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11월18일(토)맑음
사람 안에 있는 진심을 만날 때, 그 때가 반짝이는 순간이다. -칼 로저스.
칼 로저스의 <사람-중심 상담>을 읽다. 깊이 생각해본다.
나는 사람들에게 불교를 가르친다는 명목으로 사람들을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바꾸려고 하고 있지는 않은가?
나는 불교공부모임을 만들어 내 자신의 삶의 의미를 찾으려고 하고 있는가, 아니면 그들이 의미 있는 삶을 사는데 작은 도움이라도 주기를 바라는가?
내가 이끌어가는 불교공부모임은 나의 환상을 만족시키기 위함인가, 아니면 사람들이 자기가 원하는 것을 스스로의 힘으로 이루게 하기 위함인가?
나는 과연 사람들을 사랑하는가? 내가 그들과 함께하는 것이 과연 그들에게 도움이 되는가? 그들은 나와 함께하는 것을 기쁨으로 생각하는가, 아니면 부담으로 느끼는가?
“한 사람의 깊은 진실이 다른 사람의 깊은 진실과 만나는 일은 그리 흔치 않은 순간이죠. 그런 순간에 마르틴 부버(Martin Buber)가 말한 ‘나-너(I-thou relationship)관계’가 형성되는 것이죠. 그런데 그러한 상호간의 깊은 만남은 자주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가끔씩이나마 그런 만남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우리는 인간으로서 사는 것이 아닌 것이죠.”
“사람들은 단지 그 사람이 될 수 있도록 허용해주기만 하면 석양만큼이나 아름답습니다. 우리는 석양을 자신의 뜻대로 지배하여 조작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석양이 펼쳐지는 광경을 경탄하며 바라볼 뿐입니다. 사람은 인정받고 존중받을 때 꽃처럼 피어납니다.” -칼 로저스
코웨이에서 나온 기사가 렌탈 공기청정기를 설치하다. 대구에서 아림보살 오다. 초하루 독경법회하다. 오후에 보배여행사 사장님 오셔서 인도순례에 대해 설명하다. 인도여행은 개고생이나 기쁜 마음으로 느긋하게 즐기라는 말씀. 선학산 아래 상대동525-7 단독주택을 보고 오다.
2017년11월19일(일)맑음
나는 사람을 가르치기보다는 사람에게서 배우려는 자세가 필요할 것 같다. 나의 몸과 마음 전체를 열어서 한 사람 한 사람을 만나는 것이 좋지 않을까?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한 사람 한 사람을 진실로 만나는 것이지 않을까? ‘진실로 만난다.’는 것은 서로 무엇을 어떻게 하려는 의도 없이, 숨은 의도 없이, 눈앞에 있는 그대로의 상대를 온전히 긍정하면서,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사랑과 따뜻한 주의를 기울이는 일이다. 그것은 조건이 없고 제약이 없어 열려있으며 자유롭다. 그럼 만남은 연꽃 만나러 가는 바람과 같이 설레며, 연꽃 만나고 가는 바람과 같이 걸림이 없을 것이다. 그러는 사이에 연꽃은 피고 질 것이고, 바람이 지나가는 곳에서는 어디서나 꽃이 피어나리라. 무상한 세상에서 진실된 만남을 갖는 것은 하나의 축복이다.
2017년11월20일(월)맑음
호스피스 병동에 위문가다. 상대동 525-7번지 주택 매매계약하다. 아미화, 문인보살이 입회하다. 선원으로 돌아와 점심 공양하다. 가을이 막바지로 접어들어 짙어진 갈색 맛이 난다. 저녁 강의하다. <날마다 하는 기도문> 수정판 나오다.
