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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복(八福)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입을 열어 가르쳐 이르시되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마5:1~12)
이 말씀 뒤에는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고 빛이다’라는 말씀이 이어집니다. 세상의 소금과 빛은 아무나 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팔복을 소유한 사람들만이 세상의 빛이 될 수 있고, 소금이 될 수 있습니다. 팔복을 소유하지 못한다면 절대 빛과 소금이 될 수 없습니다. 육신적인 복만 추구하지 말고, 영에 속한 삶으로부터 주어지는 신령한 복을 잘 소유할 수 있도록 사모하시기를 바랍니다.
요즘 저는 이런 신령한 축복을 통하여 제 나름대로는 주님의 은혜를 누리고 있습니다. 팔복의 말씀으로 저는 복된 삶을 살고 있구나 느끼며 살아가는데, 여러분들도 저와 같은 복을 누릴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팔복은 세상에서 알 수도 없고, 맛볼 수도 없는 신령한 복입니다. 주님께서는 빈들에 모여든 모든 사람들에게 신령한 복을 나눠주시기 원하셨습니다.
오늘날도 주님은 동일한 은혜가 우리에게 임하시길 원하십니다. 팔복을 잘 소유하셔서 주님의 신령한 복을 잘 누릴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1. 심령이 가난한 자가 받는 복
팔복의 처음은 ‘심령이 가난한 자는~’ 하며 시작합니다. 이 말의 의미는 쉽게 말해 욕심이 없는 삶을 말합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진리를 소유하지 못하게 되면, 사람은 욕심이 이끄는 대로 살아가게 됩니다. 식욕, 정욕, 명예욕, 성욕 등으로 대부분이 욕심을 부립니다. 야고보서 1장 15절을 보십시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약1:15)
우리가 배고프면 밥을 먹는데, 어느 정도 배부르면 그만 먹으라고 몸에서는 신호를 보냅니다. 하지만 맛있는 음식이 있으면 더 먹게 됩니다. 사실 비만이나 현대병이 오는 이유가 공급과잉(供給過剩)인데, 따지고 보면 욕심으로부터 오는 질병입니다.
제가 예전에 읽었던 책 중에 감명 깊은 책이 있어 소개코자 합니다. 소망교회를 다니시는 장로님이 쓰신 책인데, 책 제목은 『욕심을 버리면 살아서도 천국이지』입니다. 이 책을 쓰신 장로님은 교회 안에 죽은 사람의 염(殮)을 해주셨는데 대략 2000여 명 됩니다.
사람이 죽을 때가 되면 육신의 장막 집이 깨지면서 또 다른 세계가 열려진다고 합니다. 지옥에 갈 사람은 저승사자가 그를 데리러 오다보니 그 사람은 죽기 직전에 얼마나 두려움에 떨고 있는지를 봅니다. 또 어떤 사람은 얼마나 평화로운지 그 모습 속에 ‘저 사람은 천사가 천국으로 인도하고 있구나!’ 금방 분별이 된다고 합니다.
장로님은 수많은 사람들에게 염을 해주면서 결론을 내렸습니다. 지옥에 가는 사람들은 이 땅에 살 동안 욕심대로 살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책제목을 “욕심을 버리면 살아서도 천국이지” 로 지었습니다.
욕심 없이 사는 것이 복된 삶입니다. 욕심 없이 살아갈 때 천국의 기쁨을 맛볼 수 있고, 소유해 나갈 수 있습니다.
2. 애통하는 자가 받는 복
주님이 말씀하신 애통은 세상의 일로 분하고 억울해서 흘리는 눈물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목적을 이루지 못해서 오는 슬픔, 혹은 연인들의 이별 속에 오는 아픔 등으로 인한 비통한 눈물이 아닙니다. 성경적인 애통은 믿음 안에서 흘리는 영적인 눈물입니다.
다시 말해 믿음의 눈물, 신령한 눈물을 흘릴 수 있는 사람이 복 있다는 것입니다. 사무엘상 1장을 보면 엘가나라고 하는 사람이 나옵니다. 이 사람에게는 두 아내가 있었는데, 하나는 한나였고, 또 다른 여인은 브닌나였습니다.
