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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
한강 소설 | The Elegy of Whiteness
한강 지음 | 차미혜 사진 | 난다 | 2016년 05월 25일 출간
책 소개
이 책이 속한 분야
소설 > 한국소설 > 한국소설일반
결코 더럽혀지지 않는, 절대로 더럽혀질 수가 없는 어떤 흰 것에 관한 이야기!
한국인 최초 맨부커상 수상 작가 한강의 신작 소설 『흰』. 2013년 겨울에 기획해 2014년에 완성된 초고를 바탕으로 글의 매무새를 닳도록 만지고 또 어루만져서 2016년 5월인 오늘에 이르러 펴낸 책이다. 삶과 죽음이라는 경계를 무력하게 만드는 이 소설은 한 권의 시집으로 읽힘에 손색이 없는 65편의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강보, 배내옷, 각설탕, 입김, 달, 쌀, 파도, 백지, 백발, 수의…. 작가로부터 불려나온 흰 것의 목록은 총 65개의 이야기로 파생되어 ‘나’와 ‘그녀’와 ‘모든 흰’이라는 세 개의 부 아래 담겨 있다. 한 권의 소설이지만 각 소제목, 흰 것의 목록들 아래 각각의 이야기들이 그 자체로 밀도 있는 완성도를 자랑한다.
‘나’에게는 죽은 어머니가 스물세 살에 낳았다 태어난 지 두 시간 만에 죽었다는 ‘언니’의 사연이 있다. 나는 지구의 반대편의 오래된 한 도시로 옮겨온 뒤에도 자꾸만 떠오르는 오래된 기억들에 사로잡힌다. 나에게서 비롯된 이야기는 ‘그녀’에게로 시선을 옮겨간다. 나는 그녀가 나대신 이곳으로 왔다고 생각하고, 그런 그녀를 통해 세상의 흰 것들을 다시금 만나기에 이른다.
북소믈리에 한마디!
소설의 전체가 다 작가의 말이라고 작가 스스로 이야기한 이 작품을 통해 한강의 소설에 관한 모든 것을 엿볼 수 있다. ‘흰’이라는 한 글자에 매달려 파생시킨 세상의 모든 ‘흰 것’들에 대해 한강이 써내려간 한강의 문장들 속에서 한강이 끌어올린 넓고도 깊은 서사를 만나게 된다. 맨부커상 수상작 《채식주의자》와 《소년이 온다》를 번역한 데보라 스미스가 이번 작품의 번역을 맡아 2017년 영국에서 출간할 예정이다.
저자소개
저자 : 한강
저자가 속한 분야
문학가 > 현대문학가>소설가/시인
인문/교육작가 > 대학/대학원 교수
한강
1970년 광주에서 태어나 연세대 국문학과를 졸업했다. 1993년 계간 '문학과사회'에 시가, 이듬해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붉은 닻'이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이상문학상(2005) 오늘의 젊은예술가상(2000) 한국소설문학상(1999), 이상문학상(2005)을 수상하였다. 현재 서울예대 문예창작과에 재직 중이다. 소설집 '여수의 사랑'(1995) '내 여자의 열매'(2000)와 장편소설 '검은 사슴'(1998) '그대의 차가운 손'(2002) '채식주의자'(2007), 그리고 산문집 '가만가만 부르는 노래'(2007) '사랑과, 사랑을 둘러싼 것들'(2009, 개정판) 등이 있다. 작가는 소설 <채식주의자>로 2016년 5월 16일 한국인 최초 맨부커 인터내셔널 부문 수상의 영예를 안게 되었다.
사진 : 차미혜
사진삽도인 차미혜는 미술가. 파리국립고등미술학교를 졸업했다. 견고해 보이는 기준이나 경계가 모호해지는 지점들을 영상, 사진, 퍼포먼스, 설치 등을 통해 표현한다. 개인전 《가득, 빈, 유영 Full, Empty, Floating》(케이크갤러리)을 비롯하여 《랜덤 액세스 2015》(백남준 아트센터), 《회색의 바깥》(아트스페이스 풀) 등 다수의 그룹전에 참여하였다. 제9회 서울국제실험영화페스티벌 아비드 어워드 상을 수상하였으며, 2015년 서울시립미술관 Emerging Artist로 선정되었다.
