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추억은 아름답고 소중한 자산 큰 딸이 어렸을 때 그린 그림
추억은 아름답고 소중하다. 그래서 기억에 남기고 싶은 자산이다. 빛바랜 상자 속에 숨겨뒀던, 남편과 가슴 떨리던 첫사랑의 고백을 주고받던 일기장과 애틋한 편지들. 어느 비오는 여름 날, 한가한 오후에 꺼내어서 읽기 시작했다. 살아온 세월이, 짧은 순간처럼 느껴지며 순수하고 투명하며 맑고 아름다웠다. 나에게도 처녀시절, 저리도 뜨거웠던 가슴 떨리는 추억들이 있었던가? 파노라마처럼 달콤하게 스치고 지나간다.
우리가 이 세상에 남아있지 않을 때를 생각하니 자식들에게도 들키지 않고, 영원히 간직하고 싶었다. 둘만의 소중한 조각들을 없애는 것이 아쉬웠지만(남편의 허락도 없이) 불에 태워 연기 속으로 날려 보냈다. 아무리 고령화 시대에 진입했다고 해도 정신 줄 놓기 전에 하나하나 정리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나에게는 옛 것이라고는 없다.
남편이 무엇이던 필요해서 찾으면 없다. 신기한 것은, 버리고 나면 꼭 필요한 일이 생긴다는 사실이다. 남편은 50년 이상 된 자기를 안 버리고 사는 게 신통방통하다고 한다. 나도 생각하면 불가사의하다. 50년 이상을 살아도 질리지도 않는다. 신혼 때 같지는 않지만 남편을 사랑 1순위 자리에 놓고 한결같은 마음으로 의지하며 행복하게 산다. 영원히 풀지 못할 미제 사건이다.
둘째 딸이 대학 다닐 때 그린 추상화
이번에 캐나다 사는 둘째 딸이 입국해서 그림 자료들을 찾았다. 정신이 혼미했는지 딸들의 자산인 추억까지 활활 태워버렸다. 태웠다고 하니 펄쩍 뛴다. 우리 딸들은 유난이 옛 것을 좋아한다. 허락도 없이 나의 편지와 함께 딸들의 소중한 시간과 순간들의 추억을 흔적없이 태워버렸다. 내가 생각해도 가슴이 철렁한 일이다. 딸들의 원망 소리를 들으니 어찌 공포영화를 보는 것처럼 무섭다.
딸들의 최애 보물 상자의 추억. 우리 집 다락 3단 서랍장과 창고에 내몰린 장롱 속에 간직한 그림에 대한 자료들과 학창시절의 편지들. 비닐하우스 안에는 둘째딸 그림이 곳곳에 보관됐다. 작품을 그리기 위해 아르바이트로 비싼 흑백 카메라를 사고, 방방곳곳을 돌아다니며 참 많은 작품들을 찍었다. 높은 곳에 올라 사진을 찍다가 떨어져 피를 흘려 가면서 찍은 사진들이다. 둘째딸의 추억이 가장 많이 우리 집 구석구석에 보관되어 있었다. 캐나다까지 가져 갈 수가 없어 20년 이상을 보관 중인 보물이었다.
학창시절에 연애편지 한번 안받아본 사람이 어디 있으며 판도라의 상자 하나쯤 간직하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을까? 이런 소중한 추억들은 보관해서 한번 씩 들추어 보는 것도 참 좋은데 말이다. 내가 아무리 엄마라고 해도 딸들의 추억이 켜켜이 쌓인 편지와 그림을 허락도 없이 태우다니. 딸들에게 많이 미안하고 후회가 되었다. 나의 경솔한 처사를 자책했다.
좀더 신중했더라면 좋았을 터인데 돌이킬 수 없는 일이 참 많은 걸 생각하게 하는 순간이었다. 그나마 큰 딸과 둘째 딸의 그림이 아직까지 남아, 어울림펜션 손님방에 걸려 있어서 다행이다. 아무튼 딸들아! 정말 미안하다. 그리고 사랑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