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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시인의 방 [蒜艾齋 산애재] 원문보기 글쓴이: 松葉
▲시집 [☆엄마가 아팠다☆]의 앞표지(좌)와 뒤표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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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가 아팠다]
김명이 시집 / 지혜사랑 093 / 도서출판 지혜/계간시전문지 애지(2013.11.14) / 값 10,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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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가 아팠다
김명이
앞마당 오래된 나무 베어버린 후
여든 나도록 처음
식음 거부하고 끓는 급병
며칠째 병상을 붙들고 있다
동티일까 들리는 염려
불쑥 돌아가신 외할머니 보았다
병실 입구 쪼아댄 낮을 베고
침이 꽂힌 표본실 눈빛
통창에 들어 온
천왕봉 봉우리만 마주하였다
죽 드셔요
약도 먹고 그래야 낫지
달래며 여러 번
정전 밤 움켜쥐던 음성 번갈아
죽은 솔잎 매달아 놓고 간 2월의 바람
기일을 보았을까
손 내밀었다
까드린 귤 한 조각 겨우
아기처럼 빨아먹었다
이. 제. 살. 았. 네
배. 고. 프. 구. 나
링거액에서 아버지 목소리 떨어졌다
랄랄라 스무 살
김명이
아홉시에 아홉시 랄랄라 스무 살, 방학득수, 알바천국 황금이삭을 줍자, 오 만원어치 물렁뼈가 지근거린다
자주 한 시간 덤 주면서 웃어 주기, 바코드에 능숙할수록 목적지에 다가가는 법은 쉽게 베운다. 부러진 발톱 붙이러 간 화장실
그때 벽쪽에 서 있는 엄마, 어린이 집 다닐 적 헐값으로 퍼 주고 겨우 남긴 쌍가락지 왜 빼셨을까? 링 속에 생긴 허공을 밀고 금 한 돈 이십이 만원 화살촉 급히 따라가셨다
광고 등 외벽 밝히면
나의 발바닥은 불어터진 생선이 되었습니까
삼키지 못한 가시는 제 목에 걸려야 맞습니까
신음들 사이로 빛나는 성공시리즈
철학은 전설처럼 먼지의 두께가 되고
책가방은 방학 전 그대로 하품한 채
랄랄라 스무 살, 쉰 살
살기 좋은 우리 나라
돌아가는 길
김명이
이 도시의 끝
네게로 가뿐하게 흘러가던 그 길일까
거리는 줄지 않고
낯선 불빛 즐비하다
조명 아래 입술은
괄호에 너를 넣고 취한 말의 바닥
바깥이 되어간다
번갈아 추가하는 커피
벌게진 말의 원산지 찾으며
사소한 자국들 데여서 넘친다
쉼표
마침표
김 탐색
구름무늬 또 긋는다
돌아가는 길
출렁이는 운전대
가로수 흉터를 훑고 지난다
처음 해본 내일아트
네 손에 쥐여
숨 가쁘게
꽃잎으로 떨어지던 그 길일까
밤비 냄새 들이친다
어디 주유소 휴지였더라
두툼하게 쌓인 저것들
사월의 그늘
김명이
배를 끌어안고 초경을 감추고 싶었다
누군가 튕기고 간 진창물
병아리는 막 보행기를 벗은 듯
등나무 아래 다가와
누웠어, 한참 감고 있는 조그만 눈
젖어있던 깃털 위로
바람먼지 날아와 엎어져
아침신문
내비게이션처럼 가지 뻗는 제 지구
돌연 멈춤 누르고 아득한 나라의 별이 된
천재학교의 박제들
기가 찬 뉴스를 보는데
오늘 선생님도 위치 추적 떠났다는데
노란 봄 터뜨린 언덕배기
왁자지껄 혀를 쏟아내는 다행들
내 이름 내가 되기 위하여
도서관 입구 놓고 가는 뒷발치 보며
이제 당당하리라는 주문은 생략한다
환자
김명이
뱃살 물컹한 남자 노랑 물을 배꼽 아래 봉지 매달아 뻐끔뻐끔 채우고 인조 목걸이 같은 쇄골 뼈를 드러낸 걸쇠에 매달린 노랑 물을 야금야금 살 속에 채우고 다리 세 개 바퀴 달린 다리 외눈 동굴의 눈 흰 천이 둔갑된 머리들 포르말린 향 스칠수록 주유소 바람 빠진 풍선처럼 꺾기 춤추는 나 피를 마신 주사기 뒹굴고 빨간 칸들 허둥대는 엘리베이터 안 결이 마른 동공을 외면하고 턱에 찬 모래바람 빠져나와 문고리를 감싸 쥔 푸른 정맥들이 겨울강의 풀처럼 얼려 있다 잘려진 햇살 커텐 모서리로 기어나와 그 여자 망막에 맺혀 천장을 더듬었다
자궁 들어낸 저 보고 피식피식 나를 향해 또각또각 걸어오는 청진기
부자
김명이
민들레가 말했어요
홀씨 날아가는 곳이면 다 제 땅이에요.