역대상에 나오는 엘가나의 족보를 보면 엘가나는 레위지파, 즉 제사장 직분을 물려받은 오늘날 목사와 같은 사람입니다. 그 당시의 상황은 목사가 두 여인을 아내로 두면서도 아무런 거리낌을 갖지 않는 어두운 시대였습니다. 사사기 21장 25절을 보면 당시 상황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삿21:25)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다시 말해 제 멋대로 살았던 시기입니다. 따라서 당시에 제사장이었던 자가 아내 두 명을 둬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오랜 세월 동안 범죄함으로 인해 하나님도 관여(關與)하지 않는 시대가 됐습니다.
엘가나의 두 아내였던 한나와 브닌나 중에 브닌나는 아이를 잘 낳는 반면 한나는 아이를 낳지 못했습니다. 옛날 우리나라에서도 그랬듯 여자가 아이를 낳지 못하면 죄인 취급당하기도 하고, 시집살이로 핍박을 받았는데, 브닌나도 자식을 낳지 못하는 한나를 늘 괴롭혔습니다.
여기서 한나는 아이를 낳지 못하는 사건을 육적인 문제가 아닌 영적인 문제로 풀어갑니다. 한나는 아이를 낳지 못한 문제로 브닌나와 다투는 것이 아니라 그 아픔을 가지고 하나님의 전에 나와 애통하며 기도합니다. 한나가 얼마나 애통하며 간절히 기도했는지 제사장 엘리가 볼 때 한나는 술에 취한 사람으로 보았습니다.
엘리: “왜 여기까지 와서 술주정 하느냐?”
한나: “그게 아니라 너무 슬퍼서 내 마음을 하나님께 토로했을 뿐입니다!”
한나는 자기의 슬픔을 하나님께 토로했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한나는 자신의 아픈 문제로 하나님께 기도하는 동안 하나님께서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악으로 인해 얼마나 마음 아파하는지를 한나는 깨닫게 되었습니다. 자기보다 더한 하나님의 아픈 마음을 느끼게 된 것입니다.
호세아서에서도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마음을 깨닫게 하시기 위해 선지자 호세아에게 음란한 여인 고멜과 결혼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호세아는 고멜을 데리고 살지만, 그녀는 가출과 외도를 밥 먹듯 합니다.
호세아는 왜 하나님께서 저런 여자와 같이 살라고 하셨을까? 고민하며 살아갈 때에 죄로 인해 하나님을 멀리하는 이스라엘 백성이 밥 먹듯이 외도하는 고멜과 똑같음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사랑해서 원하는 대로 이뤄주면 그들은 세상을 사랑해서 하나님을 떠났다가, 아쉬울 때면 다시 돌아오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반복된 삶이 음란한 여인 고멜의 모습이었습니다. 호세아는 아내를 통해서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타락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하나님의 심장을 가지고 불타는 복음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
한나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그 당시 죄가 관영하던 때에 자기는 자식이 없는 것을 가지고 하나님께 기도할 때에 선지자 호세아처럼 아버지의 심정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한나는 아버지에게 마음을 토로하는 깊은 기도를 드리게 된 것입니다.
한나는 하나님과 심정을 통함으로 인해 서원하기를 ‘하나님께서 제게 아들을 주시면 그 아들을 통하여 타락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시 하나님께로 이끌 수 있는 자녀로 키우겠습니다!’ 기도합니다. 그렇게 해서 나온 아들이 사무엘입니다. 한나는 이렇게 육신적인 문제를 영적인 문제로 풀어버렸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사랑하여 눈물을 닦아주셨습니다.
따라서 애통은 세상의 문제로 슬퍼하거나 괴로워 눈물 흘리는 것이 아니라 호세아나 한나처럼 영적으로 풀어가야 합니다. 믿음으로 구하고 응답받아야 합니다. 주님의 마음으로 구원받지 못한 영혼을 위해 눈물을 흘릴 수 있어야 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못하는 이웃 형제들을 위해 눈물을 흘릴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그 눈물을 닦아주시고 위로해주시는 은혜가 있을 줄로 믿습니다.
저희 집안의 복음은 어머니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죽을병에서부터 고침을 받고자 예수를 믿었지만, 신앙이 자라면서 진리를 알게 되니, 하나님 앞에 너무나 크나큰 죄를 짓고 있음을 보게 되었습니다.
