은 마음이 아프셨습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각가지 사랑의 제스쳐를 수없이 보여주어도 청개구리처럼 말을 듣지 않아 이젠 자식을 키우는 모성애의 마음으로 설득도 하셨습니다.
이사야 49:15.....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 부모가 혹시 자식을 잊을지라도 나는 너희를 잊지 않겠다” 안타까운 심정으로 하나님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런데요 첫 인간 아담에게 가죽옷을 입혀준 하나님 사랑의 지극 정성을 깡그리 잊어버렸을까요? 정말! 어처구니없는 하나님 자기 백성들의 말을 들어보십시오
구약성경 마지막책 말라기1:2절 상반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 하는도다~~~~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습니까? 우리를 사랑하신 이유를 말씀해 보세요!!~~ 하나님을 향하여 사때질 하는 것처럼 목이 곧는 백성들의 모습입니다.
사랑이신 하나님 이제 지치셨고 결국 긴 침묵으로 일관 하셨습니다. 강팍한 자기 백성들의 모습이 어떻게 사랑하셨냐며 사때질 하는 모습이 구약성경 뚜껑을 닫게 하는 마지막 모습입니다.
우리는 구약과 신약이 성경한 권으로 붙어 있으니까 가깝다고 하지만 하나님과 자기백성과의 거리가 너무나 멀어요 장장 하나님의 침묵이 400년이 흘러간 것입니다.
결국 사랑이신 하나님은 400년 침묵의 시간을 끝내시고 결단하셨습니다. 마지막 카드를 쓰셨는데 외아들 독생자를 이 땅에 보내신 것입니다.
요3:16...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죄 많은 인류를 위해 십자가에 지게 하시고 못 박게 하시고 죄를 사하여 주신 것입니다. 마지막 예수님 십자가에서 운명하실 때 마지막 한마디”저들을 용서하여 주옵소서“이 용서의 한마디가 측량할 수 없는 사랑 하나님 사랑으로 완성 된 것입니다. 할렐루야!!~~~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누구보다도 지옥의 자리에 있어야 할 내가 새 생명의 자리로 옮겨진 죄 사함 받고 새사람 된 은혜를 받았기에 예수님을 따라 사랑을 실천하며 살아야 합니다. 믿으시면 아멘입니다.
사랑하는 주향성도여러분!! 예수님은 누구십니까? 하나님이 사랑이셨던 것처럼 예수님도 사랑 그 자체이십니다.
사랑이신 예수님은 절대적 사랑입니다. 사랑하는 대상이 어떤 사람이냐, 사랑의 대상이 지금 어떤 태도와 반응을 보이느냐 그것은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 편에서 절대적인 사랑입니다. 사람들이 하는 사랑은 상대적입니다. 그 사람의 태도와 반응에 따라서 사랑이 커지고 작아집니다. 그러나 우리 예수님은 상대방이 어떠하냐 하는 것은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눅10장을 보면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이웃사랑에 대한 예수님 비유말씀이 나옵니다. 한 율법사가 예수님께 질문합니다.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율법에 무엇이라고 쓰여있느냐 율법사는 잘 알고 있는 말씀을 꺼내 듭니다.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예수님은 옳다 그대로 행하라 이때 율법사가 그러면 이웃이 누구입니까? 이웃에 대해 물으니까?.... 당시 이웃인 유대와 사마리아 갈등관계를 잘 아신 우리 예수님 선한 사마리아 비유를 말씀 하신 것입니다.
비유는 이렇습니다..... 유대인 한 사람이 강도 만나서 거의 죽게 됩니다. 같은핏줄이요 혈통인 제사장 레위인은 반죽음으로 신음하는 같은 동족을 보고 그냥 지나갔습니다. 그런데 유대인하고는 원수인 사마리아 사람이 지나가다가 유대인을 지극 정성으로 도와주었습니다. 도저히 사랑을 베풀 수 없는 사마리아 사람이 유대인에게 지극 정성으로 사랑을 베푼 것입니다.