새들이 날갯짓 치며 말했어요
바다 해수욕장도 있고
북극 얼음 별장을 향해 가는 중이어요
언제나 등 기댈 곳 있지
잠꼬대에 발바닥 턱에 차는 집
망설이는데
떠밀리며 나는 말해요
뿌리 내리는 목
김명이
목의 종류, 아차하면 댕강거려 석고대죄가 된다
속, 붉은 것들
가만히 있어도 멈추어 가는 두려움
내부의 내부로 응고시킨다
아이는 뛰고
두 번, 공중이 무섭다
눈발 쥔 겨울 계단
틀어막은 내부
기침에 드러나
적신 치부, 외부가 되었다
끝없는 수풀, 긁히던 광대뼈
어느 나라의 수행자가 촛농을 안고 얼룩져 간다
매스자국의 외부와 내부, 맞댄 벽
목이 긴 현기증
센 곳, 샌다
아기 바구니에 내리는 옹알이
겨울산
김명이
오르막도 내리막도 앞에서만 부는 바람
나무는 밀려도 제자리에 있고
나는 나이가가야만 했다
돌 계단 턱을 딛고 있는 오전의 햇살
희고 꽝꽝한 재를 가리키며 떨어졌다
한 덩어리 바람으로도 날개 없는 새
멈춤의 두께는 먹구름처럼 짙어졌다
발자국 깊은 소리로 묻혀갈수록
눈발이 나무 비늘 되어 바람의 바닥으로 주저앉을수룩
숨 막고 붙잡히는 팽팽한접전
불현듯 예외 없이 가벼울 수 있다는 것
미끌린 폭 빙산 담장 무너뜨리며
떨어진 흙무더기 아래 절벽
기어오르는 네 발 짐승 되어 간다
짐승은 안다
꼭대기엔 아무것도 없다는 것
그래서 꼭대기로 향하는 것
어공을 두른 막바지 산봉우리
눈을 잃고 내가 없는 몸을 던진다
설원 틈바구니마다 눈을 뜨는 낮별들
새가 될 수 없는 내가 단 한번 새가 되기 위해
맨 아래 땅을 딛는 순간 지고 내려온 눈발 한 빔
겨울 산은 나를 놓아주고 또 붙잡는다
여자의 상자
김명이
너의 도화지에 스케치하고
작법과 색을 채워 넣기 시작했다
귀퉁이에서 중심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어
지팡이 짚고 가는 그림자처럼
면의 틀에 끼워지기 위해
연필심으로 눌러 찍기도 했다
구름을 좇았으나 사라진 수직
수평은 멀미로 둘썩였다
가난이 여실히 가난하고
모서리의 각이 틀어질 때
선의 형식은 방망이
di악사 없는 불협화음 들리며
명치의 구멍은 분간으로 불거졌다
세워놓은 입체
그 속에 숨기고 싶은 판도라는 무엇이었을까
뚜껑을 덮기 위해
오늘도 손가락은 허공을 몇 번 짚고 웃는다
물렁해지기 위해
지탱한 뼈의 간헐적 화음 들으며
지워진 봄꽃 이름을 찾아 어슬렁거린다
둘러가지 않아도 곡선이 되는구나
위험한 계단
김명이
핸들 바튼 길 왼뺨 흐트러졌다
흐려진 하늘
나의 손톱은 주머니에 눌린 캬라멜 껍질 뜯어 벗긴다
그 식당 아무렇지 않은 삼겹살
너는 턱 젓가락으로 허공을 집었다
‘생과 냉동’ 사이 함정을
고기 한 점 연기가 되어가는 동안
너는 눈물 훔친다
핸드폰 만지작거리며
일회용 물수건 같은 질문 몇 번째
등을 안아줄 때는 눈을 감아야 한다
바람 꺾이는 계단
빗방울 서너 개
나의 물고기는 아가미를 마지막으로 퍼덕인다
멈춰가는 시계바늘
육교에 숨지 못한 저녁그늘 차인다
내려가는 계단 다가갈 때 튀여 오른 너의 환영
나를 자빠뜨린다
캬라멜 낀 손톱 깨문다
첫눈
김명이
거꾸로 찍고 간 발자국 타래 끝
시려워 비벼댄 웅덩이
눈발이 미쳐올수록
그리움의; 크기란 걸
첫 눈이 오면
맨 먼저 묻는다
당신 살아 있니
사금파리
김명이
새벽이슬 에 누워
계곡 이끼로 핀 돌 틈
흰 사금파리 물지게 지고 있다
또 다른 조각들은 어디로 떠내려갔니
너도 한때 밥상에 수저가 많은 집
수북한 기쁨이었으리라
양陽
김명이
아버지 자꾸 누우려 마세요
건들장마에 곯은 텃밭
가문 햇살 꾹꾹 눌러줘야
김장배추 속살 여물지요
함석지붕에 두엄처럼 켜 쌓인 은행잎
조임 못도 속대까지 녹 먹고
천장은 부대껴 온 어루러기 갈피를 놓아요
이젠 가지를 쳐야겠구나, 하셨지요
산자락에 사드린 햇살 넘실한 터
저물어 쉴 곳 좋구나, 하셨지요
새벽 네 시 기침소리 들릴까
먼 산 어스름 별 캐 와서
전화기에 심어놓은 끝 번호
환히 동 트는데
배추벌레는 얼마큼 잡으셨나요
수련
김명이
설핏한 하늘 달그락거리는
젖은 담요 꿈꾸는 창가
종기 퍼져 쭈그린 앉은뱅이 연못 수련
근심 배어난 오누이들이 적셔 있다
오호
반짝이는 비늘을 끌고 헤엄쳐 오는 붉은 머리 잉어
노을까지 다 삼켜라
홍련 백련 흐드러지는 연못
바람으로 떠도는 너 쉬어 가 길
꽃 향 섬섬한 정원으로 띄워 주리라
여인
김명이
살대 구멍 난 평상에 감잎 덮은 미이라 감투는 희어 숭숭한 머리털 가물진 짐불로 치장하였다 사내와 아이가 점령하려 그 밤의 전투가 폐허로 남은 젖무덤 늘어진 내복 사이 흘러나와 생의 꼬리로 가는 입구 입술의 냄새 그리워하는 것일까 압력밥솥처럼 끓었을 것이리라 한 덩이 기쁨의 공기 퍼올려지면 멈춰진 추를 가슴 한쪽 눈사람으로 재워낸 석양의 무게 꼬들꼬들 해진 흙밭이어도 물을 품고 물길을 내어주고 저 여인에게도 푸르고 여린 봄날 있었으리니 등 뒤로 다가가 문지를 때 파닥하는 잠자리 날갯죽지 짙은 물빛 차올라 생의 앞자락 마침 떨어지는 감잎과 낮은 소리로 주억거렸다 엿보다가 미끄러졌구나 “닮은 그 여자”
가을 짓기
김명이
