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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사도행전 제6강
생명의 말씀을 다 말하라
말씀/행5:17-6:7
요절/행5:20 “가서 성전에 서서 이 생명의 말씀을 다 백성에게 말하라 하매”
오늘 말씀을 보면 초대 예루살렘 교회에 고난이 밀물과 썰물처럼 반복됩니다. 공동체가 좀 은혜롭고 너무나 좋아 보일만 하면 일이 터지고 고난이 생기고 고난이 지나가는가보다 싶으면 또 다른 고난이 닥쳐옵니다. 사도들이 옥에 갇히고 죽임을 당할 위험에 처합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당면한 현실이나 우리네 인생사나 비슷합니다. 우리 인생도 크고 작은 고난의 연속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고난을 겪는 예루살렘 교회를 돕는 하나님을 통해 큰 위로와, 고난을 헤쳐 나갈 힘과 지혜를 얻게 됩니다. 또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 교회의 본질적인 사명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17절을 보십시오. 사도들의 인기는 날로 높아가고 사람들은 교회로 몰려듭니다. 사도들을 통해 예수님 믿는 사람들이 늘어만 가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병자들이 나음 받고 귀신들이 쫓겨가는 역사가 흥왕하게 일어납니다. 대제사장을 비롯한 종교 지도자들이 사도들에 대한 시기심으로 충만합니다. 왜 그럴까요? 자기들의 기득권을 사도들에게 빼앗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들의 명령 한 마디면 좌지우지되던 세상이었는데 이제는 백성들이 사도들을 많이 따릅니다. 그들은 시기심으로 사도들을 모조리 잡아다 옥에 가두었습니다. 교회의 리더들을 이참에 완전히 제거해 교회가 일어서지 못하도록 하려고 한 것 같습니다. 사도들이 모두 옥에 갇히면서 하나님의 말씀도 갇힐 위기 상황입니다. 과연 종교 지도자들의 뜻대로 될까요?
19절을 보십시오. “주의 사자가 밤에 옥문을 열고 끌어내어 이르되” 하나님이 천사를 보내셔서 옥문을 여셨습니다. 그리고 사도들을 내보냅니다. 와! 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당시 종교 지도자들은 무소불위의 권세를 가진 자들이었습니다.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감옥에도 잡아넣고 죽일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천사를 급파하시니까, 감옥도 아무런 힘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도들을 감옥이 붙들어 놓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 세상 권세 위에 하나님의 권세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연약하지 않습니다. 세상의 어떤 권세도 굴복시킬 수 있고, 택한 자들이 주의 사명을 완수하도록 늘 지켜 보호해 주시는 분입니다. 시편 121편 5-8절은 말씀합니다. “여호와는 너를 지키시는 이시라. 여호와께서 네 오른쪽에서 네 그늘이 되시나니 낮의 해가 너를 상하게 하지 아니하며 밤의 달도 너를 해치지 아니하리로다. 여호와께서 너를 지켜 모든 환난을 면하게 하시며 또 네 영혼을 지키시리로다. 여호와께서 너의 출입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지키시리로다.” 우리 하나님은 지금도 살아계셔서 택하신 자들을 눈동자와 같이 보호해 주십니다.
이런 하나님이 천사를 통해 무슨 메시지를 주십니까? 20절을 읽겠습니다. “가서 성전에 서서 이 생명의 말씀을 다 백성에게 말하라 하매” 주님은 지금은 핍박이 거세니 좀 납작 엎드리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핍박의 파도가 물러갈 때까지 기다리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이 말씀에는 세 개의 동사가 나옵니다. ‘가서’, ‘서서’, ‘말하라’입니다. 그들이 어디로 가야 합니까? 성전입니다. 한꺼번에 많은 사람에게 말씀을 전하기 위해서였을까요? 물론 그런 의미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전이 어떤 곳입니까? 구약에 보면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입니다. 제사장들이 그곳에서 제사를 주관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칩니다. 사람들은 그곳에서 하나님께 기도하며 죄 사함을 받습니다. 그런데 예수님 당시 성전은 강도의 소굴로 변해 참된 성전 기능이 끊어진 지 오랩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 옛 성전을 허물고 예수님이 친히 성전이 되게 하십니다. 예수님을 통해 주시는 말씀을 통해 생명을 얻게 하십니다. 에스겔서 47장을 보면 성전에서 흘러나오는 물이 마른 광야와 사해를 적시고 생명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 이사야서 2장 3절도 말씀합니다. “많은 백성이 가며 이르기를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오르며 야곱의 하나님의 전에 이르자. 그가 그의 길을 우리에게 가르치실 것이라. 우리가 그 길로 행하리라 하리니 이는 율법이 시온에서부터 나올 것이요 여호와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올 것임이니라.” 이 말씀이 성전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있는 사도들을 통해 성취되고 있습니다. 이제 성전에서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해 온 세상으로 퍼져나가게 됩니다. 오늘날은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가 성전의 역할을 하게 됩니다. 교회를 통해 죽은 영혼들이 생명을 얻게 되고 교회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이 온 세상으로 전파될 것입니다.