목차
1─나
─ … 9
문 … 15
강보 … 18
배내옷 … 20
달떡 … 22
안개 … 26
흰 도시 … 29
어둠 속에서 어떤 사물들은 … 34
빛이 있는 쪽 … 35
젖 … 37
그녀 … 38
초 … 39
2─그녀
성에 … 47
서리 … 48
날개 … 49
주먹 … 50
눈 … 51
눈송이들 … 54
만년설 … 56
파도 … 58
진눈깨비 … 59
흰 개 … 60
눈보라 … 63
재 … 66
소금 … 67
달 … 69
레이스 커튼 … 71
입김 … 72
흰 새들 … 73
손수건 … 76
은하수 … 77
하얗게 웃는다 … 80
백목련 … 81
당의정 … 82
각설탕 … 83
불빛들 … 85
수천 개의 은빛 점 … 86
반짝임 … 87
흰 돌 … 88
흰 뼈 … 89
모래 … 90
백발 … 91
구름 … 94
백열전구 … 95
백야 … 96
빛의 섬 … 97
얇은 종이의 하얀 뒷면 … 98
흩날린다 … 100
고요에게 … 101
경계 … 104
갈대숲 … 106
흰나비 … 108
넋 … 109
쌀과 밥 … 111
3─모든 흰
─ … 117
당신의 눈 … 118
수의 … 120
언니 … 121
백지 위에 쓰는 몇 마디 말처럼 … 123
소복 … 124
연기 … 125
침묵 … 126
아랫니 … 127
작별 … 128
모든 흰 … 129
책 속으로
◐
마침내 혼자 아기를 낳았다. 혼자 탯줄을 잘랐다. 피 묻은 조그만 몸에다 방금 만든 배내옷을 입혔다. 죽지 마라 제발. 가느다란 소리로 우는 손바닥만한 아기를 안으며 되풀이해 중얼거렸다. 처음엔 꼭 감겨 있던 아기의 눈꺼풀이, 한 시간이 흐르자 거짓말처럼 방긋 열렸다. 그 까만 눈에 눈을 맞추며 다시 중얼거렸다. 제발 죽지 마. 한 시간쯤 더 흘러 아기는 죽었다. 죽은 아기를 가슴에 품고 모로 누워 그 몸이 점점 싸늘해지는 걸 견뎠다. 더이상 눈물이 흐르지 않았다. -「배내옷」에서
◐
삶은 누구에게도 특별히 호의적이지 않다, 그 사실을 알면서 걸을 때 내리는 진눈깨비. 이마를, 눈썹을, 뺨을 물큰하게 적시는 진눈깨비. 모든 것은 지나간다. 그 사실을 기억하며 걸을 때, 안간힘을 다해 움켜쥐어온 모든 게 기어이 사라지리란 걸 알면서 걸을 때 내리는 진눈깨비. 비도 아니고 눈도 아닌 것. 얼음도 아니고 물도 아닌 것. 눈을 감아도 떠도, 걸음을 멈춰도 더 빨리해도 눈썹을 적시는, 물큰하게 이마를 적시는 진눈깨비. -「진눈깨비」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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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미진 주택가 건물 아래를 걷던 늦여름 오후에 그녀는 봤다. 어떤 여자가 삼층 베란다 끝에서 빨래를 걷다 실수로 일부를 떨어뜨렸다. 손수건 한 장이 가장 느리게, 마지막으로 떨어졌다. 날개를 반쯤 접은 새처럼. 머뭇머뭇 내려앉을 데를 살피는 혼처럼. -「손수건」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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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녀는 자주 잊었다,
자신의 몸이(우리 모두의 몸이) 모래의 집이란 걸.
부스러져왔으며 부스러지고 있다는 걸.
끈질기게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리고 있다는 걸. -「모래」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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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하셨어요, 그 아이를?
스무 살 무렵 어느 밤 아버지에게 처음 물었을 때, 아직 쉰이 되지 않았던 그는 잠시 침묵하다 대답했다.
겹겹이 흰 천으로 싸서 산에 가서 묻었지.
혼자서요?
그랬지, 혼자서.
아기의 배내옷이 수의가 되었다. 강보가 관이 되었다.
아버지가 주무시러 들어간 뒤 나는 물을 마시려다 말고 딱딱하게 웅크리고 있던 어깨를 폈다. 명치를 누르며 숨을 들이마셨다. -「수의」전문
출판사 서평
2016 한강 신작 소설
『흰』
사라질─사라지고 있는─아름다움……
더럽혀지지 않는 어떤 흰 것에 관한 이야기
1.
작가 한강의 신작 소설을 선보입니다. 『흰』이라는 이름으로. 2013년 겨울에 기획한 책. 2014년에 완성된 초고를 바탕으로 글의 매무새를 닳도록 만지고 또 어루만져서 2016년 5월인 오늘에야 간신히 꿰맬 수 있게 된 책. 수를 놓듯 땀을 세어가며 지은 책, 그런 땀방울로 얼룩진 책, 다행이라면 “얼룩이 지더라도 흰 얼룩이 더러운 얼룩보다 낫기에.”
이참이 아니라면 ‘흰’이라는 한 글자에 매달려 그가 파생시킨 세상 모든 ‘흰 것’들의 안팎을 헤집어볼 수가 있었을까, 문득 그런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흰’이라는 한 글자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노라니 ‘흰’이라는 한 글자의 생김과 발음에서 끓어 넘친 숭늉처럼 찐득찐득한 슬픔 같은 게 밀려듭니다. ‘흰’, 익숙한 듯 편안했다가 낯선 듯 생경스러워지는 이 느낌의 근원은 어디에서 비롯될까요. 안다고 말할 수도, 또 모른다고 말할 수도 없는 이 기묘하고 미묘한 ‘흰’의 세계 속에서 한강이 끌어올린 서사는 놀라우리만치 넓고 깊습니다. 예민하면서도 섬세한 특유의 감각으로 예리하게 건져올린 사유는 얼음처럼 차갑고 막 빻아져 나온 뼛가루처럼 뜨겁습니다. 우리는 모두 ‘흰’에서 와서 ‘흰’으로 돌아가지 않던가요. 한강이 백지 위에 힘껏 눌러 쓴 소설 『흰』. 그 밖의 모든 흰 것을 말하는 소설 『흰』. 『흰』은 결코 더럽혀지지 않는, 절대로 더럽혀질 수가 없는 어떤 흰 것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2.
