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사무엘상 2 :29-30
제목: 존중은 존중으로, 멸시는 경멸로
일시: 2019. 6. 30.
장소: 라이프찌히 한인교회
I. 오늘 주일 예배에 잔뜩 긴장했다. 39도까지 올라간다고 해서. 이 온도를 낮추기 위해 아침부터 열기 방어 작전을 세웠다. 오늘 예배를 싸우나 예배, 찜통예배, 가마솥예배라고 머릿속으로 이름까지 지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는 지체들이 예배를 드리기 위해 지극정성으로 모였다. 이런 아름다운 모습에 어떻게 배려를 할까라는 마음에 어떻게든지 오늘 말씀은 5분은 짧게 해야지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지만 그래도 빨리 마치는 것이 능사가 아니고 제대로 드려야지 하는 것이 나의 정리되지 않은 심리이다. 왜 이리 예배를 드리려고 하는가? 예배를 귀하게 여기기 때문이다.
II. 왜 예배를 그렇게 귀히 여기는가? 그래야 예배를 받으시는 하나님이 나를 귀하게 여기기 때문이다. 오늘 말씀을 보라.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하리라”(삼상2:30). 우리가 살고 있는 독일을 보면 각 도시들마다 젠트룸이 있다. 그 젠트룸에는 3가지 요소가 있는데 하나는 경제활동을 위한 시장, 둘째는 살다가 보면 서로 분쟁이 생기니 그것을 해결하기 위한 시청, 세째는 한주일 내내 살다가 회개할 꺼리들이 많으니 교회가 있다. 시와 더불어 교회도 함께 지어진다. 니콜라이교회도 Stadt Kirche로 1175년 시와 더불어 생겨났다. 일반적으로 젠트룸에서 교회보다 더 높게 건물을 지을 수 없다. 그래서 탑을 세운다. 그것이 그 도시의 랜드마크가 된다. 교회가 사회의 중심에 있다는 말은 예배중심의 사회이고 예배 중심의 사회라는 말은 하나님이 중심에 계시다는 말이다. 이 중심이 바로 무게중심이 된다. 만일 예배가 우리 삶의 중심에 오지 못하고 무게중심이 이동하게 된다면 우리 삶은 흔들린다. 예배를 삶의 중심에 놓을 때 삶의 질서가 잡히고 우리는 든든히 세워갈 수 있다. 하지만 예배가 흔들리면 삶이 모두 흔들리는 것이다. 예배에서 무너지는 사람은 삶이 무너지는 것이다.
예)엘리의 아들들은 홉니와 비느하스이다. 그들도 제사장들이었는데 “행실이 나빠 여호와를 알지 못하더라”(삼상2:12) 아니 어찌 하나님의 뜻을 가장 잘 알 수 있고 알아야만 하는 제사장들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가? 여호와를 알지 못했다는 의미는 “여호와의 제사를 멸시함”(삼상2:17)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행태를 보라. 하나님께 드릴 것을 자기들이 먼저 취했다. 찬물도 순서가 있는데 말이다. 제사장은 삶은 고기를 취하도록 되어 있는데 생고기를 달라고 하고 있다. 29절의 말씀을 보라. “너희는 어찌하여 내가 내 처소에서 명령한 내 제물과 예물을 밟으며 네 아들들을 나보다 더 중히 여겨 내 백성 이스라엘이 드리는 가장 좋은 것으로 너희들을 살지게 하느냐?”(삼상2:29). 또한 제사에 함께 하던 여인들과 동침을 한다. 아비 엘리제사장이 그들에게 애타는 마음으로 이렇게 말을 한다. “내 아들들아 그리하지 말라 내게 들리는 소문이 좋지 아니하니라”(삼상2:24). 그러나 그 아들들은 아비 엘리제사장의 말을 듣지 아니하였다. “이는 여호와께서 그들을 죽이기로 작정하셨음이더라”(삼상2:25). 결국 엘리가문은 어떻게 되는가? 두 아들들은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전사하게 된다. “하나님의 궤는 빼앗겼고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죽임을 당하였더라” (삼상4:11). 그리고 그 소식을 들은 엘리는 자기 의자에서 뒤로 넘어져 목이 부러져 죽게 된다. 그 날에 비느하스의 아내가 해산하였는데 그 모든 소식을 듣고 해산한 아들의 이름을 지었으니 “이가봇” 즉 “하나님의 영광이 이스라엘에게서 떠났다”는 의미의 이름을 짓는다.
