똑똑한 사람은 다 평양 가고 서울엔 쭉정이만 남았다
▲ 철원읍 대마리에 세워진 두루미평화관의 문학비와 이태준 흉상 ⓒ 윤태옥
[기사수정: 26일 오전 9시 50분]
휴전선 일대에서 한국전쟁 흔적을 찾아다니면서 만난 가장 인상적인 월북자는 철원 태생의 이태준이었다. 철원읍 대마리에 있는 두루미평화관 마당에는 그의 탄생 100주년인 2004년에 세운 '상허이태준문학비'가 흉상과 함께 세워져 있다. 문학비 기단에는 이태준의 문학 인생을 요약한 뒤에 이렇게 맺고 있다.
"조국과 고향을 잃어버리고 떠도는 이 위대한 문학자의 자취는 지금도 묘연하다. 이제 그의 나이 100세, 하루속히 통일이 이루어져 이 고독한 '경계인'의 문학과 생애가 우리 모두에게 알려지길 바랄 뿐이다"
철원의 노동당사 옆에는 컨테이너 하우스로 만든 소박한 이태준 문학관이 있다. 관장은 철원 이야기를 시로 담아내고 있는 시인 정춘근. 그는 오랫동안 철원에 살면서 이태준을 연구하며 관련 자료들을 모았다.
그는 이태준의 단편소설 <촌뜨기>의 배경을 하나하나 찾아내 촌뜨기길도 만들었다. 촌뜨기길은 이태준이 살던 용담마을에서 노동당사와 관전리로 이어지는 5.4km의 길이다. 13개 표지를 따라 걸으면서 소설 <촌뜨기>의 한 대목씩 짚어볼 수 있다. 최근 철원군은 19억 원의 예산을 확보해 이태준 문학관 건립을 추진하고 있다. 이 정도면 이태준은 부활했다고 할 수 있다.
'조선의 체호프' 이태준
이태준은 '우리나라 단편소설의 완성자'나 '조선의 체호프'라고 칭해질 만큼 훌륭한 작품을 많이 남겼다. '시는 정지용, 소설은 이태준'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다. 그러나 그는 월북이라는 이유로 대한민국 문학사에서 오랫동안 희뿌연 그림자였다. 이름 석 자 가운데 한 글자는 ×나 ○나 ■로 복자(伏字)를 당하는 신세였다. 한국전쟁이 멈춘 지 50년이 지났고, 소식이 끊어진 지 30년이 넘은 2004년, 다른 곳도 아닌 그의 고향에 이태준 문학비를 세울 때도 '월북 빨갱이 절대불가'를 외치는 일부 철원 사람들 때문에 꽤나 애를 먹기도 했단다.
1904년 출생한 그는 고아와 다름없는 불행한 소년기를 거쳐 힘들게 문인으로 등단했다. 이태준은 1933년 이효석, 이상, 김유정 등과 함께 구인회를 만들고 주도했다. 구인회는 사회주의 참여문학인 카프(KARF) 계열과는 대조되는 순수문학 그룹이었다. 태평양전쟁 이후 일본 제국주의의 강압은 거세졌고 문인들의 목을 억세게 졸랐다. 조선의 식자나 문화예술인 대부분은 "님의 부르심을 바뜰고서"와 같은, 억지로 짜내는 친일매국에 허덕였다. 이태준도 이런 광풍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결국 이태준은 1943년 〈돌다리〉까지 내고는 철원군 안협으로 낙향했다. 펜을 놓고 낚시로 시간을 흘려보내려고 했으나 <해방전후>에서 묘사했듯이 그의 이름값은 계속해서 그를 경성으로 끌어내곤 했다.
일제가 패망하고 건국이라는 시대적 과제와 마주친 이태준은 일제강점기의 문학경향과는 달리 현실참여로 자세를 전환했다. 해방 직후 조선문학가동맹 부위원장, 민주주의민족전선 선전부장 등 진보진영에 적극 가담했다. 그 내밀한 속내는 1946년 발표한 <해방전후>에 녹아 있다. 작중 인물 '현'에게 자신을 투영한 이 작품에서 이태준은 좌익에 대한 경계심도 드러냈지만 우익에 대해서는 환멸감을 쏟아냈다.
▲ 이태준
그는 1946년 7월 장편 <불사조> 연재 도중에 8월 조선쏘련문화협회 시찰단의 일원으로 소련을 방문했다. 두 달간의 시찰을 마치고는 북한에 눌러 앉아 <쏘련기행>을 썼다. 소련 기행문은 12월부터 몇몇 잡지에 게재되다가 1947년 5월 서울의 백양당 출판사에서 단행본으로 출간됐다. <쏘련기행> 이후에도 <혁명절의 모스크바> <위대한 새 중국> 등 두 편의 기행집을 더 냈다. <혁명절의 모스크바>는 북한의 정부수립 후인 1949년 10월, 볼셰비키 혁명 32주년 축하 사절단으로 다녀온 기록이다. <위대한 새 중국>은 1951년 9월 중국 베이징에서 건국 2주년 행사를 참관하고 중국 각지를 2개월 가량 여행한 기록이다.