끙끙거리며 계절은 쌓인다 신축 건물 난간 위 햇머리가 십장什長에세 막 들키는 순간 망치소리 거푸집 쪼개며 휴일 없음 선고한다 두껍게 쓸쓸해진 바람은 허기진 목화 구름 몇 뭉치 창문에 날라놓고 당신은 허리춤에 손 넣어 ‘미안해’하고 쓴다
쇠꼬리 뽀얗게 우려내는 냄새에 실려 아래층 퇴직부부 관절염 진행 중임 레일을 텅텅 치며 하늘로 가는 빨간 기차 간밤 자정 넘어 주정하던 곰보자국 가재며 익숙해진 위층 집 말려진 혀를 싣고 떠나간다
꽃무릇 쓸려가는 초저녁 하늘 강 가로등 시울에 화관을 씌운다 마른 풀잎에 고여 오는 안개의 몸 냄새 발밑은 난간에서 흔들지라도 단단히 묶고 간다 발목 끄으는 당신에게로
비, 시멘트
김명이
구름의 양수 터지고 깨져 오는 하늘의 알들
고래 신호를 부르는 노래 이어지고 저수지가 시멘트 턱 위로 뽀글거리면 피라미는 은빛 배를 뒤집으며 실려 갔지 그건 진혼곡이었어
침대를 놓아버린 새 차가운 시멘트 바닥에 날개 붙이려 하네
발자국 찍을 수 없다는 것을 바람은 가르쳐 주지 않고 저만 빠져나간 거야
젖은 날개는 제 몸의 몇 배 얼마나 무시무시한 지
그림자만 있었다고 소녀
고층 난간에 올린 제 몸 햇볕 쪼이고 싶었을 테니, 하늘의 알처럼 말았다 하네
송두리째 날려 시멘트 바닥 흥건히 적셨다 하네
물기 먹은 시멘트는 동요 없이 단단해졌다
겨울사무소
김명이
여든 살 명함에 별 셋 달고 다니는 퇴역 장교, 김 선생 봐달라며 딱딱한 혀를 부서뜨린 퇴직 교장, 공룡마트에 먹힌 골목가게 사장, 인터넷에 잘린 사무원, 역맛살 있어 뛰쳐나온 주부, 돌배기 울음 눈에 넣고 온 새댁, 그 가운데 미래 시인도 있다
오늘은 시인님 터뜨린 실적 한 방
지점장은 한쪽 실눈으로 연신 갸웃하는데
판매 왕이 되는 거야
수피에 가려진 헐거운 뼈를 발라 보이고
휘둥그레 눈자위 열릴 때
안성맞춤 꽂아야 한다
이빨 빠졌으나 맞댄 날은 놓을 수 없다
몸뚱이만 드는 본전
문득 문득 멈추며
후들거려도 가고 또 가다보면 가는 것이다
톱밥처럼 바람 앞에 놓여 있는
외판 사무원
막차다!
폭설 내리는 날
목도리 끌리며 뛰어가 올라탄
슬금슬금 웃음도 뒤따라 헐떡인
가로수
김명이
쌩하니 다가가
날렵한 상처 주지 않는다면
화려한 비바람은
언제고 익숙해진 줄거리라고
그 자리 지켜선
정년이 언제인지 알 수 없다
예전에 도로의 폭이 넓어질 때였지
오래도록 사랑한 나무
크레인에 들려 사라진 후
낯선 얼굴 거리 두고 서 있었음을
갓길 없음 표지가
너를 붙들고 서 있다
빈 몸인 네 꼭대기 위로
새들은 둥지를 틀어 놓았네
친구여 종은 크게 울린다
김명이
마흔 중반 훌쩍 넘어 지방 문예지 신인으로 실렸다
“축하해” 숨소리 턱 막혔다 폐부까지 돌아 나온 목소리, 여상을 졸업하고 세상 첫 유리문에 끼워진 후 보이는 것을 눈감지 못한 우리는 몰락했다 넘어진 담벼락을 일으키던 장미의 계절 완행열차에 담아 서울에 닿았고 연애마저 실패한 너는 담배 연기 깊숙한 지방 카페에 내렸다 빌딩 벽에 갇힌 시간의 귀 마는 전등 꺼지길 기다리며 구미에 맞는 부속이 되었다
아내는 이름으로 만나 조심스레 문을 열 때 가지들 엉킨 임대아파트 오색 종을 접고 있었든가 좌판 행상도 넌지시 들렸다 천정 구석 수납장에 흘러내린 시집 한 페이지! 박제되지 못한 기억은 튀어 나온 핏줄처럼 선명해졌다 생소한 것까지 진열하는 너는 안개가 물들의 나래되는 호수 저편 얘기 아물지 못한 상처를 만지작거렸다
저린 몸으로 부대끼고 있을 금이 간 유리의 시간
햇살의 반짝임이 더디 오는 것이리라
친구여 깊을수록 종은 크게 울리니
그 호수 전부 발 담가 물장구치는 바닥이려니
다 저녁 때 의자
김명이
밑동만 남은 나무
의자가 되어
횟가루로 낙인 된 분류번호 입었다
발자국 소리를 기다리는 걸까
많은 사람 스쳐갔으리
다가가 앉아본다
한때는 공원의 바람을 쥐락펴락 했을 터
뿌리를 엉덩이 속으로
밀어 올리며
사라진 가지의 번지를 찾아 달라 보채는 듯
나이테에 새겨진 하트무늬 잔해
맴돌고 있는 붉은 점모시나비
나무의 기억을 오므렸다 펼쳤다
매정한 사람아 여태 돌아오고 있는가
나 일어나자
나무의자는 쪼가리 해시계를 붙들고, 저만치
목발을 짚고 와
손바닥으로 쓸고 가는 작은 등
사라진 가지의 눈 어둠을 밀고
집으로 가는 길 끄덕이는 둥근 의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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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의 말
건너온 징검돌을 떠올리며 자신을 두드려 본 시간
늘 그래왔던 것들이 짙게 어둑해졌다
뒤늦게 필연처럼 깨우는 세포들
집중하여 생의 전환점으로 돌려가야 했다
허공으로 난 길을 가슴속에 숱하게 그리며
숨으려고만 한 나를 끄집어내고 있었다
그 사이, 백지에 몇 개의 발자국이 찍혀있음을 보았다
그리고 무리지어 가는 것을
가만히 손 흔들었다
2013년 초겨울