또 ‘서서’라는 동사를 보십시오. 어디에 ‘서라’는 말은 문제나 상황, 대상을 피하지 말고 직면하라는 의미입니다. 내가 감당해야 할 일이라면 이를 받아들이고 도전하는 자세를 가지라는 말입니다. 그들은 핍박을 피할 것이 아니라 성전으로 가서 굳게 서야 합니다. 성전은 그들을 핍박하는 세력들이 모인 곳입니다. 화약을 안고 불구덩이로 뛰어들라고 하는 것 같습니다. 무모해 보입니다. 그러나 거기서 ‘생명의 말씀을 다 말하라’ 하십니다. 쉽게 말해 복음으로 세상과 맞짱 뜨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렇게 할 수 있을까요? 사도들은 하나님이 말씀을 전하는 자들과 함께하신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주의 자녀들이 주의 사명을 완수하기까지 계속해서 지켜 보호해 주십니다. 간수들이 지키고 자물쇠로 잠겨 있는 옥문에서도 풀어주신 하나님이십니다. 세상의 권세자가 사람을 죽이는 것처럼 보이지만 우리의 생명은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생명의 말씀을 다 말하라.” 여기 보면 그냥 말씀이라고 하지 않고 생명의 말씀이라고 했습니다. 생명을 주는 말씀, 생명을 살리는 말씀입니다. 생명은 모든 것에 우선합니다. 소방차가 출동할 때 보면 다른 차량은 길을 비켜주어야 합니다. 소방차가 들어갈 길을 막고 서 있는 차량은 견인되기도 합니다. 생명을 구하는 일은 상황과 조건을 따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반드시 해야 할 일은 어떤 고난과 어려움도 이겨낼 수 있고 넘어설 수 있습니다.
또 살펴보면 ‘다 말하라’라고 했습니다. 대개 사람들은 자기가 듣기 좋은 말만 듣고 싶어 합니다. 시대가 힘드니까 위로의 메시지 중심으로 듣고 싶고 위로의 메시지를 많이 전하도록 요청받습니다. 복음 전파자도 듣는 사람들의 기호에 맞춰 축복의 메시지, 위로의 메시지, 듣기 좋은 메시지를 부담 없이 전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도들에게 듣기 좋은 말뿐만이 아니라 꼭 들어야 하는 생명의 말씀을 ‘다 전하라’고 하십니다. 축복과 위로와 사랑의 메시지도 좋지만, 회개, 고난, 십자가와 부활, 재림과 심판의 말씀도 ‘다 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도들이 어떻게 합니까? 21절을 보십시오. 사도들이 하나님의 명령에 즉각적으로 순종합니다. 옥에 갇혀 있었으니 삭신이 쑤시고 피곤하니까 푹 쉬고 다음 날 전한 것이 아니라 새벽 일찍 즉각적으로 성전에서 생명의 말씀을 선포했습니다. 한편 대제사장과 그와 함께 있던 사람들은 새벽부터 뭘 합니까? 공회와 이스라엘 원로들을 소집합니다. 사람을 감옥으로 보내 사도들을 데려오도록 합니다. 그런데 감옥에서 사도들을 보지 못합니다. 사도들이 어디에 있습니까? 성전에서 백성들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자 파워 센 성전 경비대장이 사도들을 체포해 옵니다. 그리고 공회 앞에 세웁니다. 대제사장이 심문합니다. 27,28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금지했는데 왜 예수의 이름으로 가르치냐는 것입니다. 또 예수와 사도들의 인기가 상승세이다 보니 예수를 죽인 책임을 우리 종교 지도자들에게 돌리려는 것 아니냐는 것입니다. 너무도 인간적이고 정치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생각뿐입니다.
그러나 사도들은 어떻게 대답합니까? 29절을 보십시오. 그들은 권세를 가진 자들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합니다. 분명한 자세로 예수님을 증거합니다. 종교 지도자들, 너희가 죽인 예수님을 하나님이 높이시고 부활시키셔서 우리의 주와 그리스도로 삼으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증인이고 성령께서도 이 예수님을 증언하고 계신다고 단호하고 담대하게 말합니다.
