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8장1-12 무죄의식, 유죄의식, 죄무의식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요 8:7)
본문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부류별로 나눈다면 셋입니다.
하나는 무죄의식을 가지고 있는 [서기관들의 바리새인] 그룹이고,
또 하나는 현행범으로 잡혀온 유죄의식을 가지고 있는 [여인] 개인,
그리고 세 번째는 죄의식을 갖지 않으신 분으로 곧「죄 무의식」하시는 예수님입니다.
먼저 본문에 등장하는 인물들 중에 죄인이 누구냐 하는 문제부터 생각해 보면, 일반적인 판단이 여자는 말할 것도 없고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왜? 서기관, 바리새인들이 죄인이냐고 물으면, 그거야 외식하고, 착취하고, 예수님 미워하고, 고소하고, 죽이려 하는…그들의 행동을 볼때 그렇다 라고 생각해서 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죄인이 아닌가요? 정말 그가 죄가 없다면 왜 십자가에 강도와 함께 죽으셔야 했죠?
예수님이「죄가 없다」는 관점은「우리」가 보는 호의적 관점때운이 아닐까요?
당시 서기관이나 바리새인들은 그렇게 보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이는 기독교가 이단들을 보듯 말입니다.)
그들의 관점에서 보는 예수님은 얼마나 지독한 이단자요, 무법자요, (계명을 범하는) 파괴자인지 모릅니다.
그러니까 「외형적」이란 보는 관점에 따라서는 내가 죄인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으며 상대방 역시 죄인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누가 죄인이냐? 한마디로 말하면「죄의식을 [가지고] 있는 개인」입니다. 왜 죄의식이 있느냐?
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죄에 대한 의식이 있게 마련인 것입니다.
부자가 왜 부자인가요? 돈이나 재물을 [가지고] 있고, [가지고 있다는 의식]이 있기 때문에 그 재물과 그 의식이 그를 부자 행세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부자인 것입니다.
죄인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는 죄인인 것입니다.
사람은 의식하는 동물입니다. 의식은 또한 행동을 하게하고 그가 어떤 행동을 하느냐가 바로 사람 됨됨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죄인은 죄의식을 하고 죄행을 합니다. 그러므로 그는 죄인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서기관, 바리새인이나 여인은 죄의식을 가지고 있는 죄인들입니다. 다만 이들은 죄의식은 있지만 행동을 하고 안하고 로 「나는 죄가 없다」라고 의식을 하고 있는 것이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두 부류 사이의 공통점은 모두가 죄를 의식하고 있다는 것이요, 다른 점은 행동을 하고 안하고 로 나는 '죄가 없다'와 '있다'는 것이 다를 뿐입니다.
그런 죄 없다 라고 생각하는 자들에게 본문에서 예수님의 말 한마디 "죄 없는 자가…"는 그들도 죄인이라는 사실을 일깨워 준, 즉「없다」를「있다」로 바꿔준 말씀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 말씀에서 하나님 입장에서 죄인의 기준을 발견하고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이 인상적인 면은「예수님의 침묵」입니다. 주님의 이 침묵하심을 우리가 어떻게 볼 것이냐? 하는 점입니다. 그것은 한 마디로「그것은 너희들에게나 문제꺼리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여자는 서기관, 바리새인들을 향해 너희들도 숨어서 나처럼 사는 놈들 아냐? 하며 그들에게 돌을 던질 것이고, 서기관 바리새인들은 여자를 향해서 최루탄을 쏘아대는 양상 밖에는 일어날 것이 없는데, 왜 내가 그 틈바구니에 끼어 드느냐? 인 것입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최상의 처신이 무엇이겠습니까? 침묵하면서 손가락으로 글이나 쓰는 수밖에.....
침묵이 계속되자 의기가 양양한 서기관, 바리새인들은 다그쳐 묻습니다. 너는 어느 편이냐? 라고요.
한마디로 말하면 돌을 두 번 던지는 수고를 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한 번에 속전속결로 처리해 버리자는 심산입니다.
