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중하고 귀한 도반(법우法友)들
우리들 곁에는
알아채는 사람과 무덤덤하게 살아가는 사람,
이 두 부류만으로 그렇게 흘러가는 듯 합니다.
사찰의 법회 때도 보면
그렇게 두 부류로 나누어지는 것을 자주 보게 됩니다.
바쁘다고,
여건이 안 된다고,
시도도 안 해 보고 포기도 하고,
법회에서 종종 보는 풍경입니다.
법회法會는 어렵다고 미쳐 돌아보지 않던
삶의 진실을 드러내는 세파에 휘둘리며 사는 일상은 아닙니다.
날마다 법문을 듣고 있다는 사실을
환희심 가득 안고 깨달을 수 있는 일이기에 그렇습니다.
혼자의 힘만으로 이런 기쁨을 맞이하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앞에 앉아 있는,
뒤에 버티고 있는,
그리고 옆에 받치고 있는 법우法友가 없다면
도저히 벌어지지 않을 사건이며 시간임을 아실 겁니다.
승은 늘 천 배 정도는 하라고 합니다.
천 배는 매일 권하고,
주말이나 휴일에는 삼천 배를 하라고 합니다.
천 배 기도를 하거나,
삼천 배 기도를 하거나 할 때 보면
동참同參하고 있는 법우法友야말로
절기도가 절 기도답게 해 주는 계기를 마련하는
아주 소중하고 귀중한 계기를 마련해 주는 귀중한 존재가 됩니다.
내게 부족한 의지를 부추겨 주는 법우法友는
정말 고맙고 귀한 도반이 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거리를 지나는 많은 사람들을 물끄러미 쳐다보면,
아줌마나 아가씨 혹은
아저씨나 할아버지를 볼 때 뒤섞인 무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관찰하는 입장에 따라서 조금씩 다르겠지만,
별 감정 없이 눈길을 던진다는 말이 맞을 겁니다.
승은 그렇게 지나가는 사람들을 종종 봅니다.
걸음걸이, 옷매무새, 신고 있는 신발,
걷는 모습만으로 봐도 잘 살 것이다, 못 살 것이다 보입니다.
복은 그냥 들어오는 것이 아닙니다.
음식을 먹는 모습에서,
걷는 모습에서,
입고 다니는 복장에서도, 말하는 언어의 톤 조절에서,
이런 모습은 금방알 수 있게 됩니다.
옛날 어른들 말씀을 보면
잠자는 모습도 잘 살지, 못 살지를 안다 하였습니다.
그것은 행동에서 쉽게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절에서 만나는 도반(법우法友)들은
부처님 말씀을 배우면서 행으로 실천하기에
모든 행위들은 조심해 질 수 밖에 없습니다.
행동이 조심해 지면 인격이 바뀌거든요.
도반(법우法友)들은
법회라는 거룩한 장엄莊嚴을 잘 연출하고 있습니다.
스스로 부처님생명으로 살기를 작성한
자랑스러운 모습으로 나타나 우리와 함께 곁에 있습니다.
그것이 참 불자요 ,참 도반(법우法友)입니다.
그렇게 인식을 하게 됨으로써
말미암아 도반(법우法友)은 부처님의 생명을 알게 됩니다.
이것은 얼마나 감사한일이고,
이것은 얼마나 환희심 일어나는 일인지 잘 아실 겁니다.
그래서 도반(법우法友)들은
어쩌다 만나서 반가운 사람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어두운 현실에 찌들어 있던
우리의 게으름을 돌아보게 하고 잊었던 자신을 깨우쳐 줍니다.
그래서 고마운 것이고,
그래서 기쁜 참사랑의 부처님 자식입니다.
지금 나의 곁에 다가온 도반(법우法友)이
자신의 진면목을 드러낼 때 까지 기다려줘야 하고
자칫 못난 선입견에 의해서,
그냥 아저씨 아줌마로만 대하다가는 헤어지고 말 수도 있습니다.
도반(법우法友)은 법우로 마주 할 여유는 반드시 필요합니다.
무작정 불자니까, 도반이니까 가 아니라
진심 담아 맞을 수 있는
도반(법우法友)이 되어 다가오게 기다려야 합니다.
그러다 보면
도반(법우法友)을 만나는 가운데
저절로 삶의 변화라는 향기가 우러나오게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저절로 젖어들면서
절에 잘 왔다는 살만한 가치를 실현해 가게 하는 것입니다.
자기에게 여유를 주려는 사람이
여유를 주는 다른 도반(법우法友)을 만나,
그 여유 속에 함께 녹아듭니다.
그렇게 인연 지은 도반들은
참 생명이 남아 무한히 성장해 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드리는 따끈따끈한 글입니다.
행복한 시간들로 가득 차시기 바랍니다.
2024년 01월 10일 오전 05;31분에
남지읍 무상사 토굴에서 운월야인雲月野人 진각珍覺 합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