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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꿈을 먹고 자란 요셉
37: 1~11
○ 요셉의 꿈
1. 야곱이 가나안 땅 곧 그 아비의 우거하던 땅에 거하였으니 창36:7
2. 야곱의 약전이 이러하니라 요셉이 십 칠세의 소년으로서 그 형제와 함께 양을 칠 때에 그 아비의 첩 빌하와 실바의 아들들로 더불어 함께하였더니 그가 그들의 과실을 아비에게 고하더라
3. 요셉은 노년에 얻은 아들이므로 이스라엘이 여러 아들보다 그를 깊이 사랑하여 위하여 채색옷을 지었더니 창44:20, 삼하13:18
4. 그 형들이 아비가 형제들보다 그를 사랑함을 보고 그를 미워하여 그에게 언사가 불평하였더라
5. 요셉이 꿈을 꾸고 자기 형들에게 고하매 그들이 그를 더욱 미워하였더라
6.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청컨대 나의 꾼 꿈을 들으시오
7. 우리가 밭에서 곡식을 묶더니 내 단은 일어서고 당신들의 단은 내 단을 둘러서서 절하더이다 창42:6, 창44:14
8. 그 형들이 그에게 이르되 네가 참으로 우리의 왕이 되겠느냐 참으로 우리를 다스리게 되겠느냐 하고 그 꿈과 그 말을 인하여 그를 더욱 미워하더니
9. 요셉이 다시 꿈을 꾸고 그 형들에게 고하여 가로되 내가 또 꿈을 꾼즉 해와 달과 열 한 별이 내게 절하더이다 하니라 창46:29
10. 그가 그 꿈으로 부형에게 고하매 아비가 그를 꾸짖고 그에게 이르되 너의 꾼 꿈이 무엇이냐 나와 네 모와 네 형제들이 참으로 가서 땅에 엎드려 네게 절하겠느냐 창35:18
11. 그 형들은 시기하되 그 아비는 그 말을 마음에 두었더라 눅2:19, 행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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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의 사람 믿음의 사람' 집회 첫째 날, 하용조 목사와 전 성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에 앞서 히브리서 4장 12절, 디모데후서 3장 16,17절 말씀을 한 목소리로 선포하며 그 말씀대로 살 것을 다짐했다.
성경에 나오는 인물 가운데 우리가 가장 닮고 싶은 인물이 있다면 요셉일 것입니다. 우리는 그동안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 대한 생애를 뒤돌아 보았습니다. 그들에게도 인간적인 실수는 있었지만 그들은 믿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요셉의 삶을 볼 때마다 격려와 용기와 감동을 받는 것은 그가 최악의 상황을 최선으로 바꾸었다는 데 있습니다. 누구든지 위기를 경험합니다. 위기는 문제가 아닙니다. 그 위기를 축복으로 어떻게 바꾸느냐가 중요합니다.
요셉의 특징이 있습니다. 그는 환경 탓, 조상 탓을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특징은 환경 탓, 조상 탓을 하는 것입니다. 요셉을 보면, 그렇게 억울하고 어려운데도 하나님 탓을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힘들게 했던 사람들을 원망하지도 않습니다. 여기에 요셉에 대한 감동이 있습니다.
요셉의 생애를 네 가지로 이야기 하고 싶습니다.
☛ 첫째, 그는 정직한 사람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 시대의 위기는 정직의 위기입니다. 정직이 무너지면 다 무너집니다. 요셉은 정직한 사람이었습니다.
☛ 둘째, 우리가 발견하는 점은 그가 꿈의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꿈을 꿀 줄 알았고, 꿈을 이룰 줄 알았던 사람, 어떤 위기 속에서도 꿈을 간직했던 사람이 요셉입니다.
☛ 요셉의 또 다른 특징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의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 요셉의 생애의 클라이막스는 용서입니다.
형들을 용서하고 모든 사람을 다 품고나서 요셉의 생애는 마무리됩니다.
정직한 사람, 꿈의 사람, 믿음의 사람, 용서의 사람의 모습이 여러분의 삶 속에서 발견되기를 축원합니다.
이런 사람이 바로 예수님이었습니다. 요셉이야말로 가장 예수님을 닮은 사람이었습니다.
정직한 요셉
오늘 본문에서 생각하고 싶은 것은 요셉의 정직함입니다. 정직은 타고 나야 합니다. 내가 노력해서 정직해 질 수 있지만 그럴지라도 천성적으로 정직이 있어야 합니다. 저는 여러분의 자녀들에게 이 정직한 기질이 있기를 바라고, 품성이 있기를 바랍니다. 어떤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사기성을 갖고 태어납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이 사기성을 벗어나기 어려운 사람도 있습니다. 요셉의 아버지 야곱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요셉을 공부해 보면 아주 신기한 것이 많습니다. 어떻게 야곱같은 사람에게서 요셉이 태어날 수 있었을까요? 불가능한 일 같습니다.