이때 원자폭탄 적 말씀 한마디….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던져 놓으시고는 다시 침묵… , 글….
왜 인간들은 다른 사람에 죄에 대해 관심도 많고 자세도 적극적인지....
왜 눈만 뜨면 돈, 돈, 돈, 아니면 죄, 죄, 죄하는 것일까요? 얼마나 그래야 하고 언제까지 그래야만 하는 것인가요?
유죄의식의 여자와 무죄 의식의 종교로 사는 서기관, 바리새인 중에 누가 더 지독한 죄인이죠? 그거야 물론 간교한 서기관, 바리새인들이라 하시겠지만...
사실은 그들의 간교함보다는 그들이 가지고 있는「죄를 죄로 드러내려는 심뽀」가 죄인의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들의 삶이요, 재미요, 보람이요, 심지어는 종교적 사명(?)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리고 저들은 자기들이 그렇게 함으로써 사회가 정화되고, 교회가 거룩해지며, 하나님이 기뻐하시리라고 믿는 믿음이기도 한 것입니다.
이에 반해 본문의 여인은 그래도 저들보다는 그런 면에서는 순수하다고 말 할 수 있는데, 그것은 그녀는 본능으로 그런 짓을 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여인은 그러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그런 본능적 여인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아니면 그렇게 사는 삶이 그가 먹고살 수 있는 것이어서 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여인이 가지고 있는「본능적 행동과 양심」은 어떻게 봐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왜 짐승은 본능적 행위를 하고도 아무렇지 않은데 유독 인간만은 본능적 행위 때문에 돌 세례를 받아가며 죽어가야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도 하나님의 계명 때문이라는 이유로…. 말입니다.
기독교의 세례는 죄를 씻어 주는 의식인가요, 아니면 죄의식을 씻어주어야 할 의식인가요?
이 여인이 죄의식을 갖지 않고 본능적 행위로 그랬다면 잡혀서 여기까지 끌려 나올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그건 여인 자신의 문제지 남이 관여할 문제가 아닌 것입니다. 이것은 엄연한 인권침해입니다.
만약 이 여인이 진정 죄를 지었다면 주님께서도 유죄판결을 내리셨어야했습니다. 소위 「하나님의 사랑」이 죄를 눈감아 주는 그런 사랑이 아니라면 말입니다.
그런데 왜 "나도 너를 정죄「하노니」로 안 나오시고「하지 아니하노니…」"로 집행유예 석방을 하셨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죄로 정죄할 성격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사람들은 어느 누구도 이 여인을 정죄할 자가 없지만(본문 10절) 주님만은 정죄하실 수 있는 분인데, 왜 석방하셨습니까? 물론 그렇다고 이 석방이 분명 무죄 석방은 아닙니다.
「내가 너를 정죄하지 않」는 것이지, 「너는 죄가 없다」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시면서 다음 말씀에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고 하시는 그 말씀은 어떤 의미의「간접적 유죄 선고」이시기도 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이 보시는「죄의 정의」는 무엇인가요?
「비도덕적 반 율법적인 본능적 행위」인가요? 아니면 죄의식인가요? 아니면 다른 어떤 것인가요?
앞에서 예수님은「죄 무의식」하시는 분이라고 밝혔습니다.
사람은 생각의 차원이 있습니다. 창녀는「나는 창녀다」라는 차원의 생각을 항상 갖고 있습니다.
그 생각 그 차원이 그를 창녀 생활을 담대히(?) 할 수 있게 합니다.
목사는「나는 목사다」하는 차원의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그 차원의 생각이 그를 겸손하게 하려하고 경건하게 하려하며 진실 되게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창녀라 해서 겸손, 경건, 진실이 없는 것이나 모르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그들의 생각이 차원이 그것을 기대하거나 시도해 보지 않을 뿐인 것입니다.
또 목사라 해서 여인처럼 본능적 행동을 하지 않는다거나 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역시 목사․차원의 생각이 그것을 절제하게 할 뿐인 것입니다.
