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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녀들/1957,캔버스에 유채/194*260cm
누드와 푸른 잎사귀와 흉상/캔버스에 유화/162*132
과학과 자선/1897/캔버스에 유채/197*249cm
아비뇽의 처녀들/1907/캔버스에 유화/243.9*233.7cm
비둘기를 안고 있는 아이/캔버스에 유화/73*54cm
할리퀸/1917/캔버스에 유채/117*89.5cm
꿈/캔버스에 유화/130*97cm
울고 있는 여인/1937/캔버스에 유채/60.8*50cm
한국에서의 학살/1951/패널에 유채/110*210cm/피카소 미술관, 파리
게르니카를 위해 그렸던 스케치
게르니카1937/캔버스에 유채/349.3*776.6cm
입체파(큐비즘)의 형태를 분해, 재구성 하여 20세기 초 야수파(포비슴)운동과 전후해서 일어난
미술운동. 입체주의라 고도 한답니다. 그 미학은 회화에서 비롯하여 건축·조각·공예 등으로 퍼지면서
국제적인 운동으로 확대되었는데 우리나라에선 고 김환기와 그의 아내가 그 특질은 무엇보다도 포름
(forme) 의 존중에 있으며, 인상파에서 시작되어 야수파·표현파에서 하나의 극에 달한, 색채주의에
대한 반동으로 봅니다. 자연을 재구성할 것을 목표로 한 세잔에서 원류를 찾을 수 있으나, 역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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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슬러 올라가면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원근법의 대가인 우첼로, P.D.프란체스카,17 세기 프랑스의 G.
드라투르 등에서도 입체파적인 추구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또 나무를 쌓아올린 것 같은 입체표현에
뛰어난 루카 칸비아노, 프라체리, 독일의 뒤러 등도 입체파의 선구자라고 할 수 있어요.
시대적 구분에 의한 큐비즘
1.초기(세잔적) 큐비즘 (1907 ~ 1909)
“자연을 원통형·구체·원추형에 의하여 처리하지 않으면 안 된다”(에밀 베르날에게 보내는 편지, 1904년
4월)라고 하여“색채 속의 면, 그 면을 정확히 파악할 것, 이러한 면을 조립하고 융합시킬 것, 그것들이
움직이기 시작하며 서로 결합되도록 할 것”(G.가스케 세잔) 등을 제작목표로 한 세잔이 이 운동의 직접적인
선구자였던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1907년 살롱 도톤에서는 그 전년에 사망한 세잔의 회고전이
열렸으며, 젊은 피카소와 브라크는 그 회장에서 세잔이 특히 1880년대에 그린 구축적인 화면에 매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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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었습니다. 따라서 일반적으로 1908년을 입체파 탄생의 해로 칩니다. 피카소와 브라크는 다같이 기하학
적인 포름, 예를들면 구체·삼각추, 면원통형·입방체 등을 응용하여 대상을 마무리하고 있었으므로, 이러한
초기 입체파를 '세잔풍의 입체파’라고 부르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원래 입체파(큐비즘)라는 명칭은
인상주의를 비롯한 근대의 혁신적인 운동이 일반대중에게는 인정되지 못하였고, 그 때문에 경멸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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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용된 비난의 말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입체(Cube)란 최초로 비평가인 R.보셀이 브라크의 작품에 붙인
이름입니다. 보셀은 1909년에도 브라크의 작품에 대하여 몇 차례‘기묘한 입체’라는 말을 사용하였습니다.