‘야곱’이라는 이름은 움켜쥔다는 것입니다.
그는 사기꾼이었습니다. 형 에서의 장자권과 축복권을 훔쳤고 그로 인해 집을 떠나 방랑의 세월을 보낸 사람이 야곱이었습니다. 성경을 보면 놀라운 것이 많습니다. 이삭에게서 야곱이 나온 것도 놀랍고, 야곱에게서 요셉이 나왔다는 것도 놀랍습니다.
이 사실을 미루어 볼 때, 부모 탓을 하지 말아야 함을 알 수 있습니다. 부모와 상관없이, 요셉처럼 될 수 있습니다. 부모가 여러분이 따라가기 힘든 모습을 보여주고 그래서 여러분이 어려운 일을 많이 겪었다 할지라도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요셉을 보십시오. 신기할 정도로 요셉은 그 모든 환경을 뛰어넘었습니다.
요셉은 아버지와 전혀 다른 기질, 전혀 다른 성품을 가지고 태어납니다. 하나님은 그에게는 천성적으로 거짓없는 양심을 주신 것 같습니다.
창세기 37장 1, 2절을 보면서 시작하겠습니다.
“야곱이 가나안 땅 곧 그 아비의 우거하던 땅에 거하였으니 야곱의 약전이 이러하니라 요셉이 십칠세의 소년으로서 그 형제와 함께 양을 칠 때에 그 아비의 첩 빌하와 실바의 아들들로 더불어 함께 하였더니 그가 그들의 과실을 아비에게 고하더라”
본문에는 요셉의 어릴 적 이야기는 소개되지 않고 17세 소년이 되어 사춘기를 겪는 예민한 나이였을 무렵부터 소개를 합니다.
말씀을 보면 요셉은 아버지와 형제들과 함께 약속의 땅에서 자라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아마 요셉의 마음 속에 어릴 때부터 하나님에 대한 약속, 믿음이 자리잡을 수 있는 터전이 되지 않았을까 생각해 봅니다.
어떤 분위기에서 우리 자녀들이 자라는가 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요셉은 어머니를 일찍 잃었습니다. 요셉의 어머니 라헬은 요셉의 동생인 베냐민을 낳을 때 난산으로 죽었습니다. 요셉에겐 다른 형제들이 있었지만 배다른 형제들이었습니다. 의붓어머니가 셋이 더 있었습니다. 이런 분위기에서 요셉이 17세의 소년으로 자랐습니다. 그러나 놀라운 사실은 요셉에게 상처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저는 여러분에게 상처가 없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환경이 어려우면 상처를 받습니다. 부모가 이상적인 부모가 아닐 때 상처를 받습니다. 그래서 그것으로 인해 성격이 비뚤어지고 말도 곱게 하지 못합니다. 혈기를 부리고 시기하고 경쟁하며 거짓말을 하는 성품으로 만들어지기 쉽습니다.
요셉을 보십시오. 그가 이런 환경 속에서도 환경과 상관없이 쭉 뻗은 대나무처럼 자란 것은 기적 중의 기적입니다. 아버지가 그렇게 교육했을까요? 아닙니다. 야곱은 사기꾼이었습니다. 그런 아버지가 무슨 교육을 했겠습니까? 이것을 기억하십시오. 환경이 어려워도, 부모님이 어려워도, 얼마든지 상처없이 순진하게 자랄 수 있습니다. 1,2절을 다시 보십시오. 요셉의 특징 중의 하나는 불의와 거짓을 용납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요셉은 빌하와 그의 아들들과 함께 양을 쳤습니다. 그런데 배다른 형제들이 불의한 일을 행한 것을 목격한 요셉은 못본척 하지 않고 아버지에게 모두 일러바쳤습니다. 어떻게 보면 고자질이고, 남자로서 의리없는 행동입니다. 저는 이 본문에서 요셉의 행동이 옳은가를 놓고 몹시 고민했습니다. 결국 요셉은 천성적으로 거짓말을 못하는 성격이었을 것이라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비록 고자질 같고, 내가 괴롭고, 다른 사람이 피해를 본다 할지라도 거짓말을 못했던 것입니다.