저의 아버지는 3대 독자이신데, 제사뿐만 아니라 절을 수시로 다니며 수많은 돈을 시주하셨습니다. 그러다보니 가난과 궁핍으로 살 수 밖에 없었고, 집안에 강한 불신과 우상숭배를 어떻게 끊을까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우리 집은 한옥 집에 살고 있었는데, 안방 위에 다락방이 있었습니다. 어머니께서는 시간만 나시면 그 곳에 올라가 눈물을 뿌리며 기도를 드렸는데, 기도 할 때마다 일반 수건으로는 부족하여 큰 목욕용 타월을 가지고 3년을 기도하셨습니다. 그 기도 덕분에 집안의 모든 우상과 가난이 끊어지고, 제사장 가문이 되었습니다. 할렐루야!
3. 온유한 자가 받는 복
온유(溫柔)라는 말을 국어사전에 보면 따뜻하고 부드럽다는 뜻으로 해석해 놓았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씀하시는 온유는 그런 뜻이 아닙니다. 성경이 말씀하시는 온유는 하나님의 말씀에 길들여진 사람을 말합니다. 민수기 12장 3절을 보면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 (민12:3)
모세는 모든 사람들보다 온유했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모세의 삶을 보면 그는 결코 인간적으로 따뜻하고 부드러운 사람이 아닙니다.
그의 인생은 참 드라마틱한데, 태생은 히브리인이었고, 태어나자마자 생명의 위협을 당합니다. 그의 어머니는 모세를 살리고자 바구니에 담아 나일 강에 띠웁니다.
마침 목욕하러 왔던 애굽의 공주가 바구니에 담긴 모세를 구출하여 아들을 삼았고, 공주의 양아들이 된 모세는 이집트 최고의 실력자가 될 수 있는 기회를 맞았지만, 동족인 히브리인이 이집트 사람에게 고통당하는 것을 차마 보지 못해 살인하게 됩니다.
영원히 숨겨질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동족의 고발로 인해 그 죄는 탄로(綻露)났기에 그는 모든 것을 뒤로한 채 40년간을 광야에서 양을 치며 살아갑니다.
세월이 흐르고 어느덧 80먹은 노인이 된 모세에게 하나님께서 부르시고 소명(召命)을 주셨습니다.
하나님: “내가 너로 이스라엘의 구원자로 삼을 것이다.”
모세: “나는 아무 힘도 없는데요?”
하나님: “네 손에 들고 있는 것이 무엇이냐?”
모세: “지팡이입니다.”
하나님: “그 지팡이를 땅에 던져라!”
하나님의 말씀대로 지팡이를 땅에 던졌을 때 지팡이는 뱀이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다시 말씀하십니다.
하나님: “그 뱀의 꼬리를 잡아라!”
모세는 40년을 광야에서 지냈기 때문에 뱀은 꼬리를 잡으면 물린다는 사실을 경험적으로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지식과 경험을 내려놓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여 꼬리를 잡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뱀의 꼬리를 잡을 때 그 지팡이는 능력의 지팡이로 변했습니다.
어떤 사람이 온유한 사람인가? 바로 하나님의 말씀 앞에 순복(順服)하는 자가 바로 온유한 자입니다. 하나님께서 홍해를 건너게 하실 때에 지팡이로 바다를 쳐라 하십니다. 사람의 이론과 상식과 경험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짓입니다. 뒤에서는 애굽 군대가 죽이려고 달려오는데 빨리 전투태세를 취하던가 아니면 모든 짐을 내려놓고 도망가라고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왜 그런 상황에서 바다를 치라고 하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모세는 이해할 수 없어도 지팡이로 바다를 칠 때 물이 갈라졌습니다. 이것은 사람의 상식과 이론으로는 있을 수 없는 일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 하셨을 때 모세가 순복함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홍해를 건너고, 광야에서 사는 동안 농사짓지 않았어도 의식주(衣食住)가 해결되었고, 아프지도 않는 신비한 은혜가 40년 동안 임했습니다.
모세처럼 하나님의 말씀에 길들여지는 온유한 자가 되기를 사모하세요.
4.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받는 복
하나님께 쓰임받기 원하십니까? 하나님의 축복을 받기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 쓰임 받았던 믿음의 사람들, 축복받았던 인물들을 살펴보면 항상 의에 주리고 목말라합니다. 반면에 의에 주리고 목마름을 잃어버린 사람은 신앙이 정체되고, 영적인 사람이 아닌 육적인 사람으로 점점 후퇴합니다. 따라서 항시 의에 주리고 목말라하는 것이 복인 줄 믿습니다.
저희 교회에서 선교 후원하는 분 중에 여자의 몸으로 혈혈단신(孑孑單身) 태국에 가서 선교하시는 분이 계십니다. 방정렬 선교사이신데, 여자 홀로 불교의 나라로 가서 신학교와 80여 개의 교회를 개척하셨습니다.