메시지는 내용도 중요하지만 전하는 사람이 어떻게 전하는가가 중요합니다. 독일의 유명한 신학자 폴 틸리히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오렌지 주스를 광고하는 배우가 찡그리며 억지로 마시는 모습을 시청자들에게 보여준다면 아무도 사 먹지 않을 것이다.” 그 맛을 경험했고 그 맛을 알려주고 싶어 진정성 있는 모습을 선보일 때 사람들은 감동하고 사 먹는다고 했습니다. 전도나 설교도 이와 마찬가지라고 했습니다. 어떤 고난에도 굴복하지 않는 사도들의 모습이 그들이 전하는 부활의 말씀에 힘을 실어줄 것입니다. 저를 비롯해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상황과 형편 속에서도 구원의 경험과 생명의 말씀의 맛을 알려주고 싶어 진정성 있게 말씀을 가르치고 전도할 때 영혼들을 살리는 메시지가 될 것입니다.
사도들이 생명의 말씀을 가지고 담대하게 맞짱을 뜨니까 위험과 핍박이 감소했습니까? 아닙니다. 대제사장과 사두개인 당파들은 듣고 더욱 크게 분노했고 이번엔 아예 죽여버리고자 했습니다. 33절에 ‘크게 노하여’라는 단어의 원어 의미는 ‘분노로 인해 마음이 천 갈래 만 갈래로 찢어졌다’는 말입니다. 그들의 눈에서는 미움과 분노와 살기의 레이저 광선이 쏟아져나왔습니다. 하나님께 순종했는데 투옥되었을 때보다 위험은 더 커졌습니다.
그런데 앞에서 본 것처럼 사도들의 고난에 하나님이 함께하십니다. 그 자리에 가말리엘이라 이름하는 바리새인 율법교사가 있었습니다. 그는 백성에게 존경받는 사람이었고 사도바울의 스승으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가말리엘이 두 가지 예를 언급하는데 이것은 요세푸스의 기록에도 나와 있습니다. 드다가 많은 사람을 꾀어 자기를 따르도록 했는데 결국 잡혀 참수당했습니다. 갈릴리 사람인 유다는 열심당원의 선구자였는데 동족들에게 로마에 세금 내지 말 것을 주장하면서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하지만 로마군에 진압되자 그를 따르던 사람들도 모조리 흩어지고 말았습니다. 38,39절을 보십시오. “이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사람들을 상관하지 말고 버려두라. 이 사상과 이 소행이 사람으로부터 났으면 무너질 것이요, 만일 하나님께로부터 났으면 너희가 그들을 무너뜨릴 수 없겠고 도리어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까 하노라.” 사람의 일은 스스로 무너집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일은 사람이 막을 수 없습니다. 막으려고 하면 하나님의 대적자가 됩니다. 산헤드린 공회원들은 이 같은 가말리엘의 말을 받아들입니다. 사도들을 채찍질하고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을 금지하고는 풀어줍니다. 주님은 가말리엘이라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사람을 통해 그들을 구해주셨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사도들은 어떠합니까? 41절을 보십시오.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 그들은 반응은 기쁨입니다. 채찍에 맞아 피 흘리고 살점이 뜯기고도 기뻐합니다. 왜일까요? 예수님 때문입니다. 그들은 예수님 때문에 겪게 되는 핍박과 고통과 능욕을 오히려 기뻐했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베드로전서 4장 13절에서 성도들에게 권면합니다.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사도들의 육체는 채찍질로 인해 큰 고통을 느꼈지만 마음은 성령이 주시는 기쁨으로 가득 찼습니다. “우리가 무엇이관대 예수님의 남은 고난에 참여하게 하십니까?” 사도들은 십자가에서 고난받으신 예수님을 생각하면서 기쁨으로 주어진 고난을 감당했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만 소망을 두고 산다면 최대한 고난 받지 않고 편안하게 살면서 온갖 즐거움을 누리고자 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소망은 이 땅에 있지 않고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예수님 때문에 고난받는 제자들에게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크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늘의 상을 소망할 때 이 땅에 사는 날 동안 주와 복음 역사를 위해 헌신할 수 있고 희생할 수 있고 고난 가운데서도 기뻐할 수 있습니다.