요셉이 그 형들을 미워해서 고자질 한 것이 아니라는 증거가 있습니다. 야곱이 형들에게 도시락을 갖다 주라고 했을 때 그는 순종했습니다. 만약 요셉이 형들을 미워했거나 질투했다면 그렇게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순종했고 형들이 그 자리에 없어서 수소문까지 해가면서 찾아간 것을 보면 요셉은 형들에게 나쁜 감정이 없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요셉은 왜 일러바쳤을까요? 그의 정직성 때문입니다. 우리의 위기는 정직을 잃어버린 데 있습니다. 우리는 정직하면 죽습니다. 우리는 정직하면 손해를 봅니다. 그래서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고, 보고도 보지 않은 척하고, 사건도 해석을 반대로 해서 현실을 지혜롭게 산다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 민족을 위하여 기도할 때마다 ‘주님 우리 민족성 속에 정직이 있게 하옵소서’라고 합니다.
교회가 가지고 있는 최대의 위기는 예수를 잘못 믿는 것이 아니라 교인들이 정직하지 않은 것입니다. 성령도 받고, 성경도 잘 읽고, 기도도 많이 하는데 우리 삶 속에 정직이 없습니다.
편애하는 야곱
두 번째 요셉의 생애를 통해서 발견하는 것은 그가 아버지의 지극한 사랑을 받고 자랐다는 것입니다. 3,4절입니다.
요셉은 노년에 얻은 아들이므로 이스라엘이 여러 아들보다 그를 깊이 사랑하여 위하여 채색 옷을 지었더니 그 형들이 아비가 형제들보다 그를 사랑함을 보고 그를 미워하여 그에게 언사가 불평하였더라
이 구절을 보면 요셉에게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에게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버지 야곱이 요셉을 편애했습니다. 요셉에게 채색 옷을 입히니 다른 형제들이 시기하고 질투했습니다. 말도 험하게 했습니다. 그런 상황이 여기 벌어지고 있습니다. 야곱이 요셉을 편애한 것은 이해할 수 있습니다. 네 명의 부인 중에서 요셉의 어머니였던 라헬은 야곱이 가장 사랑했던 여인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여자가 낳은 아이를 야곱이 사랑한다는 것은 이해할만 합니다. 또 어머니가 일찍 죽었기 때문에 아버지로서 안타까운 마음이 있어서 요셉을 누구보다도 더 챙겼을 것이란 것도 짐작이 갑니다. 그래서 성경을 보면 여러 아들들보다 그를 더욱 깊이 사랑하여 채색 옷을 지어 입혔다고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그 결과는 형들의 시기와 질투, 그리고 가정의 불화였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두 가지를 배우게 됩니다.
☛ 첫째, 편애는 자녀들에게 갈등을 준다는 것입니다.
가정의 불화를 가져오게 됩니다. 부모도 인간이기 때문에 자녀들 중에 누구를 더 특별히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본문을 통해서 부모님들이 배워야 할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편애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똑같이 나워 주어야 합니다. 여기서 다른 각도로 야곱의 편애를 보고 싶습니다. 배다른 형제들의 입장에서 보면 아버지의 편애는 몹시 불편한 것이었지만, 요셉의 입장에서는 매우 놀라운 일이었을 것입니다. 요셉은 특별한 대우를 받았습니다. 그랬을 때 아버지에 대한 요셉의 감정은 어땠을까요? 아마도 ‘아버지는 내가 무슨 실수를 해도 다 용서하실 것이다.’라는 믿음이 있었을 것입니다. ‘아버지가 나를 사랑하는 것은 확실하다. 그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라는 생각을 갖고 자랐을 것입니다.
이것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부모가 자신을 어떠한 경우에도 용서하고 사랑한다는 믿음을 갖고 자라는 것이 아이의 미래에 있어서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사랑받고 있다고 느끼는 것 만큼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우리들의 모든 비극은 거절감 때문입니다. 부모가 나를 거절하고, 사람들이 자신을 믿어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나를 이용했을 뿐 사랑한 것이 아니었다’라고 느낄 때 인격에 위기가 옵니다. 그러나 ‘누군가 나를 정말 사랑한다’, ‘자기 자식을 죽일 만큼 나를 사랑한다’, ‘이 사랑은 진짜다’라는 믿음이 생기면 변하기 시작합니다.
☛ 요셉에게는 아버지가 자신을 사랑한다는 확신이 분명했던 것 같습니다.