홉니와 비느하스는 예배를 존중히 여기지 않았기에 하나님이 그들을 존중히 여기지 아니하였다. 존중은 존중으로 오며 멸시는 경멸로 온다. 아버님의 기도처소 월악산 자락에 깊은 계곡이 있다. 크고 작은 돌들이 많았는데 제게 조심하라는 말씀으로 “돌을 무시하면 그 돌이 나를 무시한다”고 말씀하셨다. 짧은 말씀이었지만 아주 감명깊게 들었고 그와 같은 버전으로 모든 것을 본다. 날씨를 무시하면 날씨가 나를 무시한다. 개를 무시하면 개가 나를 무시한다. 그것이 개무시이다. 생선의 가시를 무시하면 생선가시가 나를 무시한다. 아내를 무시하면 아내가 나를 무시한다. 하지만 아내를 왕비와 같이 존중하면 내가 왕과 같은 대접을 받을 것이다. 하나님은 어떠하신가? 하나님은 멸시하는 자는 경멸하시지만 당신을 존중히 여기는 자를 존중히 여기신다. 우리가 예배를 귀하게 여길 때 하나님이 우리를 귀하게 여기신다.
예배는 그토록 귀한 것이고 우리가 존중을 받을 수 있는 기회이기에 특권이다. 예배가 멸시하는 예배가 아니요 존중하는 예배가 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우리는 긴장해야 한다. 따라서 우리가 예배를 드리는 것은 꽤나 선심 쓰듯이 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하나님이 열납하시기를 바라고 사모해야 한다. 예배는 영원한 희생제물이자 대제사장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피값을 주고 주신 것이기에 특권이다. 그러기 때문에 예배는 귀하게 여겨져야 하는 것이다. 이런 예배는 우리의 의무가 아니요 우리의 특권이다. 이 값비싼 예배를 드릴 때 가장 값지고 귀하게 드려야 한다.
III. 예배의 종류가 많이 있다. 주일예배 수요예배 청년예배 새벽예배 돌예배 개업예배... 예배는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기에 소홀히 여겨지거나 멸시되어서는 안되고 가장 존중되고 최선의 것으로 드려야 한다. 그러면 나의 최선은 무엇인가? 내 자신이다. 따라서 하나님께 드리는 모든 예배는 근본적으로 헌신예배가 되어야 한다. 헌신이라는 말은 내 자신을 예물로 드리는 것이다. 내 자신이 가장 고귀한 예물이 되는 것이다. 드릴 수 있는 것이 과부의 두 렙돈이라도 괜찮다. 그것이 최선이라면. 한 아이의 물고기 두 마리 보리떡 다섯 개 소박한 점심이라도 괜찮다. 나는 나의 최선을 어떻게 표현하는가?
<주일>을 지키는 것을 주일 성수라고 한다. 그러나 주일성수를 “해야만 하기 때문에” 하는 것이 아니라, 귀히 여기기 때문에 드리는 예배가 되어야 한다. 그래서 예배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드리는” 희생과 감수하는 예배가 되어야 한다. 예배를 협상테이블에 올리지 말라. 날씨와 협상하지 말라. 날씨를 탓하지 않는 예배가 되어야 한다. 목사의 노파심 속에 날이 좋으면 날이 너무 좋아서 놀러가면 어쩌지? 날이 궂으면 날이 너무 궂어 태풍이 불면 어떻게 하지?라는 생각이 든다. 거리와 협상하지도 말라. 우리 교회에서 가장 멀리 사는 사람이 누구인가? 호프? 막데부르크? 캠니츠, 쯔비카우? 스케쥴과도 협상하지 말라. 여행계획을 예배와 겹치게 하지 말라. 손님이 오면 특별한 일이 생겨 예배를 타협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예배를 드리라. 협상을 하기 시작하면 더 많은 협상을 하고 Excuse를 생각하게 되고 연구하게 될 것이다.
<시간>을 잘 지키라. 예배시간에도 늦지 말고 잘 나와야 한다. 늦는 것도 습관이다. G20 세계정상들의 회합에서 푸틴 문재인대통령과 정상회담 시간에 2시간 늦게 왔다. 그것을 “외교 결레”라고 한다. 하나님께 결레를 범해서 되겠는가? 어느 교회는 예배를 12시 7분으로 드리는 곳도 있다고 한다. 하도 사람들이 적절히 늦으니까...
<드리는 예물>도 미리 준비하라. 좀 민망스러울 때는 기도할 때 헌금을 꺼내는 것인데 마침 동전이 굴러다닐 때이다. 이왕이면 빳빳한 것으로 드려라. 액면가는 같을 수 있어도 마음은 다른 것이다. 어떤 분들은 은행에서 바로 찾은 신권을 드린다고 한다. 혹은 어떤 분은 다리미로 펴서 드린다고 한다.