김명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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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이 詩集 [※엄마가 아팠다※]
[ 해설 ] -
저린 몸으로 펼친 진혼鎭魂의 시학
오홍진(문학평론가)
1. 스무 살의 아이러니
김명이의 시는 저린 몸으로 고통스런 세계와 맞부딪히며 살아가는 존재들의 삶에 주목하고 있다. ‘저린 몸’이라는 시적 주체의 상황이 암시하는 대로, 시인은 “연약한 다리로 지탱하는 삶”(「눈새」)의 비애에 시안詩眼을 집중한다. 저린 몸을 지니고 살아가는 이들에게 세상은 “밧줄 매지 않고 번지 점프하는 곳”(「유리 지구」)과 다르지 않다. 번지점프라는 놀이가 죽음으로 화해버리는 세상에 우리는 살고 있다는 것을 시인은 ‘아파트’라는 절대적 소외의 공간을 빌려 표현한다. 아파트는 자본주의의 공간적 특징을 상징한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는 이 마천루들은 부자와 빈자를 정확히 가름으로써 그곳에 거주하는 사람들만의 고립된 세계를 구축한다. 비슷한 사람들이 모여 서로의 삶에 동화되어가는 생활방식은 자본주의적 삶의 리듬이 되어 아파트 특유의 폐쇄된 구조로 펼쳐진다. 폐쇄된 공간에 사는 사람들은 조그만 소리에도 예민하게 반응한다. 층간 소음 때문에 벌어지는 숱한 갈등은 “아파트 통째 찍던 그 밤의 격전, 패배한 아래층이다”라는 시적 정황을 통해 표현되고 있는바, 시인은 무엇보다 아파트의 폐쇄성으로부터 인간관계의 폐쇄성을 이끌어내고 있다고 보면 좋을 것이다.
아파트의 폐쇄적 공간감은「콩나물시루 속으로」에서는 ‘콩나물시루’의 조밀한 이미지로 변주되어 표현되고 있다. 콩나물에 얽힌 아픈 추억을 되새기고 있는 이 시에서 시인은 일상 깊숙이 박혀 있던 가난의 문제를 끄집어내고 있다. 아랍여자처럼 차도르를 쓰고 사는 콩나물이 “갑갑할까봐, 벗겨버리면 쑥쑥 자랄 것 같아” 아이는 베일을 들추어낸다. 파래진 얼굴로 돌아온 엄마의 빗자루에 맞아 멍이 든 몸을 “멍든 콩나물”에 비유하며 시인은 가난으로 하여 빚어진 설움을 표현한다. 가난한 삶에 비행기재 넘어 장사하랴, 증조부 제사 지내랴 고달픈 어미의 일상과 마찬가지로, 아이 또한 콩나물시루 속에서 노랑대가리 굼실거리며 지금까지 살아왔다. 시의 말미에서 시인은 “검은 이불 뒤집어 쓴 채/절여진 나의 샅은 붉은 음표 가득하였네”라고 고백한다. 성장의 징표인 “붉은 음표”의 이미지는 가난을 벗 삼아 어른이 된 아이의 정황을 에둘러 드러낸다. “빨리 세상 나오라고 꼬박 하루 구경시켰”다가 도리어 멍이 들어버린 콩나물처럼 아이는 비정한 세상의 물정을 고통스런 몸을 통해 가슴 깊이 체득해버렸다. 그리하여 「랄랄라 스무 살」에 등장하는 스무 살의 딸은 쉰 살의 엄마와 다를 바 없는 자신의 삶을 예감하고 있다. 콩나물에 멍든 아이는 스무 살이 되어도, 쉰 살이 되어도 그 멍-흔적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리라는 서글픈 예감.
아홉시에서 아홉시 랄랄라 스무 살, 방학특수, 알바천국, 황금 이삭을 줍자, 오 만원어치 물렁뼈가 지근거린다
자주 한 시간 덤 주면서 웃어 주기, 바코드에 능숙할수록 목적지에 다가가는 법은 쉽게 배운다. 부러진 발톱 붙이러 간 화장실
그때 벽 쪽에 서 있는 엄마, 어린이 집 다닐 적 헐값으로 퍼주고 겨우 남긴 쌍가락지 왜 빼셨을까? 링 속에 생긴 허공을 밀고 금 한 돈 이십이 만원 화살촉 급히 따라가셨다
광고 등 외벽 밝히면
나의 발바닥은 불어터진 생선이 되었습니까
삼키지 못한 가시는 제 목에 걸려야 맞습니까
신음들 사이로 빛나는 성공시리즈
철학은 전설처럼 먼지의 두께가 되고
책가방은 방학 전 그대로 하품한 채
랄랄라 스무 살, 쉰 살
살기 좋은 우리 나라
-「랄랄라 스무 살」전문
아홉 시에서 아홉 시까지 스무 살 청년은 일을 한다. 스무 살에 할 수 있는 노동의 종류는 한정되어 있다. 발톱이 부러질 정도로 부산하게 몸을 움직이지만, 정작 부러진 발톱을 붙이기 위해 화장실에 갈 시간은 쉽게 나지 않는다. 하루 종일 일을 해도 손에 들어오는 돈은 언제나 부족하다. 바코드를 능숙하게 찍으면 인생의 목적지에 더 빨리 도달할 수 있는 것일까? 88만원 세대의 비애가 채 사라지지 않은, 아니 88만원마저도 벌 수 없어 아예 백수의 길로 나서는 청년들의 상황을 생각한다면, 12시간 노동은 시대의 슬픔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시대의 코미디에 가깝다. 공부할 시간에 공부할 돈을 벌어야 했다면, 공부가 끝난 후에는 공부하기 위해 빌렸던 돈을 갚기 위해 돈을 벌어야 한다. 부채 인간을 양산하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특성상, 청년들은 공부를 끝내기도 전부터 부채의 그늘에 휘말려 들어간다.
