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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916. 묵상글 들 ( 성 고르넬리오 교황과 성 치프리아노 주교 순교자 기념일. - 단죄받으러 사람에게 가지 말고 용서받으러 주님께 가자!.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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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916. 성 고르넬리오 교황과 성 치프리아노 주교 순교자 기념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단죄받으러 사람에게 가지 말고 용서받으러 주님께 가자!
오늘 복음에서 죄녀는 어찌하여 바리사이의 집에 쳐들어왔을까?
마을의 공공연한 죄녀가 죄녀를 끔찍이 싫어하는 바리사이의 집에,
초대받지 않았고 그래서 환영받지 못할 것이 뻔한데도 어찌왔을까?
바리사이의 입장에서는 너무도 대단한 침입입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예수님이 그 집에 안 계셨으면
그런 대담한 짓은 여인이 할 수 없는 거였고 그래서 오지도 않았습니다.
그렇잖습니까?
그는 바리사이를 보러 온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보러 온 것이지요.
죄인을 심판하겠다는 바리사이를 죄인이 찾아 갈 이유는 없습니다.
그녀는 자신을 용서해 줄 분을 찾아간 겁니다.
이것을 보면 단죄가 죄를 바꾸지 못하고 용서가 죄를 바꿉니다.
바람과 해가 사람의 옷을 벗기기 시합을 했습니다.
그래서 바람이 옷을 벗기려고 강하게 불면 불수록
옷이 벗기지 않으려고 사람은 옷을 더 여몄고 그래서 실패했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해가 나서서 사람을 따듯하게 하니
사람은 스스로 옷을 하나하나 벗어젖혔습니다.
단죄가 아니라 용서가 죄를 바꾸는 것도 이런 이치입니다.
그런데 여인이 한 행위는 용서를 청하는 것이 아니었고
그저 주님 앞에 나타나, 아니 정확하게 얘기하면
주님 뒤쪽 발치에서 하염없이 눈물로 주님의 발을 닦고
머리로 말린 다음 향유를 발라드리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용서를 청하는 행위가 아니라 감사와 사랑을 드리는 행위입니다.
그는 용서를 미리 받았습니다.
아니, 용서받을 것을 미리 알고 감사와 사랑을 드린 것입니다.
주님께서 빵의 기적을 행하실 때
미리 감사의 기도를 드리고 빵을 나눠준 것과 같은 의미입니다.
그러니 여인의 감사와 사랑은 주님의 사랑과 용서를 믿은 결과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거라."
여인이 구원까지 바란 것은 아니었을 겁니다.
그저 용서해 주시기만을 바랐을 테지만,
그러나 용서란 말은 감히 입밖에 내지 못하고
다만 모두 자기를 단죄해도 주님만은 자기를 받아들여주길 바랐을 겁니다.
아무튼, 여인은 죄를 많이 용서받았고 큰 사랑을 드렸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여자는 그 많은 죄를 용서받았다.
그래서 큰 사랑을 드러낸 것이다.
그러나 적게 용서받은 사람은 적게 사랑한다."
그런데 적게 용서받는 사람은
주님께서 적게 용서하시기 때문입니까?
용서도 됫박만큼 받는 것입니다.
그리고 용서의 됫박이 사랑의 됫박입니다.
그런데 이 말은 무슨 얘기입니까?
적게 용서받은 사람은 자기 죄가 크지도 않고 많지도 않다고 생각하여
그 용서의 됫박을 작게 마련한 것이고,
아예 죄가 없다고 하는 사람도 있는데 그는 용서받을 됫박조차 없습니다.
그리고 그 됫박으로 사랑을 드리는데 자연 드릴 사랑이 적거나 없습니다.
우리도 단죄받으러 사람들 앞에 가지 말고 용서받으러 주님께 가는 나,
가되 용서와 사랑의 됫박을 크게 마련하여 가는 내가 되도록 하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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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916. 성 고르넬리오 교황과 성 치프리아노 주교 순교자 기념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적게 용서받은 사람은 적게 사랑한다.”
오늘 <복음>에서는 바리사이 시몬의 집에서 식사 때 있었던 참으로 아름다운 이야기가 소개됩니다.
“그 고을에 죄인인 여자 하나가 있었는데, ~그 여자는 향유가 든 옥합을 들고서 예수님의 뒤쪽 발치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분의 발을 적시기 시작하더니 자기의 머리카락으로 닦 고 나서,
그 발에 입을 맞추고 향유를 부어 발랐다.”(루카 7,37-38)
이 자리에서 ‘죄 많은 여인’이 영광을 입습니다. 죄 많은 그녀는 감히 예수님의 앞쪽에 나서지도 못하고 뒤쪽 발치에서 눈물로 그분의 발을 적셨습니다. 자신의 머리 위에 간직한 가장 고귀한 머리카락으로 땅에 붙이고 있는 예수님의 발을 닦아 드렸습니다. 그 발에 당신 입을 맞추고 그 발에 자신의 전부를 쪼개어 부수고 깨뜨려 그 발에 붓고 발라드렸습니다. 하여, 그 옥함의 사랑의 향기는 온 집안, 온 고을로 퍼져나갔습니다.
교부들은 이 ‘죄 많은 여인’을 교회에 비유합니다. 성 암브로시우스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교회 말고는 누구도 그런 향유를 만들어 내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몸소 죄인의 모습을 취하셨으니,
교회가 창녀의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 하겠습니다.”(루가복음 해설)
이러한 “창녀의 모습을 하고 있는 교회”의 모습이 아름다움은 뒤에 나오는 예수님의 선언으로 그 향기를 뿜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 여자는 그 많은 죄를 용서받았다. 그래서 큰 사랑을 드러낸 것이다.
그러나 적게 용서받은 사람은 적게 사랑한다.”(루카 7,47)
그렇습니다. 오늘도 내가 있는 우리 집, 우리 공동체 안에는 ‘죄 많은 여인’(교회)이 부은 사랑의 향유가 가득합니다. 그런데 나는 왜, 공동체에 파고 든 그 향기를 느끼지 못하는 것일까?
그것은 어쩌면 내게 사랑이 없어, 사랑의 향기를 맡지 못하는 까닭이 아닐까요? 사실, 오늘도 내 형제들은 예수님을 섬기며 발을 닦아드리느라 여념이 없는데도, 그들의 땀과 눈물을 닦아주지 않는 것은 결코 닦아드릴 머리카락이 없어서가 아니라, 머리를 수구려 발까지 자신을 낮출 줄 모르는 까닭이 아닐까요? 아직도 향유를 나를 치장하기 위해 쓰고 있는 까닭이 아닐까요? 값비싼 것을 낭비할 수 없다면서, 오히려 물질에 애착하고 있는 까닭은 아닐까요?
사실, 오늘도 ‘죄 많은 여인’인 교회는 옥함을 깨뜨려 향유를 쏟아 붓듯 내 발에 사랑이 쏟는데 아직 내가 그 사랑을 보지 못함은 아직도 구린내를 담고 있는 나를 깨부수지 못한 까닭이 아닐까요? 아직도 자신을 감추어 둔 채, 다 부수지 않은 까닭이 아닐까요? 결국, 주님을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는 까닭이 아닐까요?
그러나 오늘도 우리 주님께서는 온 집안, 온 공동체를 사랑의 향유로 가득 채워주십니다. 그러니 이제는 온 집안에 가득 퍼진 이 감미로운 사랑의 향기에 종일토록 취할 일입니다. 내내 토록 찬미할 일입니다. 그 향기 온 몸에 묻혀, 바다소라처럼 그 향 되어 날릴 일입니다. 오늘 하루 이 그리스도의 향기에 흠뻑 취하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향기가 되어 세상에 뿜으시길 바랍니다.
하오니 주님!
오늘 저의 불순한 입이 당신의 발에 입 맞추고 거룩해지게 하소서!
저 자신을 깨뜨려 형제들의 발에 입 맞추는 사랑의 삶이 되게 하소서! 아멘.
-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예수님의 발을 자기의 머리카락으로 닦고 나서
입을 맞추고 향유를 부어 발랐다.”(루카 7,38)
주님!
온 집안에 사랑의 향기가 가득한데도
그 향기를 맡지 못함은 제 안에 사랑을 사랑으로 보지 못하는 불순이 낀 까닭입니다.
향유를 붓고 머리카락으로 발을 닦는데도
그 숨 가쁜 사랑의 숨소리를 듣지 못함은 제 안에 사랑이 없어서 사랑의 마음을 듣지 못하는 까닭입니다.
아직도 자신을 치장하기 위한 향유가 필요한 까닭에 제
자신을 위한 자애심으로 가득 찬 옥함을 깨부수지 못한 까닭입니다.
닦아드릴 머리카락이 없어서가 아니라, 머리를 수구려 발까지 자신을 낮출 줄 모르는 까닭입니다.
물질을 버려 예수님을 차지하는 여인이 되기보다,
물질을 차지하고 예수님을 버리는 유다가 되고 마는 어리석음 때문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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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916. 성 고르넬리오 교황과 성 치프리아노 주교 순교자 기념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큰 죄를 용서 받은 사람
‘죄가 많은 곳에 은총도 풍부했다’는 말씀을 생각합니다. 그만큼 주님의 자비가 크다는 것입니다. 또한 큰 죄를 용서 받은 사람은 큰 사랑을 보여줄 수밖에 없습니다. 더 많은 빚을 탕감 받은 사람이 더 많은 사랑을 보여주는 것은 당연합니다. 나쁜 사람이라고 낙인찍힌 사람이라도 용서받을 권한이 있고 용서를 받으면 사랑할 수 있는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습니다. 그야말로 “과거 없는 성인 없고, 미래 없는 죄인 없습니다.”
동네에서 행실이 몹시 나쁜 여인이라고 소문난 여인이 예수님께 용서를 청하였습니다. 그 용서를 청하는 방법이 남 달랐습니다. 그 여인은 예수님 뒤쪽 발치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분의 발을 적시기 시작하더니 작기의 머리카락으로 닦고 나서, 그 발에 입을 맞추고 향유를 부어 발랐습니다.
