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찰과 경험, 서로 감응하는 자연의 존재들, 유강희의 동시집 「오리 발에 불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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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찰이라는 낱말은 볼 관(觀) 자와 살필 찰(察) 자로 이루어져 있다. 글자 그대로 ‘보고 살피는’ 일이 관찰이라고 해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유강희 시인의 동시는 대개 이와 같이 ‘보고 살피는’ 관찰에서 출발하고 있다.
시골의 경운기는
이상한 곤충 같다
앞머리는 삐쭉 나온 데다
손잡이는 더듬이처럼 길고
짐칸은 펑퍼짐하니
소리는 또 얼마나 요란한지
-「경운기」 부분
관찰하는 눈에는 사물이 새롭게 보인다. 경운기가 이상한 곤충처럼 보이는 것은 경운기를 눈여겨보고 잘 살폈기 때문이다.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거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어른의 눈으로 잘 보이지 않던 것들이 관찰하는 눈, 아이의 눈으로 보이기 시작한다. “경운기는 곡식을 가득 싣고/ 시골길도 잘 달리고/ 걸어가는 이웃 사람도/ 그냥 가다 태워 준다”. 이상하게 생긴 경운기가 이처럼 “이상하지 않은” 일을 하는 것도 관찰하는 눈에는 더욱 잘 보인다. 아니 관찰로부터 생각이 뻗어 나간 것이기도 하다.
시인은 일차적으로 생활 주변의 사물 또는 일상의 경험을 관찰하고 거기서 일어나는 생각과 상상을 표현한다. 하루 종일 입을 꼭 다물고 있는 빨래집게를 보고는 “답답하겠다”는 생각이 들고, 그래서 “하루에 한 번쯤은/ 아, 하고 크게 입을/ 벌리고 있었으면”(「빨래집게」) 하고 바라게 된다. 「조기 한 마리」 「빨래판」 「나물 캐는 칼」 「게」 「빌딩에 매달린 사람」 등도 생활 주변의 경험을 바탕 삼아 쓴 작품으로, 관찰과 그로부터 뻗어 나간 영상이 중심이 되고 있다. 생활 주변의 소재와 경험에서 비롯된 발상들은 대체로 평범하거나 익숙하게 다가오지만, 빨래에서 나 있는 줄을 보고 ‘밭이랑’과 ‘물이랑’, ‘기타줄’로 상상해 활달하게 시상을 펴 보인 「빨래판」과 같은 작품은 참신하다. 이 시인이 관찰하는 눈이 좀 더 돋보이는 것은 자연을 응시한 작품들에서이다.
물스키 타는
긴다리 소금쟁이
끼이익----------
새파랗게 금이 가는
작은 연못
-「소금쟁이」 전문
물 위를 걷는 소금쟁이는 빠르게 움직이다 멈춘다. 끼이익, 브레이크 거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소금쟁이의 발이 수면에 그은 줄은 유리에 좍 금이 가듯 연못에 새파란 금을 낸 것이다. 움직이는 소금쟁이의 모습을 잡아낸 「소금쟁이」는 이처럼 소리와 형태, 색체를 동시에 담고 있다. 멀티미디어적인 작품이다.
여름밤 황소개구리가
우앙 하고 운다
큰 입이 똑 닮은
엄마 보고 싶다고
바다 건너 두고 온 집
돌아가고 싶다고
물속 파이프오르간처럼
크게 크게 통으로 운다
캄캄한 저수지도
황소개구리 달래 주러
우앙우앙 따라 운다
-「황소개구리」 전문
이 작품은 황소개구리가 “우앙 하고” 우는 소리가 중심이다. 여름밤 저수지에서 우는 황소개구리는 주위가 어두은 데다 물속에 있어서 사람의 눈에는 잘 보이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 큰 소리를 내는 황소개구리의 입은 클 것이고, 외국산인 황소개구리는 바다 건너에 있는 자기처럼 입이 큰 엄마를 보고 싶어 할 것이다. 캄캄한 저수지에서 들려오는 우렁찬 울음을 듣다 보면 마치 저수지가 울고 있는 것 같다. 집에 돌아가고 싶어 하는 황소개구리를 달래 주러 저수지도 따라 울고 있는 듯싶은 것이다. 아마도 황소개구리의 울음은 이런 연상 작용을 일으켰으리라. 여기서 주목할 것은 이 시인이 자연의 존재들을 바라볼 때 이처럼 서로 교감하고 감응하는 존재로서 인식한다는 점이다. 황소개구리라 하면 보통 생태계를 교란하는 박멸할 대상으로 보는데, 이러한 상투적 인식을 벗어나 있다는 것도 눈여겨볼 만하다.
