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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역사와 함께하는 지명에는 탄생하게된 地格을 보유하고 있다.예를 든다면 사람들이 모여 만든 고을들이 江과
관련이 있으면 江과 호응하는 '江寧,江浦,江都,江陵,江州,江東,江口,江南,江北' 같은 지명들이 생겨나고,이어 황하
의 河에서는'河東,河南,河西,河內,河北' 등의 지명들이 생겨난다.湖와 연관이 있으면 '湖南,湖北,湖西,湖州,湖口' 와
같은 지명이 생겨난다.山과 호흡하는 지명으로는 '山陰,山陽,山東,山西,山南' 등의 지명들이 자연스럽게 생겨난다.
지명생성의 이러한 기준으로 본다면 반도의 경기만 해역에서 海水로 둘러싸인 강화도란 섬지역에 식재된 역사의
'江華' 는 근본적으로 생성의 자연기준에도 맞지 않고,역사서의 기사와도 맞지 않는다.강화가 고려의 江華와 강화
도호부로의 자격을 얻을려면,'江으로 인해 번성과 번영의 중심지(華:번성의 중심지)' 란 실질적 의미나 상징이 존
재해야 한다.그래야 江華란 지명의 지격을 얻을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반도의 강화도엔 그게 없다.江도 없고 그강으로 인해 역사와 함께한 화려한 중심부도 없다.반도의 강화도
는 江이 아닌 海水로 둘러싸인 섬(島)일 뿐이며,강의 혜택으로 번성한 중심지(華)로 만들어 질수도 없는 그저그런
평범한 섬이다.현실의 세계 대도시 형성을 보더라도 大江,大河,大湖의 주변,강과 바다와 만나는 江口나 海口의 주
변에 있음이 증명하고 있다.반도에는 湖水도 없는데 湖南이라는 지명은 있고 조그마한 저수지 기준으로 湖西란
지명도 만들어 놨다.湖를 기준으로 호남은 있는데 湖北이 없는 나라의 지명 구분은 아주 절망적이다.이점의 실질
은 세계지도를 펼쳐 놓고보면 오류가 잘 보인다.
2, 조선사에서 江華에 대해 쓰기를 '江華' 라고는 쓰나,해수나 강으로 둘러싸인 '江華島' 로 기록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단지 해설 권력자들이 반도의 강화도를 역사의 江華로 강제 했을 뿐이다.역사서에서 강화의 이력을 살펴
보면,조선의 강화가 될려면 우선 江으로 인한 번성함이 있는 곳이란 실질과 상징이 있어야 한다.
" 강화는 고구려 시대와 신라의 원성왕 시대에는 '혈구군' 으로 불렸다.고려초에 강화로 고쳐 縣이 되었고,현종9
년(1018년) 현령을 두었다가 고려 고종 19년(1232년)에 몽고군의 침입으로 강화로 천도 함으로서 郡으로 승격
되었고,이곳을 '江都(강에 의지한 새로운 고려 도읍)' 라 불렀다.38년 후인 원종 11년(1270)에 환도했다.우왕3년
(1377년)에 府로 승격되었다.이씨조선 태종 13년(1413년)에 다시 도호부로 승격 되었다.이후 부침을 거듭하다
가 고종32년(1895년)에 郡으로 격하 되었다가,건양 1년(1896년)다시 府로,광무10년(1906년)에 다시 郡이 되었
다.한말이 되면 역사도 뒤죽 박죽 혼돈을 거듭하지만 지리지도 덩달아 춤을 춘다.이유는 역사서를 반도로 옮겨
적용,이해시키는 과정에서 생겨난 터불런스로 보인다.
"고려 고종시대 나라의 수도(도읍)를 옮기는 천도가 있었던 강화였고,이씨조선 인조의 병자호란 때(1636년)는
왕자와 그들의 권솔들이 강화도가 아닌 강화로 피난하였으나 인조가 항복하자 함께 청태종에게 항복 했었다.
이후 병인양요(1866년)때까지 역사의 강화에 史庫가 있었다 하나,그 사고가 반도의 강화도에 있었다는 말도 전
혀 아니다.세종실록지리지를 보면,江華(도호부)에 속현이 2곳이 있었는데 그 하나는 '鎭江縣' 이고 또 하나는
'河陰縣' 으로 쓴다.2현을 강화의 任內(소속)에 두었다고 쓴다.강화의 동쪽에는 '通津縣' 이 있었고,북쪽에는 '海
豊郡' 이 있었다로 쓴다.또 강화에는 國馬 1천 500 마리를 방목하는 목장이 있었는데 둘레가 41리다.이 목장은
진강산과 吉祥山이 연결되어 있는 사이에 있었다.