이를 바라보는 바리사이들은 여인의 참회행위를 보지 않고 과거의 잘못에만 비중을 두었습니다. 반성하고 뉘우치는 참회의 모습에는 관심도 없고 여인의 과거 잘못에 대해 평가하고 판단하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발을 잡는 그녀의 손짓 하나까지도 못마땅하게 여겼습니다. 여인의 접촉을 부정을 타는 일로 여겼습니다. 그 여인은 마땅히 심판과 벌을 받아야 하는 사람입니다. 비난 받아 마땅한 여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여인의 나쁜 행실을 알고 있고, 주변사람들이 그 여인을 두고 수군거리는 것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인의 모든 참회행위를 모두 받아주셨습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거라.” 하시며 여인의 과거를 묻지 않고 미래를 열어 주셨습니다. 어떤 사람은 과거에 매여 미래를 막아 버립니다. 어떤 사람은 과거를 하느님의 자비에 맡기고 미래를 하느님의 섭리에 맡깁니다. 어떤 사람은 과거를 빌미로 한 사람을 매장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용서와 사랑으로 미래의 새로운 희망을 불어넣어줍니다. 나의 마음은 어디에 있는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느님에 대한 지식과 하느님께 대한 열정이 넘쳐난다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지난 일에 연연하고 집착하면 미래가 불투명합니다. 그러나 오늘의 큰 사랑은 과거의 잘못에 용서를 가져옵니다. “남을 사랑하는 사람은 율법을 완성한 것입니다”(로마13,8). 예수님의 마음을 닮아 모두를 품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법을 지켜야 하지만 사랑의 법이 다른 모든 것에 앞서야 합니다. “정의는 사랑을 포용할 수 없지만 사랑은 정의를 포용합니다.” 저도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이 없었다면 지금 이렇게 주님을 전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허물로 누벼놓는 하루를 주님의 자비가 감싸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단 한 번도 용서하시는 일에 소홀하신 적이 없습니다. 우리도 용서를 구하는 일에 결코 소홀하면 안 됩니다. 하느님은 결코 용서하시는 일에 지치지 않기 때문입니다.....하느님께서 용서하실 때 기억을 잃어버리시고, 우리의 죄를 잊어버리십니다....하느님께는 어떤 죄도 마지막이 아닙니다.”(프란치스코 교황). 법보다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오늘이 되기를 희망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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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916. 성 고르넬리오 교황과 성 치프리아노 주교 순교자 기념일. 이기우 사도요한 신부님.
◈ 믿는 이들의 본보기가 되십시오
믿음은 하느님께 관한 지식을 깨우치게 해 줍니다. 사도 바오로는 생전에 예수님을 만난 적도 없고 그분에게 배우지도 않았지만,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십여 년 동안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기울여 믿음을 전하기 위한 지식을 스스로 터득하였습니다. 그 결과가 제자 티모테오에게 보낸 편지에 고스란히 담겨있습니다.
말에서나 행실에서나 사랑에서나 믿음에서나 순결에서나 믿는 이들의 본보기가 되라는 권고는 자신의 삶과 경험에서 우러나와 스스로 터득한 지식이었습니다. 성경 봉독과 가르침에 열중해야 사도직에 충실할 수 있다는 사실도, 원로단을 안수 예절로써 축성하는 일도, 또한 그들에게 예언적인 가르침으로써 양성해야 한다는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가톨릭교회의 성품성사 예절 전통이 되었습니다. 열두 제자 출신의 기성사도들과는 매우 대조적인 모습입니다.
죄인으로 여겨지던 한 여인이 예수님께로부터 자신의 죄를 용서받고 나서 감사한 나머지 당시 노동자의 일년치 연봉을 주어야 살 수 있는 귀한 향유가 든 옥합을 들고 예수님께 감사의 예를 표한 일도 역시 그 여인이 용서와 함께 믿음을 얻고 나서 어떻게 하면 감사할 수 있을 지와 함께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느님 안에서 살아갈 수 있을지를 고민하며 터득한 결과이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믿음은 참되게 살아갈 수 있는 지식을 더해 주고, 지식은 믿음을 더욱 더욱 굳게 해 줍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우리 선조들에게 보여주신 놀라운 신앙의 섭리에서도 이러한 이치는 잘 드러났습니다.
처음에 이벽과 천진암 강학회 선비들은 마테오리치의 천주실의 덕분에, 당시의 국가보안법과도 같았던 사문난적이라는 족쇄를 돌파하여 주자학 이전의 하느님께 관한 지식으로 천주교 교리를 습득하여 믿음을 얻는 방아쇠 효과를 얻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이 선각자 선비들이 한글과 구어체로 천주교 교리를 전해준 덕분에 한문과 유학을 배우지 못했던 일반 신자들을 통해서 조상 대대로 수천 년 동안이나 민간 사이에서만 믿어 오던 하느님 신앙의 거대한 지하수맥이 지상으로 용솟음치는 마중물 효과를 누렸습니다.
믿음의 방아쇠 효과의 결과로 6년 사이에 선비 천여 명을 세례받게 하였고, 교리 지식의 마중물 효과의 결과로 중인 신분 이하의 천주교 교우들이 박해 백 년을 견디어 내고 전국에 교우촌을 건설할 수 있었으며, 결국 믿음으로 얻어진 지식으로 우리 겨레에게 믿음의 본보기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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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916. 성 고르넬리오 교황과 성 치프리아노 주교 순교자 기념일. 조명언 마태오 신부님.
아직도 내게 슬픔이/ 우두커니 남아 있어요
그날을 생각하자니/ 어느새 흐려진 안개
빈 밤을 오가는 마음/ 어디로 가야만 하나
어둠에 갈 곳 모르고/ 외로워 헤매는 미로
누가 나와 같이 함께 울어줄 사람있나요.
누가 나와 같이 함께 따뜻한 동행이 될까
사랑하고 싶어요/ 빈 가슴 채울 때까지
사랑하고 싶어요/ 살아 있는 날까지
고등학생 때 기타를 치며 많이 불렀던 가수 최성수의 ‘동행’이란 노래의 가사입니다. 이 노래 가사 중 ‘누가 나와 같이 함께 울어줄 사람 있나요’라는 노랫말이 있습니다. 누가 있을까요? 배우자, 가족, 친구…. 그런데 끝까지 어떤 상황이 있어도 나와 함께 해줄 사람은 누구일까요?
부모와 자식 간에 등지며 사는 모습도 많이 보고, 형제간에도 소송으로 서로 적대시하는 모습도 봅니다. 친한 친구에게 사기를 당해서 힘들어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진정한 동행은 주님밖에 없습니다. 내가 주님을 배신해도, 돌아오면 다시 받아주시는 주님이십니다. 너무 힘들어 눈물 흘리고 있을 때, 침묵 속에서 함께 해주시는 분은 주님뿐입니다.
이런 주님임을 기억하면서 오늘 복음을 바라보았으면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빚을 자주 언급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모국어인 아람어로 ‘호바’는 ‘빚과 죄’라는 두 가지 뜻이 있는 까닭에, ‘빚’ 이미지는 흔히 ‘죄’를 가리킵니다. 두 채무자의 비유에서 돈놀이꾼은 하느님을 가리키는 이미지입니다.
돈놀이꾼에게 한 사람은 오백 데나리온(노동자의 500일분 품삯)을 빚졌고, 또 한 사람은 오십 데나리온을 빚졌습니다. 그들이 빚을 갚을 길이 없자 돈 놀이꾼은 이를 탕감해 줍니다.
빚을 적게 탕감받은 이는 부지런히 율법을 익히고 지켜서 의인으로 자처한 바리사이들이고, 빚을 많이 탕감받은 이는 율법을 잘 알지 못하고 지키지도 못한 직업상의 죄인들, 윤리상의 죄인들을 가리킵니다. 대표적으로 세리, 간음녀였습니다.
여기에 드러나는 예수님의 신관을 눈여겨봐야 합니다. 하느님은 가차 없이 쥐어짜는 수전노가 아닙니다. 큰 빚을 탕감해 주시는 인정 많은 채무자 같은 분이십니다. 그래서 요한 사도는 그의 서간에서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라고 고백합니다.
이런 사랑으로 진정한 동행을 해주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주님의 사랑에 어떻게 동행하고 있었을까요? 빚을 적게 탕감받았다고 그 사랑을 외면하고 있지는 않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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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눈부시게 밝은 백열전구 같은 삶을 살고 싶다. 평생 밝게 빛나다가 어느 날 갑자기 꺼지는 삶 말이다(산제이 굽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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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훈
초등학교 다닐 때, 선생님께서 ‘우리 집의 가훈’을 알아오라는 숙제를 내주셨습니다. 아버지께서 “우리 집의 가훈은 이것이니 모두 이 가훈을 기억하며 살아라.”라고 말씀하신 적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퇴근하신 아버지에게 가훈이 무엇이냐고 여쭤보았습니다. 잠깐 생각하시더니, ‘성실’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너무 시시했고 뻔해 보였습니다.
다음날 우리 집 가훈을 발표하는데 다들 비슷한 것이었습니다. 그중 제일 많은 가훈이 ‘성실’이더군요. 저는 다르게 말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나름대로 튀어 보겠다고 등교하다가 본 옆 학교의 벽에 붙어 있던 교훈을 우리 집 가훈인 것처럼 발표했습니다. 그 교훈은 이것이었습니다.
“열심히 공부하여 내일의 보람을 찾자.”
가훈이 될 수 없음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다르게 발표하고자 하는 마음에 거짓말을 한 것입니다.
지금 생각해보니 ‘성실’보다 훌륭한 가훈이 있을까 싶습니다. 특히 뛰어난 재능이나 능력이 없는 저로서는 반드시 필요한 덕목이었습니다. 단, 실천해야 합니다.
어떤 가훈도 다 좋습니다. 그러나 실천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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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916. 성 고르넬리오 교황과 성 치프리아노 주교 순교자 기념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한국교회도 고령화의 문제가 있습니다. 구조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저 출산은 고령화의 직접적인 원인입니다. 의식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신앙생활과 하느님의 영광이 삶의 중심에 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기도, 나눔, 봉사, 희생’보다는 ‘성공, 명예, 권력, 욕망’이 앞서기 때문입니다. 제도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교회가 현대인들의 고뇌와 아픔을 보듬어 주지 못하고, 희망을 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민자들이 함께하는 교포들의 공동체에도 고령화는 현실이 되고 있습니다. 구조적인, 의식적인, 제도적인 문제에 더하여 언어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어릴 때는 부모를 따라서 성당에 나오고, 복사를 하지만 아이들은 자라면서 이민자의 사회에 적응하기 어려워합니다. 한국어보다는 영어가 익숙하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은 자라면서 영어를 사용하는 교회에 나가기도 하고, 신앙생활에서 벗어나기도 합니다. 한국사회가 발전하면서 이민자들의 수가 줄어들었습니다. 육체적인 고령화도 문제이지만 영적인 고령화도 문제입니다.
요즘 아이들은 태어나서 1년 이내에 16가지 이상의 예방 주사를 맞는다고 합니다. 아이들은 예방 주사를 맞기 때문에 질병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방 주사를 통해서 깨끗해진 아이들은 면역체계가 약해지기 때문에 새로운 질병에 쉽게 노출된다고 합니다. 많은 아이들이 비염, 아토피, 각종 알레르기에 감염된다고 합니다. 너무나 깨끗해진 아이들의 몸이 그런 질병을 이겨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몸은 아직도 4만 년 전의 모습을 가지고 있는데, 우리의 환경은 급속하게 변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너무 많이 먹고, 너무 적게 움직입니다. 그 결과 우리는 ‘당뇨, 고혈압, 심장질환, 비만’이라는 새로운 질병과 싸우게 됩니다. 우리의 아이들이 ‘게임, 텔레비전, 컴퓨터’라는 굴레서서 벗어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일주일에 하루는 들판의 꽃도 보게 하고, 도토리도 줍게 하고, 흐르는 물에 발도 적셔 보게 하면 좋겠습니다. 머리로 세상을 살기 보다는 가슴으로, 몸으로 세상을 살 수 있도록 하면 좋겠습니다. 그래야만 예방 주사 때문에 오히려 약해진 우리의 몸과 마음이 건강해 질 수 있습니다.