그러나 입체파의 창시자인 피카소와 브라크가 세잔의 계열을 따른 새로운 화면구성을 의도하면서도 반드시
'기교함'을 중시하지 않았던 사실은 다음의 두 사람의 문장으로도 알 수 있습니다.“우리들이 입체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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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물을 그리기 시작했을 때는, 달리 큐비즘을 계획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고, 그저 우리의 마음에 끌린 것을
표현한 데 지나지 않았다(피카소).“내게 있어 큐비즘이란 내 습관에 적합한 입체적인 표현수단이며 이것을
이용하면 나는 자신의 재능을 잘 살릴 수 있다고 생각하였으므로 나의 큐비즘이라고 말해두기로 한다”
(브라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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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년 이미 피카소는 대작 '아비뇽의 처녀들'에서 강한 데생풍의 명암을 없앤 수법으로, 아프리카 흑인
조각에 가까운 인물표현을 시도하였는데, 브라크와의 교우가 시작된 것도 같은 해입니다. 이 '아비뇽의
처녀들'는 입체파 최초의 작품으로 평가되며 분석적 큐비즘의 단초(복수시점과 촉각적 평면의 구성)가
처음으로 보이기 시작합니다. 브라크 역시 이 당시 세잔과 피카소의 그림에 힘입어 초기의 야수파 미학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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벗어나 대상의 구조와 질서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하며 1908~9년경에는 이런한 초기의 세잔의 재해석이
일련의 풍경화로 나타나게 됩니다. 이 시기에 그려진 일련의 풍경화는 집과 나무들이 단순한 입방체로
환원되어 있고, 색채는 제한되어 있으며 조명이 여러 각도에서 비춰진 것처럼 그려져 있어서 큐비즘 회화의
한 특징인 복수시점을 느끼게 해 줍니다. 이러한 풍경화 속에서 발견되는 아름다움은 대상에서 찾아낸 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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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감/부피 같은 조형요소들 자체에서 또는 그것들의 배열에서 발견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브라크와 피카소의 그림에 나타난 풍경은 다음과 같은 점에서 차이가 납니다. 피카소의 풍경은
"힘이 있고 대담하며 무엇보다 조각적, 건축적 또는 축조적인 요소가 지배적"인 반면 브라크의 풍경은
"회화적이고 유동적이며 투명하다"는 것입니다. 피카소의 경우 초기의 큐비즘 연구를 조각적으로 접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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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각실험을 통해 대상의 해체와 종합- 했고 브라크는 이와는 달리 회화적으로 접근해서 공간의 촉감적인
표현을 이루어 내었다는 것이 다릅니다. 이러한 작품을 보면, 피카소에게는 예술가의 직관이, 브라크에게는
명석한 논리가 현저하여 각기 독자적인 스타일을 구별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양자가 대상의 도형화에
있어 현실과는 다른 회화공간을 쌓아올려 이 공간에서는 도형 그 자체의 연관이 유기적인 점, 두 사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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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채가 갈색과 회색의 뉘앙스에 묶여 있는 점은 서로 공통됩니다. 1909년 이들은 아폴리네르의 소개로
만나게 되고 서로의 작품에서 공통점을 발견하고 큐비즘이라는 새로운 미학에 공동연구를 하기 시작합니다.
이 노력들은 1910년 경을 전후로 해서 일어난 이른바 "분석적 큐비즘"의 정물화와 초상화를 내놓게 됩니다.
2.분석적 큐비즘 (1910 ~1912)
세잔풍의 입체파에서 대상은 그것과 판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1910년을 고비로 형체는 점차 세밀하게
결정화 되고, 사물은 현저하게 해체되어 가는 ‘분석적 입체파’의 시대가 됩니다. 주제도 집이나 수목에서
한걸음 나아가 과실·술병·컵 등의 정물적 모티프가 되고, 다시 기타·만돌린·바이올린 등의 악기가 등장하여
분해된 그들 형체가 전후좌우로 서로 뒤섞여지므로 마치 거울면의 난반사를 방불케 하는‘시각적인 확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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획득하는 것이 되었습니다. 피카소가 몇 개의 초상에서 실험을 한 것도 이 시기이며, 후안 그리스가 형체의‘
비구성’을 주장하여 ‘분석적인 그림’으로 불린 것도 이 시기입니다. 원래 분석적 입체파에서는 물체는 일단
일상눈으로 보는 포름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어요. 그러나 한 개의 바이올린을 이루는 세세한 오브제가 현재
하고 있는 것이라면 보는 각도를 바꾸면 이것도‘물체 그 자체’ 의 탐구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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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석적 입체파의 가장 큰 업적은 르네상스 이래 이루어져 온 일들의 동시적 존재를, 뒤집어서 형체의
동시존재로서 정착시킨데 있으며, 인간의 얼굴만 하더라도 측면, 정면에서, 궁극적으로는 여러 가지 시점에서
구성된 것입니다. 그것은 어떤 의미로는 이집트의 벽화나 부조에서 볼 수 있는 인물표현의 다원적인 전개이며, 같은 입체파의 유력한 멤버였던 F.레제가 프리미티브한 예술에 기울인 관심과도 관계가 있습니다.
