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의 고향 강서초등학교
민문자
여덟 살 되던 해 어느 봄날이었다. 아버지 손에 이끌려 난생처음 학교라는 곳에 왜 가는지도 모르고 따라갔다. 언니 오빠도 없는 맏이로 T·V는 물론 라디오도 없는 집에 태어나서 듣고 본 것이 없어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였다. 지금 생각해 보니 사전교육을 받지 못하고 초등학교에 입학했던 것이었다. 6·25 전쟁이 일어난 다음 해, 어려운 시기에 입학을 했던 것이다.
학교에 갈 때에는 왼쪽 가슴에 손수건과 이름표를 달고 갔다. 당시는 코침을 질질 흘리는 어린이가 대부분이어서 손수건이 꼭 필요했었다. 처음 맞이하는 담임선생님은 긴 머리 파마를 한 여자 선생님이셨다.
선생님께서 “앞으로 나란히!”하고 구령을 붙여 두 팔을 들어 어깨와 평행되게 똑바로 세우셨다. 나는 아무것도 몰라서 열 손가락을 쫙 벌리고 서있던 기억이 떠올라 지금도 부끄럽기 짝이 없다.
어느 날은 공책과 연필을 준비하고 이름을 써보라 할 때 이름도 못써 쩔쩔매니 선생님께서 다가오셔서 가르쳐주시던 기억이 난다. 숫자도 10까지나 세어보고 갔었는지 모르겠다. 자신의 이름도 쓸 줄도 모르고 학교에 왜 가는지도 모르고 준비 없이 입학을 했던 것이다.
그렇게 입학을 한 후 고학년으로 올라갈수록 공부 잘한다는 소리를 듣고 4학년 때에는 졸업생을 위한 학예회 때 연극반에 뽑혀 흥부아들로 무대에도 서 보았다. 5학년 때에는 졸업생들에게 재학생 대표로 송사를 낭독했고 6학년 졸업할 때는 우등상을 탔다.
우리 학년은 1, 2학년 때 남자가 약 80명으로 1반이고 여자가 40명으로 2반이었다. 지금 강당 건물 뒤쪽에 외따로 있던 큰 교실에는 1반 남학생들이, 그 옆 작은 창고교실에서는 우리 2반 여학생들이 공부를 했다. 2학년 때까지 의자도 없이 마룻바닥에 앉아 앉은뱅이책상에서 마분지 같은 질 낮은 공책을 사용하였다. 모든 학용품과 물자가 귀하던 시대였기에 그림을 그릴 때는 6색 크레용이 전부였다.
그 당시 위궤양으로 고생을 많이 하시던 올드미스 신숙현 담임선생님께서 1, 2학년을 이어서 그 창고 교실에서 가르쳐 주셨다. 2학년 때, 선생님께서는 우리에게 교실 뒤쪽에 양동이 2개를 가져다 놓고 소변을 보게 하셨다. 공부를 하다가도 오줌이 마려우면 교실 뒤쪽에 놓인 양동이에 엉거주춤하게 엉덩이를 들고 소변을 보던 일, 지금 학생들이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그렇게 해서 받은 오줌통을 나이 많고 키 큰 어린이 둘씩 낑낑거리고 선생님과 함께 들고나가 실습지 채소밭에 거름으로 주었다. 지금까지도 그 선생님으로부터 겨울철에 배운 동요가 잊히지 않는다.
눈,꽃,새
하얀 눈 하얀 눈 어째서 하얀가
마음이 맑으니 하얗지
빨간 꽃 빨간 꽃 어째서 빨간가
마음이 예쁘니 빨갛지
파랑새 파랑새 어째서 파란가
파란 콩 먹으니 파랗지
2학년 때 추운 겨울 학예회 준비로 점심 도시락을 싸가지고 다녔다. 나는 집에서 농사지은 검정 밤콩 섞인 쌀밥을 싸가지고 가면 선생님은 당신 도시락과 바꾸어 먹자고 하셨다. 선생님 도시락은 하얀 안남미 끈기 없는 쌀밥이었는데 아마도 전쟁통에 배급받은 쌀이었던 것 같았다. 이제는 맛있는 음식 자주 사 드릴 수 있는데 어디 계실까? 지금까지 살아계신다면 100세가 다 되셨을 것이다.
3학년에 올라가서는 남녀 합반으로 큰 교실에서 공부할 수 있었다. 화장실 건물은 우리 학년 교실과 본관 쪽으로 가는 교사(校舍) 사이에 별도로 있었다. 그때는 변소라고 불렀는데 마룻바닥이 다 낡아 구멍도 나고 잘못하면 풍덩 빠지기 쉬웠다. 청소할 때는 대부분 변소 청소를 하기 싫어 억지로 하려다 보니 양동이로 물을 많이 퍼다 끼얹어 배설물보다는 물이 많았다. 대변을 볼 때는 첨벙 대는 소리와 함께 오물이 튀어 오르기 십상이라 엉덩이를 번쩍번쩍 들며 용변을 보아야 했다.
교실 크기와 남녀 학생 비율이 불균형인 우리 학년인지라 4학년과 5학년 때도 우리 여자반은 작은 창고교실에서 공부를 해야 했다. 여자에 대한 호기심이 강한 남학생들의 짓궂은 장난이 몹시 심했다. 여학생들이 모래주머니 받기 놀이를 하면 채어가고 고무줄놀이를 하면 주머니칼로 잘라 달아나기 일쑤였다.