신앙은 관념이 아니고, 신앙은 생활이며 실천입니다. 때문에 감사하고 고마워하면 감사하고 고마워 할 일들이 생기는 것입니다. 반면에 미워하고 분노하면 미워할 일, 분노할 일들이 생기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재복음화’시키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초대한 바리사이파 사람들에게 신앙은 관념이 아니라 실천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발라드리고, 씻어 드린 여인은 신앙이 무엇인가를 보여 주었습니다. 우리들의 신앙 또한 실천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을 하십니다. ‘이 여자를 보아라. 내가 네 집에 들어왔을 때 너는 나에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않았다. 그러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자기의 머리카락으로 닦아 주었다. 너는 나에게 입을 맞추지 않았지만, 이 여자는 내가 들어왔을 때부터 줄곧 내 발에 입을 맞추었다. 너는 내 머리에 기름을 부어 발라 주지 않았다. 그러나 이 여자는 내 발에 향유를 부어 발라 주었다.’ 이 말씀은 마태오 복음 25장의 이야기를 생각나게 합니다. ‘너희는 내가 배고팠을 때, 먹을 것을 주지 않았고, 내가 목말랐을 때, 마실 것을 주지 않았고, 내가 헐벗을 때, 입을 것을 주지 않았다.’
우리를 기쁘게 하는 것은, 우리를 구원에로 이끄는 것은, 우리를 행복에로 이끄는 것은 보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믿는 것, 힘들고 어려운 이웃과 함께 하는 것, 세상을 긍정의 눈으로 바라보는 것, 바로 이런 것들을 통해서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것 넘어 참된 진리를 볼 수 있습니다. “아무도 그대를 젊다고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십시오. 그러니 말에서나 행실에서나 사랑에서나 믿음에서나 순결에서나, 믿는 이들의 본보기가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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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916. 성 고르넬리오 교황과 성 치프리아노 주교 순교자 기념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주님과 일치의 여정
- 사랑이 답이다 -
가톨릭 교회는 순교자들의 교회라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빼놓을 수 없는 영성이 순교영성입니다. 자랑스러운 순교자들의 후예인 우리들이요 9월은 순교자들을 기리는 순교자 성월이기도 합니다. 살아서 만이 순교가 아니라 살아서도 순교적 삶을 살아가는 이들 또한 많습니다. 어제 고통의 성모 마리아 기념일 미사때 은혜로웠던 복음 환호송도 기억하실 것입니다.
“동정 마리아님, 복되시나이다. 당신은 주님의 십자가 아래서 죽음 없이 순교의 월계관을 받으셨나이다.”
사실 죽음 없이 순교의 월계관을 받은 분들도 많을 것이며 앞으로도 받으실 분은 계속될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성 고르넬리오 교황과 성 치프리아노 주교 순교자 기념 미사를 봉헌합니다. 우리 삶의 영원한 좌표가 되는 순교 성인들입니다. 순교는 성체와의 결합입니다. 주님과 사랑의 일치의 절정을 보여주는 순교의 사랑이요 믿음입니다.
두 순교 성인은 그리스도와 교회를 충실히 섬겼던 친구들이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참다운 우정임을 깨닫습니다. 수도형제들의 깨끗한 사랑의 우정도 이러할 것입니다. 카르타고의 주교였던 치프리아노는 용기있게 순교의 죽음을 맞이했음은 그의 백성들이 증언합니다. 그의 순교는 장엄한 전례와도 같았고 카르타고의 교회의 믿음에 결정적 영향을 주었습니다. 그는 일찍이 친구인 교황 고르넬리오에게 이런 편지를 쓴적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중 하나를 곧 죽게 할 은총을 주신다 해도, 우리의 우정은 주님 앞에서 계속될 것입니다.”
성 고르넬리오 교황은 짧은 3년 동안(250-253) 교황직을 수행하는 동안 그가 이룬 업적은 박해중에 배교를 선언했던 신자들과의 화해 정책이었습니다. 그는 배교자들에게 엄격할 것을 요구한 노바티아누스를 중심으로 모인 엄격파들을 단죄하여 교회의 평온을 회복했으나, 그 이후 갈루스 황제의 박해가 재개되자 체포되어 유배되었다가 모진 고문으로 253년 순교적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교황의 친구였던 치프리아노 주교는 이보다 5년후 258년 참수형의 순교의 죽음을 맞이하는데 이때의 장면이 또 감동적입니다. 외투를 벗어 깔고 무릎을 꿇은후 온마음을 다해, “하느님께 감사합니다!(Thanks be to God!)” 마지막 임종 기도후 참수됩니다.
말그대로 주님을 위한 사랑의 순교입니다. 역시 우리 믿는 이들의 삶의 여정은 주님과 믿음과 사랑의 일치 여정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과연 날로 주님과 깊어가는 신뢰와 사랑의 관계인지 자문하게 됩니다. 주님 앞에 갔을 때 역시 지니고 갈 것은 이 사랑의 관계 하나일 뿐입니다. 얼마전 가난한 병고중의 자매가 양말 두켤레를 선물하며 약소하다 하며 미안해 했을 때 덕담이 생각납니다.
“자매님 자체가, 자매님 정성이 최고의 선물입니다.”
사실 착하고 순수한 사람은 빈손으로 와도 반갑듯이, 주님께서도 참으로 당신과 깊은 신뢰와 사랑의 관계에 있던 이들이 그러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 용서받은 주인공인 죄녀가 시공을 초월하여 우리에게 감동을 선사합니다. 말그대로 살아있는 사랑의 순교자요 주님은 죄녀의 이런 사랑과 믿음에 감동하십니다.
지성이면 감천이란 말도 있듯이 참으로 주님을 감동케 하는 것은 우리의 지극정성의 사랑이요 믿음임을 깨닫습니다. 예수님을 환대했던 바리사이 시몬과 죄녀가 주님과 사랑의 깊이에서 첨예한 대조를 이룹니다. 다음 그림같은 죄녀의 주님 사랑 장면은 얼마나 감동적인 아름다움인지요!
‘그 여자는 향유가 든 옥합을 들고서 예수님 발치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분의 발을 적시기 시작하더니 자기의 머리카락으로 닦고 나서, 그 발에 입을 맞추고 향유를 부어 발랐다.’
과연 어디서 이런 감동적인 장면을 만날 수 있을 런지요! 이어 주님의 시몬에 대한 말씀과 죄녀에 대한 말씀이 우리의 부족한 사랑을, 믿음을 되돌아 보게 하니, 이 또한 우리에게는 회개의 표징이 됩니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이 여자는 그 많은 죄를 용서받았다. 그래서 큰 사랑을 드러낸 것이다. 그러나 적게 용서받은 사람은 적게 사랑한다.”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거라.”
그대로 미사장면을 보는 듯 합니다. 이런 죄녀와 같은 주님과 사랑의 관계로 미사에 참례한다면 그대로 구원체험일 것입니다. 죄에 대한 답은 사랑뿐입니다. 죄책감에 마음 아파할 것이 아니라 죄를 지을수록 열정적으로 주님을 사랑하면 됩니다. 죄녀가 죄를 용서받은 것은 죄녀의 지극정성의 주님께 대한 사랑이었습니다.
사랑과 죄는 양립할 수 없습니다. 똑같은 사람안에 사랑과 죄가 공존할 수 없습니다. 죄녀가 주님을 사랑하는 순간 죄인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시몬은 이것을 몰랐습니다. 그의 죄에 대한 개념은 순전히 법률적이지만 예수님의 관점은 관계적입니다. 죄의 잣대는 법률이 아니라 사랑임을 몰랐습니다. 인정머리 없는 것이 진정 큰 죄입니다.
하느님이 보시는 바 과거나 미래가 아닌 오늘 지금 여기 있는 그대로의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어제 한 일은 전혀 문제가 안됩니다. 문제가 되는 것은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 즉 주님과 또 이웃과 어떻게 관계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생각은 우리와 다릅니다. 주님은 회개한 자들의 과거는 결코 묻지 않습니다.
하느님은 용서했는데 어리석게도 본인이 과거를 끄집어 내고 휘저어 놓아 자초한 마음의 혼란입니다. 고요하고 깨끗한 물을 휘저어 놓아 흙탕물이 되게 하는 이치와 똑같습니다. 그러니 남은 물론 자기의 지난 과거도 휘젓지 마십시오. 바로 이것은 악마가 즐기는 것이니, 절대 이런 유혹에 빠지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느님께서 예수님 안에 원하시는 바는 처벌이 아니라 관계 회복입니다. 하느님의 바램은 우리 모두가 온전해지는 것이며 내적평화와 조화를 체험하는 것입니다.
꽃마다 색깔과 향기가 다 다르듯이, 주님을 사랑하는 색깔과 향기 역시 다 다릅니다. 복음의 죄녀같은 비상한 사랑이 있는가 하면 제1독서에서 바오로가 가르치는 그리스도의 훌륭한 일꾼으로 살아가는 평범한 모범적 사랑도 있습니다. 그대로 우리를 향한 말씀입니다.
“그러니 말에서나, 행실에서나, 사랑에서나, 믿음에서나, 순결에서나, 믿는 이들의 본보기가 되십시오. 그대가 받은 은사를 소홀히 여기지 마십시오. 자기에게 주어진 일에 관심을 기울이고 전념하십시오.
그리하여 더욱 나아지는 모습이 모든 사람에게 드러나도록 하고, 그대 자신에 주의를 기울이고 그대의 일을 지속해 나아가십시오. 이렇게 하면, 그대는 그대뿐만 아니라 그대를 보는 이도 구원할 것입니다.”
약간 각색했지만 본뜻은 그대로입니다. 이런 충실한 삶 또한 주님 사랑의 표현입니다. 이런 평범한 모범적 사랑보다 더 좋은 강론講論도 없을 것입니다. 주님의 시詩이자 강론講論같은 사랑의 인생입니다.
사랑밖엔 길이, 답이 없습니다. 인생 무지와 허무에 대한 답도 사랑뿐입니다. 평생을 살아도 주님과 무관無關한 사랑없는 삶이라면 참 허무하고 헛된 유령幽靈같은 삶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당신과 사랑과 믿음의 일치를 날로 깊게 해 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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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916. 성 고르넬리오 교황과 성 치프리아노 주교 순교자 기념일.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오늘 미사의 말씀은 용서를 구하고 사랑을 표현하는데 지치지 말라고 격려하십니다.
"이 여자는 그 많은 죄를 용서받았다. 그래서 큰 사랑을 드러낸 것이다."(루카 7,47)
바리사이 시몬의 집에 초대받으신 예수님께 그 마을의 죄 많은 여자가 찾아옵니다. 눈물과 입맞춤과 향유의 도유는 그녀가 한 인간으로서 표현할 수 있는 최대의 정성어린 사랑이었습니다.
죄인과의 접촉을 용인했다는 사실에 집착해 예수님의 능력을 의심하는 집주인 시몬에게 그분께서 그녀의 행동을 대신 설명해 주십니다. 그 애절하고 아름다운 행위들은 많은 죄를 용서받은 것에 대한 사랑의 응답이었다고요.