2017년11월21일(화)맑음
요가하고 점심 공양하다. 대 청소하고 커피 마시다. 저녁에 위빠사나 명상하다. 우리는 깨달은 분과 동일한 재료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무엇인가? 나마nama와 루빠rupa, 몸과 마음이다. 그리고 현재순간이다. 성자와 중생은 몸과 마음, 현재순간이란 같은 재료를 사용하고 살아간다. 그러나 지혜의 깊고 엷음으로 말미암아 재료를 사용하는데서 차이가 벌어진다. 중생은 재료를 유익하게 사용하지 못하고 오히려 손상시키고 더럽힌다. 그래서 무익하거나 유해한 결과를 만들어낸다. 반면에 성자는 재료를 유익하게 사용하여 자신과 세상을 이익 되게 하는 아름다운 결과를 만들어낸다. 우리가 이미 가지고 있고 의도대로 사용할 수 있는 것은 몸과 마음, 현재순간 뿐이다.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
2017년11월22일(수)흐림
아침에 유투브에서 미얀마 스님의 독경을 듣다. 가슴을 울리는 깊은 감동에 젖는다. 레디 사야도와 밍군 사야도의 일생을 알아보다. 미얀마가 영국의 식민지가 되었을 때 스님들에게서 미얀마를 구하는 일은 불교를 중흥하는 길 밖에 없다는 정견이 일어났다. 그리하여 승가의 전통적인 교육을 바르게 전승하는 바탕 위에 현대적인 해석을 가미하였고, 교리와 수행을 병행하여 수행하면서 승가를 반석 위에 올려놓았다. 선각자 스님들은 광범위한 재가자 조직이 탄생하도록 인도했으며 승가는 국민적 지지를 얻었다. 그래서 미얀마의 문화적 정신적 정체성을 불교 승가가 담당하였다. 불교가 제대로 전승되는 한 미얀마 정신은 살아있고 미얀마는 영원할 것이라 믿었다. 과연 그리되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떠했는가? 나라가 일제에 의해 침탈될 당시 한국불교는 거의 전멸 상태에 있었다. 교학과 수행이 미미하게 전해져왔으며 계율은 거의 지켜지지 않았다. 교학이란 것도 한문경전의 해석이 전부라 체계적인 불교를 이해하기에는 터무니없이 부족하였다. 수행이란 것도 중국에서 전해진 참선이 전부인데다 그것조차도 전승이 희미해졌다. 계율은 아예 언급할 정도도 아니라 수계하는 계단자체가 불완전했다. 우리에게는 선각자 스님들이 없었는가? 일부 몇 스님이 있었다. 그러나 미얀마의 큰 스승처럼 교학과 수행을 다 갖추고 국민적 지지를 받은 분이 하나도 없었다. 용성스님이나 만해스님, 석전스님과 같은 분들이 있어 세계불교의 동향을 조금 눈치 채긴 했지만 몸소 해외로 나가 남방불교나 티베트 불교를 접하지 못했다. 그들이 사용했던 언어의 장벽을 넘을 수 없었다. 그래서 사유의 폭도 한자문화권을 넘지 못했다. 한국불교는 스스로의 힘으로 승가를 재건하지 못했고, 불교의 전통을 중흥하지도 못했다. 오히려 일본불교의 국가주의적, 세속적인 대처불교에 물들고 말았다. 제일 아쉬운 점은 율장에 의거한 여법한 계단을 확립하지 못한 것이었다. 이것은 지금까지도 해결되지 않고 있다. 한국불교는 계율이 없다. 있다고 주장한다 해도 유명무실하다. 그러니 한국에서 불교를 중흥하자, 불교를 정화하자, 승가를 청정하게 하자고 주장해도 모두 사상누각이다. 왜냐? 계율이 지켜지지 않으니까. 국민적 지지와 감시아래 승가가 율장대로 재건되고 운영되지 않는 한 한국불교는 계정혜 삼학에서 다리가 부러진 절름발이 불교를 면치 못할 것이다. 나는 한국에서 태어나 스님이 되었으니 한국불교의 흐름에 묻혀가는 상황에 처해있다. 그러나 세계불교라는 넓은 도량에 참여하여 보편적인 불교를 지향하며 이 한 생을 살다갈 뿐이다. 한 방울의 물이 마르지 않으려면 바다에 던져라. 저녁공부에 디파 마(Dipa Ma)의 삶과 깨달음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강의를 시작하다.