江華에 대한 역사약술은 이렇다.앞에서도 작은 해설을 했지만,역사와 함께한 지명이 江華 든 江華島든 그 지명
은 海水로 둘러싸인 海域의 섬이란 뜻은 어디에도 없다.있다면 海華島가 되야 한다.江都나 江華란 지명은 어디
까지나 江의 혜택으로 인해 번성한 중심지(도시)란 뜻이다.江華의 별칭인 심주(沁州)란 호칭도 나라의 심장부와
같이 스며드는 곳이란 뜻이다.강도의 史庫란 것도 반도의 강화도에 사고를 설치해 사서들을 보관했다는 뜻이
아니다.당시 프랑스 해군(상선=해적선)들의 양요를 일으켜 없에고 탈취했다는 史庫의 사류,사적들도 반도가 아
닌 장강의 강도지역에서 일어난 사건이다.당시 프랑스의 해적들은 반도에는 관심조차 없었다.반도의 강화도에
는 사고 전서란 거창한 역사서를 넣을 만한 서고를 만들 정도의 황제국이 아니였다.정삭을 받아쓰고 책봉을 받
고 조공을 바치는 제후국으로 조선의 변방이자 일부였다는 기록도 참고해야 한다.
3, 고려와 이씨조선 시대의 縣(종6품)이나 府(종4품),또는 都護府(종3품)의 관할지역은 지금의 道면적 만 하거나
그 보다 훨씬 컸다.강화의 소속현으로 있었다는 '鎭江' 은 '鎭守江防之要地(강의 요충지 방어를 위해 군대를 주둔
시켜 지키는 곳)'의 뜻을 축약한 지명이며,지금도 강소성 장강유역에 거대한 도시(鎭江市)로 지금도 있고,장강과
淮水가 만나는 합류 삼각주 지역 강북에 바로 강화의 '江都' 란 지명이 지금도 있다.또 강들이 합쳐지는 넓고 넓은
중간에는 이씨 조선의 최대 치욕이자 인조와 조정이 항복했던 '三田渡의 三江營' 이 지금도 있다.이곳이 회수와
장강이 만나면서 만들어진 퇴적의 큰섬인 삼강영(삼전도)이다.이곳은 역사의 기록처럼 온화하고 땅이 기름져 풍
요로운 강화다.河陰縣은 강이나 河의 남쪽에 있다는 지명으로 지금도 강소성의 장강 남쪽에 '江陰市' 로 자리잡고
있다.진강의 짝인 '吉祥' 표현은 吉祥善事(강으로 인해 좋은 일이 생기는 곳)의 축약이다.강화의 동쪽에 있었다는
'通津縣' 은 지금의 강소성에서 바다로 통하는 南通市가 대신하고 있고,북쪽의 海豊縣은 반도에서는 황해도 개풍
군으로 설명되나 실제는 장강의 하류 북쪽에서 풍요의 泰興,泰州로 자리하고 있다.
4, 이들은 장강 하류의 강화지역에 지금도 있고 강소성 남경(한양) 동쪽에 자리하고 있다.이곳은 정사서의 강화에
대한 기사처럼 옛날부터 장강의 퇴적평야 지역으로 일찍 따뜻해지고 농사가 잘되는 풍요로운 지역이다.이곳이 바
로 강화다.강원도란 지명도 장강유역을 근거지로 탄생했다.몽고군이 반도의 황해도 개성을 함락시킨후 근처의 강
화도로 피신한 고려조정을 항복시키지 못했다는 것은 삼국지연의의 소설과 같은 얘기다.강소성의 '강도,진강,강음,
丹徒,丹陽,常州,양주의를 품은 장강 유역은,실제로 반도의 김포와 개풍에서 강화도를 보는것 보다 더 넓다.그래서
몽고군이 거대한 장강을 못 넘은 것이다.반도의 형편의 강화도 같으면 몽고군이 곧바로 함락시켰을 것이다.반도의
고려를 침략한후 38년 동안 김포나 개풍에서 강화도 피난 조정을 보고만 있었다는 것은 질낮은 소설이다.고려조정
이 황하의 개봉에서 장강의 강도로 천도한 것의 반도 이전이다.현재 중국에서 長江으로 부르는 강명을 우리가 '揚
子江' 으로 부르는 근거는 장강이 揚州(江州)의 중앙부(子)를 흐르는 강이란 뜻이다.揚州는 국민당시대와 공산당
집권 전까지 江州로 불렸던 곳이다.지금도 양자강은 장강으로 불린다.