흔히 물질적 봉헌이나 희사 등으로 주님의 마음을 움직이면 용서나 축복을 얻을 것으로 착각할 수 있지만, 예수님을 통해 그 선후 관계가 명확해집니다. 주님의 용서가 먼저이고, 자신이 용서받았음을 인식하는 이가 사랑을 표현함으로써 용서받았음을 증거하는 것이라고요.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거라."(루카 7,50)
예수님께서 그 여인에게 구원을 선포하십니다. 죄 많은 이라고 손가락질 받아온 그 여인이, 늘 무겁고 서글프게 자신을 짓누르던 주홍글씨를 떨쳐내기 위해 향유를 준비하여 예수님 계신 곳으로 발길을 돌린 순간 이미 용서는 시작되었던 것이지요. 믿는 그녀의 존재 안에서 이미 자유와 해방이 피어오르게 된 겁니다.
제1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지역 교회를 이끌고 있는 젊은 티모테오를 격려합니다.
"그대가 받은 은사를 소홀히 여기지 마십시오."(1티모 4,14)
"이 일을 지속해 나아가십시오."(1티모 4,16)
사도 바오로의 티모테오에 대한 사랑은 서간 곳곳에서 잘 드러나 있습니다. 이 서간이 쓰여질 때 바오로는 로마에서 감옥에 갇힌 수인이었고 티모테오는 에페소 교회를 책임지고 있었다고 추정됩니다.
바오로에게 티모테오는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부를 만큼 착실한 제자이고 소중한 협력자입니다. 모든 참 예언자가 가는 험한 여정을 헤치며 나아가는 아버지요 스승인 바오로에게 티모테오의 분투와 노력이 참 많이 짠하고 또 대견했을 터입니다.
스승 없이 홀로 공동체를 이끌면서 목자로서의 사명을 지킬 수 있는 힘은, 주님의 제자로서 받은 은사를 믿고 지키는 데서 나옵니다. 또 어떤 어려움과 메마름, 실패와 고독, 허무와 무의미의 유혹에도 꿋꿋이 하던 일을 지속하는 충실함에서 흘러나오지요.
마치 오늘 복음 속 여인이 태산 같이 쌓인 죄의 짐을 지고서도 용서받기 위해 지치지 않고 두려움을 넘어 주님 앞으로 나아갔듯이, 주님의 일을 하는 모든 이는 한계와 도전의 파도가 닥쳐도 부르심과 은사에 대한 믿음을 견지하며 중단 없이 나아가야 합니다.
주님만 바라보고 그분과 함께 참 열심히 살아왔지만 결실이 보이지 않고 현재의 상황이 마치 실패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자신의 나약함과 한계가 온갖 관계와 뒤엉켜, 쉬이 풀 수 없는 매듭처럼 자신을 옭죄어 들 수도 있지요. 그럴 때는 오늘 복음 속 여인처럼 용서의 확신을 안고 주님을 향해야 합니다. 또 사도 바오로의 권고처럼 은사를 소중히 여기며 포기하지 말아야 하지요.
사랑하는 벗님! 언제나 지치지 않고 우리를 용서하시는 주님께 마음을 다해 극진한 사랑을 보여 드리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그분의 용서는 끝이 없으니, 믿고 떨치고 일어나 그분을 향하는 순간 기적은 시작된답니다. 용서 받았다는 믿음에서 사랑이 나오고, 사랑은 구원을 보증합니다. 용서받은 죄인인 우리 모두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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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916. 성 고르넬리오 교황과 성 치프리아노 주교 순교자 기념일. 이병우 루카 신부님.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루카7,48)
'참사목자이신 예수님!'
오늘은 참사목자의 길을 걸어가시다가 순교하신 '성 고르넬리오 교황과 성 치푸리아노 주교 순교자를 기억하는 날'입니다. 먼저 오늘 영명축일을 맞이한 분들에게 축하의 인사를 드립니다.
오늘 복음은 '죄 많은 여자를 용서하시는 말씀'입니다.
죄 많은 여자가 많은 죄를 용서받고, 예수님께 큰 사랑을 드러냅니다.
오늘 복음이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는,
예수님께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갖고 계신 하느님'이시며, '죄인들의 친구이신 하느님'이시라는 메시지와 죄를 용서하시는 하느님께로 나아가 죄를 용서받고, 큰 사랑을 드러내는 신자들이 되어야 한다는 메시지입니다.
바오로 서간 중에서 '티모테오1.2서와 티토서'를 '사목서간'이라고 부릅니다. '사목서간'은 사도 바오로가 어느 지역의 신자 공동체에 보낸 것이 아니라, 티모테오와 티토라는 '한 개인에게 보내 편지'입니다. '편지의 요지'는 '사목자로서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권고'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티모테오에게 '사목자는 믿는 이들의 본보기가 되어야 한다.'고 권고합니다.
"사랑하는 그대여, 말에서나 행실에서나 사랑에서나 믿음에서나 순결에서나, 믿는 이들의 본보기가 되십시오. 그대가 받은 은사를 소홀히 여기지 마십시오. 그대가 더욱 나아지는 모습이 모든 사람에게 드러나도록 하십시오."(1티모4,12-15 중에서)
교회 안에 이런 사목자들이 많아야 하는데..
'어느 수녀님의 외침처럼',
유유자적하는 사목자가 아닌 예수님을 닮으려고 부지런히 움직이며 땀 흘리는 사목자! 가난한 이들의 친구이시고, 죄인들의 친구이신 예수님을 닮은 사목자! 교회 안에 이런 사목자들이 많아져야 합니다.
사목자들의 참본보기가 되어주신 참사목자이신 예수님을 굳게 믿고, 이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교회 안에 참사목자가 많아지기를 청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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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916. 성 고르넬리오 교황과 성 치프리아노 주교 순교자 기념일. 신우식 토마스 신부님.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에서 죄 많은 여인은 예수님을 찾아와 참회하며, 눈물로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용서를 청합니다. 이 여인이 구체적으로 어떤 죄를 지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주님께서는 그의 죄를 용서하시고 잃어버린 평화와 자유를 되찾아 주십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거라.” 그가 예수님께 다가와 향유가 든 옥합을 깨어 예수님의 발을 적시고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닦는 동안 바리사이는 매우 불편해합니다. 더구나 예수님께서 여인의 죄를 용서하신다고 하자 바리사이와 식탁에 초대된 사람들의 불평이 터집니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면 ‘용서’입니다. 물론 잘못을 저지른 사람은 벌을 받아야 하지만, 나의 말이나 행동으로 그들을 괴롭혀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고, 예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들입니다.
어제 고통의 성모 마리아 기념일에 우리는 ‘고통의 무게는 모두 다르지만, 모든 고통을 피하지 말고 마주하여, 그 안에서 하느님의 뜻과 은총을 찾고 하느님과 일치하려고 노력해야 함’을 배웠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죄 많은 여인은 주님의 용서를 통하여 평화와 자유를 얻지만, 바리사이와 초대된 사람들은 평화와 자유를 빼앗겼습니다. 나의 이기심에서 벗어나 그리스도를 받아들일 때, 우리는 진정 자유로워지고 평화를 되찾으며 크든 작든 우리의 죄도 하느님께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 “이 여자는 그 많은 죄를 용서받았다. 그래서 큰 사랑을 드러낸 것이다. 그러나 적게 용서받은 사람은 적게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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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916. 성 고르넬리오 교황과 성 치프리아노 주교 순교자 기념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눈물로 그 발을 적시었다.
예수께서는 바리사이인 시몬의 집에 초대를 받으시고 그 집으로 가셨다. 그 바리사이의 집은 예수님을 배척하는 회당이라고 할 수 있다. “그 고을에 죄인인 여자가 하나 있었는데”(37절), 그 여자는 예수께서 바리사이의 집, 즉 회당에 오셨다는 말을 들었다. 그 여인은 아마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땀에 젖은 채 식사 중인 안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예수님 발 앞에 엎드려 눈물로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닦고 나서 그 발에 입 맞추고 향유를 발라드린다.
여기서 바리사이 시몬은 속으로 “저 사람이 예언자라면, 자기에게 손을 대는 여자가 누구이며 어떤 사람인지, 곧 죄인인 줄 알 터인데.”(39절) 하고 속으로 말하였다. 그러자 예수님은 시몬에게 두 채무자의 비유를 말씀하신다. 바리사이는 “더 많이 탕감받은 사람이”(43절) 채권자를 더 사랑한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주님께서는 여인의 죄를 용서하셨다.
주님께서는 밖에서도 표징을 일으키셨지만, 바리사이의 집에 들어가셔서는 더 큰 기적을 행하셨다. 밖에서는 병든 육신을 고쳐 주셨지만, 안에서는 병든 영혼을 고쳐 주셨다. 밖에서는 라자로를 죽음에서 살려내셨고, 안에서는 죄 많은 여자를 죽음에서 살려내셨다. 그러나 눈먼 바리사이는 주님께서 일으키시는 놀라운 일들을 끝까지 알아보지 못하고 있다.
입맞춤이란 사랑의 표시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발에 입 맞춘다는 것은 그분을 사랑한다는 의미이며, 그분을 따른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교회는 그리스도의 발에 입 맞추기를 그치지 않는다. 마리아께서 주님의 모든 말씀에 귀를 기울이셨듯이, 교회는 그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모든 말씀을 마음속에 간직한다. 교회만이 신부처럼 신랑에게 입을 맞춘다. 바로 우리 자신이 그분의 신부, 신랑을 사랑하는 신부가 되어야 한다.
여자는 깊숙이 감추었던 눈물을 자신의 사랑을 통해 밖으로 드러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그 여자의 용기와 믿음을 보시고, 여인을 옭아매고 있는 많은 조에서 그를 해방해 주셨다.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48절) 이 말씀은 참으로 하느님다운 말씀이다. 이 말씀으로 여자를 자유롭게 해주신 동시에 함께 앉아있던 이들에게 놀라움을 안겨 주셨다. “저 사람이 누구이기에 죄까지 용서해 주는가?”(49절) 말한다.
이제 용서는 넘치는 사랑을 통해서 온다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 여자는 그 많은 죄를 용서받았다. 그래서 큰 사랑을 드러낸 것이다.”(47절) 라고 하신다. 베드로 사도도 “사랑은 많은 죄를 덮어줍니다.”(1베드 4,8)라고 이야기한다. 우리의 삶을 사랑으로 꾸미며 살아감으로써 하느님 앞에 올바른 자녀로서의 삶을 살아가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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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916. 성 고르넬리오 교황과 성 치프리아노 주교 순교자 기념일.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적게 용서받은 사람은 적게 사랑한다.”(루카 7, 47)
진정한
사랑은
있다.
하느님의
용서와
하느님의
사랑이 있다.
봉인된
하느님의
사랑이
예수님을 통해
활짝 열린다.
용서는
가장
아름다운
하느님의
나눔이다.
하느님께서
먼저
용서를
나누신다.
옥합을
깨뜨리듯
아픔 없는
사랑이란
없다.
옥합의 눈물이
회개의 향유이다.