“흰 것에 대해 쓰겠다고 결심한 봄에 내가 처음 한 일은 목록을 만든 것이었다.”
그렇게 작가로부터 불려나온 흰 것의 목록은 총 65개의 이야기로 파생되어 ‘나’와 ‘그녀’와 ‘모든 흰’이라는 세 개의 부 아래 스미어 있습니다. 한 권의 소설이지만 때론 65편의 시가 실린 한 권의 시집으로 읽힘에 손색이 없는 것이 각 소제목 아래 각각의 이야기들이 그 자체로 밀도 있는 완성도를 자랑하기 때문입니다. 비교적 얇은 볼륨감을 가진 이 한 권의 소설은 쉽게 읽혀버리지 않습니다. 천천히 아주 느릿느릿 읽게 하다가, 흐린 연필 한 자루를 들어 문장에 혹은 단어에 실금을 긋게 하다가, 다시금 앞서 읽은 페이지로 돌아가 그 앞선 데서부터 다시금 읽기 시작하게 만듭니다. 내 마음의 멍울 같은 게 책장에 스미면서 점점 묵직해져가는 소설 『흰』의 무게감을 받치기 위해 불려나온 흰 것들. 예컨대 강보, 배내옷, 달떡, 안개, 흰 도시, 젖, 초, 성에, 서리, 각설탕, 흰 돌, 흰 뼈, 백발, 구름, 백열전구, 백야, 얇은 종이의 하얀 뒷면, 흰나비, 쌀과 밥, 수의, 소복, 연기, 아랫니, 눈, 눈송이들, 만년설, 파도, 진눈깨비, 흰 개, 눈보라, 재, 소금, 달, 레이스 커튼, 입김, 흰 새들, 손수건, 은하수, 백목련, 당의정…… 등등 온통 무참히도 흰 것들의 이름을 나지막하게 발음해봅니다. 이 소설은 이렇듯 눈으로 읽고 입으로 읽는 두 가지 과정 속에 불현듯 진정한 제 속내를 들켜주기도 한다지요. 흰 것을 떠올리고 불러내고 불러주고 글로 쓰는 일련의 과정이 결국은 흰 것을 보고 흰 것을 읽는 우리를 치유시켜주는 일이 아닐까요. “환부에 바를 흰 연고, 거기 덮을 흰 거즈”가 결국 한강이 말하고자 하는 소설이라는 장르의 역할이자 또다른 의미에서의 정의가 아닐까요.
3.
“익숙하고도 지독한 친구 같은 편두통”에 시달리는 ‘나’가 있습니다. 나에게는 죽은 제 어머니가 스물세 살에 낳았다 태어난 지 두 시간 만에 죽었다는 ‘언니’의 사연이 있습니다. 지난봄 누군가 나에게 물었지요. “당신이 어릴 때, 슬픔과 가까워지는 어떤 경험을 했느냐고.” 그 순간 나는 그 죽음을 떠올립니다. “어린 짐승들 중에서도 가장 무력한 짐승. 달떡처럼 희고 어여뻤던 아기. 그이가 죽은 자리에 내가 태어나 자랐다는 이야기.”
나는 지구 반대편의 오래된 한 도시로 옮겨온 뒤에도 자꾸만 떠오르는 오래된 기억들에 사로잡힙니다. 그러다 우연히 1945년 봄 미군항공기가 촬영한 이 도시의 영상을 보게 되지요. “유럽에서 유일하게 나치에 저항하여 봉기를 일으켰던 도시,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 깨끗이, 본보기로서 쓸어버리라는 히틀러의 명령 아래” 완벽하게 무너지고 부서졌던 도시, 그후 칠십 년이 지나 재건된 도시 곳곳을 걸으면서 나는 처음 “그 사람-이 도시와 비슷한 어떤 사람-의 얼굴을 곰곰이 생각”하기에 이르지요.
오직 목소리만을 들었을 것이다. 죽지 마. 죽지 마라 제발. 알아들을 수 없었을 그 말이 그이가 들은 유일한 음성이었을 것이다.
그러니 확언할 수도, 부인할 수도 없다. 그이가 나에게 때로 찾아왔었는지. 잠시 내 이마와 눈언저리에 머물렀었는지. 어린 시절 내가 느낀 어떤 감각과 막연한 감정 가운데, 모르는 사이 그이로부터 건너온 것들이 있었는지. 어둑한 방에 누워 추위를 느끼는 순간은 누구에게나 찾아오니까. 죽지 마. 죽지 마라 제발. -「빛이 있는 쪽」, 36쪽.