2017년11월23일(목)맑음
찬란한 날. 아침 길을 걷는다. 볼 때 볼. 들을 때 들릴 뿐. 걸을 때 걸음 뿐. 이것 말고 더 무엇이 있으랴. 삶이 이렇게 간단한 걸, 아직 드러나지 않은 심심미묘한 것이 어디엔가 숨어서 발견되길 기다리고 있다는 말은 환타지 소설가들의 환상이지 않을까? 사는 것이 무료하고 심심하니까 재미있는 것을 찾아서 지어내는 것이다. 마음의 장난이다. 마음은 같이 놀아줄 대상이 없으면, 없는 것도 만들어내는 재주가 있다. 삶에 특별한 것도 없고, 특별히 할 것도 없다. 그냥 할 일이 없어졌다. 머리는 고요하고 가슴은 시원하다. 내장을 다 빼낸 듯이 무언가 속에 웅크리고 엉겨 붙은 것이 없다. 이것을 속이 텅 비었다고 표현하는지, 몸이 텅 비었다고 할지? 몸과 마음에 무언가가 가득차서 나를 채우고 있다고 느끼게 하는 것이 바로 ‘존재의 짐’이다. 몸과 마음은 내가 지고 있는 짐이요, 괴로움의 덩어리이다. 뭐하려고 그걸 붙들고 이고 지고 가려는가? 내려놓으면 놓여나서 훨훨 자유로운 텐데. 내려놓는다고 포기하고 방치한다는 말이 아니다. 구름이 자신을 내려놓으니 하늘 가운데 저렇듯 가벼이 떠있지 않은가? 물이 자신을 내려놓고 흐름을 따르니 저렇듯 유연하게 흘러가는 게 아닌가? 모든 것을 내려놓으면 모든 게 제 자리를 찾아 제 자리에서 제대로 굴러간다. 그러니 내려놓으라. 마음이 쉬어져 할 일이 없어졌다. 전에는 항상 무언가 할 일이 앞에 있었고, 그래야 된다고 생각해왔고, 그것이 사는 것이라고 여겼다. 누구나 그렇게 살고 있으니 그걸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할 일이 없는데 할 일이 있는 것처럼 바쁘게 돌아다닌다. 그러지 않고는 삶이 무료해서 버티지 못 하리라. 현재순간은 어디로 나돌아 다니지 않는다. 현재는 항상 나에게 주어져 있다. 내가 가만히 멈추기만 하면 내 앞에 나타나 언제나 함께 호흡한다. 내가 고요해지면 현재가 전체가 된다. 시간이 공간화 된다. 현재순간이 현존재로 드러난다. 이것은 명료함-알아차림-텅 빔! 시간도 공간도 기억할 것도 없다. 그냥 모든 것이 사라져도 좋다. 어디에 의지하거나 붙잡을 것 하나 없어도 그냥 이대로 좋다. 허전한 것도 없고 부족한 것도 없다. 가을색이 풍요롭다. 떨어진 낙엽은 어디로 갈까 걱정하지 않는다. 잎은 나무에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꼭 붙잡지 않는다. 잎은 봄에 피어났다 여름동안 제 할 일 다 하고 때가 되니 떨어질 뿐이다. 별다른 걱정이나 불안이 없다. 낙엽은 어디에서 왔고 어디로 갈까, 어디 가서 다시 태어날까 이런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자연이 낙엽을 부려먹고는 쓸모없어지니 버려버린 것일까? 그렇지 않다. 낙엽은 일회용 소모품이 아니다. 그것은 우주의 공유재산이다. 이번 가을에는 낙엽으로 살다가 겨울에는 눈에 묻혀 얼었다 녹았다 하면서 해체되어 먼지로 돌아가리라. 봄바람에 날려 흩어지면 땅이 되거나 물로 흘러들거나 바람 따라 갈 것이다. 낙엽의 잔해는 언제나 지구에 머무를 것이기에 지구와 한 몸이다. 더구나 지구는 우주라는 나무에 달린 한 잎이지 않은가? 지구가 이미 한 잎이라면 지구를 밟고 서있는 ‘나’란 무엇인가? 마지막 잎 새가 떨어져도 괜찮다. 서울에는 눈이 내린다는 전화가 온다. 첫눈 내리는 길을 누구와 함께 걸을까?