5, 강화도령 이원범의 철종 얘기도 소설이기는 마찬가지다.역사서도 지배자들이자 강자들의 맘대로다.당시의 안동
김씨란 세력들이 아무리 기세가 등등하고 안하무인이라고 해도,낫놓고 기역자도 모르는 나뭇꾼를 왕으로 옹립한다
는 것은 이씨조정을 능멸하는 얘기다.즉 이씨왕조를 조선사에서 마감하기 위한 일제의 선행서술 작업일 뿐이다.여
기서 안동김씨란 것도 반도의 경북 안동을 본관으로 삼았던 안동 김씨란 뜻이 아니다.편안한 동방 또는 안정된 동국
의 김씨란 뜻으로 일개의 성씨 세력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여기서 말하는 安東(또 다른 조선의 표현)은 지금의 절
강과 강소,복건지역의 지역 세도가 들이자 부유층(豪紳=토호) 연합 세력들을 말한다.그중 큰세력이 안동지방의 김
씨란 세력가 였다는 뜻이다(주로 절강의 남부와 복건성지방).당시 대륙의 화동지방 권력은 이들의 합의(승인) 없이
는 상징적 권력인 지방의 왕(侯)으로 등극할수 조차 없었다.토호들은 허수아비에 불과한 상징이자 구심점으로 만들
어 백성들을 복종케 하고는 실질을 챙겼다.반도 경북의 안동을 역사의 안동 김씨 본관인 안동으로 강제한다면 역사
는 꼬인다.
6, 요녕성 丹東도 1953년 이전까지는 安東이었다.江도 없고 구릉의 평원도 없는 지역을 江凌으로 쓰지 말고 江도 없
는 급경사 지역에 어울리지도 않는 江口란 지명을 만들지 말자.이어 이씨조선 후기에는 '江華학파' 라는 학파가 있었
다고 역사서는 쓴다.이것 역시 척박한 반도의 강화도 얘기가 아니다.이학파는 강주의 남부인 절강성 '餘姚(余姚=소흥
과 영파사이)' 출신으로 '양명학' 을 전파한 왕수인 학문을 공부하던 학파를 말한다.양명학은 주자의 관념적 理가 아
닌 실용적 氣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실용주의 학문을 말한다.여기서 이씨 조선의 실학이 나왔다.절강지역의 학자들과
부호들은 옛부터 유명하다.왕수인,노신과 장개석도 절강성 출신이다.여기서 말하는 조선실학의 태두로는 정제두(鄭
齊斗,1649~1736),이광사(李匡師,1705~1777),이광리,윤순,이진병 등을 드나 실적은 없었다.이들의 후학으로는 이광
사의 아들인 이긍익(1736~1806)은 '연려실기술' 을 저술했고,박지원(1737~1805)은 '열하일기' 를,박제가(1750~1805)
는 '북학의' 를 저술했다.이 저술들의 主내용들은 모두 교조적인 주자학(동양학)의 고정 관념에서 벗어나 좀더 나은
학문과 실생활의 발전을 위해 다양한 학문과 사상,문물을 접하자는 내용들이다.
7, 그러나 모든 학문이 문화(유교처럼)가 되어 보편성을 가질려면 어느정도 세월이 흐르고 획기적인 변화를 보여야
하는데,이역시 인문학적(청각적) 요소가 크게 자리잡고 있어 확장돠지 못했다.즉 양명학도 시각적 학문이 아니라 청
각적 학문이라 성리학과 다른 실질을 보여주지 못하는 한계가 있었고,당시의 주류 학문적 흐름도 무시할수 없었다.
사실 반도의 강화도에서 대륙의 남방인 절강성에서 태동한 왕수인의 양명학을 연구하면서 경지에 이르는 강화학파
까지 형성하고,후학들이자 후배들이 이씨조선의 실학 선두주자가 되었다는 것은 상상하기는 좋아도 실천하기엔 끔
직하게 힘들다.그래서 역사와 함께한 그들의 결과물이 이어오지를 못했다.여기서 말하는 이씨조선 후기의 양명학파
이자 강화학파들의 태동지및 연구지 역시 반도의 강화도가 아니라는 것이다.이들이 활동했던 지역 역시 장강하류지
방의 강화지역 학파 였다.이곳은 역사의 조선에서 아주 풍요로운 지역이었다.
즉 강으로 인해 유익함과 풍요로움이 넘쳤던 장강(江州=지금의 揚州)의 華州(강도,강포,강녕)였던 것이다.옛날이나
지금이나 크고 작은 학문이나 이론이 만들어 질려면 안정된 삶과 풍요로움이 있어야 가능하다.그래야 학교,서원,학
당도 만들어지고 학인들이 몰려오며 유명한 학자도 탄생하는 것이다.그래서 옛날부터 '書院田,鄕校田' 이 있었던 것
이다.먹을 것이 부족하고 가난하고 살벌한 기후대에서 이동하며 살아가는 유목민에게 학문을 말한다는 것은 어렵다.
지금 중국을 지배하고 있는 세력들은,먹고 살기에 어느정도 여력이 있고 일찌기 서양의 문물을 접한 南方의 漢族이
란 것도 참고가 된다.
첫댓글 고맙습니다
실타래를 풀어 주는 감동적인 글입니다.
감사합니다.
감사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