나에서 비롯된 이야기는 그녀에게로 시선을 옮아가기에 이릅니다. “죽지 마. 죽지 마라 제발. 그 말이 그녀의 몸속에 부적처럼 새겨져 있으므로” 나는 “그녀가 나 대신 이곳으로 왔다고 생각”하기에 이릅니다. 그리고 그런 그녀를 통해 세상의 흰 것들을 다시금 만나기에 이릅니다. 희게 얼어 있는 바다여, 태양의 빛이 조금 더 창백해지기 시작하는 서리가 내릴 무렵이여, 죽은 나비의 투명해져가는 날개여, 움켜쥘수록 차가워지는 창백한 두 주먹이여, 검은 코트 소매에 내려앉았다 녹아 사라질 때까지 일,이초를 살다 가는 눈이여, 안간힘을 다해 움켜쥐어온 모든 게 기어이 사라지리란 걸 알면서 걸을 때 내리는 진눈깨비여, 어느 추워진 아침 우리가 살아 있다는 증거, 우리 몸이 따뜻하다는 증거로 입술에서 처음으로 새어나오는 흰 입김이여, 아무리 멀리 날아가도 시야에서 사라지지 않는 흰 새여, 날개를 반쯤 접은 새처럼, 머뭇머뭇 내려앉을 데를 살피는 혼처럼 떨어지는 손수건이여, 얇은 종이의 하얀 뒷면 같은 죽음이여.
이 도시의 사람들이 그 벽 앞에 초를 밝히고 꽃을 바치는 것이 넋들을 위한 일만은 아니라는 것을 그녀는 안다.
살육당했던 것은 수치가 아니라고 믿는 것이다. 가능한 한 오래 애도를 연장하려 하는 것이다.
그녀는 자신이 두고 온 고국에서 일어났던 일들을 생각했고, 죽은 자들이 온전히 받지 못한 애도에 대해 생각했다. 그 넋들이 이곳에서처럼 거리 한복판에서 기려질 가능성에 대해 생각했고, 자신의 고국이 단 한 번도 그 일을 제대로 해내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보다 사소하게, 그녀는 자신의 재건에 빠진 과정이 무엇이었는지도 알게 되었다.
물론 그녀의 몸은 아직 죽지 않았다. 그녀의 넋은 아직 육체에 깃들어 있다.
(……)
그러니 몇 가지 일이 그녀에게 남아 있다;
거짓말을 그만둘 것.
(눈을 뜨고) 장막을 걷을 것.
기억할 모든 죽음과 넋들에게―자신의 것을 포함해―초를 밝힐 것.
-「넋」, 109~110쪽.
결혼을 앞둔 동생의 신부가 죽은 어머니의 몫으로 마련해온 흰 무명 치마저고리를 태우면서 나는 생각합니다. “당신, 올 수 있다면 지금 오기를. 연기로 지은 저 옷을 날개옷처럼 걸쳐주기를.” 그리고 나는 말합니다. “모든 흰 것들 속에서 당신이 마지막으로 내쉰 숨을 들이마실 것”이라고. ‘모든 흰’의 이름으로 알게 되고 앓게 된 통증, 이 고통을 온몸으로 겪어내고 견뎌낸 뒤에 나누는 작별의 인사라니 최선이라 할 수 있겠지요. 이것이 진정한 만남의 인사라 할 수 있겠지요. “둘 사이에 이승과 저승 사이를 소리 없이 일렁이는 거대한 물의 움직임”이 그렇게 섞이는 거라지요.
죽지 마. 죽지 마라 제발.
말을 모르던 당신이 검은 눈을 뜨고 들은 말을 내가 입술을 열어 중얼거린다. 백지에 힘껏 눌러쓴다.
그것만이 최선의 작별의 말이라고 믿는다. 죽지 말아요. 살아가요. -「작별」, 128쪽.
4.
『흰』에는 ‘작가의 말’이 실려 있지 않습니다. 작가의 말을 요청하는 편집자에게 한강은 이렇게 말했다지요. “이 소설은 전체가 다 작가의 말인걸요.” 어쩌면 이 한 권의 책에서 한강의 소설에 관한 모든 것을 엿볼 수 있지 않을까 섣부르나마 짐작도 해보거니와 마무리에 이 아름다운 책이 현재 번역중이라는 사실을 알려드릴까 합니다. 『채식주의자』와 『소년이 온다』를 번역한 데보라 스미스가 이번에도 한강의 『흰』을 맡았고, 이 책은 2017년 영국에서 크리스마스 언저리쯤 출간될 예정이라고 하네요. 이 또한 귀한 선물이 되겠지요. 그 외 다수의 나라에서 번역, 출간 계획 속에 있는 『흰』을 얘기하자니 문득 왜 이 구절이 떠오르는지 모르겠습니다. “먼저, 당신에게만은 깨끗한 것을 먼저.” 이 정서를 과연 해외에서는 어떻게들 이해하게 될는지요.
『흰』은 삶과 죽음이라는 경계를 무력하게 만드는 소설입니다. 삶과 죽음이라는 벽을 모래로 허물고, 삶과 죽음이라는 단단함을 무르게 만들고, 삶과 죽음이라는 당연함을 낯설게 하고, 삶과 죽음이라는 평면을 입체로 분산시키고, 삶과 죽음이라는 유한을 우주라는 무한으로 확장시킵니다. 넘나든다는 일은 몸에 유연성을 기르는 일이지요. 유연한 사고가 빚어내는 끌어안음은 연대를 이루기에 충분하지요. 산 자와 죽은 자의 연대, 어차피 모든 산 자는 모두 죽은 자가 될 것이 아닌가요. “아기의 배내옷이 수의가 되고 강보가 관이 되었”듯이 말입니다.