그 선교사가 선교하시는 곳을 가려면 태국 치앙마이에 내려서 다시 한 번 잠자리같이 생긴 경비행기를 타고 1시간을 더 가야 합니다. 방선교사는 태국 매홍선이라 하는 산간 오지에서 선교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어느 날 우리 교회에서 쓴 책을 보고서는 비행기를 타고 오셨습니다. 우리교회에 흐르는 은사가 자기에게도 흐르기 원한다며 그 먼 거리를 한 걸음에 오신 것입니다.
또 『철인(세상이 감당치 못할 믿음의 사람)』의 저자인 다니엘 김 선교사가 저희 교회에 몇 번 오셨는데, 저와 식사 중에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저는 영적으로 눌림을 당할 쯤엔 이스라엘로 가서 금식 기도합니다.”
이처럼 하나님께 귀히 쓰임 받는 사람들의 특징은 의에 주리고 목마름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혹시라도 의에 주림과 목마름을 잃어버린 체 살고 있다면 다시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항시 의에 주리고 목마름이 복 있는 자입니다.
5. 긍휼히 여기는 자가 받는 복
긍휼은 불쌍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요즘 교회 성도들이 인터넷에서 재정 강의를 하는 한 간사의 동영상을 보고서 좋았다고 합니다.
그 간사의 간증 중에 이런 내용이 있는데, 어머니는 자신이 어릴 적부터 구제하는데 무척이나 힘썼고, 또한 자녀를 모아서 축복기도를 해주면서도 항시 자녀들이 사는 주변에는 자녀들을 통하여 가난한 사람이 없도록 기도했다고 합니다. 그 어머니의 기도대로 살아갈 때 하나님께서 물권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우리가 누군가를 긍휼한 마음으로 대하면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는 은혜가 임합니다. 따라서 구제와 선교와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놓쳐서는 안 됩니다.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어 드리는 것이니 그의 선행을 그에게 갚아 주시리라” (잠19:17)
저 역시 하나님의 긍휼함을 받은 자입니다. 교회가 여러 가지 재정문제로 힘들 때 가지고 있던 아파트를 팔아 교회 재정으로 필요한 부분을 쓰고, 당시 힘들어했던 몇몇 가정들을 도와주었습니다.
가지고 있던 재산을 팔아서 썼기 때문에 이제는 가난하거나 어려운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 맞습니다. 그것이 세상 이치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려고 하니 이전보다 더 큰 집에서 살게 하시는 신비한 은혜를 주셨습니다. 저희 집에 다녀간 성도들은 그것을 누구나 신기해합니다.
어머니에게서 새벽 1시께쯤 되어 전화가 왔었다고 합니다. 무슨 일이 있으신가 싶어서 새벽 2시쯤에 전화를 드렸더니 날이 추워져서 온수매트를 틀었는데, 고장이 났다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 나 지금 추워서 잠도 못자고 있는데 어떡하냐? 이 뜻입니다.
매우 피곤한 상태였지만, 연로(年老)하신 어머니께서 추워하시니까 힘들어도 집에 있는 온수매트를 가지고 어머니의 집으로 가서 바꿔드렸습니다.
그런데 어머니가 사시는 곳이 재개발 지역으로 묶여서 이사를 가야 하는 상황인데, 어머니가 가지고 계신 건물의 가격이 평가를 받았는데, 50평 정도의 아파트를 보상 받을 수 있을 것 같다고 합니다. 어머니께서는 온수매트를 깔아주는 저를 보며 그 아파트에 들어가서 살라고 하셨습니다.
그곳에 가서 살라고 해도 살지 않겠지만, 긍휼한 마음을 가지고 섬기니까 작은 것 즉 온수매트가 큰 것 아파트로 돌아오는 것을 봅니다.
사실 우리교회 성도들을 보면 대부분 교회에서 도와줘야 할 만큼 힘든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놀라운 사실은 마르지 않는 샘처럼 교회재정에 펑크가 나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어쩌다 한 번씩 채워진다면 그럴 수 있겠다 싶지만, 신기하게도 지금까지 잘 운영되어 집니다. 이것을 보며 광야에서 이스라엘에 만나와 메추라기를 보내주신 것처럼 우리에게도 신령한 만나를 주시는 구나 생각이 듭니다.
