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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 역동적인 삶을 살다 - 인간, 문화, 사회 편
1장 고려를 통치한 사람들
1-2. 다양한 층위의 관료 집단
건국과 함께 3성 6부 체제의 근간이 마련되고, 성종과 문종대를 거치면서 관료제도가 확립됩니다. 또 광종 9년(958) 시행된 과거제 또한 중요한 계기가 됩니다.
고려의 관료들은 대체로 한 직책에서 30개월을 근무하면 승진이나 근무지 이동이 가능했습니다. 단, 말단 행정 실무자인 서리(胥吏)는 90개월을 근무해야 승진 또는 이동이 가능했습니다. 근무시간은 원칙적으로 사시(巳時, 오전 9시~11시)부터 유시(酉時, 오후 5시~7시)까지였는데, 해가 긴 계절에는 출근 시간이 진시(辰時, 오전 7시~9시)로 앞당겨지기도 했습니다.
매달 1,8,15,23일은 정기 휴일이고, 휴가는 설날, 입춘, 한식, 입하, 칠석, 입추, 추분, 연등, 팔관회 기간을 포함해 특별휴가가 연간 54일이 넘었지요. 그러나 연간 휴가는 이를 포함해 100일을 넘길수 없었습니다. 100일을 넘기는 경우 관직에서 물러나야 합니다.
인사 발령은 매년 6월과 12월에 이루어졌는데, 그중 12월은 정기 인사, 6월은 임시 발령이었지요.
관료들은 근무의 대가로 토지와 녹봉을 받았습니다. 토지를 받는다는 것은 수확량 중 일부를 수취할 수 있는 권리, 즉 수조권(收租權)을 받는다는 뜻이며, 이때 땔감을 취할 수 있는 시지(柴地)도 함께 받았지요. 녹봉은 1년에 두 번 1월 7일과 7월 7일에 쌀과 보리등 곡물로 받았습니다.
고려의 관료제는 문반과 무반으로 구성된 양반제(兩班制)였지만, 조선과 달리 문반이 무반보다 우월한 지위에 있었습니다. 전쟁이나 내란이 일어나도 무반은 직접 전투를 수행하는 기술적 실무자에 불과할 뿐, 군대 통수권은 어김없이 문반이 쥐게 되어 있었습니다, 실례로, 거란이 침략했을 때 1차는 문관인 시중(侍中) 박양유, 2차는 이부상서 강조, 3차는 역시 문관인 강감찬이 최고 지휘관이 되어 군을 통솔했습니다. 여진 정벌 때 윤관도 문관이었습니다.
고려의 관료는 정1품에서 종9품까지 관품을 받았으며, 관품에 따라 지위가 구분되었습니다. 관품을 기준으로 크게 '재상(宰相, 2품 이상)', 참상(參上, 3품 이하 6품 이상)', '참하(參下, 7품 이하 9품까지)'로 나뉩니다.
재상을 비롯해 관품을 받은 고려의 관료 집단은 신분상 상층 양인으로서 그 기원은 신라 말 고려 초 지방세력인 정호층(丁戶層)에서 기원합니다. 정호는 대체로 지방세력인 호족의 휴예들입니다. 이들은 지방사회의 지배세력이면서 경제적으로는 대토지를 소유한 자들이었지요. 고려 태조가 지방의 주요 세력에게 성씨를 내려줄 당시 성씨를 부여받은 층이 이들입니다. 이들은 고려 초기 지배 질서에 참여할 권한을 부여받았다는 점에서 지배층의 범주에 속합니다. 고려 초기 한때는 이들을 '백성(百姓)이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백성은 국가로부터 다양한 성씨와 본관을 부여받은 계층, 곧 지방의 우력자로서 지배 질서에 참여할 수 있는 계층이라는 뜻으로 사용되었지요. 하지만 조선시대 이래 '백성'은 일반 민을 가리키는 용어가 되었습니다.