5.
더불어 한 가지, 소설 『흰』을 채우고 있는 열두 점의 작품에 관한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을 듯합니다. 『흰』은 차미혜 작가와의 협업을 통해 그의 사진과 영상이 한강의 글과 한데 어우러졌다는 데서 일단 그 특별함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싶은데요, 무엇보다 한 권의 책으로 합집합이 되는 일을 넘어서서 교집합으로, 서로의 고유한 영역이 유지되기도 하고 또 겹치기도 하면서 텍스트와 이미지라는 각각의 영역이 팽팽한 긴장감으로 특유의 예술성을 한껏 드러내게 되는바, 바로 그 지점이 작은 이 책을 만만치 않은 물성으로 응축하게 만든 힘이 아닐까 하였습니다.
파리국립고등미술학교를 졸업한 차미혜 작가는 견고해 보이는 기준이나 경계가 모호해지는 지점들을 영상, 사진, 퍼포먼스, 설치 등을 통해 표현해오고 있는데요, 이번 작업을 위해 선별하여 고른 열두 점의 사진과 영상 속 스틸 컷은 침묵이 얼마나 큰 목소리를 삼키고 있는지, 그러나 기실 그 말없음 속에 얼마나 많은 이야기가 숨죽여 있는지, 그 이면의 상상력을 무한대로 몸에 지니고 있음에 한 컷 한 컷 쉽사리 들어 넘길 수 없는 이미지의 무게를 한 장이라는 찰나에 고스란히 담아내느라 작가 자신이 얼마나 아팠을까 하는지를 여실히 어떤 떨림으로 느끼게 합니다.
텍스트 사이 그 사이에서 마치 수화를 하듯 속내를 아슬아슬 들키고 있는 이미지들 속에 천천히 눈이 머문다면 보다 느리게 때론 덮었다 다시 펼치는 아낌으로 이 책의 책장들에 바람을 불어넣어주셨으면 합니다. 바람에 바람이 스민다는 우연 같은 필연 속에 우리가 살아간다는 일과 우리가 사라져간다는 일에 문득 말수가 적어져본다면 이 또한 이 책이 주는 숭고한 울림이 아니겠는지요.
북로그 리뷰 (5)
흰 - 죽지마라 lm**440 | 2016-06-07 | 추천: 0 | 5점 만점에 5점
'채식주의자', '소년이 온다'에 이은 세번째로 읽은 한강 작가의 책이다. 장르가 소설로 분류되어 있으나 에세이에 가깝다고 개인적으로 생각한다. 세상의 흰 것들에 대한 작가의 경험과 철학이 담겨져 있다. 기승전결이 없는 짧은 글이기에 시를 읽듯이 되새김질 해야 한다. 행간을 읽기 위해서는.
흰 눈이 주가 되어 풍경을 묘사한 부분도 기억에 남지만 무엇보다 인상적인 소재는 탄생과 죽음이다. 강보와 배내옷이 책의 처음과 끝을 장식한다. 위로 오빠와 언니가 태어난 얼마 뒤 숨을 거둔 뒤 배내옷이 수의가 되고 강보가 관이 되어 묻혔다. 그들이 생명을 유지했다면 작가의 탄생은 없었을 것이라 한다. 그래도 만약을 상상한다. 언니가 있었으면 자신을 돌보고 어머니의 슬픔이 덜했졌을거라고.
저세상에 계신 어머니를 향한 글은 독자의 감정선을 자극한다. 생전 함께했던 일들, 남동생의 결혼식에 앞서 무명저고리를 태워 어머니께 입혀드리는 행동에 작가의 감정이 녹아들어 있다. 그러며 작가는 불특정다수를 향해 외친다. 죽지마라. 죽지마라.
이전작 '소년이 온다' 속 광주항쟁을 떠올리게 하는 글도 있다. 작품 속 인물들이 워낙 강렬한 탓에 묵념하듯 그들을 기리며 읽게 된다.
내용 중에 옛애인을 백발이 성성한, 몸의 기운이 많이 빠져나간 상태에서 다시 볼 수 있었으면 하는 문장이 있다. 작가의 창조적 문장인지 아니면 누구의 말을 인용한 것인지는 확실치 않지만 개인적으로 한번 경험해 봤으면 한다. 가장 아름다울 때, 가장 멋질 때 만날 것이란 고정관념을 깬 건 둘째치고 죽음을 앞둔 시기에 다시 결별하는 감정이 어떤 것인지 느껴보고 싶다.
시간 넉넉히 잡고 앉은 자리에서 완독하는 그런 종류의 글이 아닌 출퇴근 지하철 등에서 한 두개의 글을 곱씹어보며 읽으면 좋은 책이다.