교회 주보에는 저희가 선교하는 곳이 10곳이 기재(記載)되어 있고, 이 외에도 몇 곳 더 선교하고 있습니다. 저희는 개척할 때부터 지금까지 한 번 시작한 선교는 중간에 그만 두지 않고 계속 해서 도와줍니다. 선교는 계속 이어져야만 우리의 상급이 하늘에 쌓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도 긍휼한 은혜를 입습니다.
여러분들도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주님의 사랑을 가지고 나보다 연약한 사람을 섬기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겨주십니다.
목요 영성집회 역시 마찬가지로 어언 10년이 되어 가는데, 오시는 분들에게 영적인 갈급함이나 혹은 육적인 치유 또는 내적 치유가 필요하신 분들을 주님의 사랑 안에서 섬기다보니 하나님께서 너무나 많은 것들을 누릴 수 있도록 은혜를 주셨습니다.
하나님께 긍휼한 은혜를 받고자 한다면 먼저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실천해야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6. 마음이 청결한 자가 받는 복
마음이 청결한 사람은 하나님의 임재를 사모하여 더 깊이 들어가려 하는 사람입니다. 죄가 가려져 있으면 안 됩니다. 세속적인 신앙관을 갖고서는 절대로 하나님을 볼 수 없습니다.
영적으로 깨끗한 사람을 보면 때로는 꿈과 환상으로, 세미한 음성으로 여러 가지 방법으로 함께 하십니다. 다시 말해 심령이 청결하면 하나님과 교제를 할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우리가 하지 말아야 할 3가지가 있습니다. 성령을 소멸하면 안 되고, 성령을 근심시키셔도 안 되며, 성령을 훼방하는 죄도 범해서는 안 됩니다.
이런 것들을 하지 않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임하셔서 꿈과 환상을 통하여, 세미한 음성 등 다양한 방법으로 찾아오십니다. 마음이 깨끗한 자에게만 주어지는 은혜입니다.
신앙생활 한다면서 기도생활은 하지 않고, 세상의 즐거움을 다 누리려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또한 정욕적인 삶을 추구하면서 예배 때만 와서 은혜 받았다고 합니다. 이런 삶을 살면서도 하나님과 동행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어불성설(語不成說)입니다. 그것은 동행하는 삶이 아닙니다.
따라서 신앙이 깊어질수록 세속적인 삶을 탈피하고 더욱 하나님의 임재 안에 더욱 깊이 들어가도록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7. 화평하게 하는 자가 받는 복
하나님과의 관계가 신통(神通)한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평화로운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과 화평한 사람은 대인관계 속에서도 인통(人通) 합니다.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요삼1:2)
신통하면 인통하고, 인통하면 물통 합니다. 이것은 공식과도 같은 내용입니다. 하나님과 화평한 자가 누릴 수 있는 축복입니다.
하나님과 화평하면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화평해집니다. 그러면 물권도 하나님께서 주십니다.
8.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
신앙생활 하는 사람들을 바라볼 때 대부분이 넓은 길로 가는 것 같아 너무나 많은 근심이 됩니다. 주님을 위하여 조금도 손해 보려 하지 않고, 주님을 통하여 복을 누리고픈 생각만 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계3:15)
그러나 신앙생활은 예수 때문에 좁은 길로 걸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믿음생활은 편한 삶이 아닌 힘든 삶입니다. 하지만 세속적으로만 살아가려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세상과 타협하고 너무나 편하게만 믿으려 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인정받는 삶을 누리고자 한다면 때로는 세상으로부터 때로는 가족으로부터 상황에 따라서 예수 때문에 핍박을 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 믿는 것 때문에 가족과 원수가 될 수도 있고, 공격도 많이 당합니다. 어려운 일들이 몰아닥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어려움을 감내(堪耐)하며 나갈 수 있어야 복 받는 사람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역으로 말하면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아무런 손해도 보길 원치 않는 사람은 뭔가 잘못됐다는 뜻입니다. 여러분들이 자신의 신앙을 되짚어 보면서 나는 과연 주님을 위해 무엇을 희생하며 살았는가? 나는 진실로 주님을 바라보고 있는가? 축복 때문에 주님을 바라보고 있는 것은 아닌가? 고민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돌이킬 것이 있다면 돌이키시고, 이기시는 자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 8가지의 복을 소유해야지 세상을 이길 수 있습니다. 세상의 빛으로써, 소금으로써 살아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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