958년 처음 시행된 과거제는 실력과 능력 있는 인물을 관료로 발탁하는 제도로서 고려 정치 지배층의 지형을 크게 변화시켰습니다. 초기에는 과거제가 부호장(副戶長) 이상의 손자나 부호정 이상의 아들에게만 응시자격을 주었습니다. 따라서 정호층, 즉 지방의 호족세력과 그 후예들을 지배세력으로 흡수하는 통로로 활용되기도 했습니다. 과거를 통해 중앙으로 진출해 중앙 관원이 된 이들은 이후 왕실과 혼인 관계를 맺거나 정치적 학문적 능력을 발휘하여 문벌귀족으로 성장하게 되는 2품 이상의 고위 관료인 재상과 3품 이하의 일반 관료 집단으로 분화됩니다.
관품은 받지 못하지만 중앙과 지방의 관청에서 행정 실무를 전담한 사람들도 있었는데, 향리와 서리층이 그들입니다. 이들은 행정 실무직인 이직(吏職)에 종사한 최하층 관원으로, 신분상 정호층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고려 초기 지방세력 가운데 중앙으로 진출하지 않고 지방 행정의 실무자가 되어 지방사회에서 지배계층으로서의 지위를 누린 계층입니다. 이들은 주로 문벌귀족이 몰락한 무신정권 때 과거를 통해 중앙으로 진출합니다.
재상이 소속된 관서는 중서문화성(재부宰府)과 중추원(추부樞府)입니다. 소속된 곳에 따라 각각 재신(宰臣)과 추신(樞臣)으로 일컬었고, 흔히 '재상'이라고 통칭합니다. 고려 전기에는 재신 5명과 추신 7명을 합해 12명의 재상이 관료부의 최상층부를 구성했습니다. 이들은 재추회의(宰樞會議)에서 국가의 중대사를 논의한 후 국왕의 최종 재가를 받거나, 국왕의 정책 결정에 영향을 주었습니다. 6부의 장관을 겸하는 데다 감찰기관인 어사대(御史臺)와 재정 기관인 3사(三司)의 장마저 겸할 정도로 권한이 막강했습니다.
고려 전기에는 재상이 특정 가문 출신들로 충원되는 일이 잦았습니다. 그래서 재상은 그들의 사회적 지위와 연결시켜 '문벌' 혹은 '문벌 귀족'으로 불리기도 합니다.
원 간섭기 이전 고려에는 태조의 제1비 신혜왕후의 집안인 정주 유씨, 최 충을 비롯해 고려왕조에서 5대에 걸쳐 재상을 낸 해주 최씨, 이자겸의 집안인 인주 이씨, 김부식의 집안인 경주 김씨 등 네 가문이 대표적인 문벌이었다고 합니다. 안산 김씨도 유력한 외척 가문 중 하나였습니다. 이들은 서로 혼인 관계를 맺어 세력을 확대해나갔고, 관료 집단의 최상층을 형성해 전성기 고려의 정치를 주도했습니다.
고려 전기 인주 이씨를 최고의 문벌로 발돋움할 발판을 마련했다는 이자연을 예로들어 유력가문 출신이 재상이 되는 과정을 살펴 보겠습니다. 이자연은 22세 때인 1024년(헌종 15)에 과거에 급제했고, 7년 뒤인 덕종 즉위년(1031)에 정6품으로 관직 생활을 시작했으며 45세 되던 1047년(문종 1)에 재상의 반열에 올랐습니다. 과거에 합격한지 23년만이었지요. 그리고 이로부터 9년 후인 53세 때 최고위직인 수상, 즉 문하시중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자연은 급제 당시 처가가 왕실의 외척이었고, 이런 배경 덕에 남들보다 빨리 승진할 수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무신정권기에 재상직에 오른 이규보는 대대로 지방 향리직을 지내다가 아버지 대에 비로소 중앙 관직에 진출한 한미한 가문 출신이었습니다. 1183년(명종 13) 16세에 2차 시험인 국자감시(혹은 사마시)에 처음 응시했지만 떨어졌고 이후 두 번을 더 낙방한 끝에 23세되던 1190년(명종 20)에 드디어 최종 시험인 예부시에 합격합니다. 그런데 과거에 합격한다고 해서 곧바로 관리가 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예부시에 합격하고 18년이 지나 정식관료가 될 수 있었습니다 (28~9년이 걸리는 경우도 있었으니 이규보의 경우는 오히려 빠른 편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에 비해 이자연은 7년 만에 관료가 되었지요.