흰 ro**nce365 | 2016-06-03 | 추천: 0 | 5점 만점에 5점 구매
문을 읽고 강보를 읽는데 소설로 잘못 알고 있었나 어리둥절해져 새삼 이 책의 분류를 찾아봤다. 표지에도 분명 소설이라고 적혀 있으니 잘못 안 건 아니었다. 시인듯 에세이인듯 소제목의 짧은 이야기에는 제각각 울림이 있어 끊어지는 듯하면서도 이어져서 신선했다. 보통 장편소설 한권의 반도 안되는 적은 페이지의 얇은 책이지만 읽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대개 스토리 위주로 책을 읽다보니 속독을 하는 편인데 이 책은 그럴 수 없었다. 시집을 읽을 때처럼 문장 한줄 단어 하나하나를 음미하고 곱씹게 되었다. 솔직히 한번 읽어서는 잘 감이 잡히지 않지만 이 책을 쓰는데 작가가 얼마나 공을 들였을지 고스란히 전해져와 절로 숙연해졌다. 그리고 작가의 수상 소식이 참 시기적절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을 모르고 지나치지 않아 다행이다.
[책수다] 흰 - 한강 de**te48 | 2016-05-27 | 추천: 0 | 5점 만점에 4점 구매
원문 : http://blair.kr/220720945164
[매력쟁이크's 책수다] 맨부커상 수상이후로 연일 국내 서점 메인 및 책 소개 페이지를 차지하고 있는 한강이라는 작가. 이 상을 타기 전에는 이런 작가가 있었는지도 잘 몰랐었는데 분위기에 휩끌려 예약걸어 놨다가 배송이 오자마자 바로 읽기 시작했다. 이 책은 장르는 소설이지만 어떤 긴 줄거리로 글이 그리 길지는 않다. '흰' 하얀 것들에 대한 이야기를 주르륵 써내려갔으며, 각자 주제에 맞는 짧은 글들이지만 또 전체적으로 읽어내려가다 보면 묘한 분위기로 어우려지는 힘이 있는 이야기가 있다. 한 편 한 편 나눠보면 얼핏 시집처럼 읽히기도 한다. 황경신 작가 같이 표현력은 뛰어나지만 문체가 보다 힘 있고, 무채색을 띈 것 같은 느낌이지만 어딘가 모르게 또 강렬한 느낌을 주는 글들이 참 좋았다. 주제는 '흰' . 65개의 작은 주제의 짧막한 글을 퀼트처럼 연결한 구성이다. 하얀 것들은 어떨 것들이 있을까 궁금해 하며 읽었는데, 참 많은 이야기를 펼쳐낼 수 있는 능력이 돋보였다. 자신이 태어나기 전 죽은 언니에 대한 자전적인 이야기들도 있고, 빛, 초, 눈, 파도, 별, 등등 더럽혀 지지 않는 하얀 것들에 대한 이야기들이 이어진다. 글이 길지 않아 책을 많이 읽지 않는 사람도 별 부담 없이 일어볼 수 있다. 짧지만 강한 표현력이 돋보이는 책, 한강 이라는 작가가 궁금하다면 한 번 읽어봐도 좋을 듯 하다.
흰 (The Elegy of Whiteness) - 한강★★★★☆
흰 것에 대해 쓰겠다고 결심한 봄에 내가 처음 한 일은 목록을 만든 것이었다. 강보 배내옷소금눈....... (중략)백발 수의한 단어씩 적어갈 때마다 이상하게 마음이 흔들렸다. 이 책을 꼭 완성하고 싶다고, 이것을 쓰는 과정이 무엇인가를 변화시켜줄 것 같다고 느꼈다. 환부에 바를 흰 연고, 거기 덮을 흰 거즈 같은 무엇인가가 필요했다고. 하지만 며칠이 지나 다시 목록을 읽으며 생각했다.어떤 의미가 있을까, 이 단어들을 들여다보는 일엔?활로 철현을 켜면 슬프거나 기이하거나 새된 소리가 나는 것처럼,이 단어들로 심장을 문지르면 어떤 문장들이건 흘러나올 것이다.그 문장들 사이에 흰 거즈를 덮고 숨어도 괜찮은 걸까.질문에 답하기 어려워 시작을 미루었다
시간의 감각이 날카로울 때가 있다. 몸이 아플 때 특히 그렇다.열네 살 무렵 시작된 편두통은 예고 없이 위경련과 함께 찾아와 일상을 정지시킨다. 해오던 일을 모두 멈추고 통증을 견디는 동안, 한방울씩 떨어져 내리는 시간은 면도날을 뭉쳐 만든 구슬들 같다. 손끝이 스치면 피가 흐를 것 같다.숨을 들이쉬며 한순간씩 더 살아내고 있다는 사실이 또렷하게 느껴진다. 일상으로 돌아온 뒤까지도 그 감각은 여전히 그 자리에 숨죽여 서서 나를 기다린다. 그렇게 날카로운 시간의 모서리 - 시시각각 갱신되는 투명한 벼랑의 가장자리에서 우리는 앞으로 나아간다. 살아온 만큼의 시간 끝에 아슬아슬하게 한 발을 디디고, 의지가 개입할 겨를 없이, 서슴없이 남은 한 발을 허공으로 내딛는다. 특별히 우리가 용감해서가 아니라 그것밖엔 방법이 없기 때문에.지금 이 순간도 그 위태로움을 나는 느낀다. 아직 살아보지 않은 시간 속으로, 쓰지 않은 책 속으로 무모하게 걸어 들어간다.