2017년11월24일(금)맑음
낙엽 Les feuilles mortes – Remy de Gourmont 구르몽
시몬, 나뭇잎 져버린 숲으로 가자
낙엽은 이끼와 돌과 오솔길을 덮고 있다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소리가
낙엽 빛깔은 정답고 모양은 쓸쓸하다
낙엽은 버림받고 땅 위에 흩어져 있다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소리가
해질 무렵 낙엽 모양은 쓸쓸하다
바람에 흩어지며 낙엽은 상냥히 외친다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소리가
발로 밟으면 낙엽은 영혼처럼 운다
낙엽은 날개 소리와 여자의 옷자락 소리를 낸다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소리가
가까이 오라, 우리도 언젠가는 낙엽이 되리니
가까이 오라, 벌써 밤이 되고 바람이 분다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소리가
본해스님 오다. 보살님 다섯 분이 와서 점심 공양 함께 하다. 선원으로 돌아와 커피를 마시며 환담을 나누다. 본해스님 음악 이야기 해주시다. 다음 만남을 약속하고 헤어지다.
밖으로 찾아다니면 꿈을 꾸고 내면으로 돌아오면 깨어난다. 나는 깨어있음. 깨어있되 깨어있는 자는 없다. 생명의 나무는 펼침과 거둠을 반복한다. 눈은 빛과 어둠을 보지만 저 자신을 보지 못한다. 생각은 부서진 빛의 조각들. 조각난 것은 전체의 진실을 알 수 없다. 마음은 진리의 들판을 헤매면서 공연히 짖어대는 배고픈 들개. 몸은 물에 젖은 짚신처럼 중력의 혼에 접신되어 땅을 기어 다닌다. 자신을 무엇이라 여기는 즉시 그것밖에는 아닌 것이 되고 만다. 애초부터 무한하며 무제약이며 무장애였는데 그걸 잊고 살다니 애석하다. 나는 마음도 아니고 몸도 아니다. 몸과 마음은 물방울. 하나의 물방울이 마르지 않으려면 바다에 던져라. 물방울이 바다 가운데 있음을 알면 물방울이면서 동시에 바다로 살아간다. 만상이 우주적인 춤을 추지만 춤추는 자는 없다. 강 가운데 모래섬에 서서 어제에서 내일로 끊임없이 흘러가는 강물을 바라보는 백로의 고고함이 절대현재. 나와 남도 없는 알아차림. 가을바람에 잎이 떨린다. 우주는 하나의 떨림. 호흡은 하나의 진동. 삶과 죽음은 하나의 들뜸. 한 밤중 한 잔의 물을 마시니 떨림과 진동과 들뜸이 쉬어버린다.
2017년11월25일(토)맑음
秋日陽光似飛箭, 추일양광사비전
不知可見不老面; 부지가견불로면
落霞柳洲下雙鴨, 낙하유주하쌍압
歸來點燈對自前. 귀래점등대자전
가을 햇볕 쏜살같이 지나가니
늙지 않는 얼굴 만나볼 수 있으랴,
낙조 드리운 버드내로 오리 한 쌍 내리는데
돌아와 불 밝히고 자신을 마주한다.
삶이란 잠시 머무는 것. 몸은 태어남과 죽음 사이에 놓인 다리. 다리를 건너가되 다리 위에 집을 짓지 말라. 삶에도 죽음에도 머물지 말라. 머물 곳을 정하지 않으니 어느 곳이든 쉬어갈만 하다. 바람에 떨어진 잎에겐 누운 자리가 그의 쉴 곳이요, 나그네 길 가다 멈추면 그 곳이 방랑을 끝내는 때이다. 수행자가 호흡을 멈추고 고요에 잠기면 그의 세계는 사라진다.
2017년11월26일(일)맑음
아침에 일찍 일어나 예불하고 대구 관오사로 가다. 11시에 등현스님, 경진스님, 학해스님, 혜등스님이 참석한 모임에서 불학원 문제는 내후년으로 미루기로 결정하다. 점심 공양하고 산회하다. 경진스님과 혜등스님과 대화를 나누다 늦어졌다. 진주 오는 버스표가 매진되어 스님들이 운전하여 선원까지 데려다 주다. 아파트 위로 반달이 걸려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