창녀나 목사는 다 인간이고 그러기 때문에 창녀가 가지고 있는 본능을 목사도 가지고 있고, 목사가 가지고 있는 고귀성을 창녀도 가지고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다만 그들의 신분이 어떤 것은 절제하거나 포기하고 어떤 것은 하고 있거나 담대한 행동을 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현상이 바로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여인과 서기관, 바리새인들에게도 작용한 것뿐입니다.
다만 그 짓을 하지 않는 서기관, 바리새인들이 그 짓을 하는 여인을 정 죄 시 한 것뿐입니다.
두 부류의 다른 점이란 행동으로 했다. 안 했다. 일 뿐이지 그 차원과 생각은 같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의식은 다 갖고 있는데 그 죄의식이 무죄의식이냐, 유죄의식이냐 의 차이 뿐인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죄 없는 자가…" 하신 말씀으로 무죄의식으로 정죄하고 있는 그들을 유죄의식으로 바꾸어 놓자, 아무래도 죄 행적이 많은 장로들(원문은 πρεσβυτερων-프레스부테론)로부터 시작하여 죄 행적이 적은(?) 젊은이들까지 모두 다 가고 정죄한 자가 하나도 없는(원문은 ουδεις-우데이스)상태가 된 것입니다.
결국 서기관 바리새인들이 갖고 있던 무죄의식은「자기 환각」이었다는 결론입니다.
그 환각제 효과를 예수님의 말씀 한 마디가 싹 가시게 했고 다시 제 정신으로 돌아오자 여인이나 예수님의 고소(본문 6절)문제가 문제가 아닐 뿐 아니라, 여인이 인권침해로 고소할까 무서워서가 아니라 자기 양심이 자기를 고소하는 것이 괴로워(본문 9절) 떠나갈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말씀을 대하면서 우리는 교회 교인으로서 지금까지 어떤 의식을 가지고 살고 있었는지요?
누가복음 16장에 나오는 부자와 나사로 이야기는 서로 다른 의식으로 살고 있던 사람의 이야기로 너와 내가 건널 수 없는「구렁」이라는 단어를 통해「차원의 장벽」이 어떤 것인가를 잘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그 사건에서 부자가 아브라함에게 간절히 구하는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나사로 손가락 끝의 물 한 방울.......? 이 아닙니까?
그 물을 주고받을 수 없는 상태가 차원입니다.
주님은 요한복음 4장에서 수가성 여인에게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 4:3-14)
지금 본문에서 여인과 대화하는 주님이 목마르게 하지 못하도록 솟아 나오는 뱃 속에 있는(요 7:38), 그러면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인 것입니다.
부자에게는 세상에 있는 것들은 가지고 있어서 부자로 살았으나 영혼의 세계에 영원히 살아야 하는 그 세계에서 살 수 있게 하는 이런 샘물이 없었을 뿐 아니라 이런 샘물이 있는지도 몰랐던 것입니다.
문제는 그가 살 때 그「차원」으로 살았다는 것입니다.
「마시면 다시 목마른 물」과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배속에서 솟아나는 샘물」!
그것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영생의 사람이요 죄 무의식으로 사는 사람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어떤 차원이었는가요? 오늘 본문의 모든 해답은 12절에 있습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주님의 그 말씀 한마디는 빛의 차원에 계셨음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어두움」과는 다른 차원이란 말입니다.
육법전서나 뒤적이면서 유죄냐? 무죄냐? 돌로 칠 것이냐, 교수형, 십자가 감이냐를 논하는 그런 차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주님으로부터 깨달아야 하는 것이 어떤 것입니까?
죄인으로 죄의식을 가지고 사는 것이 잘 못 된 것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을 들은 우리 모두 주님의 차원의 사람으로 바꿔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길은 주님의 말씀을 통해서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오늘 주님은 이 말씀을 통하여 우리 모두 자신이 주는 생수로 목마름 없이 사는 사람으로 만들어 가시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죄의식으로 여전히 죄 가운데 사셨다면 오늘 주님의 말씀으로 무죄 의식의 차원으로 사는 영생의 사람이 될 수 있기를...