문제는 청년들의 이러한 곤경이 부모 세대의 고통으로 전가되고 있다는 점에 있다. 위 시의 3연에 표현되듯, “어린이집 다닐 적 헐값으로 퍼주고 겨우 남긴 쌍가락지”를 엄마는 자식의 미래를 위해 처분한다. 돈을 쓰지 않으면 배울 수 없고, 배우지 못하면 사회적으로 성공할 수 없다. 돈과 성공의 고리는 뫼비우스의 띠처럼 안과 밖에 연결되어 있다. “신음들 사이로 빛나는 성공시리즈”를 갈망하며 그들은 오늘도 “랄랄라 스무 살, 쉰 살”을 외치며 살아간다. “살기 좋은 우리나라”라는 환상을 여전히 품은 채 살아가야 하는 게 피할 수 없는 그들의 인생이라면, “랄랄라”에 스며든 아이러니는 어떻게 보면 어릴 때부터 인생의 지독한 쓴맛을 보고 자란 세대의 운명과 맞물려 있는지도 모른다. 그들에게 “철학은 전설처럼 먼지의 두께가” 되어 버렸고, “책가방은 방학 전 그대로 하품한 채”로 저 구석에 박힌 쓸모없는 물건이 되어버렸다. 방학특수를 맞아서는 알바천국에서 “랄랄라” 황금이삭을 주울 수 있게 되었으니 이 얼마나 “살기 좋은 우리나라”인가.
미래의 목표는 예전에 이미 사라졌다. 현재에 대한 성찰이 사라진 동물의 왕국에서는 오로지 ‘현재’의 시간을 견뎌내는 것만이 유일한 목표가 된다. 가야 할 곳이 이미 정해져 있고, 또 올라갈 곳의 한계가 분명히 정해져 있다면, 쌍가락지를 판 쉰 살 어미의 삶에는 알바천국에서 황금이삭을 줍는 스무 살 청년의 삶은 쉰 살 어미의 삶을 그대로 따라가고 있다. 살기 좋은 우리나라에서 벌어지는 이러한 악순환은 “랄랄라 스무 살”의 희망을 뿌리부터 잘라버리는 효과를 발휘한다. 콩나물시루에는 멍든 콩나물이 가득 담겨 있다. 검은 베일에 싸여 있는 콩나물들의 삶은 베일이 살짝이라도 벗겨지면 이내 숨통을 조여 오는 고통에 휩싸여버릴 위험에 처해 있다.「나무의 집」을 따른다면, 그것은 “새가 없는 숲”의 상황과 상당히 유사해 보인다. 새가 없는 숲은 생명이 없는 공간이다. 거대한 빌딩의 숲으로 덮여가는 자본주의 사회의 이면에서 어린 새들은 하나하나 도태되고 있다. 그들은 어디로 가야 할까? 어떤 상황에서도 “랄랄라” 노래를 부르는 게 청년의 권리라고 말할 수 있는 시대는 예전에 지나갔다. 스무 살의 아이러니는 미래가 봉쇄된 현재로 그들 앞에 나타나 있다. 다시 묻자. 어떻게 해야 이런 상황을 벗어날 수 있을까? “꼬옥 끌어안고 조금만 견뎌랴 그리 했지요” (「꽃이 피면 슬퍼지는 얘기」)라고 말하면 삶의 지독한 아이러니는 해결될 수 있는 것일까?
2. 별 캐러 가는 아이의 서정
아이러니스트는 무언가를 직접적으로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는 에둘러서 사물의 본질 속으로 들어가려고 한다. 겉으로는 무심한 표정을 짓고 있어도, 속으로는 온갖 상상의 나래를 펴는 존재가 아이러니스트이다. 그리하여 아이러니스트는 절망 속에서 희망을 본다. 절망이라는 말이 발화되는 순간, 거기에는 이미 희망이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요컨대 “살기 좋은 우리 나라”라는 시구에는 살기 좋은 나라를 향한 아이러니스트의 절박한 희망이 담겨 있다. 아이러니가 절망이 아니라 희망과 연관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새가 없는 숲에서 아이러니스트는 새로 가득 찬 숲을 소망한다.
오르막도 내리막도 앞에서만 부는 바람
나무는 밀려도 제자리에 있고
나는 나아가야만 했다
돌계단 턱을 딛고 있는 오전의 햇살
희고 꽝꽝한 재를 가리키며 떨어졌다
한 덩어리 바람으로도 날개 없는 새
멈춤의 두께는 먹구름처럼 짙어졌다
발자국 깊은 소리로 묻혀갈수록
눈발이 나무 비늘 되어 바람의 바닥으로 주저앉을수록
숨 막고 붙잡히는 팽팽한 접전
불현듯 예외 없이 가벼울 수 있다는 것
미끌린 폭 빙산 담장 무너뜨리며
떨어진 흙무더기 아래 절벽
기어오르는 네 발 짐승 되어간다
짐승은 안다
꼭대기엔 아무것도 없다는 것
그래서 꼭대기로 향하는 것
허공을 두른 막바지 산봉우리
눈을 잃고 내가 없는 몸을 던진다
설원 틈바구니마다 눈을 뜨는 낮별들
새가 될 수 없는 내가 단 한번 새가 되기 위해
맨 아래 땅을 딛는 순간 지고 내려온 눈발 한 짐
겨울 산은 나를 놓아주고 또 붙잡는다
- 「겨울산」전문
오르막길에서도, 내리막길에서도 바람은 세차게 분다. 오르는 길을 막는 바람과, 그 길을 올라가야 하는 존재의 “숨 막고 붙잡히는 팽팽한 접전”이 황량한 겨울 산에서 벌어진다. 그는 왜 산 위로 올라가려고 하는 것일까? 정상에 대한 욕망일까? 만약 그렇다면 돈, 돈, 돈을 외치며 자본의 정상에 서려는 이들과 무엇이 다른가? 시인은 “불현듯 예외 없이 가벼울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 산에 오르고 있음을 강조한다. 정상에 오를수록 가벼워지는 몸의 역설은 사실 정신의 무게와 긴밀하게 결부되어 있다. 정신의 무게라고 했지만, 정신에 무게가 있을 리는 없다. 정신은 한없이 가볍다(가벼워야 한다). 정신이 무겁다는 건 무언가를 향한 욕망이 그만큼 크다는 것을 의미한다. 정신에 무게가 있다면, 그것은 욕망의 무게와 다르지 않다. 욕망의 무게가 정신을 좀먹어 들어오니 몸은 한없이 무거워진다. 