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여성수필의 정체성 연구
80년대 여성언술의 특성
3. 열림 지향성
권대근
문학박사, 대신대학원대학교 교수
여성 수필에 나타난 언술 특성의 세 번째 유형은 열림 지향의 언어 형식이다. 자아 정체성의 확립 과정에서 여성들이 자멸하지 않기 위해서는 자신들의 상처를 마음 속에 두지 말고 겉으로 드러내야 한다. 그동안 억눌려 있던 언어의 물꼬를 과감하게 트이게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트임은 언어의 범람으로 이어지면서 전염성과 확산성을 지닌 교체와 혼합, 대화와 논쟁, 구술의 언어를 형성함으로써 여성 언어의 특성을 드러내게 된다. 여성의 말, 여성이 내어놓지 못하고 응얼거리던 말, 여성의 몸 깊숙이 배어 있으나 그릇이 없어 떠올리지 못하던 말들이 여성의 문학 속에서 새로운 형상으로, 새싹이 흙을 밀치고 올라오듯 빼곡히 내밀어져 올라올 것이다.
남성의 언어는 가능한 한 이성에 바탕을 두고 논리 정연한 규칙에 따르려 하기 때문에 구심적인 언어라고 할 수 있다. 반면 여성의 언어는 임의성과 비종결성을 특징으로 하면서 중심으로부터 벗어나려고 하기에 원심적인 언어라고 할 수 있다. 구심적 언어는 단일성과 통일성을 중시하는데 비해 원심적인 언어는 다원성과 상대성을 강조한다. 따라서 여성의 언어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바는 ‘퍼짐’의 언어를 통한 감금으로부터의 탈출이다.
먼저 교체와 혼합의 언어는 작가가 전지적인 관점에서 사건을 전부 설명해 주는 권위적이고 단성적인 언어에 반대할 때 발화된다. 억압적이고 질서 정연하며 단성적인 남성의 언어를 깨뜨리는 것이 바로 다성성에 기초한 여성의 언어이기에 이런 언어를 통해 여성들은 복수적인 시점이나 개방성을 확보하려고 한다. 이처럼 다양하고 역동적이어서 고정된 형태를 거부하는 여성의 언어는 ‘열린 언어’에 접근하면서 모호하거나 긴장을 유지하는 언어가 된다.
대화와 논쟁의 언어는 자신의 의견을 상대방에게 전달하고 싶은 간절한 욕망이나 관계를 맺으려는 욕망, 독백의 언어를 거부하면서 부재의 공간에서 자신의 존재를 찾아내려는 욕망을 나타낸다. 자신의 내면을 폭로하는 이런 대화와 논쟁을 통해 여성들은 거침없이 쏟아져 나오는, 그래서 멀리 퍼지는 언어를 형성한다.
그리고 구술과 광기의 언어는 앞뒤가 맞는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행위로부터 벗어나는 데에 쓰인다. 잘 정돈된 ‘글’은 이성에 바탕을 둔 ‘중심’에 바탕을 둔 ‘주변’의 언어이다. 이런 구술적인 ‘말’의 언어를 통해 화자는 청자에게 직접 말을 걸면서 그의 응답을 적극적으로 유발시킨다. 또한 가부장적 사회에서의 여성은 자신만의 고유한 표현 수단이 없어서 억눌린 분노와 고통을 광기로 나타낼 수밖에 없었다. 흔히 여성이 ‘남성이 아닌 존재’로 정의되어 온 것처럼 광기도 ‘이성이 아닌 것’으로 정의되어 왔다. 그러나 도덕적 제약이나 남성의 권위를 나타내는 이성에 대항하는 힘이 바로 광기라는 새로운 평가가 내려지고 있다. 이때 광언은 자유로움과 본능, 솔직함을 드러내는 여성의 언어와 보다 쉽게 결합된다.
이러한 언어들은 모두 지나치게 많이 이야기하는 여성들의 언어의식을 드러낸다. 자신들의 언어가 없었기 때문에 남성의 언어로 이야기할 수밖에 없었고, 그것도 불충분하게 이야기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여성들은 이에 반발하면서 언어를 풀어 놓아 널리 퍼지게 한다. 이런 ‘퍼짐’을 통해 자아 자체가 외부로 열리는 체험을 하고 싶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렇게 갑자기 많은 이야기를 하는 여성들의 언어는 그동안 그것이 얼마나 밖으로 나오지 못하도록 억눌려 왔는지를 역으로 드러내 주는 언어들이라고 할 수 있다. 여성 정체성의 측면에서 보면, 다른 세 가지 특성 중에서 가장 적극적인 저항 의사 표시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이러한 관점을 바탕으로 본장에서는 남성들의 논리적인 언어규칙에서 탈피하여, 억압된 욕망의 분출을 나타내는 ‘열림 지향성’의 특성을, 대화의 생산성과 구술의 확산성으로 크게 대별해서 구체적으로 고찰해보도록 하겠다. 전자는 ‘나눔’의 언어라는 측면에서 관계 지향적인 여성의 본질과 잘 부합하고, 후자는 여성언어로서 여성의 이야기하고 싶은 욕구를 자극하는 언어이기 때문에 본장에서 다룰 이런 ‘흐름’ 언어로서의 성격과 특성은 독자와의 적극적인 관계를 형성해 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