회개는
실패가
아니다.
가장 고귀한
용서의
체험이다.
회개의
용서이며
용서의
회개이다.
하느님을
사랑한 적이
없는
우리들이다.
용서의
방관자들인
우리가
용서를
만난다.
복음의 삶이란
옥합이 깨어져
용서를 만나는
용서의 삶이다.
옥합 안에는
향유가
있어야 하듯
우리들 삶에는
용서가
있어야 한다.
하느님 없는
용서란 없다.
용서 자체가
하느님이시다.
하느님
자녀들의
용서이다.
하느님의
옥합에
다시 채워지는
용서이다.
용서는 용서로
다시 채워져야
한다.
하느님을
다시 뜨겁게
만나는 용서의
새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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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916. 성 고르넬리오 교황과 성 치프리아노 주교 순교자 기념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용서, 사랑, 회개>
“이 여자를 보아라. 내가 네 집에 들어왔을 때 너는 나에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않았다. 그러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자기의 머리카락으로 닦아 주었다. 너는 나에게 입을 맞추지 않았지만,
이 여자는 내가 들어왔을 때부터 줄곧 내 발에 입을 맞추었다.
너는 내 머리에 기름을 부어 발라 주지 않았다. 그러나 이 여자는
내 발에 향유를 부어 발라 주었다. 그러므로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이 여자는 그 많은 죄를 용서받았다. 그래서 큰 사랑을 드러낸 것이다.
그러나 적게 용서받은 사람은 적게 사랑한다(루카 7,44-47).”
이 말씀은, ‘시몬’이라는 이름의 어떤 바리사이에게 하신 말씀인데,
겉으로만 보면, 시몬이 하지 않은 일과 여자가 한 일이 비교되어 있어서,
예수님께서 여자는 칭찬하시고 시몬은 꾸짖으신 것으로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아니고(시몬을 꾸짖는 말씀은 아니고),
여자의 ‘이례적인 행동’의 의미를 설명해 주신 말씀입니다.
“그 많은 죄를 용서받았다. 그래서 큰 사랑을 드러낸 것이다.” 라는 말씀은,
“많은 죄를 용서받았다고 생각하면서 크게 고마워한 것이다.”로 해석됩니다.
“적게 용서받은 사람”이라는 말은,
“자기는 적게 용서받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하느님의 용서와 자비와 사랑에는 차별이 없습니다.
그래서 누구는 많이 용서받고, 누구는 적게 용서받는 일은 없습니다.
(큰 죄를 용서받든지, 작은 죄를 용서받든지 간에, 또는 많은 죄를 용서받든지
적은 죄를 용서받든지 간에, 하느님의 용서는 똑같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많이 용서받았다고 생각하고,
어떤 사람은 적게 용서받았다고 생각합니다.
도대체 왜 그럴까?
그것은 아마도 ‘회개의 차이’일 것입니다.
회개를 제대로 하지 않으면, 똑같은 용서를 받아도
적게 용서받았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똑같은 은총을 받아도, 어떤 사람은 많이 받았다고 생각하고,
어떤 사람은 적게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하느님에 대한 사랑의 차이입니다.)
어떻든 적게 용서받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고마워하는 마음도 적게 됩니다.
(여기서 ‘큰 사랑을 드러낸다.’는 ‘크게 고마워한다.’로,
‘적게 사랑한다.’는 ‘적게 고마워한다.’로 해석됩니다.)
<여자가 눈물로 예수님의 발을 적시고, 자기의 머리카락으로 닦고,
예수님의 발에 입을 맞추고, 향유를 부어 바른 일은(루카 7,38),
자신만의 방식으로 예수님에 대한 감사와 사랑과 기쁨을 나타낸 일입니다.
이 일은 마르타의 동생 마리아가 한 일과 비슷해서(요한 12,3),
마리아를 ‘죄 많은 여자’로 오해하는 경우가 많았고, ‘죄 많은 여자’ 라는
말 때문에 그 여자를 ‘일곱 마귀가 떨어져 나간 막달레나’(루카 8,2)로
생각하는 경우도 많고, 세 여자를 모두 한 사람으로 생각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할 근거도 없고, 이유도 없습니다.
우리는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는 그대로,
세 명의 여자를 모두 다른 사람으로 구분해서 생각하는 것이 옳습니다.>
‘큰 죄’를 용서받고, ‘큰 감사와 큰 사랑’을 바친 사람들 가운데에서
대표적인 인물은 바오로 사도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나를 굳세게 해 주신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분께서는 나를 성실한 사람으로 여기시어 나에게 직무를 맡기셨습니다.
나는 전에 그분을 모독하고 박해하고 학대하던 자였습니다. 그러나 내가 믿음이
없어서 모르고 한 일이기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나에게 자비를 베푸셨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우리 주님의 은총이
넘쳐흘렀습니다. 이 말은 확실하여 그대로 받아들일 가치가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죄인들을 구원하시려고 이 세상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나는 그 가운데에서 첫째가는 죄인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 때문에
하느님께서 나에게 자비를 베푸셨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먼저 나를
당신의 한없는 인내로 대해 주시어,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고 당신을 믿게 될
사람들에게 본보기로 삼고자 하신 것입니다(1티모 1,12-16).”
바오로 사도는 자신이 ‘첫째가는 죄인’이라고 고백합니다.
그런 죄인을 하느님께서 용서하신 일은, 그런 죄인도 구원받을 수 있음을
보여 주는 ‘본보기’ 라는 것이 바오로 사도의 설명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자신이 지은 죄를 잊지 않았고, 그 죄를 솔직하게 인정하고
고백했고, 큰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용서를 받은 것을 늘 감사드렸습니다.
그리고 그 감사는 사랑으로 이어졌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열성적이고 헌신적인 선교활동은
그 감사와 사랑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의 경우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한 일은 분명히 ‘큰 죄’입니다.
물론 그는 곧바로 회개했습니다.
루카복음을 보면, 베드로 사도가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할 때,
예수님께서 그를 바라보셨다는 말이 나옵니다.
“...... 그가 이 말을 하는 순간에 닭이 울었다. 그리고 주님께서 몸을 돌려
베드로를 바라보셨다. 베드로는 주님께서 ‘오늘 닭이 울기 전에 너는 나를
세 번이나 모른다고 할 것이다.’ 하신 말씀이 생각나서,
밖으로 나가 슬피 울었다(루카 22,60-62).”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부인하는 베드로 사도의 말을
모두 들으셨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베드로 사도를 바라보실 때, 베드로 사도도 예수님을
바라보았을 것이고, 그래서 예수님과 베드로 사도의 시선이 마주쳤을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의 눈빛은 세상에서 가장 슬픈 눈빛이었을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가 그렇게 느꼈을 것입니다.)
그 눈빛은 원망이나 미움이 아닌, 사랑과 안타까움과 가엾게 여기는 마음 등이
가득 담겨 있는 눈빛이었을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가 곧바로 회개한 것은, 닭의 울음소리 때문이 아니라,
예수님의 사랑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자신이 얼마나 큰 사랑을 받고 있는지를 깨닫는 순간, 자신의 죄가
얼마나 큰 죄인지를 깨달았을 것이고, 곧바로 회개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용서를 통해서 주어지는 주님의 사랑은 우리를 회개로 인도합니다.
(사랑받고 있음을 깨달을 때 회개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회개는 주님에 대한 사랑으로 완성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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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916. 성 고르넬리오 교황과 성 치프리아노 주교 순교자 기념일.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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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916. 성 고르넬리오 교황과 성 치프리아노 주교 순교자 기념일.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큰 사랑을 드러낸 것이다. / 2015년 9월 17일
예수님께서 모처럼 바리사이 집에서 식사를 초대받아 식탁에 앉으셨습니다.
그런데 그 고을의 죄인인 여자가 와서 향유가 든 옥합을 들고 예수님 발치에 앉아 울며, 눈물로 그분의 발을 적시고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그분의 발을 닦고 나서 입을 맞추고 향유를 부어 바릅니다.
이런 낯선 풍경에 예수님을 초대한 바리사이는 예수님을 못마당하게 여기며 ‘저 사람이 예언자라면, 자기에게 손을 대는 여자가 누구이며 어떤 사람인지, 곧 죄인인 줄 알 터인데.’(루카 7,39)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서 그 바리사이가 아니라 시몬을 불러 오백 데나리온 빚을 진 사람과
오십 데나리온 빚을 진 사람의 비유를 들어 말씀하시고 질문하십니다.
“어떤 채권자에게 채무자가 둘 있었다. 한 사람은 오백 데나리온을 빚지고
다른 사람은 오십 데나리온을 빚졌다. 둘 다 갚을 길이 없으므로 채권자는 그들에게 빚을 탕감해 주었다. 그러면 그들 가운데 누가 그 채권자를 더 사랑하겠느냐?”(41-42절)
시몬은 “더 많이 탕감받은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43절)이라고 대답합니다.
그리고 당신 앞에서 회개의 눈물을 흘리며 발을 닦아주고 향유를 발라준 여인에 대해서 죄를 용서받았다고 설명하십니다.
그러나 그들 속에 있던 사람들 중에 몇은 “‘저 사람이 누구이기에 죄까지 용서해 주는가?”라고 반문하지만 예수님께서 그 여인을 향하여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거라.”(50절)라고 말씀하십니다.
루카는 이 여인이 어떤 여자인지를 침묵하고 다만 ‘죄인’이라고 하지만 일반적으로 학자들은 예수님께서 그 여인에게서 일곱 마귀를 쫒아주신 마리아 막달레나로 보기도 합니다.
구약은 묵은 포도주에 낡은 부대에 그리고 신약은 새 포도주에 새부대를 나누어 주님께서 설명하신 적이 있습니다.
구약에 속한 사람들은 구원의 길을 율법을 철저히 지키는 것인데, 주님께서는 신약의 사람들은 새 포도주에 새 부대의 새로운 가르침을 실천하는 사람들이라고 가르치십니다.
율법실천이 아니라 하느님의 사랑실천을 따르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구약의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의인으로 자처하지만 신약에 속한 제자들을 위시해서 모두 죄인임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새 부대에 포도주를 담고 마시는 사람은 제자들을 위시해서 다 유대인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완전한 사람이 아니라 죄인임을 고백하는 것이고 하느님의 자비가 그들에게 내리시는 것입니다.
죄인이라고 하는 이 여인은 주님으로부터 자신의 죄를 용서 받고 떠납니다.
우리는 신약에 속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자칫 잘못하면 구약의 율법은 아니더라도 각자의 원칙과 경험에서 오는 가치관을 가지고 새로운 율법을 가지고 살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맞지도 않는 원칙과 가치관을 마치 어떤 특권의 새로운 율법으로 만들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참으로 자유로우신 분이셨습니다. 율법에 묶여 있는 바리사이가 이해할 수 없었지만 사실 그분은 사랑의 율법에 충실하신 분이셨습니다. 그분은 율법에 의해 죄인을 단죄하시는 것이 아니라 스스럼없이 그 여인에게 모든 것을 맡기시고 용서하시는 것입니다.