내가 겪어온 삶의 모든 기억들이, 그 기억들과 분리해낼 수 없는 내 모국어와 함께 고립되고 봉인된 것처럼 느껴진다. 고립이 완고해질수록 뜻밖의 기억들이 생생해진다. 압도하듯 무거워진다. 지난여름 내가 도망치듯 찾아든 곳이 지국 반대편의 어떤 도시가아니라, 결국 나의 내부 한 가운데였다는 생각이 들 만큼.- 안개 中이 도시에는 칠십 년 이상 된 것들이 존재하지 않는다. 구시가의 성곽들과 화려한 궁전, 시 외곽에 있는 왕들의 호숫가 여름 별장은 모두 가짜다. 사진과 그림과 지도에 의지해 끈질기에 복원한 새것이다. 간혹 어떤 기둥이나 벽들의 아랫부분이 살아남았을 경우에는, 그 옆과 위로 새 기둥과 새 벽이 연결되어 있다. 래된 아랫부분과 새것인 윗부분을 분할하는 경계, 파괴를 증언하는 선들이 도드라지게 노출되어 있다. 그 사람에 대해 처음 생각한 것은 그날이었다. 이 도시와 같은 운명을 가진 어떤 사람. 한차례 죽었거나 파괴되었던 사람. 그을린 잔해들 위에 끈덕지게 스스로를 복원한 사람. 그래서 아직 새것인 사람. 어떤 기둥, 어떤 늙은 석벽들의 아랫부분이 살아남아, 그 위에 덧쌓은 선명한 새것과 연결된 이상한 무늬를 가지게 된 사람.- 흰 도시 中몸을 서서히 밀어 넣으며 초들이 낮아진다. 서서히 사라진다. 이제 당신에게 내가 흰 것을 줄게. 더럽혀지더라도 흰 것을, 오직 흰 것들을 건넬게. 더 이상 스스로에게 묻지 않을게. 이 삶을 당신에게 건네어도 괜찮을지.- 초 中엉망으로 넘어졌다가 얼어서 곱은 손으로 땅을 짚고 일어서던 사람이, 여태 인생을 낭비해왔다는 걸 깨달았을 때, 씨팔 그 끔찍하게 고독한 집구석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이게 뭔가, 대체 이게 뭔가 생각할 때 더럽게도 하얗게 내리던 눈.*눈송이가 성글게 흩날린다. 가로등의 불빛이 닿지 않는 검은 허공에. 말없는 검은 나뭇가지들 위에. 고개를 수그리고 걷는 행인들의 머리에.- 눈송이들 中물과 물이 만나는 경계에 서서 마치 영원히 반복될 것 같은 파도의 움직임을 지켜보는 동안 (그러나 실은 영원하지 않다- 지구도 태양계도 언젠가 사라지니까),우리 삶이 찰나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또렷하게 만져진다. 부서지는 순간마다 파도는 눈부시게 희다. 먼 바다의 잔잔한 물살은 무수한 물고기들의 비늘 같다. 수천수만의 반짝임이 거기 있다. 수천수만의 뒤척임이 있다(그러나 아무것도 영원하지 않다).- 파도 中시골 본가에 찾아간 밤이면 두 눈 속으로 일제히 쏟아져 내리던, 알알의 소금 같은 수천의 별들. 한순간 눈을 씻어 어떤 것도 기억할 수 없게 하던 차고 깨끗한 빛들.- 은하수 中어린 시절부터 그녀가 먹어온 알약들을 모두 합하면 몇 개일까? 앓으면서 보낸 시간들을 모두 합하면 얼마가 될까? 마치 인생 자체가 그녀의 전진을 원하지 않는 것처럼 그녀는 반복해서 아팠다. 그녀가 밝은 쪽으로 나아가는 것을 막는 힘이 바로 자신의 몸속에 대기하고 있는 것처럼. 그때마다 주춤거리며 그녀가 길을 잃었던 시간을 모두 합하면 얼마나 될까?- 당의정 中이제 그녀는 더이상 단것을 특별히 좋아하지 않지만, 이따금 각설탕이 쌓여 있는 접시를 보면 귀한 무엇인가를 마주친 것 같은 기분이 된다. 어떤 기억들은 시간으로 인해 훼손되지 않는다. 고통도 마찬가지다. 그게 모든 걸 물들이고 망가뜨린다는 말은 사실이 아니다.- 각설탕 中그리고 그녀는 자주 잊었다, 자신의 몸이(우리 모두의 몸이) 모래의 집이란 걸. 스러져왔으며 부스러지고 있다는 걸. 끈질기게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리고 있다는 걸.- 모래 中회복될 때마다 그녀는 삶에 대한 서늘한 마음을 품게 되곤 했다. 원한이라고 부르기엔 연약하고, 원망이라고 부르기에는 얼마간 독한 마음이었다. 