3.종합적 큐비즘 (912 ~ 1914)
1912년 입체파는‘종합적 입체파’의 시기를 맞이합니다. 이것은 전술한 바와 같이 분석적 입체파가 자연히
화면구성에만 치중하여 물체가 지닌 리얼리티를 망각한 위기에서 비롯된 기법으로, 파피에 콜레(papiers
colle)가 강력한 무기가 됩니다. 즉 즉물적으로 신문지나 벽지, 담배갑이나 트럼프 등을 화면에 붙여가는
방법이며, 최초의 파피에 콜레는 1912년 브라크에 의하여 응용되었습니다. 물론 입체파의 파피에 콜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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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화적인 의미에서의 테크닉이었으므로, 그것으로 바로 화면에 현실감을 주었다고 할 수는 없으나, 이러한
화면에 있어서 이질적인 촉감이 처음에는 시각을 통하여, 다음에는 보는 사람의 심리에 어떤 종류의 거스름
으로서 작용한 것을 간과할 수 없으며, 이것은 피카소가 말한‘입체파의 눈과 마음이 지각한 것을 표현하는
수단’임을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후에 다다이즘은 더욱 철저한 콜라주를, 쉬르레알리스트는 포토몽타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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펼치게 되나, 그것도 입체파의 현대적 발상의 하나였습니다. 입체파의 종합적인 전람회는 1911년의 살롱
데장 데팡당에서 개최되었는 데 당시 출품자에는 앞서 말한 4인 외에 들로네, 뒤샹, 비용, 로랑생 등 이 포함
되어 있으며, 소박한 화가로서 알려진 H.루소의 작품에서도 입체파적인 조형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 중
입체파의 색채 경시의 경향을 다시 문제삼아, 다채로운 색을 동시적인 존재로 바꾼 것이 들로네의 오르피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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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며, 그의 이론이 마케, 마르케, 클레를 중심으로 한 청기사 운동에 미친 영향은 매우 큽니다. 또 사람들
중에서는 J.그리스를 전형적인 입체파 화가로 보는 사람도 있으나 그것은 분석적 입체파에서 종합적 입체파
로의 전환에 미친 그의 공적을 인정하기 때문이며, 사실 J. 그리스의 경우 후년의 피카소, 브라크에 비하여
입체파에 몸바친 경향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닙니다. 독일의 입체주의자로는 보통 슐레머, 바우마이스터를
들고 있습니다. 운동으로서 입체파의 역할은 이윽고 제1차 세계대전 을 계기로 소멸해가나, 그 후 20세기
미술에 끼친 영향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큽니다.
피카소
1920년대부터 전지전능한 존재로 인식되었던 피카소는 입체주의 그림과 장엄한 고전양식의 그림을
그렸을 뿐 아니라 신고전주의적 기법의 드로잉들을 어렵지 않게 그려냈습니다. 또한 초현실주의자들이
추구하던 음울한 분위기로 가득찬 그림과 조각을 제작하기도 하였어요.1930년대 작품 또한 아주 다양한 데
다소 해학적인 대규모 조각과 함께 초현실주의 조각도 제작하였으며 '게르니카' 같은 갈등의 이미지들을
그렸는가 하면 평온한 아름다움을 주는 섬세한 에칭과 축제분위기로 가득찬 장식회화도 제작하였습니다.
1947년부터는 도자기를 만들어 내기도 하고 대부분 자신을 풍자하는 작업을 하였습니다.
-작품설명-
<아비뇽의 아가씨들>
- 오른쪽의 두 누드는 아프리카 조각에서 받은 영향을 고전적인 미를 파괴하는 도구로 사용했음을 보여줌.
- 전체적으로 인물과 배경이 삼차원적으로 해체되어 있음
<등의자가 있는 정물>
- 모든 물체를 각과 평면으로 분해
<세악사>
- 정확하게 절단된 형태들은 서로간의 긴밀한 결합을 보여줌
레제
레제는 입체파 미학을 기계미학의 추구(운동감)를 위해 도입한다. (인체를 튜브형태로 묘사했던 그는
그래서 자신을 "튜비스트"라고 부르기도 한다
청색시대의 자화상 (1901)
거의 무명이었던 이 시기에 제작된 작품들이 대부분 청색조를 이룬다 하여 청색 시대라고 불렸습니다.
지독한 가난과 심한 성병에까지 찌들었던 화가는 청색을 이용하여 비참하고 궁핍한 자신의 모습을 오히려
신비롭게 표현하였습니다. 피카소는 당시의 괴로움과 절망을 새로운 예술의 원천으로 삼았던 것입니다.
부채를 든 여인 (1908)
그의 첫번째 연인 페르낭드 올리비에를 그린 작품입니다. 파리의 빈민굴에서 만나 가난을 벗하며 살았던
시간들이었으나 그들은 행복했습니다. 피카소에게있어 페르낭드는 며칠동안이라도 꼼짝하지 않는 훌륭한
모델이었을 뿐만 아니라, 병과 가난으로 인한 고통을 견디게 해주는 힘이었습니다.
누드, 나는 에바를 사랑해 (1912)
언뜻 바라보았을 때는 추상화 인 듯하여 사람의 모습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회화를 해체하고, 재조합하여
신비로운 효과를 내는 분석적 입체파의 진수를 보여주던 시기의 작품입니다. 그는 작품 속에 갸날픈 연인 에바와
자신의 모습을 해체한 후 기하학적인 모양으로 다시 조합하여 그려넣었습니다.