유임하(한국체육대학 교양과정부 교수)는 세 편의 기행에 대해 이태준이 고심 끝에 건국의 방략으로서 사회주의 체제를 선택했고, 그 결행을 문장으로 구체화시킨 정치적 문학적 전향서라고 분석했다. 이태준은 소련이 전후복구를 거쳐 일궈낸 선진문물과 함께 조선이나 일본, 중국에서 보지 못했던 '제도의 승리'에 시선을 집중했다. 특히 소련의 축제를 문화 정책을 통해 다양성의 조화를 구현한 선진적 사례로, 소수민족 전통과 평화와 문화가 합치된 것으로 평가했다.
혹자는 이태준이 스탈린 독재의 이면이나 그 한계를 읽어내지 못하고, 훗날 소련의 해체도 예견하지 못한 것을 아쉬워하기도 한다. 이태준과는 반대로 결론을 내렸던 앙드레 지드의 <소련기행>(1936)에 빗대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앙드레 지드와는 판이한 처지였다. 용광로가 쏟아지듯 화급하게 닥쳐오는 과제를 직면한 식민지 출신의 문인이었다. 이태준과 동시대의 문인들에게, 영미불일의 제국주의를 몸소 겪거나 관찰했던 앙드레 지드와 동일한 결론을 기대하는 것은 훗날의 허무한 탄식에 지나지 않는다.
월북 후 달라진 작품 세계
▲ 이태준의 <쏘련기행>(시인 정춘근 소장) ⓒ 윤태옥
월북 이후의 작품은 일제강점기와는 완전히 달라졌다. <농토>(1948)에서는 억쇠 부자가 계급적으로 각성해 가는 과정을 집중적으로 묘사했다. 이태준은 <쏘련기행>에서 상찬했던 '제도의 승리'를 <농토>에서 북한의 토지개혁으로 재현하면서도 북한 체제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못하는 노인을 내세워 폭력적인 분단현실을 고심하도록 만들었다. <호랑이 할머니>(1949)는 문맹퇴치 운동과 인민대중의 계도를 집중적으로 묘사했다. <고귀한 사람들>(1951)은 이태준이 항미원조전쟁이란 명분으로 한국전쟁에 참전한 중국인 병사를 등장시켰다. 그는 조선과 중국의 국제적 연대, 국가 사이의 혈맹과 개인의 인류애를 연결시켰다.
유임하 교수는 <먼지>(1950)에서 북한 문학의 변화 속 이태준의 처지를 읽어내고 있다. 이 작품에서 이태준은 북한체제의 우월성을 인정하면서도 주인공인 한뫼 선생이란 인물을 문제적으로 구성하여 단일한 민족국가 건설의 꿈이 사라지고 분단이 고착되는 현실을 서사화했다는 것이다. 북한문학은 1950년대 중반까지는 다양한 사유와 목소리가 존재했다. 1953년 정전 이후 북한에서는 한국전쟁 실패에 대한 살벌한 책임논쟁이 전개됐고, 외부적으로는 소련에서 시작된 스탈린 격하 운동이 김일성을 압박했다. 북한이 자신들의 체제와 권력을 세워가는 과정이었으나 그 과정에서 거친 갈등과 충돌로 인해 다양한 사유는 자리를 잃었고, 이태준은 북한의 제도권 문학에서 바깥으로 밀려났다.
카프 출신의 한설야와 이기영은 이태준 작품을 평가절하하고 비판했다. 그들은 이태준의 월북 이전에 이미 북한 문단의 권력을 장악하고 있었다. 한설야는 1945년 북조선문학예술총동맹 중앙위원회 위원장을 시작으로 교육문화상에 이르는 북한 문학권력의 정점이었다. 이기영은 1946년 2월에 월북하여 조선문학예술총동맹을 이끌면서 북한문예계의 중심인물로 활동했다. 이런 인물들이 이태준을 비판한 것은 문학토론이 아니라 정치적 박해였다. 한설야와 이기영은 이태준의 저격수였고 기소검사였고 판사였고 간수였다.
이들은 전쟁 이전의 이태준 작품들을 사상이 약하고 부르주아 반동이 잔존한다고 비판했다. 월북 이후의 작품도 그대로 두지 않았다. 빨치산 대원을 냉혈동물로 묘사했다든가, 미국의 풍요를 노래했다면서 자연주의적 퇴폐나 반동적 태도라는 꼬리표를 붙여버렸다. 광복 후 북한 최고의 작품이라던 <호랑이 할머니>마저 문맹퇴치사업이 별 성과가 없는 것으로 묘사했다고 비난하는 정도였다.