5학년 때에 담임선생님은 성적이 좋지 않은 친구들에게 점수가 잘 보이도록 두 손으로 시험지를 이마에 대게하고 1반 남자 교실을 다녀오게 하였다. 아마도 수치심을 느껴 공부를 열심히 하게 한 것일 게다.
창고교실의 가장 잊지 못할 추억은 오랫동안 오들오들 떨며 큰소리로 읽기 연습을 했던 것이다. 그것은 선배들 졸업식에 내가 재학생 대표로서 많은 내빈과 졸업생들 앞에서 낭독한「송사(送辭)」였었다.
6학년 때에는 본관 교무실 옆에 위치한 좋은 교실에서 공부를 할 수 있었다. 우리 학년을 남녀 합하여 똑같이 1, 2 반으로 나누어 한 교실에 남자 세 줄, 여자 한 줄씩 앉혀 남녀 공학을 시켰기 때문이다. 이때는 또 얼마나 남자들이 짓궂게 굴었는지 개구쟁이들은 여학생들에게 침을 톡톡 뱉는 등 못살게 굴어 싸움이 자주 일어나곤 하였다. 그러던 우리 34회 동기생들이 졸업 후 성년이 된 후에는 남녀 서로 일 년이면 몇 차례씩 만나 애경사를 챙기고 여행을 함께하는 돈독한 정을 나누고들 있다.
입학 당시에 숫자 열도 제대로 못 세고 자신의 이름도 못 쓰던 어리뱅이였던 내가 15살에 아버지가 일찍 세상을 하직하셔서 우울한 세월을 보냈다. 그래도 그 시대의 몇 안 되는 행운아로 청주여중 청주여고 청주교대에서 공부하고 초등학교 교사를 수년간 하였다. 그 후 문학에 빠져 취미생활을 오래 하다 보니 시인이 되어 전자책과 종이책으로 나온 저서 9권을 간직하고 있다. 강서초등학교 도서실과 총동문회 사무실에 이 책들이 비치되어 있으니 후배들에게 다소나마 도움이 되면 좋겠다.
초등학교를 졸업한지 어언 63년이 흘러갔다. 전통적인 농촌이던 이 지역이 시대의 변화에 따라 상전벽해(桑田碧海)가 되었다. 가난하던 시대에 창고건물에서 공부하던 내가 3, 4층의 현대식 건물로 크게 발전한 모교를 바라보는 마음은 감개무량하다.
본관 가운데에 있는 국기게양대가 내 눈에 띄었다. 해마다 10월 3일 총동문회가 열리는 날 참석하게 되면 나도 모르게 발길이 그곳으로 옮겨진다. 돌아가신지 43년이나 된 숙부님의 사랑어린 흔적을 살펴보기 위해서다.
『강서면 용정리 민영직 기증. 서기 1963년 8월 15일』
오랜 세월이 흘렀어도 낡았다고 버려지지 않고 새로 학교를 건축하거나 증축이 되었어도 본관 입구에서 자리를 지킨 국기 게양대, 여간 고맙지가 않다.
우리 가족에게는 특별한 의미가 있는 이 태극기가 펼럭이던 국기게양대는 나의 어린 동생들이 이 학교에 다닐 때 작은 아버지가 기증한 것이었다. 그것은 멀리 인천에서 사시던 작은아버지가 어린 조카들을 위해서 아버지대신 최선의 역할을 해주신 것이었다. 철물상을 하시고 계셨는데 국기게양대를 공작소에 부탁 주문제작한 후 150Km를 운반해 온 투박한 철구조물, 그래도 당시에는 보기 드문 훌륭한 기증품이었다. 숙부님은 1977년 돌아가셨으나 그분의 바람대로 어린 동생들도 잘 자라 칠순을 바라보며 나름대로 역할을 잘하며 살아와서 참으로 고맙다.
강서초등학교는 나의 삶 나의 인생의 출발지로 새싹을 피워 올린 곳이므로 영원한 내 마음의 고향이다. 다가오는 100주년 기념 10월 3일 동문체육대회에는 꼭 참석해야겠다.



지금은 강서초등학교 교기가 펄럭이고 있다. <2020. 7. 14>
첫댓글 6.25전란 직후 열악한 환경 속에서 초등학교를 다녔군요. 그래도 귀한 추억들을 간직하게 되었으니 아름다운 시절이라고 해야 되겠네요.
어릴 때 전쟁의 후유증으로 남들은 미국의 원조에 의탁하여 식생활도 옥수수우유죽으로 해결해야 할 때 농부의 딸로 태어나 굶지 않은 것 만도 행운이었습니다.
무지몽매하던 어빙이 소녀가 초등학교 6년 동안 학교 담임선생님들로부터 분에 넘치는 사랑을 받고 지혜의 씨를 잘 받고 성장했지요.
저와 형제들에게 아버지가 안 계셨어도 큰 고생없이 자랄 수 있었던 것은 멀리 인천에서 자주 왕래하시며
아버지 역할을 잘 해주신 숙부님 덕분이라 늘 감사함을 잊지 않고 있습니다.
청주에도 강서초등학교가 있군요. 소변통, 졸업식 송사 이런 것 사라진 지 오래돼서 볼 수 없지만
형제 대신해서 조카들 사랑해줄 숙부도 이젠 볼 수 없겠지요. 인천에서 청주가 좀 멉니까?
그런 국기게양대 또 있을까요,
가슴 뭉클합니다.
공감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성인이 되도록 부모 대신 이렇게 친척의 도움을 받은 분, 또는 도움을 주신 분 누가 있을까요?
우리 숙부, 숙모의 사랑을 먹고 자란 우리는 사촌과 한 형제처럼 지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