이규보가 재상이 된 것은 66세 되던 1233년(고종 20)이었죠. 문벌이란 배경이 없는 이규보는 과거 합격후 무려 45년 만에 재상이 된 것입니다. 이규보는 문벌 출신은 아니지만. 최씨 무신정권의 문객으로 활약하면서 각종 외교문서를 전담한 데다 최씨 정권을 옹호하는 글을 썼기에 재상이 될 수 있었습니다(*세상 별로 변하지 않았습니다. 요즘도 이런 사람 많죠).
고려에서 관직에 오를 수 있는 첫 번째 방법은 과거나 음서를 통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재능을 인정받거나 국가에 공을 세우는 방법이고, 세 번째는 말단 서리로서 여러 해 근무한 공로를 인정받아 관품을 받고 관료로 편입하는 방법입니다.
이 가운데 가장 일반적이고 중요한 통로는 '과거'입니다. '고려사" 열전에 실린 650명 가운데 과거에 합격해서 관료가 된 사람이 340명으로 가장 많습니다. 음서 출신은 40명이고 나머지 270명은 관료 진출 경로가 불확실하거나, 과거나 음서외의 방법으로 관료가 된 사람들입니다.
음서(蔭敍)는 글자 그대고 '조상의 음덕(蔭德)으로 관료로 진출하는 제도'를 말하는데 1년에 한 번씩 정기적으로 5품 이상 관료의 자제들 가운데 1명을 관료로 뽑거나, 국가적 경사를 맞이해서 유공자나 유공자의 자손에게 관료 진출의 혜택을 부여하는 식이었죠. 음서를 통해 관리가 된 사례는 매우 적습니다. 고려사 열전의 음서 출신 40명 가운데도 9명은 관직에 오른 뒤에도 과거를 치렀으니 순수한 음서 출신은 31명밖에 안 되는 셈이지요.
조선의 과거는 예비시험이라 할 수 있는 생원시(生員試)와 진사시(進士試) 최종 시험인 문과로 구성되었습니다. 예비 시험에 합격하면 성균관에 들어갈 자격을 얻었고, 최종 시험에는 성균관이나 지방에서 향시를 거쳐온 700명 가량이 응시했습니다. 이 때 최종적으로 33명을 뽑습니다. 합격자들에게는 성적에 따라 관품을 차등있게 부여했는데 장원급제한 사람에게는 바로 6품을 주었습니다.
고려의 과거제에서 조선의 대과에 해당하는 시험은 제술업(製述業)과 명경업(明經業)입니다. 제술업은 문장을 잘 짓는 사람을 뽑는 시험으로 조선의 진사시와 유사하고, 명경업은 경서에 밝은 사람을 뽑는 시험인데 둘 중에서 제술업이 더 중시되었습니다. 조선의 잡과같이 기술관을 뽑는 시험을 고려에서는 잡업(雜業)이라고 했습니다. 잡업에는 법률 지식을 시험하는 명법업(明法業), 회계나 재정에 밝은 인재를 선발하는 명산업(明算業), 의술을 시험하는 명의업(名醫業), 음양 풍수 전문가를 뽑는 지리업(地理業) 등이 있었습니다.
조선의 생원, 진사시같은 예비시험은 지방의 향시(鄕試)라 합니다. 조선의 성균관에 해당하는 국자감에서 2차시험을 치루었고 이를 국자감시 혹은 사마시(司馬試)라고 합니다. 여기서 합격하면 마지막으로 제술업과 명경업으로 구성된 최종시험을 치르게 되는데 이를 예부에서 치른다고 해서 예부시(禮部試) 혹은 진사시라고 합니다. 진사시는 때로 국자감시를 가리키기도 합니다. 급제 시의 성적이 관계 진출과 승진에 매우 중요한 기준이 되었습니다.
능력주의는 전근대 사회의 과거제가 지닌 보편성입니다. 능력주의에 기초한 과거제는 고려 광종 때 처음 실시된 이래 능력과 실력을 갖춘 관료층의 대두를 가져와 지역과 무력에 토대한 지방세력이 주도하던 고려 초기의 정치 지형을 크게 변화시켰습니다. 또한, 유교 경전이 시험 과목이라 과거에 합격하려면 유교적 소양을 닦는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과거제 시행은 유교 정치 이념이 뿌리내리는 계기가 되었지요.