정신은 이미 몸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인은 위 시에서 정신의 모험을 감행한다. 그것이 하필 겨울 산이어야 하는 까닭은, 정신은 곧 몸이라는 시인의 생각에서 연유한다. 요컨대 시인은 정신=몸은 극한적 상황에 배치함으로써 욕망으로부터 한없이 가벼워지는 새로운 정신-몸을 상상한다. 새로운 몸은 그러므로 욕망의 외부에서 뻗어 나온다. 근대주체-인간의 인식체계에 갇혀 있다면 새로운 몸은 결코 만들어질 수 없다. 짐승-되기의 시적 여정은 바로 이 지점에서 김명이 시의 세계로 들어온다. “떨어진 흙무더기 아래 절벽/기어오르는 네 발 짐승”이 됨으로써 시인은 “눈을 잃고 내가 없는 몸을” 산봉우리 아래로 던질 수 있는 힘을 얻는다. 눈을 잃었으니 당연히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것이다. 주목할 점은 “꼭대기엔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시인이 이미 알고 있다는 사실이다. 인간의 눈을 잃은 대가로 시인은 “새가 될 수 없는 내가 단 한 번 새가 되”는 순간에 직면한다. 인간의 눈을 지니고 있었다면 산봉우리 아래로 몸을 내던지지 못했을 것이다. “겨울 산은 나를 놓아주고 또 붙잡는다”는 이 시의 결구는 정확히 이 맥락에 걸려 있거니와, 시인은 목숨을 건 도약을 실천함으로써 새로운 몸으로 나아가는 길을 스스로 열어젖힌 셈이다.
목숨을 건 도약은 새로운 생명을 잉태하기 위한 상상 속의 도약을 의미한다. 상상의 주체는 어둠 속에서 제 눈을 잃고 낭떠러지 아래고 기꺼이 도약한다. 밧줄을 매지 않고 도약하는 일이라는 점에서 그것은「유리 지구」에 나타나는 “밧줄 매지 않고 번지점프하는” 정황과 유사해 보인다. 하지만 목숨을 건 도약과 밧줄이 없는 번지점프는 인간의 눈을 간직한 채 낭떠러지 아래로 떨어지는 일이기에, 그것을 감행하는 존재는 거대한 공포감에 휩싸여버릴 수밖에 없다. 목숨을 건 도약이 인간의 눈을 잃은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행위라는 점에 새삼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인간의 눈을 잃었다는 건 추락에 대한 공포감에 더 이상 빠지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뜻한다. 곧 목숨을 건 도약이 이루어지는 순간 도약의 주체는 엄청난 인식의 확장을 경험하게 된다. 김명이는 이러한 인식의 확장을「겨울 산」에서 보여주고 있는 바, 그것을 돌려 말하면 그녀가 자신의 고통과 맞설 수 있는 힘을 비로소 지니게 되었다는 의미로 해석해도 좋을 것이다.
하지만 겨울 산에서 펼쳐내는 시인의 서정에는 채 지워지지 않는 슬픔이 어려 있다. 겨울 산에서 불어오는 바람과 정신적으로 맞서려는 시도 자체가 시적 주체에게는 엄청난 압박감으로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겨울 산에서 내려온 시인은 “폴짝 등에 올라/하늘에 박힌 별 캐러 가자고/품속 끌어당기는 아이”와 마주하고 있다. 별을 캐러 간다는 낭만적 서정의 이면에는 “신설된 부실 팀의 챌린저호”에 탑승할 지도 모른다는 생활인으로서의 불안감이 깊이 스며들어 있다. 겨울 산의 서정과는 이질적인 일상의 서정은 정신적인 능력을 강조하는 아이러니스트의 한계를 분명히 보여준다. 이러한 한계를 아이러니스트의 정직함이라고 표현해도 상황은 마찬가지다. 아이는 별을 캐러 가고 싶어하고, 엄마는 아이의 소망을 들어 주고 싶어 한다. 하늘로 소풍을 가서 배낭 가득 별을 따오고 싶은 낭만적 서정을 아이와 더불어 펼치고 싶은 게 어미의 마음이다. 하지만 아이러니스트는 그것이 상상 속에서만 가능하다는 걸 알고 있다. 아이의 시선에 갇힐 수 없는 아이러니스트는 겉으로는 낭만적 서정을 이야기해도, 속으로는 그것의 불가능성을 헤아리고 있다. 별을 캐러 가자는 아이와의 약속을 지킬 수 없으면서도 웃으면서 약속을 해야 하는 자의 운명적 비극이라고 해야 할까. 아이러니를 시의 기법으로 선택하는 순간 김명이는 이러한 운명에 자동적으로 빠져버리게 된 셈이다.
김명이 시의 딜레마는 바로 여기서 비롯된다. 한쪽에는 푸른 유리 빛으로 감싸인 무서운 건물(「무서운 건물」)과 맞서고 있는 시적 주체가 있고, 다른 한쪽에는 별을 따러 가자며 시간을 훌쩍 뛰어 넘으려는(「어느 순간 시간은 훌쩍 뛰어넘었으면 해」) 시적 주체가 있다. 세상에 대한 끝없는 두려움과 그 두려움 너머에서 펼쳐질 새로운 희망 사이에서 김명이 시의 주체는 뿌리를 내리지 못한 채 한없이 흔들리고 있다. 마른 꽃이 “잎을 피우고 꽃대를 피우는 상상”(「꽃」)에 빠져 즐거운 시적 주체가 있는가 하면, 젖은 날개로 고층 난간을 뛰어내린 그림자 소녀(「비, 시멘트」)의 비극을 들먹이며 오열하는 시적 주체가 있다. 그 사이에서 시인은 겨울 산에 올라 짐승-되기의 정신적 도약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슬픔을 끓이는 도가니”(「무기수」)에 무기수로 갇힌 자의 비애를 드러내기도 한다. 만나는 지점은 없이 양 갈래로 끊임없이 뻗어가는 이러한 딜레마 앞에서 시인은 과연 어떤 시적 행보를 취하고 있을까?