요셉은 사랑을 받고 자란 반면 배다른 형제들은 불신 속에서 자랐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을 구원의 차원에서 이야기 하기 원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편애입니다. 나에게 사랑받을 만한 조건도, 자격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일방적으로 자기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이기까지 나를 사랑하셨고, 내가 하나님의 사랑을 거부했을 때에도 하나님은 그 오랜 시간 동안 내가 돌아오기를 기다리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한 번도 쉰 일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한 번도 좌절한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 앞에 녹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편애받고 자랐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하나님의 사랑과 야곱의 차이점은 이것입니다. 야곱은 요셉만 편애했고, 하나님은 우리 모두를 편애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깊이와 넓이와 크기를 측량할 수 없는 사랑을 무조건 쏟아 부어주셨습니다. 저는 여러분의 자녀들이 부모의 신뢰와 사랑을 받고 자라는 자녀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한 번도 부모의 따뜻한 사랑과 용서를 받지 못하고 자란 자녀는 불행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안심하십시오. 하나님은 여러분을 편애하십니다. 부모는 나를 버릴지라도 하나님은 나를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두 가지 꿈
세 번 째, 요셉은 꿈을 먹고 자란 사람이었습니다. 이것이 소년 시절의 특징입니다. 요셉은 정직하게 자랐고, 사랑을 받고 자랐으며, 꿈을 먹고 자랐습니다.
5~10절을 읽겠습니다.
“요셉이 꿈을 꾸고 자기 형들에게 고하매 그들이 그를 더욱 미워하였더라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청컨대 나의 꾼 꿈을 들으시오 우리가 밭에서 곡식을 묶더니 내 단은 일어서고 당신들의 단은 내 단을 둘러서서 절하더이다 그 형들이 그에게 이르되 네가 참으로 우리의 왕이 되겠느냐 참으로 우리를 다스리게 되겠느냐 하고 그 꿈과 그 말을 인하여 그를 더욱 미워하더니 요셉이 다시 꿈을 꾸고 그 형들에게 고하여 가로되 내가 또 꿈을 꾼즉 해와 달과 열한 별이 내게 절하더이다 하니라 그가 그 꿈으로 부형에게 고하매 아비가 그를 꾸짖고 그에게 이르되 너의 꾼 꿈이 무엇이냐 나와 네 모와 네 형제들이 참으로 가서 땅에 엎드려 네게 절하겠느냐”
요셉은 정직했습니다. 그는 사랑을 받고 자랐습니다. 그러나 그의 가장 큰 특징은 비전의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꿈을 꾸며 살았습니다.
17세 때 있었던 일입니다. 그는 평생에 있어 잊을 수 없는 꿈을 꾸게 됩니다. 이 꿈 때문에 요셉은 역경과 모함과 위기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게 됩니다. 꿈을 꾸는 사람들은 눈이 반짝거립니다. 배고파도 반짝거리고, 실패해도 반짝거립니다. 꿈이 있는 민족은 망하지 않습니다. 꿈이 있는 사람에게는 미래가 있습니다. 저는 여러분들에게 성령의 꿈, 하나님의 꿈이 있기를 축원합니다.
요셉의 꿈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좀 특이합니다.
꿈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자기가 만든 꿈이 있습니다.
어릴 때 가난하게 산 사람은 부자가 되고픈 꿈이 있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꿈입니다.
나로부터 온 꿈과 하나님으로부터 온 꿈은 큰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는 내가 꾸는 꿈을 가리켜 ‘백일몽’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요셉이 꾼 꿈은 자기가 만든 꿈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꿈이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중요한 정의를 하기 원합니다.
크리스천이 갖는 꿈은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이어야만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포기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꿈이기 때문에 반드시 이루어 지는 것입니다.
요셉이 꾼 꿈은 어떤 것입니까?
첫 번 째 꿈은 자기가 묶은 곡식 단이 있는데 그 단에다 형들이 묶은 곡식 단들이 절을 했다는 것입니다. 말이나 됩니까? 상식에 맞지 않아서 이해할 수 없는 말입니다. 그런데 사실입니다. 이 꿈은 13년 후에는 사실로 변했습니다.
하나님의 꿈은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합니다. 이것은 미래에 일어날 일에 대한 암시입니다. 꿈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하면 사람들은 미워하고, 분노하고, 시기하고, 공격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주신 꿈의 특징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 입니다. 온누리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꿈이 있습니다. 그 꿈을 다 이야기 한다면 우리는 힘들고 어려운 상황 에 빠져 모두 도망갈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획과 꿈은 온누리교회를 통해서 반드시 이루어 질 것입니다. 교회가 여러분의 이성과 상식에 맞지 않는 이야기들을 가끔 합니다. 저도 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나 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가지신 이상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자녀들에 대해서, 자신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입니다.
요셉이 두 번 째 꿈을 꾸는데 매우 이상합니다.