<찬양>도 최선의 것으로 하라. 왜?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로마한인교회에서는 찬양하는 사람들이 교회에서 찬양하기를 가장 두려워한다고 한다. 다들 성악을 해서 그렇다나? 그러나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는 사람을 보고 찬양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을 보고 찬양해야 한다.
<설교>도 그러하다. 하나님께서 먼저 설교를 들으신다. 그리고 “내가 언제 그런 말을 하라하든”이라고 하실지 모른다. 사모가 토요일이나 주일날에는 권목사 성질 안 건들려고 한다. 주일날 아침에는 이메일도 잘 안 본다. 혹시 신경 쓰이는 메일이 올까봐. 예배 전에는 말다툼도 하지 말라. 예배는 방해받지 말아야 한다. 가능하면 예배 전에는 교회식구들을 만나지 않는다고 한다. 신경 쓰는 말을 들을까봐.
<주일 복장>은 가장 좋은 옷으로 입으라. 독일에서 사람들은 음악회장에 갈 때 얼마나 멋있게 하고 오는지 모른다. 할머니들도 아가씨 같이 화사하게 할아버지들도 멋진 청년처럼 입고 온다. 주일날보다 더 화려하게 입는 것 같다. 우리는 sonntag kleidung을 입어야지 opera kleidung을 입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예배와 하나님을 존중히 여기는 우리 마음의 표현이다.
예)아버님의 회개 - 아버님은 오래동안 사역하시던 신학교를 나오시고 공식적인 은퇴전까지 선화예고 후문에 위치한 벧엘교회라는 곳에서 목회를 하셨다. 신학교를 나오시면서 받은 퇴직금으로 고향시골 촌가를 사서 기도처소를 마련했는데 이름을 벧엘관이라고 했다. 800평 정도의 땅과 시골집이 기도처로 쓰인 것이다. 사람들이 수련회도 하고 집회도 하고 종종 다른 곳에서도 소규모 모임을 갖겠다고 하니 속에 들어갈 물건들이 필요했다. 그래서 교회에 광고를 하기에 벧엘관에 필요한 헌물을 하도록 했다. 저나 아버님이니 스타일이 비슷해서 겸손한 표현 혹은 부담주지 않으려는 표현으로 집에서 쓰던 것이나 이곳에서 썼으면 좋겠다싶은 것을 가져오라고 했다. 다 가져왔다. 그런데 문제는 수개월씩 쓰다보면 다 쓰레기가 된다는 것이다. 가져온 것을 보니 거의 수명이 다 되어가는 것이다. 주는 사람은 이제 중고품 처분해서 좋고 자기는 새것으로 들여놓으면 되니까. 그리고 교회에는 무엇인가해서 좋고. 이후에 그 쓰레기를 치우느라고 고생을 많이 했다. 여기에 아버님의 깨달음이 있다. 교인들에게 주님께 가장 귀한 것을 드리라는 것을 가르치지 못했다는 것이다. 합리적인 생각이고 겸손한 표현이기는 했지만 주님께 가장 귀한 것을 드려야 한다는 것에는 실수를 했다. 선지자 학개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 전이 황무하였거늘 너희가 이 때에 판벽한 집에 거하는 것이 가하냐” 라고 질책이 한 것처럼 우리가 그러하지는 않는가? 하나님을 존중할 때 하나님은 우리를 존중하신다. 그러나 하나님을 멸시할 때 하나님도 우리를 경멸하신다. 유치해 보이고 작아 보인다고 무시하지 말고 삶의 작은 일에 주님을 존중해 보라. 하나님께서도 우리의 삶의 현장 속에서 우리를 존중해 주실 것이다.
IV. 6월 마지막 주일은 언제나 예배를 강조하고 있다. 이미 한국을 방문하는 지체도 있지만 7월이 되면 본격적으로 한국을 방문하고 타 지역으로 여행을 떠나기 때문이다. 어디를 가더라도 예배할 곳을 찾으라. 호텔부터 정하지 말고 예배할 교회부터 정하라. 이제 다른 도시로 이사할 분들도 있다. 예배할 교회를 소개시켜주는 것이 목회자의 기쁨이다. 또한 즐거운 것은 그 기간 동안 한국에서나 다른 지역에서 이곳을 방문하여 예배를 함께 하기도 한다. 귀한 일이다. 어디를 가든지 꼭 예배처소를 찾으라.
한 주간을 예배 속에서 승리하기를 바란다. 예배 속에서 승리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임재가 우리의 싸움의 기술이 되어 우리에게 승리를 준다는 것이다. 예배를 기억하고 예배를 가장 귀히 여기기를 바란다. 예배를 존중하는 자들은 하나님을 존중하는 사람들이며 하나님은 이러한 사람들을 존중하신다.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체험이 모든 교우들에게 넘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