눅15장 탕자의 비유에서도 예수님 말씀하셨습니다. 둘째 아들이 내 몫의 유산을 달라고 아버지께 졸라됩니다. 아버지 어떻게 쓸 것을 다 알면서도 아들 요구대로 다 줍니다. 둘째 아들 자기 몫의 재산가지고 세상에 나가 허랑방탕 탕진합니다. 결국 거지가 되어 아버지집으로 돌아옵니다. 불효막심한 자식이요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자식인데 아버지는 둘째아들을 용납하고 받아줍니다. 아들을 향해 돈을 어디 썼느냐 왜 그렇게 망나니로 살았느냐 말하지 않습니다. 그냥 받아줍니다. 탕자이야기이지만 아낌없이 사랑이 감추어져 있는 예수님 비유입니다......
그런데 우리 예수님이런 비유의 말씀을 말로만 가르친 것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 자신이 절대적인 사랑을 끝까지 몸으로 실천하셨습니다.
본문말씀을 보세요 1절....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유월절 전에 말씀으로 시작됩니다. 지금 예수님 사역의 상황은 너무 급박합니다. 요한복음이 21장까지 있는데 여기 13장에서부터 21장까지는 예수님의 사역중에 십자가 그리고 죽음과 부활에 대한 이야기로 되어 있습니다. 그만큼 13장은 아주 중요한 때입니다. 유월절 전이라고 했는데 이제 예수님이 체포되는 하루 전을 말합니다. 그리고 예수님 내일 아침이면 십자가에 돌아가시는 날입니다. 최후의 만찬이 끝나면 바로 겟세마네 동산에 올라가시어 밤새도록 피땀 흘리시며 기도하시는 시간입니다.
인간적으로 볼 때 우리 예수님 가장 가슴아픈 순간임에도 예수님은 태연하게 제자들 발을 씻기시고 마지막 만찬을 나누는 장면이 본문 말씀 이어서 계속됩니다.
이스라엘은 더운 날씨이기에 샌들을 신습니다. 조금만 걷다 보면 땀이 차고 발은 먼지투성이가 되어 반드시 씻고 들어가 식사를 합니다. 이스라엘 풍속으로는 자기 발을 자신이 씻지 않습니다. 만일 종이 있으면 종이 주인의 발을 종이 없으면 서로서로 씻겨 줍니다. 남편은 아내 발을, 아내는 남편 발을 씻겨 주고, 친구끼리도 서로 씻겨 준다고 합니다. 상대방을 씻어주지만 먼저 씻겨 주는 사람이 손아래 있는 사람입니다.
아마 베드로는 나이가 많으니까 야고보나 요한이 내 발을 씻어주면 나도 야고보나 요한의 발을 씻어주어야겠다 버티고 있었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서로 먼저 발을 씻겨 주기를 망설이다보니 모두가 더러운 발을 그대로 하고 상에 마주 앉아 있는 것을 예수님 보신 것입니다. 그리고 친히 예수님 대야에 물을 가져 오시어 허리에 수건을 동여매고 한 사람 한 사람 발을 내놓으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끝까지 사랑하신 예수님 누구의 발을 먼저 씻었을까요?
13장6절을 보면 예수님 발을 씻여주실 때 베드로가 먼저 등장하기에 베드로의 발을 씻었을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정말 그랬을까요? 초대교부였던 크리쏘스톰의 말에 의하면, 가룟 유다의 발을 제일 먼저 씻겼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것은 가장 사랑하기 어려운 자를 먼저 사랑해야 전체를 사랑할 수가 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만약 베드로의 발부터 씻겼다면 가룟 유다의 발은 씻기지 못했을 수도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것이 바로 원수를 사랑하는 절대적인 방법입니다. 원수를 사랑하는 마음의 자세로 사랑을 베풀면 모두를 사랑할 수가 있습니다.
