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체중계에 올라갔다가 놀라서 내려왔다. 겨울 동안 체중이 조금씩 불기 시작한다는 걸 알았지만, 이렇게 살이 찐 줄 몰랐다. 임신 막달에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아마 내 생애를 통해 최고치가 아닌가 싶다. 어려서 골이 나면 엄마에게 밥 안 먹는 거로 시위를 하곤 했지만, 실은 입이 짧아 평소에도 싸준 도시락을 다 비운 적이 거의 없었다. 학창 시절에 곧잘 친구들이 한쪽 팔로도 안을 수 있는 허리라고 놀리기도 하고, 부러워하기도 하였다. 다이어트라는 단어조차 생소했던 말라깽이는 어디로 가고 거울 앞에 초로의 뚱보 아줌마가 서 있다. 하기야 요즘 내가 먹는 식사를 생각하면 살이 찌지 않는 게 오히려 비정상일 것이다. 아침마다 두부 세이크에 견과류를 첨가하고, 온갖 과일이며 채소를 갈아 먹고 있는데 그 양이 만만치 않다. 게다가 씹을 게 좀 있어야겠다 싶어 곡물 식빵에 치즈, 달걀까지 얹어 먹으니 변명의 여지가 없다. 똑같은 식사를 해도 남편은 늘 비쩍 말라 있어 사람들한테 밥 좀 잘 챙겨 먹이라는 억울한 소리를 듣곤 하는데, 그럴 때면 속이 상해 남편에게 한마디 하게 된다. "사람이 양심이 있어야지, 그만큼 먹었으면 나처럼 살이 찌는 게 당연하지 어쩌면 그렇게 솔직하지 못하고 비생산적이야?"
시어머니한테서 아침 일찍 전화가 왔다. 통 밥맛이 없으니 전에 먹던 밥맛 나는 약을 좀 사다 달라고 하신다. 최근에 혈당이 높아졌다고 요양병원에서 식사 제한을 하고 있어 즐겨 드시던 간식을 맘껏 드시지 못하니 그만 기운이 없고 밥맛도 뚝 떨어지신 모양이다. 병원에서 식사량을 줄이라는 판에 밥맛 나는 약이라니 무슨 엉뚱한 말씀인가 싶었지만, 한번 말씀을 내시면 기어이 당신 뜻을 고집하니 이번에도 어쩔 도리가 없겠다. 그리고 누구 말마따나 나이 구십에 굳이 초콜릿을 먹지 않으려고 애쓰는 것은 참 쓸데없는 짓이기도 하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어머니가 나를 보면 늘 죽고 싶은데 죽을 수가 없다며, 죽을 날을 기다리는 것이 지루하다고 말씀을 하신다. 한 번은 내가 "어머니, 입술에 침이나 바르시지요." 하고 짓궂게 농담을 했더니, 금방 샐쭉해서는 "네가 내 심정을 어떻게 알겠어?" 하시며 돌아앉으신다. 그런 분이 툭 하면 링거 꽂으라 하시고, 몸에 좋다는 온갖 영양제는 다 찾으시는가 묻고 싶었지만, 속으로 웃고 말았다. 오죽하면 인간의 삼대 거짓말이 처녀가 시집가지 않겠다는 것과 장사꾼이 밑지고 판다는 것 그리고 노인네가 빨리 죽고 싶다는 말이라고 했겠는가. 우리 병원에 입원하신 암 환자들의 경우에도 정작 암 때문이 아니라 식탐으로 탈을 내어서 돌아가시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된다. 위암 환자가 밥을 욕심내는 가하면 밤에 몰래 간식을 사서 들어오기도 하는 걸 볼 때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이제 알 것 같다. 나 자신 비만이 되어간다고 걱정을 하면서도 밥을 하루 한 끼라도 줄여볼까 생각하면 왠지 엄두가 나지 않는다. 젊어서 금식을 해 본 적이 있었는데, 음식을 끊은 며칠 간은 힘들지만, 고비만 넘기면 몸뿐만 아니라 정신이 맑아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걸 알면서도 한 끼 거르는 것조차 주저하게 되는 것은 아무래도 두려움 때문인 것 같다. 늙으면 밥심으로 버티는데, 괜히 굶었다가 쓰러지기나 하면 어쩌나 싶은 거다. 이 나이에 미스 코리아에 나갈 것도 아닌데, 몸을 축냈다가 기력이 빠져 지금 이 정도의 건강도 유지하지 못하는 게 아닌가 해서 은근히 겁도 난다. 밥맛이 꿀맛이라서가 아니라 생명에 대한 애착이 심리적으로 배고픔을 견딜 수 없게 만드는 것 같다. 그러고 보면 내가 시어머니를 흉볼 처지가 아니다. 사람은 곡기가 끊어져야 죽는다고 하던데, 곡기가 끊어져 죽을까 봐 무서워하는 건 어머니나 나나 매한가지다. 군소리 말고 내일은 어머니가 원하시는 밥맛 나는 약을 사드려야겠다. 그래도 나는 아직 밥맛 나는 약을 먹지 않아도 밥이 술술 넘어가니 그나마 다행이다. 밥을 먹을 수 있는 것만도 축복이니 체중계 따위는 치워버리고 밥맛 있을 때 맛있게 먹으며 즐겁게 살아볼 일이다.
정직한 글. 바다만큼 공감하게 됩니다. ㅎㅎ 음식에 대한 절재력도. 이젠 별 의미가 없어져버리고. 자꾸 편해져 가네요. 밥맛. 입맛이 없으면. 약까지는 아니더라도 나가면 별의 별 먹거리 음식들이 넘쳐나니까 어떻게 살이 빠지는 대박을 기대하겠어요? ㅋ 먹고 싶은 걸 먹고. 운동은 할려고 하는게 유일한 비만예방의 방법입니다. 덜 먹으면 몸도 가볍고 살도 빠져서 좋을텐데 역시나 어렵겠지요. ㅎㅎ
첫댓글 암튼 부럽습니다. 그 마음이.ㅎㅎ
정직한 글. 바다만큼 공감하게 됩니다. ㅎㅎ
음식에 대한 절재력도. 이젠 별 의미가 없어져버리고. 자꾸 편해져 가네요.
밥맛. 입맛이 없으면. 약까지는 아니더라도 나가면 별의 별 먹거리 음식들이 넘쳐나니까 어떻게 살이 빠지는 대박을 기대하겠어요? ㅋ
먹고 싶은 걸 먹고. 운동은 할려고 하는게 유일한 비만예방의 방법입니다. 덜 먹으면 몸도 가볍고 살도 빠져서 좋을텐데 역시나 어렵겠지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