올가 피카소의 초상 (1923)
처음으로 피카소란 성을 준 자신의 부인을 고전적인 표현으로 그렸습니다. 붉은 스카프와 푸른 드레스가
눈처럼 하얀 피부와 어울려 그녀를 더욱 우아하게 하네요. 올가를 그린 이 그림은 과연 피카소의 것이
맞나 싶을 정도로 그의 다른 작품들과 확연히 달라보입니다. 한 화가가 하나의 화풍을 다 이루지 힘들지만,
그의 생애에는 여러 가지의 화풍들이 한번에 등장합니다. 여기에 그의 천재성이 있다고 사람들은 평가하고
있습니다.
거울 앞의 소녀 (1932)
앞면과 옆면을 동시에 나타나게 그린 이 작품을 보면 “빛은 직진한다”는 사실을 부정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직진하는 빛으로는 보일 수 없지만 빛을 휘게 함으로써, 또 다른 면을 보이게 하였지요.
이러한 생각은 공간에 대한 기존의 생각을 깨뜨리는 것이었고, 전통적 물리학에 위배되는 것이어서
당시 사람들에게 많은 충격을 주었습니다.
마리 테레즈 (1937)
부드러운 곡선과 은은한 색상을 통해 여성스럽고 따뜻한 분위기가 묻어나는 작품입니다. 아름다운
금발을 가진 그녀의 헤어 스타일이 잘 나타나 있지요. 그는 마리 테레즈를 주제로 하여 그린 작품들이
특히 많습니다. 젊고 건강한 아름다움을 지닌 그녀는 피카소에게 있어 최고의 모델이었던 것이죠.
거울 앞의 소녀 (1932)
앞면과 옆면을 동시에 나타나게 그린 이 작품을 보면 “빛은 직진한다”는 사실을 부정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직진하는 빛으로는 보일 수 없지만 빛을 휘게 함으로써, 또 다른 면을 보이게 하였지요.
이러한 생각은 공간에 대한 기존의 생각을 깨뜨리는 것이었고, 전통적 물리학에 위배되는 것이어서
당시 사람들에게 많은 충격을 주었습니다.
마리 테레즈 (1937)
부드러운 곡선과 은은한 색상을 통해 여성스럽고 따뜻한 분위기가 묻어나는 작품입니다. 아름다운
금발을 가진 그녀의 헤어 스타일이 잘 나타나 있지요. 그는 마리 테레즈를 주제로 하여 그린 작품들이
특히 많습니다. 젊고 건강한 아름다움을 지닌 그녀는 피카소에게 있어 최고의 모델이었던 것이죠.
우는 여자 (1937)
'게르니카'와 더불어 피카소의 걸작으로 꼽히고 있는 작품이죠. 내전으로 인해 불바다에 휩싸인 스페인을
보며 슬퍼하는 연인 도라 마알을 모델로 한 작품입니다. 전쟁의 공포와 아픔을 표현한 이 작품을 통해
피카소는 자신의 정치성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덕분에사회적으로도 더욱 인정을 받게 됩니다.
프랑소와즈, 클로드와 파로마 (1951)
연인이었던 프랑소와즈와 그녀가 낳은 아들 클로드와 딸 파로마를 함께 작품에 담았습니다. 그녀 또한
젊고 아름다운 여류 화가였으며, 부유한 가정에서 자라 의지가 강하였고 주관이 뚜렷하였습니다. 그녀는
“떠나면 자살하겠다”고 협박하는 피카소에게 “그렇게 하세요. 그것이 당신을 더 행복하게 할거에요.”
라며 당당히 그를 버립니다.
꽃을 들고 있는 자클린 (1964)
두번째로 결혼한 여인 자클린은 피카소가 죽을 때까지 작품 활동을 할 수 있도록 그를 도왔던, 생애
마지막 동반자였습니다. 그녀는 피카소가 죽자, 집안을 검은 커튼으로 가리고, 식탁에 그의 자리를
남기는 기이한 행동들을 하곤 했습니다. 그리고 결국에는 그가 없는 현실을 이기지 못한 채 생을
마감하고 맙니다.
손을 겹치고 있는 자클린 (1964)
결코 80세가 넘은 화가의 작품이라 보기 어려울 만큼 힘과 패기가 느껴집니다. 화가의 강한 터치 만큼,
유난히 긴 목과 큰 눈은 모델에게도 강한 의지가 있음을 엿보이게 합니다. 그녀는 50살의 나이차를
극복하는 결혼을 행함으로서 세상에 자신의 의지를 보여주었습니다.
2020.4.19.sun.악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