만약 저와 여러분이 사랑할 만한 자를 찾아서 사랑받아 가면서 사랑하겠다고 한다면 그 사랑은 상대적이기에 오래갈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내일 아침이면 십자가에 돌아가시는 날입니다. 이 성만찬이 끝나면 바로 겟세마네 동산에 올라가시어 밤새도록 기도하시며 "민망하여 죽게 되었다"라고 피땀 흘리시어 간구하는 대단히 어려운 시간을 앞에 놓고 있는 순간입니다. 인간적으로 볼 때는 정말 마음 아픈 순간임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이렇게 태연하게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습니다.
다시 2절 말씀을 봅니다. .......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랑이신예수님 끝까지 변함없는 사랑으로 나아가지만 사랑을 실천하는 자리에 마귀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지금 최후의 만찬의 자리에 마귀가 어떤 장난을 치고 있습니까? 12제자중에 가룟유다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집어 넣었다고 했습니다.
어떤 주석가는 12제자중에 마귀가 왜 가룟유다를 지명했을까? 그것은 가룟유다가 돈을 자주 만졌기 때문에 쉽게 자기편으로 만들 수 있었다고 주석한 학자들도 있습니다.
끝까지 사랑하시는 예수님의 마음을 사랑받지 못하도록 마귀가 가룟유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다는 것입니다.
2절말씀과 함께 보아야 할 요13:26-27을 보면...... 우리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떡 한 조각을 적셔다 주는 자가 그니라 하시고 곧 한 조각을 적셔서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에게 주시니 조각을 받은후 곧 사탄이 그속에 들어간지라 이에 예수께서 유다에게 아르시되 네가 하는 일을 속히하라 하시니 라고 했습니다.
여기 떡 조각을 적셔서 라고 했습니다. 떡 한 조각은 우리가 성찬식 때 사용한 떡을 말합니다. 그런데 예수님 유독 떡 조각을 가룟유다 입에 넣어주실 때는 공개적으로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 이 떡을 먹은 자가 나를 팔 것이니라.“ 이 말씀은 어찌보면 가룟유다가 회개하고 돌아올 것을 끝까지 기다리시는 사랑이신 예수님 마음이 담겨있습니다. 안타까운 것은 철없는 제자들이 가룟유다를 향한 예수님말씀을 이해하지를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가룟 유다가 조금이라도 예수님마음을 알았다면 그순간 주님! 제가 정말로 주님을 팔 생각을 했습니다. 저를 용서해주십시오 그 즉시 엎드렸다면 아마 역사가 달려졌을 것입니다.
그런데 조각을 받는 순간 어떤 일이 벌어졌습니까?..... 사탄은 놓치지 않고 떡 조각을 받은 가룟유다 마음속에 마귀가 들어간 것입니다. 이런 모든 상황을 다 알고 계신 우리 예수님 이제 어떻게 하셨습니까?.....”네가 하는 일을 속히 하라“ ~~~ 주님말씀에 그 즉시 가롯유다 사단에게 종노릇하며 순간 만찬의 자리를 박차고 떠나고 맙니다.
성도여러분!!...... 끝까지 사랑 받아야 할 자리에 사랑받지 못하도록 마귀의 시험이 우리 가까이에 유혹하고 있음을 영적으로 깨닫게 합니다.
저도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가깝게 지낸 사람들로 통해 이용 당한 적이 있었습니다. 버랑끝 위기에 몰려 괴롭고 힘들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사랑을 알고 깨닫게 되니까 오히려 잘못한 일이 그 사람에게 화살을 돌리기보다 나의 잘못으로 인정하고 내가 먼저 용서하는 자로 변화된 나의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괴로워하고 해결하지 못할 때는 마귀의 속삭임 ”용서하지마라“ 내 궛전에 들려오더라구요~~~ 이것이 언약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고백해야 합니다. 끝까지 나를 사랑하시는 사랑이신 예수님만 믿고 따라가겠습니다. 확신 가지고 "아멘" 해야 하겠습니다.
이 시간 1절 말씀 ”자기 사람들을“ 여기에 자신의 000을 넣고 묵상하고 설교를 마치겠습니다.
1절....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1절....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000(김승권)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끝까지 사랑하신 예수님을 따라 사랑의 실천하는 삶 되시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