율법은 사람을 묶어 놓지만 사랑은 상대를 존중하며 자유롭게 해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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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916. 성 고르넬리오 교황과 성 치프리아노 주교 순교자 기념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인간의 끝은 하느님 측의 시작입니다. 인간의 절망은 하느님 편의 기회입니다!
이 풍진 세상 살아가는 우리는 모두 내 마음에 딱 드는 편안한 사람만 만나고 살아갈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루에도 몇 번씩 어쩔 수없이 나와 달라도 너무 다른 그, 정말이지 마주치고 싶지 않은 껄끄러운 그를 만나고, 그를 견디고, 인내하며 살아갑니다.
이런 우리에게 예수님의 인간관계 맺음 방식은 참으로 큰 경종을 울리며 다가옵니다. 예수님께서 한 바리사이 사람의 초청을 받아 식탁에 앉으셨을 때의 일입니다. 격식이나 체면과는 거리가 먼 예수님이셨습니다. 오랜만에 만나게 된 산해진미 앞에 예수님과 제자들은 신바람이 났겠지요. 기쁘고 감사한 마음으로 영양보충에 전념하시던 예수님 앞에 한 ‘껄끄러운 존재’가 등장했습니다.
루카 복음사가의 표현에 따르면 그 ‘껄끄러운 존재’는 다름 아닌 ‘죄인인 여자’였습니다. ‘행실이 양호하지 않은’ 여자였습니다. 아마도 ‘자영업’ 여성 이었던가 봅니다. 정황을 봤을 때 이 여인은 당시 사람들로부터 공공연히 손가락질 받던 인물이었습니다.
그런 여인이 만찬석상에 등장한 것만 해도 부담스런 일이었는데, 그 여인이 하는 행동 좀 보십시오. 정말 가관이었습니다. 갈수록 점입가경이었습니다. 식사 중이시던 예수님의 뒤쪽 발치에 서서 대뜸 울기 시작합니다. 그냥 우는 것이 아니라 대성통곡을 터트렸습니다.
얼마나 서럽게 울었던지 흘러내리는 눈물의 양이 만만치 않았습니다. 그 눈물은 예수님의 발을 적셨습니다. 만찬 파티에서 대성통곡을 터트리고 있는 여인, 참 안 어울리는 장면이지요. 뿐만 아니었습니다. 여인의 자신의 긴 머리카락을 이용해서 예수님의 발을 닦았습니다. 더 괴로운 일은 예수님의 발에 입을 맞추었습니다. 마무리로 향유까지 발에 부었습니다.
예수님 입장에서 보았을 때 참으로 난감한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만일 제가 예수님 입장이었더라면, 여인을 향해 크게 호통을 쳤을 것입니다. “왜 하필 밥 먹는데 까지 와서 이 난리입니까? 제발 날 좀 가만히 놔주십시오. 그리고 찝찝하게 왜 남의 발에 눈물을 떨어트려요? 남사스럽게 남의 발에 입은 왜 맞춰요? 당장 그만 안 둬요?”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여인을 조금도 몰아세우지 않으십니다. 그저 묵묵히 여인의 행동을 바라보십니다. 여인의 눈물에 담긴 지난 세월의 상처와 아픔에 깊은 연민의 정을 느낍니다. 여인의 회개하는 마음을 조용히 받아주십니다. 여인의 죄를 말끔히 씻어주십니다. 이윽고 여인에게 새 삶을 부여하십니다. 마침내 여인을 일으켜 세우십니다.
예수님의 달콤한 사랑은 갈 데 까지 간 여인의 마음을 녹이셨습니다. 예수님의 따뜻한 사랑은 지난 세월 여인이 받아왔던 갖은 상처를 순식간에 치유시켜주셨습니다. 예수님의 부드러운 손길은 여인 내면에 깃들어 있던 인간 본래의 존엄성과 고귀한 가치를 다시금 복원시켜주셨습니다.
그 옛날 여인에게 보여주셨던 것처럼 예수님께서는 상처입고 방황하는 우리들을 향해 오늘 똑같이 다가오십니다. 우리의 상처를 싸매주십니다. 새살을 돋게 하십니다.
상처 입은 영혼들이여, 힘을 내십시오. 영원한 좌절은 없습니다. 영원한 눈물도 없습니다. 끝도 없는 슬픔이란 더욱 더 없습니다. 오늘 우리의 앞길이 아무리 캄캄하다 하더라도 언젠가 저 멀리 어둠 속에서 마주 잡을 손 하나 반드시 오고야 말 것입니다.
‘위기가 호기’란 말이 있습니다. 우리가 수시로 겪는 인간적 한계 상황은 역설적이게도 은총의 순간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더 깊이 사랑하시기 위한 배려가 고통입니다. 인간의 끝은 하느님 측의 시작입니다. 인간의 절망은 하느님 편의 기회입니다.
고통과 설움의 땅을 넘어 드넓은 벌판에 당당히 서십시오. 세상의 한 복판에 용감히 서십시오. 질기고도 질긴 고통의 세월 앞에 당당히 직면하십시오. 상처에 살이 쓰라려도 흔들리면서 세상의 고통 그 한가운데로 기쁘게 나아가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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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916. 성 고르넬리오 교황과 성 치프리아노 주교 순교자 기념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용서받았다는 믿음이 ‘봉헌’으로 표현되지 않으면 실상은 용서받지 못한 것이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바리사이 시몬의 집에 초대를 받습니다. 이때 죄인인 여인이 들어와서 예수님의 발을 눈물과 향유로 씻어드립니다. 이때 시몬은 속으로 이런 생각을 합니다.
‘저 사람이 예언자라면, 자기에게 손을 대는 여자가 누구이며 어떤 사람인지, 곧 죄인인 줄 알 터인데...’
예수님은 시몬이 당신에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않고 입도 맞추지 않았지만, 그 여인은 모든 것을 내어놓았다고 하시며 그 여인의 믿음이 그 많은 죄를 용서받게 했다고 말씀하십니다. 사실 바리사이 집에 들어와 그런 모습을 보이는 것 자체가 모든 것을 내려놓았음을 의미합니다.
왜 예수님은 ‘내어놓음’, 곧 ‘사랑’의 정도와 ‘죄의 용서’를 직결시키는 것일까요? 당신께 용서를 받은 사람도 봉헌을 적게 하면서도 용서받은 것을 증명할 수는 없을까요? 없습니다. 왜냐하면, 용서란 다 내어주심을 받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박보영 목사는 심장병에 걸려 언제 죽을지 모르는 상황에서 극적으로 회개한 분입니다. 목사 집안의 아들로 태어나 당연히 목사가 될 것으로 보였으나 박 목사는 다른 길을 갑니다. 어렸을 때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끔찍한 일들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몰려와 목사인 자신의 아버지를 끌어내고 내어 쫓으려 하고 싸우는 모습들, 여자들이 계시를 받았다며 들어와 자기 어머니에게 음란마귀를 몰아내야 한다고 소리치는 모습들. 그리고 학교에서 자기 별명을 불렀다고 다리로 머리를 밟은 다음 “나는 쓰레기다.”라고 몇 번이고 복창하라고 한 선생님이 예배 때는 기도 인도자가 되어 대표로 기도하는 모습들. 이런 것들이 그를 하느님이 계심을 부정하게 만들고 혼자 힘으로 잘살아 보자는 결심을 하게 만들었습니다.
반에서 꼴찌를 하던 그는 하느님이 없음을 확신하고 분노에 가득 차 공부를 해서 의사가 되었고 좋은 집안의 아내를 얻습니다. 그 덕분인지 30년 전에 30억의 재산을 가진 병원 원장이 되었지만 그의 삶은 타락 그 자체였습니다. 덕분에 아내는 박 목사를 떠나고 박 목사는 1년 이내에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의 심장병에 걸립니다. 심박수가 어떤 때는 50 이하로 떨어지고 또 갑자기 300 이상으로 오르는 지옥의 고통을 느끼게 만드는 병이었습니다. 병원에서는 더는 손을 쓸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는 하느님을 찾지 않았습니다.
죽기 전에 작은아버지께 인사하러 인천방주교회에 갔을 때 한 절뚝거리는 여자가 걸어 내려오며 자신을 안다고 웃었습니다. 자기가 8년 전에 계시를 받았는데 목사 아들의 회개를 위해 매일 기도하라는 것이었고 오늘 그가 나타날 것이라는 소리도 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녀는 매일 기도하기 위해 8년 동안 명절임에도 시댁에도 한 번도 가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녀는 박 목사에게 오늘 자정에 주님께서 교회 안에서 만나주시겠다고 했다고 말했습니다. 박 목사는 어머니에게 찾아왔던 여인들을 생각하며 미친 사람이라 여기고 예정대로 작은아버지를 만났습니다.
밤이 되어 잠을 청했는데 심장이 안 좋아 자신도 모르게 교회에 들어갔고 성탄 트리가 있는 앞에 앉았더니 심장이 제대로 뛰더라는 것입니다. 때는 자정이었고 박 목사는 “나는 너를 내 종으로 쓰겠다.”라는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헛들었겠거니 하고 집으로 돌아왔는데 또 심장이 안 좋아 교회로 갔고 다시 성탄 트리 앞에 앉으니 마음이 편안해졌습니다. 그 후 주님은 차 사고가 날 상황에서 사고가 나지 않게 하시고 전화기를 들으면 이러저러한 내용을 들을 것이라고 하시던 그것도 그대로 이루어졌지만, 박 목사는 그런 건 다 ‘우연’의 일치일 수 있다고 생각하며 믿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날도 심장이 뛰었다 안 뛰었다 하며 죽을 고통을 느껴 교회로 찾아가 트리 앞에 앉았습니다. 그런데 그날은 이상하게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이 아니라 공황장애 증상이 와서 숨도 쉴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때 갑자기 한 여인이 나타나 그의 가슴을 열고 수술을 해주는 것처럼 하더니 검은 옷을 입히고 십자가를 목에 걸어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는 몸이 좋아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는 교회를 나와 산을 뛰어올랐습니다. 산꼭대기까지 뛰는데 숨은 찼지만, 심장은 멀쩡했습니다. 떼굴떼굴 구르면서도 너무 기분 좋은 상태로 산에서 내려왔습니다. 내려오는 도중 마음에서 이런 소리가 들렸습니다.
“나는 너에게 믿음을 주기 위해 모든 방법을 동원했는데 넌 믿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네가 의사로서 믿는 것으로 너에게 믿음을 주기 위해 네 심장을 고쳐주었다. 이젠 믿겠느냐?”
다른 모든 것은 우연일 수 있어도 의사로서 이런 일은 일어날 수 없다는 것을 믿게 된 그는 결국 하느님께 용서를 빌며 밤새 울었습니다.
그리고 가진 재산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주고 20만 원만 들고 바로 신학교에 등록하였습니다. 그때 나이가 39세였습니다. 왜 재산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주었을까요? 그것이 있었다면 목사가 되어서 바로 교회를 짓고 개척교회 목사로서 그런 고생은 하지 않았어도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받으면 내어놓고 싶은 것이 인간 양심입니다. 따라서 용서받았다는 표징은 내어놓는 것으로밖에 증명될 수 없습니다. 용서는 하느님의 다 내어주심이고 그 용서를 믿는 증거는 그 은혜 때문에 나온 나의 내어놓음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죄는 왜 시작되었을까요? ‘주님은 나에게 준 게 없어!’ 이런 불만족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래서 선악과도 봉헌하지 않고 자신의 것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죄의 시작입니다.
