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인 평양의 "평양방송국"에서 활동을 시작한 그는 방송뿐 아니라 작사, 작곡, 연극, 합창단, 지휘 등 다방면에서 유능한 재원이었다고 한다. 방송생활을 하던 중 방송국 사정이 좋지 않자 국립예술극장으로 옮겼지만 6.25 전쟁으로 전쟁을 맞았고 1.4 후퇴 때 피난으로 부산에 도달했다
7월 25일 국영방송국 3기관이 통합되었다. 라디오방송국인 서울중앙방송국, 1961년 6월 23일 독립, 승격되었던 해외 방송 담당의 서울국제방송국, 1961년 12월 31일 개국한 서울텔레비전방송국을 통합해 중앙방송국 체제로 단일화한 것이다. 이후 강찬선은 방송과장이 되었고, 스포츠중계나 대북방송 의논설 등을 맡았다.
[1971년]] 대통령 선거에서 공을 세운 실세인 김종필을 국무총리로 하는 내각이 들어서고, 총리와의 대화 프로가 생길 때 이 프로그램의 사회를 진행했다.
3월 3일 중앙방송국은 한국방송공사법을 근거로 한국방송공사(Korean Broadcasting System)로 개편되었다. 공영영 체제로 전환했지만, 자본금 전액이 정부의 출자이고 대통령이 사장을 임명하며 임원은 문공부 장관이 임명하는 체제여서 실제로는 여전히 정부에 예속된 형태였다. 공사가 발족되면서 쟁쟁한 인사들을 뒤로 하고 과장직급으로는 파격적으로 강찬선이 공사 창립이사가 되었고, 연수원에서 사원 연수를 맡았다
1977년에서 1986년까지 KBS 영어방송 프로듀서 겸 아나운서로 활동하였고 1986년에 KBS를 퇴사하여 프리랜서를 선언하였다. 이후 1988년에서 1991년까지 서울특별시 지하철공사의 영어 안내방송(한국어세종대학교 영어영문학과 조교수로 재직했고, 1990년 6월 16일 국회의장 섭외비서관, 1993년 5월 1일에서 1994년 1월 1일까지 국회의장 섭외담당 비서관, 1994년 1월 1일부터는 국회한국여성단체협의회외무고시를 합격하지 않았으나, 1998년 김대중 정부
UN 활동
코피 아난 (Kofi Annan)과 반기문 (Ban Ki-moon)에서 안토니우 구테흐스대한민국 대표부 공사 참사관, 2003년 UN여성지위위원회 CSW 의장 등을 지내다가 2005년 외교통상부안토니우 구테흐스
2000년 강경화의 딸은 미국 고등학교에서 대한민국의 이화여자고등학교로 전학하였다. 강경화는 이때 서울 중구 정동의 한 아파트에 위장전입(주민등록법위반)하였다.
2017년 5월 21일 강경화는 대통령비서실이 외교부 장관 후보자 지명 사실을 발표할 때 해당 아파트가 친척집이라고 해명했으나, 당시 정동 아파트는 사실상 이화여자고등학교의 관사로 밝혀졌다. 강경화는 2017년 6월 7일 위장전입 사실을 인정하였으나, 주민등록법위반 공소시효(5년)가 지나 형사처벌 받지는 않았다.
주민등록법 제37조 3의2항은 "주민등록 또는 주민등록증에 관하여 거짓의 사실을 신고 또는 신청한 사람"은 3년이하의 징역 또는 1천만원 이하의 벌금형으로 처벌하도록 규정하고 있으며, 30일 이상 거주할 목적없이 주소지를 등록하면 위장전입으로 해석된다.
자녀 미국 국적
강경화의 자녀는 2006년 한국 국적을 포기하고 미국 국적을 선택했다. 2017년 5월 외교부 장관 인사청문회에서 장녀의 미국 국적이 논란이 되자 강경화는 한국 국적 회복을 약속했다. 하지만 취임 뒤에도 국적 회복 신청을 하지 않아 비판을 받았다. 결국 강경화의 자녀는 2018년 7월 3일에 한국 국적을 회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