42절을 보십시오. 사도들은 집에 있든지 성전에 있든지 어디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하는 생명의 말씀을 가르치고 전하기에 힘썼습니다.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하는 생명의 말씀, 이것은 사도들이 목숨 걸고 증거한 메시지의 핵심이요, 그 후 수많은 믿음의 선진들이 전파했던 복음의 핵심입니다. ‘예수는 그리스도’라는 메시지는 지난 2,000여 년 동안 세상을 향해 날마다 울려 퍼진 생명의 말씀입니다. 이것만이 우리 인간들을 구원하고 참 생명을 줍니다. 이것만이 진주에 있는 캠퍼스 영혼들을 살리고 민족과 세계를 살립니다. 우리가 속한 공동체에서 적극적으로 ‘예수는 그리스도’라는 생명의 말씀을 확신있게 담대하게 전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6장 1절을 보십시오. 교회에 성도들의 수가 많아졌습니다. 성도들이 많아지자 문제가 생겨납니다. 헬라파 유대인 성도들이 구제 문제로 히브리파 성도들을 원망합니다. 의사소통이 잘 안되었는지 헬라파 과부 성도들에게 매일 공급되어야 할 식사 구제가 누락됩니다. 과부들은 세상에서도 괄시받기 쉬운데 교회에서까지 푸대접을 받는 것 같아 서운한 마음이 들었을 것입니다. 서운한 마음은 원망으로 발전합니다. 이 일은 자칫 지역감정, 민족적 대립을 유발할 수 있었습니다. 한마음과 한뜻으로 진행되던 교회 내에 파벌이 형성되고 공동체의 그릇이 깨질 수 있었습니다.
사도들이 어떻게 합니까? 2절을 보십시오. “열두 사도가 모든 제자를 불러 이르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 접대를 일삼는 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생명의 말씀을 다 말하라.” 그들은 자신들이 받은 사명에 충성하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믿음과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일곱 명의 사역자들을 세워 구제와 재정을 맡깁니다. 자기들은 기도와 말씀을 가르치는 일과 전도사역에 힘쓰겠다고 방향을 잡습니다. 사도들이 아무리 성령 충만해도 모든 일을 다 신경 쓰며 감당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 중에도 재정과 섬김을 담당하는 분이 있습니다. 예배 환경을 위해 매주 청소를 담당하는 분이 있습니다. 매주 예배를 위해 사회와 기도와 특송과 찬양과 영상과 PPT와 식사 등을 섬기는 분들이 있습니다. 맡은 직분과 맡은 봉사와 섬김 부분에서 한 사람 한 사람의 수고와 헌신과 희생이 있기에 교회가 원만하게 돌아갑니다. 이런 섬김과 봉사를 담당하는 분들이 있기에 양들이 교회에 와서 예배드리고 말씀을 받고 쉼을 누리며 생명을 얻게 됩니다.
사도들은 기도와 말씀 사역에 전무하고 세움 받은 일곱 사역자들은 그들이 맡은 사역을 잘 감당하는 분담이 잘 이루어져 섬길 때 교회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7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강력하게 퍼져나갔습니다. 사도들이 기도와 말씀 가르치는 일과 전도 사역에 힘썼을 때 말씀이 점점 왕성해졌습니다. 먼저는 사도들 안에 그리고 성도들 안에 왕성해졌습니다. 성도들 마음속에는 늘 말씀이 역동적으로 살아 있었습니다. 그러자 그 말씀의 생명력이 교회를 넘어 성도들의 가정, 교회, 직장, 학교, 그 외에도 여러 모임 가운데 퍼져나갔습니다. 심지어는 복음을 대적하고 사도들을 핍박했던 제사장의 허다한 무리도 예수님을 믿게 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말씀의 생명력이 왕성할 때 성도들이 살아 있게 됩니다. 말씀의 생명력이 왕성할 때 교회가 세상에 대해 영향력을 가질 수 있습니다. 말씀의 생명력이 왕성해지니 제자의 수가 많아졌다고 했습니다. 생명 구원역사에는 다른 왕도는 없습니다. 우리가 기도와 말씀을 가르치는 일과 전도사역을 감당하면서 모든 섬김과 봉사와 직분에서 서로 협력해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의 기쁨의 원천이 무엇입니까? 사도들은 핍박 중에도 예수님 때문에 기뻐합니다. 날마다 성전에서 집에서 어디에 있든지 간에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생명의 말씀 가르치기를 쉬지 않습니다. 교회에 문제가 있을 때 사람들을 세워 역할 분담을 통해 모든 섬김과 봉사와 직분에서 협력합니다. 무엇보다 기도와 말씀을 가르치고 전도하는 사역에 집중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은 흥왕한 생명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 가십니다.
여러분! 교회의 본질은 무엇일까요? 교회는 기도와 말씀 사역으로 생명을 살리는 곳이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서로 협력해야 합니다. 주님이 이 시간 말씀하십니다. “가서 서서 생명의 말씀을 다 말하라.” 주님이 우리 생활 속에 늘 함께하시며 도우시고 보호해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속한 공동체인 가정, 교회, 직장, 학교, 그 외 모임들을 우리의 사역지로 생각하고 생명의 말씀을 담대하게 전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