과거제는 국왕권 또는 집권체제를 유지하는데도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국왕이 과거를 통해 혈통이나 가계가 아니라 능력을 기준으로 선발된 관료들과 함께 국정을 운영하는 것이 국왕권의 유지, 나아가 집권체제 유지에도 유리했기 때문입니다.
고려의 과거는 조선과 다르게 양인 일반에게 전면적으로 개방되지 않았습니다. 시행 초기의 과거는 일반 양인 이상에게 완전히 개방된게 아니라 양인 중에서도 왕조 성립과 통일왕조 수립에 일정하게 협조한 지방세력이나 그 후손으로 응시자격이 제한되었습니다. 이는 과거가 지방세력을 중앙으로 흡수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로서 기능했기 때문입니다.
이규보의 사례에서 보았듯 합격자 모두가 합격과 동시에 관료로 임명될 수는 없었습니다. 제도적으로 관리의 정원이 제한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고려 전기인 11세기 문종 때를 기준으로 동반(東班 혹은 문관)은 1품에서 9품까지 정원이 532명이고, 서반(西班 혹은 무반)은 3867명으로, 모두 합해서 4,399명입니다. "송사" 고려전에 고려 전기 인구가 200만 명이라고 했지만 실제로는 4~5백만 명 정도로 추산되는바, 당시 인구를 최대 500만으로 상정하면 인구 대비 관료의 비율은 0.1%가 채 되지 않습니다. 참고로, 2018년 현재 대한민국 공무원 수는 약 107만 명으로 전체 인구의 2%가 넘지요. 조선시대에도 동반이 1,779명, 서반이 3,826명으로 모두 5,605명에 불과합니다. 조선 초기에 인구가 상당히 증가했음을 볼 때, 인구 대비 관료의 비율은 오히려 고려 때보다 낮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고려는 이렇게 해서 과거 합격자 모두가 바로 임명될 수 없었습니다.
고려 정부는 과거 합격 등으로 관료의 자격을 갖추었으나 관료로 임명되지 못한 이들에게 동정직(同正職)을 주어 관료 대우를 해 주었습니다. 동정직은 글자 그대로 '정직(正職, 현직)과 같다(同)'는 뜻입니다. 1123년 무렵 고려를 방문한 송나라의 사신 서긍이 남긴 "고려도경"에는 당시 '산관(散官)동정' 즉 현직에 있지 않은 관료가 무려 14,000명이나 된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관직 정원의 한계로 과거 합격자등 예비 관료들의 불만이 높아지고 인사 적체 현상이 심해지자 이를 해소하기 위해 마련한 제도적 장치였습니다. 예를 들어 '양온령동정(良醞令同正)에 제수되면 실제로 근무하지는 않아 현직 관리처럼 녹봉은 받지 못하지만, 전시과 토지를 받았습니다. 비록 현직은 아니지만 진급이 가능했을뿐 아니라 나중에 현직을 받으면 동정직의 품계가 그대로 현직에 반영되었습니다.
조선시대에는 일단 과거에 합격하면 '사관(四館)'에 배치됩니다. 성균관은 요즘의 대학과 비슷한 교육기관이고, 예문관은 각종 문서를 작성하고 도서를 관장하는 곳이며, 승문원은 외교 문서를 작성하는 곳이며, 교서관은 경서를 포함한 각종 서적을 간행하는 곳인데 이 넷을 합쳐서 사관이라고 부릅니다. 조선 사회가 문치주의(文治主義)를 바탕으로 하고 있어 새로운 관료에게 필요한 자질로서 유교적 식견을 중시했기 때문입니다.
이와 달리, 고려시대에는 과거에 합격하면 그중 아주 뛰어난 사람은 국왕의 측근인 내시로 바로 발탁되었고, 대부분은 먼저 지방의 군현에 베치되었습니다. '속관'이라 해서 지방 수령을 보좌하는 관원으로 발령받은 것입니다. 이들은 부임 후 3년간 지방에서 근무했습니다. 속관 생활을 한 후 대체로 6품까지는 순조롭게 승진하다가 5품으로 승진하면 다시 지방으로 내려가 3년간 지방관으로 복무해야만 더 높은 자리로 승진할 수 있었습니다.