3. 저린 몸으로 부르는 진혼곡鎭魂曲
표제작인「엄마가 아팠다」에서 시인은 아픈 엄마를 시의 세계로 불러내고 있다. 여든 살의 어미는 급병이 나서 식음을 거부한 채 앓고 있다. 며칠째 병상을 붙들고 누워 있는 어미를 보며 시인은 “앞마당 오래된 나무”를 생각한다. 그 나무를 베자마자 어미가 앓아누웠기 때문이다. 나무의 동티일까. 생나무를 잘랐으니 생사람인들 제대로 살아갈 수 있을까 싶기도 하다. 아픈 엄마를 위해 딸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불쑥 돌아가신 외할머니 보았다”고 시인은 적고 있다. 죽은 외할머니가 나타나면서 이 시의 주체는 설화적 세계로 들어간다. 일상 세계라면 일어날 수 없는 일이 설화적 세계에서는 충분히 벌어질 수 있다. 죽은 외할머니가 있고, 링거액에서 떨어지는 아버지의 목소리가 있다. 어미를 향해 “약도 먹고 그래야 낫지”라고 낮은 목소리로 읊조리는 딸도 아픈 어미 곁에 있다. 병을 앓는 엄마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생명의 관계망이 형성되면서 나무를 베어버린 동티로 병이 난 어미의 몸은 시나브로 치유하기 시작한다.
딸이 내민 귤 한 조각을 아기처럼 겨우 빨아먹는 어미를 보며 시인은 “이,제,살,았,네”라고 또박또박 말하고 있다. 함부로 나무를 베면 엄마가 아프다. 엄마가 아프면 죽은 외할머니도 아프고, 아버지도 딸도 아프다. 한 존재의 아픔이 다른 존재의 아픔으로 이어지는 생명의 그물망은 타자의 아픔이 곧 나의 아픔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에둘러 입증한다. 한 맺혀 죽은 영혼을 온몸으로 받아내는 무당이 되어 시인은 아픈 엄마의 몸살을 온몸으로 받아낸다. 헤아릴 수 없는 일에 부대끼며 살아 왔을 어미의 몸은 이제 “금이 간 유리의 시간”(「친구여 종은 크게 울린다」)이 되어버렸다. 약간의 충격만으로도 쉬이 깨질 수 있는 몸이 나무의 동티까지 만났으니 당연히 생사를 넘나들 수밖에 없다. 어미의 몸이 어미의 몸으로 한정되지 않는 이유는 여기서 비롯된다. 어미가 아프면 죽은 외할머니도 아프다. 외할머니와 어미의 몸은 하나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어미가 아프면 딸의 몸 또한 아플 수밖에 없다. 그리하여 약해질 대로 약해진 어미의 몸을 대신하여 딸이 그 아픔을 온몸으로 받아낸다. 이것이 생명의 기억이다.
저린 몸으로 일상과 부대끼며 형성된 유리의 시간은 이렇게 변함없이 이어지는 생명의 기억을 통해 하나로 봉합된다.「시선」이라는 시를 참조한다면, 그것은 “그들만의 신호”로 이루어지는 원초적 세계와 다르지 않다. 생명의 시간은 그들이 남긴 수많은 흔적들이 모여 이루어진다. “폐허로 남은 젖무덤”이 내복 사이로 흘러나온 “저 여인에게도 푸르고 여린 봄날”(「여인」)이 있었듯이, 생명이 있는 모든 존재들은 저마다의 푸른 봄날을 저마다의 방식으로 살아냈다. 그것이 나와 다르면서도 나와 “닮은 그 여자”를 거부할 수 없는 이유이다. 누군가가 죽으면 누군가는 태어난다. 그러므로 죽고 사는 게 “뭔 의미가 있다냐”(「공원 빗돌 묻다-마을의 발달 그 후」)라고 나직하게 말하는 아버지의 모습은 이미 누군가를 통해 실현된 모습이었다. 돌려 말하면 누군가의 미래 속에서 아버지의 모습은 다시 한 번 실현될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을 것이다.
밑동만 남은 나무
의자가 되어
횟가루로 낙인된 분류번호 입었다
발자국 소리를 기다리는 걸까
많은 사람 스쳐갔으리
다가가 앉아본다
한때는 공원의 바람을 쥐락펴락 했을 터
뿌리를 엉덩이 속으로
밀어 올리며
사라진 가지의 번지를 찾아 달라 보채는 듯
나이테에 새겨진 하트무늬 잔해
맴돌고 있는 붉은점모시나비
나무의 기억을 오므렸다 펼쳤다
매정한 사람아 여태 돌아오고 있는가
나 일어나자
나무의자는 쪼가리 해시계를 붙들고, 저만치
목발을 짚고 와
손바닥으로 쓸고 가는 작은 등
사라진 가지의 눈 어둠을 밀고
집으로 가는 길 끄덕이는 둥근 의자
-「다 저녁 때 의자」전문
밑동만 남은 나무가 있다. 많은 생명이 스쳐갔을 그 나무 의자에 시인이 다가가 앉아본다. 한때는 공원의 바람을 쥐락펴락 한 생명체였을 이 나무는 이제 밑동만 남아 그곳에 앉으려하는 이들을 기껍게 받아들인다. 나이테에 새겨진 기억들을 뒤로 한 채 나무는 “다 저녁 때 의자”가 되어 자기에게 주어진 삶을 여전히 살아간다. 오래된 기억에 새로운 기억이 덧보태진다. 수많은 잎을 드리웠던 화려한 시절은 지나갔지만, 그래서 숱하게 몰려들던 생명들도 발길을 끊은 지 오래지만, 그래도 나무는 나무일 수밖에 없는 삶을 살아가야 한다. 그것을 자연自然이라고 말해도 상관없다. 집으로 가는 길에 시인은 나무의 이러한 모습을 목격한다. 집에서 나왔으니 집으로 돌아가는 건 당연하다. 집으로 가는 길에 잠시 앉은 밑동만 남은 나무 앞에서 시인은 집에서 집으로 영원히 순환되는 시간의 흐름을 비로소 이해한다. 개인적으로 보면 헤아릴 수 없이 금이 간 유리의 시간이겠지만, 자연-시간의 맥락에서 보면 그 금조차도 하나의 기억으로 화해버리는 시간의 흐름에 시인은 주목하고 있는 것이다.