밤마다 그녀에게 이불을 덮어주고 이마에 입 맞춰 주던 이가 다시 한 번 그녀를 얼어붙은 집 밖으로 내쫓은 것 같은, 그 냉정한 속내를 한 번 더 뼈저리게 깨달은 것 같은 마음.(중략)자신을 버린 적 있는 사람을 무람없이 다시 사랑할 수 없는 것처럼, 그녀가 삶을 다시 사랑하는 일은 그때마다 길고 복잡한 과정을 필요로 했다. 왜냐하면, 당신은 언젠가 반드시 나를 버릴 테니까. 내가 가장 약하고 도움이 필요할 때, 돌이킬 수 없이 서늘하게 등을 돌릴 테니까. 그걸 나는 투명하게 알고 있으니까. 그걸 알기 전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되었으니까.- 얇은 종이의 하얀 뒷면 中잿빛 구시가지가 삽시간에 희끗하게 지워졌다. 갑자기 비현실적으로 변한 공간 속으로 행인들이 자신의 남루한 시간을 덧대며 걸어 들어갔다. 그녀도 멈추지 않고 걸었다, 사라질 - 사라지고 있는 - 아름다움을 통과했다. 묵묵히.- 흩날린다 中부서져본 적 없는 사람의 걸음걸이를 흉내내어 여기까지 걸어왔다. 꿰매지 않은 자리마다 깨끗한 장막을 덧대 가렸다. 결별과 애도는 생략했다. 부서지지 않았다고 믿으면 더이상 부서지지 않을 거라고 믿었다. 그러니 몇 가지 일이 그녀에게 남아 있다. 거짓말을 그만둘 것.(눈을 뜨고) 장막을 걷을 것. 기억할 모든 죽음과 넋들에게- 자신의 것을 포함해- 초를 밝힐 것.- 넋 中길었던 하루가 끝나면 침묵할 시간이 필요하다. 난롯불 앞에서 자신도 모르게 그렇게 하듯, 침묵의 미미한 온기를 향해 굳은 손을 뻗어 펼칠 시간이.- 침묵 中자작나무숲의 침묵 속에서 당신을 볼 것이다. 겨울 해가 드는 창의 정적 속에서 볼 것이다. 비스듬히 천장에 비춰선 광선을 따라 흔들리는, 빛나는 먼지 분말들 속에서 볼 것이다. 그 흰, 모든 흰 것들 속에서 당신이 마지막으로 내쉰 숨을 들이마실 것이다.- 모든 흰 中
흰 - 한강 ch**jang | 2016-05-26 | 추천: 0 | 5점 만점에 5점
<흰> - 한강 The Elegy of Whiteness
"죽지 마. 죽지 마라 제발"
<흰>의 목록
목록에 글이 채워저 어떤 것은 에세이가, 어떤 것은 시가 되었다.
흩어진 목록이 모여 소설이 됐다.
힘껏 써내려간 생이 된 소설 <흰>
<흰>...
봄에서 여름으로 넘어가는 사이의 계절에 한강의 소설 <흰>을 만났다.
이제막 더위가 시작되려 하는 때 머리에, 심장에, 온몸에 차가운 예방 접종을 맞았다.
내가 읽은 <흰>은 "틈"이다.
벌어지지도 좁아지지도 않는 틈.
연고를 바르고 솜으로 덮어도 매울 수 없는 틈.
사는 것도 죽는 것도 아닌 견뎌내는 '틈'
삶과 죽음의 사이에 있는 바로 그 틈.
그 틈속에서 힘껏 눌린 검정의 선
흰 바탕에 어지러이 퍼져가는 선들을 가만히 바라보는 것 만으로도 온 힘을 다해야 했다.
시간이 흐를 수록 점점 더 어리러이 퍼지는 선,
놓칠까봐 부랴 부랴 쫒아가다가도 잠시 한눈을 파는 순간 선이 지나간 자리는 하얗게 지워진다.
힘껏 쓰여진 <흰>문장들 틈사이에서 힘껏 살아온 지난 날들의 삶을 돌아 본다.
의미가 없었던 듯한 삶, 순간의 의미는 있었던 것 같기도 한 삶의 한 자락들...
지나온 삶은 그렇게 틈 속에 있었다.
남은 것은 다가오지 않은 삶. 아직 한번도 살지 못한 미래의 삶.
<흰>것에 힘껏 삶을 채워 보기로 한다.
흰 것은 눈을... 머리를... 생각을 피곤하게 만든다.
아니다. 환상을 만들게 한다. 잠잠하던 생각의 흐름을 빠르게 한다.
마치 사냥을 앞둔 맹수처럼 온몸이 긴장을 하고, 모든 감각이 예민해 진다.
아무것도 없는 깨끗한 "흰" 것.
'백(白)'도 아닌 '하얀'도 아닌 "흰"이여만 하는 것. ...
한강은 이렇게 또 한번 다그친다. 도망칠 수 없는 것이 있다고, 도망쳐서는 가릴 수 없는 것이 있다고.
삶과 죽음이 그런 것이라고, 그리고 용기를 준다. 충분히 마주 할 수 있다고, 온 힘을 다해 한번 살아보라고...
(이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