이들이 이태준을 비판한 것은 그들만의 체제를 만들어가는 과정이기도 하지만, 젊은 시절부터 쌓여온 조선 최고의 문장가에 대한 질투가 아니었을까. 권력투쟁에 질투가 가미된 비판은 총알이 되어 이태준을 쓰러뜨렸고 결국 북한 문단에서 퇴출됐다. 한설야는 이태준을 정치적으로 죽인 다음에는 이태준과 같은 정치적 죽임에 빠졌으니 그의 정치와 문학은 자기부정이라 할 만하다.
이태준은 1956년 함흥노동자신문의 교정원으로 추방당했고, 다시 함흥콘크리트블록공장의 파철 수집 노동자로 배치되어 집필조차 박탈당했다. 1964년 조선노동당 중앙당 문화부 창작실 전속작가로 복귀했으나 그곳에서 이태준의 문장이 살아나올 수도, 권력을 만족시킬 수도 없었다. 몇 년 후 강원도 장동탄광 노동자지구로 추방되었고, 그 곳에서 사망한 것으로 전해지지만 분명하지는 않다.
월북 예술가들의 말로
ⓒ 이은영
이태준만이 아니었다. 전쟁 이전에 월북한 사람들 가운데 학자나 문화예술가들이 적지 않았다. "남한엔 공산주의에 공감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더 많고, 남한의 정치적 성향은 의심할 나위 없이 좌익적"이라는 1946년도 미군정의 보고서가 당시의 현실을 잘 말해준다.
이런 상황에서 38선이 남북을 갈라놓자 지식인들과 문화예술인들의 월북이 많아졌다. 북한의 김일성대학이 교수진을 적극적으로 초빙하자 서울의 당대 최고 학자들이 적지 않게 평양을 선택했다. 이를 두고 똑똑한 사람은 전부 북으로 가고 서울에는 쭉정이만 남았다는 말이 돌았다. 문화예술인도 그랬다. 성혜랑(1996년 프랑스로 망명한 탈북인)에 따르면 "서울에서 온 작가, 예술가들로 넘쳐나는 평양을 보며 예술가들은 다 빨갱이였던가 생각될 정도"였다.
그들은 월북 이후 당장은 좋은 위치에 있었으나 인생 후반은 대부분 좋지 않았다. 극작가 신고송과 이서향, 만담가 신불출, 연출가 안영일, 연극배우 배용, 극작가 추민 등은 복고주의니 종파분자니 하는 명목으로 숙청당했다.
반면 북한체제가 불편했던 사람들은 월남하여 혈혈단신 객지에서 갖은 고생을 피할 수 없었다. 그래도 정치적으로 집단학살을 당하진 않았고 일부는 크고 작은 성공을 거두기도 했다. 그에 비해 월북의 결과는 대부분 불행이었다. 북한은 처음부터 월북자를 남한과 미국의 스파이로 경계하는 시각이 강했다.
학계나 문화예술가 가운데 자기 발로 38선을 넘어간 월북자는 중산층 이상이 많았고, 일본 제국주의의 갖가지 친일동원에서도 완벽하게 벗어나기 힘들었다. 이런 사람들은 북한이 사회구성의 기본으로 삼는 성분심사, 곧 출신성분과 사회성분 모두 부정적인 평가를 디폴트로 안고 있었다. 게다가 1956년 종파사건 이후 북한의 권력투쟁은 단순한 자리싸움이 아니라 죽고 사는 또 하나의 내전이었으니.
혁명은 인민을 끌어당겨 권력을 쟁취하는 과정이지만, 권력을 잡는 순간 혁명은 사라지고 권력만 남는다. 이태준은 이런 냉혹한 권력에 추돌당했다.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겠다는 이상과 열정은 그의 문장과 함께 사그라졌다. 그래도 철원에 그를 문학의 역사로 부활하고 있으니 대한민국으로서는 참으로 잘한 일이다. 한국전쟁의 직접 책임은 전범을 특정하여 그들에게 물을 일이고, 타버린 재처럼 흩날린 귀한 것들은 이제라도 하나하나 챙겨볼 일이다. 건져낼 역사가 이태준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필자 알림]
2020년 이후 계속해온 <길 위에서 읽는 한국전쟁 답사여행 – 휴전선(강화.교동~강원.고성)>을 오마이뉴스 독자들과 함께 하고자 합니다. 휴전선 답사여행 8차(8.21~26) 또는 9차(10.20~25)에 동반하고자 하는 독자는 다음 링크의 공지를 찬찬히 읽어본 뒤에 신청하시기 바랍니다.
https://blog.naver.com/kimyto/2231041595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