스무 살의 아이러니에 질려 핏발 선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던 시인의 시선은 이렇게 저린 몸으로 “금이 간 유리의 시간”을 끌어안는 천 개의 눈으로 변주된다. “집으로 가는 길 끄덕이는 둥근 의자”의 이미지는 이런 점에서, 엄청난 산고를 겪으면서도 목청껏 우는 걸 포기하지 않는( 「안녕」)저 동백나무의 이미지를 그대로 빼어 닮았다. 세상은 아마도 변하기 힘들 것이다. 아픈 사람은 여전히 아플 것이고, 슬픈 사람은 여전히 슬플 것이다. 누군가는 죽고, 또 누군가는 태어나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러면 어떤가? 그게 자연이라면, 그리고 그 자연의 기억이 생명의 기억으로 화하여 다 저녁때의 밑동만 남은 의자로 남는 것이라면, 기꺼이 그 의자에 앉아 살아온 날을 기억하거나, 살아갈 날을 예감해 보는 것도 한번쯤은 거쳐야 할 삶의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김명이의 시는 바로 밑동만 남은 나무의자의 이러한 삶에 시안을 집중한다. 스무 살의 아이러니를 경유하여 그녀가 이른 시의 세계는 사실 무한한 가능성으로 열려 있다. 시인으로서 그녀는 콩나물시루 속에서 더욱더 많은 멍-흔적을 몸에 새기며 살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연약한 다리로 자신의 삶을 지탱하며 ‘무서운’ 세상을 향해 목청껏 소리치는 그녀가 보인다. 소리를 칠수록 그것은 멍이 되어 가슴 속 깊이 생채기로 남게 될 것이다. 시인이 그 일을 모를 리 없다. 알면서도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라고 하면 어떨까? 김명이는 벗어날 수 없는 시(인)의 운명 속으로 기꺼이 들어가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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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표사의 글 ◆
김명이의 시들이 탄생하는 곳은 어디인가? 당연하게도 우리는 먼저 우리 삶의 제목들을 지목해야 할 것 같다. 시를 살아내는 삶과 그 삶을 받아내는 언어의 지형도 말이다. 그러나 김명이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지형도의 모습엔 그것을 온전히 수락하기에도, 반대로 그것은 완강히 거부하기에도 마땅찮은 어떤 심연이 존재한다. 혹시 시인은 자신의 시들이 바라보는 곳을 슬그머니 숨겨두는 게 아닐까? 아무래도 김명이 시의 미학적 특질은 이러한 ‘숨김’에서 오는 듯하다.
시인은 세속 도시를 견디는 괴로움을 “인인이라 부르는 비굴”이라고 말한다. “이름의 그늘”이나 “사월의 그늘”은 이를 테면 시인의 시인 자신고의 이름과 존재를 지워나가는 곳인데 이러한 숨김과 지움의 열망은 “화염 끓고 난 숲의 허기와 공중에 녹아버린 새의 음성”으로 구체화된다. “허기”와 “공중에 녹아버린 새의 음성”에 김명이 시의 화자들은 기거하고 있다고 말해야 한다. 자신을 숨긴 채로, 또한 자신을 지운 채로.
숨김과 지움을 향하는 김명이의 시는 “링 속에 생긴 허공”을 응시한다. 시인이 집중하고 있는 대상 자체의 공백과 여백은 시인의 내면세계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시인은 “태초로 가는/앙상한 말”로 숨으려고 한다. 사라지려고 한다. “잘 작아지는 결말” 말이다. 언어가 부화된다면 주제 또한 사라진다는 것을 우리의 시인은 말하고 있다. 이러한 내면 풍경을 우리는 슬픔이라고만 말할 수 없지 않은가. 말하면서 동시에 숨기고 지우는 것이 시의 숙명이고 우리 존재의 운명이라는 것을 우리의 시인은 잘 알고 있지 않은가.
- 박진성 시인
시의 아름다움은 만산홍엽의 단풍과도 같으며, 이 아름다움의 중독성은 아편이나 마약보다도 천배나 만배쯤의 더 심각한 중독성으로 나타나게 된다. 시의 아름다움은 황홀함이며, 이 황홀함은 몰아일체의 황홀함이다. 김명이 시인의 첫 시집『엄마가 아팠다』는 자연과 우주와 인간과 그 모든 동식물들이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만산홍엽의 단풍과도 같은 시집이라고 할 수가 있다 “엄마가 아팠다”는 삼천리 금수강산의 단풍이며, 우리는 영원히 그 아름다움의 중독자(찬양자)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 반경환『애지』주산, 철학예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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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명이 시인∥
∙ 전북 오수에서 태어났고,
∙ 한남대학교 사회문화대학원 문예창작학과를 졸업(석사)했으며,
∙ 2010년『호서문학』과『문학마을』로 등단했다.
∙ ∙ ∙
∙『엄마가 아팠다』는 김명이 시인의 첫 번째 시집이며, 이 세상의 모든 어머니들을 위한 ‘진혼가’라고 할 수가 있다. 알바천국의 스무 살 처녀에서부터 밧줄매지 않고 번지점프해야 하는 유리 지구까지, 콩나물시루 속의 어린 소녀에서부터 며칠째 병상에 누워 있는 팔순의 엄마까지, 이 세상에는 수많은 엄마들의 삶의 애환과 죽음이 있는 것이다.
엄마가 아팠다. 이 아픔은 모든 존재의 집인 엄마의 아픔이며, 이 아픔은 우주적인 충격의 크기로 우리들의 마음을 울리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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