「밤 개구리」에서 개구리는 별들이 잠들어 “하늘이 아주 깜깜할까 봐” 와글와글 울고, 개구리가 울면 “별들은 초롱초롱 더 크게 눈을 뜬다”. 「바람과 억세꽃」에서 억새꽃은 바람이 감기 들까 봐 기침하는 바람의 “꽁꽁 언 볼”을 감싸 준다. 동물과 천체가 감응하고, 식물과 공기(바람)가 감응하는 것이다. 이런 예는 더 많이 찾아볼 수 있다.
잎 진 나뭇가지에
따스한 기운 불어넣는
참새 떼는
힘센 건전지다
-「나무와 건전지」 부분
반딧불 아줌마
손전등 들고 어디 가세요?
길 건너 외딴집
혼자 사는 여치 할머니
말동무해 주러 가요
어디 아픈 데 없나 보러 가요
-「반딧불」 전문
“겨울 나무에/ 앉은 참새 떼”는 힘센 건전지처럼 겨울나무의 마른 가지에 에너지를 불어넣는다.(「나무와 건전지」) 밤에 반짝이는 반딧불은 그냥 반짝이는 게 아니라, 손전등을 들고 “혼자 사는 여치 할머니”를 살피러 가는 것이다.(「반딧불」) 또 시인의 눈에는 죽은 우렁이의 껍질에 물이 들어찬 것이, 둠벙이 외로운 우렁이를 위로하러 들어와 노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래서 둠벙의 마음을 아는 우렁이의 ‘슬픈 눈’에는 “따스한 눈물/ 그렁, 고였”다고 한다. (「우렁이 껍질」 조금만 이야기의 살을 붙이면 한 편의 고운 동화가 씌어질 것 같은 작품들이다.
이처럼 유강희 시인이 바라보는 자연은 생물이든 무생물이든, 크기가 크든 작든, 거리가 멀든 가깝든 상관없이 서로서로 감응하고 동조하는 존재들로 이루어져 있다. 자연에서 관찰되는 여러 현상들을 시인은 이런 감응과 동조의 양상으로 이해하고 있다.
길을 건너다 얼룩 고양이가
차에 치여 죽었다.
그 위에 봄비가
자장자장 내린다.
사람대신 미안하다고
편히 잠들라고
자장자장 봄비가 내린다
-「봄비」 전문
이 작품의 비극적 상황에는 사람이 만든 문명의 이기가 끼어들고 있다. 문명의 거센 속도와 폭력에 희생된 존재를 적시며 내리는 봄비를 가리켜 시인은 “자장자장 내린다”고 말한다. 절제된 연민을 압축적으로 돋을새김한 김종삼의 「묵화(墨畫)」의 세계와 그 어법을 상기시키는 작품이다. 「봄비」에서도 보듯이, 자연의 존재들을 서로 감응하고 동조하는 것으로 파악하는 시인의 시선에는 때로는 시적 자아의 정서적 반응이 직접적으로 스며들기도 한다. < ‘해묵은 동시를 던져 버리자(김이구 평론집, 창비, 2016)’에서 옮겨 적음. (2019.04.22. 화룡이) >
첫댓글 새로움을 보는 눈이 바로 동심이겠지요? 일상이 일상이 아닌 것으로 다가올 때 동심은 이미 일어나기 시작한 것일 터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