문치주의 사회인 조선시대에는 과거 합격자를 유교적 소양과 지식을 풍부히 하여 미래 사회를 이끌어 갈 엘리트로 간주했습니다. 따라서 바로 행정 실무를 익히는 자리보다는 유교적인 소양과 덕목을 키울 수 있는 자리에 먼저 배치하였습니다. 그러나 고려시대에는 강력한 지방세력을 통제하고 제어해서 중앙집권을 강화하는 일이 더 시급한 과제였습니다. 그래서 과거 합격자같은 신진 기예들을 먼저 지방에 파견해서 중앙에서 파견한 지방관을 보좌하며 지방의 실정을 파악하고 지방세력을 통제하게 했던 것입니다.
고려의 관리들이 선망한 관직은 '청요직(淸要職)'입니다. 청요직은 글자 그대로 '깨끗하고 중요한 관직'이어서 이 자리에 임명되는 것을 영예롭게 생각했습니다. 역사를 편찬하는 사관(史官), 왕에게 간쟁(諫諍)하거나 관리의 비행을 감찰하는 언관(言官), 각종 외교 문서나 국왕의 교서와 문장을 작성하는 문한관(文翰官) 등이 청요직에 속합니다. 이는 조선시대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른바 '권력기관'으로 지칭되는 몇몇 기관을 선망하는 요즘 세태와 비교하면 놀라울 뿐입니다.
"고려사"에 따르면 청요직에 임명되려면 가계와 행적에 흠이 없어야 하고, 부곡민이나 하급 서리는 임명될 수 없었습니다. 그러니 이 직책에 임명된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신분, 가계, 개인 생활에 흠이 없음을 의미하게 되며, 고려 관료들이 청요직 임명을 더욱 명예롭게 여겼던 이유입니다.
고려의 관인들은 맡은 직책에 따라 크게 문반, 무반, 이직(吏職)으로 구분됩니다. 그중 무반은 무과가 실시되지 않은 관계로 무예가 있는 사람을 별도로 충원했습니다. 특히 고려 초기에는 후삼국 통합전쟁에 참여한 일종의 직업 군인들이 상급 군인층인 무반으로 충원되었습니다. 이들은 '군반씨족(軍班氏族)'이라 해서, 세습적으로 군역을 전담한 집단이었습니다.
이직(吏職)은 지방에서 행정 실무를 전담한 향리와 중앙 각 기관의 행정 실무를 전담한 서리로 구성되었는데, 그중에서도 하급 서리들은 기술직인 잡역을 담당한다고 해서 '잡류(雜類)'라고 했습니다. 향리(鄕吏)는 다시 군현에 거주하는 호장(戶長)과 부곡 지역에 거주하는 부곡리(部曲吏) 등으로 나뉩니다. '이속(吏屬)'이라고 불리던 향리와 서리는 중앙과 지방의 각급 관청에 소속된 행정 말단의 실무자들로 각종 문서나 전곡(돈과 곡식) 등을 기술적으로 관리했습니다. 이들은 이직을 세습하는 집단에서 충원되었습니다. 이직은 음서를 통해 관직에 진출한 사람들의 첫 발령지 중 하나이기도 했습니다.
향리나 서리, 군인은 일반 관료와 충원 방식이 달랐을 뿐만 아니라, 담당 직역이 고정되고, 세습되었다는 점에서도 일반 관료와 구분됩니다. 이들은 전쟁에서 공을 세우거나 과거에 합격하면 관료 사회로 진입이 가능한, 신분의 유동성이 높은 계층이기도 합니다. 고려시대의 과거 합격자 중에는 건국 초기 지방세력의 후예인 향리 출신의 비중이 가장 높았습니다. 그래서 일부 연구자들은 조선 사대부의 기원을 고려의 향리층에서 찾기도 했지요. 또한, 이들은 하급 관원으로서 일반 양인 농민과도 구분되는 지배계층이었기 때문에 흔히 '중간계층'이라고 합니다.
주:
이 글은 "오백년 고려사"(박종기, 휴머니스트 출판그룹, 2020)의 내용을 요약한 것입니다.
(*): 요약자가 곁들인 글
첫댓글 계속
감사합니다.
코로나 극복하고
건강하세요
네, 감사합니다. 건강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