요셉이 버티고 있는데 하늘의 해와 달과 열한 별이 요셉에게 절을 했다는 것입니다. 황당무계하고 말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13년 후에 이 꿈이 이루어 졌다는 것입니다. 형들이나 아버지 입장에서는 요셉의 꿈을 이해하기 어려웠고, 받아들이기 어려웠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꿈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꿈을 가진 사람
꿈은 하나님이 주십니다. 하나님이 주신 꿈은 황당무계한 성격을 갖고 있습니다. 요셉의 나이를 보십시오. 그는 이미 상식이 있는 나이였습니다. 그는 이 말을 해서 자신에게 이로울지 이롭지 못할지 판단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꿈을 꾸었다면 말하지 않는 것이 낫습니다. 보나마나 욕 먹을 꿈이고 시기와 질투를 받을 만한데 왜 이야기를 하겠습니까? 그런데 요셉은 이 꿈을 정직하게 이야기 했습니다.
여기서 또 하나 배우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꿈은 말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레미야를 보십시오. 그는 자기 민족이 망한다는 계시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만나는 사람마다 나라가 멸망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 말을 누가 좋아하겠습니까? 상상해 보십시오. 누군가가 북한이 쳐들어와서 우리는 망할 것이라고 계속 말한다면 듣기 좋겠습니까? 그리고 그 말이 요즘 같은 분위기에 통하기나 하겠습니까? 예레미야가 얼마나 괴로웠으면 예언을 하지 않겠노라고 했을까요? 그런데도 속에서 불이 나서 예언을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것이 예언입니다. 요셉이 꾼 꿈이 그런 것이었습니다. 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예수님의 이야기 입니다. 만약에 여러분이 예수를 믿었는데 예수 이야기를 하지 않아도 괜찮다면 그것은 예수가 아닙니다. 복음을 전하지 않아도 두 다리 뻗고 잘 수 있는 것은 복음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전하지 않아도 좋은 것은 하나님이 아닙니다. 이 이야기를 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고, 말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고, 그 이야기를 하면 인기도 잃고 재산도 잃고 핍박을 받을 것을 알면서도 예수 그리스도 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요, 그를 믿어야만 천국에 간다고 말할 수밖에 없어야 합니다.
이것이 꿈입니다. 여러분의 상식에 맞고 다른 사람의 상식에 맞는 꿈은 그냥 상식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요셉을 ‘꿈의 사람’이라고 말할 때 그는 타협할 수 없는 꿈, 지울 수 없는 꿈, 말하지 않으면 안되는 꿈을 받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꿈은 날이 갈수록 선명해집니다. 이것이 특징입니다. 여러분이 예수를 처음 믿었을 때의 감격은 시간이 간다고 없어지지 않습니다. 날이 갈수록 그 감동은 새롭게 다가옵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발견하는 것이 있습니다. 꿈 이야기를 하면 사람들이 환영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꿈의 특징입니다. 형들도 비판하고 아버지도 비판합니다. 비판을 넘어 미워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꿈을 가진 사람은 외롭습니다. 하나님의 꿈을 가진 사람들은 어떤 면에서는 거부를 당합니다. 그럼에도 그 꿈을 갖고 삽니다. 노아는 방주를 짓는 꿈을 꾸었습니다. 바다에 방주를 지으면 누가 뭐라고 했겠습니까? 산에다 방주를 지으니 아무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배 같은 모양도 아니고 이상하게 생긴 것을 지으니 아무도 그 용도를 몰랐습니다. 노아만이 그 꿈을 가지고 몇 백년 동안 방주를 지었습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 되는 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여러분에게는 무슨 꿈이 있습니까? 여러분이 만든 꿈이 아닌 하나님이 주신 꿈, 새 하늘과 새 땅의 꿈, 조국이 통일되는 꿈, 세상이 변화되는 꿈,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에게 주신 꿈은 어떤 것입니까?
사람은 밤이 아니라 꿈을 먹고 사는 존재입니다. 동물의 특징은 비전이 없다는 것입니다. 꿈이 없고 비전이 없다면 우리는 동물과도 같습니다. 먹고 자고 쾌락을 누리고 물질에 만족하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아무 것도 아닙니다. 죽는 순간까지도 꿈을 이야기 할 수 있는 꿈의 사람, 믿음의 사람, 환상의 사람은 미래를 엽니다. 세상을 변화시키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는 꿈이 있었습니다. 십자가를 질 때 예수님은 거부하지 않았습니다. 십자가 앞에 당당히 나가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지셨기에 온 인류를 구원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내 목소리가 크면 다른 사람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습니다. 내 생각, 내 꿈, 내 계획이 많은 사람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자기 것을 포기하면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됩니다.
출처 : 하용조 목사
출처: 성경 벌레들 원문보기 글쓴이: 성경 벌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