그렇다면 용서는 어떻게 이루어지나요? 하느님께서 그들에게 ‘가죽옷’을 입혀주셨습니다. 가죽옷은 당신 아들의 목숨입니다. 하느님은 우리 죄를 위해 당신 아드님을 대신 죽이셨습니다. 용서는 곧 내어줌인 것입니다. 그러니 용서를 받았다는 것은 다 받았다는 말과 같습니다.
저도 주님께 무언가 드린다고 생각할 때, “그래, 너 나에게 많이 주었니? 난 네게 다 주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주님께서 성체를 주실 때마다 이미 저를 용서하고 계신 줄 몰랐던 것입니다. 그리고 드는 생각은 이것이었습니다.
‘제가 당신을 위해 목숨까지 내놓아도 부족합니다.’
받았으면 주어야 한다는 법칙이 우리 양심에 쓰여 있습니다. 용서는 받는 것이기에 용서받은 사람은 자동으로 내어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여전히 소득의 10분의 1도 내어드리지 못한다면 우리는 그분으로부터 용서받았다고 감히 말할 수 있을까요? 여전히 받지 못해 불만인 마음을 가진 것은 아닐까요?
용서받았다는 믿음이 봉헌으로 표현되지 못하면 아직 용서받지 못한 것입니다. 바리사이 시몬은 용서받은 것일까요? 당연히 모든 것을 용서받았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그의 집에 들어오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는 용서받았다고 믿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들어오셨어도 아무것도 내어주지 못하여 결국 용서받지 못한 자로 남게 되었습니다.
용서받았다고 믿고 당연히 나의 것을 모두 내어드릴 때 그때 비로소 용서받는 것입니다. 용서라는 것 자체가 하느님의 모든 것을 받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받았으면 감사하게 나의 것도 내어드려야하고 그 내어드림이 있을 때 용서에 대한 믿음이 생긴 것임으로 용서가 확정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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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916. 성 고르넬리오 교황과 성 치프리아노 주교 순교자 기념일. 이승화 시몬 신부님.
이 여자는 그 많은 죄를 용서받았다. 그래서 큰 사랑을 드러낸 것이다.
교회에는 법이 있습니다.
신자라면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교회법은
우리 신앙생활을 보호해주며
우리의 정체성을 분명히 밝혀 줍니다.
그러나 법을 통해 모든 것이 해결되지는 않습니다.
법이 제정되었을 때의 의도와
법이 집행될 때의 환경에는 차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각자가 가진 생각으로 법을 해석하기 시작하면
법은 오히려 우리를 유혹하는 장애물이 됩니다.
정체성에 혼란을 주고
신앙생활을 상대적으로 만들어
결국 하느님이 아닌 사람만을 보게 만듭니다.
그렇기에 교회는 정당한 권한이 있는 이에게 맡깁니다.
교회 안에서 신앙에 대한 양성을 받고 자격이 주어진 이에게
교회법의 해석과 적용을 맡기며
우리 공동체의 신앙을 보호해 줍니다.
때때로 결정권자가 인간적인 잘못을 할 수도 있지만
권한이 있는 이에게 순명함으로써
교회의 일치를 이루며 서로 하느님의 뜻을 찾아갑니다.
곧, 결정권자는 구성원의 의견에 경청하고
구성원은 의견을 내지만 결정에 대해 순명합니다.
그런 모습을 우리는 오늘 기억하는 두 성인을 통해 배웁니다.
초대 교회에서 박해 때에 배교한 이들에 대한 문제로
많은 토론이 있었습니다.
배교한 이를 자비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이와
교회에서 정한 규율을 따라 받아들여야 한다는 이
그리고 엄격하게 받지 말아야 한다는 주장도 있었습니다.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도 중요하고
우리 신앙의 토대를 지키는 자세도 중요하며
공동체 안에 유혹이 다가오지 않도록 경계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이때 교황 고르넬리오의 결정에 치프리아노 성인은 따랐으며
이에 반대되는 주장에 대항하여 일치를 지키려 했습니다.
비록 두 성인 모두 순교로서 신앙을 증거 하였지만
그들이 보여준 일치에 대한 자세는
교회법의 해석과 적용에 중요한 점을 알려주었습니다.
곧 경청과 순명이라는 덕을 통해
그리스도교 신앙 공동체가 가져야 할 자세를 보여주었습니다.
이는 바리사이와 여인 사이에 있던 예수님의 자세이며
율법에 매여있던 바리사이에게는 율법의 정신을,
죄지은 여인에게는 사랑과 자비를 깨우쳐 주며
모두를 하느님 안으로 초대하였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도 기도합니다.
신앙 공동체 안에서 발견되는 인간적인 약함 앞에서
경청과 순명을 통해 일치될 수 있기를,
그리하여 하느님 나라 안에서 모두가 함께 하길 희망하며
오늘도 주님을 향한 형제자매들과 함께 나아갈 수 있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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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916. 성 고르넬리오 교황과 성 치프리아노 주교 순교자 기념일. 김대군 형제님.
독서,복음서 주해
제1독서<그대 자신과 가르침에 주의를 기울이십시오. 그대는 그대뿐만 아니라 그대의 말을 듣는 이들도 구원할 것입니다.>
사도 바오로의 티모테오 1서 말씀입니다. 4,12-16
사랑하는 그대여,
12 아무도 그대를 젊다고 업싱여기지 못하게 하십시오. 그러니 말에서나 행실에서나 사랑에서나 믿음에서나 순결에서나, 믿는 이들의 본보기가 되십시오.
13 내가 갈 때까지 성경 봉독과 권고와 가르침에 열중하십시오.
14 그대가 지닌 은사, 곧 원로단의 안수와 예언을 통하여 그대가 받은 은사를 소홀히 여기지 마십시오,
15 이 일에 관심을 기울이고 이 일에 전념하십시오. 그리하여 그대가 더욱 나아지는 모습이 모든 사람에게 드러나도록 하십시오.
16 그대 자신과 그대의 가르침에 주의를 기울이십시오. 이 일을 지속해 나아가십시오. 이렇게 하면, 그대는 그대뿐만 아니라 그대의 말을 듣는 이들도 구원할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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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주해(해제.역주 장 엘 마 로)
12절
당시 교회에서 젊은 교직자를 지도자로서 받아들이는 것이 문제가 되었던 것 같다. 티모테오는 사도시대 이후 젊은 나이에 교직자로 뽑힌 대표적 인물이다.
14절
교직자가 취임할 때 장로들은 안수하고 예언자들은 사명에 관한 교훈을 준 것 같다. 그 훈시를 되새기고, 교직자로서 받은 은사를 실천에 옮기라는 말이다.
15절
”이 모든 일“은 12-14절에 서술한 교직자의 직무수행을 뜻한다.
16절
필자는 하느님과 그리스도만이 우리를 구원하신다고 확신하므로 인간이 자신을 구원할 수 있다는 뜻이 아니라 하느님의 구원사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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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이 여자는 그 많은 죄를 용서받았다. 그래서 큰 사랑을 드러낸 것이다.>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7,36-50
그때에
36 바리아사이 가운데 어떤 이가 자기와 함께 음식을 먹자고 예수님을 초청하였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그 바리사이의 집에 들어가시어 식탁에 앉으셨다.
37 그 고을에 죄인인 여자가 하나 있었는데, 예수님께서 바리사이의 집에서 음식을 잡수시고 계시다는 것을 알고 왔다. 그 여자는 향유가 든 옥합을 들고서
38 예수님 뒤쪽 발치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분의 발을 적시기 시작하더니 자기의 머리카락으로 닦고 나서, 그 발에 입을 맞추고 향유를 부어 발랐다.
39 예수님을 초대한 바리사이가 그것을 보고, “저 사람이 예언자라면, 자기에게 손을 대는 여자가 누구이며 어떤 사람인지, 곧 죄인인 줄 알 터인데.‘하고 속으로 말하였다.
40 그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시몬아, 너에게 할 말이 있다.“ 시몬이 ”스승님, 말씀하십시오.“하였다.
41 ”어떤 채권자에게 채무자가 둘 잇었다. 한 사람은 오백 데나리온을 빚지고 다른 사람은 오십 데나리온을 빚졌다.
42 둘 다 갚을 길이 없으므로 채권자는 그들에게 빚을 탕감해 주었다. 그러면 그들 가운데 누가 그 채권자를 더 사랑하겠느냐?“
43 시몬이 ”더 많이 탕감받은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옳게 판단하였다.“하고 말씀하셨다.
44 그리고 그 여자를 돌아보시며 시몬에게 이르셨다.
”이 여자를 보아라. 내가 네 집에 들어왔을 때 너는 나에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않았다. 그러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자기의 머리카락으로 닦아 주었다.
45 너는 나에게 입을 맞추지 않았지만, 이 여자는 내가 들어왔을 때부터 줄곧 내 발에 입을 맞추었다.
46 너는 내 머리에 기름을 부어 발라 주지 않았다. 그러나 이 여자는 내 발에 향유를 부어 발라 주었다.
47 그러므로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이 여자는 그 많은 죄를 용서받았다. 그래서 큰 사랑을 드러낸 것이다. 그러나 적게 용서받은 사람은 적게 사랑한다.“
48 그러고 나서 예수님께서는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49 그러자 식탁에 함께 앉아 있던 이들이 속으로, ’저 사람이 누구이기에 죄까지 용서해 주는가?‘하고 말하였다.
50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여자에게 이르셨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거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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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서 주해(해제.역주 정 양 모)
36절
마르코와 마태오 복음서에서는 바리사이들이 늘 예수님의 적수인데 루카복음에서만은 그렇지 않다. 바리사이들이 예수님을 식사에 초대하기도 하고 헤로데 안티파스의 계교를 미리 알려주기도 한다(13.31).
38절
머리카락으로 발을 닦고 향유를 발라 드렸다는 기사는 요한 12.3에도 있다. 이로 미루어보건데 루카의 전승과 요한의 전승 사이에 상당한 관계가 있었다.
39절
절대다수의 사본에서는 ”예언자“, 바티칸 사본에서는 ”그 예언자“,”그 예언자“는 신명 18.15에서 예고한 종말 예언자이다(마태21.11; 요한 6.14; 사도 3.22;7.37).
41절
41-43절은 빚을 탕감해 준 비유로서 본디 앞뒤 문맥과 상광없이 발설, 전승되었다. 한 데나리온은 농촌 일꾼의 하루 품삯. 비유의 뜻인즉, 하느님은 죄를 깡그리 용서하시는데, 더 많이 용서받은 사람일수록 하느님을 더 사랑한다는 것이다. 예수께서 자주 죄인들과 어울리시는 것을 보고 적수들은 그분을 비난했다. 예수님은 당신의 처사를 옹호하며 이 비유를 발설하셨을 것이다. 뜻은 좀 다르지만, 무자비한 채권자 비유(마태 18.23-36). 나병환자 열 사람을 고쳐주신 이적사화(17,11-19)도 참조하라.
47절
47절에는 서로 반대되는 것 같은 말이 겹쳐 있다. 많이 사랑했기 때문에 많이 용서받았다는말은 44-50절과 연결되고, 적게 용서받는 사람은 적게 사랑한다는 말은 41-43절과 연결된다.
48절
48-49절은 마르 2,5-7(=루카5,20-21)과 같다. 역사상 예수님은 말로 죄를 용서하지 않고, 오직 죄인들과 어울리는 행동으로 사죄를 드러내셨다.
50절
50절은 마르 5,34(=루카8,48)와 같다.
200주년 신약성서 주해/ 분도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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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916. 성 고르넬리오 교황과 성 치프리아노 주교 순교자 기념일. 김 로마노 형제님.
[연중 제24주간 목요일]
이 여자는 그 많은 죄를 용서받았다.
(루카 7,36-50)
그때에 36 바리사이 가운데 어떤 이가 자기와 함께 음식을 먹자고 예수님을 초청하였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그 바리사이의 집에 들어가시어 식탁에 앉으셨다.
= 식탁은 제단을 의미한다. 바리사이의 식탁, 곧 옛 계약의 율법의 제단(제사)에 새 계약이신 그리스도께서 제물로 앉으신 것이다.
사도가 말한 우리의 죄 때문에 돌아가시고 묻히셨으며, 사흗날에 되살아나신 그 기쁜 소식, 복음, 용서 의 새 계약이 앉으신 것, 율법과 상관없는 하늘의 의로움이신 분(로마3,21)
(로마3,24-25) 24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이루어진 속량을 통하여 그분의 은총으로 거저 의롭게 됩니다. 25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을 속죄의 제물로 내세우셨습니다. 예수님의 피로 이루어진 속죄는 믿음으로 얻어집니다. 사람들이 이전에 지은 죄들을 용서하시어 당신의 의로움을 보여 주시려고 그리하신 것입니다.
= 그 기쁜 소식, 복음을 들은 죄의 여자가 예수님을 찾는다.
37 그 고을에 죄인인 여자가 하나 있었는데, 예수님께서 바리사이의 집에서 음식을 잡수시고 계시다는 것을 알고 왔다. 그 여자는 향유가 든 옥합을 들고서 38 예수님 뒤쪽 발치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분의 발을 적시기 시작하더니 자기의 머리카락으로 닦고 나서, 그 발에 입을 맞추고 향유를 부어 발랐다.
= 자신의 입(말)으로 지은 모든 죄를 대신하시는 대속의 죽음, 곧 구원의 십자가의 길을 가실 그 진리의 발에 자신의 모든 것(향유)을 던진 것이다. 자신의 죄를 버리고 목숨을 의탁하는 것이다.
그 같은 진실, 죄의 덮으심, 대속, 그 하늘의 의로움(사랑)을 모르고~ 자신의 열성, 자기 의로움의 제사를 드린다면, 그 제단, 식탁을 고집 한다면 , 하느님의 용서를 몰라 다른이의 죄를 볼 뿐이다.
39 예수님을 초대한 바리사이가 그것을 보고, ‘저 사람이 예언자라면, 자기에게 손을 대는 여자가 누구이며 어떤 사람인지, 곧 죄인인 줄 알 터인데.’ 하고 속으로 말하였다. 40 *그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시몬아, 너에게 할 말이 있다.” 시몬이 “스승님, 말씀하십시오.” 하였다. 41 “어떤 채권자에게 채무자가 둘 있었다. 한 사람은 오백 데나리온을 빚지고 다른 사람은 오십 데나리온을 빚졌다. 42 둘 다 갚을 길이 없으므로 채권자는 그들에게 빚을 탕감해 주었다. 그러면 그들 가운데 누가 그 채권자를 더 사랑하겠느냐?” 43 시몬이 “더 많이 탕감 받은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옳게 판단하였다.” 하고 말씀하셨다.
44 그리고 그 여자를 돌아보시며 시몬에게 이르셨다. “이 여자를 보아라. 내가 네 집에 들어왔을 때 너는 나에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않았다. 그러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자기의 머리카락으로 닦아 주었다. 45 너는 나에게 입을 맞추지 않았지만, 이 여자는 내가 들어왔을 때부터 줄곧 내 발에 입을 맞추었다. 46 너는 내 머리에 기름을 부어 발라 주지 않았다. 그러나 이 여자는 내 발에 향유를 부어 발라 주었다. 47 그러므로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이 여자는 그 많은 죄를 용서받았다. 그래서 큰 사랑을 드러낸 것이다. 그러나 적게 용서받은 사람은 적게 사랑한다.” 48 그러고 나서 예수님께서는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 앞에서 묵상 했듯이 죄는 그리스도의 죽음, 그 피로 얻는 것, 그 대속의 고해 성사가 아닌 죄를 몇가지 골라 드린 고해성사라면 용서 받았음의 기쁨이 나올까?
오늘 복음 환호송처럼 신앙이 무거운 짐이 될 뿐이다. 곧 하늘의 안식, 자유는 모른다는 것이다.
49 그러자 식탁에 함께 앉아 있던 이들이 속으로, ‘저 사람이 누구이기에 죄까지 용서해 주는가?’ 하고 말하였다.
=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당신의 죽음으로 제사를 완성하신, 그래서 더 이상 예물이 필요 없고 더러운 양심까지 깨끗하게 하신 그분의 피의 새 계약, 십자가로 받는 용서, 그 복음은 모르면서 매일 제사를 드리는 신앙은 헛된 것이다.
(1코린15,2) 2 내가 여러분에게 전한 이 복음 말씀을 굳게 지킨다면, 또 여러분이 헛되이 믿게 된 것이 아니라면, 여러분은 이 복음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 구원, 곧 용서와 하늘의 생명은 기쁜 소식, 그 복음(말씀)을 믿어 받는 것이다.
50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여자에게 이르셨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거라.”
* 우리의 식탁을~ 매일, 매식마다 감사의 식탁(제단)으로 그 제단의 양식으로 먹으면 어떨까? 식탁위에 오르는 모든 양식(피조물)이 말씀으로 창조되어 자라나고 지어진 것, 곧 생명의 양식, 말씀 양식인 것이다. 그 말씀으로 먹는다면~ 그 피조물 안에 하느님의 신성과 본성인 대속의 죽음, 그 사랑이 들어 있으니까~~
감사의 잔치(에우까리스띠아-미사)가 아닌가~~그리고 그 식탁에 앉는 ‘나와 너’가 그 용서의 양식(말씀)을 먹는다는 것을 믿으면, 우리는 매일, 매식 감사(미사)의 삶을 사는 것이다.
(지혜16,24-26) 24 피조물은 자기를 만드신 당신을 시중들며 불의한 자들을 징벌하는 데에는 그 힘이 팽팽해지고 당신을 신뢰하는 이들에게는 득이 되도록 그 힘이 느슨해집니다. 25 그래서 피조물은 그때에도 온갖 형태로 바뀌면서 궁핍한 이들의 바람에 따라 모든 이를 먹여 살리는 당신의 선물로 쓰였습니다. 26 그리하여 주님, 당신께서 사랑하시는 자녀들이 사람을 먹여 살리는 것은 여러 가지 곡식이 아니라 당신을 믿는 이들을 돌보는 당신의 말씀임을 배우게 하셨습니다. 아멘.
연중 제24주간 목요일 복음(루카7,36~50)
"너는 내 머리에 기름을 부어 발라 주지 않았다. 그러나 이 여자는 내 발에 향유를 부어 발라 주었다. (46) 그러므로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이 여자는 그 많은 죄를 용서받았다. 그래서 큰 사랑을 드러낸 것이다. 그러나 적게 용서받은 사람은 적게 사랑한다." (47)
루카 복음 7장 46절에는 이중 대구 구조가 나타난다.
즉 '기름'에 해당하는 '엘라이오'(elaio; oil)와 '향유'에 해당하는 '뮈로'(myro; ointment; perfume), '머리'에 해당하는 '텐 카팔렌"(ten kephalen; head)과 '발'에 해당하는 '투스포다스'(tus podas; feet)가 대칭되는 개념이다.
'기름'과 '향유'는 모두 기름의 일종이지만, '향유'('뮈로')는 그 앞에 종종 '값비싼'이라는 형용사가 붙는 것처럼 매우 값진 기름이다.
반면에 '기름'은 때로는 램프의 기름이나 병자를 치료하는 약, 때로는 머리와 몸에 붓거나 바르는 등 일상생활에서 흔하게 사용되는 기름이다.
이것은 당시 올리브 나무로 뒤덮였기 때문에 붙여졌던 '올리브산'이라는 명칭에서 볼 수 있듯이 쉽게 구할 수 있었던 값싼 물건이었다.
당시 '향유'를 부을 때에는 일반적으로 머리에 부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값싼 '기름'조차도 붓지 않은 바리사이 시몬과 값비싼 향유임에도 불구하고 감히 머리에 붓지 못하고 예수님의 발에 부은 여인을 비교하심으로써 그녀의 겸손과 헌신을 칭찬하시고 계신 것이다.
'그래서 큰 사랑을 드러낸 것이다'
원문은 '호티 에가페센 폴뤼'(hoti egapesen poly; for she loved much)이다. 여인의 사랑과 헌신적 행위가 죄를 용서받게 된 근거가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죄의 용서는 순전히 하느님의 은혜로 주어지는 것이지, 결코 하느님께서 사랑에 대한 보답으로 주시는 것이 아니라고 이것을 반대하는 학자들이 있어 논란이 되는 구절이다.
그래서 여기의 '호티'(hoti)를 '내가 너에게 말한다'로 번역된 '레고 소이'(lego soi; I tell you)에 걸리는 종속절로 보아서 '내가 그녀의 많은 사랑함에 대해 말하는데'로 번역하여 '호티'(hoti)이하의 절을 그녀의 많은 죄의 용서의 근거가 아니라 죄의 용서를 선포하는 근거로 보기도 한다.
루카 복음 7장 47절과 48절에 '죄를 용서받았다'는 말이 나오는데, 이것은 '용서받았다'에 해당하는 '아페온타이'(apheontai; are forgiven)라는 새로운 단어이다.
이 단어의 원형은 '아피에미(aphiemi)인데, 이것은 '보내다'라는 뜻의 '히에미'(hiemi)에 '~로 부터'를 의미하는 전치사 '아포'(apo)가 합쳐진 형태로서, '~로부터 떼어 보내다'라는 의미를 지닌다.
이것은 여인이 자신을 억누르던 죄('하마르티아이'; hamartiai; sins)와 이로 말미암아 받게 되는 주위의 비난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났음을 표현한다.
과거의 허물과 실수, 죄악이 현재나 미래에 미치는 결과까지 완전히 백지화되었다는 뜻을 가지고 있는 이 '아피에미'(aphiemi)를 통해서 여인은 죄인의 신분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났고, 이러한 공적인 선포를 통해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죄의 용서의 권한과 권세를 갖고 있는 분이심을 드러내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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